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진보는 공백과 실수에서 온다.
“웰컴 백! Mi amigo!”
DL에서 복귀한 날. 가장 먼저 지혁을 반겨 준 건 언제나처럼 멘데스였다. 멘데스를 한 달 정도 너클 포크로 괴롭히는 일이 없었더니, 다시 아미고 타령을 시작했다.
“예아- 드디어 돌아왔군!”
“푹 쉬었어? 어깨는 괜찮고?”
동료들도 지혁의 어깨와 등을 툭툭 쳐 주며 친근함을 표시해 줬다. 지혁이 DL에 가 있는 동안 임시 선발을 맡던 마이크 클레빈저만이 약간은 서운한 감정을 담았다. 그는 이제부터 다시 불펜의 롱릴리프로 보직을 바꿔야 하니까. 보다 뛰어난 투수가 돌아오면 다시 물러나야 하는 처지다.
클레빈저도 한 달 동안 네 번 등판해 2승 1패, 평균자책점 2.89의 훌륭한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4월 한 달 지혁이 기록한 성적은 4승 무패다.
“오랜만에 돌아오니까 어때?”
“어떻긴. 그냥 한 달 쉰 것뿐인데.”
“그래? 이곳을 좀 그리워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리워하기야 엄청 그리워했지. 멘데스, 오늘 불펜 투구 때 너클 포크 던질 거야.”
“뭐라고? 미친, 또 시작이야?”
멘데스의 반응도 예상했던 그대로다. 병원으로만 출퇴근 하던 시간들은 운동선수에게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시간들이었다. 무료하고, 지루했었다. 시니에를 만날 때만 빼고. 프랑코나 감독이 슬쩍 다가왔다.
“닥터 시니에가 구단에 보내 준 자네의 재활 경과는 잘 봤어. 굉장히 흥미롭더군.”
“하, 하하, 뭐라던가요?”
프랑코나 감독은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팔꿈치와 어깨는 한 달 이전의 상태와 비교해 굉장히 좋아졌고. 우리 팀 입단 테스트 당시의 상태보다도 더 좋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하더군. 한 달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휴식만, 정말 잘 취했다는 뜻이라고 했지.”
“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바른 말만 쓰여 있네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군. 훌륭한 의지였다고 칭찬하고 싶네.”
“그…… 공을 던지고 싶은 유혹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무슨 다른 유혹이라도 있었나?”
“아뇨, 아니죠. 아닙니다. 무슨 유혹이 있겠어요.”
아, 실감난다. 프랑코나의 이 의뭉스러운 화법을 듣고 있자니 정말로 클리블랜드의 라커룸에 돌아왔구나 싶다.
“불펜 피칭은 언제부터 하면 됩니까?”
“닥터 시니에의 말로는, 자네의 팔과 어깨를 아주 세심하게 관리해 달라고 하던데.”
“예?”
“추가적으로 코멘트를 덧붙였더군. 혹시라도 자네가 무리를 할 것 같으면 즉시 조절해 달라고 말이야.”
“하하……”
“그래도 뭐, 자네는 자기 관리가 괜찮은 선수니까. 멘데스를 데리고 가게. 라커룸이 너무 시끄러운 판이었어.”
“감사합니다.”
프랑코나의 공식적인 확인을 받은 지혁은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이번 시리즈, 메모리얼 데이를 기념한 밀리터리 유니폼을 입고 치르는 시리즈다.
한 달 만에 돌아와 평소에 입던 유니폼이 아닌 특별한 유니폼을 입으니 뭔가 느낌이 또 색다르다. 살짝 설레기도 하고, 마음이 붕 뜬 것 같기도 하고.
“자! 싱커랑 패스트볼부터 가 보자고!”
하지만 홈플레이트에 앉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툴툴거리던 멘데스가 마스크를 내려쓰고 미트를 펑펑 두드리는 순간. 마운드의 플레이트를 밟고 비스듬히 선 순간. 쉬는 동안 공을 던지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마음이 신기할 정도로 착 가라앉았다.
머릿속으로 한 달 내내 그려왔던 그림대로 천천히 와인드업을 해 본다. 마치 어젯밤에도 공을 던졌던 사람처럼 편한 팔 스윙과 허리 회전, 그리고 마지막 임팩트.
손끝에서 실밥을 때리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곧장 미트 속에 빨려든 공이 호쾌한 소리를 뿜어냈다.
“나-이스 볼!”
돌아왔다. 지혁이 있어야 할 곳으로.
***
사흘이면 충분했다. 최고 구속까지 끌어올리는 데에는. 불펜에서 하루에 30구씩 던지는 연습 투구에서 패스트볼 최고구속 96마일을 기록했다. 싱커도 92마일까지 올라왔고, 특유의 마지막 움직임도 여전히 날카로웠다. 커브의 낙폭도 충분하다. 한 달간의 공백은 부상으로 인한 치료의 시간이 아니라 휴식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너는 컨디션 안 좋으면 한 달씩 쉬면 되겠다.”
“에이, 코치님도.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쉬고 왔는데 공이 오히려 더 괜찮아졌으니까 하는 말 아니냐.”
“너클 포크. 한번 던져 볼까요?”
“원래 던지는 공이나 잘 던지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고 나니까 못 던지게 할 수도 없네. 그래, 한번 해 봐.”
왼손으로 공을 빙빙 돌리다가 검지와 약지, 두 손가락을 크게 벌려 공을 끼운다. 그리고 중지로 실밥 살짝 너머를 쿡 찍는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지겹게 던지던 너클 포크의 그립이다.
제대로 돼야 하는데. 불펜에 처음 복귀했을 때보다도 더 설렌다. 오히려 조금 무섭기도 하다.
“후우, 후우.”
이번 겨울을 온전히 투자했고, 지난 서너 달을 이 공을 익히기 위해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많은 사람들이 굳이 너클 포크가 없어도 상관없는데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이유를 궁금해 했다. 캘러웨이 코치도 내심 걱정을 꽤 하고 있다는 걸 지혁도 알고 있다. 멘데스는 그냥 고개만 설레설레 저을 뿐이고.
그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혁의 주무기인 싱커는 애초에 브랜든 웹의 것이다. 패스트볼? 구속이 2마일이나 상승한 것도 신의 덕이다. 커브는 아무도 모르지만 후지가 원조였다. 물론 모든 공을 지혁 나름대로 해석하는 과정을 거치기는 했다. 싱커는 알렌의 도움을 받아 던지는 방법을 조금 바꾸었고, 커브도 지혁의 방식대로 감을 잡았으니까.
하지만 애초에 그런 공들에 재능이 없었던, 순수한 지혁의 공들은 아니었다. 반면 너클 포크는 그렇지 않다. 신에게서 도움을 받지 않은 유일한 공이었고, 아무도 전수받지 못한 공이었다. 지혁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도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공이 있다면. 그게 바로 캘러웨이의 너클 포크다.
그러니 포기할 수 없었다. 스스로의 자존심과도 연결되는 문제니까.
“아?”
서서히 와인드업을 하고 손에서 공을 떠나보내는 순간, 살짝 느낌이 뒤틀렸다. 불만스러운 한숨이 본능적으로 나왔다. 그 전까지 던지던 공의 느낌이 아니었다. 실망스러웠다. 그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그렇게 던져 댔는데. 공이 다 날아가기도 전에, 한 달 전 쉬지 말았어야 한다는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
지혁이 투구하는 마운드 뒤에 서서 지켜보던 캘러웨이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멘데스가 포구에 실패한 것이다. 멘데스의 미트 끝부분에 맞은 공이 옆으로 툭, 툭. 굴렀다.
“뭐야?”
멘데스도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 허공에 물었다. 지혁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던진 이 공, 오랜 공백에서 나온 실수에서 말미암았던 공.
그러나 실수로 던진 이 공이, 지혁이 기존에 던지던 너클 포크보다 훨씬 먼저 회전을 멈춰 버린 채 나머지 반 정도를 정처 없이 흔들리며 날아갔다. 마지막 순간까지 바람에 흔들리던 공 때문에 멘데스가 포구에 실패해 버린 것이다.
“됐어! 들어갔어!”
캘러웨이가 한걸음에 달려와 멍하니 있는 지혁을 얼싸안았다.
“안 돼! 코치님, 저리 가세요! 지금 감각대로 던져야 해요, 지금. 빨리! 빨리 다음 공!”
포크처럼 떨어지지만 포크도 아니고, 너클처럼 흔들리지 않지만 완전한 너클도 아니고, 브레이킹볼도 아니고 오프스피드 피치도 아닌 공이면서 둘 모두의 효과를 내는 진짜 너클 포크를. 지혁은 던졌다.
캘러웨이의 격한 포옹을 벗겨 낸 지혁은 방금의 그 느낌대로 계속해서 던져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위대한 진보는 오랜 공백과 수많은 실수에서 온다.
지혁은 단 한 번도 저딴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온전한 너클 포크를 제대로 던져 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진보는 공백과 실수에서 왔고 말이다.
***
[웰컴 투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오늘은 시애틀 매리너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경기로 찾아왔습니다. 이곳은 시애틀, 세이프코 필드입니다. 저는 짐 보든입니다. 제 옆에는 언제나처럼 닉이 나와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닉 윌리엄스입니다.]
[홈팀 시애틀은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3위에 올라 있습니다. 시즌을 개막하고 첫 한 달은 굉장히 좋지 않은 시작이었는데, 5월 들어 반등에 성공했죠. 특히 지난 오클랜드 애슬래틱스와의 원정 시리즈에서 3연전을 스윕하며 파죽의 4연승을 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홈으로 돌아왔죠.]
[기세가 무섭습니다. 아무리 중부지구의 패권을 쥐고 있는 클리블랜드라고 해도, 조금 걱정이 되겠습니다. 게다가 클리블랜드의 시애틀 원정 성적은 상당히 좋지 않은 편입니다.]
[그렇죠. 하지만 오늘 클리블랜드는 한 달 동안 그토록 그리워했던 좌완 에이스를 선발로 내세웁니다. DL에서 복귀한 문. 문의 선발 복귀 경기입니다.]
[문이 없는 기간 동안, 좌완 선발의 부재 때문에 프랑코나 감독이 골머리를 좀 앓았죠? 많은 팀들이 클리블랜드를 대비해서 우완 투수에 강한 타자들을 많이 기용했고, 나름대로 쏠쏠한 재미를 봤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좌완 선발인 문이 복귀한 건 상당한 이점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지혁은 일찌감치 불펜 투구를 마치고 더그아웃에 앉아 야구장을 찬찬히 관람하다시피 뜯어보았다. 익숙한 세이프코 필드의 냄새를 맡으며 관중석을 둘러보기도 했고, 경기 시작 30초 전 시애틀의 야수들이 수비 위치로 뛰어나오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기도 했다.
마운드에 서서히 올라오는 시애틀의 선발투수는 ‘킹 펠릭스’, 펠릭스 에르난데스. 언제나처럼 관중석 한쪽 ‘펠릭스 존’에는 노란 옷으로 맞춰 입은 사람들이 ‘K’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플래카드를 들고 일사불란하게 흔들어 대고 있다. 킹 펠릭스가 삼진을 잡을 때마다 저 K자를 흔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광경은 경기장의 선수들을 압박하기에 충분하다.
“헤이!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점수 좀 내 줘!”
지혁은 대기 타석에서 킹 펠릭스의 연습 투구를 지켜보고 있는 타자들에게 익살맞게 말했다. 선수들이 답변을 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투구를 보던 린도어가 지혁을 돌아보며 싱긋 웃는 게 꽤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하나 해 줄 건가 본데?”
지혁은 멘데스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서서히 타석으로 걸어 나가는 린도어를 가리켰다.
“쟤가 정신 놓고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주장감이야. 알아?”
“주장감이라고?”
“그래. 동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른 녀석이라고. 아마 너한테 선물 하나 줘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을 걸.”
글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혁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해 주었다. 그리고, 멘데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공 하나 만에 증명되었다.
따아악-!
[초구! 때렸습니다! 우익수 뒤로! 담자아앙- 밖으로! 넘어갑니다! 선두타자 린도어의 리드오프 홈런! 킹 펠릭스의 초구를 때렸습니다!]
킹 펠릭스의 초구 패스트볼을 받쳐 놓고 잡아당긴 린도어의 까마득한 타구가 세이프코 필드 외야 2층에 떨어졌다. 인정해야겠네. 린도어는 차기 주장감이다.
***
[1대0으로 앞서고 있는 클리블랜드, 1회말로 이어 갑니다. 복귀전을 치르고 있는 문이 마운드에 섰습니다. 타석에는 시애틀의 1번 타자, 진 세구라. 이번 시즌 타율 .356을 기록하며 뜨겁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기분이 좋다. 마운드에 선다는 건, 메이저리그의 치열한 경기 속 한복판에 선다는 건. 지혁은 자신감 넘치는 팔 스윙으로 초구를 때려 박았다. 존 한복판, 약간 높은 코스. 솔직하게 말하자면 위험하기 그지없는 공이었지만. 96마일의 패스트볼에 세구라가 헛쳤다.
[스윙 스트라이크 원. 문이 자신감 넘치는 초구로 자신이 돌아왔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클리블랜드가 기다렸던 투구죠. 세구라 선수가 초구부터 노리고 돌렸습니다만 배트가 공을 따라가지 못했네요.]
[이런 공격적인 피칭, 문 하면 생각나던 것이었거든요. 2구 던집니다. 바깥쪽 흘러나가는 싱커에 헛스윙! 세구라가 이번에도 헛쳤습니다.]
[높은 코스 이후에 바깥에서 떨어지는 공. 존을 넓게 쓰는 것도 문의 장점이죠.]
[하하, 공 두 개를 던지는 동안에 문의 칭찬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3구 던집니다. 3구…….]
지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딱 정확한 지점에서, 공의 회전이 멈췄다. 애매한 빠르기의 공에 방망이를 출발시킬 타이밍을 재지 못하고 있던 세구라의 팔이 움찔거렸다.
‘실투 같아 보이지?’
한 번 움찔한 근육을 그대로 멈추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세구라의 방망이가 출발했다. 그 순간에 멈춘 듯 느껴지던 공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너클볼이 되어 버린 공이 멘데스의 발 앞쪽까지 떨어졌고, 세구라의 방망이는 한참 먼 곳에서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스윙! 배터 아웃!”
[…… 스트라이크 아웃! 세 공에 모두 헛스윙을 하고 마는 세구라입니다. 그나저나, 닉.]
[네. 방금 그 공. 너클…… 인가요? 아니면 포크볼 같기도 하네요.]
[이게…… 뭐죠?]
[하하, 글쎄요. 아무래도 문은 쉬는 동안 더 무서워져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저건, 분명히 문이 던져 오던 공이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실투라고 보기도 힘들고요. 아마…….]
[신무기?]
[그렇다고 봐야겠죠.]
[오, 마이, 갓. 슈퍼 문의 복귀전이 점점 더 궁금해져만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