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봉착시작은 순조로웠다.
왜인지 알 수 없지만 1번 타자로 타석에 들어선 롱고리아는 삼진으로 처리했다.
다음 타자인 디커슨에겐 떨어지는 커브를 던지다가 1-2루 간을 가르는 안타를 하나 맞았지만, 아다메스를 유격수 플라이로, 질라스피를 3루수 앞 땅볼로 잡아냈다.
“오늘은 유독 코너워크가 좋은데. 이걸 조금 더 살려 가는 게 좋겠어.”
“코너 쪽으로?”
“존을 넓게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바깥쪽 반 개, 몸쪽 반 개. 평소보다 이 정도씩은 늘릴 수 있어. 내가 공을 조금 더 잘 받으면 한 개까지도.”
“한 개는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하하, 심판도 그렇게 짠 것 같지 않더라고. 믿고 던져.”
멘데스는 1회 초가 끝나자마자 재빨리 지혁에게 다가와 1차전의 게임 플랜을 수정했다. 당초에 탬파베이는 그렇게 강한 타격을 가진 팀이 아니었으니 빠른 템포로 승부를 걸어 가자고 합의했었다.
하지만 오늘 지혁의 제구력은 날이 서 있었고, 어려운 코스를 날카롭게 찌르는 걸 반복해서 타자들의 존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1년 동안 클리블랜드에서 멘데스와 배터리를 맞추면서 배운 것. 멘데스가 하자는 대로 하면 무조건 된다. 그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린도어! 오늘 존이 꽤 후한 편이야. 비슷하면 나가는 게 좋아!”
그리고 멘데스는 타석에 들어서는 선수이기도 했다. 1회 초 공 열 몇 개를 받은 것만으로 심판의 존을 확실하게 캐치한 그는 타자들에게 공략 방향을 제시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는 선수다.
실제로 클리블랜드의 타자들은 홈경기에서는 가장 먼저 멘데스 쪽을 돌아보곤 하고, 지금처럼 조언을 받고 나서는 그의 말을 100% 신뢰한다.
[1회 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클리블랜드는 지난 DS 5차전과 비교해 라인업 변화를 주지 않았습니다. 라인업 보시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라인업.
1. 프란시스코 린도어 SS
2. 마이클 브랜틀리 LF
3. 페르난도 멘데스 C
4. 에드윈 엔카나시온 DH
5. 호세 라미레즈 3B
6. 카를로스 산타나 1B
7. 제이슨 킵니스 2B
8. 브랜든 가이어 RF
9. 브래들리 짐머 CF
[브랜틀리를 2번으로 끌어 올린 선택이 아주 잘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요.]
[원래 3번을 주로 치던 브랜틀리를 2번에 놓으면서 초반 공격력이 더 극대화되었죠.]
[그렇습니다. 그리고 시즌 중에는 2번을 치던 짐머가 하위 타선으로 내려가면서 오히려 부담을 한결 덜어 낸 모습이죠. 스윙에 자신이 붙고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선수입니다.]
[자, 굉장한 짜임새를 자랑하는 클리블랜드를 상대할 탬파베이의 선발투수, 브랜트 허니웰입니다. 정말 무서운 2년 차 선수입니다. 특히 그의 스크류볼은 정말 대단하죠. 선수들이 뽑은 상대하기 힘든 구종 4위에 올랐습니다.]
[1위는 크리스 세일의 슬라이더, 2위는 클레이튼 커쇼의 커브, 3위는 문의 싱커였죠.]
허니웰은 아처가 루키 시즌일 때와 비슷한 뽀글머리를 하고 그 위에 모자를 덮어쓴 사람이 되어 마운드에 섰다. 그는 긴장한 듯한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몸도 조금 굳어 보였고.
지혁은 허니웰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기에. 연습 투구를 하고 있는 허니웰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이 긴장에서 온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늘 점수를 좀 뽑겠는데?”
지혁은 옆에 앉아서 타격 장비를 점검하고 있는 멘데스에게 툭 던졌다.
“그래?”
“저 녀석, 긴장을 많이 한 것 같은 폼이야.”
“흠?”
멘데스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픽 웃었다.
“긴장을 하건 말건 내가 날려 버릴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걱정? 내가 무슨 걱정을 해. 하하, 알아서 해 주겠지.”
“그래. 그거야.”
자신감이 넘쳐흘러 보이는 멘데스는 이미 클리블랜드의 더그아웃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지혁뿐만이 아니라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의지를 받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전생의 그를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지금의 멘데스가 바로 홈 플레이트의 왕 그 자체였으니까.
여튼, 허니웰의 초구로 1회 말이 시작됐다. 린도어는 거의 복판에 들어오는 초구를 흘려보내며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칠 만한가 봐.”
“그러게.”
린도어가 지은 미소의 의미를 이해한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한결 자신감을 가지고 다음 공을 지켜본다. 하지만, 린도어는 공과 크게 벗어나는 헛스윙을 보여 주고 말았다.
[스윙, 바로 이 공이네요.]
[악마의 볼, 스크류볼입니다. 허니웰은 이 공을 기가 막히게 쓰는 선수죠.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스크류를 던지는 선수는 허니웰이 유일합니다.]
[우투수의 스크류볼.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좌타자인 린도어 입장에서는 공이 몸 쪽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 보였겠죠. 이 공에 갑자기 역회전이 먹으면서 반대로 빠져나갑니다. 공이 스크류볼이라는 걸 미리 캐치하지 않으면 상대하기 힘들 겁니다. 공을 보고 나서 판단하는 스윙은 밸런스가 맞지 않아요. 방금 린도어의 스윙이 그랬죠.]
[아하.]
린도어의 표정이 자신만만한 것에서 답답해하는 것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과정에는 오로지 공 한 개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 한 개만을 보고서도, 허니웰의 이 스크류볼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기도 했다.
“헤이, 저 녀석 긴장했다며?”
“아니, 긴장은 지금도 하고 있다니까?”
분명히 덜컥거리는 느낌이 있다. 허니웰을 옆에서 지켜봤던 지혁이니까 알 수 있다.
마운드에서 자연스럽지 않다는 건 긴장했다는 뜻이 분명한데, 허니웰의 스크류볼 하나만큼은 이상하게 공포스러울 정도의 위력으로 홈을 파고들었다.
“스윙! 배터 아웃!”
3구도 스크류볼. 린도어가 인코스를 대비해서 슬쩍 발을 열었지만 그러기 무섭게 멀리 빠져나가기 시작한 공은 거의 바깥쪽 존에 걸칠 정도에서야 미트에 들어갔다.
[와우, 뷰티풀.]
[이 공은 정말 대단합니다. 저 멀어지는 걸 좀 보세요!]
“아.”
투수전이 될 것이다. 모두가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
[린도어가 밀어 때려 봅니다만 힘이 없습니다. 에반 롱고리아가 잡아서 직접 3루 베이스를 밟습니다. 투아웃 주자 1, 2루의 위기를 탈출하는 브랜트 허니웰. 이번에도 스크류볼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냅니다. 5회 말 종료.]
[무실점으로 잘 버티네요. 이렇게 되면 초조해지는 쪽은 클리블랜드입니다.]
[문이 5회까지 2피안타 1사사구 무실점. 허니웰은 5회까지 3피안타 2사사구 무실점입니다. 5회에 킵니스에게 몸에 맞는 공을 주고 가이어에게 안타를 맞았습니다만, 결국 짐머와 린도어를 잡아냈습니다. 허니웰.]
[음, 이 경기가 이렇게 흐르네요. 탬파베이가 괜히 CS까지 올라온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Shit!”
1루 베이스 위에서 한참을 주저앉아 있던 린도어가 헬멧을 벗으며 욕설을 내뱉는다. 린도어뿐이 아니다. 오늘 타자들은 상당히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허니웰의 다른 공들은 칠 만하기 때문이다.
94마일에서 95마일 정도에서 형성되는 패스트볼은 충분히 공략할 법한 공이었고, 써드 피치인 체인지업도 큰 효과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문제는 스크류볼. 오늘 허니웰은 총 투구 수의 70% 이상에 달하는 비중을 스크류볼에 쏟아부었다. 부상 위험이 큰 공인데도 불구하고. 하긴, 한 발짝만 더 내딛으면 월드시리즈에 가는데 부상 위험이 있다고 공을 아낄 투수는 어디에도 없겠지만.
“오늘 네가 코너워크가 좋은 것처럼, 허니웰도 스크류볼이 좋은 날이야. 유독.”
“그래?”
“시즌 중에 한 번인가 만났잖아? 그때는 이런 공이 아니었어. 그때랑은 차원이 달라. 그냥 눈앞에서 없어져 버리는 느낌이야.”
멘데스는 린도어를 조금 안쓰럽게 쳐다보더니 이내 포수 장비를 몸에 걸치기 시작했다. 그는 오늘 허니웰의 스크류볼을 때려 안타를 만들어 낸 유일한 선수였다. 그마저도 빗맞은 타구가 아슬아슬하게 유격수 키를 넘어가는 행운의 안타였다.
“자, 다들 조바심 낼 필요 없어. 허니웰은 내구성이 강한 투수가 아니야. 더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타석에서 인내심을 보여 주란 말이야. 6회까지다. 6회 넘어서 불펜이 나오면 충분히 공략할 수 있어!”
프랑코나와 코치들은 오늘 혼란을 겪고 있는 야수들에게 직접적인 지시를 내리기 바빴다. 지혁은 그 속에서 덤덤히 글러브를 챙겼다.
‘허니웰이 언제 이렇게 좋은 투수가 됐지?’
1년 전만 해도 이러진 않았는데. 지혁의 등 뒤에서, 지혁을 바라보면서, 지혁이 닦아 놓는 길을 쫄래쫄래 길을 따라오던 선수에 불과했었는데.
그가 훗날 좋은 투수가 될 것이라는 건 분명하게 알고 있었지만, 고작 1년 사이에 이렇게 변화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탬파베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지혁의 덕분이었다. 탬파베이에서의 마지막 시즌, 지혁은 유망주들을 빨리 콜업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했었으니까.
원래 탬파베이의 스타일대로였다면 최소 2~3년은 더 마이너리그 기간을 거쳤을지 모를 유망주들이 지금 라인업의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다.
브랜트 허니웰. 호세 드 레온 같은 투수들. 케이시 질라스피, 윌리 아다메스 같은 타자들.
만약 지혁이 탬파베이를 거치지 않았었다면 이 선수들은 이제 막 기회를 얻어 보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 내가 업어 키운 팀인데. 이 팀한테 뒷덜미를 잡힐 수는 없지.”
지혁은 글러브를 챙겨 다시 마운드로 올라갔다, 머릿속에는 1년 전만 해도 유망주에 불과했던 녀석들의 장단점을 되새기면서. 곱게 키운 자식들에게 잡아먹히는 일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까.
[6회 초, 탬파베이의 공격. 1번 롱고리아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2타수 무안타, 삼진 두 개.]
[글쎄요. 저는 아직도 랭카스터의 의도를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이 정도라면 오늘의 파격 변화는 실패에 가깝죠. 차라리 롱고리아 앞에 한 명이라도 주자를 내보내는 것이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이지 않았을까요?]
[그렇겠죠. 오늘 롱고리아는 지금의 타석까지 합해 세 타석에서 모두 주자 없는 상황에서 들어섭니다. 초구 볼. 살짝 높았습니다.]
‘뒷덜미를 잡힐 수는 없어.’
의식조차 미처 하지 못했을 정도의 틈이었다. 허니웰을 비롯한 유망주들에 관한 생각을 계속 하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그 생각을 하다 보니. 롱고리아를 상대하는 데 100% 집중하지 못했다. 아마 98% 정도였을 것이다.
[밀었습니다! 바깥쪽 공을 밀었습니다! 몸을 날린 산타나를 빠져나가는 타구, 오른쪽 라인 타고 나갑니다! 롱고리아, 1루 돌아 2루까지. 선두타자 2루타! 에반 롱고리아!]
[탬파베이는 중요한 순간에 혈을 뚫어 주는 선수가 있어요. 유일하게 있죠. 바로 이 선수입니다. 에반 롱고리아. 정말 대단하네요. 방금도 바깥쪽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좋은 코스였어요. 의식적으로 잘 밀었네요.]
[선두타자 2루타. 이제는 탬파베이 레이스가 선취점에 다가섭니다. 와우, 이 경기가 이렇게 되나요? 클리블랜드가 상당히 유리한 매치 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죠.]
[하하. 야구 몰라요.]
2루 베이스 위에 안착한 롱고리아는 탬파베이 쪽 더그아웃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어 보이며 싸인을 보내고 있다.
지혁은 글러브를 짝짝 내리치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조금 더 집중했어야 했다. 하다못해 다른 타자도 아니고 롱고리아를 상대하는데 나이브할 틈이 있었던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헤이! 괜찮아, 괜찮아. 지켜 가면서 하면 돼!”
멘데스가 두 손바닥을 땅으로 한 채 지그시 누르며 지혁을 진정시켰다.
[타석에는 2번, 코리 디커슨. 이번 시즌 타율 .307에 홈런 32개입니다. 하지만 이번 가을에는 타율 .218에 홈런은 없군요. 하지만 오늘은 안타 하나를 뽑아내며 감을 조절했습니다. 문에게서 뽑아낸 두 개의 안타 중 하나를 디커슨이 때렸었죠.]
[대위기네요, 클리블랜드. 선취점을 주게 되면 쉽지 않을 겁니다. 오늘 허니웰이 정말 대단한 스크류볼을 던지고 있으니까요.]
[프랑코나 감독, 날카로운 눈으로 마운드를 응시합니다. 오늘 친정 팀을 상대로 잘 던지다가 별안간 위기를 맞은 문인데요. 문을 향한 믿음은 여전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죠.]
주자를 2루에 두고, 좌타자 디커슨을 상대로는 무조건 바깥쪽 승부다. 밀어 때리게 만들어야 2루 주자의 3루 진루를 막을 수 있으니까.
멘데스도 왼쪽 다리는 거의 우타자 배터박스에 넣을 정도로 빠져서 타깃을 확실하게 설정해 줬다.
“볼.”
“볼.”
“스트라이크!”
“……볼.”
마지막 공은 정말 아슬아슬했는데. 멘데스가 공을 쥐고 나서 고개를 격하게 떨궜다. 저건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이다. 조금만 더 안쪽에서 공을 잡는 프레이밍을 했더라면 방금은 스트라이크 콜이 울리기에 충분한 공이었는데.
멘데스의 격한 아쉬움을 지혁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여유를 부려 본다. 2루수 킵니스를 향해 돌아보며 의미 없는 사인을 주고받고, 이어서 3루수 라미레즈 쪽도 둘러보며 땅볼 타구에 대비해 달라는 말을 남긴다.
[카운트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 이제는 도망가기가 애매하죠. 노 아웃에 주자 두 명을 쌓는 건 천하의 문이라고 해도 부담스럽습니다.]
[정답입니다.]
[제5구, 다시 바깥쪽! 하지만 잡아당깁니다, 투수 옆 스치는 타구. 2루수 킵니스가 건져 내서 1루로. 타자 주자 디커슨은 잡아냅니다. 하지만 2루에 있던 롱고리아가 3루까지 들어갑니다. 원아웃에 주자 3루. 탬파베이가 외야로만 공을 날려도 챔피언십시리즈 선취점을 따내게 됩니다.]
방금 전 공이 볼을 선언받았기 때문에, 5구는 조금 안쪽으로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디커슨의 방망이 끝에 걸리는 위치였고.
죽어도 3루 쪽으로는 밀지 않겠다는 의지로 있는 힘껏 잡아당긴 디커슨의 타구는 2루 베이스 쪽으로 향했다.
철저하게 진루타를 목적으로 한 스윙이었고, 결국 목적을 이뤄 낸 것이다.
“후우-.”
지혁이 깊은 심호흡을 내뱉었다. 캘러웨이 코치가 마운드로 올라오고 있었다. 다음 타자는 윌리 아다메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