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65화 (166/204)

날개 단 인디언

Butterfly.이제는 힘이 떨어져 1군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하지만 너클볼 하나로 인생역전의 드라마를 쓴 너클볼러 R.A.디키의 별명이다. 사실 버터플라이라는 별명은 디키라는 선수 자체를 수식한다기보다는 그의 너클볼을 수식하는 별명이기도 하다.

디키의 손끝에서 떠난 너클볼이 마치 짧은 공간 안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줄 위에서 너풀너풀 춤을 추는 나비 같다고 해서 지어진 별명.

너클볼의 움직임은 마치 시공간을 멈춰 버린 것 같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 안에서 혼자 느릿느릿 날갯짓을 하는 나비처럼, 지켜보고 있는 모든 이들의 타이밍을 빼앗아 간다. 상상할 수도 없는 광속구와 140킬로미터가 넘어가는 변화구들이 판을 치는 메이저리그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존재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클의 매력에 풍덩 빠지곤 한다.

특히 빠른 볼을 던지지 못하는 투수들은 너클의 유혹에 한번쯤은 빠지기 마련이다. 상상만 해도 멋진 모습 아닌가? 속도가 지배하는 이곳에서, 속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어필하는 공이니까. 마치 시간을 멈추는 마법사라도 된 듯한 느낌일 것이다.

그러나 너클은 아무나 던질 수 있는 공이 아니다. 지독하게 어려운 공이고, 일단 손끝에서 떠나면 통제조차 되지 않는다. 공에 회전을 걸지 않고 던진다는 것 자체가 기존의 투구 메커니즘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이기에, 웬만한 투수들은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너클볼은 오직 너클볼러만을 위한 공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힘없는 포크볼처럼 날아오던 공이 도중에 회전을 멈추고, 정작 공이 맞아야 할 홈 플레이트 위에서는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시애틀의 타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스윙! 로빈슨 카노의 방망이도 공을 쫓아가지 못합니다. 이것으로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방금 이 공입니다, 닉. 이 공이에요.]

[그렇습니다. 문은 오늘 이 공을 아주 적극적으로 쓰고 있어요. 스탯캐스트, 듣고 있나요? 슬로우 카메라 좀 부탁합니다. 하하.]

[스탯캐스트는 스마트폰 앱이 아니에요, 닉!]

하지만 스탯캐스트의 재기 넘치는 사람들조차도 오늘 지혁의 이 공을 주목하고 있었다는 듯 곧 다각도의 슬로우 영상이 화면을 통해 흘러나온다.

[그립을 보면, 포크볼이네요. 명백하게 두 손가락을 벌렸어요. 글쎄요. 벌린 정도로 봐서는 포크볼치고는 조금 좁은 것 같기도 하고, 스플리터라고 보기에는 조금 넓고요. 포크볼이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왜 도중에 회전이 멈추고 흔들리는 거죠? 저 움직임이 이 공의 핵심인 것 같아 보이거든요.]

[일단 중지손가락으로 공을 찍어 누르고(주 ; knuckle) 있죠. 아마 저 손가락에 비밀이 있을 겁니다. 너클볼러들이 일반적인 너클볼을 던질 때 세 손가락으로 공을 찍어서 던지니까요.]

정체불명의 공이었다. 이 낯선 공 때문에 세이프코 필드는 완전한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타석에서 이런 공을 볼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시애틀 선수들은 물론이고, 캐스터도, 해설자들도, 경기를 지켜보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랬다.

더구나 이걸 던지고 있는 선수가 지혁이라는 게 더 충격적이었다. 딱히 부상은 없다고 했지만 한 달이나 DL에 올라 있던 선수였다. 더구나 그 전까지는 리그를 씹어먹는 에이스 중 한 명이었던 선수다.

‘문지혁’ 하면 누구나 특유의 파괴력 넘치는 싱커를 떠올렸다. 또 4년 차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노련한 게임 운영과 두둑한 배짱, 그리고 승부를 걸어야 할 때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승부사를 연상하기도 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벌써 두 번의 노히터 게임을 만들어 냈고, 올스타 플레이어이자 루키 오브 더 이어에 이어 사이 영 2위까지 기록했던 투수. 그런 투수가 새로운 공을 또 만들어서 나타난 것이다. 이건.

[스윙! 타이밍이 전혀 맞지 않습니다, 넬슨 크루즈. 이번에는 싱커였습니다. 시애틀의 2-3-4번, 모두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4회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문.]

[짐, 짐. 솔직히 말하면요, 공포스럽습니다. 저만 이렇게 느끼고 있는 게 아닐 거예요. 시애틀의 타자들은 더 그렇겠죠. 이제는 명백해졌습니다. 문이 한 달 동안 이 공을 준비한 게 틀림없어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처음 몇 번은 우연이나 실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네요.]

[확실해요. 문은 신무기를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말도 안 되네요.]

닉 윌리엄스의 표현대로다. 공포에 가까웠다.

***

6월 2일, 시애틀과의 복귀전. 7이닝 3피안타 무실점, 12탈삼진, 승리.

6월 8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전. 6피안타 1실점, 7탈삼진, 완투승.

6월 15일, 휴스턴 애스트로스전. 6.2이닝 4피안타 2실점, 승리.

복귀한 이후 세 경기를 내리 따내 버렸다. 아메리칸리그의 모든 팀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싱커와 패스트볼로 집요하게 구석을 노리는 투구를 하다가 가끔 던지는 커브로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는 방식.

지혁의 이 방식에 대비하기 위해 나름대로 맞춤 준비를 하던 팀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너클 포크의 등장에 손도 쓰지 못하고 무너졌다.

타이밍을 맞출 수 없다든가, 너클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다든가 하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혁이 새 공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게다가 대단한 임팩트를 남긴 공이어서 타자들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너클 포크에 대한 생각만 가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너클 포크를 생각하고 있는 순간 지혁과 멘데스는 가차 없는 싱커로 응징했다.

너클 포크를 배제하고 타석에 임하려는 선수에게는 황홀한 날갯짓을 어김없이 보여 주었고.

6월 21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타자들도 그랬다. 디트로이트는 자신들의 홈구장인 코메리카 필드에서 열리는 경기임에도 지독하게 고요한 상태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클리블랜드의 유니폼을 입은 지혁은 인디언이 호랑이를 사냥하듯이 인정사정없이 던졌다.

[오늘도 여전히 호투를 이어가고 있는 문. 부상으로 한 달 이탈하기 전에도 그랬습니다만, 지금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특히 오늘처럼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정말 건드리기도 힘들어 보이네요.]

[디트로이트의 타자들이 정확히 그렇게 느끼고 있겠죠.]

[타이거즈는 1회말에 두 타자 연속 볼넷을 얻어냈을 때 점수를 냈어야 했습니다. 제구가 살짝 흔들렸을 때를 공략하지 못한 게 컸네요. 2회에 안타를 하나 맞은 이후로 연속해서 아홉 타자를 범타 처리하고 있습니다.]

탁!

싱커에 타이밍이 늦다. 지혁은 자신의 발 옆을 힘없이 스쳐 가는 공을 보며 만족스럽게 땀을 닦았다.

짐 아두치 역시 초구에 보여 줬던 너클 포크 때문에 타이밍이 흐트러졌고, 싱커를 걷어 내기에 그쳤다. 유격수 린도어의 깔끔한 처리로 투 아웃.

[열 타자가 됐네요. 타석에는 3번, 미겔 카브레라입니다.]

[스코어는 겨우 한 점 차이입니다만, 한 점이 정말 크게 느껴지네요. 몇 이닝만 지나면 클리블랜드의 불펜이 출동할 수 있는데요. 디트로이트에게는 상당한 압박감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해 줘야 하는 타자가 카브레라죠. 노쇠화의 기미가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디트로이트 최고의 타자입니다.]

‘작아 보여.’

지혁은 타석에 선 카브레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생각했다. 메이저리그에 첫 등판했던 날, 지혁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타격으로 홈런을 뽑아냈던 선수. 두 번째 생애의 지혁에게 첫 아픔을 선사했던 카브레라는 그 이후에도 만날 때마다 항상 부담스러웠던 타자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너무나도 편했다. 자신감이 하늘 끝까지 차올라 있다. 카브레라를 만났을 때 이렇게까지 여유로웠던 적이 있었을까? 저 거대한 타자가 작아 보이기까지 하는 건, 자신감 탓일 것이다.

뻐어엉-!

“스트라이크! 원!”

몸 쪽을 깊숙이 찌르는 패스트볼. 멘데스가 일부러 더 큰 소리를 내며 잡은 모양이었다. 카브레라를 상대로 던지는데 포수가 저런 소리를 내 주면, 안 그래도 자신감이 있는 투수에게 날개를 달아 준다.

조금은 뚱한 표정의 카브레라가 방망이로 존을 슬쩍 체크하면서 준비 동작에 들어간다.

멘데스가 요구한 2구는 바깥쪽 싱커. 볼이 되어도 상관없으니 보여 주며 타이밍을 각인시킨다. 오히려 존에 들어가면 위험하다. 눈 먼 파워에 담장까지 넘어갈 수도 있으니, 바깥으로.

“파울.”

앞발을 살짝 닫아 놓으면서 왼쪽 어깨를 최대한 늦게 연 카브레라가 바깥쪽 공에도 손이 나왔다. 방망이 끝에 맞은 공을 힘으로 밀어 냈지만 관중석에 떨어지는 파울.

이 스윙을 보면서 지혁은 확신했다. 천하의 카브레라조차도 너클 포크를 의식하는 것이다. 최소한 너클 포크보다는 눈에 익어 있는 싱커를 공략하기 위해. 존에서 벗어났다는 걸 알면서도 스윙을 낸 것. 카브레라답지 않은 선택이다.

리그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인 카브레라에게서 인정받은 것 같은 느낌은 지혁을 둥실 떠오르게 했다. 너클 포크에 대한 자신감이 훨씬 더 배가된다고 해야 할까? 던져야만 한다. 카브레라에게 너클 포크를 보여 줘야 한다.

멘데스도 지혁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 세 개를 펴 사인을 보내온다.

[3구를 준비하는 문. 와인드업.]

지혁의 손끝에서 전해져 오는 묘한 느낌. 미는 것도 아니고 긁는 것도 아닌 느낌. 공이 제대로 떠나갔다. 아주 느리게 회전하던 공에 브레이킹이 걸리며 순간 회전을 멈춘다. 카브레라의 방망이는 이미 출발하려는 낌새를 보이고 있으니까. 이 공을 정타로 때려 낼 순 없을 게 확실하다.

둥실거리는 너클볼이 힘차게 춤을 춘다. 너클에 걸리는 움직임은 던지는 사람이 통제할 수 없다. 어떻게 흔들리든 그냥 움직임을 감상할 뿐이다. 살짝 아래로 떨어지는 듯하다가 갑자기 몸 쪽으로 휙 빠져나가는 공이 멘데스의 미트에 박히기…….

[퍼 올립니다, 카브레라. 높이 뜬 타구. 좌익수가 서서히 뒤로.]

전에 카브레라가 어떻게 휘둘렀는지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분명히 타이밍은 맞지 않았다. 억지로 퍼 올린 타구였다.

[뒤로, 뒤로, 뒤로. 담장 근처까지! 오!]

근데 왜 이렇게 멀리 가는 거야?

[넘어가기 직전에 잡아냅니다! 좌익수 브랜틀리. 본인이 잡아내놓고도 크게 한숨을 쉬는군요. 카브레라가 상당히 멀리까지 공을 보냈습니다만 결국 담장을 넘기지는 못했습니다. 5회도 삼자범퇴로 마무리하는 문. 11타자 연속 범타입니다.]

[지금은 너클 포크였는데, 카브레라가 저 공을 저기까지 날리나요? 하하. 역시 대단한 타자입니다.]

[로켓처럼 높이 뜬 공이었는데 힘이 실렸는지 상당히 멀리까지 갔습니다.]

[괴물 같은 파워네요.]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했다. 분명히 타이밍이 맞지 않았는데. 카브레라에게 또 한 방 당할 뻔했다.

“임마, 정신 차려.”

캘러웨이 코치가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더그아웃에 내려온 지혁의 머리를 툭 쳤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인다, 임마.”

“예?”

“여긴 메이저리그야. 괴물들 중에서도 괴물들만 우글거리는 곳이라고. 이 세상에 못 칠 수 있는 공은 없어. 너클 포크도 마찬가지야.”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자리에 앉아서 스스로의 두 뺨을 거세게 한 번 쳤다. 캘러웨이의 말이 정답이다.

‘방금 공의 선택은 너무 오만했어. 한번 더 생각했어야 되는데.’

“너클 포크가 잘 들어갈 때 주는 자신감이 뭔지는 나도 알아. 한국에서 이 공을 던지기 시작했을 때, 양신인가 하는 그 사람도 내 공을 제대로 못 쳤어. 킴, 별명이 두목곰인지 뭔지 하는 타자도 제대로 못 쳤고. 하지만 여기는 메이저리그야.”

“코치님.”

“그리고 임마, 넌 아직 내 공에 비하면 발끝에도 못 왔잖아. 이제 던지기 시작한 지 반 년도 안 된 녀석이. 그 공으로 절대 안 맞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맞다. 넘치는 자신감은 응징당하기 마련이다.

“하하, 나도 취했어, 나도. 괜찮아, 경기하다 보면 맞을 수도 있지. 이번엔 맞지도 않았잖아.”

멘데스도 지혁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저 말도 정답이다. 캘러웨이의 말처럼 소위 ‘뽕에 취하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맞을 게 두려워서 못 던져서도 안 되니까.

카브레라의 타구는 경종을 울리는 것으로 이해하면 족하다. 그뿐이다.

“오케이, 알겠어요.”

“진짜로?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네.”

“아, 벌써? 진짜로? 넌 임마, 투수코치가 할 일을 좀 줘야 되지 않겠냐? 무슨 어린놈의 투수가 코치가 말을 해 주면 재깍재깍 알겠다고 해? 투수코치도 먹고 살아야지.”

“아~ 더워요. 저리 좀 가세요.”

농담을 하며 옆에 들러붙으려고 하는 캘러웨이를 밀어 낸 지혁은 반대쪽 벤치 난간에 기대 있는 거대한 카브레라를 응시했다. 처음 타석에서는 작아 보이더니, 지금은 또 커 보이네.

‘경종을 울려 줘서 고~맙수다, 형씨.’

지혁은 속으로 감사 인사를 보냈다. 다음 타석에는 무조건 삼진으로 잡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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