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69화 (170/204)

희생양

[멘데스의 적시 2루타! 후지 미유타에게 꽁꽁 막혀 있던 클리블랜드가 드디어 동점 주자를 불러들입니다. 주인공은 역시 페르난도 멘데스!]

[음, 지금…….]

[오, 마운드에 후지가 주저앉아 있습니다.]

후지의 잔뜩 일그러진 표정은 굉장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곧 보스턴의 트레이너들이 마운드로 뛰쳐나왔고, 스프레이로 된 파스를 잔뜩 뿌려 댔다.

하지만 그런 정도로 회복이 될 만한 것이었다면 후지가 마운드에 주저앉지도 않았을 터. 이내 교체 사인이 나왔다. 글러브를 벗은 후지는 오른쪽 팔꿈치를 부여잡고 있었다.

후우. 지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미 지혁의 머릿속에는 신과 후지 사이의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내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후지는 생각보다 이른 타이밍에 복귀한 게 분명했다.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후지는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이번 시즌이라…….’

후지가 약속받은 기간은 올해까지다.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어쨌든, 상황이 뒤바뀌었다. 후지가 쓰러지면서 그라운드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당황했다. 특히 보스턴이 그럴 것이다. 이제 막 불펜에 투수들이 들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트레이너들이 마운드 위에서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것도 불펜 투수들의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함이리라.

멘데스에게 2루타를 맞기 전까지만 해도 후지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고, 심지어 투구수도 적어서 완봉 페이스에 가까웠다. 클리블랜드는 후지가 보여 준 의외의 깜짝 투구에 꼼짝없이 끌려가고 있었고, 보스턴은 후지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멘데스는 긴 승부 끝에 후지의 노림수를 확실히 알았다는 듯한 타격으로 밀어 때려 펜스를 맞추었고 기어이 동점 주자를 불러들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히 경기가 동점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방금의 한 점은 모든 것이 뒤바뀌는 것이었다.

부상으로 인해 좋지 못한 투구를 할 거라고 예상되던 후지는 의외로 예년의 강력한 모습을 뽐냈고. 분위기가 좋지 않던 클리블랜드 입장에서는 날벼락을 맞은 입장이었으니까.

후지가 지금 같은 피칭을 계속 유지하면서 버틸 수 있었다면 경기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의 상태였을 것이다.

갑자기 불펜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 보스턴의 입장에서는 발등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과 다르지 않다.

“캘러웨이 코치, 불펜 체크해!”

“보스턴은 그동안 불펜 소모가 조금 있었습니다. 나올 수 있는 선수는 세 명입니다.”

프랑코나 감독.

선수들의, 코치들의 시선이 후지가 쓸쓸히 걸어 나가는 쪽으로 집중되어 있을 때, 오직 프랑코나만이 냉정하게 보스턴의 라인업이 적힌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반대쪽 더그아웃에서는 이미 투수코치들이 불펜에 전화를 거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누구야?”

“조 켈리. 맷 반스. 로비 스콧. 아마 지금 쓸 수 있는 자원은 이 셋 정도일 겁니다.”

“셋업으로 바로 갈 수도 있어. 애디슨 리드?”

“리드는 하루 쉬기는 했지만, 그제 경기에서 28구나 던졌습니다.”

“음…… 브랜든!”

프랑코나 감독은 몸을 앞으로 쭉 기울여 한쪽 구석에서 방망이를 쥐고 타격 자세를 취하고 있던 선수 한 명을 불렀다. 그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헬멧을 찾아 쓰기 시작했다.

“산타나는 어떻게 할까요?”

“만약 애디슨 리드가 올라온다면 산타나로 갈 거야. 하지만 교체가 이루어지면 무조건 브랜든으로 간다.”

“조 켈리나 맷 반스라도요?”

“그럴 리는 없어. 여기서 올라오면 무조건 스콧이야. 패럴 감독이 배짱이 있다면 리드를 올리겠지만.”

멘데스의 2루타 이후, 다음 타자는 1루수이자 팀의 거포 중 하나인 카를로스 산타나. 아주 보편적인 통계대로, 좌타자인 산타나는 좌투수의 공에 아주 약한 편이다. 게다가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좌완의 슬라이더에는 커다란 약점을 노출하고 있는 선수이기도 했다.

“한 점이야. 한 점만 들어오면 지킬 수 있어. 무조건 데리고 와야 해.”

지혁이 7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 냈고, 불펜에는 하루 쉰 앤드류 밀러와 사흘이나 쉰 코디 앨런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의 좋지 못했던 성적 때문에 핵심 불펜들은 힘을 상당히 축적한 덕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건 딱 한 점. 2루에 있는 주자 페르난도 멘데스를 홈으로 불러들이는 일이다.

“브랜든, 타이밍은 잘 맞춰 놨나?”

“문제없습니다.”

“좋아, 준비해 둬. 로비 스콧이 나온다면 자네에게 영웅이 될 기회가 갈 거야.”

“옛, 서.”

프랑코나의 선택을 받은 브랜든 가이어는 DFA 되었다가 6월이 되어 메이저리그에 재합류한 선수였다.

정말 독특한 선수다. 메이저리그 어느 팀에 가더라도 주전은 힘들다. 제4의 외야수 역할을 할 정도의 평범한 공격력과, 외야 전 포지션을 소화할 수는 있지만 특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수비력. 베이스런닝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주자로 들어가기는 애매한 주력. 이런 능력들을 가지고 있는 애매한 선수.

탬파베이 시절부터 지혁과 동료로 지내 왔던 가이어는 지혁보다 먼저 클리블랜드에 트레이드되어서도 그 애매한 포지션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브랜든, 하나 날려!”

“네 차례가 왔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은 가이어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낸다. 특수한 상황, 특수한 조건에서만.

“문, 선물 하나 준다.”

“응? 그래. 부탁해.”

가이어조차도, 스스로의 능력에 철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져니맨이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가 여전히 메이저리그에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그가 철저한 ‘좌완 킬러’이기 때문이다.

좌완 투수를 상대한 커리어 통산 타율이 .398. 이번 시즌의 좌완 상대 타율은, 표본이 적긴 하지만 무려 커리어 통산 타율을 상회하는 .414다.

게임 후반의 결정적인 순간, 상대팀에서 좌완 투수가 올라온다면 누구보다도 믿고 내보낼 수 있는 선수. 브랜든 가이어.

그가 준비하고 있는 것이 분명히 보였을 텐데도, 보스턴은 좌완 투수인 로비 스콧을 마운드에 올렸다.

“됐어. 패럴이 정신이 빠졌구만.”

프랑코나는 스콧의 연습 투구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는 가이어를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턱을 쓸어내렸다. 가이어의 타율이라면 산술적으로만 계산해도 열 번의 승부에서 네 번은 승리할 수 있다. 게다가 동점이 되었고 주자를 등 뒤에 둔 아주 부담스러운 상황에 허겁지겁 올라왔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3구! 밀어 때립니다! 가이어의 타구가 우중간으로! 우중간으로!]

가이어는 실패하지 않을 카드였다.

[갈라 놓습니다! 중견수 재키 브래들리 주니어를 스쳐 펜스까지 굴러갑니다! 2루 주자 멘데스는 여유 있게 홈으로- 역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역전에 성공합니다. 대타 가이어의 1타점 2루타!]

“오케이! 역시 브랜든!”

어수선했던 분위기를 완전히 정리하는 한 방.

가이어의 역전 적시타가 터지는 바로 그 순간부터 불펜에서 앤드류 밀러가 전력투구를 꽂아 넣기 시작했다. 보스턴은 이 분위기를 되돌릴 카드가 없어 보였다.

***

[스윙! 슬라이더를 따라가지도 못합니다.]

[두 타자 연속 삼진! 이번에는 몸 쪽에 붙는 패스트볼로 결정구를 던집니다.]

[K-K-K! 앤드류 밀러, 8회를 삼진 세 개로 지웠습니다!]

…….

[커브, 헛스윙! 낫아웃 상황에서 1루로 송구합니다. 코디 앨런이 한 점 차 세이브를 지켜 내며 클리블랜드의 연패를 끊었습니다. 보스턴은 돌아온 후지 미유타가 7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습니다만, 갑자기 부상으로 쓰러지면서 이기고 있던 경기를 내줘 버렸군요.]

[보스턴에게 오늘 경기는 단순한 1패가 아니게 됐네요. 경기를 내준 흐름이 아주 좋지 않았어요. 후지는 다시 DL에 올라갈 것으로 보이고요. 프라이스가 장기 DL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투수진에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클리블랜드는 어떨까요?]

[클리블랜드 입장에서는 아주 소중한 1승이라고 할 수 있죠. 7월 들어 좋지 않던 분위기였는데, 적절한 시점에 굉장한 역전승으로 반등에 성공했습니다. 물론 앞으로의 경기가 중요하겠습니다마는 클리블랜드 정도 되는 팀이 지금의 이 상승기류에 탑승하지 못할 것 같지는 않네요. 내일은 또 클루버가 등판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보스턴은 드류 포머란츠를 예고했군요. 내일, 2차전. 코리 클루버와 드류 포머란츠의 대결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봐요, 신 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흐흐, 자네. 오늘 투구했는데 피곤하지도 않은가?”

“빨리 답 듣고 잘 거니까 피곤하게 굴지 마세요.”

“흐흐흐.”

후지는 여전히 연락이 되지 않는다. 패트릭은 후지와 함께 병원에 가기 위해 보스턴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어차피 이 건에 있어서는 패트릭조차도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뭔가를 했다고 확신하는가?”

“당연하죠. 그게 아니면 구속이 이렇게 나올 리가 없죠. 데드암이라면서요?”

“흠. 누가 그러던가? 후지가?”

“……아뇨. 그런데 누가 봐도 딱 데드암이었잖아요.”

“재밌구만, 재밌어. 왜 확인하지도 않은 걸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럼 데드암이 아니었다는 겁니까?”

신은 손에 쥔 야구공을 빙글빙글 돌렸다. 실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팽팽 돌아가는 공이 어지러웠다.

“후지는 어깨에 부상을 안고 있네. 단순한 데드암이 아니야. 그리고 작년 시즌이 끝난 이후에는 이미 꽤 심각한 상태였네.”

“부상을 달고 있는데 보스턴이 던지게 했다구요?”

“그러니 경기에 나온 게 아니겠는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프다는 걸 동료 선수들이 몰라요? 보스턴은 선수 노조도 꽤 센 구단인데.”

“동료들은 단순히 데드암이라고 알고 있겠지.”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구단 담당 병원도 있고, 담당 주치의도 구단 사람이……고…….”

순간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패트릭 에이버리. 패트릭이라면 구단이 모르게, 혹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천재 에이전트다. 게다가, 데이브 돔브로스키라는 보스턴의 단장은 이미 패트릭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패트릭입니까?”

“그건 내가 말해 줄 수 없지. 난 자네와 후지에 관한 일들만 얘기해 줄 수 있네.”

“아, 하느님. 정신이 하나도 없네.”

후지는 패트릭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아마 그게 신이 개입했다거나 하는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닐 테지만, 자신이 올해까지만 야구를 하고 그만둬야만 하는 사정을 대충 흘렸을 것이다.

패트릭이 1년 내내 보스턴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후지가 무리를 하면서까지 마운드에 서는 것. 또 그것을 보스턴이 용인하고 있는 것. 이 과정 사이에 패트릭이라는 조각이 없을 리가 없다.

후지는 아프다. 아픈 것을 참고 던지고 있는 중이다. 올해가 야구를 할 수 있는 마지막 해이기 때문일 것이다.

“멍청한 새끼.”

신과의 계약 자체가 무리한 것이었다. 스스로를 계속해서 옥죌 수밖에 없는 계약. 후지는 신을 악마라고 부르곤 했다. 눈앞에서 야구공을 빙글빙글 돌리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저놈이 이제는 지혁에게도 악마로 보인다.

“……걔를 안 아프게 해 줄 수는 없습니까? 어차피 올해가 마지막이라면서요.”

“이봐, 문. 그 녀석은 평생 메이저리그, 아니, 미국 땅에는 올 수도 없었을 녀석이야. 애초에 그릇이 안 되었던 녀석이라고. 그저 자네가 보낸 휴가 기간 동안 우연히 나와 만났을 뿐이지. 본인의 깜냥에 맞지 않는 곳에서, 가장 위험 부담이 큰 린스컴의 폼으로 2년간 압도적인 투구를 했으면 됐지 않은가? 내가 왜 녀석의 뒤를 더 봐줘야 하는 거지?”

“당신은 그냥 심심풀이를 위해 후지를 개입시킨 거잖아요.”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난 후지에게 그렇게 큰 관심이 있지는 않아.”

지혁은 씁쓸하게 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후지는 아직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프로 경험이 많지도 않고, 미성숙하고, 결정적으로 지혁처럼 전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신이라는 존재가 후지에게 다가간 이후의 삶은 혼란 그 자체였을 테지.

“왜 하필 후지였습니까?”

“좋은 질문이군. 후지는 내가 봐 온 모든 프로선수들 중에서 가장 극적이고 도박적인 내기를 할 수 있는 녀석이었거든. 흐흐흐, 그 누구도! 야구를 단 3년만 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계약을 할 수는 없었을 게야. 이건 가장 위험한 도박이지. 그래서 가장 짜릿한 도박이기도 하고.”

“어리고 철없는 녀석에게 걷잡을 수 없는 부담을 주셨군요. 그래서.”

“인간이 절박할 때 어떤 힘을 내는지, 궁금하지 않았나? 오늘의 후지를 봐. 어깨가 아픈데도 98마일을 던졌지 않아? 흐흐흐, 난 끝을 보고 싶었던 것뿐이네.”

“후지를 가지고 노셨어요. 이렇게 될 걸 아시면서도.”

“흐음? 그건 이상한 말이군. 자네도 마찬가지야. 자네라고 다를 게 있는가? 자네는 노력했지만 그 노력의 대가를 받지 못했기에 내 선택을 받은 것이네. 후지는 자네보다도 훨씬 못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세계의 정상에 서고 싶다는 강한 야망이 있었기에 내 선택을 받은 것이고.”

신은 야구공을 침대 위로 휙 던져 버렸다.

“자네에게도 끝은 오게 되어 있어. 난 자네의 노력에 약간의 재능을 덧대 주었네. 높이 올라가 보라고. 그리고 후지에게도 정확히 그렇게 했지. 두 사람 모두 높이 올라갔어. 다만 후지는 먼저 내려오고 있는 것이지.”

그리곤 오싹하게 말했다.

“자네도 내려올 날이 있을 걸세. 자네의 끝이 후지와 다를 거라고 생각하나? 메이저리그를, 야구장을 떠나야 할 때. 자네는 어떤 모습일 것 같나?”

클클클.

“후지를 보고 배우게. 그 아이는 자네의 롤 모델이야. 나쁘게 말하면 희생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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