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68화 (169/204)

알 수 없는 경기

-원정 팀, 보스턴 레드삭스. 1번 타자, 좌익수. 앤드류 베닌텐디.

경기가 시작되었다. 지혁은 여전히 후지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후지는 후지고 승부는 승부다. 게다가 지난 경기에는 첫 패전까지 떠안았고, 팀은 좋지 않은 분위기에 허덕이고 있다.

-흐름을 끊어야 할 때 끊어 주는 게 에이스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 명제를 증명해야만 하는 경기. 지혁은 집중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하루를 푹 쉬었더니 팔과 어깨의 컨디션도 괜찮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싱커 두 개를 던진 뒤 한복판으로 날아가는 너클 포크. 쭉 뻗어오다 마지막에 꿈틀거리면서 경계선을 공략하는 싱커로 카운트 두 개를 내준 베닌텐디는 타이밍을 완전히 뺴앗긴데다가 너클의 움직임까지 보이는 포크를 그냥 지켜보고 들어갔다.

마지막 순간에 이상한 방향으로 떨어지던 포크볼을 멘데스가 묘기에 가깝게 캐치해 냈다. 역방향으로 포수 미트를 틀었는데도 정확하게 쥐었다. 게다가 프레이밍은 조금 환상적인 게 아니었다. 살짝 낮았다고 볼 수도 있는 공인데 정확하게 존 위에서 건져 올렸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새 무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문, 첫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네요.]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저 공은 딱 봐도 포구가 굉장히 어려운 공이거든요.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도 저 공을 쓸 수 있다는 건 전적으로 포수인 멘데스 덕분입니다. 심지어 너클볼러들의 전담 포수들조차도 한 경기에 제대로 포구하지 못하는 공이 수두룩하게 나오는데, 멘데스는 저 공을 빠트리질 않아요.]

[파트너가 멘데스이기에 쓸 수 있는 공이란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최소한 자신의 뒤로 빠트리지 않고 앞에 떨궈놓을 수 있는 포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패스드 볼(주 ; passed ball, 포구에 실패해 뒤로 빠지는 공)이나 와일드피치가 나오지만 않는다면 멘데스의 어깨로는 우사인 볼트가 와도 낫아웃을 잡아낼 수 있으니까요.]

[하하하! 우사인 볼트가 와도요?]

[당연하죠. 괜히 퀵 팝이 아니잖습니까.]

멘데스는 당연하다는 듯 시크하게 내야로 한 바퀴 공을 돌린다. 정말 든든하기 그지없는 포수다. 세상에 이런 파트너는 또 없으니까. 지혁은 더더욱 자신 있게 너클 포크를 뿌릴 수 있다.

[5구 승부, 때립니다. 힘없이 빗맞은 타구. 3루쪽, 호세 라미레즈가 전진하며 잡아 1루로. 가볍게 투아웃을 잡아내는 문.]

[오늘은 컨디션이 좋나 보군요. 직전 경기에서는 초반에 제구가 많이 흔들렸는데요. 오늘은 평소의 문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입니다.]

이어진 타자 헨리 라미레즈는 1루수 팝 플라이로 마무리. 1회의 투구만 놓고 보면 지혁과 클리블랜드의 분위기는 최악의 흐름에 올라탄 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다. 군더더기가 단 하나도 없는 시작이었다.

* * *

[드디어 돌아왔습니다. 보스턴의 후지 미유타.]

[사실 조금 의아했죠. 데드암 증세로 의심되었고, DL에 한 달 반이나 올라 있었는데도 보스턴은 마이너리그에서 리햅 경기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몸 상태나 실전 감각을 확인하지 않고 곧장 메이저리그로 복귀시켰어요.]

[확실히 조금 의문이 남는 행보입니다. 이번 시즌 성적은 3승 2패, 평균자책점 4.18입니다. 4월부터 한 달 정도의 성적입니다만, 후지라는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록이죠.]

[과연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줄 것인지, 기대가 됩니다. 가장 최근 경기였던 5월 10일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경기에서 2이닝 동안 43구만 던지면서 3실점으로 패전을 기록했었네요. 이 당시 패스트볼 구속이 90마일이었다는군요.]

[102마일까지 기록했던 선수가요? 오, 이런. 정말로 팀 린스컴의 전철을 밟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는군요.]

클리블랜드의 타자들은 신중하게 후지의 투구를 노려봤다. 아무렇지도 않게, 덤덤하게 마운드에서 던지고 있는 후지는 예전과는 다르지 않아 보였다.

“공은?”

“힘을 안 쓰고 던지고 있어. 저 정도면 연습 투구라고 보기도 힘들어. 그냥 캐치볼?”

“흠. 스피드를 일부러 안 보여 주는 건가?”

“데드암이라는 게 그렇게 단기간에 확 좋아지는 게 아니지. 대략 90마일대 초중반에 타이밍을 맞추면 되겠어.”

분석할 자료가 없다. 리햅 경기도 치르지 않았고, 후지의 상태는 철저하게 대외비에 붙여져 있었다. 그러니 DL에 가기 전 상태를 염두에 두고 분석할 수밖에 없다. 클리블랜드 쪽 타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초구! 와우. 99마일!]

미트를 찢을 것처럼 한복판을 파고든 후지의 공에는 부상당하기 이전의 힘이 실려 있었다. 타석에서 공을 지켜본 린도어는 얼굴을 찌푸렸다. 까다로웠던 시기의 후지 그대로다.

‘부상이 아니었나?’

아닌데. 분명히 패트릭은 데드암이라고 말했었는데. 데드암이 있는 팔로 99마일을 던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대체 뭐지?

답은 금방 나왔다. 이런 극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건 지혁과 후지만이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인 신밖에 없다.

“후우,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도 쉽지는 않겠다.”

1번인 린도어에 이어 2번인 짐머까지 너무나 무기력하게 물러나는 모습을 보고 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이 경기는, 신의 유흥을 위한 경기일지도 모른다.

* * *

따아악-!

강한 타구 음. 3루수 라미레즈가 선상을 타고 뻗어나가는 공을 향해 몸을 던졌지만 글러브를 스치고 쏜살같이 빠져나가는 타구.

“젠장.”

젠더 보가츠의 타구가 좌측 폴대 밑까지 데굴데굴 구른다. 좌익수 브랜틀리가 빠르게 따라갔고 나쁘지 않은 펜스 플레이를 했지만, 2루에 있던 주자인 스와이하트가 홈까지 들어오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앞서 나갑니다. 젠더 보가츠의 1타점 적시 2루타! 3회초 공격에서 2루타 두 개로 득점을 뽑아내는 보스턴.]

[싱커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죠? 보스턴의 타자들도 기민하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1회에 베닌텐디가 헛스윙 삼진을 당한 이후에, 너클 포크에 좀처럼 손이 나오지를 않네요. 너클 포크는 철저하게 버리는 자세로 타석에 임하고 있습니다. 패럴 감독의 선택이 아주 영리합니다. 칭찬하고 싶어요.]

보스턴은 지혁에 대해 치밀하게 분석하고 나왔다. 서서히 때가 되기는 했다. 너클 포크가 여러 팀들에게 충격을 주는 공인 건 맞다. 하지만 아직 숙련도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익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공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타자의 배팅 타이밍을 흐트러뜨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 던질 수는 없다.

결국 지혁이 카운트를 잡는 공은 싱커와 패스트볼이다. 타석에서 너클 포크는 철저하게 버리고, 싱커와 패스트볼만 집요하게 공략하는 전략.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보스턴의 타자들이 해내고 있다. 덕분에 경기는 갈수록 어렵게 흐르고 있고.

멘데스가 타임을 부르고 마운드로 올라왔다.

“괜찮아. 저놈들이 잘 친 건 어쩔 수 없어.”

“씁. 몰렸어?”

“아니야. 꽉 차게 잘 들어왔어. 보가츠가 앞발을 내려놓는 타이밍이 완벽하게 맞았을 뿐이야.”

“귀찮게 나오네. 너클 포크를 더 쓸까?”

“제구. 자신 있어?”

“…….”

너클 포크에 제구라는 단어가 어울리기는 한 걸까? 일단 회전이 멈추고 날아가기 시작하면 어디로 튈지 지혁도 모른다. 오랫동안 너클볼만 단련해 온 너클볼러들도 제구를 잡는데 어려움을 호소하는데. 지혁이 너클 포크로 안정된 제구를 계속 가져가는 건 최소한 지금 단계에서는 매우 힘든 일이다.

“하. 나는 내 투구대로 승부를 볼게. 방망이나 좀 쳐 줘.”

“그래. 어차피 답은 그것밖에 없어.”

알고 있으니 됐어. 멘데스는 하려던 말을 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지혁은 언제나 해답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정답만 선택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는 게 야구다. 너클 포크를 고집했더라면 오히려 경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지혁도 알고 있고, 멘데스도 알고 있다.

“자, 자! 이제 겨우 한 점이야! 빡세게 수비하고 따라가자고!”

멘데스가 홈플레이트 앞으로 두어 발 걸어 나와 수비수들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선수들이 목소리를 높여 호응하는 것을 들으며 지혁은 손에 로진을 듬뿍 묻혔다. 경기에 집중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마음 한 구석에 걸리는 것이 있다.

‘신의 유흥을 위한 경기인가. 후지 녀석이 하필이면 오늘 제대로 돌아온 것도 그렇고. 보스턴 놈들이 타석에서 너클 포크에는 손도 안 대는 것도 그렇고…….’

평소의 지혁이라면 야구의 흐름을 캐치해 낼 수 있었다. 공을 제대로 못 던져서 맞아 나가든, 아니면 타자들이 잘 쳐서 맞아 나가든. 맞아 나가는 건 어쩔 수 없는 투수의 숙명이니까 그냥 넘길 수 있다.

하지만 흐름 자체가 이상한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보스턴은 때맞춰 지혁의 맞춤형 공략법을 들고 나왔고, 후지는 때맞춰 팔이 회복되었다.

‘결국 신인가. 또 장난질을 했어.’

흐읍.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문제가 신이라면. 만약 신이 지혁에게 더 힘든 경기를 하게끔 만들고 있는 거라면.

‘이겨 내야지, 뭐.’

“으야차!”

지혁은 기합까지 넣어 패스트볼을 꽂았다.

1번 타자로 두 번째 타석에 선 베닌텐디도 카운트를 잡는 패스트볼이라는 걸 직감했는지 있는 힘껏 풀스윙을 돌렸다.

무릎 높이의 안쪽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파고들어가던 공이 배트 위쪽을 스치며 멘데스의 미트에 꽂힌다. 한쪽 무릎을 비스듬히 꿇은 채 미트를 대고 있던 멘데스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공을 받아 주었다.

멘데스는 신 따위를 모르지만. 지혁이 한층 단단한 각오를 다졌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았다. 오늘까지 던진 공 중 제일 베스트가 들어왔으니까. 가장 묵직하고, 가장 빠르고, 미트를 낀 왼손이 가장 얼얼했던 공이다.

투수가 이 정도로 기합을 올려 줬으면 포수가 받아 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좋아! 나-이스 볼!”

* * *

[7회말, 클리블랜드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보스턴은 후지를 계속 올렸습니다. 부상을 당하고 복귀한 첫 경기인데도 꽤 오래 마운드에 세워 두는군요.]

[투구 수로만 봤을 때는 아직 충분하죠. 6이닝을 72구로 막았으니까요.]

[이번 경기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96.7마일이라고 합니다. 가장 낮은 구속의 패스트볼이 94마일이었군요. 최고구속은 99마일입니다.]

[오늘 내용만 놓고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작년까지의 후지 미유타가 그대로 마운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돌아왔습니다. 스코어는 1대0. 앞서가는 보스턴. 클리블랜드는 홈에서 패배하며 시리즈를 시작하고 싶지는 않을 텐데, 의외의 변수에 꽁꽁 막혀 있네요. 3-4-5번으로 시작되는 이번 이닝에 어떻게든 경기를 뒤집고 싶겠죠? 3번 타자, 마이클 브랜틀리부터 시작합니다. 초구 스트라이크.]

좌타자인 브랜틀리에게 가장 먼 곳에 박히는 패스트볼. 후지의 집중력은 여전해 보였다. 예전과는 다르게 마운드에서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뭐랄까, 이전의 후지는 그 기세를 온몸으로 표출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마운드에서 보여 주는 태도나 자세는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 몰라도 확 바뀐 모습이다.

[3구, 밀어 때립니다. 깊숙한 코스, 백핸드로 건져내는 보가츠! 역동작에서 1루로 길게! 원바운드 송구가 되며 세이프가 선언되는군요. 브랜틀리의 전력 질주가 빛을 발했습니다.]

[타구가 워낙 깊었어요. 빗맞았는데 코스가 좋았네요.]

[3루수가 건져 내지 못하면 내야안타가 될 수밖에 없는 코스였네요. 어쨌든 모처럼 선두타자가 출루합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후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자를 벗어 땀을 닦는다. 어떤 타구가 나오든, 공이 어떤 쪽으로 움직이든 난간에 기대어 후지만 주목하던 지혁은 계속해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기분이다. 평소의 후지 같지 않다.

딱!

좋은 예감이 드는 타구음이다. 하지만 이내 한숨이 나왔다.

“아! 잘 때렸는데 이게 잡히나?”

4번, 엔카나시온. 3루 베이스 위를 타고 빠져나갈 것 같은 타구를 때려 냈다. 하지만 보스턴의 3루수 라파엘 데버스는 미끄러지며 그 빠른 타구에 글러브를 가져다댔고, 숏바운드로 빨려 든 공을 잡자마자 튕겨 일어나 1루로 긴 송구를 뿌렸다. 발이 느린 엔카나시온을 잡아내는 레이저 송구다.

1루에서 헬멧을 땅에 집어던져버린 엔카나시온이 허탈하게 더그아웃으로 돌아온다. 이제 주자는 원 아웃에 2루. 타석에는 5번, 페르난도 멘데스.

“헤이- 파트너! 한 번 도와줘, 좀!”

지혁은 양손으로 입에 깔때기를 만들어 크게 외쳤다. 멘데스는 두 손으로 단단히 부여잡은 방망이를 빙빙 돌리며 타석에 향할 뿐이다.

후지는 브랜틀리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 듯 힘찬 키킹을 보여 주더니 초구 패스트볼을 꽂아 넣는다.

초구, 98마일. 멘데스의 몸 쪽을 낮게 파고드는 절묘한 코스.

그리고 2구는 체인지업. 멘데스가 참아낸 게 용할 정도로 비슷한 코스에서 낮게 떨어졌다. 포수 스와이하트가 황급히 블로킹을 하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빠져나갔을 공이다.

후지의 3구는 멘데스가 파울로 걷어 냈고, 4구로 들어온 커브에 움찔거렸지만 간신히 참아내며 투 볼 투 스트라이크까지 끌고 나갔다.

‘스태미너가 좋아진 건가? 푹 쉬어서? 단순히? 하…… 후지야. 너 대체 무슨 짓을 했냐.’

땀을 많이 흘리고 있지만 폭발적인 구위는 여전히 살아 있다. 멘데스의 타이밍도 묘하게 계속 늦고 있고. 무엇보다 후지의 코스 공략이 절묘하다. 타격하기 힘든 코스를 계속해서 찌르고 있다. 마치 지혁의 투구처럼.

[5구. 멘데스와 후지의 대결.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를 둔 상황에서, 바깥쪽! 걷어 올립니다!]

투구가 배트에 맞는 순간, 클리블랜드의 모든 사람들이 벌떡 일어섰다.

후지는 대단한 투수다. 하지만 멘데스 역시 대단한 타자였다. 명백하게 노리고 있었다는 듯한 타격 자세. 바깥쪽 공을 결대로 밀어 때려 보내면서도 육중한 힘을 온전히 실은 타격.

공이 멀리멀리 떠 갔다. 펜스를 직격으로 때리는 순간이었다. 후지가 마운드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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