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의 마지막에
“좋아, 방금 전 양키스와 휴스턴의 더블헤더 첫 경기가 끝났다.”
프랑코나는 액티브 로스터에 올라 있는 모든 선수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첫마디를 던졌다. 운동장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대부분의 선수들이 눈을 초롱거렸다. 마사지를 받으며 TV를 봤던 몇몇 베테랑 선수들만이 알고 있다는 눈빛을 보낼 뿐이다.
“휴스턴이 끈질긴 경기를 하더군. 하지만, 결국엔 양키스가 뒤집었다. 9회초에 역전 홈런을 때렸지. 애런 저지.”
“하, 그 녀석. 끝까지 어마어마하네. 몇 개째지? 48? 49?”
린도어가 조금은 아쉬운 듯이 중얼거렸다. 만약 휴스턴이 양키스를 이겼다면, 앞으로 남은 네 경기가 조금 더 중요해졌을지도 모른다.
“49개다. 아무래도 작년에 스탠튼이 그랬던 것처럼, 저지도 50홈런을 넘어설 모양이지. 하지만 그건 우리에게도 간접적으로 좋은 일이다. 저지는 쉬지 않고 시즌을 소화하고 있으니까.”
“괴물 같은 새끼, 힘이나 다 빼고 왔으면 좋겠네.”
“뭐, 저지의 파워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우리와는 조금도 상관이 없다. 양키스가 와일드카드 팀을 이기고 올라오게 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하지만 가을 야구는 상대가 누구여도 상관없는 곳이다. 초심을 놓치는 순간이 바로 탈락하는 순간이지. 그리고 내 밑에 있는 녀석들은 그 누구도 초심을 잃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맞습니다!”
“예, 써!”
선수들이 가볍게 손뼉을 짝짝 치면서 프랑코나의 말에 동의했다. 이미 클리블랜드의 라커룸 안에서 프랑코나의 말은 진리나 다름이 없으니까. 이건 지혁이 팀에 합류하기 전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렇다.
어쨌든, 방금 전 프랑코나가 알려 준 내용의 의미는 이렇다. 양키스가 휴스턴을 홈으로 불러들인 더블헤더에서 1승을 거둠으로써 시즌 96승째를 기록했다는 것.
94승을 기록하고 있는 클리블랜드와 양키스 모두 앞으로 네 경기를 남겨 놓고 있고, 이건 양키스와의 경기 차이가 두 경기로 벌어졌다는 뜻이다.
남은 경기를 양키스가 전패하고 클리블랜드가 전승한다면 두 팀의 승률은 동등해지겠지만. 이번 시즌 상대 전적에서 양키스가 한 경기를 더 이겼다. 이 말인즉슨, 클리블랜드는 아메리칸리그 전체 순위표에서 1위를 차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가을 야구의 상대가 정해졌다는 뜻이기도 하고.
“디비전시리즈 첫 경기가 열리는 10월 5일까지 정확히 일주일이 남았다. 우린 남은 시간 동안 철저하게 휴스턴을 대비한 전력 분석을 할 예정이다. 다들 그렇게 알고 준비할 수 있도록. 특히 몸 관리에 신경 쓰고.”
“옛!”
선수들이 우렁찬 대답으로 확인했음을 알렸다. 가을 야구의 상대는 승률 2위 혹은 3위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나눠 가질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정해진 것이다.
“오케이! 다시 스트레칭하러 가자, 문!”
“넌 만족스러워 보인다?”
“예아- 내가 맞췄잖아. 하하.”
“기왕이면 1위를 하고 와일드카드 팀이랑 붙는 게 좋았을텐데.”
“지나간 일에 미련을 버리라고, 아미고, 하하. 그리고 휴스턴도 분명히 할 만할 거야. 어차피 단기전이라는 건 다 그렇다고.”
멘데스가 지혁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내기라도 했다간 큰일 날 뻔했다.
“투수들에게 휴스턴은 공포의 대상이라는 걸 알고나 그러는지 모르겠네.”
“헤이, 헤이. 가을 야구에서는 어느 팀이나 공포의 대상이야.”
“나도 작년에 가을 야구 해 봤거든?”
“아! 그러고 보니 작년에 휴스턴을 떨어뜨린 녀석이 너였잖아? 하하하! 잘됐네. 휴스턴 킬러가 여기 있었어!”
뭐가 그리 좋은지 멘데스는 낄낄대기만 한다. 상대 팀이 누가 될지 예측하는 사소한 예상에서조차 승부욕을 발휘한 것일까.
어쨌든, 휴스턴 킬러라는 말은 조금 낯간지럽다.
휴스턴은 엄청난 공격력으로 자신들의 부족한 모든 부분을 다 덮어 버리는 팀이다. 물론 탬파베이의 유니폼을 입었던 작년 디비전시리즈에서 휴스턴을 상대로 챔피언십시리즈 진출을 확정짓는 경기에 등판한 적이 있었다.
상대는 사흘 쉬고 올라온 에이스 카이클이었고, 그 맞대결에서 7과 1/3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었었다.
좋은 기억이 남았던 건 사실이지만. 올해의 휴스턴과 작년의 휴스턴은 완전히 다르다. 작년에도 아찔했던 휴스턴의 방망이는 올해 훨씬 더 파괴적인 모습으로 진화했으니까.
지혁도 이번 시즌 중에 한 번 혼쭐이 난 적이 있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3이닝 동안 홈런 세 개를 맞으며 6실점이었나, 그랬다.
말도 안 되는 배부른 투정이라는 걸 알지만, 상대가 휴스턴으로 결정되고 나니 시즌 막바지에 마이너리거들을 대폭 내세우며 경기 결과에 집착하지 않은 프랑코나 감독의 선택이 조금 원망스럽다. 사실 그런 선택을 한 건 휴스턴이나 양키스 모두 마찬가지였는데 말이다.
세 팀 모두 긴 시즌을 소화한 주전들에게 휴식을 주고 있었다. 세 팀 모두 시즌 막바지의 성적이 평균 승률보다 떨어졌고 말이다.
이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있다는 걸 뜻하기도 했다. ‘어차피 누굴 만나도 힘든 싸움이야’라는 의미다. 양키스건 휴스턴이건, 혹은 와일드카드 매치를 통해서 올라올 상대이건 전력으로 부딪혀야 할 상대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그게 가을 야구다. 누굴 상대로든 어려운 싸움을 각오해야만 하는 야구. 지혁은 묵묵히 스트레칭을 하러 다시 이동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엔 휴스턴 선수들의 비디오가 돌아가고 있었다.
***
-양키스, 더블헤더 2연전 스윕. 아메리칸리그 포스트시즌 매치 업 확정!
-[ALDS]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vs 휴스턴 애스트로스 / 뉴욕 양키스 vs 와일드카드 위너시즌 최종전이 열리는 10월 1일. 꽉 차지는 않았지만 2층까지는 관중들이 제법 들어찬 프로그레시브 필드가 퍽 웅장해 보인다, 새삼. 게다가 이곳은 지혁이 경기 중에는 들어와 있지 않던 곳이다.
낯설면서도 새로운 시각이 그를 사로잡는다. 불펜의 철창 너머로 조그맣게 들어오는 야구장의 시야는 독특했다.
“한 시즌이 또 끝났구만.”
사실 선발투수도 마이너리거인 D.J. 하우스이고, 주전 야수들 아홉 명 중 다섯 명도 마이너리거로 구성된 오늘의 경기에는 별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상대인 캔자스시티 로얄스는 더했다. 1번부터 9번까지의 라인업 중에 지혁이 이름조차 모르는 선수가 네 명이나 들어있었고, 주전들 중 일부는 첫 타석만 소화하고 빠져 버렸으니까.
지혁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느낌에만 집중했다. 4월부터 시작했던 시즌이 또 한 번 끝난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느낌이 퍽 달랐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 그러니까 지금처럼 찬바람이 쌩쌩 부는 곳에서의 한 시즌. 완전히 새로운 사람. 홈 플레이트의 왕, 리그 최고의 감독, 사이 영 상을 수상했던 투수들과 함께했던 한 시즌. 완전히 새로운 도시. 클리블랜드. 올드하고, 때로는 무기력하게 느껴질 정도이지만 스포츠를 향한 열정만큼은 전미에서 제일 극성이라는 필라델피아 못지않은 이곳.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의 한 시즌이었으니까. 회귀를 한 이후에는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다.
한 시즌을 별 탈 없이, 아니 별 탈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잘 마무리했다는 뿌듯함이 반 정도. 또한 아직 야구가 끝나지 않았다는 설렘과 포스트시즌 야구에 대한 두려움이 반 정도. 그렇게 섞인 감정이 지혁을 휘어잡고 있었다.
“헤이, 그거 알아?”
“응? 나?”
“그래, 너. 이름이…… 밀브래드? 밀브래쓰? 뭐랬지? 아, 미안. 까먹었어.”
“조단 밀브래쓰. 괜찮아. 섭섭하긴 하지만.”
불펜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던 밀브래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지혁이 시즌 막판 DL에서 복귀한 이후에야 처음 볼 수 있었던 선수다. 2013년 드래프트된 이후 계속 더블 A에만 있다가 지혁이 DL에 빠진 사이 로스터에 등재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스프링캠프에도 합류하지 못했던 이 친구가 왜 지금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등록된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이라는 건 느낌이 독특해. 그렇지 않아?”
“음. 그렇…지?”
밀브래쓰라는 애송이는 지혁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혁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말을 내뱉을 상대가 필요했던 것뿐이니까.
“그동안 해 왔던 걸 뒤돌아보게 만들잖아. 확인하게 만들고. 그리고 우리 같은 프로 선수들에게는 바로 그렇게 하는 게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방법이고. 마지막이라는 건 사람을 성장하게 만들도록 강요하는 거야.”
밀브래쓰는 볼 한쪽을 씰룩거렸다. 문맥 없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시즌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뒤를 돌아보고. 잘 해 왔는지 체크하고. 잘된 것들에 만족하고, 성취를 느끼고. 잘 안 된 것들에 후회하고, 짜증을 내고. 이런 것들이 몰려오기 시작해. 시즌을 치르는 동안에는 하루하루에 집중하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이 마지막에는 눈덩이처럼 굴러오지.”
“으음…….”
“한 달 전을 돌아보고, 한 시즌 전을 돌아보고, 나아가서 2년 전, 3년 전을 돌아보고. 지금의 내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체크하면서 성장하는 거야. 시즌의 마지막 날만이 그럴 수 있는 느낌을 만들어 주지.”
지혁은 데이토나 컵스 시절을 떠올렸다. 이제 막 회귀했을 때의 그 철없던 애송이. 심지어는 싱커도 던질 줄 모르는 상태에서 싱글 A 파이널시리즈 게임에서 던졌다. 싱커를 배우고, 정신없던 윈터 미팅을 거쳐 몽고메리 비스킷츠의 유니폼을 입고. 더램을 거쳐 탬파베이에서 메이저리그 데뷔. 그 이후의 메이저리그 생활들. 쭉쭉 달려왔고, 이제는 클리블랜드에 있다. 그것도 르브론을 대신해 클리블랜드 지역의 제일가는 스포츠 스타가 되어서.
“문! 어깨는 다 데웠어?”
“네. 진작에요.”
“좋아, 올라가!”
“옙.”
마지막이라는 건 성장을 확인하는 순간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인생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만 아니라면. 언제나 그 성장을 통해 다음을 기약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잘 돌아보라고. 밀래쓰. 아니, 밀러? 뭐든 간에.”
지혁은 자신의 글러브를 집어 들고 불펜의 철문을 열었다. 끼이익, 하는 소리가 낯설다.
-투수 교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No, 70! The Super~Mooon!
장내 아나운서의 낯간지러운 힘찬 멘트와 함께, 지혁은 2018 정규 시즌을 마무리할 마운드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
[지혁 문이 올라옵니다. 클리블랜드 프로그레시브 필드, 모든 관중이 기립 박수로 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와우.]
[슈퍼스타의 복귀네요. 프랑코나 감독이 타이밍을 잘 골랐네요. 팬들이 지루해 할 만한 타이밍이었잖아요.]
[그렇습니다. 9월 18일, 텍사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성수 초이의 강습 타구에 직격당해 DL에 올랐었던 문. 시즌 최종전에서 홈 팬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마운드를 찾습니다.]
[경기 감각도 체크할 수 있고, 팬들의 환호성도 받을 수 있고. 일석이조네요. 하하.]
[휴스턴 애스트로스 관계자들이 이 장면을 주목하고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당연한 말씀이죠. 이번 시즌 성적대로라면 클리블랜드와 휴스턴의 디비전시리즈 1차전 선발은 문이 차지해야 하니까요. 확정된 건 아니지만,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오늘 등판에서의 상태가 중요하겠지만요.]
탁탁. 피쳐 플레이트를 발로 차 본다. 스파이크에서 흙이 떨어져 나가는 모습이 좋다.
부상을 당했다가 마운드에 돌아오는 건 이미 수차례 겪어서 익숙하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 등판하는 것도 매우 익숙하다. 한 시즌을 돌아보는 일도 그렇다. 심지어는 시즌을 마무리하며 가을 야구를 준비하는 일조차도, 작년 탬파베이에서 해 봤던 일이다.
“후우우-.”
마운드에서 깊은 심호흡을 해 본다. 너무 차가운 클리블랜드의 밤공기가 지혁의 몸 안으로 들어와 폐를 한 바퀴 돌아 나온다. 온몸이 차가워지는 기분이다.
“마지막이라. 너무 익숙한데, 또 너무 새롭네.”
밀러인지 뭔지 하는 그 녀석에게 시간이 있었다면 몇 마디는 더 해줬을 텐데. 마지막의 뒤에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있다고. 그러니까 마지막이라는 건, 결국 뒤를 돌아보고, 성장을 확인하고, 새로 달려 나가기 위한 경유지에 불과하다는 것. 심지어 지혁의 첫 번째 인생에서는 은퇴조차도 마지막이 아니었던 것처럼. 모든 마지막이라는 건 시작을 위한 발판에 불과하다.
“으랴쌰!”
연습 투구로 던진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본 전광판에는 95마일이 찍혔다.
“살살 해! 연습이잖아!”
멘데스가 미트를 낀 왼손을 툭툭 털어 보이며 소리쳤다.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는 뜻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혁은 다음 공을 전력으로 뿌려 봤다. 이번엔 97마일. 패스트볼 컨디션이 그 어느 때보다 좋다.
“좋아, 아주 많이 좋아졌어.”
작년을. 그리고 재작년을. 3년 전을. 회귀 전을. 18년 전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를. 지혁은 떠올렸다. 멘데스가 분명히 뭐라고 얘기하고 있기는 한데, 들리지는 않았다.
죽을 만큼 했다. 그리고 정말 많이 성장했다. 지금의 지혁은 메이저리그에서 한 손 안에 꼽히는 투수까지 올라왔다. 자신감이 뿜어 오른다. 마지막 경기가 아닐 때에도 이런 감정이 매번 찾아왔으면 좋으련만.
“피처, 자리로!”
구심이 곧 플레이볼을 선언했다.
부우웅-.
“스윙. 스트라이크 원.”
이름도 모르는 캔자스시티의 마이너리거는 한복판의 공에 스윙을 맞추지도 못했다. 이건 확신을 주었다.
“스트라이크! 투!”
2구째, 바깥쪽 보더 라인에 정확하게 걸친 싱커. 움찔거리며 공을 지켜보려던 타자는 허탈하게 카운트에 몰렸다. 확신이 강해졌다.
“스윙! 배터 아웃!”
커브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타자의 발등 부근까지 떨어졌고, 있는 힘껏 풀스윙을 돌려 본 타자는 벗겨진 헬멧을 주워 들고는 터덜터덜 더그아웃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이 순간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함성과 함께, 지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뒤를 돌아보는 건 다 마쳤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숨어 있는 의미처럼, 이제는 새로운 야구를 향해 나아갈 시간이었다. 목표는 휴스턴이다.
***
-문지혁, 9구 3삼진으로 복귀하다.
-테리 프랑코나,
“디비전시리즈 1차전 선발투수?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우리에겐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코리 클루버,
“1차전 선발에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판단은 모두 배제했다. 우리는 프랑코나 감독의 판단에 따를 것이다. 그게 70년의 저주를 풀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ALPS WC매치] 보스턴 레드삭스 0 vs 6 탬파베이 레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