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저주에 씌인 팀이야
지혁이 너클 포크를 장착하며 변화를 시도한 이후, 여러 강팀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벌써 두 자릿수 홈런을 네 명이 기록하고 있는 휴스턴도 있었고, 무려 보스턴을 밀어 내면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기 시작한 양키스도 있었다. 하지만 지혁과 클리블랜드는 상대들을 모두 꺾었다.
DL에서 복귀한 후 다섯 경기 선발 등판, 5승.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하지 못한 경기는 디트로이트전, 딱 하나였다. 아웃카운트 두 개가 모자란 상황에서 프랑코나는 조금 일찍 지혁을 내렸다. 투구 수와 이닝 관리는 필수적이니까.
지혁도 굳이 불만을 갖지 않았다. 클리블랜드는 탬파베이처럼 불펜이 불안한 팀도 아니다. 누가 올라가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준다.
복귀 전 한 달, 5경기 4승. 복귀 후 한 달. 5경기 5승. 기록지에는 괴물 같은 성적이 드러났다.
막상 지혁은 그렇게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솔직하게 말하면 클리블랜드의 팀원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승리에 중독된 사람들처럼, 지혁이 등판하면 이기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니다. 지혁이 합류하기 전, 지금의 지혁 역할을 하던 클루버도 미친 사람처럼 던져 댔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나오는 공은 예년들의 그것을 훨씬 상회했다. 원인이 내부적인 경쟁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고.
어쨌든, 클루버의 기록도 대단했다. 세 달 동안 벌써 11승. 팀 내 이닝과 다승, 탈삼진 부분에서 압도적인 선두다.
발맞춘 하위 로테이션의 카를로스 카라스코, 대니 살라자르, 조쉬 톰린. 세 선수 모두 시즌이 끝났을 때 13승 이상을 기록할 수 있는 페이스로 달려가고 있었다.
덕분에 불펜진의 승리는 지난 시즌보다 현저하게 떨어졌지만, 앤드류 밀러와 코디 앨런을 중심으로 한 클리블랜드의 불펜진은 넉넉한 휴식을 취하면서 또 굉장한 퍼포먼스로 블론과 역전패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지워 가고 있다.
올 시즌의 클리블랜드는 ‘되는 팀’이라는 걸 증명하듯이, 살라자르나 톰린이 애를 먹고 있으면 어김없이 타자들이 대량 득점으로 든든한 후원을 해 줬다.
타자들이 애를 먹고 있을 때는 투수들이 최소 실점으로 틀어막는 경기가 나오고.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의 1위 자리는 6월이 끝나는 날에 사실상 결정됐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현격한 차이로.
팀마다 80경기 남짓을 치른 6월 말. 클리블랜드의 성적은 58승 22패.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높은 승률인 0.725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이번에야말로 와후의 저주를 풀겠다.
-아무도 그들을 멈출 수 없다. 인디언의 학살극이 펼쳐지는 AL 중부.
이런 제목의 특집 기사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나도 위화감이 없었다. 클리블랜드는 문자 그대로 질주하는 중이니까.
***
하지만.
메이저리그라는 무대가 얼마나 지독한 곳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세계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그중에서도 가장 잘하는 선수들만, 또 그중에서도 특별하게 잘하는 선수들만 간신히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메이저리그에서 나름의 성과를 거둔 선수들은 모두 존경받아 마땅하다. 모든 팀들이 그렇다.
설령 그게 리빌딩 팀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작년을 기점으로 텍사스 레인저스는 몇 년쯤 쉬어가기로 했다.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에도 클리블랜드와 비슷한 절대자가 최소 몇 년간은 독재할 기세로 달리고 있으니까. 나름대로 현명한 선택이다.
FA가 된 다르빗슈 유가 LA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었고, 포수인 조나단 루크로이는 콜로라도 로키스행을 택했다. 그 자리들과 선발 로테이션을 유망주가 채우고 있는 이번 시즌은 텍사스 입장에서는 쉬어 가는 시즌이다.
“오, shit.”
넘어갔네. 볼 것도 없었다. 최성수 선배가 있는 힘껏 잡아 당긴 뒤에 고개를 푹 숙였으니까. 글로브 라이프 파크의 3층까지 향하는 어마어마하게 까마득한 타구. 조쉬 톰린을 상대로는 거의 킬러나 다름없는 최성수 선배의 리드오프 초구 홈런이 터져 나온다. 오늘은 시작이 제법 거창한데?라고 농담을 던지려던 찰나였다.
“어?”
또 넘어가네. 2번 타자, 노마 마자라의 백투백 홈런. 조쉬 톰린은 공 두 개를 던져 홈런 두 개를 맞는 기이한 스타트를 하는 중이다.
따아악-!
잠깐만. 저건 볼이잖아.
40을 넘은 타자가 저런 파워를 보여 줘도 되는 걸까? 아드리안 벨트레는 뒷무릎을 꿇으며 거의 원 바운드가 될 것 같이 떨어지는 커브를 잡아당겼다.
아름다운 궤도를 그리던 공이 좌중간 담장을 훌쩍 넘어 사라지는 순간. 그제야 클리블랜드의 더그아웃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홈런 두 개를 맞고 일부러 볼로 빼려고 던진 공인데, 저걸 때리네.”
“그것도 초구부터…….”
멘데스는 톰린의 투구를 한 개도 미트에 쥐지 못했다. 세 타자를 상대로 던진 세 개의 공이 모두 담장을 넘어가는, 정말 희귀한 경우였다.
마운드에 있는 톰린의 표정은 이상하게 씰룩이고 있었다. 마운드 위에서 약해 보이고 싶지는 않을 테지만, 지금의 분노가 어디 가지는 않을 테니. 억지로 참고는 있지만 볼 근육에 가벼운 경련이 있을 터다.
“동요하지 마. 다들 평소처럼 있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우리조차 조쉬를 압박해서는 안 돼.”
프랑코나 감독의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말 한마디로 더그아웃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그 말이 마운드까지 닿았으려나.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일어날 수는 있는 일이다. 맞아.’
지혁도 프랑코나의 말에 동감이다. 하지만, 한 번의 인생을 더 살아 본 지혁의 감은 다른 신호를 계속 보내오고 있다.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아주 불길한 느낌이다.
***
느낌이 적중했다. 3회말, 8번과 9번에 있었던 유망주 두 명을 가볍게 처리해 낸 톰린이 다시 최성수 선배를 맞이했다. 최성수 선배는 조쉬 톰린을 상대로 이번에는 스윙을 잘 내지 않았다. 하지만 특유의 선구안으로 톰린을 끝까지 괴롭혔다. 투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파울을 네 개를 만들었고, 쓰리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된 후에도 파울 두 개를 뽑았다.
투수는 평정심을 잃을 수밖에 없는 흐름에서. 테일링이 걸린 좌타자의 바깥쪽 높은 투심. 멘데스의 선택은 아주 훌륭했다. 하지만 오늘은 인간의 힘을 벗어난 뭔가가 작용하는 듯한 날이었다.
“…….”
더그아웃이 침묵에 빠져들었다. 바깥쪽으로 힘들이지 않고 툭 밀어 낸 타구가 담장을 넘었으니까. 최성수의 연타석 홈런.
“캘러웨이 코치, 불펜 레디시켜.”
“네.”
거짓말 같겠지만. 악몽은 끝나지 않는다. 이어진 노마 마자라의 타구음 소리는 끔찍하다시피했다. 담장에 매달리는 클리블랜드의 외야수들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다.
[연타석 백투백 홈런!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텍사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벨트레가 남아있어요.]
[연타석 백투백투백. 이게 과연 가능할까요? 정말로? 그렇다면 전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릴 겁니다. 모든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니까요.]
[프랑코나 감독, 아직 투수 교체 생각이 없나요?]
[이제 막 불펜에서 투수들이 몸을 풀기 시작했다는군요.]
[조쉬 톰린이 심리적으로 상당히 쫓겨 있을 텐데요. 아. 역시 걸어 나오네요. 한번 끊어야 할 타이밍이죠. 명백하게요.]
더그아웃에서 마운드에 모여 있는 프랑코나 감독과 내야수들을 바라보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지혁의 육감은 오늘 하루 종일 신나게 일을 하고 있다. 불길하기도 했다가, 이상하기도 했다가, 또 유별나게 민감스럽기도 했다가.
“야구는 사람이 하는 스포츠지…….”
지혁은 스스로 뭐라고 하는지도 명확히 모른 채 중얼거렸다. 무의식적으로 그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야구는 분명히 사람이 하는 운동인데도, 이상하게 꼬이고 꼬이는 경우가 존재한다. 신의 장난질이든, 아니면 지독한 악운에 악운이 겹치는 일이든. 현실에서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일들도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같은 경우가 그렇다. 보이지 않는 힘이 인과를 거스르고 작용하는 듯한 느낌?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무서운 예감이 드는 순간, 톰린의 초구를 받아 때린 벨트레가 두 주먹을 불끈 쥐는 게 눈에 들어왔다.
[Back-to-back! - to back! AGAIN!]
[오, 마이, 갓.]
[믿을! 수가! 없습니다! 텍사스의 폭격이 몰아칩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처음으로요!]
***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에 있는 팀들은 결코 클리블랜드를 멈춰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건 다른 지구의 팀들이라고 변하지 않는다. 서부지구의 절대강자인 휴스턴이나, 동부지구의 2강인 양키스나 보스턴이라고 해서 클리블랜드를 쉽게 제어할 수 없었다는 게 6월에 이미 드러나 있었다.
인터리그? 내셔널리그의 워싱턴이나 시카고 컵스, LA 다저스 같은 팀들도 클리블랜드와 호각을 이루면 이루었지, 클리블랜드를 완전하게 제압하지는 못했다. 원체 강력했던 팀에 분위기까지 타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클리블랜드의 기세를 단번에 제압한 게 텍사스였다. 한 경기에서 세 명의 타자가 연타석 백투백투백 홈런. 톰린의 뒤를 이어 올라온 불펜에게도 홈런 두 개를 더 뽑아내며, 무려 한 경기 여덟 개의 홈런. 17득점. 텍사스는 메이저리그 기록을 세워 냈다.
세 타자의 연속 홈런이 연타석으로 나온 것도 메이저리그 기록이었고, 한 팀이 한 경기에 여덟 개의 홈런을 때려 낸 것도 역대 최다 기록이었다.
한 경기에서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기록을 두 개나 내주고 나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경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운은 자꾸 질척거리며 들러붙었다.
클루버가 7이닝 2실점으로 버텼지만, 분 로건의 블론 세이브가 나왔다. 로건은 가벼운 팔꿈치 통증까지 호소했다. 3대4, 역전패.
4월. 5월. 6월. 불붙은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하던 클리블랜드는 7월의 두 경기에서 최악의 스타트를 한 셈이다.
그리고 쉴 틈도 없이 곧장 이어진 밀워키와의 인터리그 원정 시리즈. 지혁이 등판한 첫 경기. 컨디션이 조금 좋지 않다 싶더니만 너클 포크가 제대로 회전을 멈추지 않았고, 에릭 테임즈는 지혁에게 첫 번째 피홈런을 선물했다.
경기도 뒤집지 못하고 3대0으로 끝나 버리며 지혁은 시즌 첫 패전을 떠안았고, 클리블랜드는 3연패에 빠졌다.
카를로스 카라스코가 등판한 2차전. 2대5 패배.
대니 살라자르의 3차전, 설마설마 했지만, 6대7 패배.
5연패이자 이번 시즌 첫 스윕. 7월의 다섯 경기에서 무승. 비상 상황은 이렇게 예고 없이 도래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팀 미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과 분위기다.”
멘데스와 린도어가 나란히 출근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시끄러웠던 적 없는 라커룸이라니. 믿을 수 없는 광경 속에서 프랑코나는 당연히 팀 미팅을 소집했다.
“지난 세 달의 여러분은 환상적이었다. 트집을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있는 게 없었어.”
선수들이 고요하게 프랑코나의 말을 듣고만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비상이다. 하지만 누구도 말을 꺼낼 수 없을 테고, 그러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연패라는 사슬은 선수들의 정신을 옭아매 버리니까.
“시즌이 시작하기 전을 기억하고 있겠지? 스프링캠프가 끝나는 날, 너희들을 잡고 5시간 동안이나 비디오를 돌려 봤다. 너희들의 문제는 한두 개가 아니었고 특히 정신력에 문제가 있었지. 시즌이 시작한 후 세 달의 성적은 그날의 분석에서 시작했다고, 난 믿고 있다.”
프랑코나는 엄한 감독이다. 수렁에 처박힌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라면 5시간은 우스울 정도겠지. 선수들을 극한으로 몰아칠 수 있는 감독이니까.
“후, 5연패. 힘든 나날들이었다. 조쉬가 가장 괴로웠을 테고. 나머지 녀석들도 모두 그랬겠지. 나도 그랬다. 우리가 오만했던 게 아닌가? 너무 들떠 있었던 건 아닌가? 이틀 밤을 새웠다. 계속해서 비디오를 봤지. 우리의 경기를 세 번씩 돌려 봤다. 그리고 난,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가 5연패를 당한 지난 다섯 경기에서도 너희들의 트집을 잡을 수 없다는 걸. 너희는 잘했다. 할 수 있는 최고의 플레이를 했어.”
프랑코나는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와후 추장이 익살스럽게 웃음을 띠고 있는 로고가 박힌 모자.
“야구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잘하고도 지는 일이라던가, 개똥같이 플레이를 하고도 이기는 일이라던가. 우리가 최근 겪고 있는 지독한 불운 같은 것들 말이지. 텍사스가 한 경기에 여덟 개의 홈런을 때린다고? 평생 다시 나올 수 없는 기록이야. 그리고 유독 우리 팀에게는 그런 미스테리한 일들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
“70년.”
“그래. 70년 동안이나 말이야.”
프랑코나는 손에 쥔 모자를 한 주먹에 찌그러뜨렸다. 와후 추장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그 70년간의 불운을 우리는 저주라고 부른다. 잊지 마. 우린 저주에 씌인 팀이야.”
프랑코나는 손을 높이 들어 주먹에 쥔 모자를 벽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마치 와후 추장의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먹이는 것처럼.
“불운? 저주? 다 좋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지. 우리는 저주를 뚫고 나간다는 거다! 반드시! 이번만큼은 저주를 풀어내야 하고, 풀어낼 거야! 너희는 이대로 올해도 저주의 희생양이 되고 말 건가?”
그럴 수는 없지. 기어이 저주를 풀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이곳에 왔으니까. 끝끝내 풀어내야만 하는 과제니까. 그게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지혁의 목표이자, 클리블랜드의 목표니까.
선수들이 자신의 모자를 벗어 일제히 벽에 던져 버렸다. 앞으로의 시즌, 그리고 가을 야구. 우리가 상대해야 할 것은 단순한 상대 팀이 아니라, 미스테리한 저주라는 것을 상기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