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몫
프로 선수라면 누구나 경기장에 나가길 원한다.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싶어 하는 선수는 단언컨대 아무도 없다.
만약 그 무대가 월드시리즈라면? 나가서 처참하게 깨지고 박살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무대의 한복판에 서기를 원한다.
하지만 모두가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출전할 수 있는 선수의 숫자는 정해져 있다. 게다가 조금 더 잔인한 상황이 만들어지곤 한다. 시즌 내내 팀에 상당한 기여를 해 왔던 선수조차도 베스트 컨디션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팀의 에이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지금의 대니 살라자르가 그랬다.
“4차전 선발투수는 문으로 가기로 했네.”
“…….”
“……대니.”
프로 6년 차를 맞이한 대니 살라자르는 팀의 네 번째 선발투수다. 클리블랜드가 워낙 투수진이 튼튼한 팀이니, 투수진이 허약한 팀으로 간다면 아마 두 번째 투수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을 때부터 그의 앞에는 큰 산이 산재해 있었다. 코리 클루버가 대표적이다. 또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활약하기 시작한 카를로스 카라스코 역시 살라자르의 상위 호환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살라자르가 능력이 모자라다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살라자르와 카라스코는 항상 엎치락뒤치락 하는 선수였으니까.
“실망이 크다는 건 알고 있네.”
“위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프랑코나는 이럴 때 감독의 어려움을 가장 크게 실감하곤 했다. 시즌 내내 팀에 헌신하고 기여해 온 선수를 중요한 순간에 제외해야 할 때,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선수의 표정을 보면서도 냉정한 통보를 해야만 할 때, 자네는 나갈 수 없어. 하고 말해야 할 때 말이다.
“실망하지 않았다는 건 솔직히 거짓말이지만 말이죠. 후우-.”
살라자르는 냉정한 현실을 곱씹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해야죠. 이해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깊은 대화를 나누는 감독실에 지혁이 문을 열고 들어간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살라자르가 깊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 내리고 있던 때 말이다.
“들어오게.”
“예.”
머뭇거리는 지혁을 프랑코나가 안으로 불러들였다.
“자네가 4차전 선발로 나갈 걸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예.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만…….”
월드시리즈 같은 단기전에서 사흘 휴식 후 등판을 하는 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1차전에 등판했던 지혁도 몸은 끌어올려 놨다. 물론, 정상적인 로테이션을 돌 때만큼 완벽한 상태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지혁이 의아했던 건 왜 굳이 프랑코나가 살라자르를 만나게 했냐는 것이었다.
3차전 경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바로 30분 전에 3차전을 패배하며 시리즈가 뒤집힌 상태의 사람들은 정말 예민하기 그지없다. 그야말로 툭 건드리면 펑 폭발하고 마는 그런 심리 상태이다. 그건 지혁도 마찬가지고.
그런데도 프랑코나는 살라자르와 따로, 지혁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두 사람을 함께 불렀다. 한 자리로 정해져 있는 마운드를 포기해야 하는 자와, 그 자리를 빼앗아 올라가야 하는 자를.
“4차전은 반드시 잡아야만 해. 그리고 난 문, 자네를 올리기로 했어. 대니도 이해했지.”
프랑코나는 위로의 마음을 담아 살라자르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대니가 자네에게 마운드를 넘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어 보게.”
“예?”
“대니?”
“……이건 잔인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프랑코나는 마치 살라자르가 어떤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예스, 감독님. 당신이 맞아요.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저주가 뭔지 체감했으니까. 기자들이 그냥 떠드는 말이 아니고 진짜로 뭔가가 일어나니까. 이걸 넘어서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녀석은 이놈이 유일하니까. 그러니까 납득하는 겁니다.”
“좋아, 그 정도면 됐네. 문, 내일의 등판은 대니의 몫까지 던져야 하네. 자네라면 충분히 그렇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결국 저한테 부담감을 얹으려고 부르셨군요.”
“대니뿐 아니지. 모든 선수들이 월드시리즈 마운드를 꿈꾸며 이곳까지 왔으니까. 불펜에 있는 선수들, 선발 로테이션에서 떨어져 나간 조쉬나 마이크의 몫까지 모두 포함이네. 부담을 가져야 해. 그리고 책임감도 갖길 바라네. 평소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더더욱. 물론 모든 녀석들이 자네를 응원할 거야.”
“후우.”
“자네에게 자리를 빼앗겼다는 알량한 생각을 하는 놈은 우리 팀에 없네. 왜냐면 작년과 재작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지. 누가 마운드에 올라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중요한 건 이기는 거야. 난 믿고 있네.”
프랑코나, 이 독한 영감. 항상 이런 식이다. 너무 당연한 일을 하면서도 꼭 필수적인 심리적인 요소를 능구렁이처럼 추가시킨다. 지혁의 어깨에는 자신의 투구 기회까지 미루면서 클리블랜드에 이어져 온 70년 저주를 깨고야 말겠다는 선수들의 의지가 실릴 수밖에 없었다.
***
[ 웰컴 투 프로그레시브 필드. 2018년 월드시리즈 4차전이 열리는 이곳 클리블랜드는 굉장히 뜨겁습니다. 날씨는 매우 춥지만, 선수들과 관중들의 열기가 찬바람을 전부 몰아내고 있습니다! ]
[ 정말 꽉 찼네요. 이런 게 필요하죠. ]
[ 그렇습니다. 털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한 사람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관중석을 꽉 메웠습니다. 이런 응원을 받아야 해요. 클리블랜드는 정말 위기에 몰렸죠. 1승을 먼저 따낸 건 좋았지만 연속으로 2패를 당하며 시리즈가 뒤집어졌습니다. ]
[ 커쇼와 다르빗슈의 원투 펀치를 넘어서지 못했죠. 특히 2차전 커쇼에게 완봉을 당한 게 컸습니다. 타격의 사이클이 확 꺼져 버린 느낌이 들었거든요. ]
[ 클루버가 좋은 피칭을 했는데도 진 게 투수진에도 타격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더군요. 클리블랜드가 자랑하는 불펜도……. ]
[ 글쎄요, 조금 애매했죠. 실점은 없었지만 밀러는 불안했고, 앨런은 1실점을 했죠. 아무래도 코디 앨런은 부상의 여파가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구속이 덜 올라왔어요. ]
“음, 구속이 조금 덜 나오는군.”
“어깨가 아직 덜 풀렸어요.”
“평소만큼 던졌는데?”
“날이 추워서 그런가…….”
불펜에서 연습 투구를 던져 보던 지혁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캘러웨이는 투구를 마친 지혁에게 핫팩을 건넸다.
오늘의 클리블랜드는 정말 추웠다. 야구를 하기에는 힘들 정도였다. 체감 온도가 영하로 내려갔다는 뉴스도 봤다. 시니에가 특별히 2시간 동안이나 전신 마사지를 해 줬고 잠도 충분히 잤는데.
“아직 피로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을 거야. 절대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던지다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게 느껴지면 벤치에 사인을 보내.”
“옙. 당연하죠.”
사흘 휴식 후 등판. 게다가 영하의 날씨. 모든 상황들이 지혁에게는 좋지 않게 돌아간다. 반면 오늘 다저스의 선발인 알렉스 우드는 일주일 넘게 휴식을 취했다.
다저스의 선발 로테이션은 아주 두껍고 독특해서, 커쇼와 다르빗슈, 류희주를 제외한 나머지 자리에 알렉스 우드, 마에다 켄타, 브랜든 맥카시가 돌아가며 등판하곤 했다.
게다가 훌리오 유리아스와 토니 싱그라니도 필요할 때 선발로 등판할 수 있으니, 다저스의 로테이션은 그야말로 단기전에 최적화된 것이었다.
[ 오늘 클리블랜드는 연패를 끊고 시리즈를 동률로 맞추기 위해 1차전 선발이었던 문을 올렸습니다. ]
[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클리블랜드 입장에서는 말이죠. ]
[ 그럴까요? 문이 너무 무리하고 있다는 의견도 없지는 않습니다. 시즌 중에 부상을 당했다 복귀하지 않았냐는 말인데요. ]
[ 예스, 저도 그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단기전, 그것도 70년의 숙원이 걸린 단기전에서 문을 쓰지 않는 것도 이상하죠. 충분히 올라올 수 있는 몸 상태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게 좋겠죠. 그러길 바라야겠고요. ]
[ 다저스의 로버츠 감독은 문을 상대하는 라인업을 조금 바꿨습니다. 1차전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바뀌었네요. 보시죠. ]
2018 월드시리즈 4차전, LA 다저스 선발 라인업.
1. 저스틴 터너 3B
2. 야스마니 그랜달 C
3. 코리 시거 SS
4. 코디 벨린저 DH
5. 아드리안 곤잘레스 1B
6. 알렉스 버듀고 RF
7. 닐 워커 2B
8. 키케 에르난데스 CF
9. 크리스 테일러 LF
[ 예. 모든 게 바뀌었습니다. 1차전과 비교해서 같은 타순에 들어선 선수는 벨린저밖에 없어요. 로버츠 감독은 다양한 시도를 자주 하는 감독답게, 월드시리즈 라인업에서도 자신의 성향을 드러냈습니다. ]
[ 터너-그랜달, 두 우타자를 테이블세터로 끌어 올린 게 독특하죠. 워낙에 좌타자가 많은 팀이다 보니 좌완 투수에게는 꽤 약한 편인 다저스인데요. 오늘 문을 상대하기 위한 라인업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
[ 아드리안 곤잘레스가 들어온 것도 특이하죠? ]
[ 지난 경기에서 베테랑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스스로 증명했으니까요. 곤잘레스가 중심을 잡아 준다면 어린 선수들에게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
[ 과연 문이 다저스를 상대로 또다시 좋은 피칭을 보일 수 있을지! 경기 시작됩니다. ]
***
이제는 클리블랜드 팬들의 응원이 익숙하다. ‘FUCK the curse!’라고 쓰인 플랜 카드, 로고인 와후 추장의 얼굴에 붉은색 크레파스를 잔뜩 덧칠해 버린 괴기한 깃발이 휘날린다. 저들은 모두 분노했고, 또 우려하고 있다.
1승 뒤 2연패. 클리블랜드의 입장에서 3패를 먼저 당하는 건 회복 불가능한 최악의 결과가 될 수 있다. 아직 커쇼가 한 번 더 출장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프랑코나가 지혁을 무리해서 출장시킨 것도 그 때문이다.
다저스는 커쇼가 한 번 더 등판할 수 있는 기회를 남겨 놓은 상태에서 3승을 거두기를 바라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진짜로 저주가 클리블랜드의 눈앞에 드러나는 것이다. 작년에 이어, 또다시 마지막 일격을 커쇼에게 맞는 꼴이 될 테니 말이다. 중요한 건 다저스에게 3승을 주지 않는 것이다. 커쇼가 등판할 때까지. 그러니 앞으로 치러질 모든 경기가 클리블랜드에게는 벼랑 끝 일전이다.
관중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3년 연속으로 월드시리즈 무대에서 좌절하는 팀을 보고 싶지 않기에, 입김을 내뿜고 피부가 빨갛게 얼어붙는데도 이곳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 그거야, 클리블랜드.”
지혁은 로진을 듬뿍 바르며 환호를 내뿜는 관중들을 향해 중얼거렸다.
“집중해서 가자! 집중해서!”
그리고 더그아웃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대니 살라자르는 지금 지혁이 있는 이 자리에 있었어야 할 선수지만, 지금 그 누구보다 목소리를 크게 내며 선수들을 독려하는 중이었다.
[ 오늘 경기에서 지면 클리블랜드는 상당히 불리해집니다. 이 모든 부담을 안고 나흘 만에 다시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문, 초구를 던집니다. ]
“스트-라이크!”
싱커가 날카롭게 꺾이며 저스틴 터너의 무릎 앞을 파고든다.
저주를 깨는 것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 저주를 깨기 위해 자신의 등판을 양보한 사나이, 모든 이들의 공통된 숙원을 안고 던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지혁을 감싸 쥐었으니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최고의 공을 던지는 것. 최고의 경기를 치르는 것.
“그뿐이야.”
얼어붙은 코끝을 훔쳐 내며, 지혁은 마운드 위에서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