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마주한 사나이
“의사가 뭐라고 합니까?”
패트릭의 첫 질문은 완전히 패트릭다웠다. 앞뒤는 다 잘라먹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보만 단도직입적으로 딱 물어보는 스타일. 패트릭의 뒤에 선 후지는 어색한 듯 서성거리고만 있다.
지혁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일단은 패트릭의 말에 대답했다.
“갈비뼈 쪽은 가벼운 타박상이고, 무릎은 뼈에 멍이 들었대요.”
“얼마나 쉬라고 하죠?”
“뼈에 멍이 가실 때까지. 사나흘 입원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하고.”
“다행이네요. 자, 갑시다.”
“어딜요?”
“어디긴? 클리블랜드. 집으로요.”
“아직 경기 중인데요? 시리즈 1차전밖에 되지 않았는데…….”
“구단하고 얘기는 이미 됐습니다. 1년 떨어져 있었다고 감도 같이 떨어졌네. 나 이런 걸 허투루 처리하는 사람 아닙니다.”
“……그랬지. 트레이너님께 얘기하고 나올…….”
“얘기 다 됐습니다. 출발하면 됩니다.”
패트릭은 지혁이 제대로 걸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는 곧장 병원을 빠져나갔다. 먼저 나간 패트릭과 몇 걸음 뒤에서 쫓아가는 지혁 사이에서 후지가 어물쩍거린다.
패트릭이 성큼성큼 걸어가 주차장에서 시동을 걸어 두는 동안, 후지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녀석과도 해야 할 얘기가 산더미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질문이라면.
“야, 걸렸냐?”
“……네.”
“내 얘기도 했냐?”
“아뇨, 그건 아닌데…….”
“아닌데?”
후지는 한숨을 쉬었다.
“저 사람 패트릭 에이버리예요. 머리 돌아가는 건 진짜…….”
“그래. 알았다.”
그랬지. 어떤 하나를 보고 판이 돌아가는 상황을 유추하는 능력은 지혁이 지난 38년 인생과 이번 인생까지 모두 더하는 동안 만나 본 어떤 사람보다도 탁월했지.
그런 패트릭과 함께 클리블랜드로 날아가는 동안,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긴 비행이었다.
***
클리블랜드 집에 도착하자 집 안에 찬바람 하나 없이 따뜻한 공기가 훅 감돈다. 지혁이 클리블랜드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시니에가 집에 들러 온도를 조절해 두고 갔나 보다.
후지는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그제야 조금 어린애다운 감탄을 냈다.
“와, 형. 집이 좀 바뀌었네요.”
“뭐가?”
“그냥 느낌이…… 조금 아기자기해진 것 같은데요. 소파 쿠션도 바뀌었고, 침대도 그렇고.”
“아, 그러네. 그냥.”
“여자친구 생겼습니까?”
이건 뭐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겠네.
“네, 뭐…… 만나는 사람은 있습니다.”
“좋네요.”
패트릭은 짧게 대답하고는 익숙한 사람처럼 지혁의 냉장고에서 캔 맥주 한 개를 꺼냈다. 그리고 후지나 지혁에게는 권하지도 않고 캔을 뜯는다.
치르르르, 소리를 내며 맥주 거품이 부글부글 솟아올랐다. 그 모습이 마치 앞으로 계속 솟아날 패트릭의 질문 모습인 것 같다.
“자, 시작해 봅시다. 서로 물어봐야 할 게 너무 많으니까.”
패트릭은 테이블에 엉덩이를 슬쩍 걸터앉고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심지어 약간은 비장해 보일 정도였다. 마치 각오가 다 되었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부터 할게요.”
“좋습니다.”
지혁은 먼저 치고 나왔다. 패트릭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이런 것들을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텍사스에는 왜 와 있었던 겁니까?”
가장 궁금했던 것. 패트릭과 후지는 왜 텍사스에 있었는가.
“후지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꽤 오래 전부터 어깨 쪽에 심각한 부상이 있습니다. 보스턴 내부에서는 이미 최소 2~3년간은 전력 외로 취급하고 있죠. 당신과 부딪혔던 등판이 마지막이었어요. 그날 경기는 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활활 타는 불꽃 비슷한 것이었죠.”
패트릭은 후지 쪽으로 잠깐 시선을 돌렸다.
“그게 텍사스에 온 거랑은 무슨 상관이죠?”
“후지가 더 이상 보스턴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오늘 보스턴 쪽 로스터에서 제외됐어요. 당분간 복귀는 불가능해요.”
“당분간? 장기 DL에 올라갔나요? 아니면 설마…… 웨이버 공시라도 된 겁니까?”
“웨이버? 절대로 아니죠. 후지가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면. 아마 영영 복귀하지 못할 겁니다.”
“형, 저 은퇴하려고요.”
후지가 끼어들었다. 패트릭은 그 말에 긴 한숨을 쉬었다.
“은퇴라고?”
“어차피 못 던져요. 제 몸은 제가 잘 알아요. 2년 동안 너무 무리했어요. 그리고 아시잖아요. 악마랑 계약한 거.”
지혁은 움찔거렸다. 본능적으로 말을 하고 있는 후지가 아닌 패트릭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패트릭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사람처럼 표정에 미동이 없다.
“후지는 은퇴를 원했습니다. 당신과의 등판을 마지막으로, 아주 강하게. 보스턴에서 후지가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어필한 케이스는 이게 유일합니다. 보스턴 쪽 사람들이 계속해서 후지를 뜯어말리기는 했지만 결국 두 손을 들었죠. 후지는 은퇴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보스턴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 당신에게 온 겁니다.”
“그래서 텍사스로?”
“네. 당신이 1차전 등판이라 미리 연락하지는 않았습니다. 와서 기다리려고 했죠.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텍사스에 내렸는데, 내리자마자 공항 로비에서 TV로 당신이 부상당하는 장면을 봤어요. 곧장 클리블랜드 구단 쪽에 연락해서 텍사스 쪽 지정 병원으로 간다는 걸 알아냈고. 우리도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막 병원에 도착해 보니 당신이 입구에서 들어가고 있더군요.”
“형이 화장실에 들어가는 걸 봤어요. 나는 패트릭한테 나오면 만나자고 했는데…….”
“사람들 눈이 많은 병원 로비에서보다는 화장실에서 따로 만나서 상태부터 살피고 싶었을 뿐입니다. 난 에이전트고 같이 있던 사람은 트레이너니까. 구단과의 문제도 있으니까요. 어쨌든, 그 화장실에서 나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됐고.”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정보를 머릿속으로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혁은 옆에 앉은 후지가 은퇴를 한다는 사실이 피부로 확 와닿았다.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다는 것. 아직 스물둘에 불과한 어린 선수인데. 어렸을 때부터 해 온 야구를 끝내야 하는 시점에 온 것이다.
만약 후지가 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혁이 커브를 연습하겠다고 잠시 동안 신을 떨쳐 버리지 않았다면?
후지는 평범한, 혹은 평범함보다 못한 선수일지는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야구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때 아닌 죄책감이 밀려왔다.
“궁금한 건 더 없습니까?”
“아. 그…… 그러니까.”
지혁은 뭐라고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잠시 주저했다.
“악마. 후지가 악마라고 부르는 그 존재. 알고 있냐고 물으려 했죠?”
“네.”
“나도 그걸 물으려 했었죠 원래는. 당신도 알고 있냐고. 그리고 그렇게 물어보는 걸 보니 당신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군요.”
“……네.”
“어떻게 알게 됐죠?”
패트릭은 덤덤해 보였다. 하지만 지혁은 그대로 다시 되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알게 됐죠? 내 사연은, 그러니까 말하자면 좀 길어서…… 먼저 듣고 얘기해 줄게요.”
“좋습니다. 상관없으니까. 당신이 클리블랜드와 계약을 하고 나서, 나는 쭉 보스턴에 있었습니다.”
지혁이 겨울에 클리블랜드로의 이적을 마무리 짓고 나서, 패트릭은 후지를 살피기 위해 보스턴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때 당시에 이미 후지는 어깨에 부상을 안고 있는 상태였다. 그때만 해도 1년 정도 푹 쉬면서 재활에 힘쓴다면 충분히 복귀가 가능하다는 게 보스턴 측 의료진의 소견이었다. 패트릭이 후지를 끌고 다닌 병원에서도 한결같이 같은 소리를 했다.
온몸에 급격하게 부하가 걸려 있는 상태고, 어깨는 특히 더 그렇다. 쉬지 않는다면 어깨부터 시작해 전신이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후지는 쉬어야만 했고. 패트릭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후지는 절대로 쉴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생떼를 부리거나 고집을 피웠다. 어린 녀석이 고집은 또 쇠심줄 같아서 돔브로스키 단장도, 존 패럴 감독도, 팀 동료들인 크리스 세일과 데이빗 프라이스도, 천하의 패트릭도 후지를 돌려놓지 못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선수라면 자신의 몸을 먼저 생각하는 게 정상인데. 분명히 더 큰 부상으로 이어질 텐데. 이 친구는 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일까?”
그때부터 패트릭은 후지를 면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선수들이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경우에는 신상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으니까.
하지만 단순히 신상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게 됐다.
자꾸 혼자 방에 틀어박힌다든가. 화장실에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다든가. 야심한 새벽에 갑자기 혼자 산책을 나간다든가. 패트릭을 떨어트려 놓으려는 서투른 액션들이 잦아졌고, 후지 혼자 방에 있을 때는 무언가 자꾸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나 싶었습니다. 그건 내가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이었죠. 뭐, 정신적인 문제는 아니었으니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믿었지만. 결과는 은퇴가 되었군요. 내 상상을 넘어서는 최악의 결과네요.”
패트릭은 잠깐 이야기를 끊고 고개를 떨구었다.
“당신은 잘못 없어요, 패트릭.”
후지가 어설픈 위로를 건넸다. 그리고 자조적인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잘못은 악마에게…… 아니, 아니지. 악마랑 계약한 나에게 있어요.”
“어쨌든. 내가 관리하는 선수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발견되면 그건 긴급 상황입니다. 그래서 난 후지를 보다 타이트하게 쫓았죠. 후지는 계속 혼자 있으려 했고. 그런 날들의 반복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지간히 바빴어도 이렇게까지 보스턴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을 거예요.”
후지에게서 이상한 냄새를 맡은 패트릭은 끈질기게 때를 기다렸다. 후지가 혼자 있으려 하는 상황에서는 온 신경을 다 기울여 주목하기도 수십, 수백 번. 지혁과의 맞상대가 예정되어 있던 날의 사흘 전에 패트릭은 결심을 했다. 여느 때처럼 방에 혼자 틀어박혀 있는 후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문을 따고 들어가기로.
때는 금방 찾아왔다. 후지가 하루 종일 어깨를 부여잡으며 끙끙거리다가 혼자 방에 들어갔고, 패트릭은 미리 준비해 뒀던 마스터 키로 방문을 따고 후지를 급습했다. 그리고 패트릭은.
“악마를 보았죠.”
“봤다구요?”
지혁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건 정말로 예상 밖의 일이었다.
지혁이 생각하는 신이라면, 그리고 그동안 겪어 왔던 신이라면 분명히 패트릭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라졌어야 정상이다. 눈 깜짝할 새도 주지 않고 사라지는 게 신의 주특기니까. 아니, 신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왔었다.
“네. 악마라고 하기엔…… 음, 너무 동네 할아버지 같더군요. 어쨌든 나는 그를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후지와 악마의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후지와 악마 사이의 이야기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군요.”
패트릭은 헛웃음을 흘렸다. 자기가 말하고도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그 이야기를 믿었습니까?”
지혁은 마른침을 삼키며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패트릭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믿어야지 그럼.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후지의 방에 들어와 있는 게 15층짜리 건물을 타고 창문으로 올라온 사람이라고 믿을 수는 없잖습니까?”
“그걸 믿는다고요? 그 허무맹랑한 얘기를?”
“당신도 믿었잖습니까?”
“저요?”
“문. 당신도 후지와 악마 사이의 이야기를 믿었잖아요. 나라고 믿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아니, 그건…….”
“내가 찾고 모으고 보고 느낀 후지의 일본 시절 자료들. 아무리 봐도 메이저리그는커녕 더블 A급 선수도 안 되는 투수였어요. 일본에서도 2군에나 어울리는 투수였죠. 그런 투수가 갑자기 100마일짜리 패스트볼을 뿌린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어요. 살아남아야겠다는 필사적인 각오로 린스컴의 투구 폼을 따라 해 봤더니 구속이 오르더라. 얼핏 납득이 될 것 같지만 이것도 넌센스죠. 악마와 마주하고 나서는, 그 전까지 아무 것도 아니었던 투수가 갑자기 메이저리그 특급 선수가 된 계기가 이해가 되었단 말입니다.”
지혁은 솔직히 많이 놀랐다. 이 세상 누구도 믿지 않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후지를 정신병원에 데려가는 게 일반인들의 선택일지도 몰랐다. 자신도 헛것을 봤다고 생각하거나.
하지만 패트릭은 납득하고 있었다.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얼마나 시간이 걸려 납득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패트릭은 이 상황을 명백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미.
“문.”
패트릭은 맥주를 한 모금 꿀꺽 들이키더니 지혁 쪽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장 처음 만났던 날일까? 데이토나 컵스에서 방출당하고, 데이빗 더그 감독에게 연락처를 받아 전화를 하고, 플로리다 어느 카페에서 처음 마주쳤던 때?
“나는 그런 투수를 한 명 더 압니다. 그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투수, 그러다 갑자기 이전까지는 던지지도 않던 공을 던지는 투수. 그것도 메이저리그급으로.”
패트릭이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당신.”
패트릭은 모든 것을 알아냈다.
이제는 지혁이 대답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혁 혼자서 대답해서는 안 되었다. 신과 함께여야 했다.
클클클. 신이 웃음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