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 1차전 (1)
-재작년 우리는 손에 다 쥐었던 트로피를 놓쳤다. 작년에도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내딛지 못했다. 3년 연속으로 실패할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정상에 설 것이다.
(테리 프랑코나, CLE 감독)
-작년 기억이 난다. 놀라운 순간이었다. 우리 선수들은 이긴 경험이 있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 2년 연속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진정한 왕조의 첫 걸음을 뗄 것이다.
(데이브 로버츠, LAD 감독)
-한 경기 한 경기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우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난 언제나 이기고 싶고, 언제나 우승하고 싶고, 언제나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
(클레이튼 커쇼, LAD 투수)
-팀으로써는 우리가 더 강하다. 작년 가을을 기억하고 있다. 같은 상대에게 두 번 질 수는 없다. 모든 것을 걸고 시리즈에 임하겠다.
(페르난도 멘데스, CLE 포수)
***
많은 기사들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선수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곧장 그날의 헤드라인이 되었다.
코치나 감독들의 코멘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크리스 안토네티와 앤드류 프리드먼, 두 단장의 말도 그랬다.
“우리는 왕조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팀이 될 겁니다.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 있는 어린 선수들은 더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고, 베테랑들은 어린 선수들에게 헌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Yes, 우리가 이길 겁니다.”
프리드먼의 자신감 넘치는 인터뷰가 불을 붙였고.
“클리블랜드. 이 도시에 계속되고 있는 70년의 저주를 끊을 겁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loser’s city라고 조롱받던 클리블랜드에게 영광을 가져올 겁니다. 선수들과 감독이 하나가 되어 우리의 꿈을 이뤄 줄 거라고 믿습니다.”
안토네티는 격정적인 인터뷰로 맞불을 놓았다.
2018년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시리즈만을 남겨 놓은 상황. 전 세계의 야구팬들이 모두 숨죽이며 기다렸다. 한국만 빼고.
나라 전체가 ‘새로운 역사’를 목도하기 위해 달아오른 한국만 축제 분위기일 뿐, 나머지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1차전만을 기다렸다. 2018년, 10월 24일. 수요일. LA의 다저 스타디움에서 마지막 공이 던져지는 순간만을 말이다.
***
“흠, 근육 컨디션은 나쁘지 않네.”
“여긴 클리블랜드보다 훨씬 따뜻해서요. 전 아무래도 따뜻한 곳이 편해요. 작년까지만 해도 플로리다에 있다 왔으니까.”
“시끄러워. 말은 그만해. 다시 숨 깊게 내뱉어.”
트레이너 짐이 지혁의 등 뒤에 올라타 그의 목을 천천히 내리눌렀다. 온몸 안에 있는 공기가 쭉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지혁의 가슴과 배가 잔디에 밀착하는 느낌을 즐겼다.
“저기 또 있네. 왼쪽을 봐, 저쪽에도 있다.”
“아, 아파요.”
“멘데스가 그러던데, 한국의 마이클 조던이라며?”
“그 정도는 아니에요. 조던은 너무 위대하고.”
“LA에 미국 기자들보다 한국 기자들이 더 많이 보이는데도 그런 소리를 할 거야?”
짐이 지혁이 고개를 돌리는 모든 곳마다 손가락을 들어 카메라를 짚어 주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한국 기자들을 향해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려 본다.
“짐, 한국에서 슈퍼 스타가 되고 싶어요?”
“뭐? 당연하지!”
“그러면 날 일으켜서 어깨동무라도 좀 해 봐요. 플래쉬 무지하게 터질걸요.”
짐은 얼른 일어나 지혁을 일으키고는 시키는 대로 지혁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한국 기자들이 몰려 있는 한쪽에서 카메라 플래쉬 여러 개가 동시에 파바밧, 터져 나왔다.
“하하하, 예쓰! 이번에 우승하고 한국에 돌아갈 거지? 그때 나도 데려가라고. 스타 한 번 되어 보게.”
“참 나, 시끄러워요.”
짐은 1차전 선발 등판을 앞둔 지혁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는 것이다.
지혁의 손을 이끌고 한국 기자들 쪽으로 다가간 짐은 익살스럽게 자신과 지혁을 번갈아 가리키며 환하게 웃어 보이고는 사라졌다.
짐의 노력 덕분에 기자들의 입가에도 웃음이 슬쩍 폈다.
“경기 시작 직전이라 인터뷰는 힘들고, 사진만 몇 장 찍을게요.”
구단의 직원이 재빨리 기자들 앞으로 다가가 공식적인 경고를 주었지만, 한국의 기자들은 여전히 질문을 던져 댔다.
“오늘 경기 준비는 잘 하셨나요?”
“음, 글쎄요. 뭐…… 준비는 평소대로처럼, 똑같이 했습니다. 잘 던져야죠.”
“역사상 최초로 아시아인 투수 두 명이 월드시리즈 무대에서 선발투수로 맞붙는데요. 류희주 선수에게 한마디 해 주고 싶으신 건?”
“류희주 선배는 좋은 투수니까요. 시즌이 갈수록 컨디션이 더 좋아지시는 것 같더라고요. 지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진들은 다 찍으셨죠? 그럼 전 준비하러 이만.”
지혁은 마지막으로 작은 포즈 하나를 취해 주고는 단호하게 더그아웃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쪽에서 터지는 플래쉬 소리가 왜인지 질척거리는 것 같이 느껴진다.
더그아웃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구석에 기대어 있던 프랑코나가 슬쩍 다가왔다.
“아직까지는 평소와 같아 보이는군.”
“아, 감독님. 네, 사실 DS나 CS나 WS나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아요.”
“네 감을 너무 맹신하지는 마.”
“예?”
“월드시리즈는 완전히 다른 무대야. 이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지. 느껴 봐야만 알아.”
“흐음.”
“지금부터 1시간 동안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언제라도, 아니면 마운드에 올라가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1회? 2회? 3회. 언제라도, 갑자기 툭 다가오는 벽이 있어. 그걸 저주의 실체라고 받아들이는 녀석들도 있지.”
프랑코나는 뚱하니 듣고 있는 지혁의 표정을 보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헛, 참. 어쨌든 만약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런 벽이 갑자기 턱 다가온다고 해도, 절대로 당황할 필요 없어. 네놈이라면 당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손으로 저주를 쥐어 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는 뜻이야.”
“알겠습니다.”
“자, 가서 준비나 해.”
“옙.”
프랑코나는 고개를 슬쩍 흔들며 지혁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안토네티는 저주를 끊어 내기 위한 열쇠로 지혁을 골랐고, 만약 지혁이 진짜 그 열쇠라면. 어쩌면 지혁은 알 수 없는 부진이나 부침을 겪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바람으로 프랑코나는 시리즈를 준비했다. 1시간 앞으로 다가온 리벤지 매치 시리즈를.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감독, 테리 프랑코나입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무미건조한 멘트와 함께 프랑코나가 더그아웃에서 뛰어나왔다.
선수들이 도열해 있는 3루 라인을 따라가며 선수들 하나하나와 일일이 악수를 나눠 본다.
후보 선수들에게서부터 선발 라인업을 거쳐 마지막으로 지혁의 손까지 꽉 잡은 프랑코나가 홈 플레이트 앞에 서자 다저 스타디움에 긴 야유가 울려 퍼진다.
상대팀을 압박하려는 다저스 팬들의 야유다. 파란 물결이 휘날린다. 휘날리기는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도열해 있는 3루 쪽 관중석에서는 그 압박이 덜하다. 아주 훨씬 덜하다. 왜냐면 거기엔 지혁을 응원하기 위해 몰려든 한국인 관중들이 엄청나게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전략이 성공하셨네요.”
“흐흐. 그런가 보군.”
“덕분에 제가 좀 귀찮았지만요.”
“다 팀을 위한 일이지. 저 한국인들에게 실력을 제대로 보여 주라고.”
“뭐, 저 사람들은 저만 응원하는 게 아니라 류희주 선배도 응원할 거예요.”
지혁은 프랑코나와 작게 대화를 나누며 다저스의 선수들이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 톤이 최소 두 키는 높아지며, 다저 스타디움에 엄청난 환호성이 터졌다가 잠잠해졌다가를 반복한다.
-오늘의 다저- 선발! 라인업입니다!
장내 아나운서는 한 명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지혁은 다저스의 라인업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아나운서가 이름을 호명할 때마다 작은 목소리로 상대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러면서 녀석들의 약점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1번. 좌익수, 크리스 테일러.
2번. 3루수, 저스틴 터너.
3번. 우익수. 알렉스 버듀고.
4번. 1루수. 코디 벨린저.
5번. 유격수. 코리 시거.
6번. 중견수. 쟉 피더슨.
7번. 포수. 야스마니 그랜달.
8번. 투수. 류희주.
9번. 2루수. 닐 워커.
내셔널리그인 다저스의 홈에서 열리는 1차전이어서 투수가 타선에 들어서야 한다. 1년에 한두 경기에나 타석에 들어서곤 했던 지혁에게는 이것도 나름 부담이 되는 요소였다.
다저스는 예상외로 8번 자리에 투수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트레이드 데드라인 기간 동안 메츠에서 데려온 2루수 워커를 9번 자리에 투입한 것도 이색적이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다저스의 핵심적인 타자들, 그것도 아주 어리고 재능이 넘치는, 진짜로 포텐셜이 어마어마하다고 평가 받고 있는 타자들이다.
테일러, 버듀고, 벨린저, 시거, 피더슨. 몇 년 전부터 다저스의 팬들이, 아니 전 미국의 야구팬들이 잔뜩 기대하던 바로 그 선수들이다.
테일러와 버듀고는 3할은 기본으로 깔아 줄 수 있는 최고급의 컨택을 자랑하고, 벨린저와 시거, 피더슨은 한 해에 40홈런 이상을 때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파워를 가졌다.
프리드먼이 다저스에서 가장 공을 들인 것도 이 부분이었을 것이다. 이 어린 선수들은 2년 차 징크스를 많이 겪지도 않았고, 적응에 실패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벤치에 있는 아드리안 곤잘레스, 체이스 어틀리 같은 베테랑들을 끝까지 내치지 않고 팀에 데리고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일 터다.
어린 선수들의 정신적으로 케어해 줄 수 있는 역할. 그들은 그 역할에 만족하고 있었다. 베테랑이 케어하는 어린 선수들이 실제로 작년에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가져왔으니까.
“쉽지 않은 라인업이야. 참, 나.”
지혁은 혀를 쯧 하고 찼다.
분명 쉽지 않은 라인업이다. 월드시리즈까지 올라온 팀인데 쉬울 리가 없는 것도 맞다.
하지만 지혁은 왜인지 마음이 편했다. 프랑코나도 그렇고, 트레이너 짐도 그렇고, 클리블랜드의 모든 선수들도 그렇고. 저주가 발목을 붙잡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단단히 준비를 하라고 계속 말했지만.
지혁이 느끼기에 다저스의 타선은 휴스턴의 타선보다는 위압감이 덜하고, 양키스의 타선보다는 역동적인 맛이 덜했다. 그렇다고 탬파베이보다 끈끈한 팀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좌타자 위주로 구성된 유망주들은 좌투수에게 많은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다저스가 강하다고? 강하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지혁은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지금까지 지혁이 상대해 온 팀들보다 타선이 압도적으로 강하지는 않다.
파워에서 쏟아지는 눈먼 장타만 조심한다면, 어떻게 생각해도 실점할 것 같지 않은 기분이다.
-마지막으로, 블루- 블러드! 다저의 감독! 데이브! 로-버어어어어츠!
장내 아나운서가 마지막으로 다저스의 감독 데이브 로버츠를 소개하면서, 월드시리즈의 식전 행사가 모두 끝이 났다.
이제는 진짜로 야구를 해야 할 시간이 찾아왔다.
[역사의 한 장면을 함께하고 계십니다! 2018년 월드시리즈, 1차전 선발투수로 나선 다저스의 류희주 선수입니다.]
[아, 아아, 목이 잠겨 버렸네요. 허허허, 감동적입니다.]
[허 위원님 말씀대로입니다. 감동적인 장면이죠. 메이저리그 역사상 처음입니다. 월드시리즈 1차전 선발투수로 나서는 건요. 그것도 양 팀의 투수가 모두 한국인이라는 게, 정말 한국 야구의 역사에 남을 한 장면입니다.]
[자, 류희주, 지난해 월드시리즈에서 4차전 선발투수로 나왔었습니다. 그때는 클리블랜드에게 아쉬운 패배를 당했었는데요. 오늘 류희주 선수가 조심해야 할 선수는 역시 5번에 있는 페르난도 멘데스입니다.]
한국의 스포츠 채널은 당연하게도 현장에 중계진을 직접 파견하며 역사의 현장을 담기 시작했다. 한국의 방송사에게, 그리고 한국의 팬들에게 있어 오늘의 경기는 상상 이상의 가치를 담은 매치 업이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 시간으로 아침 9시에 시작하는 경기를 보기 위해 휴가를 썼다는 직장인들이 줄을 이었고,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모두 TV를 켜고 두 선수의 경기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경기 시작 1시간 전에 방영되었던 프리뷰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두 자릿수를 찍은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침 8시 프로그램이 두 자릿수 시청률을 찍은 건 대한민국 방송 역사에서 한 손으로 꼽는 일이었다.
[류희주, 클리블랜드의 1번 타자 프란시스코 린도어를 상대합니다. 초구! 바깥쪽 패스트볼. 스트라이크로 기분 좋게 출발합니다.]
마운드의 류희주, 그리고 차례를 대기하고 있는 더그아웃 안의 문지혁. 두 사람의 얼굴이 번갈아 클로즈업되며 월드시리즈 1차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