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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180화 (181/204)

해방감

“아주 재밌어. 아주 좋다고. 이렇게까지 흥미로운 건 오랜만이야! 다들 고맙네. 그리고 패트릭. 아주 훌륭한 추리였어.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완벽했네.”

신은 껄껄 웃어 댔다. 모두의 시선을 단숨에 빼앗아 버린 신은 사뿐사뿐 움직였다. 모두의 고개가 다 같이 돌아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첫날 지혁에게 찾아왔던 복장 그대로를 입고 있는 신은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 테이블 위에 툭 얹어 두었다.

한편의 연극을 하는 것 같은 과장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공간의 분위기를 지배해 버린 신은 몸을 빙그르르 돌려 세 사람을 동시에 바라봤다. 가볍게 두 팔을 벌리고는 중세식 인사를 하는 듯 가볍게 무릎을 까딱해 보인다.

지혁도, 후지도, 패트릭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런 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후지와 패트릭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혁은 넋이 빠져나가려는 걸 억지로 단단히 부여잡고 있기로 했다. 신이 남들에게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지혁에게는 약간의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꼭 그런 것뿐이 아니더라도 오늘은 이미 충분히 충격적인 날이기도 했지만.

공에 맞았고, 병원에 다녀왔고, 후지는 은퇴를 한다 하고, 패트릭은 신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신은 패트릭에게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아, 머리야.”

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가 고요하고 어색한 공기를 깨는 유일한 말이었고, 또 시작점이었다. 패트릭이 입을 열었다.

“또 보는군요.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흐흐, 나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존재지. 그리고 몰랐다는 건 거짓말 아닌가? 이 친구도 나와 계약을 했다는 걸 정확하게 유추해 냈잖은가.”

“제가 틀렸길 바랐습니다.”

“왜지?”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현실이라고 믿기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요.”

“좋아, 하지만 이게 현실이지. 지금은 어떤가?”

패트릭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여기저기를 불안하게 훑던 패트릭과 지혁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지혁은 눈빛으로나마 말해 주고 싶었다. 미안하지만 이게 현실이라고.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패트릭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않을 수 없군요. 우리가 단체로 미친 게 아니라면.”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선뜻 모습을 보인 걸세. 받아들일 수 있는 친구니까. 세상엔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네.”

“일주일 전, 제게 했던 말은 모두 사실이겠죠?”

“물론. 후지에겐 남은 선수 생명이 없네. 재능을 받기 이전의 후지 미유타로 돌아갈 게야.”

“……좋습니다. 그럼 문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문도 그런 계약을 맺었고, 언젠가는 후지처럼 은퇴하게 되는 겁니까?”

“그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봐야지.”

패트릭의 시선이 잠시 후지에게 멎었다가 다시 지혁에게 향했다.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지혁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난감했다.

“난 당신들의 에이전트입니다. 그리고 이번 일처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당신들의 은퇴일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난 그걸 알아야만 합니다. 반드시.”

패트릭의 말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힘이 담겨 있어서,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알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후.”

거짓말을 조금도 보태지 않고. 노히터 게임을 달성할 때보다, 퍼펙트게임을 완성시킬 때보다 훨씬 더 긴장되는 순간이다. 평생의 비밀이라고 생각했는데.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싱커, 샀습니다.”

“역시 그랬어.”

“또…….”

“또? 아, 혹시 패스트볼? 구속이 좋아진 겁니까?”

순간 커브를 말하려다 흠칫했다. 패트릭이 말을 끊어 준 게 차라리 나았다. 커브는 내기의 대가이긴 했지만 선수 생명까지 소모하지는 않았으니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패트릭 입장에서는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 듯 이마를 짚는다. 그리고는 제일 중요한 걸 물어볼 것이다.

“언제 은퇴합니까? 후지처럼 당장 내일이라고 하면 진짜 나한테 죽을 줄 알아요.”

“음…… 이번 시즌까지 마무리하고 나면, 여섯 시즌 남았어요.”

“여섯 시즌이라. 여섯 시즌. 당신이 나를 만난 게 5년 전이니까…… 열한 시즌? 거기다가 싱커와 패스트볼까지 샀다고? 염병, 당신 엄청나게 오랫동안 야구 할 팔자였구만.”

털어놓았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비밀을. 패트릭이 이 와중에도 머리를 팽팽 돌리고 있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지혁의 관심 밖이었다.

물론 회귀했다는 사실만큼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신을 만났다는 걸, 또 재능을 선수 생명과 교환했다는 걸 털어놓는 순간 마음이 몹시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 누구도 갖지 못할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죄책감 같은 것이 마음 한구석에서 그를 괴롭히고 있다. 또 패트릭은 그를 공정하지 않은 선수로 볼지도 모른다. 약물을 한 선수들과 다를 바 없이 취급할 수도 있다. 그래서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비밀을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흐흐, 그건 해방감이네.”

물끄러미 지혁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던 신이 지혁의 마음을 읽은 모양이었다.

“해방감이라고요?”

“그래, 자넨 죄가 없어. 그냥 선택받은 것뿐이지.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네. 누군가 나에게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고 그 호의를 누리게 된다면, 누구나 약간의 죄책감을 갖기 마련이지. 하물며 자넨? 별 볼 일 없는 선수여야 했는데 퍼펙트게임까지 만들지 않았나. 흐흐흐, 자네 스스로도 모르게 무의식적인 죄책감을 갖고 있던 게지. 그걸 털어놨으니, 그 죄책감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진 게야.”

신의 말에는 강한 설득력이 담겨 있었다. 탬파베이의 마이너리그에 있던 시절. 대체 어디서 이런 투수가 갑자기 등장했냐는 의문에 어색한 웃음으로 넘길 수밖에 없던 순간들. 미스테리 피처라는, 진짜 미스테리한 일의 주인공인 지혁을 알게 모르게 압박하던 별명. 후지의 커브를 던지기 시작했을 때, 그 공을 받아 주던 포수들의 이상한 시선들.

동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한 노력파라는 모습으로 커버해 왔지만 실제로는 신의 특권을 누려 왔던 지난 순간들이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이것들은 분명히 지혁의 깊은 어딘가에 씨를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그런 법이지. 특권을 주지 않으면 신을 원망하고, 정작 특권을 쥐어 주면 전전긍긍해한다네. 이 세상에서 단 한 명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리면서도, 그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해하지. 안 그럴 것 같다고? 아니, 모든 인간이 다 그렇네. 그렇지 않은 인간들을 사이코 패스라고 부르잖아. 내가 누누이 얘기하지 않았나? 인간들은 재밌다고 말이야. 흐흐흐.”

신은 한바탕 즐겁게 웃더니 다시 테이블로 가 자신의 중절모를 머리에 얹었다.

“자네들 덕분에 요새 참 재미있어.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모습들을 자네들을 통해 보고 있네. 강한 욕망, 향상심, 노력, 성취. 도박, 실패, 좌절, 분노. 자네들의 이런 모습과 감정들이 야구장 위에서 살아 숨 쉬고 있네. 아주 즐거워. 진심이야.”

“잠깐만요. 갈 겁니까?”

“내가 가긴 어딜 간다고. 아까도 말했잖나. 나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존재라고. 이제는 내가 있어도 도움이 될 게 하나도 없네. 현실의 일을 하라고, 패트릭 에이버리. 자네는 비상한 친구야. 평범한 인간이 절대로 아니지. 이 두 녀석을 잘 도와주게. 덕분에 재미가 몇 배가 되고 있으니.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흐흐.”

“…….”

신의 한마디는 패트릭을 강하게 일깨웠다. 현실의 일을 하라.

“현실의 일을 하라…….”

신이 사라졌다. 패트릭은 신의 말을 곱씹었다.

“하, 오늘 하루, 더럽게 길구만.”

보스턴에서 텍사스로 날아와 신까지 만난 패트릭에게도, 경기에 등판했다가 타구에 맞아 병원에 갔다가 평생의 비밀까지 내보인 지혁에게도 오늘 하루는 너무 길었다. 현실의 일은 내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일단, 좀 잡시다.”

“패트릭, 오늘 일은…….”

“당연한 소리 하지 말아요. 어차피 남들에게 이런 말을 해 봤자 믿지도 않을 겁니다. 누가 믿겠어요? 야구의 신, 아니 악마? 하여튼 그런 존재라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현실의 일이나 합시다. 나는 후지의 일을 마무리해야 하고, 당신의 케어에 더 신경을 써야 하고.”

“나는 야구나 잘 하고.”

지혁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 어차피 변하는 건 없다. 은밀한 비밀은 비밀로 덮어 두고, 현실의 일을 해야 할 뿐이다.

***

“15일 DL에 올리면 시즌 막바지에 복귀가 가능합니다. 한 경기 시범 등판으로 몸을 풀게 한 뒤…….”

“괜찮을까?”

“……글쎄요. 2주 정도면 타박상은 금방 낫지 않겠습니까?”

프랑코나는 안도의 한숨인지 아니면 고민의 한숨인지 모를 긴 호흡을 내뱉었다. 약간의 침음이 흐르는 것은 덤이었다.

“트라우마나 공포가 남았을 수도 있어.”

“투수 하면서 강습 타구를 받아 본 게 한두 번은 아닐 겁니다.”

“캘러웨이 코치. 투수 생활 하면서 공에 직격당한 적이 있나?”

“어……있죠. 직접 맞지는 않았지만, 굴절된 타구는 맞아 본 적 있습니다.”

“그 이후에 아무렇지도 않던가?”

70년의 숙원을 풀어 줘야 할 마지막 열쇠였던 지혁이, 마운드에서 공에 직격당해 내려갔다. 클리블랜드의 입장에서는 타이밍이 아주 좋기도 했고, 또 아주 나쁘기도 했다. 큰 부상이 아닌 데다가 괜히 없는 통증을 만들어 내 DL에 올릴 필요도 없으니까, 필요했던 휴식을 확실하게 부여할 수 있다는 게 캘러웨이의 생각이었다. 아주 좋은 타이밍이라는 것.

하지만 프랑코나는 만에 하나라도 생길 지혁의 정신적 내상을 걱정했다. 170킬로미터가 넘는 빠른 타구가 몸에 맞는다는 건 단순한 외상 이상을 의미할 수 있다.

공에 대한 두려움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몸에 스며들고, 그건 빌어먹게 예민한 투수들의 스위치를 통제할 수 없는 지경까지 만들곤 한다.

프랑코나는 감독 생활을 하며 그런 트라우마를 겪는 투수들을 수도 없이 만나 봤다. 만약 지혁에게도 비슷한 게 생겼다면, 지금의 타이밍은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녀석의 정신력에 달려 있겠죠. 그리고 제가 봐 온 문은 그 정도로 정신력이 흔들리는 놈이 아닙니다.”

캘러웨이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단순히 너클 포크를 멋들어지게 재현해 준 데서 오는 애정이 아니었다. 리그 최고의 투수코치로서 갖는 확신이었다.

“좋아, 일단 문과 얘기를 해 봐. 조금이라도 이상한 게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하지만 자네가 정상이라고 판단했다고 해서 시즌 말미에 등판을 줄지 안 줄지는 확정지을 수 없네.”

“알겠습니다. 살펴보고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캘러웨이는 감독실의 문을 닫고 나와 라커룸으로 향했다. 걱정하는 선수들 사이에 둘러싸여 짐을 챙기는 지혁이 보였다.

“이봐, 문, 짐은 다 챙겼냐?”

“네. 뭐, 어차피 금방 다시 돌아올 건데, 굳이 라커 정리까지 해야 할까 싶어서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뺄 것도 없네요.”

“여유만만하구만? 마운드에서 쓰러질 때는 썩은 고목나무마냥 픽 하더니만.”

“에이~ 코치님도. 제가 뭘 또 픽 하고 쓰러졌어요? 그 순간까지도 공을 막아 내려고 발버둥 치는 게 전국방송에 다 나갔는데.”

지혁은 농담을 던졌다. 캘러웨이도 실웃음을 흘리며 지혁의 머리를 한 번 헝클었다.

“확실히 큰 부상은 아니네. 입은 살아 있는 걸 보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니까요.”

“무릎에 감은 그거나 빨리 떼 버리고 돌아와. 2주 동안 푹 쉬고.”

“네. 근질근질하겠네요. 가을에 제대로 화끈하게 던져야겠어요, 하하.”

웃어 보이고는 멘데스와 린도어와 함께 쓸데없는 농담이나 하고 있는 지혁을 바라보며, 캘러웨이는 프랑코나에게 보고할 내용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 오히려 텐션이 더 올라갔다고. 어째서 부상을 당한 뒤에 한층 더 홀가분해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여~ 다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컨디션 관리들 잘 하라고! 나는 휴가 간다!”

“시끄러워, 약골아!”

“우우~.”

약간의 위화감이 들 정도로 지혁은 밝아 보였다. 이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패트릭이 지혁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 것 때문에, 지혁이 오히려 후련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로 아무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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