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 better than star
[스윙! 첫 번째 스트라이크 카운트를 잡아냅니다.]
[오, 갓. 오늘의 문은 칠 수 없는 공을 던지고 있어요! 방금의 이 싱커는 이 자리에 배리 본즈가 와 있어도 제대로 타격하지 못했을 겁니다.]
[조쉬 도날드슨이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오늘 던진 공 중에서 가장 무브먼트가 좋은 공이었던 것 같네요.]
던질수록 손가락 끝이 더 예민해진다. 가끔씩은 공을 던질 때 손끝에 긁힌 솔기의 개수까지 생생하게 알 것 같은 느낌도 들 정도다.
모든 것이 정상 속도보다 현저하게 느려 보인다. 타자의 배트 스윙도, 멘데스의 움직임도, 심판의 스트라이크 콜도, 관중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는 모습까지, 모두 다.
타자의 반응이 느려 보이게 되면서 타자가 무엇을 노리고 타석에 들어서는지도 보다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 덧붙이자면, 모든 스포츠 선수들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듯한 묘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야구처럼 생각을 많이 해야 하고 또 그럴 시간도 충분한 스포츠에서는 주로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감각이 발달하곤 한다. 특히 투수들에게.
오늘의 지혁이 그랬다. 방금 도날드슨은 아주 미세하게 앞발을 플레이트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무게중심도 미묘하게 오른쪽 허벅지에 더 실었다. 바깥쪽 싱커를 노리고 있다는 증거물이었다.
지혁은 그것을 읽어냈고, 멘데스가 바깥쪽을 요구하는 것에 고개를 젓고 몸 쪽으로 찔러 넣었다. 바깥을 노리던 타자가 몸 쪽에 대처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어정쩡한 스윙은 필연이었다.
이닝을 거듭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건 컨디션이 아주 좋다는 증거다.
가끔씩 이런 날이 있다. 그야말로 절정에 달한 날. 프로라면 누구나 이런 날이 한 번쯤은 있다. 인생에 한두 번 오는, ‘그날’이다.
불쌍하지. 왜 하필 토론토는 지혁이 이렇게 컨디션이 좋은 날에만 걸리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제구는 털끝만큼도 흔들리지 않았다. 방금 전 공에 이어서 이번에는 일부러 존 한복판에 들어가다가 떨어지는 커브.
도날드슨의 무릎 높이에서 발등까지 떨어진 공은 어설픈 스윙을 낸 방망이 밑둥을 때렸다. 리그에서 가장 강한 타구를 때리는 선수들 중 한 명인 도날드슨의 타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없는 타구가 그대로 지혁에게 되돌아왔다.
여유 있게 주워 들어 1루로 송구. 깔끔한 아웃카운트 적립. 이게 컨디션이 절정에 있는 날 지혁이 보여 주는 투구 패턴이다.
“하하하! 또 힘없는 타구가 나오는군. 저것 봐!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잖아.”
VIP 룸의 안토네티는 5회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다섯 잔째 칵테일을 들이켜고 있었다. 3회초 두 번째 타자인 토론토의 8번 롭 레프스나이더부터 시작된 땅볼 퍼레이드는 5회초 첫 타자인 조쉬 도날드슨까지 이어지고 있다.
무려 여섯 타자 연속 땅볼. 오늘 경기에서 지금까지 잡아낸 아웃카운트 13개 중 10개가 땅볼이다. 나머지 세 개는 삼진.
“이게 바로 내가 저 녀석을 선택한 이유라고! 하하하! 자격이 있어, 정말로 자격이 충분하단 말이야!”
“단장님, 좀 취하셨습니다. 술은 그만 준비하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항상 안토네티를 옆에서 보좌하는 비서인 네디 콜린스가 말려 봤지만, 이미 얼굴이 붉게 상기된 안토네티는 멈출 줄 모르고 단번에 칵테일을 들이켰다.
새빨갛게 빛나면서도 또 투명한 색깔의 칵테일이 순식간에 안토네티의 입속으로 사라진다.
“이봐, 네디. 그동안 캡스(주 ; cavs, 농구단인 캐벌리어스의 약칭) 녀석들한테 은근히 괄시당하고 있었던 거 알아. 심지어 내 직속 비서이자 우리 구단에서 가장 높은 수석비서인데도 불구하고 말야. 그 새끼들 어깨에 힘 잔뜩 주고 다녔잖아? 스웩이니 나발이니 하면서. 지들이 농구 선수도 아닌데.”
“멍청이들의 기싸움일 뿐입니다.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 나도 안다고. 다 알지. 내가 그런 것도 몰랐을 줄 알고?”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기 시작하는 건 좋지 않은 징조지만. 네디는 안토네티를 술로부터 빨리 떨어트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동시에 다음 스케줄을 취소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안토네티는 요사이 정말로, 정말로 신이 나 있었으니까. 단장이라는 자리에 앉아서, 무엇보다도 트레이드 데드라인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인데. 이렇게까지 마냥 기분이 좋은 사람은 아마 전 미국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이제 농구단에 쏠려 있던 관심을 야구단으로 가져올 거야. 르브론이 없는 캡스는 자연스럽게 암흑기로 들어갈 수밖에 없지.”
“농구장으로 가던 팬들과 야구장에 오던 팬들은 비슷한 사람들 아닙니까? 어차피 경기하는 계절이 다르니까요. 스포츠를 좋아하는 클리블랜드 사람들이…….”
“네디, 네디, 이봐아- 네디. 그게 아니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하하하, 중요한 건 스타야. 스타지. 스타고 말고. 사람들은 캡스를 보러 간 게 아니야. 르브론을 보러 간 거지! 그런데 이젠 르브론이 없지? 그러면 자연스럽게 르브론을 대신할 스타를 찾게 된다고.”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한다. 네디에게는 점점 더 안 좋은 상황으로 가고 있다. 이번 이닝이 시작할 때만 해도 얼굴이 살짝 상기된 듯한 느낌으로 홍조를 띄었다면. 지금은 거의 붉으락푸르락해졌으니 말이다.
네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토네티는 두 팔을 활짝 벌려 프로그레시브 필드의 하늘을 껴안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클리블랜드에는 이제 코트 안에서 이렇게 팔 벌리고 내가 왕이라고 외칠 수 있는 녀석이 없단 말씀이지. 하하하! 지금 마운드에 서 있는 한국인을 빼면 말이야.”
“문은 그런 스타일이 아니잖습니까?”
“물론이지. 네디. 한 잔 더.”
네디는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경기 이후의 모든 스케줄은 전부 취소. 단장을 찾는 전화가 걸려 오면 내일로 미룰 것. 사유는…… 급한 일, 아무거나. 그러면서도 나머지 한 손으로는 칵테일 한 잔을 더 준비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안토네티의 기분을 맞춰 주는 편이 훨씬 더 나으니까.
“단장님, 여깄습니다.”
“땡큐!”
“천천히 드셔야 합니다. 이미 많이 드셨으니까요.”
“괜-찮아!”
네디는 셔츠의 가장 윗 단추를 풀며 자신도 한 잔을 들었다. 마운드의 지혁이 5회초 두 번째 타자인 켄드리스 모랄레스를 3루수 앞 땅볼로 막 돌려세웠다.
“예-이! 공이랑 저렇게 차이가 많이 나서야 아무것도 못 하지, 멍청한 캐나다 놈들아!”
“단장님께서 마침 술이 많이 취하셨으니, 이 기회에 한 번 여쭤 보겠습니다. 왜 문입니까? 클리블랜드에 온 지 1년도 채 안 된 아시아 선수를 선택하신 이유, 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단장님 비서로 올해 4년째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볼 때는 코리 클루버가 선택을 받았어야 합니다.”
“뭐? 아하하, 아하하하! 네디, 지금 이 퍼포먼스를 보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클루버는 좋은 친구지. 하지만 문은 더 좋은 투수야. 지금도 봐, 점점 성장하고 있잖아? 어제보다 오늘이 더 좋은 녀석이라고.”
“하지만 아시아인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마운드에서의 압도적인 맛은 클루버가 더 있습니다. 클루버야말로 삼진도 많이 잡는 스타일이고요. 사람들은 삼진에 열광하는데, 클리블랜드의 사람들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정확해. 이입할 수 없어야지! 이입할 수 없으면 더 좋지.”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네디, 문은 르브론과는 근본부터 다른 사람이야. 타고난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데다가 불모지에서 나고 자란 피지컬도 구린 아시안이잖아. 바닥부터 구르고 굴러서 여기까지 올라온 녀석이라고. 사람들이 문에게 이입할 수 없다고? 당연하지! 이유는 명확하거든. 일반인들 중에 문이 한 것만큼 노력한 사람이 누가 있겠어? 심지어 에이스 역할을 하고 있는 지금조차도 팀에서 가장 지독한 녀석이 바로 문인데 말이야.”
“전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흐하하하. 술기운에 취한 안토네티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쟤는 스타가 될 팔자가 아니야. 오늘 경기도 봐. 삼진을 펑펑 잡아내면서 스타성을 보여 주고 있지 않잖아. 컨디션이 아주 좋아서 삼진을 잡을 수 있는데도 말이야. 일부러 저러는 거거든. 투구 수를 아끼려고. 흐하하, 돌멩이를 아무리 반짝반짝 닦아도 다이아몬드가 되지는 않아. 쟤는…… 그래, 별이 아니라 달이 되어야 할 녀석이지.”
“…….”
“너무 시적이었나? 으하하. 우리는 쟤를 빛나는 별로 만들지는 않을 거야. 빛나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밤하늘을 지배하는 달로 만들 거지.”
-이예에에에에쓰!
-문! 문! 문! 문!
여덟 타자 연속 땅볼 처리. 1루수 산타나가 제자리에서 공을 주워 베이스를 밟는다. 프로그레시브 필드가 달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그로부터 정확히 1시간 6분이 지난 뒤. 안토네티의 얼굴은 여전히 빨갛다. 하지만 정신은 완전히 멀쩡하게 돌아왔다. 대취할 것 같은 날이었는데,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경기장 안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네디는 가슴팍 안에서 정신없이 울려 대는 전화 때문에 아예 한 손으로 꽉 쥐고 있어야 했다.
“단장님, 구단에서 전화가 계속 오고 있습니다.”
“쉿!”
탁!
이상한 파열음. 방망이에 정타로 맞으면 나는 소리가 아니다.
“예쓰!”
안토네티가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8회초 원아웃 상황. 23개째 아웃카운트가 만들어지기 위한 힘없는 공이 2루수 킵니스의 앞으로 흘러들었다. 킵니스는 척 봐도 조금 긴장한 듯한 스텝이었다. 아슬아슬했지만, 글러브에 공을 담는 마지막 순간에는 두 다리가 지면에 꽉 붙었다.
“오케이! 천천히, 흥분하지 말고!”
다행히도 킵니스는 공을 확실하게 쥔 뒤 한 번의 휴식 타이밍을 가진 뒤 여유를 찾았다.
1루 송구가 깔끔하게 미트에 빨려들며 투아웃. 평범한 땅볼인데도 모든 사람들이 숨을 잔뜩 죽이다가 아웃 콜이 나오고 나서야 열렬한 소리를 내지른다. 안토네티도 마찬가지다.
“네 개 남았어, 네 개!”
칵테일 여덟 잔을 비웠지만 술이 깨 버린 사람과, 그 사람에게 급한 상황을 보고해야만 하는 비서. 분명히 이상한 상황이지만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도 아니다.
[23! in-a-row(연속해서)! ……다음 타자는 토론토의 6번, 데본 트래비스입니다.]
[우리까지 조심스러워지네요. 도대체 오늘 그라운드 볼이 몇 개였죠?]
[17개네요. 방금 전 모랄레스의 타구까지 포함해서요. 자, 92구를 던진 문. 투구 수는 여유 있습니다. 대기록을 향해 나아갑니다.]
8회 투아웃을 잡아내는 동안. 지혁의 공은 점점 더 좋아졌고 토론토의 타자들은 점점 더 의욕을 잃어 갔다. 어떻게든 출루하기 위해 갖은 수를 써 봤지만 오늘의 지혁은 말릴 수 없었다.
[단 한 명도 베이스를 밟지 못했습니다. 클리블랜드 역사상 가장 최근의 퍼펙트게임은 1981년 렌 바커가 기록했던 경기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때도 상대가 토론토 블루제이스였네요.]
[기록이라는 게 참 신기합니다. 메이저리그에 팀이 얼마나 많은데 또 토론토인가요?]
[문이 메이저리그 첫 번째 노히터를 기록했던 상대도 토론토 블루제이스라고 하는군요. 2015 시즌 메이저리그 최종전이었습니다.]
데본 트래비스는 투 볼 카운트를 선점했다. 패스트볼 두 개 모두 아슬아슬하게 경계선을 넘나드는 공이었는데, 운이 좋아서 모두 볼로 선언된 공들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트래비스는 방망이를 내지 않고 미트에 빨려드는 순간까지 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방망이를 안 낸 게 아니고, 못 낸 거구만.’
오늘 경기 앞선 두 번의 타석에서 모두 땅볼로 물러났던 트래비스는 타이밍이 계속해서 늦고 있었다. 밀려 친 땅볼이 나왔었으니까. 멘데스는 그날의 기록을 놓칠 포수가 아니다.
‘높은 쪽 패스트볼. 카운트에 여유 있으니 공 하나는 무조건 더 볼 거야. 퍼펙트를 당하고 있는 팀에서 성급하게 공격을 할 리가 없지.’
사인을 받은 지혁은 인터벌은 조금도 주지 않고 곧장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오늘 한 번도 세트 포지션에서 공을 던지지 않은 게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며, 송진가루를 있는 힘껏 날리며 터프한 패스트볼을 꽂아 넣었다.
멘데스의 예상대로 트래비스는 방망이를 내지 못했다.
[한복판! 스트라이크 카운트를 잡아냅니다. 문의 과감한 배짱! 퍼펙트를 하고 있는 투수가 복판으로 집어넣네요. 엄청난 자신감입니다.]
[제가 다 떨리네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최근 나온 퍼펙트게임은 2012년 8월 15일, 시애틀의 킹 펠릭스가 탬파베이 레이스를 상대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6년. 무려 6년 동안 퍼펙트게임이 나오지 못했는데요. 말씀드리는 순간 4구!]
타이밍이 계속 늦었던 타자에게 일부러 커브나 포크를 던져 줄 필요는 없다. 트래비스의 몸 쪽으로 박히는 싱커에, 여전히 타이밍이 늦은 스윙이 출발했다.
멘데스는 직감했다. 방망이가 부러질 것이다.
파아악!
찌릿찌릿거리는 소리다. 배트가 산산조각 나서 파편들이 공중으로 살짝 튀어 오르는 소리. 모든 게 생각대로…… 아니, 잠깐만.
“써드! 대쉬! 대쉬!”
공에 기묘한 역스핀이 걸려 있다. 투수가 내려와서 바운드를 기다리면 바깥쪽으로 휘어 나갈 공이다. 멘데스는 본능적으로 3루수를 호출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출발이. 마스크를 벗어던진 멘데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안정적으로 카운트를 잡아냈어야 할 공이, 도박이 되었다.
지혁의 글러브를 스치고 휘어져 나간 공에 3루수 라미레즈가 다가섰다. 곰 같은 덩치를 잔뜩 숙여 잔디 위에서 맨손으로 공을 캐치하고. 이미 머리가 거의 땅에 닿을 정도로 불안정하게 굽혀진 자세에서 그대로 1루로 뿌렸다.
멘데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라미레즈도 눈을 질끈 감았다.
안토네티도 눈을 질끈 감았다.
결과를 맨눈으로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태연한 표정으로 공의 궤적을 쫓는 건 오직 지혁 한 명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