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94화 (195/204)

WS 1차전 (2)

“사라져. 사라지는 공이야.”

“그래.”

린도어가 첫 타석에서 힘없는 투수 땅볼을 기록한 뒤 대기 타석에 있는 브랜틀리에게 조언해 준 말이었다.

“헤이, ‘진짜’ 사라져.”

“오케이.”

브랜틀리가 1루수 앞으로 향하는 맥없는 정면 타구를 친 이후에 준비하는 엔카나시온에게 전해 준 말이었고.

타석에 선 오늘의 3번 타자 에드윈 엔카나시온은 바깥쪽 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을 것이다.

공이 빠르지는 않다. 92마일 내외에서 형성되는 패스트볼이니까, 브랜틀리나 엔카나시온 정도 되는 메이저리그의 베테랑들은 공을 지켜보다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지금 엔카나시온이 헛치고 만 저 공. 체인지업 때문이다.

류희주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체인지업은 오늘 타자들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낙하산을 안 피고 떨어지던 공이 갑자기 낙하산을 핀 것처럼 멈춰 버려. 그리고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브랜틀리는 더그아웃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감상평을 전파하는 중이다.

선수들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릿속에 공의 궤적을 미리 떠올려 보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메이저리그에서 난다 긴다 하는 녀석들의 체인지업을 상상해 보며, 거기에 타이밍을 맞추는 것.

그런 사전 작업이 있어야만 타석에 들어서서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엔카나시온이 승부를 꽤 길게 끌고 가기는 했지만, 결국은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것도 루킹 삼진.

다저 스타디움에 모인 한국 팬들이 엄청난 소리를 질러 댔다. 곳곳에서 태극기가 휘날리고, 류희주의 이름이 새겨진 저지도 휘날린다.

“체인지업을 너무 의식했어. 오늘 백도어 커터도 껄끄럽겠는데.”

거의 동굴 속을 우렁우렁 울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의 엔카나시온이 헬멧을 아무 데나 툭 던져 버리며 약간의 짜증을 섞었다.

오늘의 류희주는 컨디션 관리를 엄청나게 잘 해 놓은 상태라는 것이 세 타자의 반응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저 뚱뚱한 친구는 5일이나 쉬고 나왔다고. 컨디션이 좋을 수밖에 없어. 자, 자. 괜찮아! 수비부터 하자고! 차근차근히 하면 충분히 공략할 수 있어!”

코치들이 박수를 치며 수비로 나가는 선수들의 뒤에 크게 외쳐 준다. 지혁도 그 외침을 들으며 서서히 마운드로 올라간다.

‘5일이나 쉬고 나왔고…… 컨디션도 좋고. 확실히 체인지업은 진짜 좋긴 하던데.’

방금 전까지 류희주가 서 있던 마운드에 올라, 지혁이 디딤발을 놓아야 할 곳의 흙을 매만진다.

한국인 간의 투수 대결이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일도 처음이었다.

지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한국인 투수와 선발 마운드에서 대결을 펼쳤던 적은 없었다.

그냥 시즌 중의 평범한 한 경기였더라도 꽤 이슈가 될 만한 매치 업인데. 월드시리즈라는 무대에서 한국인 두 명이 만나 버렸으니.

지금 관중석에 엄청나게 들어찬 한국인들, 그리고 가끔씩 들리는 한국어로 된 응원 소리들. 실감이 조금 난다.

“자, 던져 봐!”

멘데스가 툭툭 친 미트를 향해 연습 투구를 던져 본다.

제구가 조금 어긋났다. 몸 쪽에 미트를 대고 있었지만 바깥쪽으로 빠져나갔다. 그런데도 관중석에서는 한국식 응원으로 ‘문지혁! 문지혁!’을 연호하고 있다. 방금 전까지 류희주의 이름을 외치던 그 사람들이 말이다.

“기분이 조금 이상하네.”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이렇게까지 많은 한국인들의 응원을 받아 본 적이 없었기에, 문자 그대로 조금 이상한 기분으로, 지혁은 1회 말을 맞았다.

[이번에는 문지혁 선수입니다. 이제는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첫손에 꼽힐 수 있는 좌완 투수가 되었습니다.]

[그렇죠. 다저스의 클레이튼 커쇼, 보스턴의 크리스 세일. 이 정도와 함께 메이저리그 탑3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증말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허허허.]

[이제는 어느 팀에 데려다 놔도 팀의 에이스가 될 정도의 선수입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력적인 한국 선수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한국인들에게 다른 유니폼을 입은 두 선수가 나란히 월드시리즈 선발 무대에 섰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였다.

동방의 작은 국가에서 세계 정상을 다투는 선수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카타르시스의 끝을 느끼게 해 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승자는 한 명이다. 둘 다 승리할 수는 없다. 세상 누구보다도 우열을 가리기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있어 오늘의 경기는 축제임과 동시에 ‘문지혁과 류희주, 누가 더 좋은 투수인가?’를 가리는 매치이기도 했다.

류희주는 한국에서 프로 생활을 하다 메이저리그로 넘어온 선수이고, 국가 대표로도 수차례 나서 호투를 펼친 바 있다. 이미 그는 ‘국가 대표 에이스’다.

지혁은 정반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넘어가 바닥부터 시작한 선수다. 국가 대표 경험도 없고. 한국 방송에 많이 나오거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도 없다. 사실 한국도 잘 찾지 않는다.

대중들에게 친숙한 것은 류희주였다. 그렇기에 두 선수의 클래스 차이가 어느 정도 나는데도 불구하고 인기는 비슷한 편이다.

막상 마운드에 올라와서 한국어로 된, 태극기를 펼쳐 휘두르는, 한국인들의 응원을 보고 있자니 확실하게 알려 주고 싶어졌다.

“쓰읍.”

지혁은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

[3구, 스트라이크. 156킬로미터의 빠른 공!]

[대단하네요. 구속이 시즌 중보다도 더 잘 나오고 있어요.]

[오늘 문지혁 선수의 투구가 다저스 타자들을 완전히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앞선 두 타자를 상대로도 그랬지만, 버듀고를 상대로도 빠른 공 위주로 상대하고 있는 모습이네요. 류희주 선수가 체인지업과 커터를 많이 섞은 다채로운 투구를 한 것과 비교되네요. 오늘의 문지혁 선수는 파워 피칭을 선보이는 중입니다. 4구, 파울. 완전히 밀렸습니다.]

주 무기인 싱커보다도 빠른 공에 더 초점을 뒀다.

크리스 테일러를 몸 쪽 패스트볼로 삼진 처리했고, 저스틴 터너는 바깥쪽 패스트볼을 던져 2루수 플라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알렉스 버듀고를 상대로 던진 네 개의 공 모두 패스트볼이었다.

[5구, 때립니다. 하지만 우익수 정면으로 향합니다. 브랜든 가이어가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제자리에서 잡아내며 삼자범퇴. 류희주와 문지혁, 문지혁과 류희주. 두 선수 모두 월드시리즈 첫 이닝을 삼자범퇴로 마무리합니다. 한국의 두 투수들이 맞붙는 이곳은 다저 스타디움입니다.]

***

류희주는 2회도 삼자범퇴로 막았다. 멘데스의 잘 맞은 타구가 유격수 코리 시거의 환상적인 다이빙 캐치에 막힌 게 아쉬웠다.

물론 지혁도 삼자범퇴로 막았다. 벨린저는 아주 위협적인 파울 홈런을 때려냈지만 그 뒤에 곧장 삼진을 당했다.

그리고 이어진 3회. 클리블랜드의 7번 킵니스가 유격수 땅볼로, 8번 짐머가 삼진으로 물러났다. 투아웃 상황.

“헤이! 어디 다치지 말고 돌아와!”

투수들이 타석에 올라갈 때면 어김없이 같은 농담을 내뱉는 린도어가 지혁의 등 뒤에 대고 낄낄거렸다.

[9번 타자 문지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두 선수는 이렇게 부딪혀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한국 팬분들께는 감회가 새로운 광경이겠습니다.]

[그렇죠. 저희도 감격스러운데요.]

[마운드에 류희주, 타석에 문지혁.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두 선수가 승부에 나섭니다. 초구, 한복판 패스트볼. 89마일입니다. 스트라이크 원.]

[허허허, 문지혁 선수. 타격할 의도가 없는 것처럼 보이네요. 그냥 지켜봤어요.]

타격할 의도가 없었다기보다는 그냥 지켜보고 싶었을 뿐이다. 타자들의 말로는 오늘 류희주의 컨디션이 아주 좋아 보인다는데, 대체 어떤 공을 던지길래 그러나 싶어서 공 한 개를 본 것뿐이다.

“어이, 코리안 보이. 무리해서 스윙하지 말고 조용히 들어가지 그래. 아니다, 힘껏 휘둘러서 허리 나가는 것도 좋지.”

연습 스윙을 몇 번 휘두르자 마스크를 쓴 다저스의 포수 그랜달이 트래쉬 토크를 던진다.

포수들마다 성격이 좀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의 포수들은 타석에 있는 타자들을 꽤 자극하는 편이다. 그랜달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지혁은 그랜달의 토크를 가볍게 무시하며 배트를 위아래로 쭉 훑었다. 지혁을 향해 던진 류희주의 초구에는 약간의 무시가 담겨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타석에 들어선 게 투수니까 힘을 아껴 가면서 던지고 싶겠지.

게다가 지혁은 아메리칸리그에 몸담은 투수여서 타석에 들어설 기회는 거의 없었으니까, 타석은 아주 낯선 곳이다.

하지만 지혁이 류희주를 타석에 세워 놓고 던진다면, 방심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말이다.

여기는 월드시리즈 무대다. 투수를 상대로 던지더라도, 허튼 공은 던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따악!

[와! 1-2간을 뚫고 나갑니다! 하하하, 문지혁 선수, 문지혁 선수가 오늘 여덟 타자를 완벽하게 막아 내고 있던 류희주 선수에게서 팀의 첫 안타를 뽑아냅니다!]

[이 선수가 타격에도 재능이 있었나요? 하하하, 타석에 서는 걸 볼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제대로 보여 주네요. 그것도 월드시리즈에서요.]

투수에게 안타를 맞는 건 정말 기분이 더럽게 나쁘니까 말이다.

지혁은 비슷한 코스로 들어온 2구째 패스트볼을 잔뜩 기다렸다가 휘둘렀다.

솔직히 말하면 지혁에게 있어서 타격은 철저하게 운에 가까웠다. 한가운데의 패스트볼 하나만 노리고 있다가 미리 맞춰 놓은 타이밍에 힘껏 휘둘렀을 뿐이다. 공을 보고 치지도 못했는데 공이 방망이에 와서 맞은 수준이랄까.

그라운드 안에서의 선수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방금의 타격이 절대적으로 요행이었다는 걸.

한복판에 밋밋한 패스트볼이 왔는데도 배트가 밀렸고, 코스가 좋아서 안타가 되었을 뿐이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외야수로부터 공을 이어받은 류희주의 표정은 평소보다 조금 더 뚱해 보였다.

기분이 나쁠 것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투수들은 아주 미세한 차이를 느끼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 미세한 차이에 상당히 많은 것이 좌우되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오늘처럼 특수한 환경, 특수한 무대, 그리고 특수한 매치 업, 특수한 맞대결. 류희주는 절대로 지혁에게 안타를 맞지 않았어야 했다. 지금처럼 관중석에서 난리가 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마운드에 류희주가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혁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곳은 다저 스타디움인데도.

다저스 팬들의 긴 야유가 울리면서 지혁의 이름을 덮어 버리려고 했지만, 양쪽 더그아웃 위쪽을 점령하다시피 한 한국 팬들은 아랑곳 않고 지혁의 이름을 외쳤다.

‘이건 아주 기분 나쁜 상황이지. 더럽지, 더러워. 나 같으면 절대로 견디지 못해.’

지혁은 마치 류희주의 입장이 된 것처럼 생각해 보려다가 고개를 털어 버렸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우니까 말이다. 우리의 홈구장에서, 모국어로 된 응원을, 상대 팀 선수가 받고 있다? 그것도 빗맞은 안타를 때려 낸 상대 투수가?

흥분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표정은 아무렇지 않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절대로 그렇지 못한다. 이 정도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투수라면 당장 전쟁이 난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지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초구에 약간의 리드폭 을 더 가져갔다. 그리고 린도어가 배트를 휘둘러 주기만을 바랐다. 초구를 노려야 했다. 투수가 가장 흥분했을 때를.

[류희주, 1루에 문지혁을 두고 초구. 어- 잘 맞은 타구입니다. 센터 쪽, 좌중간으로! 린도어의 타구가…… 이 타구가 좌중간을 가릅니다. 중견수와 좌익수 사이에 떨어집니다. 1루 주자 문지혁이 2루 돌아 3루로.]

[오! 계속 뛰어요? 계속 뛰어요?]

[3루 돕니다! 3루 돌아 홈으로! 공 백 홈! 백 홈! 슬라이딩으로 들어갑니다!]

무리한 슬라이딩으로 거대한 포수와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것만큼은 사양이다. 다음 회에도 던져야 하고, 다음 경기에도 던져야 하는데 부상이라도 당했다간 진짜 큰일이니까.

지혁은 그랜달의 옆으로 돌아가며 손으로 플레이트를 쓸었다. 그랜달의 미트가 지혁의 어깻죽지를 강하게 태그했지만, 그 순간 지혁은 이미 플레이트를 쓸고 지나간 뒤였다.

“세잎! 세잎!”

심판의 역동적인 제스처가 세이프를 알린다.

“예쓰!”

지혁은 일부러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오버 액션을 했다. 그 모습을 본 한국의 팬들이 또다시 엄청난 환호를 내지르며 지혁의 이름을 연호했다.

오늘 관중석을 찾은 한국인 팬들은 호강을 하는 날이다. 문지혁과 류희주의 맞대결도 보고. 지혁이 안타를 치는 것도 보고, 심지어는 멋진 슬라이딩으로 점수까지 내는 걸 봤으니까 말이다. 평소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것들을 한 경기에 몰아서 시청하는 셈이다.

그러니 환호성 소리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만큼.

류희주의 기분은 더 나쁠 수밖에 없다.

1차전의 흐름은 이미 절반 정도는 클리블랜드 쪽으로 넘어온 것이다. 흥분한 류희주를 공략하는 게 나머지 절반을 채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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