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t pace
“감독님, 캘러웨이입니다.”
“들어와.”
프랑코나 감독은 감독실 안에서 반쯤 태운 시가를 물고 신문을 보고 있었다. 특유의 금테 안경이 콧잔등에 슬쩍 걸친 채로.
캘러웨이는 그가 들어가자 신문을 신경질적으로 탁 내려놓는 모습에서 프랑코나의 복잡한 속내가 조금 드러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생각해 보면 프랑코나가 자신의 속내를 유일하게 내보이는 공간이 바로 이곳이기도 했다. 어느 선수들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읽히지 않는 프랑코나에게도 감정을 배출할 수 있는 곳은 필요하니까.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몇 명의 코치들만이 프랑코나의 속을 은근슬쩍 엿볼 수 있는 셈이다.
“카라스코는 어떤가?”
“음, 좋은 소식 하나, 나쁜 소식 하나입니다.”
“나쁜 것부터.”
“손가락에 물집이 잡혔습니다. 조그만 크기라서 로테이션을 한 번 거르면 될 정도이긴 합니다.”
“……좋은 건?”
“투심의 각도가 굉장히 좋아졌습니다. 문의 도움이 컸습니다. 문의 싱커를 많이 참고해서 그립을 살짝 바꿨습니다. 던질 때의 느낌에 대해서도 서로 얘기를 하면서 맞춰 나가더군요.”
“실전에서 확인해야겠군. 그런데 로테이션을 걸러야 된다…….”
프랑코나가 테이블 위의 작은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닝도 고려해야 합니다. 작년에 처음으로 시즌 200이닝을 넘겼었죠. 스프링캠프와 올 시즌 초반에 그 후유증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지금 이닝이…….”
“207과 1/3이닝. 215이닝 선에서 끊어야 내년에 부담이 덜하겠지?”
“외우고 계셨군요. 그렇습니다.”
“일단 다음 경기는 거르도록 하지. 그러면 앞으로 두 경기에 등판할 수 있을 거야.”
“두 경기입니까? 그러면 이닝이…….”
“한 경기는 불펜으로 넣어 볼 생각이네.”
“예?”
“단기전에서의 원 플러스 원도 고려해야 하니까. 카라스코는 구위로 윽박지를 수 있는 선수지. 필요할 때가 있을 거야.”
휘유. 매번 그렇듯이, 캘러웨이는 감탄의 한숨을 내뱉었다. 테리 프랑코나가 어째서 리그 최고의 명장 반열에 올라 있는지를 확인할 때마다 나오는 한숨이다.
“카라스코에게 귀띔해 두겠습니다. 멘데스에게도요.”
“그래. 다른 녀석들은?”
“오늘은 드릴 말씀이 많겠네요. 먼저 톰린은 팔꿈치에 미세하게 찌릿거리는 현상이 있다고 하고…….”
캘러웨이의 보고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가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코칭스탭들의 레이더는 갈수록 예민해져 갔다.
선수들이 지쳐 있는 만큼 스탭들도 지쳐 있지만. 가을 야구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아주 조그만 허점이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령 허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스탭들이 모르는 것만큼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들은 지난 2년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아주 잘 알고 있다.
팀의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있어야만 한다. 플레이오프를 2주 앞둔 지금, 클리블랜드와 프랑코나는 사열의 기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
군대에서는 큰 훈련을 앞두고 내무사열을 실시한다. 그것도 아주 꼼꼼하고 철저하게. 있는 장비들을 죄다 깔아 놨다가 다시 싸매고, 그걸 다시 풀어 놨다가 다시 싸매고의 반복이다. 훈련 때 실수하지 않고 장비를 제대로 관리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런 내무사열을 몇 번이나 거치고도 정작 준비 태세가 발령되면 꼭 누군가는 탄창을 놓고 나간다. 누군가는 수통을 빼먹기도 한다.
훈련 전에 실시했던 수많은 사열들은, 실수의 확률을 줄여 주기는 하지만 실수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지는 못한다.
부상도 꼭 같다. 아무리 조심하고 방지하려고 애써도, 그건 확률을 줄이는 일일 뿐이다. 찾아 올 부상은 찾아온다.
[음. 트레이너가 올라오나요?]
[클리블랜드 벤치로 사인이 들어갔습니다. 어수선해지는군요. 스코어는 3대2, 한 점 차로 뒤지고 있는 미네소타 트윈스. 9회말 마지막 공격 상황입니다.]
로니 치즌홀은 자기가 친 타구에 발등을 맞아 가을 야구에 합류하기 사실상 힘들어졌다. 많은 선수들이 경미한 통증을 감내하고 뛰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차례는 코디 앨런이었다. 그리고 이건 치즌홀의 이탈보다 훨씬 더 큰 악재이기도 했다.
“안 되겠는데요?”
트레이너 중 한 명이 재빨리 더그아웃으로 돌아와 프랑코나 감독에게 보고한다. 더 볼 것도 없이 코디 앨런은 곧장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경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이동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클리블랜드의 구성원 중 그러길 바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가서 최대한 빨리 검진을 받고, 최대한 긍정적인 결과를 가지고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왜 하필이면 이제야 부상들이 터지는 거야?”
몇몇 선수들이 툴툴댔다. 그리고 몇몇 선수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입으로 꺼내기가 조심스러운 것이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가장 부상이 없어야 할 시기에 부상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하는 것. 가을 야구를 앞두고 다시 한 번 저주가 그들의 발목을 붙잡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일종의 전조처럼 느껴지니까 말이다.
지혁은 그런 선수단 중 가장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믿음이기도 했고, 또 2년 동안 처참했던 실패의 현장을 직접 겪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어서 그렇기도 했다. 어쨌든 지혁은 지금의 부상들이 저주의 전조라는 건 믿지 않았다.
부상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냥 일어날 뿐이다. 시기가 민감하다 보니 선수들이 그렇게 여기는 납득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부상은 그냥 부상이지 저주가 아니다.
지혁은 내심 각오를 다졌다. 팀이 이렇게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에이스가 버텨 줘야 한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 줘야 한다. 이튿날 선발 등판이 예정되어 있는 지혁이 뭔가 보여 주고 묘하게 안 좋은 분위기를 끊어 내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
2018년 9월 18일, 화요일. 텍사스의 글로브 라이프 파크.
“허리는 좀 괜찮으세요?”
“뭐, 괜찮다. 조금 저리긴 하는데 운동하는 놈이면 이 정도는 달고 사는 기지.”
시즌 이맘때가 되면 부상에 허덕이는 선수가 하나둘은 아니다. 특히 야구는 다른 종목에 비해 시즌이 길고 매일 경기가 있다는 특성 때문에 선수들이 부상을 당하기 쉬운 환경에 놓여 있다.
굳이 클리블랜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팀이 다 그렇다. 텍사스의 최성수는 두 달 넘게 DL에 올라갔다가 얼마 전 로스터에 복귀한 상황이었다.
“조심하세요. 수비도 좀 살살 하시고. 하하.”
“말도 마라. 작년까지만 해도 수비를 나가고 싶었제. 근데 요즘은 수비 나가는 게 무섭다, 무서워.”
잠깐 대화를 나눌 뿐이었지만 최성수는 상당히 지쳐 보였다. 신체적으로도 그렇고 심적으로도 그렇고.
“니도 부상 조심해라. 니는 내보다 한 달 더 해야 된다아이가?”
“예, 선배님.”
“그래. 니도 가 쉬어라. 오늘 살살 쫌 하고.”
“네. 선배님도 몸조심하시구요.”
최성수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텍사스 쪽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에는 지혁에 대한 부러움이 분명히 묻어 있었다. 최성수는 텍사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한 한 퍼즐로 낙점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텍사스가 리빌딩 버튼을 누른 이후, 최성수의 팀 내 입지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액 연봉을 오랫동안 받고 있는 그는 마이너리그로 내릴 수도 없으면서 유망주에게 경험을 쌓을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성적이야 기대치만큼 낼 수 있는 존재이지만, 텍사스 입장에서는 당장 성적을 내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걸 인지하고 있기 때문인지 요새 부쩍 컨디션이 떨어져 있기 때문인지. 어쨌든 최성수는 대화를 길게 끌지 않았다.
지혁은 내심 가을 야구에 대하는 자세나 마음가짐, 그리고 저주라고 불리는 70년간의 긴 징크스에 대처할 조언을 받았으면 했지만, 최성수가 누구에게 조언을 해 줄 처지가 아니라는 것만 다시 깨달았을 뿐이다.
지혁은 오늘의 라인업을 확인하면서 그 씁쓸함을 확인했다. 최성수는 부상에서 복귀했지만 벌써 몇 경기째 선발 라인업에 빠져 있었고 오늘도 마찬가지다.
“하아.”
이래저래 찬바람이 몰아치고 있구만. 이제는 꽤 선선해진 가을바람이 오늘따라 차게 느껴졌다. 클리블랜드에게는 냉혹한 가을을 예감하게 하는 쌀쌀함이고, 최성수에게는 좁아진 입지를 실감하게 하는 차가움일 터.
“내 일만 해야지, 내 일만. 야구나 잘 하면 돼.”
지혁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결국 목표는 이 찬바람 위에 올라타고 끝까지 나아가는 일이니까.
***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오늘 문은 삼진 퍼레이드를 보여 주네요.]
[텍사스의 어린 타자들이 쉽게 방망이에 맞힐 수 있는 공이 아닙니다.]
[6이닝을 다 소화하지 않았는데 벌써 탈삼진이 10개입니다. 물론 투구 수도 조금 많긴 합니다만. 방금 공으로 92구를 던졌습니다. 타석에는 로날드 구즈먼이 들어설 차례입니다.]
지혁의 투구는 여전한 위력을 뽐냈다. 이미 시즌을 포기하고 선수들에게 경험을 쌓아 주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텍사스를 상대로, 지혁은 평소보다 일부러 더 파워풀한 투구를 했다.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 놓고 나면 투구 수가 조금 늘어나는 걸 감수하고라도 더 힘을 실어 던졌다. 삼진을 많이 잡는 것만큼 팀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일은 또 없으니까.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루킹 삼진, 헛스윙 삼진, 낫아웃 삼진, 파울팁 삼진. 가리지 않고 쭉쭉 뽑아냈으니 당연하다.
“어?”
하지만 캘러웨이 코치가 타임을 요청하고 터덜터덜 걸어왔다. 지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라온 캘러웨이에게 물었다.
“왜요?”
“투구 수가 많아. 여기서 바꿔 줄까?”
“아뇨.”
“어차피 이번 타자까지야. 감독님이 팬들한테 기립박수 받을 기회를 주겠다고 하시던데.”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그리고 전 항상 기립박수를 받았는데요.”
“그래. 이 싸가지 없는 놈아. 너 잘났다.”
“하하.”
“어쨌든 변하지 않아. 이번 타자까지야. 그리고 끝나고 바로 병원으로 가서 검진 받으라고 하시네.”
“또요? 일주일 전에 받았는데요?”
“가서 네 예쁜 레이디랑 데이트나 하라고.”
심판이 매서운 눈으로 마운드를 노려보고 있는 통에 두 사람의 잡담은 오래가지 못했다. 캘러웨이는 다시 온 길을 걸어 내려갔다.
“아직 쌩쌩한데. 한 이닝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혁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텍사스 쪽의 벤치도 부산스럽다. 그리고는 곧, 더그아웃 안에서 한 명이 걸어 나왔다. 양귀 헬멧을 쓴 채로. 최성수 선배였다.
“6회에 대타?”
이상한 타이밍이었다. 최성수 선배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아마 이건 텍사스 내부의 알력 다툼이나 정치 싸움에 관한 문제일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최성수 선배는 좌투수에 약한 게 분명한데도 지금 올라온다는 건, 일부러 지혁이 내려가기 전에 대타로 낸 것이리라.
“후우.”
지혁은 씁쓸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승부는 승부다. 애초에 최성수를 상대로 우습게 보고 던질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지혁이 나름대로 최성수를 동정한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지도 않는다. 지혁도 그걸 잘 알고, 최성수도 그걸 잘 안다.
[대타입니다. 성수 초이. 대니얼스 감독이 독특한 선택을 했네요.]
[컨디션을 확인해 보는 차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경기 후반 들어서 팽팽해지는 상황이 나온다고 해서 초이를 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죠. 장기 부상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으니 확인이 필요할 겁니다.]
[그렇군요. 한국인끼리의 대결입니다. 문의 초구, 몸 쪽! 스트라이크입니다. 초이가 엉덩이를 뒤로 쭉 빼 봤습니다만 존을 통과해 들어갔군요.]
최성수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건 공 하나에 바로 드러났다. 선구안이 장점이었던 그지만, 방금 공은 완벽한 몸 쪽 스트라이크였다. 그런데 존을 재지 못하고 엉덩이를 뒤로 피했다는 것 자체가 정상 컨디션이 아니라는 소리다.
멘데스는 주저하지 않았다. 존 안으로 곧장 공략에 들어갔다. 바깥쪽 먼 코스, 싱커, 꽉 찬 공. 지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승부는 승부다.
2구. 싱커가 제대로 긁혔다. 살짝 높은 코스인 듯 떠가던 공이 홈 플레이트 근처에 다다라서 흉포하게 움직였다. 최성수의 방망이는 출발부터 늦었다. 이 공은 아주 제대로 맞아 봐야 땅볼밖에 나오지 않는다.
따악!
그런데 이 타구음은 뭐지? 지혁의 본능이 소리쳤다. 머릿결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타이밍이 늦은 스윙, 유독 좋았던 무브먼트, 최성수의 간절한 팀 내 사정.
이런 것들이 뒤범벅된 타구가 지혁 쪽으로 곧장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 지혁 쪽으로.
[투수 강습! 문!]
피해야 하나? 글러브를 대야 하나?
판단할 시간은 0.1초도 채 되지 않았다. 투구 이후 한 발로 서서 밸런스를 완전히 잡을 수 없는 지혁은 몸을 완전히 빼낼 수 없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젠장!”
지혁이 날아오는 타구를 향해 글러브를 내밀었을 때는 이미, 공이 몸통의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아. 이런. 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