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와 싸우는 마음가짐
[모든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역사와 같은 순간. 가장 마법 같았던 순간.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가장 위대한 수비 중 하나로 평가되는 바로 그 순간. 윌리 메이스의 ‘더 캐치The Catch’가 터져 나온 그 순간.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환호했습니다. 딱 한 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관계자들만 빼고 말이죠.
1948년 월드시리즈를 우승한 이후 6년 뒤의 일이었습니다. 정규 시즌에서 105승이나 기록했던 클리블랜드가 4승을 거두지 못하고 뉴욕 자이언츠에 트로피를 넘겨주었죠. 이게 클리블랜드가 맞닥뜨린 가장 오래된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
메이저리그에는 수많은 저주들이 있었다. 베이브 루스가 라이벌 팀으로 옮기면서 남겼다는 ‘밤비노의 저주’. 2004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기 전까지, 보스턴은 86년 동안이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었다.
시카고 컵스가 가지고 있던 ‘염소의 저주’는 그것보다 더했다. 무려 70년 동안 월드시리즈에 진출도 하지 못했으며,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던 것은 108년 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재작년, 바로 클리블랜드를 격파하며 한 세대가 넘어가는 오랜 저주를 깨트렸다.
그 외에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게 걸려 있던 ‘검은 양말의 저주’나 필라델피아의 모든 스포츠 구단이 우승하지 못할 것이라는 ‘윌리엄 펜의 저주’ 같은 것들도 나름 유명했다.
화이트삭스는 88년만에 우승의 한을 풀었고, 필라델피아는 야구단인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2008년 월드시리즈를 제패하며 저주를 반쯤 풀었다.
그리고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저주. 그게 바로 클리블랜드에게 걸려 있는 와후 추장의 저주다.
정말로 기이한 일이다. 저주라는 건. 절대로 실존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또 실존한다.
컵스가 다시 우승하는 데까지 무려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재작년 컵스가 월드시리즈를 우승한 것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처음으로 목도하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한 세대를 뛰어넘는 기간 동안 한 번도 우승을 못 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 정말로 저주가 팀을 옭아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시니에.”
“응?”
“저주라는 게 진짜 있을까? 있는 거겠지? 그러니까 우리 팀도 70년째 우승을 못 하고 있는 거고. 그게 아니면 도무지 말이 안 되지?”
“나한테 그걸 어떻게 설명해 달라는 거야?”
“그냥. 이런 일이 또 있나 싶어서. 말이 된다고 생각해?”
“으음. 솔직하게?”
시니에의 눈동자에서 장난기가 꿀처럼 뚝뚝 떨어진다. 하지만 지혁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응. 난 자세히 모르지만, 무슨 저주를 받았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 않았나? 야구에만 있는 게 아닐 거 아냐.”
“자긴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 그리고 이젠 저주는 먹히지도 않는 소재라구.”
“그냥 영화에나 나오는 일이다?”
“이보세요, 미스터 슈퍼 문. 난 의사잖아요. 그런…… 어…… 음, 미신 같은 걸 과학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하면 안 된답니다.”
시니에는 지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면서 아기처럼 품으로 파고들었다. 오른쪽 팔로 시니에의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도, 지혁의 눈은 여전히 TV 속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법이나, 미스테리나, 뭐 그런 것들이 많잖아. 과학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 저주도 그런 거지?”
“흐응…… 글쎄, 심리적인 작용을 미치기는 하겠지?”
“70년이 말하기는 쉬운데 진짜 어마어마한 시간이잖아.”
“그건 그래. 우리 부모님도 70이 안 되셨으니까.”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실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야구를 잘한다고 해서 모두 우승하는 건 아니죠. 누구나 다 클리블랜드의 우승을 점쳤을 때도, 운명의 드라마는 그것을 번번이 막아 세웠습니다. 그러니 저주라는 타이틀이 붙었죠. 1995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41년 만의 월드시리즈 진출이었던 1995년, 애틀란타의 강력한 선발진에 밀린 시리즈. 그로부터 2년 뒤인 1997년, 상대는 신생팀이었던 플로리다 말린스. 9회 2아웃 이후에 나온 클리블랜드의 마무리 호세 메사의 블론 세이브와 11회말에 허용한 끝내기 안타. 다시 암흑기를 지나 2016년. 3승 1패로 앞서던 시리즈에서 3연패를 당하며 컵스에게 저주의 열쇠를 내주었고. 작년, 다저스를 맞아 커쇼에게 패하는 여정까지.
우주의 기운이 클리블랜드의 우승을 저지하는 듯한 느낌이다. 정말로.
“하아……”
“그렇게까지 깊게 한숨 쉬지 마. 자기는 할 수 있어.”
어느덧 시니에의 목소리에는 졸음이 잔뜩 묻어났다. 더더욱 지혁의 품으로 파고들어 오던 시니에가 이내 쌔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지혁의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했다.
7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계속되어 온 저주에 맞설 수 있을까? 이걸 깨트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인간의 능력 밖에서 작용하고 있는 듯한 강력한 거부마저 뚫고 나아갈 수 있을까?
* * *
“야구가 안 되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멘데스는 여느 때처럼 유쾌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팀의 최근 성적이 좋지 않은데다가, 내용마저 좋지 않았기에 오늘의 비는 참 다행이었다. 며칠쯤 푹 쉬며 흐름을 끊을 계기가 필요했었는데, 때마침 내린 비로 필요한 휴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선수들도 갑자기 닥친 하강 분위기를 끊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잔뜩 후끈거리던 열기도 조금이나마 가시는 반가운 비이기도 했다. 멘데스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너는 야구장에 없었으니까 모르겠지. 2년 전에 우리는 여기서 월드시리즈 7차전을 치렀잖아.”
“응.”
“컵스 녀석들 말이야. 그 녀석들은 무려 백 몇 년짜리 저주를 깼어. 바로 우리 눈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걸 보면서 확실하게 느꼈거든. 이 세상에 못 깰 저주는 없다고. 그놈들도 깼는데 우리라고 못 할 것도 없잖아? 게다가 우린 30년이나 더 적잖아. 하하하.”
“넌 참 속도 좋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지. 우리가 지난 2년 동안은 실패했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꼭 깰 수 있겠다, 컵스도 했는데. 이렇게.”
“그건 맞는 말이지.”
“아, 감독님.”
“시원하게 쏟아붓는구만.”
“네. 모처럼 시원하네요.”
프랑코나는 모자를 벗어 그의 빈 머리에 송글송글 맺혀 있는 땀을 훔쳤다.
“저주. 참 흥미롭지. 보스턴에서 느꼈던 그 압박은 정말 어마어마했네. 자네도 알잖아? 보스턴 팬들이 얼마나 극성인지.”
“하하하. 장난 아니죠.”
“난 2004년 현장에 있었네. 그리고 재작년에도 현장에 있었고. 한 번은 밤비노의 저주를 깨 버린 입장이었고, 또 한 번은 염소의 저주를 깨 주는 입장이었군. 자, 문. 한번 생각해 봐. 보스턴에서 80년이 넘었던 저주가 깨지는 순간 어떤 기분이 들었을 것 같나?”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면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단순히 우승을 넘어서 70년 묵은 구단의 한을 풀어내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야 엄청 좋았겠죠. 우리가 느꼈던 패배감, 좌절. 딱 그만큼 좋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렇지. 기뻐서 정신이 다 나가 버릴 정도였으니까.”
2년 동안 연속으로 패배감을 맛봐야 했던 멘데스는 마지막 순간을 넘지 못한 감정을 그대로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듯 말했다.
우승과 준우승을 모두 숱하게 겪어 본 프랑코나 감독은 대충 비슷할 거라며 끄덕거렸고.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했다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았다.
두 번의 인생. 통틀어 유일한 트로피는 회귀하자마자 황급히 던져야 했던 데이토나 컵스 시절의 것이었다. 탬파베이에서 지구 우승을 차지하지도 못했었다. 단기전에서 디비전시리즈 우승을 해 보기는 했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해낼 수 없었던 일을 마침내 성취해 냈을 때의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 저주를 깬다는 건 단순한 우승이 아니야. 어떻게 설명해 줄 수가 없지. 초월적인 존재에 맞서 이긴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초월적인 존재라. 지혁의 곁에 언제나 있는 야구의 신을 깨부순 기분이라고. 생각해 보니 그건 좀 기분 좋은 일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은 단언컨대 내 딸이 세상에 나오던 날이었네. 그다음이 바로 보스턴에서 저주를 깼던 때야. 솔직히 말하자면, 아빠인 테리 프랑코나의 기쁨과 감독인 테리 프랑코나의 기쁨이 거의 비슷했다고 생각하네. 이건 가족들에겐 비밀이지만. 이렇게 말하면 크게 혼나거든. 허허.”
“생명이 탄생할 때와 비슷한 기쁨이라고요?”
“흠…… 저주의 부담감이 그만큼 컸으니까 말일세. 팬웨이 파크에 모인 백발의 노년들이 전부 손을 모으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장면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지. 그 사람들이 평생 가지고 있는 숙원을 달성한 느낌이니까. 몇십 번이나 실패하고 넘어졌던 과거의 기억들을 완전히 넘어선 순간의 황홀함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법이지.”
지혁과 멘데스는 납득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야구를 하는 그들만의 꿈이 아니다. 그들을 내리누르고 있는 지독한 저주는, 클리블랜드에 사는 모든 이들을 똑같이 짓누르고 있다.
월드시리즈 우승, 저주의 극복. 이건 영원한 패배자들의 도시라고 조롱받는 클리블랜드 전체의 숙원이기도 하다.
100살이 넘는 시카고 컵스의 팬이라는 할머니가 휠체어 위에 앉아 우승 장면을 바라보며 오열하는 모습, 인생의 황혼을 달리는 사람들이 평생 처음으로 맛보는 우승의 희열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 이런 것들은 역설적이게도 저주가 걸려 있는 팀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나도 아네. 부담스럽지. 그 부담을 이겨 냈기 때문에, 이겨 내는 순간의 감정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네.
“많이 부담스럽네요. 온 클리블랜드의 희망을 어깨에 짊어진 영웅이라도 된 것 같이요. 하하.”
“바로 그거지. 잊지 말게. 어깨에 짊어진 짐이 크고, 무겁고,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을수록. 성취했을 때의 감정이 짜릿해진다는 걸. 인생에서 한 번 느낄 수 있을까 말까한 그 짜릿한 순간을 향해 우린 나아가는 거고.”
저주를 풀어야 하는 팀의 어깨에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간절한 희망이 올라타 있다.
“나를 위해, 동료를 위해, 팀을 위해, 그리고 클리블랜드를 위해.”
프랑코나가 중얼거린 말이 빗소리 사이를 뚫고 오랫동안 지혁의 귓가에 맴돌았다.
* * *
[7월의 여덟 경기에서 2승 6패를 기록하고 있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이어진 원정 시리즈를 마치고 드디어 홈으로 돌아왔습니다. 짐 보든입니다. 옆에는 언제나 그렇듯 닉이 나와 있고요. 안녕하십니까, 닉.]
[옙. 닉 윌리엄스입니다.]
[어제의 우천 연기로 인해 클리블랜드는 선발 로테이션을 조정했습니다. 당초 선발로 예정되었던 조쉬 톰린에게 한 차례 휴식을 더 주기로 했죠. 프랑코나 감독은 1차전 선발로 곧장 문을 올렸습니다.]
[톰린이 텍사스전에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안 좋은 투구를 했기 때문이죠. 프랑코나 감독은 엄격하고 딱 떨어지는 장군형 감독이지만, 이렇게 선수 개개인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감독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명장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렇군요. 문이 등판하는 경기, 원정팀은 보스턴 레드삭스입니다. 여기 또 한 명, 주목받는 투수가 있죠.]
[후지 미유타. 돌아왔습니다.]
[4월과 5월, 뚜렷하게 떨어진 구속 때문에 데드암 증세가 의심되었었는데요. 5월 중순부터 DL에 올라가 있었다가 한 달 반가량을 쉬고 7월 초에 돌아왔네요. 확실히 시즌 초반의 공이 안 좋았습니다. 지난 2년 동안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저도 언급할 수밖에 없겠네요. 팀 린스컴을 떠올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년 동안 사이 영 상을 독식하며 리그 최고의 투수로 우뚝 섰던 린스컴도 결국 그 폼을 이겨 내지 못했는데요. 제2의 린스컴이라는 별명처럼 엄청나게 역동적인 폼으로 공을 던지던 후지도 피지컬적인 한계에 부딪친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되는 게 사실입니다.]
[보스턴은 후지와 프라이스가 모두 전열에서 이탈하며 지구 1위 자리를 양키스에 내준 상태입니다. 이런 와중에 후지가 복귀했으니 이번 경기에 대한 기대감이 매우 클 텐데요. 광고 보고 두 팀의 맞대결, 두 에이스의 맞대결. 함께하시죠.]
* * *
“후지? 마사지 받고 있어서요. 힘들겠는데요.”
경기 전 지혁은 원정팀 보스턴의 더그아웃을 찾았다. 후지 녀석, 올 시즌 들어서는 전화 한 통화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패트릭도 제대로 전달받는 것이 없다고 할 뿐이었다.
모처럼 두 팀이 만나는 날이라 후지를 한 번 보고 싶었는데. 보스턴의 마스터 클러비들은 지혁의 요구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클러비들의 뜻은 곧 후지의 뜻이다. 지혁의 경력이 몇 년인데 이런 걸 모를 리 없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전해는 주세요. 경기 끝나고라도 잠깐 보자고.”
“말은 전하도록 하죠.”
저것도 거절이다. 지혁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