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99화 (200/204)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네

[다저스가 대타 어틀리를 내세웁니다. 로버츠 감독은 이미 좌완 투수인 문을 상대로 좌타자인 어틀리를 대타로 낸 전력이 있습니다. 같은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우타자인 로건 포사이드를 벤치에 놓고도 말이죠.]

[포사이드의 컨디션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죠. 그는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군요. 어쨌든, 어틀리가 들어섭니다. 넉 점의 리드를 허용하고 있는 다저스. 추격하기 위해선 선두 타자의 출루가 필수적입니다.]

포사이드였다면 조금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지혁과 포사이드는 탬파베이 시절 한솥밥을 먹었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이다.

이건 비밀이지만, 탬파베이에서 치렀던 무수한 청백전 중 지혁의 공을 가장 잘 친 녀석 중 하나가 포사이드였다. 다저스가 그걸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무시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포사이드가 아니라 어틀리가 나온 건 지혁에게는 기분 좋은 일이다.

지혁은 왼쪽 타석에 선 어틀리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멘데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신중하게 사인을 고를 생각이었다. 올해로 서른아홉의 베테랑이다. 한국 나이로 치면 마흔을 넘긴 선수다. 포사이드가 아니라 어틀리가 나왔다고 해서 쉽게 풀어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패스트볼.’

멘데스의 첫 선택은 패스트볼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혁의 몸이 격렬한 거부 신호를 보냈다. 솜털 끝이 찌릿찌릿한 느낌이라고 할까.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오, 이봐요, 짐. 문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예? 무슨 말씀이시죠?]

[3회에 점수를 크게 주고 난 이후부터는 말이죠. 문은 멘데스의 사인을 거절하지 않았어요. 한 번도 말이죠, 단 한 번도! 철저하게 포수의 리드에 맞춰 가던 게 문이었거든요. 이건 방송에서 언급하기엔 너무 긴 얘기가 될 것 같아서 따로 칼럼을 쓰려고 했는데…….]

[말씀하시는 순간 초구. 볼입니다. 너클 포크가 들어갔군요.]

[하던 말을 계속하죠. 문은 멘데스를 완전하게 신뢰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신경 쓰고 보지 않는다면 알아챌 수 없었겠지만,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1이닝에 열다섯 개 내외의 공을 던지는 투수가, 무려 3이닝 동안 사인을 거절한 적이 없다? 이건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일지도 모르는 일이라구요.]

[아하, 인터벌이 길어집니다. 어틀리가 타임을 요청하고 발을 뺍니다.]

이 위험 신호는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걸까? 지혁은 의문에 빠졌다.

분명히 몸이 찌릿거린다. 투구에 집중하고, 몇 초 뒤의 궤적을 머릿속에 그리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몸이 거부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전생에도 이런 경험이 몇 번 있었다. 이런 신호가 오는 걸 무시하고 던졌다가는, 어김없이 결정적인 적시타를 맞곤 했다.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는 끝내기 홈런의 기억이 순간적인 이미지가 되어 떠올랐다.

‘패스트볼 승부는 안 돼. 이건 확실해.’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어틀리라는 베테랑의 노림수 한 방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강한 신호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패스트볼 하나를 노리고 들어올 확률이 크다. 게다가 어틀리 정도 되는 경력이면 패스트볼 타이밍을 잡았다가 싱커를 따라갈 수 있는 배트 컨트롤도 있다.

지혁은 멘데스의 싱커 사인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부러 존보다 훨씬 낮은 곳으로 던졌다. 의도적으로 던진 빠지는 볼이다.

[스윙! 어틀리가 낮은 공에 헛치고 맙니다. 무릎이 무너지는 스윙이네요.]

[노리고 있었던 스윙이죠. 낮았기 때문에 멈추는 게 좋았겠지만요.]

[음, 타임이네요. 멘데스가 잠시 마운드로 향합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문이 고개를 저었다구요. 단순히 커뮤니케이션의 미스일까요? 흥미롭네요.]

지혁은 멘데스가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뒤를 돌아 외야 쪽으로 몇 걸음 내디뎠다. 마운드 위에서 완전히 내려올 때까지.

“헤이, 아미고. 무슨 일이야?”

멘데스의 목소리에는 손톱만큼의 불만도 없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은 세계 최고의 포수다.

“느낌이 안 좋아. 패스트볼은 안 될 것 같아.”

여러 가지를 전부 얘기할 수는 없었다. 지금 지혁이 멘데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건 말로 표현이 되는 감정이 아니니까. 그냥 투수의 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 그러면 싱커는?”

“어틀리 정도 되면 따라가서 맞힐 수 있어.”

“그래, 그래서 볼로 던졌구만.”

“응, 방금도 봐. 볼인 게 명백했는데도 스윙이 나오잖아.”

“흐음.”

멘데스는 잠깐 하늘을 보고 침묵하더니, 솥뚜껑 같은 손으로 지혁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알았어. 플랜 B로 갈 거야. 너클 포크 위주로 가자. 주자도 없으니까. 악력은 살아 있지?”

“물론이야. 바라던 바야.”

“적극적으로 던져. 절대로 뒤로 안 빠지니까.”

멘데스는 짧은 미팅을 마치고 다시 내려갔다. 그리고 난 뒤의 첫 번째 사인은 예정대로 너클 포크였다. 지혁은 한 시즌 내내 무수히 던져 온 감각을 믿고 자신 있게 뿌렸다. 누구의 공도 아닌 오롯이 지혁의 능력만으로 던지는 공인 너클 포크가 아름답게 춤을 춘다.

어틀리의 스윙이 무너졌다. 빠른 공을 노리다가 너클 포크가 들어오면 어쩔 수 없다. 그는 아주 힘든 상황에서도 방망이 끝에 공을 맞추는 데 성공했고, 공이 지혁 쪽으로 돌아왔다. 살짝 역방향이어서 몸에 무리가 가기는 했지만 어려운 공은 아니었다. 그런데.

[자세가 무너지면서 툭 건드립니다. 투수에게 돌아옵니다. 투수 앞 땅볼. 이런, 문이 한 번 더듬습니다! 다시 잡아서 1루로! 아슬아슬합니다, 결과- 아웃! 아웃입니다. 다저스 벤치가 곧장 챌린지 신청을 합니다.]

[천하의 문도 긴장을 했나요? 지금의 수비는 평소의 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것이네요. 마음이 급했나 봅니다. 공을 완전히 잡기 전에 글러브를 닫아 버렸군요.]

****

‘실수처럼 보였겠지? 그냥 실수 때문에 주저앉은 것처럼, 그렇게 보였겠지?’

지혁은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이내 곧 일어났다. 1루 베이스 위에서 공을 가지고 있던 산타나가 아쉬운 실수였다는 듯이 얼굴을 잔뜩 찡그러트렸다가 활짝 웃어 보인다. 그건 지혁에게는 아주 고마운 표정이었다. 지혁도 있는 힘껏 얼굴을 일그러트렸다가 다시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표정을 펼 수 없었다.

‘왜 하필 지금이야. 왜 하필!’

허리. 정확한 곳을 찾자면, 왼쪽 허리와 옆구리 사이라고 해야 할 어딘가. 여기에 통증이 있다. 공을 잡으려고 몸을 틀었을 때 주삿바늘 수백 개가 동시에 찌르는 듯한 따가운 통증이 왔다. 글러브를 일찍 닫아 버린 건 너무 놀라서였다.

‘왜 몰랐지?’

완벽한 집중, 시끄러운 함성, 과중한 부담. 이런 것들이 지혁의 통각을 잠시 마비하고 있었을까? 도대체 왜, 도대체 어떻게. 허리에서 느껴지는 찌릿거리는 느낌을 어틀리의 노림수라고 착각하고 있었을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너무 짧은 순간에 지나치게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멍해졌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동료 야수들이 지혁에게 실책에는 개의치 말라고 뭐라고 하고 있었는데, 귀에는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침착하게 행동하자. 일단 숨기는 거야. 일단 숨길 수 있어. 일단은. 그래, 일단은. 일단은.’

지혁은 의미 없이 ‘일단은’이라는 말만 반복해서 되뇌었다. 속으로. 당장의 대처법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멍한 상태였다. 너무나 갑자기 찾아온 부상이고, 냉정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다.

그러던 사이, 비디오 챌린지를 마친 주심이 양팔을 옆으로 벌려 보인다. 세이프. 다저스의 선두 타자가 출루했다는 그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벤치에서 프랑코나 감독이 직접 걸어 나왔다. 그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듯이 구심에게 들러 공을 건네받고 올라왔다.

지혁이 어떤 고집을 부려도 더 마운드에 세워 놓지 않겠다는 뜻이었겠지만. 지금의 지혁에게는 오히려 고마웠다.

“수고했어.”

“……후. 예.”

“우리 불펜은 강하니까 믿고 내려가게.”

프랑코나는 약간 힘을 줘 지혁의 등을 툭 떠밀었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전기가 도는 것 같았지만 지혁은 이를 악물고 내색하지 않았다. 일단은, 내색하지 않아야 한다. 그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투수를 교체합니다. 문이 내려가는군요. 클리블랜드 팬들에게 기립 박수를 받습니다. 이 선수의 등판에서 기립 박수가 없었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요.]

‘미안. 지금은 모자를 벗어 응답해 줄 수 있는 정신이 없어.’

지혁은 굳은 표정으로 곧장 더그아웃을 거쳐 라커 룸으로 향했다. 깊숙이,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곳까지.

***

- 3루수 앞 정면! 호세 라미레즈! 제이슨 킵니스! AND- 카를로스 산타나! YES! 5-4-3으로 이어지는 더블플레이! 다저스가 주자 두 명을 채워 놓고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스코어는 여전히 8 대 4! YES!

고요한 라커 룸 앞에 TV 소리만 울린다. 클리블랜드 지역 방송의 캐스터는 특유의 까끌까끌한 톤으로 자신의 기쁨을 온 클리블랜드에 송출했다. 그의 기쁨이 곧 팬들의 기쁨이고, 그의 환호가 곧 팬들의 환호다.

하지만 지금 지혁은 캐스터의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

허리에서 느껴지기 시작한 통증은 이제 주기적인 따끔거림이 되어 있었다. 지금처럼 가만히 있을 때에는 그렇다. 슬슬 걸어 다닐 때에는 항상 거슬리는 느낌이지만, 참을 만한 정도. 뛰거나 허리를 돌리는 동작은 취해 보지 못했다. 혹시라도 더 상할지 모르니까. 아마 이대로라면 투구라는, 허리를 뒤틀어 힘을 쥐어짜야 하는 동작은 취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지혁은 몇 번이나 거듭 확인했다. 지금 라커 룸엔 아무도 없다. 경기가 진행 중인 지금 누구도 이곳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지혁은 선뜻 신을 불러내지 못했다. 신도 그런 지혁의 마음을 아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어디선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게 분명하면서.

7회 초, 7회 말, 8회 초, 8회 말. 네 번의 공수 교대가 끝나는 동안 지혁은 고민과 고뇌를 거듭했다. 그리고 최소한 집에 도착할 때까지 만큼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여기서 그만둬야만 했겠죠. 어쨌든 당신이 있으니까 선택지라도 생긴 셈이네요.”

입안에서 웅얼거리는 읊조림이었지만, 신은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지혁은 다시 몸을 일으켜 여전히 따끔거리는 왼쪽 옆구리를 느끼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

- 승부가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월드시리즈답습니다. 이게 월드시리즈죠. 양 팀이 모두 두 번씩 승리하면서, 이제 원점인 상황에서 세 경기를 남겨놓게 되었습니다.

- 내일 열리는 5차전, 프랑코나 감독은 대니 살라자르를 선발투수로 예고했습니다. 사흘 휴식 이후 등판이 예측되었던 코리 클루버를 한 경기 미뤘습니다. 다저스의 로버츠 감독은 1차전 선발투수였던 류희주를 예고했습니다. 5차전은 내일 같은 시간 클리블랜드의 프로그레시브 필드에서…….

“문.”

패트릭이 TV를 껐다. TV까지 꺼지니 테라스 쪽에 살짝 켜 놓은 주황색 스탠드만이 은은하게 빛날 뿐, 온 거실이 어두컴컴하다.

패트릭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패트릭도 지혁의 얼굴이나 표정을 못 보고 있을 것이다.

“부릅시다.”

지혁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의 시간이 왔군.”

신이 특유의 클클거리는 웃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지혁과 패트릭이 나란히 긴 한숨을 쉬었다. 후지의 일 이후로 느끼는 거지만, 신은 안 보면 안 볼수록 좋다. 신이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뭔가 일이 터졌을 때뿐이니까.

“허리…… 옆구리? 어쨌든, 지금 문이 통증을 느끼고 있다는 저 부상…….”

“근육이 찢어졌네.”

“Shit.”

신은 단호하게 패트릭의 말을 잘라 버렸다. 패트릭은 곧장 욕설을 내뱉었다.

“원인이 뭐죠?”

“……뭐라고? 흐허허,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부상에 원인이 어디 있는가? 그건 운명인 것을.”

“거참 좆 같은 운명이네.”

지혁의 낮은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집 안에서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흐흐, 뭐, 사람들이 말하는 과학과 의학에 기대서 원인을 찾아보자면. 자넨 너무 많이 던졌어. 5월에 한 달 쉬지 않았으면 어깨와 팔꿈치에도 탈이 났을지도 모르지. 자네는 엄청나게 했잖나. 처음에는 싱커. 그 뒤에는 커브. 그리고 패스트볼도 그랬고. 올해는 너클 포크까지. 자네가 던진 이닝을 좀 보라고. 어디가 탈이 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네.”

지혁도 패트릭도 대답하지 않았다. 신도 대답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관리를 잘한다고 해서 몸이 닳지 않는 건 아니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숙명이지.”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거나 물어볼게요. 얼마나 걸립니까? 치료하는 데.”

“1년은 족히 쉬어야지, 자네의 회복력으로는. 자넨 괴물이 아니니까.”

1년. 1년이라. 세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허리를 치료할 수 있다. 지혁의 선수 생명 2년을 소비하면.

“몇 시즌 남았다고 했죠?”

“이번 시즌 빼고 여섯 시즌. 지금부터 풀타임으로 치른다고 하면 2024년 시즌까지 끝나고 마무리.”

패트릭이 물었고, 지혁이 답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선수 생활의 끝을 정해 놓고 미래를 계획하는 일 말이다.

“지금 당장 허리를 치료하게 되면…… 2022년. 앞으로 네 시즌. 하, 참. 씨발.”

지혁은 소파에 눕다시피 기대 앉아 허탈하게 천장을 바라봤다. 컴컴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게, 미련하지만 지혁의 미래 같다는 생각도 했다. 어쩌다 이런 운명이 그를 찾아온 걸까? 이런 물음은 아무 의미도 없지만 말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신이 물었다. 이제야 후지의 마음을 알겠다. 신이 아니라 악마 같은 미소였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네, 친구들. 선택을 할 수 있는 것 자체로도 축복이고 말일세.”

“독촉하지 좀 마세요. 짜증 나니까.”

“흐흐, 좋아. 밤은 기니까.”

신이 어느새 손에 쥐고 있던 맥주 캔을 땄다. 더럽게 술 땡기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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