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슈퍼스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임팩트가 큰 것 같네요.”
모처럼의 휴식일. 지혁은 클리블랜드 시내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시티 센터의 꼭대기 층 전망대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클리블랜드는 그냥 평소의 상태 같았지만, 저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심지어 거리 곳곳의 쓰레기통에서 내다 버려진 르브론 제임스의 유니폼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모처럼의 휴식일에 지혁을 이곳으로 불러낸 크리스 안토네티가 커피를 홀짝 마시며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르브론은 단순한 농구 선수가 아니니까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던 선수죠.”
“제가 농구 쪽 비즈니스는 잘 몰라서 그러는데, 야구에서는 대형 스타를 팔아서 유망주를 받아 오고 리빌딩을 하지 않습니까? 농구 쪽은 그게 안 되는 모양이죠?”
“뭐, 되기야 하겠죠. 언젠가는. 하지만 트레이드가 아닌 FA를 통한 이적이고…… 뭐, 이것저것이 많이 달라서 쉽게 이해시켜 드리기가 힘들군요.”
잠시 할 말을 찾던 안토네티는 짧은 신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음. 캐벌리어스는 순전히 르브론을 위한 구단이었습니다. 르브론이 선수 영입에도 입김을 넣고, 심지어는 감독 선임에도 비슷했고. 훈련에서 코트를 장악하는 것도 실전에서처럼 르브론이었어요. 오직 르브론의, 르브론에 의한, 르브론을 위한. 그런 팀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러니 그 역할을 전부 다 해 줄 수 있는 대체 선수를 구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게 용납이 되는 겁니까? 월권행위가 자연스럽다는 게? 그러니까 제 말은, 팬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구단 관계자나 코칭스태프 사이에서도 불만이 없었을까요?”
안토네티는 무심한 듯 시크하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르브론이면 그래도 됩니다. 그 정도를 해도 되는 유일한 선수가 르브론이니까요. 선수들도, 코치들도, 관계자들도.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죠. 그리고 팬들은 오히려 그걸 더 원해요. 철저하게 르브론을 위한 팀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르브론은 우승 트로피를 가지고 올 거라는 절대적인 신뢰가 있습니다.”
“흐으음.”
지혁은 길게 소리를 냈다. 같은 운동선수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저런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먼저 강렬하게 다가온다.
르브론이라는 선수 단 한 명에게 쏟아지는 엄청난 신뢰는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경지에 있으니까. 단순히 입김을 넣어 동료들을 선택하는 것을 넘어 감독이나 코치까지 고르고, 모든 걸 좌우한다는 건. 지혁이 상상도 해 보지 못했던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건 또 지혁이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야구는 팀 게임이다. 농구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농구가 팀 게임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지만.
“동료들의 불만은 없었습니까?”
“있었죠. 그런 선수들은 팀을 떠났습니다. 어쩔 수 없잖아요. 르브론의 팀이었으니까.”
“쉽지 않은 일이네요. 절대적인 ‘온리 원’이 된다는 건요.”
“당연합니다. 농구에서는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의 비즈니스에서는 이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다른 얘기를 해 보죠.”
“아. 본론인가요?”
“네. 즐거운 얘기를 해 봅시다.”
안토네티는 장난스럽게 포크로 접시를 툭 치며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했다.
“올스타 후보에 뽑히지 못한 것 알고 계시죠?”
“네. 한 달이나 쉬었으니까요. 당연하죠.”
“나는, 아, 실수. 우리 구단은 당신을 올스타에 보낼 겁니다.”
“……네? 후보에 없는데?”
“그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팬 투표로만 올스타를 뽑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감독님이 꿈도 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쉬어야 한다고.”
“물론 프랑코나 감독은 당신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부상도 있었고 쉬는 게 좋으니까. 나도 그 생각에 동의했었어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르브론이 일을 이렇게 만드는 바람에, 우리는 다른 전략을 취할 필요가 있어졌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안토네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르브론의 FA 선언은 농구 팬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고, 클리블랜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배신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혁과는 연관이 없는 일이었다.
대체 메이저리그 올스타전과 르브론의 이적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이번 르브론 사건은 단순한 농구 선수의 이적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사실, 클리블랜드의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 말이죠.”
안토네티는 입에서 침을 튀겨 가며 쉬지 않고 말했다.
“전미에 내놓을 수 있는, 클리블랜드만의 슈퍼스타가 필요합니다. 상징. 상징이요. 시카고를 떠올리세요. 마이클 조던을 언급하지 않는 사람이 없겠죠. LA? 클레이튼 커쇼, 코비 브라이언트. 샌프란시스코? 제리 라이스(주 ; NFL 역사상 최고의 와이드 리시버). 뉴욕은 어떻습니까? 뉴욕의 황태자라는 데릭 지터가 있잖아요. 클리블랜드는 바로 어제까지 르브론 제임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가 갑자기 텅 비어 버렸고 말이죠.”
“그러니까…….”
“네. 그 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멍했다. 르브론의 자리를 채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저는 올해에 클리블랜드에 처음 왔습니다, 단장님.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네요. 클리블랜드만의 프랜차이즈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글쎄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이클 조던조차도 시카고 태생이 아니잖아요. 물론 고향이 엮이게 되면 그건 플러스 효과가 있겠지만, 당신처럼 완전한 이방인이라면 얘기가 또 다릅니다.”
“무슨 뜻이죠?”
“당신은 클리블랜드에서 제일 유명한 외국인이니까요. 아시아에서 온 메시아가 클리블랜드의 상징이 되는 거죠. 70년의 저주를 깨면서.”
안토네티는 신이 난 듯 텐션을 끌어올린다. 지혁은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아직까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하하, 이런. 아직 내 말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당신의 위상을 끌어올릴 겁니다. 지금보다 더. 훨씬 더! ‘진짜 슈퍼스타’를 만들 거예요. 말하자면 NBA의 세계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가지고 있는 위상처럼. 지금의 MLB에서 브라이스 하퍼가 갖고 있는 위상처럼 말입니다.”
“야구를 지금보다 더 잘하라는…… 말씀이신가요?”
“하하, 아뇨.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다면 물론 더 좋겠지만. 당신을 잘 포장할 거라는 얘기입니다. 앞으로는 특히 더요. 그러니 이번에도 올스타 게임에 보내려는 겁니다. 앞으로 당신에게 이미지를 씌울 겁니다. 프레임을 만들 거고. 당신을 위한 행사, 당신을 위한 쇼, 당신을 위한 건 무엇이든 할 겁니다.”
지혁은 살짝 몸을 기울여 머리를 쿡 찔렀다. 스스로의 목표는 월드시리즈 우승, 그것이면 족했다. 두 번째 생을 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도 그것이었다. 하지만 안토네티는 그것을 뛰어넘으려 하고 있었다. 야구계의 르브론 제임스가 된다고?
“……왜 저죠? 클리블랜드에는 좋은 선수들이 많잖아요. 멘데스도 있고, 브랜틀리도 있고, 클루버도 있고.”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핵심적인 질문이네요. 자, 수많은 선수들 중에 왜 당신이냐면 말이죠.”
잠깐 숨을 멈춘 그 시간이, 왜인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당신은 르브론 제임스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미국에 넘어왔을 때. 타고난 재능? 축복받은 육체? 압도적인 실력? 주위의 기대? 아무것도 없었어요. 르브론은 하늘이 내린 사람입니다. 모두가 다 르브론에게 기대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곳까지 왔죠. 단 한 번도 전국 유망주 랭킹에서 100위권 안에 들어온 적이 없고, 어느 날을 계기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진보를 계속해 왔죠. 아까도 봐요. 르브론이 멋대로 팀을 좌우했다고 하니까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나요?”
“어떻게 아셨죠?”
“내가 눈앞의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단장 역할을 하고 있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안토네티가 약간 오해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큰 틀에서의 이야기는 맞다. 지혁의 사정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정확한 때에 클리블랜드에 도착했어요. 르브론과 바톤 터치를 하기에 아주 좋을 때에. 클리블랜드에 갑자기 나타나서 70년의 저주까지 깰 수 있다면. 당신은 진짜 슈퍼스타가 될 겁니다. 이 가난하고 늙은 도시가 배출한 진짜 중의 진짜 슈퍼스타 말이에요. 모든 스토리가 맞아떨어지고 있죠. 주인공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안토네티의 일장 연설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연설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최고의 서포트를 할 거니까.”
안토네티가 지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여전히 머릿속이 하얗게 느껴졌다. 아마 하루 종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이건 확실하다.
***
-2018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최종 명단 발표. CLE 문지혁, 2년 연속 승선.
-베이스볼코리아 조예은 기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에이스 문지혁(27)이 2년 연속 올스타전에 출장한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2018년 워싱턴의 내셔널스 파크에서 열리는 2018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의 최종 명단을 15일 오후 발표했다.
팬 투표 명단에 한 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한국인 메이저리거들이었지만, 클리블랜드의 문지혁은 선수 추천 명단에 들어 올스타전에 출장하게 되었다. 작년 마이애미에서 열렸던 올스타전에 출장해 등판한 적이 있었던 문지혁은 2년 연속 출장. 한편 마찬가지로 선수 추천 명단에 들었던 LA 다저스의 류희주는 아쉽게 선발되지 못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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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 ‘한국인의 날’ 행사 개최.
-베이스볼코리아 조예은 기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7월 19일을 맞아 ‘한국인의 날’ 행사를 개최한다고 공지했다. 이날 선발 등판이 예정되어 있는 문지혁(27)은 경기에 앞서 클리블랜드의 재미 교포들을 포함해 한국인 여행객들을 초청한 대형 사인회를 열 계획이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크리스 안토네티 단장은 “문지혁은 클리블랜드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한국인”이라며, “한국 팬들의 놀라운 성원과 관심 덕에 문이 환상적인 활약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의 시구로는 헐리우드에 진출한 배우 김세원 씨가 내정되었다.
……하략…….
***
“헤이- 아미고! 컨디션은…… 워, 잠깐. 이분은 누구……?”
“컨디션은 좋아. 아침에 살짝 뻐근하긴 했는데 괜찮아졌어. 그리고 이 사람은 한국에서 온 아나운서야.”
“한국에서?”
“다큐멘터리.”
“또? 얼마 전에 CBS에서도 찍어갔잖아.”
“그건 미국용이고, 이건 한국용이래. 신경 쓰지 마. 준비는 다했어? 나 불펜으로 갈 거야. 지금.”
“하하, 안-뇽-하세요. 아이 엠 페르난도 멘데스. 헬로, 코리아!”
안토네티가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지혁의 곁에는 언제나 카메라가 따라다녔다. 안토네티는 지혁과 미팅을 가졌던 그날 이후 곧장 미국의 CBS에 연락해서 다큐멘터리 쇼 하나를 따냈다. 비하인드 컷 같은 개념이었다.
지혁이 등판하지 않는 날의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며 눈을 찡긋거리던 안토네티의 모습이 생생하다.
미국 방송국이 한차례 다녀간 이후에는 한국 방송국 차례였다. 탬파베이 시절 짧게나마 비슷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주 작정을 한 듯 열흘 동안이나 지혁을 따라다닐 예정이란다.
“가자고. 오늘 너클 포크가 손에 잘 걸리던데. 빨리 던져서 확인을 해야겠으니까.”
“후, 레이디.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야! 시끄러워!”
물론, 귀찮아지기는 했다. 한국에서 온 여자 아나운서와 카메라맨이 계속해서 지혁을 졸졸 따라다니니까, 선수들의 관심도 자연히 따라다닌다.
멘데스나 린도어처럼 철없어 보이는 녀석들은 순식간에 짧은 인터뷰를 두세 개씩 하기도 했다. 카메라가 들어올 수 없는 구역에서 지혁을 조용히 불러낸 프랑코나도 우려하는 듯 지적했다.
“야구 외의 것들에 너무 관심을 쏟지 않았으면 하는데.”
“저는 안 쏟고 있습니다. 이게…… 그러니까. 위쪽에서 내려온 지시…… 라서요. 아시죠?”
“그래. 알지. 크리스는 야심이 있는 친구야. 아주 큰 건 하나를 만들어 내고 싶어 하지. 어쨌든 우린 프로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야구에는 지장이 가서는 안 돼.”
“물론입니다. 팀에 피해를 주지는 않을 겁니다.”
“믿어 보지.”
새로운 일들의 연속이다. 반 정도는 귀찮은 일들의 연속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토네티는 지금의 이 ‘스타 만들기 프로젝트’가 정상 작동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지혁은 일단 시키는 대로 해 보기로 했다. 만약 계획이 성공해서 진짜로 야구계의 르브론 같은 위상을 지닐 수 있게 된다면, 그건 확실히 나쁜 딜은 아니니까.
어쨌든 지혁에게, 클리블랜드에게 중요한 건 야구를 잘 하는 일이다. 약간의 귀찮음과 질척거리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도 야구를 잘하는 게 슈퍼스타의 숙명이기도 하다.
수많은 한국 방송국의 카메라와 마이크와 인터뷰를 거쳐서, 수많은 한국 팬들의 싸인 요청에 일일이 응한 뒤에, 마운드에 올랐다.
상대도 환상적이었다. 커리어 내내 최고의 상대 전적을 기록한 토론토 블루제이스.
“아, 마운드에 올라오니까 생각이 싹 달아나네. 여기가 제일 편해, 역시.”
1회초. 지혁은 케빈 필라-트로이 툴로위츠키-호세 바티스타를 세 타자 연속 2루 땅볼로 처리하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