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75화 (176/204)

신선한 자극

[1회말, 내셔널리그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라인업은 1번, 부활한 선장, 앤드류 매커친. 2번, 신시내티의 핵, 조이 보토. 3번, 리그 최고의 슈퍼스타, 브라이스 하퍼! 이렇게 이어지겠습니다.]

[워싱턴 팬들이 벌써부터 하퍼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게 들리네요. 하하.]

[선발투수 자리를 클레이튼 커쇼에게 내줬으니까 말이죠. 워싱턴의 에이스인 맥스 슈어져가 등판하지 못한 한을 하퍼가 풀어 줬으면 하겠죠? 자, 이번엔 아메리칸리그의 선발투수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죠.]

엄청난 팡파르 소리와 함께 지혁이 마운드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역사상 최초입니다. 아시아인이 선발투수로 나서는 건 말이죠. 물론 보스턴의 크리스 세일이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는 바람에 등판하지 못하게 되어 대체 선발로 낙점되긴 했습니다만,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인이. 올스타전 선발 마운드를 밟습니다. 주인공은 말할 필요도 없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지-혁, 문입니다.]

작은 언덕에 도착한 지혁은 바로 방금 전까지 클레이튼 커쇼가 밟았던 마운드의 흙을 툭툭 차 내며 잘 골라냈다.

독특한 기분이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만 모인 메이저리그에서도 가장 최고의 선수들만 뽑힐 수 있는 영광의 무대. 그중에서도 또 가장 좋은 성적을 낸 선수가 가져갈 수 있는 선발투수 타이틀.

[이번 시즌 12승 2패. 한 달 전에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24번째 퍼펙트게임의 주인공이기도 했습니다. 엄청난 임팩트를 남기고 있죠?]

[작년에는 탬파베이 소속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했었고요. 2년 연속 출장이죠. 이제는 이 선수의 지배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해는 조금 주춤하지만 보스턴의 후지 미유타와 함께 ‘아시안 인베이전’의 한 축이기도 하죠.]

[또 이렇게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군요. 자, 아메리칸리그의 수비 위치 보시겠습니다…….]

몇 번의 연습 투구를 하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신기한 감정이 피어오르고 있어서. 하지만 지혁의 미소는 구심이 플레이볼 시그널을 보내면서 순식간에 싹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이벤트전이지만 이것도 승부는 승부야.”

투수는 어쩔 수 없는 존재다. 마운드에 서면 짓눌러야만 한다. 그게 마운드에 설 수 있는 사람의 숙명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상대는 지금까지 지혁과 맞부딪힌 적이 거의 없는 미지의 상대들이다.

데뷔도 탬파베이였고, 지난 4년간 아메리칸리그에서만 머물렀으니까. 물론 인터리그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두 번씩은 마주쳐 본 상대들이다. 하지만 서로가 낯선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낯섦’이라는 건 투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변수다. 또 ‘낯섦’이라는 건 지혁 개인적으로도 재미를 더해 주는 요소였다. 저들 역시 슈퍼스타들. 1년에 인터리그를 통해서만 가끔 몇 번 마주칠 수 있는 리그 최정상급 타자들과 상대해 본다는 것 자체가 지혁을 꽤 타오르게 했다.

[3구, 스트라이크! 카운트 원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지금 공의 컨트롤을 한 번 보세요. 정확하게 모서리를 찌르지 않습니까? 문의 싱커는 정말 치기 어려운 공인데 제구력까지 완벽에 가까워요. 타자들이 곤혹스러워 할 만한 공을 던집니다. 내셔널리그에서 문과 만나볼 경험이 적었던 선수들은 쉽게 대처하기 힘들 겁니다.]

[그렇군요. 앤드류 매커친, 4구를 잡아 당깁니다. 유격수 앞으로 흐릅니다. 카를로스 코레아가 달려나와 잡아내고, 1루로. 첫 번째 아웃카운트를 잡아냅니다.]

매커친이 1루까지 전력 질주를 해 봤지만 코레아의 송구는 널널하게 1루에 빨려들었다. 매커친도 지혁의 낯선 공에 바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어지는 타자는 신시내티의 조이 보토. 최성수 선배의 상위 호환인데다가 파워도 한 수 위다.

보토는 지혁이 까다로워하는 스타일이다. 사실, 모든 투수들이 까다로워하는 스타일일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눈이 좋은 야구 선수니까.

[볼! 하하. 이번엔 볼이 선언되었습니다. 방금 전에는 스트라이크 콜이 울렸던, 바로 그 위치로 들어갔는데요.]

[보토가 치지 않으면 볼이라고 판단하는 심판들이 실제로도 있을 정도입니다. 방금 공도 아주 아슬아슬했어요. 초구도 그랬던 것처럼요.]

공 두 개를 모두 모서리 끝으로 찔러 넣었다. 언제나 스트라이크 존을 완벽하게 재고 있는 보토와는 이런 승부를 한 번 해 보고 싶었다. 선구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타자인 보토와 제구 대결을 해 보는 것.

‘단 한 개도 만만하게는 안 주겠어.’

3구도 아슬아슬한 코스. 반 개 정도 바깥으로 빠진 공. 보토도 스윙을 반쯤 냈다가 거두었다. 4구는 높은 쪽을 공략하는 패스트볼. 몸 쪽 높은 코스로 들어간 공에 심판이 멈칫하더니 스트라이크 콜을 외친다.

[카운트 투 앤 투. 보토가 공 네 개를 지켜보며 스윙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아슬아슬한 코스로만 던지고 있어요. 보토의 표정을 보세요. 흥미로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하, 보토에게 이런 승부를 하는군요.]

[5구. 멘데스가 몸 쪽으로 붙어 앉았습니다. 5구! 다시 한 번 몸 쪽!]

선구안이 아무리 좋은 보토라도 투 스트라이크 카운트에 몰리고 나면 존을 넓힐 수밖에 없다. 그것을 감안한 멘데스의 리드였다.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았던 공보다 아주 약간 빠지는 공. 보토의 방망이가 나오지 않으면 이상한 코스다.

[때립니다, 2루수 쪽으로. 알투베가 여유 있게 잡아냅니다. 힘없는 타구였네요. 1루에 토스하며 투 아웃. 문이 보토를 상대로도 2루수 땅볼을 이끌어냅니다.]

[이게 바로 문의 정석적인 투구입니다. 낮은 보더라인을 움직이는 공으로 공략하죠. 타자들이 아무리 잘 쳐도 땅볼이 나올 수밖에 없는 피칭이죠.]

[올스타전에서도 어김없네요. 하하.]

[자, 타석에 브라이스 하퍼가 들어섭니다. 워싱턴의 홈 팬들이 엄청난 환대로 그를 반겨 줍니다.]

리그 최고의 스타성을 가진 괴물이자 내셔널스 파크를 홈으로 쓰는 워싱턴의 대표 스타, 브라이스 하퍼가 들어서자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환호성이 쏟아진다.

덥수룩한 수염과 건들거리는 폼, 그리고 엄청난 파워를 자랑하는 불과 스물다섯 살의 선수. 순식간에 악당이 되어 버린 듯한 느낌에 지혁도 나름대로 긴장을 곧추세웠다.

하퍼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타자다. 어떤 공이라도 불같이 들이닥쳐 외야 어디로든 때려 낼 수 있을 것 같은 우악스러운 타격 폼. 그 타격 폼을 받쳐 주는 천재적인 배트 컨트롤 능력, 무시무시한 파워. 트라웃이 모든 면에서 흠잡을 데 없는 깔끔한 완전체 같은 느낌이라면, 하퍼는 빈틈은 있지만 한번 물리면 즉사당하고 마는 독사 같은 느낌이다.

재미있는 건 그의 성격이다. 트라웃과는 치열한 수 싸움을 해야만 한다. 머리가 아주 좋은 선수다.

하지만 하퍼는…… 뒤가 없다.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

초구, 하퍼가 힘차게 걷어 올려 봤지만 관중석으로 들어가는 파울. 확실히 공격성은 대단한 타자다.

2구, 바깥쪽 패스트볼을 또 다시 경쾌하게 밀어 때리는 하퍼. 하지만 이번에는 3루쪽 관중석에 떨어지는 파울.

3구, 4구, 5구, 6구…….

지혁은 과감하게 존 안을 공략했고, 하퍼는 그때마다 방망이를 돌리며 커트해 냈다. 여섯 개 연속으로 파울이 나오자 진기한 광경에 관중들이 환호로 응해 준다.

[7구! 다시 파울. 이번에는 뒤로 빠지는 공입니다. 문과 하퍼의 이 대결도 재미있네요.]

[일곱 개 연속 싱커였죠? 문과 멘데스, 클리블랜드 배터리의 선택도 흥미롭네요. 그리고 하퍼의 대응도 재미있습니다. 하하.]

[8구. 파울! 하하하. 여덟 개 연속 파울.]

지혁은 아랫입술을 쭉 내밀어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하퍼도 방망이를 고쳐 잡으며 씨익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새끼, 스타성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만.”

지혁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검지와 약지 사이에 공을 끼웠다.

[아홉 번째 공, 던집니다!]

스타는 네가 해라. 승리는 내가 한다. 너클 포크가 춤을 췄다. 지금까지 여덟 개 동안 싱커에 타이밍을 맞춰 놓은 하퍼가 반응하려야 할 수가 없는 공이다.

[헛스윙 삼진! 하퍼를 돌려세우는 문. 하하하, 결국 변화구를 던졌습니다.]

[하퍼가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큰 스윙을 했습니다만, 갑자기 포크에 반응할 수는 없겠죠.]

[워싱턴의 홈 팬들이 긴 야유를 쏟아 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삼진인 게 변하지는 않죠.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2회로 갑니다!]

지혁은 악당이 된 기분을 만끽하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역시 재밌는 이벤트전이다. 물론, 아처의 말대로, 이겼을 때.

***

2회부터는 크리스 아처가 마운드에 올랐다. 아무리 선발투수라지만 여긴 올스타전. 많은 팬들에게 최대한 많은 투수들이 선보일 필요가 있으니까.

하지만 지혁은 뭔가 아쉬웠다. 다음 타석에 들어설 놀란 아레나도나 폴 골드슈미트, 코리 시거 같은 선수들과도 치열한 승부를 펼쳐 보고 싶었다.

이건 지혁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신선한 자극이었다. 저번 시즌 올스타전에는 왜 이걸 느끼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꾸만 호흡이 가빠져 온다.

올스타 경력이 오래 된 선수들은 태연하게 잡담이나 나누고 있는데, 지혁은 더 던지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매커친이 주는 아우라. 보토가 보여 주는 선구안. 하퍼가 들어섰을 때의 위압감. 그동안 지혁이 마주치지 못했던 리그 최정상의 타자들이 뿜어내는 새로운 자극이 지혁을 마구 몰아치고 있었다.

“저 녀석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걸.”

마운드 위에서 아레나도와 14구 승부를 하고 있는 아처를 바라보며 지혁은 슬쩍 웃었다.

아처는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였다. 승패의 부담감에서는 벗어나 있으면서도, 순수하게 실력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승부욕을 불태울 수 있는 그런 경기.

-워후-!

아처의 괴물 같은 슬라이더가 뚝 떨어져 내렸지만, 아레나도가 강하게 잡아당겨 선상을 찢어놓고 외야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3루수 마차도는 무릎을 꿇으며 백핸드로 공을 건져 올렸다.

마차도는 놀랍게도 무릎을 꿇은 채 1루수의 미트까지 레이저처럼 빨려 들어가는 송구를 뿜어냈다. 이 놀라운 수비에 지혁을 비롯한 모든 선수들이 자리에서 벌떡 이어나 뒷목을 잡으며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예쓰! 이거지!”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래, 이거다. 이게 올스타전이다.

지혁은 그냥 이벤트 게임에 불과한 경기로 치부했던 지금까지의 인식을 취소하기로 했다.

진짜 최고의 스타들이 모여,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최대 실력으로 순수하게 승부를 보는 곳이 바로 올스타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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