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을 안고, 2차전
“흐음, 흐으음.”
프랑코나 감독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 휴식과 마인드 컨트롤을 취하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에, 구단의 비디오 룸을 사용하지 못하고 집에서 비디오를 보고 있지만. 집은 고요했다.
그저 지혁의 이상한 한숨 소리와 오늘 경기의 비디오에서 나오는 소리만이 반복될 뿐이다.
지혁은 잠시 집중을 풀고 기지개를 한 번 폈다. 가로등 몇 개만이 간신히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클리블랜드의 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아, 시작이 아주 엿 같구만…….”
클리블랜드의 덤덤한 밤거리가 주는 야경이 어느 때보다 쓸쓸해 보였다. 차라리 여기가 뉴욕이나 LA같이 큰 도시였다면 기분이 좀 풀렸을까? 아니,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혁의 귓가에는 여전히 어마어마한 타구 음들이 맴돌고 있었다. 쉽게 잊히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그만큼 휴스턴의 타자들은 어마어마하게 때려 댔다.
1차전 최종 스코어, 16 대 9. 경기에 소요된 시간만 4시간 48분. 등록된 불펜투수 엔트리 중에서 앤드류 밀러와 코디 앨런을 제외한 모든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고, 놀랍게도 모든 투수가 휴스턴에게 점수를 내준 경기.
멘데스는 틀렸다. 단기전에서 타격 사이클을 잡기 힘들다는 예측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사이 영 위너였고, 지혁이 있건 없건 팀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 주었던 코리 클루버는 2.1이닝을 던지며 6실점했다.
1회에 3실점, 2회에 3실점. 그리고 3회에 다시 주자를 출루시키자 프랑코나 감독은 그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른 타이밍에 마운드에 올라온 불펜 투수 댄 오테로는 경기에 녹아드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말았다. 연속 볼넷으로 주자를 채운 뒤 터진 그랜드슬램. 카를로스 코레아는 기량이 완전히 만개한 듯 폭발적인 스윙을 보여 줬다. 같은 투수 입장에서는 끔찍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후 클리블랜드도 필사적으로 따라갔지만, 휴스턴의 타자들은 배팅 기계에서 나오는 공을 치는 듯 너무나도 쉽게 제 타격을 했다.
“괜찮아! 고작 한 경기야!”
오늘 경기를 마무리한 뒤의 팀 미팅에서 지혁이 외쳤던 말이었다. 딱 한 경기일 뿐이다. 아직 디비전시리즈는 네 경기가 남아 있고, 흐름은 빼앗아 올 수 있다. 충분히.
선수들 모두 알고 있는 말이지만. 기선을 완전히 제압당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고작 한 경기. 고작 한 경기이기는 한데…….”
잠시 서성이며 몸을 풀던 지혁이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다. 똑같은 한 경기이지만, 첫 경기가 주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것이었다.
지혁은 또 다른 한 경기로 이걸 완전히 뒤집어야만 하는 임무를 안고 있었다.
밤은, 길었다. 지혁의 밤만 긴 것이 아닐 터다. 클리블랜드의 밤은 지독하게 길었다.
***
“예, 이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굉장히 중요하죠. 엄청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죠. 하하.”
“Come on, 아드리안. 너무 반복해서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시청자들이 답답해한다고요.”
“이봐요, 닉. 광고 타임이라고 저 앞에서 사인을 보내는 게 안 보여요? 이 사람 진짜, 나보다 방송을 더 모르네!”
“왓? 뭐라구요? 아~하하하하! 제가 한 방 먹었네요! 좋습니다. 광고 보고 오시죠!”
ESPN은 몇 년 전부터 가을 야구에 진출하지 못한 선수들 중 방송에 재능을 보이는 선수들을 초대해 특별 해설위원으로 쓰고 있다.
선수들의 시각은 기자들이나 자칭 전문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경우가 종종 있고, 이런 시각이 팬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지혁의 옛 동료인 크리스 아처는 자주 초청받는 선수였다. 말도 잘하고, 유쾌하고, 생각보다 훨씬 더 박식한 그는 확실히 방송에 잘 어울리는 남자다.
하지만 올해는 탬파베이가 디비전시리즈에 진출한 덕분에 아처의 자리를 채워야 할 다른 선수가 필요했다.
그 선수로 낙점된 게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올 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선언한 아드리안 벨트레다.
벨트레는 선수들 사이에서는 이미 엄청난 입담으로 유명한 선수였다. 올해를 끝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게 확실시되는 기록들을 다 달성했으니, 이제 방송국으로 갈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벨트레는 레전드급 선수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특유의 뛰어난 언변을 더해 디비전시리즈 1차전이 갖는 중요한 점을 짚어 주었다.
“어제 경기는 단순히 스코어 1 대 0이 된 게 아닙니다. 휴스턴이 자신의 스타일대로 승리했다는 게 중요한 거죠. 휴스턴은 언제나 모든 걸 파괴해 버리는 팀이니까요. 상대 투수들에게 이건 재앙이죠.”
“언제나 그래 왔죠.”
“단기전에서 첫 경기에, 본인들의 스타일로 승리하는 건 엄청난 도움이 됩니다. 팀의 사기가 올라가죠. 선수들은 확신을 갖습니다. 감독은 자신감이 생기죠. 이 모든 것들이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 저도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아드리안. 하하하!”
“예스, 그렇죠. 그래서 전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고 싶습니다.”
“자! 우리 ESPN이 엄청난 돈을 쓰며…… 앗, 죄송, 이건 비밀이었는데. 아드리안 당신을 이곳까지 모신 이유를 보여 주세요!”
벨트레는 일부러 농담을 거는 진행자를 향해 덩치에 맞지 않게 귀여운 표정으로 눈을 째릿거리고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흠, 흠,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프랑코나 감독이 클루버를 1차전 선발로 낸 건 승부수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대단한 승부수죠.”
“어떤 의미에서요?”
“선발 후보는 두 명이었죠. 나머지 한 명은?”
“슈퍼 문.”
“슈퍼 문이 1차전에 나왔다가 어제와 같은 패턴으로 패배했다면, 오늘 클루버가 나왔겠죠. 그럼 상황이 어제보다는 나았을 겁니다.”
“왜 그렇죠?”
“경험이죠. 가을 야구의 경험, 큰 경기의 경험. 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는 큰 무대 경험이 별로 없어요. 작년에 한 번 있었을 뿐이죠. 반면 클루버는? 지난 2년 연속으로 월드시리즈 무대에까지 올랐던 투수입니다. 오늘의 선발 투수는 스스로 휴스턴의 막강한 타자들을 상대하며, 나아가 야수들을 이끌어 줘야 하는 역할까지 맡아야 하죠.”
“오.”
“투수는 단순히 공을 던지는 존재가 아니에요. 모든 야수들이 투수만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투수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중압감에 시달립니다. 그게 단기전이고, 큰 무대고, 한발 밀린 상황이라면 훨씬 더 하겠죠. 그러니 1차전에 문이 등판하고, 오늘 클루버가 등판했어야 합니다. 문이 성공을 거뒀다면 좋은 일이고, 문이 실패했더라도 그걸 커버할 수 있는 선수가 클루버니까요.”
벨트레는 자신의 의견을 열심히 피력했다. 라커룸 안에서 장비를 손질하고 있던 지혁은 TV를 바라보며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벨트레의 말을 그럴듯하다고 여길 것이다. 단기전 승부에서 경험은, 확실히 중요한 변수가 되니까.
“문은 이제야 풀타임 4년을 채운 선수입니다. 그가 대단한 투수라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클레이튼 커쇼를 보세요. 스티븐 스트라스버그는? 경험이 많은 투수들도 곤란을 겪는 게 포스트시즌입니다. 어제 NLDS에서 처음으로 등판했던 애리조나의 로비 레이도 예가 될 수 있죠.”
“레이는 2이닝도 채우지 못했죠.”
“바로 그겁니다. 가을 야구는 완전히 다른 무대입니다. 경험이 필요해요. 어제 경기에서 휴스턴은 모든 부분에서 정점을 찍었습니다. 오늘 문에게 실린 부담이 어마어마할 겁니다.”
벨트레는 지혁에게는 아주 힘든 게임이 될 것이라고 확신을 갖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오늘 경기에서 지혁마저 무너진다면, 클리블랜드는 회생하기 힘들지도 모른다고도 말했다.
확실히 야수 출신답게, 휴스턴의 화끈한 공격력에 불이 붙은 것을 상당히 고평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아주 확신을 갖고 계신 것 같네요. 그럼 다음 코너로 넘어가죠. 승부 예측 타임입니다. 하하, 사실 아드리안의 말을 꼭 들어야 하나 싶은데요. 그래도 들어 보죠.”
“1회에 휴스턴이 한 점이라도 낼 수 있다면, 그러니까 휴스턴이 선취점을 낸다면 말이죠. 전 휴스턴이 100% 이긴다에 걸겠습니다.”
“시리즈 스코어가 2 대 0이 되겠군요.”
“클리블랜드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렇죠.”
“좋습니다! 2시간 뒤 게임에서 아드리안 벨트레의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죠. 광고 보시겠습니다.”
팟.
“왜? 재밌는데.”
지혁이 리모컨을 들고 TV를 꺼 버린 선수 쪽을 돌아보았다. 아, 이런. 선수가 아니구나.
“감독님?”
“아드리안이 쓸데없는 입을 놀리는군.”
“하하, 재밌던데요.”
프랑코나는 지혁의 곁으로 다가와 손질을 마치고 옆에 던져 놓은 스파이크를 집어 들었다. 그는 스파이크를 살피는 척하며 살짝 운을 띄웠다.
“아드리안의 말이 아주 틀리진 않아. 네게 부담이 많이 실려 있지.”
“틀리진 않죠.”
“그리고 1회도 아주 중요하고.”
“중요하죠.”
“네가 경험이 없는 것도 맞지.”
“음- 맞죠.”
이제는 경험이 적은 척하는 건 익숙해졌다. 물론 가을 야구 경험이 없다는 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가을 야구라고 해서 야구가 아닌 것도 아니다. 그간 지혁이 해 왔던 것처럼, 오늘의 야구도 고작 한 경기일 뿐이다.
“하지만…….”
“증명할게요. 아드리안이 틀렸다는 걸.”
언제부턴가 지혁은 자꾸 프랑코나의 말을 끊게 되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프랑코나의 입에서 약한 소리가 나오는 걸 듣기 싫은 마음이 조금 있는 것 같다.
“……좋아, 그거면 돼.”
프랑코나는 지혁에게 스파이크를 돌려주며 돌아섰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서는 순간 프랑코나의 입꼬리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때문일까. 지혁은 괜히 센 척을 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멘데스가 그랬어요. 저 휴스턴 킬러라고.”
“……그건 너무 유치하지 않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하.”
지혁은 손질하던 나머지 스파이크를 툭 던져 놓으며 일어나 온몸을 쭉 펼쳤다.
“벨트레가 저런 소리를 하고, 감독님도 오셔서 걱정을 해 주시고 하니까. 오늘은 왠지 더 잘 던지고 싶어지네요.”
평소와 비교해서 훨씬 더 큰 부담감, 훨씬 더 많은 걱정, 훨씬 더 많은 경고. 이런 것들이 지혁을 타오르게 했다.
묘한 자극이다.
지혁은 씩 웃어 보였다. 일단 큰 소리는 쳐 놨다. 수습할 일만 남았다.
***
[1회초, 휴스턴의 공격이 시작되겠습니다. 라인업을 확인하시죠.]
1. 호세 알투베 2B
2. 조지 스프링어 LF
3. 알렉스 브레그먼 3B
4. 카를로스 코레아 SS
5. 브라이언 맥캔 C
6. 율리에스키 구리엘 1B
7. 조쉬 마리스닉 CF
8. 조쉬 레딕 RF
9. 마윈 곤잘레스 DH
[어제 경기에서 타격감이 좋았던 선수들을 대폭 앞으로 배치했죠. 그리고 또 주목해야 할 점, 5번 맥캔을 제외한 모든 타자가 우타자로 배치되었습니다. 어제는 아오키 노리치카와 카를로스 벨트란이 선발 라인업에 있었는데요. 힌치 감독이 유동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좌완 투수인 문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라인업이죠.]
[바로 그렇습니다. 알투베, 스프링어, 브레그먼, 코레아. 네 선수가 문을 상대로 2할 후반대에서 3할 초반의 상대 전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운드에 올라서자 지혁의 얼굴이 크게 그려진 플랜카드들이 보인다. 포수 뒤쪽 관중석에 자리 잡은 관중들이 머리 위로 힘껏 치켜든 것이다. 펄럭거리는 지혁의 얼굴이 퍽 괜찮았다.
휴스턴의 강타선을 상대한다는 건 분명히 큰 부담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대포에는 어제 잔뜩 불이 붙었고, 열은 여전히 뜨겁게 남아 있다. 쉽지 않은 게임이 될 것이라는 건 확실했다.
-Moon! for the Cleveland! Moon! for the Cleveland!
1루쪽 관중석에서부터 지혁의 전용 챈트가 울리기 시작했다. 르브론을 향해 울려야 하던 ‘for the cleveland’라는 타이틀도 가져왔다.
진짜 슈퍼스타일수록 큰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고, 모든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 모든 것들이 지혁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자아아아-! 해 보자!”
멘데스가 마지막 연습 투구를 받아 2루로 레이저처럼 쏘아 보낸 뒤, 전쟁터의 장군처럼 용감하게 외쳤다. 지혁의 뒤쪽에서 야수들이 호응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플레이- 볼!”
조그만 체구의, 하지만 아주 다부진 체구의 알투베가 짙은 아이패치를 그리고 타석에 들어서고. 많은 것을 짊어진 지혁의 2차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