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81화 (182/204)

상대는 누구?

의외로, 좋았다. DL에 오른 지혁의 마음이었다. 홀가분해진 마음은 지혁의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았다. 특히 요즘처럼 패트릭과 후지가 지혁의 집에서 거주하는 동안에는 더 그랬다. 이제는 패트릭에게 숨기고 있는 게 없다는 것 자체가 지혁에게 정신적인 자유로움을 주었다.

신과의 계약은 끙끙 앓아 가며 고민에 고민을 반복하던 비밀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지혁의 삶을 크게 방해하지는 않았으니까. 야구판이라는 게 워낙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선수들이 많고, 지혁도 그런 선수들 중 하나였다. 물론 그런 선수들이 다 지혁처럼 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들이 보기에 지혁은 어느 순간 싱커를 던지기 시작해서 리그 최고의 클로저 중 한 명이 된 잭 브리튼이나, 어느 날 갑자기 커터를 던져 봤다가 왕조를 노리는 다저스의 주전 마무리가 된 켄리 젠슨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냥 숨기고, 덮어놓고, 자연스럽게 새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나름대로는 적응했었다고 여겼었지만.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막상 패트릭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나니 이렇게 편한 걸 보니까 말이다.

“이거 읽어 봤습니까?”

“뭔데요?”

“AL 포스트시즌 프리뷰. 올해부터 MLB.com이랑 ESPN이 합작해서 뭔가를 한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꽤 디테일한 자료가 나왔네요.”

패트릭은 방에 틀어박혀 계속 저걸 읽고 있었던 모양이다. 단순히 포스트시즌 프리뷰라고 하기엔 꽤 두꺼운, 책자로까지 제작된 자료를 지혁에게 넘긴다.

“팬들을 위한 자료라고 해서 그냥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읽어 두면 꽤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읽어 둬요.”

“땡큐.”

패트릭은 곧장 다시 방에 들어갔다. 여전히 한 손에는 핸드폰을 쥐고 SNS들을 체크하면서. 그는 후지의 곁에 머무는 1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다. 지독한 워커홀릭이다.

“어련하겠어.”

지혁은 혼자 중얼거리며 책을 폈다. 패트릭의 저런 모습이 어쩌면 조금은 그리웠던 것 같기도 하다. 회귀한 이후 천재 에이전트인 패트릭과 이렇게까지 떨어져 지내 본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이렇게 필요한 자료를 찾아 주는 것도 늘 패트릭의 역할이었고 말이다.

이제 일상이 완전해진 것 같다. 지혁을 위해 뒤에서 항상 노력하는 패트릭이 곁에 돌아왔고, 더 이상 패트릭에게는 아무런 숨기는 것도 없다. 2% 모자랐던 부분이 채워진 기분이다. 그래서 이번 DL 기간은 조바심이 나지도 않았고, 압박감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자, 아메리칸리그 포스트시즌 프리뷰. 서부지구 1위. 휴스턴 애스트로스.”

소리 내 패트릭이 건네준 자료를 읽어 내렸다.

* * *

서부지구 1위 - 휴스턴 애스트로스.

Overall (MLB.com / ESPN)

공격력 - S / S

수비력 - B+ / A

팀 주루 - A / B+

백업요원 - A / A+

선발투수 - B / B+

불펜 - B / A-

벤치 - B+ / B

-총평 : 압도적인 공격력으로 부족한 마운드를 커버할 수 있는, 리그 최강의 공격력을 보유한 팀.

휴스턴의 야수들은 어떤 방패도 부숴 버릴 것 같은 위압을 준다. 호세 알투베, 조지 스프링어, 알렉스 브레그먼, 카를로스 코레아. 리그에서 좋은 타자로 10명을 줄 세우면 그 안에 네 명이나 자리한다.

하지만, 가을 야구는 단기전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단기전에서는 방망이보다 마운드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커리어 최악의 부진을 겪은 댈러스 카이클. 여전히 2% 모자란 랜스 맥컬러스와 콜린 맥휴. 알렉스 콥이 중심을 잡고는 있지만 휴스턴의 마운드는 부실하다.

휴스턴의 공격력이 리그 평균을 아득히 초월했다고 해도, 그들에게도 타격 사이클은 존재한다. 만약 가을 야구에서 타격 사이클이 떨어진다면, 압도적인 시즌을 보내고도 타이틀에 다가가기는 힘들 것이다.

* * *

동부지구 1위 - 뉴욕 양키스.

Overall (MLB.com / ESPN)

공격력 - A+ / S

수비력 - A+ / A

팀 주루 - B / B-

백업요원 - B+ / B+

선발투수 - B+ / A-

불펜 - A+ / S

벤치 - A / A+

-총평 : 생각보다 훨씬 빠른 리빌딩,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 결과물은 환상적인 신구 조화로 이어졌다.

작년부터 리그를 폭격하기 시작한 애런 저지와 개리 산체스는 가공할 파워를 보여 준다. 브렛 가드너와 에릭 호스머는 팀의 중심을 잡는다. 타일러 오스틴, 글레이버 토레스, 그렉 버드, 클린트 프레지어 등의 신인들은 활개를 치고 있다.

에이스 소니 그레이를 제외하고는 답답한 선발진이 조금 걸린다. 다나카의 건강. 피네다의 기복. 세베리노는 경험이 없다. 하지만 불펜은 리그 최정상급이다. 불화가 조금 있었지만 결국 타일러 클리파드, 델린 베탄시스, 아롤디스 채프먼이 모두 남았으니까.

양키스의 문제는 분위기에 쉽게 휩쓸린다는 것이다. 어린 선수들이 라인업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고, 이건 큰 태풍이 몰아칠 때 키를 잡을 능숙한 조타수가 많지 않다는 뜻이다. 상대가 누구더라도 4 대 0 스윕승이 가능한 팀인 반면, 0 대 4 스윕패도 가능한 팀이다.

* * *

중부지구 1위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Overall (MLB.com / ESPN)

공격력 - B+ / A

수비력 - A / A-

팀 주루 - A- / A

백업요원 - B / B+

선발투수 - S / S

불펜 - A+ / S

벤치 - A+ / S

-총평 : 완벽한 투수진. 짜임새 있는 야수진. 가을 야구에 합류한 그 어느 팀보다도 밸런스가 훌륭한 팀이다. 이번에야말로 70년의 저주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페르난도 멘데스가 중심이 된 타선은 엄청나게 강하지는 않지만 클러치 능력이 대단하다. 에드윈 엔카나시온, 카를로스 산타나, 마이클 브랜틀리는 가을에 더 강해지는 남자들이다. 휴스턴만큼 강하지도, 양키스만큼 익사이팅하지도 않지만, 가장 밸런스가 잡힌 타선이다.

투수진은 그 어느 팀도 비견할 수 없다. 오직 다저스만이 가능하다. 문지혁, 코리 클루버, 대니 살라자르, 카를로스 카라스코. 누가 1선발로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유일한 단점이었던 5선발은 어차피 가을에는 쓸 일이 없다. 불펜은 3년 연속 리그 1위를 기록했다. 설명이 필요 없다.

이 팀의 가장 큰 적은 70년이라는 시간 그들을 괴롭혀 온 저주다. 시카고 컵스는 100년이 넘게 그 저주에 시달렸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운과 악재를 피해 갈 수 있을까?

* * *

아메리칸리그에서 가을 야구를 치를 세 팀은 확정되었다. 작년과 달라진 것은, 보스턴 레드삭스가 있었던 자리에 뉴욕 양키스가 들어섰다는 점이다.

성공적인 리빌딩의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빨랐고, 또 효과적이었다. 뛰어난 유망주들이 핀 스트라이프를 입고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뽐냈고, 양키스에서의 첫 풀타임 시즌을 치른 소니 그레이는 이전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재현했다.

반면 보스턴은 엄청난 투자를 하고도 결국 와일드카드로 내려앉았다. 선발진의 한 축이었던 후지가 문제를 겪었고, 타선의 응집력도 너무 떨어졌다. 앤드류 베닌텐디와 무키 베츠가 힘을 냈지만, 다른 선수들의 성적은 오히려 곤두박질쳤다. 노쇠화가 심각한 헨리 라미레즈와 더스틴 페드로이아에 시즌 내내 부상에 신음한 젠더 보가츠, 처절한 부진을 거듭한 포수 자원들까지.

어쨌든 그런 보스턴이 와일드카드 한 장을 가져간다. 나머지 와일드카드 한 장을 두고 경쟁하는 팀은, 다른 팀도 아닌 탬파베이 레이스다.

서부지구와 중부지구가 압도적인 1강 체제로 달려간 것에 비해 동부지구는 2강 2중 1약의 형태를 유지했다. 탬파베이는 그들의 팀컬러를 그대로 유지했다. 좋은 선수를 팔아 훌륭한 유망주로 메운다.

이번 시즌도 마찬가지다. 지혁이 빠져나온 이후로 빈자리가 크게 드러날 거라고 여겼었지만, 그 자리를 제법 탄탄하게 메운 선수가 출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하, 브랜트, 이 녀석.”

브랜트 허니웰. 이상하게 지혁을 잘 따르던 괴짜 같은 녀석.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스크류볼을 정말 멋지게 던지는 녀석. 이 녀석은 지혁이 전생에서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이제는 안정적인 2선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크리스 아처, 브랜트 허니웰의 원투 펀치. 뒤를 받치는 트레버 바우어와 호세 드 레온. 파괴력은 떨어지지만 잠재력은 엄청나다. 게다가 롱고리아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공격력도 리그 평균 정도는 되고, 수비력은 말할 필요도 없다. 숨이 막히는 지경이다.

실제로 시즌 내내 탬파베이와 부딪힐 때마다 질식할 정도의 수비에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생생하니까. 오랫동안 괴롭혔던 잔부상을 훌훌 털어 낸 키어마이어는 외야 전체를 커버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고, 아다메스와 맷 더피가 짝을 이룬 키스톤은 내야 전체에 그물망을 쳤다.

이런 탬파베이와 보스턴이 와일드카드 매치에서 맞붙는다면?

“재밌겠는데.”

지혁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파이팅 하나는 엄청날 들소 감독도 떠올랐고, 어린 선수들이 자유롭게 뛰놀 수 있는 라커룸 분위기도 떠올랐다. 지혁 같은 선수들은 또 나타나서 라커룸 분위기를 이끌어 주고 있을 것이다. 탬파베이는 좋은 팀이었으니까. 지금도 분명 그럴 것이다.

“그나저나 누구랑 붙게 되려나.”

포스트시즌 프리뷰를 읽고 있자니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휴스턴? 양키스? 아니면 보스턴과 탬파베이의 승자? 누구여도 좋다. 빨리 가을 야구를 하고 싶다. 누가 상대가 되어도 재미있을 것이다. 물론 질 생각은 없고 말이다.

* * *

2주가 쏜살같이 흘렀다. 지혁이 DL에 올라 있는 동안, 클리블랜드는 온전한 주전으로 단 한 경기도 치르지 않았다. 프랑코나는 철저하게 선수들에게 휴식을 줬고, 완벽한 로테이션을 가동했다. 선발투수들은 주 1회 등판에 5이닝을 크게 넘기지 않았고, 불펜진 역시 한 주에 많아야 2~3회 등판하는 것으로 끊었다. 주전 야수들은 사흘 연속 출장한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의 로테이션이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5승 8패의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두기는 했다. 좋은 선수들을 영입해 오기 위해 팜의 유망주란 유망주는 죄다 끌어다 썼기 때문에,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재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주전 선수들이 쉬는 동안 기회는 마이너리거들에게 돌아갔지만, 만족스러운 경기력을 보인 선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프랑코나가 초점을 맞춘 곳이 가을이라는 것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지혁은 시즌 마지막 네 경기를 앞두고 팀에 복귀했는데, 선수들 역시 시즌의 경기 결과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모처럼 복귀한 그라운드 위에는.

“후우욱. 후우욱. 후우욱.”

어깨에 튜브를 달고 근육을 풀어 주고 있는 투수들의 모습이나.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 야, 너 임마, 뱃살 좀 빼야 되겠다.”

스트레칭에 중점을 두고 있는 야수들의 모습밖에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네가 없는 사이에 스위치가 켜졌어.”

멘데스가 지혁에게 다가와 등을 퍽 하고 쳤다. 야구선수 아니랄까 봐 손은 더럽게 맵다.

“아파, 임마.”

“아, 참. 약골이었지. 하하하!”

“새끼가…….”

“농담이야, 농담. 그래도 네가 타구에 맞아서 실려 나갔던 게 우리들 머리 위에 느낌표를 띄웠다고.”

“엉? 무슨 소리야?”

“가을이 다가왔다는 소리지. 하나둘 실려 나가기 시작했으니까. 지금은 봐. 다들 스트레칭이랑 근육 케어 훈련들만 하잖아. 지금은 공을 던지는 거나 다이빙을 해야 하는 수비 연습, 풀 스트레치를 해야 하는 라이브 배팅은 의미가 없는 시간이야. 괜히 몸만 다치지.”

멘데스는 고무 밴드를 지혁에게 건넸다.

“너도 공 던질 생각 말고 몸 관리나 해. 어깨에 감고 발목을 잡는 걸 반복하는 것만 30분이야. 하하, 감독님 엄명이거든.”

공을 쥐고 싶어서 DL에서 풀리자마자 일찌감치 경기장으로 달려왔건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멘데스가 ‘감독님 엄명’이라는 말만 덧붙이지 않았어도 불펜 피칭을 하러 달려갈 생각이었는데.

“좋아, 그럼 좀 도와줘.”

“나야 언제든지.”

지혁은 두 다리를 쫙 벌리고 앉아 어깨에 단단한 고무 튜브를 감았다. 그리곤 천천히 호흡을 내뱉으며 양쪽 발목을 잡기 위해 몸을 굽혔다. 멘데스는 지혁의 등 뒤에서 상체를 천천히 밀며 도왔다.

“으아아, 살살 밀어.”

“엄살 부리지 마.”

“야, 근데 넌 누구랑 붙었으면 좋겠냐?”

“포스트시즌?”

“응.”

멘데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휴스턴.”

“휴스턴? 왜?”

“가을에 들어가면 타격 사이클은 자연스럽게 떨어져. 단기전이 주는 압박감은 그러니까. 휴스턴 같이 공격이 센 녀석들이 감을 좀 잡기 전에 만나는 게 낫지 않겠어? 만약 휴스턴이 디비전시리즈를 이기고 챔피언십에 올라온다면, 그때는 공격을 감당하기 쉽지 않을 거야.”

“흠, 일리 있네. 아오! 살살 밀라고.”

“하하, 미안, 미안. 넌? 누구랑 붙었으면 좋겠냐?”

“음…… 글쎄. 난 누구여도 상관없기는 한데.”

지혁은 정말로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조금이나마 더 편한 상대는 아마 탬파베이 혹은 보스턴의 승자일 테다. 탬파베이는 친정 팀이라는 게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탬파베이의 타선이 다른 팀들에 비해 상대하기 수월한 건 맞으니까. 보스턴도 이제는 그렇게 강하지 않고.

“헤이, 다들 모여 봐!”

트레이너 짐이 운동장 곳곳에 흩어져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선수들을 불러 모은다. 아예 지혁의 등 뒤에 올라타 누르고 있던 멘데스가 일어나고, 지혁도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라커룸으로! 감독님 미팅이야!”

짐은 그라운드를 한 바퀴 휘휘 돌며 소리를 질러 댔다.

“무슨 일인데요, 짐?”

“포스트시즌 일정이 나왔어! 가을에 붙어야 될 게 누군지 궁금하다면, 당장 뛰어와!”

짐의 외침에 지혁과 멘데스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멘데스는 조용히 ‘휴스턴.’이라고 말하며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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