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87화 (188/204)

재회

“디비전시리즈라는 무대에서, 한 번만 지면 시리즈에서 탈락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자기 공을 던질 수 있는 선수가 클리블랜드에 있다는 게 축복입니다.”

“인터뷰 고맙습니다, 테리. 지금까지 ALCS 진출에 성공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감독, 테리 프랑코나였습니다. 이어서 곧장 오늘의 주인공인 코리 클루버와 얘기를 나눠 보도록 하죠.”

아직 선수들의 미친 듯한 환호성과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라운드에서, 클루버가 인터뷰를 위해 자리에 섰다.

“코리! 정말 축하드립니다. 놀라운 퍼포먼스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굉장히 터프한 경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만큼 각오를 하고 들어왔습니다. 이렇게까지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겸손한 말씀이시네요. 하지만 꼭 물어보고 싶어요. 1차전에서 휴스턴의 타자들을 상대로 매우 혹독한 결과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4일밖에 지나지 않았거든요. 대체 어떤 놀라운 변화가 있었던 거죠?”

“1차전을 안 좋은 성적으로 마치고 나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좀 가졌습니다. 테리는 중요한 경기의 선발로 저를 선택해 줬는데, 결과는 최악이었죠. 믿음을 저버렸다는 게 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 뒤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죠. 마음을 다잡고, 정신을 차리고. 뭐 이런 것들이요.”

“하하, 말로만 들어서는 뭔지 전혀 모르겠네요. 좋습니다. 오늘의 노히터는 2010년 로이 할러데이에 이어 나온 메이저리그 역사상 세 번째 기록입니다. 기분이 어떠세요?”

“매우 영광입니다. 전 휴스턴의 타자들에게 깊은 존경을 갖고 있고, 휴스턴을 상대로 이 기록을 쓸 수 있어서 더욱 기쁩니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 주세요.”

“팀을 위해, 동료들을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

코리 클루버는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에이스의 품격을 보여 줬다. 저주를 깨겠다는 클리블랜드의 의지가 무너질 뻔한 건곤일척의 승부에서 진면목을 보여 준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보통 승리가 아닌 노히트 노런이라는 역사적인 기록까지 써 내면서. 클리블랜드의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프랑코나 감독은 문자 그대로 열광에 빠져 있는 그라운드에서 곧장 빠져나와 라커룸의 TV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다.

[잘 맞은 타구 센터 쪽! 안타! 2루 주자 카스트로가 3루를 돕니다! 주자 홈으로! 홈으로! 백-홈!]

“와우.”

[Got him! Got him! Oh! My! Gosh! 엄청난 송구입니다, 케빈 키어마이어! 탬파베이 레이스가 승부를 12회초로 끌고 갑니다!]

양키스와 탬파베이의 경기는 연장까지 이어진 피 튀기는 5차전을 진행 중이다. 클리블랜드와 휴스턴의 경기보다 1시간 반을 먼저 시작했는데도 아직까지 경기 중인 것이다. 이곳에서의 경기가 클루버의 노히트를 바탕으로 3대0, 금방 끝난 투수전이었다면 저쪽의 경기는 8대8로 연장까지 향한 치열한 타격전이다.

노히트노런. 좋다. 엄청난 기록이고, 클루버는 역사에 남을 것이다. 클리블랜드의 모든 선수들도 조연으로 이름을 올릴 것이다. 하지만 프랑코나에게는 올라가야 할 계단 하나를 오른 것에 불과했다.

다음 승부를 바라보는 건, 선수들이 아니라 감독이 해야 할 일이다. 프랑코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광고 시간에 얼굴에 마사지를 했다. 잔뜩 긴장했던 온몸과 얼굴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듯 뻐근해 왔다.

흐읍-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피로한 눈을 꿈뻑거리고 있는데 라커룸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감독님……?”

“문? 왜 벌써 내려왔지? 다른 녀석들이랑 같이 좀 즐길 줄 알았더니.”

프랑코나는 다음 단계로 진출한 것에 대한 축하까지 포함해 작은 파티를 허락해 준 채였다. 캘러웨이 코치를 필두로 스탭들 역시 오늘은 조금 즐기라고 해 뒀다. 그래서 누군가 내려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하물며 그게 코치도 아니고 선수였으니, 프랑코나는 더더욱 놀랐다.

“다음 상대를 보고 싶어서죠.”

“후.”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놀라운 만큼, 새삼스러웠기 때문이다. 문이라면 그럴 수 있지, 라고 납득해 버렸으니.

지혁은 의자를 끌어다가 프랑코나의 조금 옆에 털썩 앉았다.

“지금 스코어가 어떻게 됩니까?”

“8대8. 연장 12회초로 갈 거야.”

“8점? 와우. 레이스가 있는 힘을 다해서 점수를 끌어냈네요.”

“그렇지. 오늘 양키스 선발은 다나카였는데 말이야. 다나카의 컨디션이 올라오고 있었는데, 8점이라니. 그 레이스가.”

“하하, 제가 던질 때도 그만큼씩만 점수를 뽑아 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지혁은 농담을 살짝 던졌다.

‘랭카스터 감독…… 무슨 마법을 부렸지?’

속으로는 솔직히 궁금했다. 이번 시즌 탬파베이는 놀라울 정도의 타격 집중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지혁이 있을 때보다 마운드의 무게감이 떨어진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누구도 지혁이 탬파베이에서 해 줬던 것만큼을 해 줄 수는 없었다.

브랜트 허니웰과 트레버 바우어가 어떻게든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런데도 탬파베이가 기어이 이 무대까지 올라와서, 지금 ALDS 5차전의 끝자락에서 버티고 있는 이유는 타격이었다. 대체 어떻게 탬파베이의 타격을 바꿔 놓았을까? 그게 지혁이 가진 궁금증이었다.

[12회초, 오늘 경기 정말 치열합니다. 양키 스타디움에서 플레이볼이 선언된 지 이제 5시간이 지나갑니다. 처절한 혈투네요.]

[그렇습니다. 양키스는 아직 채프먼을 마운드에 세워 놓고 있습니다. 이게 보여 주는 겁니다. 지라디 감독도 난감해 하고 있다는 걸 말이죠.]

[10회에 올라와서 2이닝을 던지고, 이제 3이닝째네요. 채프먼을 제외하면 양키스의 불펜에는 체이슨 슈렙과 애덤 워렌, 그리고 선발투수인 루이스 서베리노와 조단 몽고메리가 남아 있습니다.]

“채프먼에게 3이닝을 맡긴다고?”

지혁이 놀라서 중얼거렸다.

“만약 오늘 양키스가 패하게 된다면, 그건 100% 지라디의 책임이 되겠군.”

프랑코나가 말을 받았다.

“왜 저런 무리한 선택을 했을까요?”

“감독이라는 사람들은 언제나 상상 속의 공포와 싸우고, 상상 속에서 선택을 해야 하지. 리그 최고의 마무리라는 채프먼을 내리고 평범한 불펜 투수를 넣었다가 리드를 빼앗기는 그림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니까.”

“하지만 게임은 현실이잖아요. 채프먼의 구위가 떨어질 때가 됐는데. 구속과 구위가 떨어진 채프먼은 다른 투수만 못하니까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더그아웃에 감독이라는 존재는 필요하지 않을 거야.”

프랑코나와 지혁 모두, 채프먼을 3이닝째 마운드에 올려둔 것은 명백한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양키 스타디움에서 채프먼을 맞이하고 있는 탬파베이 레이스의 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의 파열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탬파베이의 타자들은 제대로 된 타이밍에 채프먼의 패스트볼을 공략하고 있다. 여전히 구속은 101마일, 102마일까지 나오고 있지만 공의 무브먼트가 뚜렷하게 떨어진 게 화면을 통해서도 보일 정도니까.

“심상치 않은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잡아 당긴 타구! 3루 라인을 뚫고 나갑니다, 외야 좌측 펜스까지. 탬파베이의 12회초. 선두타자 맷 더피가 2루까지 출루합니다! 이제 상위 타선으로 이어지는데요. 탬파베이가 정말로 일을 낼 모양입니다.]

이어지는 타자는 코리 디커슨. 리그 최고의 지명타자 자리를 2년 연속 꿰차버린 디커슨은 놀랍게도 번트 자세를 취했다.

“이건 랭카스터의 실책이야.”

프랑코나가 낮게 읊조리기 무섭게, 디커슨의 초구 번트가 높이 떠올라 버렸다. 포수 개리 산체스가 그 공을 향해 몸을 날려 잡아내며 아웃 카운트가 쌓인다.

스스로를 자책하는 디커슨의 모습과 눈을 질끈 감아 버린 랭카스터의 모습이 TV 화면을 통해 비치는 건 지혁에게 꽤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저들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던 사람이니 당연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지혁은 탬파베이를 응원하고 있었다.

“쉽게 갈 수 있는 경기를 서로 어렵게 가고 있군.”

“아다메스가 중요하겠어요. 베이스를 채우면 양키스는 곤란할 테니까.”

“왜지?”

“3번이 롱고리아잖아요.”

“롱고리아는 이번 포스트시즌 무대에서 28타수 3안타네. 아주 심각한 부진을 겪고 있지. 나라면 잘 맞고 있는 아다메스를 거르게 시킬 거야.”

지혁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만약 지라디가 그렇게 선택한다면, 탬파베이가 여기서 앞서 나가기 시작할지도 몰라요.”

“흠, 롱고리아의 클러치를 믿는다? 좋아,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롱고리아는 이미 지난 경기에서 수많은 득점권 기회를 놓쳤어.”

“아니에요. 에반은…… 클루버랑 비슷한 선수거든요.”

“그래? 그건 흥미롭군.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얘기야.”

“딸 바보죠.”

“……뭐라고?”

프랑코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화면을 가리켰다.

지라디는 프랑코나와 같은 선택을 했다. 감독들이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걸까. 어쨌든 채프먼은 공 네 개를 바깥으로 빼며 아다메스를 걸러 보냈다.

[원아웃, 주자는 1루와 2루. 타석에는 심각한 슬럼프에 빠져 있는 에반 롱고리아입니다.]

[탬파베이에게는 정말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후의 기회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타석에 있는 게 롱고리아네요.]

[28타수 3안타. 이번 디비전시리즈 타율 .107입니다. 타점은 하나도 없습니다.]

[스윙의 밸런스가 무너져 있죠.]

[오늘 경기에서도 잔루 다섯 개를 기록하고 있는 롱고리아. 정말 중요한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섭니다.]

준비 타석에서 화면에 원 샷으로 잡힌 롱고리아의 시선이 잠깐 포수 뒤쪽을 향한다.

지혁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거기에 그의 딸 엠마가 있을 것이다. 엠마가 벌써 야구장에 따라올 나이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럴 것 같았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선 롱고리아의 눈빛은 놀랍도록 침착했다. 가장 뜨거워야 할 순간에 오히려 가장 차가워진 남자가, 오랫동안 탬파베이의 중심에서 팀을 지탱해 온 남자가, 지혁의 든든한 동료였으며 또 중요한 순간에 가장 의지가 되었던 남자가. 초구를 향해 방망이를 돌렸다.

[채프먼의 초구! 잡아 당깁니다! 오- 이 타구! 멀리 갑니다! 좌중간! 좌중간!]

[와우. 오 마이 갓.]

[펜스- 넘어갑니다! 넘어갑니다! 넘어갔습니다! 탬파베이 레이스! 마지막 순간에 앞서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 주인공은, 에반! 롱-고리아!]

100마일. 앞서 말했듯이 채프먼의 패스트볼은 눈에 띄게 끝이 무뎌져 있었고, 몸 쪽 낮은 무릎 코스를 노리고 들어온 공에 롱고리아는 벼락 같은 스윙을 돌렸다. 그리고 승부는 갈렸다.

아무런 세레모니 없이 덤덤하게 베이스를 돌던 롱고리아가 홈플레이트를 밟고 난 뒤 포수 뒤쪽 관중석을 향해 두 손으로 신호를 보낸다.

순간 카메라에 잡힌 롱고리아의 얼굴을 보며, 지혁은 롱고리아의 눈시울이 시큰해져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흠, 자네가 맞았군.”

“하하, 야구는 결과론이죠.”

“아니, 아니야. 방금 내가 지라디였어도 아다메스를 거르고 롱고리아와 상대했을 거네. 물론 채프먼을 그냥 세워 두지는 않았겠지만.”

프랑코나는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제안을 했다.

“탬파베이와 다음 시리즈를 치르게 되면, 네게 많은 의견을 물어봐야 되겠어. 피쳐로 올라갈 때를 빼고는, 작전 코치 역할을 조금 돕도록 해.”

“예?”

“코치라는 말이 조금 거창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그건 별거 아니야. 그냥 모든 코치들이, 그리고 나도. 자네의 의견을 많이 들어 봐야 될 것 같다는 말이지.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나?”

“아…… 네. 그……래도 그건 좀.”

“괜찮아. 자네도 알다시피, 우린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거든. 무조건 월드시리즈까지 올라가야 하니까.”

프랑코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지혁의 모자챙을 툭 쳐 주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상대가 탬파베이이기에 더더욱 지혁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

[ALDS] 탬파베이, 기적의 역전승! 주인공은 에반 롱고리아.

[ALCS]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vs 탬파베이 레이스. ‘슈퍼 문 더비’ 실현.

[ALCS] 양 팀 감독, 1차전 선발 예고.

2018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 1차전 선발투수.

문지혁(클리블랜드 인디언스) vs 브랜트 허니웰(탬파베이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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