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86화 (187/204)

2018 ALDS 2차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1) 2 vs 0 휴스턴 애스트로스(1-1).

승리투수 : 문지혁 (6IP, 7K, 6H, 2BB, 0R)패전투수 : 랜스 맥컬러스 (6.2IP, 3K, 8H, 3BB, 2R)코리 클루버

“이번 시즌의 디비전시리즈를 보세요. 야구를 오랫동안 사랑해 온 팬들이라면, 분명히 저처럼 완전히 매혹 당했을 게 분명합니다. 완벽해요, 완벽한 시리즈라구요.”

“하하, 누가 닉을 좀 말려 봐요!”

지금 CBS의 스포츠 특집 프로그램에서 호들갑을 떨어대고 있는 해설자의 모습이, 어쩌면 야구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언론사의 반응이 한결같았고, SNS를 중심으로 한 팬들의 응집력, 폭발력 같은 것들도 예년과는 다른 수준으로 대단했으니까.

“ALDS를 봅시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오랫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저주받은 팀, 클리블랜드. 그리고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공격력을 자랑하는 팀, 휴스턴. 이 두 팀이 만들어 낸 승부의 흐름을 좀 보자구요.”

1차전에 16점을 뽑아내며 클루버를 포함한 클리블랜드의 불펜을 초토화시킨 휴스턴의 타격이 파노라마가 되어 흘러나온다. 그리고 2차전, 지혁의 6이닝 무실점 호투. 7회와 8회를 책임진 앤드류 밀러와 K-K-K로 9회를 마무리한 코디 앨런의 모습까지가 또 한 편의 극이다.

휴스턴의 흐름이 끊긴 여파는 3차전으로 이어졌다. 카를로스 카라스코가 4.1이닝 동안 2실점으로 막았고, 불펜들이 나머지 이닝을 책임진 클리블랜드가 시리즈 우위에 섰다.

하지만 휴스턴의 공격력이 다시 불을 뿜었다. 카를로스 코레아가 무려 홈런 세 개를 때려 내며 앞장선 휴스턴이 다시 시리즈를 원점으로 맞추었다.

“1대0, 1대1. 2대1로 역전했다가 다시 2대2. 한 팀이 자신의 컬러를 드러내면서 도망가면, 다른 한 팀이 곧장 쫓아가는 형태의 반복이에요.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는 시리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요!”

“하하. 오늘 날을 잡으셨네요. 어디 더 오버해 보세요.”

“당연하죠, 아직 안 끝났어요. 반대편 사이드에서도 정확히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뉴욕 양키스, 이번 시즌 아메리칸리그 최고 승률 팀이죠. 그리고 와일드카드를 통해서 올라온 언더독의 전형, 탬파베이 레이스. 이 두 팀도 똑같은 방식으로 2승 2패 중이죠.”

“이쪽도 만만치 않군요.”

“솔직히 말하면 탬파베이의 끈끈한 전력에 놀랐어요. 그리고 단기전에 꼭 필요한 요소인 깜짝 스타의 등장도 재미있었고요. 시즌 내내 잠잠했던 윌리 아다메스가 갑자기 뻥! 터져 버렸잖아요.”

“하하, 이대로 가다간 닉 혼자서 정해진 방송 분량을 다 잡아먹겠네요. 그럴 순 없죠. 광고 보고 오겠습니다.”

흐아암. 미국이란 나라의 TV 쇼는 언제나 이렇다. 광고가 너무 많다. 조금 재밌어진다 싶으면 광고로 맥을 툭툭 끊곤 한다.

지혁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TV를 껐다. 피로에 찌들어 멍 때리며 천장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을 만큼, 휴스턴 원정은 힘든 일정이었다.

몸이 피로한 것만이 아니다. 지혁이 꾹꾹 눌러놨던 휴스턴의 타격감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도 골치가 아프다. 게다가 내일 5차전에 등판하는 선수는 1차전에 호되게 혼이 났던 클루버. 휴스턴의 타자들은 클루버의 공에 타이밍을 잘 맞출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였었기에, 걱정도 그만큼 심하다.

“하. 부탁한다.”

지혁은 언제나 표정 변화 없이 무뚝뚝한 클루버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며 되뇌었다. 내일이 마지막 경기가 되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클리블랜드의 저주는 디비전시리즈가 아니라, 챔피언십시리즈가 아니라, 월드시리즈를 쟁취해야 풀리는 것이니까. 디비전시리즈에서 멈춰 서고 싶지 않았다.

***

“와, 춥네.”

일찌감치 경기장에 출근한 지혁은 잔디를 한 번 밟아 보려 더그아웃 쪽으로 나왔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클리블랜드는 며칠 원정을 다녀온 사이에 더 쌀쌀해져 있었다.

오늘부터는 목에 토시를 끼워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또 불안해지기도 했다. 지금 온몸이 으슬으슬하는 것이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아니면 5차전의 불길한 예감 때문인지 알 수 없어서다.

“왔냐.”

“어, 코치님.”

“등판도 없는 놈이 뭐 이렇게 일찍 왔어?”

“불펜에서 올라갈 수도 있잖아요.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르는데.”

“뭐?”

캘러웨이는 코웃음을 쳤다.

“그럴 일 없을 거니까, 괜히 추운 날씨에 쇼하지 말고 얌전히 스트레칭만 해라.”

지혁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캘러웨이는 지혁 쪽으로 눈도 돌리지 않았는데, 지혁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알아차린 듯이 덧붙였다.

“임마, 내가 아는 코리 클루버는 1차전에 그렇게 당해 놓고 똑같이 다시 당하는 놈이 아니야. 절대로 아니지. 난 그놈 그렇게 안 키웠다.”

“…….”

“넌 클리블랜드가 처음이니까 낯설 수 있어. 하지만 우리 팀에서 클루버는 그런 존재야.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는 존재. 너도 뭐, 비슷한 걸 가지고 있지만, 네가 우리 팀에 오기 전까지의 클루버는 절대적인 에이스였어. 지금도 그렇고. 나뿐만 아니라 클리블랜드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클루버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지. 너도 그래야 할 거야.”

캘러웨이는 그 말만 남기고는 이것저것을 한아름 챙겨서 외야의 불펜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안 믿기면 따라와 보든지.”

캘러웨이는 자신 있다는 듯한 턱짓으로 지혁을 이끌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란히 도착한 불펜에는, 이미 코리 클루버가 아지랑이를 피워 내며 투구에 한창이었다.

“언제나처럼 니가 경기장에 처음 들어온 줄 알았지?”

캘러웨이는 지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사실이었다. 어느 팀에서건 가장 먼저 훈련장에 나오는 건 지혁이었고, 클리블랜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린 가을 야구가 세 번째야. 이렇게 핀치에 몰려 본 경험도 있고. 이럴 때 해 주는 게 저 녀석이니까, 믿어. 알겠냐?”

“네.”

지혁은 끄덕이며 대답했다. 클루버가 온몸으로 배출해 내고 있는 의지가 눈에 보일 것처럼 강렬했다.

같은 투수는 단번에 알 수 있다. 지금 클루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기분인지, 어떤 각오를 하고 있는지. 표정 하나 없이 평소의 투구 폼 그대로 공을 던지고 있으면서도, 뿜어내는 기운이 다른 투수에게서 그런 변화들을 못 읽어낼 리가 없다.

들고 있던 글러브를 내려놓았다. 오늘 경기, 최악의 시나리오로 흘러서 불펜에서 지혁이 등판할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았다.

***

[잡아당긴 타구! 좌측으로 길게 갑니다- 하지만 뻗지 못하는군요. 좌익수 브랜틀리가 펜스 앞에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힘으로 눌렀네요. 정면 승부를 선택한 클루버와 멘데스 배터리의 승리입니다.]

[카를로스 코레아, 어제 세 개의 홈런을 때렸습니다만 오늘은 조금씩 모자라는군요. 두 타석 연속으로 플라이 아웃되고 맙니다.]

[4회까지 노-히트. 하하, 그가 돌아왔네요.]

[그렇습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에이스, 코리 클루버가 돌아왔습니다. 1차전에서 2.1이닝 만에 6실점하는 굴욕을 겪었던 클루버. 오늘은 단 한 명의 타자에게도 안타를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기에 강한 남자. 멋있습니다. 하지만 휴스턴 입장에서는 참 난감하겠네요. 클루버를 빠른 시간에 공략하지 못하면 앤드류 밀러와 코디 앨런이 나올 테니까요. 점점 조급해질 겁니다.]

클루버가 마운드에서 던지는 건 야구공이 아니라 돌덩이처럼 느껴졌다. 한참 떨어진 더그아웃에서도 그렇게 느껴지는데, 실제 타석에서 저 공을 보면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볼에 실린 힘이 어마어마하다는 건 공을 받을 때마다 멘데스의 미트가 뒤로 살짝 밀리는 것에서 알 수 있었고. 공 끝의 회전력이 시즌 중보다도 훨씬 더 뛰어나다는 건 휴스턴 타자들의 방망이가 연신 공의 아래쪽을 돌아가는 것에서 알 수 있었다.

“오케이! 나이스 피칭!”

“나이스, 나이스, 코리!”

디비전시리즈 5차전. 2승 2패의 상황에서 한 경기라도 패배하면 그 즉시 구단의 시즌이 끝나는 경기. 어마어마한 부담감에 시달려야만 하는 경기에서 클루버의 투구는 더 빛이 나고 있다.

동료들의 환호를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클루버의 얼굴은 마치 동네 슈퍼에 샌드위치를 사러 나갔다 오는 사람처럼 평온했다.

“오늘 완전히 불 붙었는데?”

지혁도 클루버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클루버는 말없이 주먹을 맞대 주고는 이온 음료를 순식간에 몇 모금 삼켜 냈다.

벤치에 털썩 주저앉은 클루버는 잠시 하늘을 멍하니 보더니 지혁을 불렀다. 턱수염 주위가 찬 기운에 빨갛게 달아오른 클루버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봐, 문.”

“왜?”

“네가 우리 팀에 오고 나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어. 알아?”

“……그래? 뭐가?”

“글쎄, 아주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데, 뭐라고 말을 하기는 어렵고…….”

클루버의 미간이 아주 살짝 찌푸려졌다. 그래봤자 주름 한 개 정도 더 생긴 것이지만, 클리블랜드에서 1년을 보낸 지혁은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클루버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표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너는 좋은 동료야. 그리고 좋은 투수지. 내가 지금까지 동료로 맞았던 어떤 투수보다도 더 좋은 투수야. 인정해.”

“그래, 그거 고맙네.”

“그래서인지 너는 내 역할을 많이 가져갔어. 개막전 선발도 그렇고. 에이스의 역할도 그렇고. 심지어는 저주를 깨는 우리 인디언의 오랜 소망을 이루는 일에서조차도 이제 막 팀에 합류한 네가 가장 앞에 서 있지.”

“응?”

“우리 감독도 그렇고, 미키도 그렇고. 이번 시즌에는 내가 아니라 너한테 의존하더라고. 너는 모를 수도 있겠지. 우리 팀에 있어 본 적이 없으니까. 그건 원래 내 역할이었어.”

클루버의 말은 디비전시리즈 끝장 승부를 펼치는 투수의 그것이 아니었다. 지혁은 이 어리둥절한 타이밍에 뭐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따아아악-!

순간 경기장에서 호쾌한 타구음이 울려 퍼졌다. 지혁과 클루버의 앞으로 동료들이 뛰쳐나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선수들의 괴성으로 더그아웃이 가득 찼다. 가을 내내 잠잠하던 에드윈 엔카나시온이 긴 침묵을 끊어 낸 대형 홈런을 작렬시킨 모양이었다.

“예스! 에드윈이 홈런을 때렸어! 예스! 예쓰!”

“외쳐! EE!”

지혁도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려고 했지만, 클루버의 계속되는 말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동안은 내가 할 것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조금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내 딸이 그러더라고. 클리블랜드에서 가장 좋은 투수가 내가 아니라 너냐고.”

“그건 너무…… TV가 잘못했네. 알잖아?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팀이 이기는 게 중요한 거지.”

“Come on, 문. 그건 우리에게나 그런 거야. TV에 나오는 머저리들이 떠들어 대는 내용도 내 가족에게는, 내 딸에게는 중요한 일이라는 걸, 나도 이번 시즌에야 알았어. 내가 1차전에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너는 바로 그 다음 경기에서 컨디션이 아주 좋았지. 이건 컨디션의 차이였지만, 바깥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안 보인다는 거야.”

클루버는 마치 휴스턴의 타자들을 상대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지혁을 돌아봤다. 지혁은 클루버의 눈빛을 받아 내느라, 전광판의 숫자가 1로 올라가는 장면을 캐치하지 못했다.

“너한테 지지 않아.”

“……그래. 뭐, 난 너랑 경쟁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어.”

“그건 좀 실망스러운 대답인데.”

“뭐라고?”

“앞으로 그 어떤 중요한 경기에서도 너한테 양보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난. 너도 그런 마음으로 던졌으면 해. 난 이게 우리 팀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넌 아니냐?”

머리가 순간적으로 잘 돌아가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클루버의 말에 대답해야 하는 건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것. 리그 최고의 우완 에이스로 손꼽히는 클루버의 피가 끓어올랐는데, 거기서 팀의 상황이 어떻고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상황을 관조하는 자세가 어떻고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

우승? 저주를 깨는 일? 클루버와의 개인적인 경쟁이 그 동력이 되면 되었지 발목을 잡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 뭐, 그럼 한 번 보여 줘 봐. 누가 이 팀을 이끌어 가고 있는지 내기라도 해 보자고.”

지혁은 주먹에 힘을 조금 실어 클루버의 가슴팍을 툭 쳤다. 아마 감정이 조금 실렸을 것이다.

클루버가 흠칫 놀라더니 이내 예의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똑똑히 지켜봐.”

클루버가 중얼거리며 주먹을 내밀었다. 홈런을 치고 더그아웃으로 복귀한 엔카나시온이 그 주먹을 툭 건드리며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헤이! 헤이! 헤이! 투수들! 이 한 점을 단단히 지켜 달라고!”

***

[오, 이런. 또 하나의 믿어지지 않는 퍼포먼스입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세 번째로 디비전시리즈 노히터 게임에 도전하고 있는 코리 클루버. 110개를 던졌지만 9회에도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투아웃을 잡아냈습니다! 역사를 쓰기까지 남은 카운트는 단 한 개!]

[와우. 오늘 경기를 설명할 수 있는 딱 한 단어입니다. 와우.]

[1차전에서 호되게 당했던 클루버인데, 오늘 5차전. 정말 단 한 게임으로 승부가 갈리는 이 경기에서 휴스턴을 말 그대로 혼쭐을 내고 있습니다. 완전히 박살을 내고 있어요. 오늘 볼넷 세 개를 허용했습니다만 안타는 하나도 맞지 않았습니다. 타석에는 6번 타자, 대타. 카를로스 벨트란.]

지혁은 긴장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경기를 지켜보는 그의 주먹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오늘 클루버는 그야말로 자신의 커리어에 남을 투구를 선보이고 있다. 디비전시리즈에서 노히트노런이라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두 시즌 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하가 걸리는 가을 야구에서, 클루버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듯한 퍼포먼스로 무대를 제압했다.

[떨어지는 슬라이더! 헛스윙 삼진! 벨트란이 물러납니다. 오! 마이! 갓! 코리! 클루버! 노-히터! ALDS의 최종 승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입니다!]

마지막 아웃 카운트가 잡히는 순간, 클리블랜드의 밤하늘은 폭죽으로 밝게 물들었다. 정신없는 폭죽소리, 관중들의 환호성, 그리고 마운드로 뛰쳐나가는 동료들의 괴성까지.

귀를 찢을 것 같은 소리들이 한데 뒤섞인 마운드의 한복판에서 클루버가 두 손을 치켜들며 포효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