닥터 시니에
“식사…… 요?”
시니에가 병원에서는 늘 끼고 있는 엄청나게 큰 땡그란 안경. 그 안경 속에 있는 옅은 파란색이면서 갈색이 조금은 섞여 있는 듯한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것처럼 흔들렸다.
명백하게 이상한 타이밍과, 당황하는 것 같은 행동과, 불안한 시선. 지혁의 본능이 말했다. 이건 데이트 신청이라고.
“내일. 맞죠?”
“네, 내일. 아침에 MRI 찍고, 오전에 다른 검사들 하고, 기다리다가, 아, 그러니까 제 말은 문은 집에 가서 쉬시고, 그 다음에…….”
“……닥터 시니에? 왜 이렇게 횡설수설이에요. 하하, 알았어요. 내일 저녁에 봐요.”
순간 지혁의 머릿속에 그간 오며 가며 시니에를 만났던 날들이 휘휘 스쳐 갔다. 그리고 시니에의 이미지가 자꾸만 동물과 비슷한 모습으로 저장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작은 강아지라던가, 뭔가 도토리를 숨기려고 하던 다람쥐라던가.
뭐라고 정의하긴 어려웠지만, 분명한 건. 그건 호감이었다.
***
“어, 문, 움직이시면 안 돼요.”
“미안합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끝나요. 가만히 계세요.”
MRI 기계 속에 들어가 몇 분 동안이나 꼼짝 않고 있어야 하는 시간은 언제나 지루하다. 아주 살짝 꿈틀댄 것뿐인데 기계를 지켜보던 조단이 근엄하게 한마디를 던진다. 지혁의 머릿속이 모처럼 아주 복잡했다.
물론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 건 어깨와 팔꿈치의 상태였다. 한 달 동안 푹 쉬기는 했지만, 한 개도 공을 던지지 못했었고 거기서 나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 전생에서부터 쭉 그래 왔다. 많이 던지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만이 지혁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 방법을 강제로 박탈당한 상태에서 오는 조바심은 아무리 밀어 내려 애써도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쉬는 기간 동안 너클 포크에 대한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공을 던져 왔던 것도 물론이다.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이다. 이제 막 감각을 익힌 공을 잃지 않기 위해서. 더구나 던지기 어려운 공이다 보니, 조금이라도 공의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재생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지난 한 달간 지혁이 강제 휴식을 취하며 머릿속으로 떠올린 것들 전부였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지혁이 없이도 월드시리즈에 2년 연속 진출했던 강팀이었고, 팀의 성적은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다.
물론 5월 들어 4월의 압도적인 페이스가 조금 주춤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지구 1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아, 하나 더 있다. 후지. 린스컴의 모든 재능을 이어받았던 후지는 마치 린스컴처럼, 그 폭발적이고 역동적인 폼을 이겨 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신은 후지에게 린스컴의 재능을 주었지, 금강불괴의 몸까지 같이 준 것은 아니었으니까.
후지에게서 데드암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걱정스러워 하며 보스턴에 눌러앉아 있는 패트릭은 지혁이 부상을 당했는데도 클리블랜드에 찾아오지 못했다. 대체 어느 정도길래. 지혁은 씁쓸하게 경쟁자이면서 또 유일한 동반자이기도 한 후지의 상태를 걱정했다.
“자, 끝났습니다. 제가 들어가서 묶여 있는 것 풀어드릴 거니까, 잠시만 그대로 계세요.”
곧 문이 열리고는 조단이 들어와 지혁의 몸 이곳저곳에 붙어 있는 장치들을 떼어 냈다.
“결과는 일주일 뒤에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물리치료는 계속되니까 어차피 매일 병원에 오실 거죠?”
“네, 저야 뭐.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입장이니까요.”
“좋아요. 고생 많았습니다, 문.”
“이제 가 봐도 되나요?”
MRI 기계 바깥으로 몸을 일으킨 지혁은 기지개를 한 번 쭉 피며 물었다. 조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닥터 시니에가 따로 보고 가야 한다고 하셨나요?”
“아뇨, 그런 건 없었는데.”
“그럼 그냥 집에 가시면 됩니다.”
시니에와의 약속은 저녁에 있으니까. 게다가 오늘은 시니에가 아주 바쁜 날인 것 같았다. 얼굴을 보기는커녕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아, 그리고. 문.”
막 검사실을 나서려던 지혁의 뒤에 대고 조단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네?”
“생일. 축하한다고요.”
“아, 네, 감사합니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게 참 어리석은 의문이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곳은 클리블랜드 선수들을 담당하는 병원이고, 모든 프로필이 그들에게 있으니까.
오늘은 2018년 5월 22일. 회귀한 이후 지혁이 네 번째로 맞는 생일이었다.
***
클리블랜드의 하늘이 발갛게 물들어 갈 무렵. 병원 앞 작은 골목에 있는 약간은 허름하지만 또 근사한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에서, 지혁과 시니에는 마주 앉았다.
“안경 벗었네요.”
“그, 네. 안경은 일할 때만 쓰거든요. 모니터를 계속 바라보면 눈이 아파서요.”
사실 안경을 쓴 모습이든 쓰지 않은 모습이든 크게 새로울 건 없었다.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커다란 안경을 쓴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개인적인 자리에서 안경을 벗은 모습을 봤지만. 그럼에도 시니에는 여전히 작은 강아지 같았다.
“문, 이렇게 우리 레스토랑에 모셔서 영광입니다. 다친 데는 괜찮은 거죠?”
“감사합니다. 물론이에요. 그냥 쉬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곧 마운드로 돌아갈 겁니다.”
“당신의 복귀전이 알려지면 곧장 티켓을 살 겁니다. 꼭 다시 들러서 알려 주세요. 하하, 그리고 이건 서비스로 드리는 겁니다.”
쉐프로 보이는 사람이 직접 서빙을 해 온 스테이크는 정말 엄청나게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바삭하게 구워진 겉면에서 윤기가 흘러내린다. 쉐프는 뭔가 특별해 보이는 훈제 연어 샐러드와 수프를 내려놓으면서 덧붙였다.
“부디 좋은 저녁 보내시길. 그리고…….”
쉐프는 시니에를 돌아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멋진 데이트하시길. 나가실 때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시면 더없이 감사드리겠고요. 하하.”
멋진 데이트라. 지혁과 시니에는 어색하게 웃었다.
“……멋진 데이트를 하라네요. 하하.”
“먹어요! 얼른 먹어요, 우리.”
시니에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지만. 두 사람은 곧 멋진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쉐프가 직접 서빙을 해 올 정도였던 스테이크와 연어 샐러드는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재미있는 대화와 함께 한다는 건 경기에 나가서 이기는 것만큼이나 행복한 일이었다.
대화의 공통점은 차고 넘쳤다. 물론 야구 쪽에 꽤 치우쳤지만. 주로 클리블랜드의 팀 동료들의 이야기였다. 모든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시니에의 진료를 받아야만 하니까. 시니에는 지혁만큼이나 클리블랜드의 선수들을 잘 알고 있었다.
“클루버는 표정이 아예 안 변해요. 신기할 정도로. 심지어는 부상을 당했다고 얘기를 해 줬는데도 인상 한 번 쓰지 않더라니까요? 가끔 보면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클루-봇(주 ; Klubot. 클루버의 별명. 클루버+로봇의 합성어). 하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던데요.”
“진짜 그 이상으로 잘 어울리는 별명이 없다니까요. 표정을 세 개도 못 본 것 같아요. 내가 클리블랜드 담당이 된 게 벌써 4년 전인데.”
“비밀 하나 알려 줄까요? 멘데스가 툭하면 이걸로 클루버를 놀리는데.”
“뭔데요?”
시니에는 눈동자를 초롱거리며 잔뜩 기대감을 표시했다.
“멘데스 집에서 파티를 한 적이 있었는데, 클루버가 와이프하고 같이 왔나 봐요. 멘데스가 클루버 와이프의 핸드폰에 있는 사진첩을 봤다는데…….”
“그랬다는데?”
“클루버와 같이 찍은 사진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 친구 표정이 짐 캐리 저리가라였다네요. 그래서 멘데스는 조금이라도 클루버를 놀리고 싶은 날에는 항상 짐-코리-캐리! 하고 소리를 치고 다녀요. 린도어를 옆에 끼고서. 알죠? 멘데스랑 린도어랑 같이 그러고 다니면 아무도 못 말리는 거.”
“아하하하. 짐 캐리? 말도 안 돼요, 정말로. 말도 안 돼.”
지혁이 모르는 동료들의 이야기들, 시니에가 모르는 클리블랜드 선수들의 시시콜콜한 비밀들은 두 사람의 식사 시간을 가득 채웠다. 엄청난 조미료였다. 웃음이 떠날 새가 없었으니까.
***
맛있는 식사. 근사한 음악. 은은한 조명. 데이트의 결과가 좋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달빛, 어스름한 골목, 적당히 시원한 밤바람. 다음의 만남을 약속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런 조건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필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진짜로 꼭 필요한 건, 저 모든 요소들을 함께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다.
잘 맞고, 잘 통하고, 대화 속에 웃음이 끊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어야 처음의 데이트가 다음의 약속으로 이어지고, 자주 보다 보면 미래를 약속하게 되고. 그런 것 아니겠는가?
시니에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귀여웠고. 먼저 데이트를 신청할 정도로 용기도 있는 사람이었고, 또 자주 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다 왔어요. 여기서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우리 집이에요.”
“예쁜 골목이네요. 어느 집이에요?”
“짙은 갈색 현관문이요. 저거.”
시니에는 몸을 돌려 지혁을 살짝 올려다봤다.
“검진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병원에 꼭 들러서 물리치료는 계속 받도록 해요.”
“당연하죠.”
“그리고 팀에 복귀해도, 홈경기를 하는 날에는 시간을 내서라도 병원에 자주 와요. 팔꿈치랑 어깨는 아주 세심하게 관리해야 하니까.”
“……꼭 그것 때문에?”
시니에는 생글거렸다.
“네. 야구 선수에게 팔꿈치와 어깨는 생명이죠.”
“흠…… 그렇다면 좀 어렵겠네요. 시즌 중에는 루틴이 무엇보다 중요해서. 병원에 갈 시간이 많이 없겠네.”
“내가 구단으로 찾아가도 되는데. 난 담당 닥터라서 프리패스거든요.”
“그것도 좀.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요.”
“의사랑 선수랑 만나는 게 왜요? 왜에요?”
지혁은 졌다는 듯이 살짝 웃었다.
“다음에도 이렇게 따로 만나야겠네요.”
“바로 그거예요. 그 말 듣기 참 어려웠네.”
시니에가 지혁의 허리춤에 팔을 둘렀다.
“들어갈게요. 내일 봐요.”
“……그래요.”
“생일 축하해요. 문.”
시니에가 살짝 뒤꿈치를 들었다. 시니에의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이 지혁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입술과 입술이 살짝 닿는 순간 알았다. 모든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아름다운 생일이었다.
***
“으음…… 으음.”
시니에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졌다. 덩달아 지혁의 얼굴에도 그늘이 졌다.
“안 좋아?”
휘유. 시니에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모니터를 돌려 지혁에게도 보여 주었다.
“팔꿈치 인대는 완전히 붓기가 가라앉았고, 염증이 생기려고 하던 부위도 잠잠해졌고…… 혹시 모르니까 소염제를 하루 이틀 정도만 더 먹으면 될 것 같고.”
“뭐야, 괜찮네? 어깨는?”
“어깨도…… 자, 여기. 왼쪽이 한 달 전 사진이고, 오른쪽이 이번에 찍은 사진. 무리가 가 있던 근육들이 제자리로 돌아갔고 많이 잠잠해졌어. 휴식의 효과가 있네. 회복력도 아주 좋고. 이제는 투구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아.”
“좋아. 복귀해도 된다는 소리지? 그런데 왜 한숨을 쉬고 그랬어?”
시니에가 커다랗고 땡그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제 매일 못 보잖아.”
하하하. 지혁은 유쾌하게 웃으며 시니에의 앞머리를 쓸어내렸다.
“퇴근하고 보면 되지.”
복귀다. 야구선수 문지혁의 몸에 모처럼 커다란 휴식을 준 아주 보람찬 한 달이었다. 좀이 쑤시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아, 그리고. 지혁의 마음에도 커다란 행복을 채워다 준 아주 아주 훌륭한 한 달이었다. 5월은. 지혁은 한 손으로 시니에의 손을 꼭 잡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패트릭에게 문자를 보냈다.
[복귀합니다. 마운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