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블랜드에 터진 폭탄
한동안 머리가 어지러웠다. 신의 말들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운 말이기도 했고, 무서울 정도로 진실에 가까운 말이기도 했다.
후지는 인간의 욕심을 있는 힘껏 부렸다. 실제로 그 선택이 아니었으면 미국을 밟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니, 일본에서조차 금방 사라지고 마는 투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원래의 재능만 두고 보자면 위력적인 커브 하나를 던질 줄 안다는 것 빼고는 지혁보다 택도 없이 모자란 선수였으니까.
그러니 나머지 인생을 전부 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게 작년까지의 괴물, 후지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터.
2년 연속 사이 영 상을 수상하며 리그를 압도적으로 지배했었던 팀 린스컴의 재능을 받은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렇게 단기간에 압도적인 포스를 뽐내려면 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후지와 비슷한 언더사이즈 투수이기도 했고.
하지만 린스컴의 폼은 린스컴 자신조차도 진흙탕으로 끌고 들어간 폼이었다. 후지도 그 폼에서 오는 부상에서 피해 가지 못했다.
예고되었던 것처럼.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성공한 거라고 볼 수 있을까……?”
경기의 피로 때문에 일찍 잠들려 했건만, 클리블랜드의 새벽이 밝아 올 때까지 지혁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단순히 후지의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혁의 미래에도 닥칠 일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신의 말은 옳다. 후지는 앞으로 지혁의 미래를 보여 주고 있는 모델일지도 모른다.
고민은 그래서 깊었다. 지혁이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케이스니까. 후지는.
***
“좋아! 넘어가라!”
지혁의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야구장의 분위기는 깔끔하다. 보다 더 확실해졌다. 두 팀의 분위기가 180도 뒤바뀌었다. 클리블랜드는 파도에 올라탔고, 보스턴은 보드에서 미끄러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아찔하게 떠 가던 카를로스 산타나의 타구가 프로그레시브 필드의 중월 담장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간다.
오늘은 중견수로 나선 보스턴의 핵심 선수, 무키 베츠가 담장에 매달려 가며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다.
좌완 포머란츠를 상대로 터뜨린 선제 솔로 홈런. 어제 좌완 투수인 로비 스콧이 나왔을 때 ‘좌완 킬러’ 브랜든 가이어로 교체되었던 것에 대한 무언의 항의라도 되는 듯하다.
프랑코나 감독의 입꼬리에도 미세한 미소가 걸렸다.
“후아! 후아! 예아!”
다이아몬드를 한 바퀴 돌고는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산타나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선수들과 과격한 하이파이브를 해 댔다.
지혁도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산타나의 커다란 엉덩이를 짝 내리쳐 주었다.
산타나는 만족스러운 듯이 헬멧을 벗으며 여러 타자들에게 포머란츠의 공 컨디션이 어떤지를 설명하기에 바쁘다.
반면 보스턴 쪽은 침울하다. 야수들이 수비할 때 어떤 자세로 임하고 있는지를 보면, 그 팀의 분위기를 극단적으로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프로 선수들이라고 해서 안 좋은 상황에서도 언제나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니까. 지금처럼.
“뛰어! 뛰어! 빠졌어! 뛰어!”
평범한 유격수 앞 땅볼로 2회가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젠더 보가츠의 포구 실책이 나오며 주자가 또 살아 나갔다.
홈런을 맞은 이후 실책까지 떠안은 투수의 멘탈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고, 포머란츠는 결국 2회를 채우지 못하고 내려가야 할 정도로 난타 당했다. 2회에만 대거 7득점.
“제대로 태워 주는구만. 상승기류.”
“고맙다고 인사나 해야겠어.”
“그런 말 마. 보스턴 녀석들이 얼마나 지독한데. 나중에 저러고 올라와서 발목 잡는다. 작년 기억 안 나?”
“아우, 징글징글했지.”
선수들이 다시 먼 미래, 그러니까 진짜 승부를 봐야 할 가을의 야구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좋은 신호라 할 수 있었다. 오늘의 플레이에 급급해지는 것은 클리블랜드 입장에서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중부지구 1위는 사실상 확정을 지어 놨다. 7월이지만, 벌써부터 가을을 바라보고 있는 게 이들이다.
따아악-!
호쾌하게 날아가는 저 타구처럼. 저주를 때려눕히는 게 목표니까.
*
“오케이- 다들 수고했다! 내일은 휴식일이니까 푹 쉬도록! 올스타 브레이크에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 기어를 끌어올리자고. 다들 고생했어!”
지혁이 튼 연승 물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연승 퍼레이드가 이어지는 중에는 코리 클루버가 두 게임 연속 완투승을 기록한 적도 있었고, 조쉬 톰린이 지난 경기에서의 부진을 씻고 7이닝 노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카라스코와 살라자르, 두 중남미 듀오는 모두 10탈삼진 이상의 경기를 펼치며 압도적인 파워를 자랑했다.
타자들의 타격 사이클도 전반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오히려 요새 들어 살짝 주춤한 멘데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의 진가를 어김없이 뽐내는 중이다.
마이클 브랜틀리의 타율이 .320을 돌파했고, 산타나는 네 경기 연속 홈런을 갈겼다.
린도어와 짐머의 테이블 세터도 열 번 중에 여섯 번은 출루하고 있으니. 다른 팀들은 클리블랜드를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어 가고 있다.
그 결과로.
“오늘로 11연승인가?”
“예쓰!”
“근데 왜 이렇게 기자들이 없어?”
“……글쎄?”
“경기 전까지만 해도 이번 시즌 최다연승 도전이라고, 그렇게 시끌시끌했던 것 같은데.”
11연승째. 그런데 라커룸이 너무 조용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까지 조용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야구 판에서 몇 년씩 굴러먹은 오래된 기자들만이 남아 조용조용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으레 있었던 스포츠 채널의 특파원들이나 여성 리포터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 있어요, 켄?”
“아, 클리블랜드에 또 한 번 폭탄이 터졌네요. 하하.”
“뭐라고요? 테러? 테러예요?”
막 인터뷰를 진행하려던 오늘의 선발투수 카를로스 카라스코가 호들갑을 떨었다. 클리블랜드 지역지의 기자인 켄 보치는 한손으로 핸드폰을 확인하며 점점 좋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아니고. 터질 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또 터지지 않았으면 했던 폭탄이 터졌어요. 뭐, 야구 선수인 당신들에게는 크게 감흥이 없는 일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클리블랜드 사람들에게는…… 이건 원자폭탄이나 다름없어요.”
“대체 무슨 소리죠?”
폭탄이니, 테러니 하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통에 라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켄에게 집중되었다.
라커에 같이 있는 기자들도 허탈해하는 쓴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다. 마치 초대형 발표를 할 기회를 켄에게 넘긴다는 듯한 분위기이기도 했고, 누군가는 입에 담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도 했다.
“르브론 제임스가 이적을 하겠다네요.”
켄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는 순간, 라커룸이 일제히 고요해졌다.
주된 반응은 두 개였다. 하나는 르브론 제임스가 이적한 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어리둥절한 반응. 주로 중남미 계열 선수들과 팀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되는 선수들이다. 대표적으로 에드윈 엔카나시온 같은 선수들. 그는 정말로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옆에 있던 기자에게 “그게 왜?”라고 묻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대표적으로 제이슨 킵니스가 보여 준 것처럼, 극렬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었다.
꽈아앙!
킵니스의 라커룸에 그의 스파이크(주 ; 야구용 신발)가 박혔다. 나무로 된 부분에 스파이크 밑바닥의 징이 강하게 틀어박혔다. 어찌나 심하게 집어 던졌던지.
“뭐라구요? 다시 말해 볼래요, 켄?”
“워, 제이슨. 내가 이적 시키려는 게 아니잖아요. 그가. 이적을. 하겠대요.”
“Shit! Fucking asshole!”
킵니스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욕설을 내뱉자 라커룸이 신기할 정도로 부산스러워졌다.
어리둥절해 하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다들 르브론 제임스의 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11연승 따위는 머리에서 잊은 것처럼 보였다.
“……헤이, 문. 이게 왜 문제인지 알아?”
“음…… 대충. 대충은 알겠어.”
“켄의 말이 정답이야. 터지지 말았어야 할 폭탄이 터졌어.”
멘데스는 심지어 자신조차 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리곤 아직도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선수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러 가 버렸다.
농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멘데스조차도 사태의 심각성을 안다는 것. 이건 단순히 농구와 야구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르브론 제임스. 미국 프로농구인 NBA의 아이콘이자, 영웅이자, 현재진행형 전설을 쓰고 있는 사나이. 단순히 NBA를 넘어 모든 스포츠계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강렬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 농구에 관심이 쥐똥만큼도 없더라도 르브론 제임스가 누구인지는 알 것이다.
아마추어 때부터 전미의 주목을 받았던 그는 2003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입단했다. 오하이오 주 출신인 르브론은 ‘패배자들의 도시’였던 클리블랜드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고 입단 첫 해부터 수많은 기록을 써내려 가며 클리블랜드의 왕에 취임했다. 2010년까지는.
2010년 여름. 친구를 따라 명문 학교 진학을 포기했던 의리남이자, 불우하기 그지없었던 어린 생활을 견뎌 낸 영웅이자 효자였고,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보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던 지역의 히어로였던 그는. 클리블랜드를 배신했다.
클리블랜드는 르브론을 지역의 프랜차이즈이자 상징으로 생각하고 대우했었고, 실제로 FA가 된 르브론을 잡기 위해 수많은 지역민들과 정치인까지 합심해 UCC를 만드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러나 그는 클리블랜드를 떠났다. ‘The decision’이라는 특별 생방송을 통해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하겠다고 전국에 공표를 해 버리면서, 온 클리블랜드가 분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유니폼을 찢고 불태우는 사람이 수백 명을 넘어 수천에 이르렀다. ‘패배자들의 도시’를 구원할 영웅인줄 알았던 지역의 대표가 떠난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거기에 미성숙한 쇼를 덧붙였으니 폭발력은 훨씬 더 심했고.
최악의 배신자이자 영원한 원수가 되어 버렸던 르브론은 2014년 다시 변덕을 부렸다. 클리블랜드의 모든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낸 고향 팀으로의 복귀.
-I’m coming home.
집으로 돌아가는 성명서를 낸 뒤 르브론 제임스는 클리블랜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2016년. 수십 년 동안 모든 프로구단이 단 하나의 트로피도 들지 못했던 클리블랜드에. 기어이 NBA 파이널시리즈 트로피를 선사했다.
눈물을 참지 못하면서 카메라에 대고 외쳤던 르브론의 멘트는 모든 클리블랜드 시민들의 눈에서도 눈물을 쏟게끔 만들었다.
-Cleveland! This is for you!
얼마나 완벽한 스토리인가. 아마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드라마틱한 스토리일 것이다.
르브론 제임스라는 선수의 스타성, 상징성, 인지도와 곁들여진 이 스토리는 스포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미담으로 남았다.
“아니지. 남았었지. 어제까지는.”
그런 그가 또 다시 클리블랜드를 떠나겠다는 선언을 한 것. 킵니스는 입술을 꽉 깨물며 배신감을 나타냈다. 심지어는 같은 프로 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선수들도 이럴 정도인데, 클리블랜드의 스포츠 팬들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한 배신감이 찾아들 것이다.
켄의 말이 맞았다.
폭탄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