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MLB 올스타전] 내셔널리그 4 vs 2 아메리칸리그.
-내셔널리그, 7년 만에 올스타전 승리. 주인공은 브라이스 하퍼.
-브라이스 하퍼 만루포 쾅! 문지혁, 선발로 나서 1이닝 쾌투.
즐거운 잠깐의 이벤트가 끝났다. 그리고 후반기가 시작된다. 클리블랜드의 모든 선수단은 잠깐 쉬어가는 사이 다시금 각오를 다지는 시간을 보냈다.
안토네티의 ‘지혁 푸쉬 전략’은 여전히 유효해서 클리블랜드 시내 광고판에는 연일 새로운 모습의 지혁이 등장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진짜 목표이자 마지막 목표인 가을 야구가 다가오고 있다. 마지막 관문만 남아 있는 것이다.
가을,
가을 8월. 올스타전 기간 휴식을 가진 메이저리그 팀들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쯤이면 구단주와 단장들은 버튼을 눌러야만 한다. 계속해서 달릴 것이냐, 아니면 리빌딩을 택할 것이냐.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넘기면서 구단들은 어느 정도 청사진을 그렸고 후반기에는 그걸 실행해야 한다.
클리블랜드가 속한 아메리칸리그는 내셔널리그에 비해 극단적인 팀들이 몰려 있었다.
특히 양키스와 보스턴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상황에 3위 자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탬파베이와 토론토가 흥미진진한 장면을 연출하는 동부지구를 제외하고는 더 그랬다.
우선 서부지구는 휴스턴의 질주가 이어지고 있다. 댈러스 카이클이 심각한 부진에 빠진 것을 포함해 투수진의 단체 슬럼프를 겪었으면서도, 가공할 공격력으로 그 모든 것을 커버했다.
알투베, 코레아, 스프링어 등이 포진한 타자진은 상대 투수들에게 공포 그 자체니까.
오클랜드와 텍사스는 일찌감치 리빌딩을 진행 중이고, 시애틀과 LA 에인절스는 와일드카드를 목표로 치열한 경쟁 중이다. 두 팀은 와일드카드를 거머쥐기 위해 끝까지 자신들의 핵심 선수들을 지켰다.
중부지구. 클리블랜드의 독주 체제. 이미 5월부터 갖춰진 이 체제 때문에 나머지 네 팀은 희망을 잃었다. 그나마 5할 승률 근처에서 와일드카드를 향한 희망을 완전히 잃지는 않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제외한 세 팀은 서서히 시즌 포기에 들어갔다.
미네소타 트윈스는 자신들의 에이스인 어빈 산타나를 콜로라도 로키스에 트레이드했고, 그들의 핵심 2루수 브라이언 도지어는 FA가 되기 전에 애리조나에 새 둥지를 텄다. 애리조나가 다저스의 왕조 구축을 저지하기 위해 필사의 힘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캔자스시티 로얄스? 월드시리즈 준우승과 우승이라는 짧지만 강력했던 영광의 시대를 함께 했던 선수들을 떠나보냈다.
가장 충격적인 트레이드는 그들의 프랜차이즈였던 에릭 호스머를 양키스로 보낸 것이다.
양키스의 유일한 구멍이었던 1루수를 리그 수위권 선수인 호스머로 채움으로써 양키스는 더더욱 강해졌다. 또 중견수인 로렌조 케인도 끊임없이 트레이드설이 제기되었고, 포수인 살바도르 페레즈를 지키는 일도 요원해 보였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유망주들이 성장하는 것이라도 지켜봐야 하는 그들은 앞으로 몇 년 동안 암담할 것이다. 그뿐이다.
상황이 이러니 클리블랜드는 연패를 조금 해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어차피 가을 야구 진출 확정은 사실상 결정이 난 것이나 다름없다.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말이다.
***
“좋아. 오늘은 이 공으로?”
“응.”
살라자르는 요새 커터의 그립을 살짝 바꾸었다. 지혁은 살라자르와 멘데스의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살라자르가 쥔 그립을 살폈다.
지혁이 보기엔 달라진 걸 잘 모르겠지만, 살라자르는 매우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살짝 깊게 잡게 되면서 타석과 조금 더 가까운 쪽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나 뭐라나.
어쨌든 여유가 있는 팀 상황 덕분에 바빠진 건 멘데스였다. 왜냐면, 모든 투수들이 새로운 변화를 꿈꿨기 때문이다.
이건 프랑코나 감독의 지시이기도 했다. 지혁이 너클 포크를 연마하면서 기어이 실전에서 쓸 정도까지 성장시킨 것도 프랑코나의 지시를 뒷받침하는 큰 증거가 되었다.
“70년의 저주와 싸워야 한다는 걸 잊지 마. 항상 새로운 자세로 임해야 한다. 우리의 후반기 시즌은 새로운 변화를 위해 투자할 거야.”
말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지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하겠다는 강한 의지다.
“우린 압도적인 리그를 치르고 있는데, 하던 대로 하는 게 제일 좋은 거 아닌가?”
지혁은 처음 프랑코나의 말을 들었을 때 선수들에게 이런 의문을 제시했다. 하지만 2년 연속으로 1승이 모자라 월드시리즈 우승 문턱에서 미끄러진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손사래를 쳤다. 제이슨 킵니스의 표현은 예술이었다.
“우리는 하던 대로 하다가 피똥을 싼 사람들이야.”
킵니스는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난 2년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시카고 컵스가 반년 렌탈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데려왔던 리그 최강의 마무리, 아롤디스 채프먼을 무너뜨리고도 실패했던 재작년 7차전. 할 수 있는 최선의 플레이를 했고, 최고의 플레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투수, 클레이튼 커쇼를 넘지 못했던 작년 7차전.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 있지. 특별한 순간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거야. 작년 7차전이 끝나고 나서 감독님이 하신 말씀이었어. 그 말이 맞아. 중요한 순간에 꺼내 들 수 있는 카드가 하나씩 필요해. 그게 아니면 저주를 넘어설 수 없어.”
가만히 앉아 스파이크를 손질하고 있던 브랜틀리가 조용히 덧붙였다. 클리블랜드 타선에서 중심을 잡아 주는 최고의 타자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겸손하고 조용한 성격의 그다.
게다가 말수는 또 어찌나 적은지, 브랜틀리가 작정하고 의지를 다지는 날에는 그의 목소리를 한 번 듣기도 힘들 정도인 선수다. 그런 브랜틀리조차도 단호하게 말할 정도다.
그만큼 이들은 데여도 단단히 데인 선수들이다.
지혁은 어느 정도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규 시즌에 한 경기만 잘못 던져도 분노가 일고 짜증이 치솟는데,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2년 연속 패배했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건 지옥이야.”
멘데스는 여전히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비릿했다. 지옥 같은 패배감. 지옥 같은 좌절감. 아예 리빌딩 팀에서라면 느낄 수 없는, 아까운 2등만이 느낄 수 있는 절망에서 이번만큼은 벗어나기 위해서.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기로 작정한 듯했다. 그동안 해 오던 것들은 기본이고, 거기서 추가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도 더.
클리블랜드의 후반기는, 팀 성적과는 별개로 치열했다.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
확장 로스터가 시작되고, 9월이 되었다. 클리블랜드는 이전보다 승리하는 횟수가 조금 줄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기도 했다. 핵심 선수들은 자신만의 색다른 카드를 실전에서 테스트하고 있고, 로테이션 몇 명은 부상을 방지해 번갈아 가며 휴식을 취하고 마이너리그 선수들이 그 자리를 채웠으니까.
하지만.
“분위기는 아주 마음에 들어요. 어쩌면 이런 분위기가 저한테 더 맞는 것 같아요. 탬파베이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르고, 이 팀에서의 전반기와도 또 다르거든요.”
“어떤 면에서 그렇죠? 사실, 성적은 오히려 조금 안 좋아졌잖아요. 지혁 선수도 한 경기에서 크게 혼이 나기도 했고.”
“하하하, 그랬죠. 하지만 중요한 건 이거예요. 당장의 성적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
“정확히 어떤 의미죠?”
오랜만에 만난 조예은 기자는 몇 년 전 현장에서 보여 주던 초롱초롱함을 다시 보여 주었다. 잠시 한국으로 돌아가 메이저리그 현장에서는 멀어졌다가 이번 달부터 복귀한 그녀는 한국에서 찾아오는 기자들 중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잘하는 기자였다.
게다가 원래 친분까지 있었으니, 베이스볼코리아가 가장 많은 지혁의 단독 인터뷰를 따내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마이애미전에서 크게 혼이 났을 때, 너클 포크를 많이 던졌어요. 사실 그날은 너클 포크를 던지면 안 되는 날이었거든요. 하지만 감독님도 그렇고 코치님도 그렇고, 멘데스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도 너클 포크를 게임에서 잘 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컨디션이 안 좋은데 굳이 포크를 고집할 이유가 있나요? 싱커만 잘 들어가도 충분하지 않나?”
“우리의 목표는 단순한 1승이 아니니까요. 내가 컨디션이 안 좋으면 다른 팀들은 싱커만 노리고 올 수 있죠. 그럴 때 역으로 너클 포크를 찌를 수 있는 투수가 되는 게 지금 당장의 목표예요. 큰 경기에서는 그렇게 역으로 찌를 수 있는 게 중요하거든요.”
“아하.”
조예은은 볼펜 뒤쪽을 살짝 깨물며 뭔가를 열심히 적어 내렸다.
“그러면 요새 클루버가 커브보다 슬라이더를 많이 던지는 거나, 카라스코가 테일링이 달린 패스트볼을 많이 던지기 시작하는 것도…….”
“누나는 여전하네요. 맞아요. 다들 비슷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요. 변화하고 싶은 거죠. 변화해야 앞설 수 있다는 게 감독님 철학이에요.”
“흐응…….”
예은이 기사 내용을 한참 정리하는 동안 지혁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카페 창 밖을 멀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날씨가 점점 선선해지고 있다. 영락없는 가을 날씨가 찾아오고 있다. 물론 햇살을 정통으로 맞고 있으면 여전히 후덥지근한 것은 사실이지만, 비가 한두 차례 호쾌하게 쏟아지고 나니 가을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아, 떨리네.”
“응, 뭐라고?”
“아, 아니에요. 기사 마저 쓰세요.”
지혁은 무심코 본심이 튀어나온 것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가슴이 계속 두근거렸다. 기분 좋은 설렘이라고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설레는 것도 사실이기는 했지만,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지금의 지혁은 마치 클리블랜드의 숙원을 풀어 줄 만능열쇠처럼 되어 버렸으니까.
안토네티의 정책은 대성공이었다. 모든 클리블랜드 시민들에게 지혁은, 르브론이 하던 역할을 대신 해 줄 사람이 되어 있었다. 클리블랜드에게 트로피를 가져다줄 존재.
게다가 한국에서는 또 어떤가? 고병희에 이어 두 번째로 월드시리즈 반지를 차지할 거라는 강한 희망이 뭉게뭉게 퍼지고 있다.
툭하면 찾아오는 한국 방송사 사람들 때문에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미 국민 영웅이 된 지 오래고, 사람들은 끝까지 다다르기를 원한다. 심지어는 눈앞의 예은조차도 그렇다.
가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부담도 커져 간다.
‘이걸 이겨 내야 한다는 거지.’
큰 숨을 들이쉬었다. 향긋한 커피 냄새에 가을 냄새가 섞여 들어온다. 클리블랜드의 하늘은 눈부시게 새파랗고, 하얀 구름이 아름답게 떠가고 있다.
커다란 부담감과 가을 야구를 맞이한다는 설렘과 공포감 같은 것들이 한데 뒤섞여 지혁의 몸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메이저리그 정규 시즌 마지막 한 달. 9월이 지나가고 있다.
***
“아으윽!”
고통스러운 신음이 그라운드를 채운다.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 그냥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트레이너들이 곧장 응급 키트를 들고 대기하다가, 심판이 사인을 내자마자 전력 질주로 달려 나간다.
“이런, 씨발…….”
지혁은 가까운 곳에 서 있던 프랑코나 감독이 욕을 내뱉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 처음이었다. 프랑코나의 비속어를 들은 것은. 그만큼 시기가 좋지 않았다.
[자기 타구에 발등을 맞은 것 같죠?]
[강한 타구였어요. 발등 부분에 직격으로 맞았는데, 보통 스파이크에 저쪽은 이중으로 보호대를 덧대는 곳이거든요?]
[큰 부상은 아닐 수도 있을까요? 하지만 상당히 고통스러워 하는데요. 치즌홀 선수.]
[음, 조금 지켜봐야 하겠네요.]
로니 치즌홀. 클리블랜드 타선에서 가장 약점인 곳 한 군데만 꼽으라면 우익수다.
클리블랜드에 지명되어 자신의 커리어 내내 클리블랜드에서만 성장해 온 견실한 선수. 하지만 타격 생산력과 수비력 모두 A급이라고 보기는 힘든, 그야말로 ‘평범하지만 견실한’이라는 수식어와 딱 어울릴 정도의 선수.
그런 치즌홀을 계속해서 주전으로 쓰는 것은 외야 백업이 변변치 않기 때문이다. 대 좌완투수 스페셜리스트인 브랜든 가이어가 백업으로 있긴 하지만, 그는 벤치에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들어갈 때에나 자신의 존재감을 발휘하는 선수다.
외야 전천후 백업으로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던 테일러 네이퀸은 지혁의 트레이드 당시 탬파베이로 건너갔다.
프랑코나 감독은 외야 백업의 미비한 부분을 주전 선수들과 가이어의 적절한 로테이션으로 잘 커버해 왔다. 덕분에 그간 유리몸 기질이 있다고 평가받았던 브랜틀리도 풀타임을 무사히 소화하고 있고, 2년 차인 짐머 또한 체력적으로 조금 모자라기는 했지만 크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따라오고 있는 것이다.
[치즌홀, 안 되겠는데요. 트레이너에게 부축을 받으며 빠져나갑니다. 오른발을 땅에 딛지를 못하는군요. 충격이 상당한 모양입니다.]
[저 정도라면 발가락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뼈에 이상이 있을 수도 있어요. 클리블랜드의 입장에서는 날벼락이네요.]
[일단 브랜든 가이어가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잡힙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드러나지 않은 약점? 이런 게 그나마 하나 있다면 외야 로테이션이었거든요. 그리고 3루수 백업 문제도 있고요. 프랑코나 감독의 용병술로 그 문제를 지금까지 해결해 왔었는데, 하필이면 가을 야구를 코앞에 두고 이런 일이 또 터지네요.]
치즌홀의 어깨를 받치며 더그아웃까지 들어온 트레이너 한 명이 프랑코나 감독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프랑코나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얼굴에 가득한 땀을 닦아 냈다.
가을 야구를 코앞에 두고, 절대로 맞이하지 않아야 할 친구가 클리블랜드를 찾아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부상.
“Shit! 너무 아파!”
더그아웃에서 라커룸으로 향하는 컴컴한 통로 속에서 치즌홀의 고통 섞인 비명이 울려 퍼졌다. 클리블랜드의 가을은 다른 구단의 한겨울과 언제나 비슷했다. 그때처럼 냉혹한 기운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