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star game, starting pitcher
2012년 8월 15일, 시애틀. 킹 펠릭스가 27번째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단 한 명의 출루도 허용하지 않은 채.
펠릭스 에르난데스는 탬파베이를 상대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루킹 삼진으로 잡아낸 뒤 마운드에서 하늘을 가리키며 포효했다. 몸을 있는 힘껏 흔들어 댔고, 세이프코 필드를 노랗게 물들인 시애틀의 팬들은 킹 펠릭스의 상징인 ‘K’를 들고 거대한 파도를 일으켰다.
그로부터 6년 동안 퍼펙트게임이 나온 적이 없었다. 지금은 LA 다저스에 가 있는 다르빗슈 유가 9회 2아웃까지 퍼펙트를 기록한 적도 있었고 워싱턴의 에이스 맥스 슈어져도 아웃카운트 두 개만 남긴 상황까지 완벽한 피칭을 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들 모두 마지막 문턱을 넘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굉장한 환호와 열광적인 격려를 보내 주었다.
퍼펙트게임이라는 건 그런 기록이다. 진짜 선택받은, 진짜 위대한 투수들만이 생애 한 번 기록할 수 있을까 말까한 대기록 말이다. 다시 말해, 지혁을 클리블랜드의 새로운 상징으로 밀어붙여야 할 안토네티 단장에게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기회인 셈이다.
인터뷰. TV 쇼. 인터뷰. 라디오 전화 연결. 인터뷰. 지역 행사의 연설 무대 등등 안토네티를 비롯한 프런트와 현장의 코칭스태프들, 선수들이 직간접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지혁의 칭찬이 쏟아져 나왔다.
기자들도 눈치가 있다. 이 정도 떡밥을 뿌려 놨으면 멋들어지게 포장하는 것은 그들의 일이다.
르브론이 있었어야 할 자리를 지혁의 얼굴이 채워 가기 시작했다. 지혁의 입장에서는 꽤 쪽팔리는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뿌듯해지는 일이기도 했다.
“와! 이것 봐봐, 자기!”
시니에는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어떤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는 대형 광고판을 가리키며 꺄르르 웃었다.
버스 정류장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광고 자리에 지혁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다. 그 자리는 당연히 르브론의 전신사진이 붙어 있던 자리였다. 한 손에 농구공을 쥐고 하늘로 날아가는 듯한 르브론의 모습이 있었어야 할 자리에, 이제는 지혁이 와인드업에 들어가 있는 사진이 있다.
“문! 사진 한 장만 찍어 주면 안 될까요?”
버스 정류장 앞에 잠시 기웃거리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지혁에게 달려든다. 옆에는 시니에가 방긋방긋 웃고 있고, 어린아이들이 아장아장 다가오며 작은 손에 꼭 쥔 야구공을 내밀곤 한다. 클리블랜드에 비어 버린 왕의 자리를 달이 채우고 있다. 만월이 되어 가는 중이다.
***
그렇게 한 달. 클리블랜드에 대관이 이루어지는 시간 동안, 지혁은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하루하루의 루틴을 절대적으로 지켜 왔다. 인터뷰나 광고 촬영이 조금 거추장스럽기는 했지만, 시니에가 더욱 더 세심하게 지혁의 몸을 챙겨 주었기에 스케줄을 소화하는 데 큰 거침은 없었다.
물론 인간미도 발휘했다. 이전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이나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선수들은 이상하게 다음 경기에 부진하곤 했다. 뭔가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이상한 징크스이기도 했지만, 확률이 100%에 가까운 놀라운 결과를 가지고 있는 종류의 것이기도 했다.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다음 경기, LA 에인절스와의 원정 경기. 1회 두 타자를 잡아낸 이후 트라웃에게 장외로 넘어가는 솔로 홈런을 한 방 맞았다. 그리고 마지막 촛불을 불태우고 있는 푸홀스에게 백투백 홈런을 맞았다. 아무리 지혁이 기세를 타고 있다고 해도 모든 경기에서 완벽한 피칭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천하의 지혁도 징크스를 피하지는 못했다. 그 경기에서 5이닝 3실점으로 시즌 2패째를 떠안았지만, 그래도 다음 경기인 캔자스시티 로얄스 전에서는 곧장 6이닝 무실점으로 승리를 챙겼다. 이번 시즌 11승째였다.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이후 한 달, 네 경기 등판에 1승 1패, 노 디시전 두 개. 나쁘지 않은 기록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좋은 기록도 아니었다. 특히 클래식 스탯에 큰 가치를 두곤 하는 한국 팬들에게는 실망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클리블랜드 구단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았다. 특히 5월 어깨와 팔꿈치에 휴식을 준 적이 있었던 터라 지혁의 몸 상태에 아주 민감했기 때문이다.
프랑코나 감독은 마운드에 지혁을 오랫동안 세워두지 않았다. 투구 수에 여유가 있더라도 6회까지만 마무리하면 마운드에서 내렸다. 동점 상황이든, 패전을 떠안을 상황이든 개의치 않았다.
“이건 정규 시즌에 불과해. 너의 그 승부욕은 가을 야구에서 보여 주면 돼. 지금은 장전하는 시간이야. 발사는 가을에 하는 거고.”
아이싱을 하고 있는 지혁이 조금 부루퉁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캘러웨이 코치는 귀신같이 다가와 지혁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지혁도 그때 그때마다 마음을 잘 추슬렀다.
마운드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지혁이 추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조준하고 있는 곳이 명확하게 가을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기존의 선수들이 기회를 많이 받았다. 8월 첫째 주에는 견실하게 로테이션을 지켜 오던 3선발 카라스코와 4선발 살라자르, 5선발 경쟁을 하는 톰린이 하루씩 일정을 앞당기고 지혁이 던졌어야 할 자리에 클레빈저가 대체 선발로 나서기도 했다. 클리블랜드의 극진한 비호 속에 전반기가 마무리되었다.
2018시즌 성적은 12승 2패, 평균자책점 2.08.
아메리칸리그 다승 부문 공동 2위. 평균자책점 단독 선두. 완봉 2회로 부문 공동 선두. 크리스 세일이 13승으로 최다승을 거두고 있는 것을 빼고는 모든 부문에서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올스타전이 다가왔다.
***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한국인 최초로 2년 연속 초대받은 문지혁.
-[8/16 MLB 올스타전] 내셔널리그 선발투수 클레이튼 커쇼 확정. 아메리칸리그는? 크리스 세일, 손가락 부상.
-문지혁, 올스타전 선발투수 가능성 제기…… 크리스 아처, 제임스 팩스턴, 코리 클루버 등과 경쟁.
지혁의 관리를 더욱 세심하게 하고 싶었던 프랑코나 감독의 바람과는 달리, 지혁은 올스타전 선발투수로 이름을 올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원래 선발투수로 내정되었던 보스턴의 크리스 세일이 마지막 등판에서 손가락에 작은 물집이 잡힌 것이다. 아메리칸리그는 누가 되었든 대체 선발을 골라야만 했고, 그렇다면 지혁이 유력한 후보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프랑코나 감독은 인상을 썼지만 안토네티 단장은 즐거워 보였다. 안토네티의 계획에 부스터를 달아 줄 수 있는 계기니까. 그가 지혁을 포장하는 작업에 들어가고 나서 마치 응답하듯이 퍼펙트게임을 기록해 준 지혁이었다.
여기에 올스타전 선발투수까지 하고 나면, 더 이상 메이저리그 야구팬 중에 지혁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클리블랜드를 대표하는 투수가 올스타전 선발로 나서는 건 우리에겐 큰 영광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이 선발로 등판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요. 그는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저기서 이런 인터뷰를 하고 다닌 것은 덤이다. 클리블랜드의 거리 곳곳에 올스타전 저지를 입은 선수들의 광고판이 세워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그중 지혁의 것이 가장 앞에 있었다.
당연히 한국에서도 난리가 났다. 한국인 메이저리거의 터줏대감인 최성수조차도 한 번을 밟아 보지 못한 올스타전 무대. 작년에 지혁이 세 번째로 올스타전에 입성한 것만으로도 전국적인 호응을 얻어냈을 정도의 사건이었다면, 올해는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려 하고 있으니까.
한국 중계진들은 올스타전이 열리기 일주일 전부터 미국으로 날아와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고 현장 인터뷰를 준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기하고 있었다.
한국 방송사와 안토네티의 목적은 똑같았으니 순풍에 돛 단 듯이 컨텐츠가 만들어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안토네티한테 작작 하라고 그러십쇼.
워커홀릭인 패트릭조차 문자로 피곤함을 호소할 정도로. 바빴다. 지혁도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야 했다. 올스타전 TV 광고에 출연해야 했고, 한국 방송사의 인터뷰 클립도 만들어야 했고, 클리블랜드 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촬영해야 했다.
그렇게 바쁘게, 올스타 브레이크를 맞이했다.
***
“와, 저놈 파워 봐.”
올스타전 전야제, 그리고 올스타전의 꽃과 다름없는 행사. 홈런 더비 현장에 참여한 지혁은 2년 연속으로 괴력을 과시하고 있는 애런 저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안 그래도 거대한 몸집의 소유자인데, 힘없이 날아오는 배팅볼을 퍼 올리는 것을 보자니 팔뚝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휘유! 또 간다! 이건 장외야!”
누군가가 휘파람을 불며 소리쳤다. 말마따나 저지의 공은 파크 팩터가 안 좋은 편에 속하는 내셔널스 파크의 담장을 훌쩍 넘겨 버렸다.
“인간이 저런 힘을 내도 되는 거냐? 진심으로?”
지혁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까마득한 탄도의 타구는 아마 지금도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까지 치솟는 타구들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니까.
“저런 놈이 우리 팀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 안 그래? 하하하.”
“내셔널리그 쪽에도 스탠튼이 있잖아. 쟤도 만만찮아.”
“내가 볼 땐 힘은 저지가 나아. 무지하게 맞아 봐서 알지. 낄낄.”
크리스 아처가 지혁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여전히 탬파베이의 에이스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그다. 오랜만에 경기장에서 만난 아처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쾌하다. 하긴, 저지 같은 선수가 같은 팀에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저지뿐만이 아니다. 영원한 1인자로 남을 것 같은 포스의 마이크 트라웃. 아메리칸리그 팀의 주전 3루수로 낙점받은 볼티모어의 매니 마차도. 리그 최고의 유격수 중 하나가 되어 버린 카를로스 코레아. 보스턴의 핵심 플레이어인 무키 베츠. 이런 선수들을 뒤에 놓고 던진다는 건 분명히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올스타전 선발인데, 기분이 어때?”
“어떻긴 뭘. 똑같지. 길어야 2이닝이나 던질까 하는 경기잖아.”
“이 자식 덤덤한 척하는 건 우리 팀에 있을 때랑 똑같네. 인생에 한 번 올까 말까한 기회야, 임마. 올스타전 선발이라는 건 영광이라고.”
아처의 눈빛에는 진짜 부러움이 담겨 있다. 그래서 장난으로나마 ‘그럼 네가 할래?’라고 물으려던 걸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지혁은 올스타전에 큰 의의를 두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미국에서 나고 자란 아처는 올스타전에 선발로 나서는 꿈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WBC에도 참가했던 선수니까. 특별한 이벤트전에 꽤 큰 의미를 두는 스타일이다.
어쨌든, 지혁은 마지막 등판에서 손가락에 물집이 잡힌 크리스 세일을 대신해 올스타전 선발에 나서게 되었다. 올해 아메리칸리그의 감독으로 선정된 건 클리블랜드의 프랑코나 감독이 아니라 휴스턴의 힌치 감독이었는데, 그는 세일의 부상 소식을 접하자마자 곧장 지혁을 선발로 낙점했다.
-왜냐고요? 그는 퍼펙트 투수잖아요.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모르겠네요, 난.
이 한마디의 인터뷰만 남기고서는.
“뭐, 올스타전 등판이 처음도 아니고. 그냥 재밌게 던지면 되는 거지.”
“아냐! 이겨야지! 이것도 승부라고, 문. 으-하하! 또 넘어간다!”
아처는 올스타전에서조차 순수한 승부욕을 불태우는 모양이다. 저지의 타구가 아찔하게 날아간다. 순식간에 담장에 꽂히는 라인드라이브 성 타구가 마치 대포알 같다. 기대감을 품지 않게 만들 수 없는 타구다.
“그래, 뭐. 재밌게 해 보자고. 재밌게.”
***
“헤이- 반가워.”
“와썹- 맨!”
올스타전 당일 라커룸. 여기저기서 선수들의 친목질이 한창이다. 특히 멘데스 주위에는 다른 팀 선수들이 유독 많이 모인다. 덕분에 지혁도 다른 팀 선수들과 꽤 손쉽게 인사를 할 수 있었다.
“헤이, 그 싱커. 좀 살살 던지면 안 돼?”
“포크볼은 언제부터 연습한 거야? 나한테는 좀 던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 공은 대체 뭐야?”
이렇게 지혁에게 친근하게 물어 오는 마차도 같은 녀석들도 있었고.
“반갑다.”
이렇게 짧게 인사만 남기고 가 버리는 트라웃 같은 선수들도 있었다. 어쨌든 리그에서 첫손으로 꼽을 수 있는 선수들과 정다운 친목질을 한바탕 마치고 나서, 지혁은 글러브를 쥐었다. 2년 연속으로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한 멘데스와 지혁의 호흡을 보여 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