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보낸 자리에 달빛이 찬란하여
라미레즈가 아크로바틱한 자세에서도 집념으로 던진 송구는 살짝 빗나가긴 했지만 어쨌든 1루까지 당도했다. 평소 같았으면 베이스를 비우더라도 실책을 하지 않고 공을 안전하게 잡았을 게 분명하지만, 퍼펙트가 걸린 경기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1루수 산타나도 스파이크 끝을 베이스에 아슬아슬하게 박아 넣은 상태에서 축구의 골키퍼처럼 몸을 날렸다. 그러고도 미트 끝에 간신히 걸리는 송구였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을 게 확실하다. 산타나가 미트 끝에 공을 매달고서 앞으로 쭉 넘어졌을 때 그의 뒷발은 분명히 베이스에 닿아 있었다. 하지만 공이 빨려드는 그 순간에 트래비스도 베이스 위를 밟고 지나갔다.
숨막히게 고요한 경기장. 모든 사람들이 1루심의 제스처만 기다리는 상황. 분명히 아슬아슬했지만, 결정은 난다. 선택지는 두 가지 중 하나뿐이다.
“세이프!”
-BOOOOOOOO!
누워서 판정을 기다리더 산타나가 발버둥을 치며 일어섰다. 산타나뿐이 아니다. 모든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일제히 비디오를 요청했다.
1루수와 1루 코치를 포함해 모든 내야수들이 벤치를 돌아보며 비디오 사인을 내는 건 장관이라면 장관이었다.
“하, 하하.”
그 이상한 풍경 때문에 오히려 헛웃음이 나왔다.
지혁은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흐르는 땀을 닦았다. 흐름이 잠깐 끊긴 지금 생각해 보면 지독하게 더운 날인데, 8회까지 던지는 와중에 왜 더위를 못 느꼈는지 모르겠다.
“헤이, 문. 무조건 아웃될 거야.”
비디오 챌린지가 진행되는 동안, 아직도 씩씩거리는 산타나가 지혁의 옆에 와 쭈그리고 앉았다. 멘데스와 킵니스, 린도어까지. 그리고 멋진 송구를 보여 준 라미레즈도 이내 지혁의 등 뒤에 와 섰다. 하지만 모두들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혹시라도 부정이 탈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섯 명이 마운드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껌만 씹고 앉아 있는 모습이 외야 쪽 대형 전광판에 비춰졌다.
-예에에에!
-Let’s go Indians! Let’s go Indians!
다섯 박자의 박수와 거기에 맞춘 구령. 관중들 속에 응원단장이 숨이 있는 것도 아닌데 기묘하게 정확한 타이밍에 응원이 쏟아져 나온다.
관중들의 일사불란한 반응이 좋아서인지 카메라맨이 꽤 오랫동안 그들을 비추었다. 3초, 5초, 10초…….
“너무 길지 않아?”
10초가 넘어가는 시간의 원샷은 엄청나게 긴 클로즈업이다. 물론 외야 전광판이 다이나믹하게 화면이 전환되는 일반 TV 카메라는 아니지만, 지혁의 얼굴이 오랜 시간 클로즈업되고 있자 조금은 뻘쭘해졌다. 전광판은 또 워낙 커서. 자신의 얼굴을 안 보려야 안 볼 수도 없고 말이다.
“팬들이 원하니까. 하하.”
멘데스는 실없이 웃으며 지혁의 등을 툭 쳤다.
이윽고 심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심은 머리에 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었다. 그리곤 단호한 표정으로 1루 주자인 트래비스를 한 번 가리켰다가, 허공에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래! 이거야! 내가 분명히 잡았다고!”
산타나가 포효했다. 같이 애를 태우고 있던 린도어와 킵니스는 호쾌한 하이파이브를 했고, 3루수 호세 라미레즈는 성호를 긋고 하늘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안토네티는 네디와 칵테일 잔을 부딪치고는 단숨에 한 샷을 들이부어 버렸다.
그야말로 인디언의 환호 속에 파란 어치(Blue Jays)가 꼼짝없이 짓눌린 꼴이 된 것처럼. 경기장의 분위기는 압도적이고 일방적으로 흘렀다.
[오, 신이시여! 24번째 타자조차도 아웃 선언이 되었습니다! 원심이 뒤집어졌습니다! 24명이 등장했고, 24명을 처리했습니다! 슈퍼 문, 대기록을 향해 남은 아웃카운트는 단 세 개뿐입니다! 우리는 9회로 갑니다!]
원심이 뒤집어지는 순간 클리블랜드의 야수들이 일제히 더그아웃으로 힘차게 뛰쳐 들어갔는데 정작 지혁만 덤덤하게 걸어 내려간다.
지혁의 뒤에서부터 달려오던 모든 야수들이 지혁의 등이며 허리며 엉덩이며 어깨를 한 대씩 치고 지나간다.
“지들이 더 신났네, 아주.”
픽 웃음을 흘렸다. 절정의 컨디션에, 심판까지 도와주는 날. 문득 4년 전 이맘때가 떠올랐다. 꼭 이 즈음이었다. 탬파베이의 트리플 A 팀인 더램 불스에서 퍼펙트게임을 만들어 냈을 때. 그때 뒤에는 형진이가 있었지. 벤치에는 알렌 코치가 있었고. 또…….
지혁은 즐거운 기억을 떠올렸다. 달라진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곳은 더램이고, 이곳은 클리블랜드라는 것.
***
“폭죽?”
“준비됐습니다!”
“화약 확실하게 확인해. 안 터지면 넌 나한테 죽어!”
“확인 다섯 번 했어요.”
“전광판!”
“완벽합니다.”
“오탈자 확인해. 틀린 문자 하나라도 나오기만 해 봐!”
실무진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야구에서 대기록이란 어느 때나 나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도 제법 탄탄하게 준비하는 편이다. 오늘도 5회가 넘어서면서부터는 모든 직원들이 현장으로 나와 준비를 시작했다.
8회, 클리블랜드에서 신청한 비디오 챌린지가 원심을 뒤집는 순간에는 모든 직원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기뻐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더 성대하고 화려한 이벤트를 남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역사적인 순간에 현장을 찾은 사람들을 완벽히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그들의 임무니까.
“그나저나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단장의 비서가 전화를 안 받는다. 모든 스케줄을 취소한다는 문자만 딸랑 던진 이후에 연락도 안 된다.
얼마 전까지, 아니지, 오늘 경기 시작 전까지만 해도 문을 지역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야 한다며 포장지가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정작 주인공인 지혁이 퍼펙트게임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우기 직전인데 연락이 안 닿는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빌어먹을 안토네티! 돈을 어떻게 가져다 쓰란 말이야!”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이건 결재를 받아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뜻이다.
담당 팀장인 팸은 쉰 목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구장의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소리 때문에 지시를 내릴 때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지금은 그냥 분풀이였다. 마침 관중석에서 쏟아져 나온 굉장한 환호 속에 팸의 원망은 묻혀 버렸다.
“여긴 왜 이렇게 시끄러워? 방금 뭐라고! 했지! 팸?”
“우와우, 깜짝이야! 단장님!”
“돈은 마음대로 써. 있는 힘껏 써. 하하하! 쓸 수 있는 최대로 쓰라고! 오늘 끝나고 파티도 열어!”
팸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안토네티를 쳐다봤다. 이미 잔뜩 취해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단장님, 방금 그 말씀 후회하시면 안 돼요. 저 진짜 막 써요!”
“막 써! 오케이야!”
“아, 몰라! 진짜 막 씁니다!”
구단에서 제일 높은 사람과 현장 실무진들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고래고래 악을 써 가는 와중에 경기장의 웅성거림은 점점 더 커져 갔다. 그리고 이내 엄청난 함성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9회에 들어서 벌써 두 번째다.
“팸, 투아웃이에요! 레프스나이더는 2루수 땅볼이에요. 이제 9번 타자만 남았어요!”
“좋-았어! 모두 스탠바이 해!”
가슴이 쿵쾅거렸다. 모두가 미친 사람들처럼 가슴 한쪽을 억지로 부여잡고 있었다. 이내 엄청난 긴장감이 찾아들었다.
***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문, 제2구! 볼입니다. 이번에는 볼입니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 대타 저스틴 스모크가 배팅 장갑을 벗었다 끼웁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마지막 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손에 땀이 나네요. 관중들을 좀 보세요. 관중들도 모두 손에 땀이 날 겁니다. 이건 절대로 더워서가 아닙니다, 시청자여러분.]
[컴온, 짐. 이런 긴장되는 속에서 그런 실없는 유머를 들어서 너무 감사하네요. 물론 이건 반어법입니다. 자. 3구, 갑니다, 문! 파울. 파울이 됩니다. 스모크가 체크 스윙을 냈습니다만 방망이 끝에 맞은 공이 뒤로 빠져나갑니다. 이제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퍼펙트게임까지 필요한 건 스트라이크 딱 한 개입니다!]
심판에게서 새 공을 받은 멘데스가 자신의 미트에 대고 공을 있는 힘껏 부빈 뒤 지혁에게 던져 주었다.
툭, 하고 날아오는 공을 받은 지혁은 평온하게 자신의 루틴을 계속했다. 허리를 숙여 로진을 두어 번 툭툭 튀기고, 손가락에 묻어 있는 하얀 가루들을 불어 흩날린다. 그러면 딱 끈적끈적한 미세한 덩어리들만 손끝에 남는다.
글러브 안에서 공을 착 감아쥔다. 마치 솔기에 갈고리라도 붙어 있는 것처럼 완벽하게 밀착되는 느낌이 평소와 완전히 똑같다.
퍼펙트게임까지 아웃카운트 하나, 스트라이크 하나만을 남겨 놓은 상태에서도 이상스럽게 마음이 편안하다.
“그때는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는데.”
더램에서의 퍼펙트게임 당시 얼마나 긴장했었는지. 9회의 투구가 어땠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날 정도였다. 그땐 그랬지. 방금 전 던진 공이 뭐였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9회를 마쳤었다. 마지막 타구가 유격수 플라이였나? 정말 평범한 공이었는데 미친 사람처럼 형진이의 이름을 불렀었던 기억만 난다.
지금 이 공을 스트라이크 존에 꽂아 넣으면, 지혁의 이름은 역사에 남는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투수여야 마땅했던 필립 험버의 이름이 아직도 기억되는 건 그가 퍼펙트게임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만약 지혁이 마지막 공을 성공시킨다면, 앞으로 처절하게 망해 버려 은퇴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지혁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그 정도의 대기록이다. 140년 역사에서 단 23번밖에 없었던 기록.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편안한지 모르겠다. 심지어 오늘은 마이너리그 경기도 아니고 메이저리그 경기인데. 마지막 순간 실패했을 때의 공포나 부담이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다. 실패하면 다음에 또 하면 되지라는 무의미하게 태평스러운 마음만이 있을 뿐이다.
와인드업에 들어간다. 스모크가 두 손에 낀 배팅장갑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걸로 봐서는, 아마 반드시 스윙을 낼 모양이었다.
멘데스가 몸 쪽으로 슬쩍 한 번 붙으려던 페이크를 줬다가 재빠르게 바깥쪽으로 옮겨 앉는다. 지혁의 손끝에서 떠난 공이 출발한다.
지금까지 패스트볼로 윽박지르던 게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힘없이. 그리고 회전을 멈춘다.
“……Shit.”
멘데스는 타석의 스모크가 나라 잃은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걸 똑똑히 들었다.
오늘 경기에서 지금까지 단 세 개밖에 던지지 않았던 너클 포크를, 제구가 불안해 던지는 사람도 어디로 갈지 모르는 너클 포크를 이런 마지막 순간에 직접 선택하다니.
멘데스도 스모크와 같은 마음이었다.
나비처럼 춤을 추는 공이 이리저리 흩날린다. 스모크의 방망이가 허공을 가른다.
멘데스는 일부러 엉덩이에 최대한 힘을 주며 몸을 최대한 낮추었다. 혹시라도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갈 걸 대비한 본능적인 자세였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프로텍터 제일 밑 부분에서 멘데스는 좌우로 튀어나가려던 공을 미트에 꽉 쥐었다. 손가락이 터져 나갈 것처럼 힘을 주며 미트의 주둥이를 꽉 깨물었다. 야구공의 묵직한 무게감이 왼손에 똑똑하게 느껴졌다.
멘데스는 있는 힘껏 펄쩍 뛰어오르며 오른손으로는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왼손으로는 공이 들어 있는 미트를 하늘로 들어 올렸다.
귀를 찢을 것 같은 소리가 들리며 어마어마한 양의 폭죽이 동시에 터져 올랐다. 클리블랜드의 밤하늘이 순식간에 형형색색의 폭죽으로 밝아졌다. 또 관중석에는 만세를 부르며 방방 뛰는 관중들의 파도가 넘실거렸다. 그라운드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마운드를 향해 뛰쳐나간다.
그런 와중에 멘데스는 처음으로, 투수에게 약간의 공포를 느꼈다. 분명히 기뻐하고는 있지만 너무나도 덤덤한 모습으로 서서히 마운드를 내려오고 있는 지혁에게.
지혁은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퍼펙트게임,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언제든 할 수 있다고.
***
“자기이이-!”
술을 몇 잔 마신 듯이 살짝 붉은 뺨의 지혁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시니에가 달려들었다.
지혁의 품에 쏙 들어온 시니에는 곧장 지혁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시니에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뭐야, 울었어?”
“너무 자랑스럽잖아!”
“근데 왜 울어?”
“넌 하여튼 여자를 너무 몰라. 씨…… 잘했어! 당신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아.”
“하하하, 뭘 또. 그 정도야?”
지혁은 여전히 허리를 꽉 쥐고 놓아주지 않는 시니에가 떨어질 때까지 안아 주었다가, 그녀가 놓아주자마자 냉장고에서 커다란 아이스 팩을 꺼냈다. 그리고는 어깨에 수건을 덧대고 칭칭 감았다.
“아파?”
“아니. 오늘은 경기 끝나고 인터뷰하고, 단장 만나고, 파티하고. 시간이 하나도 없어서 아이싱을 못 했거든.”
불과 몇 시간 전에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태연하게 대답하는 지혁은 어느 때보다 더 커 보였다.
시니에는 와인 한 잔을 따라 컵에 들고는 지혁이 몸을 기대고 누워 있는 소파에 앉았다.
“오늘 경기를 현장에서 봤어야 하는데.”
“괜찮아. 바빴잖아.”
“방송에서 사람들이 역사적이라고 그렇게 노래를 불러 대는데. 병원에서 컴퓨터 모니터로 그걸 보고 있는 게 너무 아쉬웠어.”
“하하.”
“오늘 플라이 아웃이 한 개도 없었대. 아까 난리 났었어. 역사상 처음이래, 플라이 아웃이 하나도 없는 퍼펙트게임은.”
“그랬나?”
“또, 아, 안토네티 단장이 인터뷰한 거, 봤어?”
“아니. 그 사람 계속 나랑 붙어 있었는데. 언제 인터뷰했지?”
“아마 파티장에서 아닐까? 술에 좀 취한 것 같던데. 혀가 좀 꼬여 있었어. 헤헤.”
“……이상하네? 파티장에서는 진짜 나랑 1초도 떨어지지 않았거든.”
“잠시만.”
시니에는 탁자에서 태블릿을 가져와 안토네티의 영상 인터뷰를 틀어 보여 주었다.
[문은 클리블랜드의 영웅입니다. 히어로죠.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장담하는데, 이 친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바꿔 놓을 겁니다. 오늘처럼요! 클리블랜드에 오랜 시간 덧씌워져 있던 패배의 이미지를 이 친구가 씻어 줄 겁니다. 클리블랜드! 내 도시, 내 고향, 클리브랜드! 르브론을 잃었다고 슬퍼하지 마세요. 우리에겐 문이 있습니다!]
“……오바하시네, 이 양반.”
“헤헤헤, 난 좋은데?”
시니에가 지혁의 가슴팍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역사적인 하루의 마무리로 완벽한 손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