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90화 (191/204)

승부는 한순간에 결정나기 마련이다

“푸우.”

지혁은 입술을 부르르 털었다. 마운드에 내야수 전원이 모였고, 캘러웨이 코치는 씁쓸한 얼굴로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있을 뿐이다.

사실 다 같이 마운드에 모여 있는 이 시간의 의미는 그저 경기 진행을 잠시 멈추는 것에 있다. 각자가 해야 할 일을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냥 야구를 하다 보면 늘 찾아오는 수많은 위기들 중 하나일 뿐이다. 원아웃에, 주자 3루. 타석에는 지난 시리즈에서 가장 감이 좋았던 어린 타자.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존 바깥쪽을 공략하며, 어려운 승부로 끌고 가고, 어떻게든 한 점에서 막을 것.

“주자는 들여보내도 좋아.”

캘러웨이는 벤치의 의도를 전달했다.

3루에 있는 롱고리아가 홈을 밟게 해 주더라도 아웃 카운트를 늘려 가는 것. 정석적이고 일반적인 해결책이다. 하지만 지금, 그래도 될까?

“후우.”

챔피언십시리즈라는 무대, 그중에서도 1차전이라는 특수한 환경. 게다가 시리즈 전체의 선취점이 될 주자이기도 한 상황. 투수진의 매치 업에서는 소위 말하는 ‘급의 차이’가 많이 유리했던 경기였는데.

상황이 이렇게 흘렀다는 것 자체가 이미 뭔가 꼬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탬파베이는 저 한 점으로 가능성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기세를 타기 시작할 것이다.

언더독의 반란. 첫 경기의 선취점이 지닌 의미는 거기서 찾을 수 있다. 언더독인 팀들은, 첫 점수를 뽑아내는 것 자체로도 엄청난 자신감을 얻곤 하니까. 지혁조차도 그랬다. 작년까지는.

결론적으로 지금 3루에 있는 롱고리아가 가지고 있는 ‘한 점’의 가치는 일반적인 상황과는 다르다. 그러니 지금은 일반적인 대처보다는 조금 더 과감한 승부를 하는 게 옳지 않을까.

이게 지혁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멘데스의 결론이기도 했다.

“잡아 보죠?”

“어렵게 끌고 갈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충분할 것 같은데. 바깥쪽 높은 공에 약하잖아요, 저놈.”

“저쪽도 알고 있겠지. 그리고 우리가 어렵게 갈 거라는 것도 알 거야. 초구부터 자신 있게 돌릴걸. 외야로만 보내면 성공이니까.”

“그럼 어쩔 수 없고요. 한 점 주는 게 본전이라고 생각하면 편해요. 승부 한 번 해볼게요. 삼진으로 잡아내는 게 무조건 최선이죠.”

멘데스와 캘러웨이가 의견을 나누는 중에 지혁이 끼어들어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하고 의견을 나눌 시간이 없다. 이미 구심이 마운드로 슬쩍 올라오며 손을 휘적대고 있으니까.

“클리블랜드! 경기 재개합니다!”

캘러웨이는 애써 지은 게 분명한 미소를 보이더니 지혁의 옆구리를 툭 치고 내려갔다.

마운드 위에서 투수 코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건 분명히 좋은 느낌은 아니다. 이유가 뭐가 됐든 간에, 벤치가 투수의 리듬을 끊어 가고 싶다는 소리니까.

지혁은 일부러 캘러웨이의 뒷모습을 보지 않고 돌아서 로진을 여러 번 매만졌다.

그때 프로그레시브 필드의 관중들이 파도가 이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지혁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Moon! for the cleveland!

-Moon! for the cleveland!

캘러웨이가 내려가면서 양팔을 위아래로 부추긴 게 뻔했다.

보통의 야구 경기장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장면이긴 했지만, 이건 꽤 효과가 있어 보였다. 최소한 클리블랜드의 내야수들이 피식거리기 시작했고, 탬파베이의 어린 야수들을 정신적으로 압박할 수 있을 테니.

“고맙네요, 코치님.”

흐름을 억지로 끊기 위해서는 타임을 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관중들의 반응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지혁조차도 이렇게 꽉 찬 사람들의 응원이 귀를 가득 때리면 정체모를 자신감이 피어나곤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자! 가 보자고!”

멘데스가 자리로 돌아가 미트를 때리며 외쳤다. 갑자기 지혁의 이름을 연호하는 관중들의 엄청난 함성 때문에 소통이 잘 되지는 않았지만, 이 순간 해야 할 일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야아!”

몸을 있는 힘껏 뒤틀어 바닥에 있는 힘까지 다 짜낸다는 기분으로, 초구를 최대한 세게 꽂아 넣는 일.

“파울.”

모두의 예상대로 아다메스는 초구부터 공격적으로 휘둘렀다. 하지만 바깥쪽 모서리에 걸친 공을 1루 쪽으로 밀어 내는 데 그쳤다.

관중석으로 공이 들어가는 바람에 지혁을 향한 응원이 잠깐 어수선해졌지만, 이내 곧 다시 원래의 목소리를 찾았다.

[클리블랜드의 팬들이 아다메스를 강하게 압박하네요. 분위기가 뜨거워졌습니다.]

[아다메스가 좋은 활약을 보여 주고 있긴 하지만 아직 어린 선수인 것도 맞죠. 클리블랜드의 팬들조차도 경기의 흐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점을 먼저 주기 싫다는 강한 의지네요. 이런 응원이 있으면 투수도 힘을 받겠습니다.]

[그렇군요. 방금 전 1구의 구속이 97마일이 찍혔네요. 문이 구사할 수 있는 맥시멈에 가까웠습니다. 2구, 몸 쪽을 찌릅니다. 이번에는 살짝 벗어났군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초구와 2구 승부를 패스트볼로 들어갔다면, 3구와 4구는 싱커로 대처했다. 마지막에 큰 각을 그리며 휘어 떨어지는 공 두 개. 아다메스는 한 개에는 대처했지만 한 개는 골라냈다. 스트라이크와 볼이 하나씩 더 쌓였다.

‘투앤투. 승부 타이밍.’

지혁도, 멘데스도, 그리고 아다메스와 롱고리아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3루에 있던 롱고리아는 평소보다 한 발 정도 더 리드 폭을 넓혔다. 지혁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과연 베테랑다웠고 노련했다.

만약 아다메스가 삼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지혁의 투구에 따라가는 배팅을 한다면? 어설픈 내야 땅볼이 나올 확률이 높다. 롱고리아도 지금의 한 점이 천금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과감하게 홈으로 대쉬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3루수 호세 라미레즈가 베이스에 붙어서 자신의 글러브를 퍽퍽 두드리며 지혁에게 시그널을 보냈지만, 지혁은 듣지 못했다. 그리고 3루 쪽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는 듯 타석만을 응시했다.

주자 롱고리아도, 3루수 라미레즈도 같은 생각을 했다.

지혁이 타자와의 승부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구나.

롱고리아가 반 발짝을 더 앞으로 나섰다. 그에겐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5구. 과연 탬파베이가 선취점을 기록할 수 있을지. 던집니다!]

지혁은, 아니, 멘데스는. 오늘 결정적인 순간에 너클 포크를 써 왔다.

랭카스터가 롱고리아를 1번으로 전진 배치한 이유를 롱고리아는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다. 현재 탬파베이의 라인업에서 가장 많은 경험을 가진 선수고, 가장 많은 상대와 맞부딪혀 본 선수라서.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그날 가져가는 패턴을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선수라서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투입된 이유는 그 패턴을 가장 빨리 캐치해 내고, 결정적인 타이밍에 어린 선수들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역할 때문. 두 번의 타석을 소화하며, 5회까지의 경기를 지켜보며. 롱고리아는 어린 선수들에게 이미 조언을 건넨 뒤였다.

“너클 포크. 정말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너클 포크를 반드시 의식해야 해. 반드시. 오늘 경기는 너클 포크를 자주 쓸 거야. 우리 팀에서 던지지 않았던 공이니까 특히 더.”

아다메스는 롱고리아의 조언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너클 포크가 들어가면 분명히 맞춰낼 수 있는 타격 재능도 있다.

땅볼이 나오더라도 반드시 홈으로 파고들어간다.

여기까지가 롱고리아의 생각이었고, 또 확신이었다. 그래서 지혁이 공을 던지는 순간 롱고리아의 스킵 동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고 과감했다.

하지만 멘데스는 이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 그는 마치 처음부터 롱고리아의, 또 아다메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한다는 듯한 포즈로 두 무릎을 어정쩡히 일으켰다.

[하이 패스트볼! 헛칩니다!]

97마일짜리 패스트볼이 솟구쳐 오르듯 타자의 가슴팍으로 달려들었다. 눈높이에 가까운 코스로 빠른 공이 들어올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예상하지 못한 아다메스의 방망이가 공중을 헛돌았다. 멘데스와 지혁은 허를 찔렀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그리고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멘데스는 모든 시나리오를 이미 머릿속에 그려 넣은 사람처럼 재빨리 다음 동작을 이어 갔다. 왼발을 크게 뻗어 헛스윙을 한 아다메스의 뒤쪽으로 빠져나왔고, 번개 같은 스피드로 미트 속에서 공을 빼내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Fuck!”

평소보다 리드가 길었던 롱고리아가 재빨리 역동작을 걸며 3루로 돌아가기 시작했지만. 멘데스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레이저 같은 송구가 이미 라미레즈의 글러브로 빨려 들었다.

3루 베이스 위에서의 승부는 너무나 허무하게 끝났다. 롱고리아가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복귀하려는 필사적인 움직임을 보였지만, 베이스 위에는 이미 라미레즈의 글러브가 공을 꽉 쥔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아웃!”

태그가 되는 순간 3루심의 호쾌한 아웃 콜이 울려 퍼졌다. 내야수들은 모두 자리에서 뛰어오르며 주먹을 허공에 휘둘러 보였다. 지혁은 모자를 벗었다 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마스크를 벗어던진 멘데스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면 3루 베이스 위에서 슬퍼 보이는 듯한 눈으로 3루심을 올려다보는 롱고리아와, 결정적인 순간에 높은 패스트볼에 헛스윙 삼진을 당하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군 아다메스의 모습은 아주 극명한 대비를 만들어 냈다.

언더독은, 약팀이다. 약팀에게만 주어지는 호칭이다. 그들은 모든 힘을 다 짜내어 자신보다 강한 팀에 도전하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 문턱을 넘지 못하게 되면 훨씬 더 큰 데미지를 입는다. 탬파베이가 그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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