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
외야수 세 명, 내야수 네 명, 그리고 포수. 여덟 명. 경기장 위에 있는 선수들 중 우리가 흔히 ‘야수’라고 부르는 포지션이다.
그리고 야수들을 재단할 때 수비력은 굉장한 지표 중 하나다. 좋은 수비력을 가진 야수들이 많은 팀은 언제나 경기가 편하게 흘러간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이렇게 수비력으로 세상에 평가받아야 하는 야수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수비는 경험이다’. 물론 경험이 적은 선수더라도 타고난 센스와 천부적인 감각으로 수비를 잘하는 선수도 있다. 어디에나 돌연변이는 있으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수비가 좋아진다. 달리기가 갑자기 빨라져서 커버할 수 있는 수비 범위가 늘어나거나, 어깨가 갑자기 좋아져서 레이저 송구를 쏘아 보낼 수 있게 되는 게 아니다.
경험은 본능을 바꿔 버린다. 특히 수비에서의 경험은 더더욱 그렇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본능적으로. 타구의 방향과 속도를 예감하게 한다. 1초 이후의 상황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위대한 수비수들은 모두 1초 앞을 볼 수 있다. 그건 수많은 타구를 받아 본 경험에서 오는 예측이기도 하고, 수비력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이들의 생존 본능이기도 하다.
그러니 선수들의 수비력은 일반적으로 시간이 갈수록 농익기 마련이다. 1초 앞이 모두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0.1초 앞은 누구나 볼 수 있게 된다. 경험이 쌓이면 말이다.
자, 다시 원점으로. 야구장 위에는 여덟 명의 야수가 있다. 하지만 수비 팀에는 한 명의 선수가 더 있다. 그것도 내야와 타자 사이를 관통하는 한가운데에. 투수의 수비력은 오랫동안 경시되어 왔다. 투수의 수비력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투수는 수비 말고도 워낙 막대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투수 역시 야수가 된다. 예컨대 한 경기에서 투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나가는 중전 안타는 꼭 한 개씩은 나온다. 투수가 잡아 줘야 하는 코스 근처로 향하는 공들.
물론 공이 중견수 방향으로 향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배트에 잘 맞았다는 의미이고, 투수와 타자 사이의 거리가 워낙 가깝다 보니 타구도 굉장히 빠른 게 일반적이다. 이제 막 투구 동작을 마친 투수가 그 공을 잡아내지 못하더라도 투수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우리가 ‘투수의 수비력’을 논할 때는, 투수 앞으로 떨어지는 공에 대한 대처를 두고 말하곤 한다. 가령 번트에 대처하는 능력이라든지, 힘없이 구르거나 역회전이 걸린 공에 대한 글러브질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두고 투수의 수비력을 재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혁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많은 경험을 가진 사내다. 투수의 몸 쪽으로 오는 강습 타구? 머리통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가는 중전 안타?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많이 받아 봤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많이. 18년의 경력은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지혁은 순간적으로 0.1초 앞을 봤으니 말이다.
“으아아!”
퍼억!
지혁의 몸 앞까지 다다른 공은 영락없이 왼쪽 갈빗대를 정통으로 강타할 모양새였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오른팔에 낀 글러브를 가져다 댔다.
둔탁한 소리가 나는 걸로 봐서 공이 글러브 위를 때린 모양이었다. 0.1초가 가져다 준 선물이다. 글러브를 벌려서 공을 잡아낼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글러브의 바깥쪽 면으로 공에 직접 강타당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빠르게 날아오던 공은 날아오는 충격 그대로 갈비뼈를 때렸다. 글러브 위에 맞았다지만 충격을 다 줄이지는 못했다. 무지막지하게 아팠지만 그래도 참을 만했다. 하지만 진짜 고통은 그 다음에 찾아왔다.
지혁의 몸 위에서 강하게 튕겨나간 공이 공중에 떠 있던 지혁의 왼쪽 무릎 안쪽 뼈를 정통으로 때린 것이다.
“아오 씨바!”
뼈에 공이 맞는 순간 눈앞이 희뿌예졌다. 순간적으로 눈물이 고인 것이다. 그러나 지혁의 몸은 소리를 지르면서도 본능대로 움직였다. 희뿌연 눈으로도 마운드 밖으로 굴러 내려가는 공을 쫓았고, 무릎이 얼얼하게 울리는데도 한 발을 내딛어 몸을 숙여 공을 주워 들었다.
[문! 공에 맞았습니다! 비틀거리면서 공을 주워 1루로! 1루로! 성수 초이를 잡아냅니다. 대단한 투혼을 보여 주는 문. 하지만 마운드 위에 쓰러져 있습니다.]
아주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가 이내 온몸이 얼얼해지는 것 같은 고통이 몰려왔다. 공에 직접 맞은 갈빗대 쪽이나 무릎도 아팠지만, 순간적으로 온몸이 엄청난 긴장에 빠졌던 탓인지 몸 어느 곳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모든 근육이 일제히 소리를 질러대는 기분이었다.
지혁은 마운드에 누워서도 어디를 부여잡아야 할지 몰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
엄청난 침묵이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 찾아들었다. 야수들이 뭐라 소리치면서 지혁에게 다가오는 것만이 들릴 뿐이다. 몇 초 지나지도 않아 트레이너들이 지혁의 곁에 다가왔다.
“야, 어디야? 허리에 맞은 거 아니야?”
“아뇨, 갈비 쪽이요…….”
“파스부터 일단 뿌려! 응급처치부터 해!”
“무릎, 무릎도요. 왼쪽…… 악!”
차가운 액체 파스가 지혁이 정통으로 맞은 부위 위에 덧뿌려진다.
지혁은 생각했다.
‘씨발, 그냥 기립박수 받고 내려갈걸.’
아파 죽겠네.
***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텍사스에서 주로 이용하는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는 숨 막히는 침묵만 감돌았다. 다행히 경기장에서 걸어 나오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무릎을 내딛을 때마다 얼얼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찌르르한 고통은 여전했다.
트레이너가 운전하는 개인 차량에 타기는 했지만,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무릎은 계속 비명을 냈다.
“끄으응.”
“많이 아프냐?”
“네.”
“뼈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 거야. 그래도 걸어 나왔으니까. 무릎뼈 나가면 힘을 싣지도 못해.”
“그거 위로 맞죠?”
“…….”
트레이너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차를 몰았다. 속도가 빨라지면 지혁에게 충격이 갈 테고, 그렇다고 천천히 몰자니 마음이 급하고. 신호에 한 번 걸릴 때마다 트레이너는 짜증을 냈다.
“그러고 보니 너. 왼쪽 무릎 수술하지 않았었냐?”
“네. 십자인대.”
“한 번 수술했던 쪽이라니…… 하필이면.”
“안 좋아요?”
“당연하지. 몸에 칼을 댔었던 부위잖아. 인대 문제가 아니라, 무릎 근처에 칼을 댔었는데 또 그쪽이니까.”
“……이번에는 위로가 아니라 겁을 주고 계신 것 같은데.”
“트레이너니까, 임마. 있는 그대로 말해 줘야 될 거 아니야.”
“그럼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미리 말 좀 해 주시지.”
지혁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농담처럼 받아치는 척하며, 언제 따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는 신을 만나야 했다. 지혁은 알고 있다. 신을 만나면 해결될 문제다.
‘도착하면 화장실부터 가는 척해야겠다. 화장실부터.’
차량은 곧 병원에 도착했다. 구장 근교에 있는 이 병원은 텍사스 쪽 선수들을 전담으로 다루는 병원이기도 했다.
“저, 트레이너님.”
“왜?”
“화장실부터 먼저 가면 안돼요?”
“이 와중에? 검사부터 받고 가지?”
“쌀 것 같아요.”
“아오, 젠장! 그래. 혼자 갈 수 있냐? 같이 들어가 줄까?”
“갈비뼈랑 무릎뼈가 모두 부러졌어도 제 프라이버시는 지킬 겁니다.”
“……그래, 갔다 와. 문 앞에 있을 테니까.”
지혁은 절뚝절뚝거리며 화장실 안에 들어갔다. 다행히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지혁은 작은 칸 하나를 열고 들어가 변기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와 봐요, 신 님.”
…….
“아! 빨리요. 급하다니까요.”
…….
“아, 이거 뭐야? 갑자기 왜 이래요?”
지혁은 짜증을 냈다. 하지만 신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혹시 사라 져버렸나? 이대로? 몸도 아픈데 정신까지 어지러워지려던 찰나에.
똑똑똑.
누군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지혁은 신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급한 와중에 장난질이라니, 면상에 주먹을 한 대 꽂아 줄까 보다.
“문.”
하지만 이내 정신이 아득해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문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는…….
“나와요.”
후우. 오늘 하루는 너무 힘들구나. 지혁은 좁아 터진 작은 화장실 안에서 진짜 신을 찾고 싶었다. 망할 영감탱이, 야구의 신 말고. 진짜 하느님을.
지혁은 몸을 일으켜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 앞에서 지혁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두 명이었다. 이곳에서 볼 거라고는 정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방금 당신, 신이라고 했습니다. 맞죠? 나와 보라고 했던 거, 급하다고 했던 거, 갑자기 왜 이러냐고 했던 거. 다 들었어요.”
“잠깐만. 내 말부터 들어요. 언젠가는 말할 생각이었어요.”
“……나와서 얘기합시다.”
패트릭 에이버리. 그리고 후지 미유타. 텍사스의 이름 모를 병원, 화장실에서. 그것도 시즌 중에. 이번 시즌 내내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었던 두 사람이 지혁의 앞에 서 있었다.
***
“임마, 에이전트가 왜 여기 있어?”
“저도 몰라요. 연락 없이 그냥 찾아왔다니까요?”
트레이너는 당혹스러운 말투로 X-Ray를 찍고 있는 지혁에게 물었다. 하지만 지혁도 정말로 몰랐기에, 패트릭이 왜 지금 여기 있는지를 말해 줄 수 없다.
“젠장, 프런트 쪽 사람하고 연락은 해 놨는데…… 내가 에이전트랑 무슨 말을 하냐. 난 그냥 네놈 몸만 지켜보면 되는데. 왜 이렇게 불편한 만남을 갖게 만들어?”
“아, 글쎄, 제가 부른 게 아니라니까요. 진짜예요. 마침 텍사스 근처에 있었는데, 제가 부상당하는 걸 보고 바로 이 병원으로 왔다잖아요.”
“그걸 믿으라고?”
“미치겠네 진짜. 하.”
“나도 미치겠다, 임마.”
“X-Ray 찍을 때 말씀 많이 하시면 안 돼요! 아실 만한 분들이 왜 이러시나?”
무섭게 생긴 간호사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두 사람은 곧장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으슥한 침묵이 끝나고, X-Ray 결과를 보기 위해 의사에게 이동할 때까지 지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하필이면 지금 걸리다니. 패트릭에게. 그런데 후지는 왜 있는 거지? 후지가 여길? 잠깐, 후지도 신을…… 아, 모르겠다.
18년간의 경험은 마운드 위에서 지혁을 누구보다 여유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줬다. 꼭 마운드 위만이 아니다. 더그아웃에서도, 라커룸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지혁은 겪어 왔던 일을 한 번 더 경험하는 삶을 살았다.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미리 예측할 수 있었다. 0.1초 앞을 항상 봐 왔으니까 말이다.
지혁의 유일한 역린이라면 신의 존재였다. 신의 존재 덕분에 그는 0.1초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신의 존재는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될 절대적인 비밀이다. 그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건 후지가 유일했고, 또 유일해야만 했다. 그 비밀이…… 지금.
지혁은 문득 4년 전 즈음을 떠올렸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만에 하나라도 지혁의 옆에 있는 신의 존재를 알아채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건 패트릭이 될 것이라고.
그게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지만 결국 결과는 이렇게 됐다.
이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고 있는 의사 앞에 앉았을 때, 지혁의 얼굴은 거의 시푸르둥둥해져 있었다.
후우우우. 깊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표정이 너무 안 좋네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문. 반갑습니다. 난 닥터 알버스 핀입니다. 그냥 알버스라고 불러 줘요.”
“……예.”
“자, X-Ray부터 봅시다. 먼저 이건 갈비뼈예요. 자…….”
흐응. 닥터 알버스가 거무튀튀한 X-Ray 사진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모니터 위에 뜬 사진을 크게 했다가 작게 했다가 좌우로 돌렸다가 해 보다가 빙긋 웃었다.
“다행이네요. 뼈에 금이 가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비디오를 받아 봤는데 그 순간에 글러브로 막았더군요? 그게 정말 큰 도움이 됐을 겁니다. 큰 이상은 없네요. 단순 타박이에요. 이쪽은.”
“하아…….”
“음? 좋은 소식인데도 왜 그렇게 한숨을 쉬는지 모르겠네. 무릎 쪽이 걱정되어 그렇군요? 무릎 쪽도 괜찮을 겁니다. 한번 보죠.”
여전히 얼얼했지만, 오히려 지혁은 이제 아픈 줄 몰랐다. 진짜 문제는 무릎이 아니었으니까. 닥터 알버스가 열심히 X-Ray를 살피는 동안 지혁은 닫혀 있는 작은 문 바깥을 흘끔거렸다. 패트릭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후지는 패트릭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수술 흔적이 있네요. 이건 재건술이네요. 인대가 꽤 많이 망가졌었나 봐요?”
“…….”
“문? 십자인대 수술 했었죠?”
“아, 예, 예. 했었습니다.”
“무릎에 수술 흔적이 있는데…… 이번에 공을 맞은 부위가 그 근처네요. 이전에 수술했을 때 뼈를 건드렸던 적이 있었나요?”
“어…… 전 잘 모르겠는데요.”
“흠.”
닥터 알버스는 묘한 소리를 냈다. 심각한 것 같기도 하고, 흥미로운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네요. 수술까지 했으니 뼈가 조금 약해야 정상인데.”
“네?”
“부모님께 감사하셔야겠어요. 아주 통뼈인가 보네요. 뼈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인대 쪽이나 근육 쪽도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공에 맞은 걸로 인대가 손상되지는 않는데다가 무릎 쪽 근육이 많은 곳에 맞지도 않았으니까요.”
“괜찮다는 말씀이신 거죠?”
“네.”
“근데 왜 이렇게 아프죠?”
“뼈에 멍이 들었어요. 멍이 가라앉고 붓기가 가실 때까지는 얼얼하고 찌르는 것 같을 겁니다. 단순히 멍이 든 것뿐이니 그냥 쉬면 나을 겁니다. 클리블랜드 병원으로 돌아가면 차라리 입원을 해서 사나흘 정도 푹 쉬는 게 좋겠습니다. 무릎에 힘이 안 들어가게끔 하면 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클리블랜드 쪽으로 진단서와 소견서를 보내겠습니다. 트레이너님과 얘기하면 되겠군요.”
닥터 알버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문을 휙 열어젖혔다.
“트레이너님, 잠시 들어오시고. 문, 나가셔도 좋습니다.”
지혁은 무릎이 아픈 줄도 모르고 몸을 일으켰다.
열린 문으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패트릭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