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85화 (186/204)

Fireman

차가운 클리블랜드의 공기 속에 맞은 1회초. 공 다섯 개밖에 던지지 않았는데 벌써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지혁은 손등으로 이마를 살짝 훔쳤다. 알투베는 확실히 감이 좋은 모습이다. 어려운 공을 잘 골라내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런 어려운 승부가 앞으로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휴스턴이라는 팀이 그렇다. 투수들이 단 한 개의 공도 허투루 던질 수 없게 만드는 팀.

“볼! 투 앤 투!”

그러나 지혁도 확실히 알았다. 부담이 커서 살짝 우려했지만, 오늘 지혁의 컨트롤이나 로케이션이 나쁘지 않다. 방금 공도 분명 들어온 것처럼 보였었다. 알투베가 방망이 끝을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이 그 증명이다.

지혁은 한 번 더 같은 코스를 공략했다. 하지만, 심판은 또 다시 잠잠하다.

[풀카운트로 갑니다. 선두타자 알투베. 지금까지 한 번도 스윙을 내지 않았습니다. 문의 공을 많이 보고 있어요.]

[좋은 지적입니다. 알투베는 상당히 공격적인 타자인데도 아직까지 스윙을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노리고 들어온 것이겠죠.]

[아드리안, 어떻게 보세요?]

[글쎄요, 조심스러운 접근이긴 하네요. 만약 저라면 몇 개 정도의 공에는 스윙을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지혁도 의아했다. 휴스턴은 분명히 불이 붙어 있는데 알투베는 상당히 침착한 자세로 타석에 임하고 있다.

어제 스프링어가 초구 홈런을 때려 냈던 것처럼 빠른 승부를 해 들어오길 예상했던 지혁의 입장에서는 조금은 난감한 일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하면, 고마운 일이기도 했다. 작년 가을 지혁이 인상적인 피칭을 했던 것이 휴스턴에게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게 분명하다.

한 번 당했던 상대에게 다시 당하지 않겠다는 마인드? 좋다. 침착하게 투구를 늘려 가며 승부하겠다는 마인드? 그것도 좋다.

하지만 지금의 휴스턴 선수들처럼 방망이에 불이 붙어 있는 상황이라면 그건 안 좋은 선택이다. 저렇게 타격 컨디션이 좋을 땐 눈 감고 휘둘러도 안타를 때린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는 마당에, 스스로 그 강점을 아끼고 있는 셈이니까.

어쨌든, 결과는 풀카운트다. 잘 던져도 구심이 손을 들어 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단기전에서의 1회는 타자와의 승부인 동시에 심판과의 줄다리기를 하는 기점이니까. 많은 투수들이 1회에 곤란을 겪는 건 이 때문이다.

그래서 투수에게는 진리처럼 통하는 말이 있다.

-선두타자 볼넷은 죽음보다 못하다.

‘싱커, 바깥쪽 존으로. 맞춰서 잡자.’

멘데스의 손가락이 말한다.

지혁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팔을 높이 들어 머리 뒤로 젖혔다가 일순간에 앞으로 뻗어나간다.

채찍처럼 휘둘러진 팔에서 공이 출발한다. 타석에서의 조심스러운 접근. 같은 뜻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휘두르지 않으면 삼진이다.

따악!

“숏!”

알투베는 확실히 컨디션이 좋다. 타이밍이 살짝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방망이 중심 부근에 맞춰 냈다.

엉덩이를 빼며 잡아당긴 타구가 지혁의 옆을 살짝 스치며 2루 베이스 위로 향한다.

지혁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볼넷은 아니더라도 정타가 아닌 타구로 선두타자를 내보내는 건 기분 나쁜 일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힘이 죽은 타구 앞에 린도어가 번개처럼 나타났다.

달려오던 스피드를 그대로 살려 공 앞에 글러브를 가져다 댄 린도어는 살짝 튀어나가려던 공을 맨손으로 잡아 런닝 스로우로 이어 가는 데 성공했다. 멋진 동작이었다.

[1루로! 아웃입니다. 유격수 린도어. 멋진 수비로 첫 번째 아웃 카운트를 가져갑니다!]

“좋았어!”

지혁은 이례적으로 크게 소리치며 린도어를 가리켰다. 린도어가 활짝 웃으며 지혁을 향해 주먹을 툭 내밀어 보였다.

야수들의 수비 집중력이 살아 있는 건 이런 단기전에선 필수적인 일이다. 첫 타자를 상대로 그걸 증명해 줬다는 게 기뻤다.

[2번, 스프링어. 어제 경기에서 5타점을 쓸어 담았습니다. 초구. 지켜봅니다. 한복판에 스트라이크.]

지혁은 조금 흠칫했다. 방금 전의 타구가 조금 위험해서였는지, 힘이 살짝 들어가며 제구가 흔들린 탓이다.

한복판으로 향했지만 스프링어 역시 오늘은 공을 지켜보는 쪽을 택했고,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아찔한 타구가 담장 밖으로 날아갈 뻔했으니까.

‘공을 보면서 천천히 공략하겠다?’

마음을 쓸어내리며 휴스턴의 선택에 감사했다. 신중한 공격을 하겠다는 의미를 빨리 캐치할 수 있다는 건 과감하게 스트라이크를 넣을 수 있다는 의미와 같으니까.

몸 쪽을 찔러 넣은 2구에도 스프링어는 체크 스윙으로 반응했을 뿐, 풀스윙을 돌리지 않았다.

“좋았어.”

카운트를 몰아넣은 지혁은 한결 자신감을 가지고 중얼거렸다. 스프링어는 정말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타자지만, 선구안에 조금 약점을 드러내곤 한다.

타이밍 싸움에서도 그렇다. 무서운 게스 히터지만, 노리지 않은 공의 대처는 알투베보다 분명히 못한 타자이고. 방금 전의 타석보다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노 볼 투 스트라이크. 과감하게 승부하는 문.]

[대단하네요. 어제 그렇게 공을 때려 대던 휴스턴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존을 공략해 들어가는군요. 알투베를 상대로도 도 노 볼 투 스트라이크까지 몰았었죠.]

[3구! 스프링어가 따라 나옵니다! 하지만 헛칩니다, 너클 포크를 던졌네요. 낫아웃 상황입니다만 멘데스가 태그하며 투아웃이 됩니다.]

[와우, 투구의 이 다양성을 좀 보세요. 이 너클 포크는 완전히 허를 찌르는 투구였네요.]

[아드리안?]

[저 공은 쉽게 못 치죠. 아주 잘 던졌네요.]

어제 경기 홈런 포함 4안타 경기, 5타점을 쓸어 담았던 조지 스프링어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순간 경기장 내의 분위기가 바뀌는 게 느껴진다.

신나게 두드려 맞았던 게 24시간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야수들도, 벤치에 있는 선수와 코치들도 모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들의 목소리가 마운드까지 들려올 정도로 커졌다.

“오케이! 똑같은 걸로 한 번 더 가자!”

야수들이 스스로를 다잡으면서 지혁에게 보내는 응원 덕분에, 집중력이 한결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의 시작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종류였다면, 오늘은 정반대로 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투아웃, 주자 없이, 알렉스 브레그먼의 타석입니다.]

지혁은 생각보다 작은 체구의 브레그먼이 숨기고 있는 파워를 똑똑히 알고 있다.

드래프트 전체 1픽 출신의 선수인데다가, 작년 WBC 미국 대표 팀으로 출장하기도 했던 브레그먼. 어리지만 얕볼 수 없는 상대다. 얕볼 생각도 없고.

오히려 더 세게 던질 생각이었다.

‘지금이 승부처야.’

겨우 세 번째 타자이고, 아직 1회에 불과하지만. 지혁은 지금 브레그먼의 타석을 승부처라고 여기고 있었으니까.

이유는 간단했다. 불타올라 있던 휴스턴의 타선에 찬물을 완벽히 끼얹어야만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지를 주지 않는 피칭이어야 했다. 클루버라는 산을 집어삼킨 거대한 산불을 진압하기 위해선 초장에 찬물을 물탱크째로 퍼부어야 하는 법이다.

[초구! 와우, 98마일!]

이를 악물고 던졌다. 가장 빠른 공을, 가장 강하게. 찍어 누르고, 기세를 가져오는 방식은 의외로 간단하니까.

힘 대 힘으로 붙어서 이기면 된다. 감수해야 할 위험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지만, 어려운 승부를 하면서 빗맞은 타구를 유도하는 방식으로는 느낄 수 없는 박력이 있어야 한다.

“좋아! 아주 좋아!”

멘데스가 미트를 쭉 뻗어 보인 뒤 공을 돌려주었다. 그리곤 자리에 쭈그려 앉자마자 사인도 내지 않고 정확히 같은 자리에 다시 미트를 대었다.

멘데스는 지혁의 의중을 파악하고 있었고, 공감하고 있었다. 사인을 내지 않는 건 방금 전과 똑같은 공을 다시 던지라는 얘기였다.

“으쌰!”

입술을 앙다물고 힘을 뽑아낸다.

부우웅- 하는 위협적인 스윙 소리가 지혁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방망이 끝을 잡고 풀스윙을 돌린 브레그먼의 방망이는 찬바람을 일으킬 뿐 공을 터치하지 못했다.

[와우, 두 개 연속 패스트볼. 한복판에 꽂았습니다. 두 개 모두 98마일입니다.]

[문이 전력으로 던지고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평소 로케이션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선수인데, 지금은 몰렸다고 해도 될 정도로 가운데로 향했어요.]

[불타오르는 겁니다, 하하. 알렉스가 조금 당황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문을 상대해야 하는 팀의 타자들은 저런 공을 미리 준비하지 않아요.]

[아드리안, 당신도 그런가요?]

[물론이죠. 문 정도 되는 투수들을 상대하는 타자의 머릿속에는 어떤 사이드를 노려야 할지, 어떤 구종을 노려야 할지, 변화구의 움직임은 어떤지. 이런 내용밖에 들어있지 않거든요.]

타자들은 한가운데로 오는 공은 본능으로 반응한다. 어떤 공이 오더라도 타자의 본능으로 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가운데는 상대적으로 허술하게 대처하고, 다른 쪽을 노리기 마련이다.

휴스턴의 타자들이 정확하게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게 지혁에게는 약점으로 보였다.

[다시 한 번 패스트볼을 선택할지. 문의 3구!]

으드득. 온몸에 힘이 들어가니 꽉 깨문 두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난다. 그만큼 손가락 끝에도 있는 힘껏 힘이 실렸다. 덕분에 공이 살짝 낮아지기는 했지만.

“파울팁! 배터 아웃!”

브레그먼이 길게 잡고 휘두른 방망이를 스치듯이 지나간 공이 멘데스의 미트 안에 빨려들었다. 미트 안에 들어가는 소리가 묵직한 것이, 오늘 지혁의 공에 얼마나 큰 힘이 실려 있는지를 실감케 해 주었다.

[원-투-쓰리 이닝.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어제의 악몽을 극복합니다. 오늘은 정말 호쾌한 시작을 보여 주고 있는 문. 어제와는 다른 경기를 예감하게 합니다.]

[훌륭합니다. 환상적이에요.]

프로그레시브 필드에 울려 퍼지는 슈퍼 문을 향한 연호가 증명한다. 어제와는 180도 달라진 분위기를.

***

2회초.

[구위로 찍어 누릅니다, 코레아의 타구가 밀려 맞으며 내야 팝업. 3루수 라미레즈가 잡아내며 원아웃.]

3회초.

[빗맞은 안타 두 개를 맞으며 노아웃 주자 1, 3루 상황. 하지만 문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삼진과 내야플라이로 아웃 카운트 두 개를 잡아냈고…… Got it! 스프링어를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기회를 잡은 휴스턴의 상위 타선이 문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4회초.

[베이스 온 볼스. 마리스닉이 끈질긴 승부 끝에 출루하면서, 풀 베이스. 휴스턴이 결정적인 찬스를 맞이합니다.]

[브래들리 짐머의 에러가 너무 결정적이었네요. 아웃 카운트를 쌓아야 할 시점에 주자를 늘려 주기만 했으니까요.]

[투아웃 이후 맞은 만루의 기회, 휴스턴은 선취 득점에 성공할 수 있을지. 타석에는 8번 조쉬 레딕입니다.]

팔뚝을 타고 미끈거리는 땀이 뚝뚝 떨어진다.

세게 던지는 일은, 힘으로 상대를 내리누르는 일은 상당히 많은 스태미너를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경기 중반으로 이제 막 접어든 참인데도 평소보다 훨씬 더 큰 체력 부담이 있다.

하지만 먼저 물러서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다. 방향을 회전시켜서 어려운 승부를 자초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모자를 벗어 머리를 쓸어 넘긴 뒤, 다시 모자를 쓰고 로진을 듬뿍 만져 본다. 베이스가 꽉 차 있지만 아웃 카운트도 두 개를 잡아 놨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던진 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

멘데스가 잠깐 마운드에 올라와서 툭 던지고 간 말이 정답이다. 별다른 일 아니라는 걸 되뇌었다. 아직 점수를 준 게 아니고, 점수를 줄 일도 아니다.

[스윙! 힘껏 휘둘렀습니다만 커브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문은 오늘 보여 줄 수 있는 투구를 모두 보여 주네요. 파워, 로케이션, 그리고 베리에이션까지요. 칭찬이 모자랍니다.]

[레딕이 잠시 타임을 요청하고 발을 빼 봅니다. 싱커, 패스트볼, 커브를 모두 봤죠.]

[머리가 복잡할 겁니다.]

지혁은 오늘 많이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멘데스의 리드에 100% 의존하고 따라가고 있다. 생각하는 건 오로지 공을 세게, 최대한 세게 던지는 것뿐이다. 사인이 나오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번째 공, 주자 만루! 던집니다, 헛스윙! 헛스윙! 헛스윙 삼진! 주자가 가득 찼지만 다시 한 번 위기를 탈출하는 문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입니다!]

[이쯤에서 제가 경기 전에 했던 말을 취소해야겠네요. 이 선수에게 경험 부족 같은 건 크게 의미가 없어 보이니까요. 하하.]

[아드리안, 당신이 먼저 하지 않으면 제가 요구하려고 했어요.]

[슈퍼 문은 오늘 완벽한 소방관이네요. 뜨겁게 불타고 있는 휴스턴의 방망이에 찬물을 잔뜩 끼얹고 있습니다.]

[멋진 표현입니다. 휴스턴의 타선에 소화기를 분사하고 있는 슈퍼 문입니다. 4회말로 갑니다, 스코어는 여전히 0 대 0.]

***

야구선수가 한 말이라기보다는 해설자가 해야 알맞을 것 같던 벨트레의 비유는, 이튿날 모든 신문의 타이틀에 실렸다. 그 정도로 멋진 비유였고, 꼭 알맞은 비유였다. 단순히 한 게임의 호투가 아니라 디비전시리즈 전체의 흐름을 좌우하는 경기였으니까.

프랑코나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흐름을 되찾아 왔다’는 짧은 말로 경기를 평가했다.

그 역할을 해낸 것은 지혁 한 명이었다.

-슈퍼 문, 소방관이 되어 불붙은 휴스턴의 타선을 완전히 진화하다.

-1차전에서 타오르던 휴스턴의 방망이, 2차전에서는 꼼짝없는 침묵.

-문 - 밀러 - 앨런. 클리블랜드의 필승 방정식 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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