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훈
시끄러운 휴대폰의 알람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울려 퍼진다. 지혁은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소리가 울리는 곳을 찾아 머리맡을 뒤적거렸다. 커튼 틈 사이로 쨍쨍한 햇빛이 내리쬔다.
“으으으…… 끄아아. 벌써 12시네.”
동이 트고 난 뒤에야 잠이 들었던가?
고민은 길고 길었다. 회귀한 이후 처음으로 선수 생명을 걸고 딜을 해야 했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가 가장 깊은 고민을 했던 때였다. 돌이켜 보면 그때는 선수 생명이 15년이나 남았었는데, 3년 이상을 단번에 소비하기가 겁이 났었던 것 같다. 신을 붙잡고 밤새도록 이 선수의 이 공은 어때요? 라고 일일이 물어봤었으니까.
지혁은 기어이 브랜든 웹의 싱커를 찾아냈다. 조금 괜찮은 공을 던진다 싶은 녀석들은 지혁과 비교했을 때 죄다 재능 덩어리였다. 재능만으로 이렇게 저렇게 툭툭 던지는 공은 아니었겠지만, 지혁과는 타고난 게 다른 녀석들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웹만큼은 싱커에 대한 타고난 재능보다는 노련한 코칭과 웹의 피나는 노력이 더 압도적이었다.
“그렇게 던져 댔으니까…… 일찌감치 팔이 아작이 나고, 은퇴도 일찍 했겠지.”
문득 웹의 운명이 지혁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궤는 조금 다르고 은퇴의 메커니즘은 완벽하게 다르겠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짧은 임팩트로 메이저리그를 평정하다가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일찌감치 은퇴하는 선수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아오, 씨바.”
부상으로 은퇴한 웹의 생각을 잠깐 했던 탓일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왼쪽 옆구리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 왔다. 본능적으로 욕을 내뱉는데 기가 막힌 타이밍에 방문이 덜컥 열렸다.
“왜요, 많이 아픕니까?”
“끙…….”
패트릭은 얼른 나가서 진통제 몇 알을 들고 와 지혁에게 건네주었다.
“참을 수 있겠어요?”
“참아야지. 어쩌겠어요.”
“들키지 않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어때요.”
“패트릭 당신이 밤새도록 찾아내지 못했는데, 아직도 방법이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두 사람은 일단 선택을 보류하기로 했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이성적인 선택은 그것이다. 최대한 상황을 보고 결정하는 것.
지혁이 한 경기를 더 등판하게 된다면 그건 7차전이다. 만약 무턱대고 선수 생명을 소비하고 부상을 치료했다가 지혁이 등판 기회를 잡지 못하면, 그건 그냥 허공에다가 2년을 날려 버리는 최악의 선택이 된다.
지혁과 패트릭은 이번 시리즈에 더 이상 등판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1년 동안 얌전히 치료와 재활에만 매달리기로 합의를 봤다. 신은 단순히 옆구리 쪽의 근육 파열만 지적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어깨와 팔에도 휴식을 줄 필요성이 분명히 있다. 이왕 다친 김에 1년 정도 쉬는 게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인 셈이다.
하지만 경기를 나서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때는…… 아직 100% 결정한 건 아니지만, 지혁과 패트릭 모두 얼추 의견을 모았다. 지혁이 선택을 내려야만 할 상황까지 오지 않고 남은 두 경기를 내리 이겼으면 좋겠지만. 지혁은 지끈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수를 하러 들어갔다. 어젯밤의 대화가 계속 떠올랐다.
“월드시리즈 우승입니다.”
“월드시리즈 우승이죠.”
“당신이라면 어땠을 것 같아요?”
“나한텐 신이 필요 없습니다만.”
“진짜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렇게 정 떨어지는 소리 할래요?”
“하, 어쩌다 이런 사람을 고객으로 받아 가지고.”
새벽에 패트릭은 맥주를 무려 일곱 캔이나 마셨다. 언제나 최고의 결정을 내리는 패트릭에게 닥친 인생 최대의 난제인 것처럼 보였다.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항상 같은 상태를 유지하던 패트릭의 얼굴에도 약간의 취기가 올라온 것을 느낄 수 있었을 때.
“난 합니다. 남아 있는 시즌 여섯 개, 그중에서 33%를 소비해서 해야 되는 도박. 근데 그 도박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내 꿈이야. 꿈. 그럼 난 합니다.”
살짝 알딸딸해 보이는 패트릭은 마침내 마음을 결정한 듯했다. 월드시리즈 타이틀이다. 결코 아무나 쥘 수 없는 타이틀. 모든 야구 선수들 중 99%는 평생에 걸쳐도 얻어 낼 수 없는 타이틀. 이 세상에서 야구를 하고 있는 모든 선수들의 꿈이자 목표. 그러니까, 야구 선수로서 도전할 수 있는 궁극의 목표. 그게 바로 월드시리즈 우승이다.
그 꿈을 위해서 남은 시즌들 중 두 시즌 정도를 희생하는 건 제법 타당한 선택이 될 것이다.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도 지혁조차 취한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
지혁은 갓 회귀해서 얼떨떨한 상태였던 때를 떠올렸다. 티미의 가게 화장실이었지.
그때. 이제 막 패전처리로 은퇴하고 돌아왔던 때.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혁은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이뤄 내고 말겠다고 다짐했던 걸 떠올렸다. 싱커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못 던지던 때였는데 뭐가 그리 패기만만했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어쨌든 여기까지 왔다. 마이너리그를 차례차례 거쳐서, 탬파베이의 기대 받는 신인 시절을 거쳐서, 탬파베이의 어린 선수들을 이끌어 주는 멘토의 역할을 하다가, 월드시리즈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클리블랜드로 넘어왔다. 그리고 마지막 고비까지 왔다.
“여기서 물러나면 좀 아깝긴 하죠?”
“당연하지.”
“내 평생에 걸쳐서, 다시 월드시리즈 무대에 못 오를 수도 있겠죠?”
“그것도 아주 당연하지.”
신은 사실만 말하곤 했다. 그리고 자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막말을 하기도 했다.
“흐흐, 내기라도 할 텐가? 후지의 커브를 얻을 때처럼?”
“7차전에서요? 이봐요, 할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설령 내가 등판한다고 하더라도 못 이길 수도 있는 건데, 한 경기 졌다고 남은 시즌 중에 네 시즌이나 걸어야 된다구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긴. 그건 좀 심하군. 흐하하하. 아무리 내가 도박 중독이라도 말이지. 미안하네.”
“후…… 도움 안 되는 신이야, 진짜로.”
지혁은 소파에 어기적거리며 몸을 뉘였다. 패트릭의 말도, 신의 말도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평생의 꿈. 다시는 못 오를 수도 있는 무대.
월드시리즈.
여기까지 올라와서 마지막 남은 것까지 다 끌어모아 승부를 걸지 않는 건, 그래. 그건 너무 미련한 짓이다.
*
“문! 뭐 하느라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패트릭이 화장실 문을 쾅쾅 두드렸다. 지혁은 찬물에 담그고 있던 얼굴을 빼내어 수건으로 닦아 냈다. 5차전을 지켜보러 갈 시간이었다.
***
“NO! 막아! 막아!”
벤치 선수들의 애타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벨린저가 때린 총알 같은 타구가 중견수 짐머와 좌익수 브랜틀리 사이를 꿰뚫었다.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다이아몬드로 된 베이스를 빙글빙글 돌아간다.
1루 쪽 더그아웃 앞을 스쳐 지나간 코디 벨린저가 2루 베이스 위에서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2루에서부터 뛰기 시작해 전력 질주하던 주자가 홈에 슬라이딩을 해 들어오며 흙먼지를 일으키는 순간.
숨막히는 정적이 프로그레시브 필드에 감돌았다. 관중석을 꽉 채운 사람들도, 경기 내내 호쾌한 멘트로 관중들을 자극하던 장내 아나운서도, 더그아웃의 코치들과 감독도. 모두 말을 잃었다.
[ 앤드류 밀러를 공략하는 데 성공하는 다저스! 이제 경기를 뒤집습니다! 6 대 5, 역전에 성공하는 다저스! 주인공은 코디 벨린저입니다! ]
“괜찮아. 아직 8회 말이랑 9회 말이 남았어! 다들 정신 차리고 집중해!”
누군가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현실로 이뤄지지 못했다. 다저스의 마무리 젠슨이 등판해 클리블랜드의 공격을 철통같이 막아 낸 것이다.
5차전. 클리블랜드의 홈구장에서 열리는 마지막 경기에서, 다저스가 우위를 잡았다.
***
2018 월드시리즈 5차전 경기 결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2-3) 5 vs 6 LA 다저스(3-2)
***
네 시간 반에 달하는 비행은 고역이었다. 특히 지혁은 더 그랬다. 선수들의 편의를 완벽하게 배려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거라고 여겨지는 전세기를 타고 왔음에도 허리와 옆구리의 고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지혁이 선수 생명을 걸고 도박을 하기 위해 감내해야 할 며칠 동안의 고통이었다.
5차전의 결과를 지켜본 지혁은 이젠 선수 생명을 소비해서 2년을 버리더라도 등판 기회를 잡기를 원하게 되었다. 6차전에서 이대로 패배해 버리면 다시는 이 무대에 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존재했다. 어쨌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6차전 결과에서 지혁의 선택도 결정이 날 것이다.
지혁은 LA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호텔방에 틀어박혔다. 지난 등판 이후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면서 관계자들로부터 도망쳤다. 그나마 다행인 건 누구나 지혁의 피로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꼭 혼자 있게 해 달라고 신신당부한 부탁을 철석같이 지켜 줬다는 것 정도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지혁과 패트릭은 6차전을 앞둔 미디어 데이를 인터넷 생방송으로 지켜봤다. 클리블랜드의 프랑코나 감독은 내일 6차전 선발투수로 코리 클루버를 예고했다. 당연한 선택이었다.
“클루버는 이 와중에도 표정이 변하질 않는군요. 맘에 드네.”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저거 지금 엄청나게 결의를 표현하고 있는 건데.”
“……? 평소랑 완전히 똑같은데요?”
지혁이 클루버는 원래 표정이 없는 녀석이고, 저 정도면 엄청난 표정을 지은 거라고 설명해주려던 찰나, 다저스의 로버츠 감독이 예상외의 선택을 했다.
- 내일 다저스의 선발 투수는…… 훌리오 유리아스입니다.
- What?
마이크를 차고 있지 않은 기자들이 놀라움의 함성을 내지른 게 사운드에 잡힐 정도로. 순식간에 기자회견장이 시장 바닥이 되어 버렸다.
로버츠 감독은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체념하는 표정을 지었고,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어째서 클레이튼 커쇼가 아닌 겁니까? 로테이션상으로 당연히 커쇼의 차례이고, 5일이나 휴식을 했는데요. 부상이라도 있는 겁니까?
로버츠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 2차전에서 커쇼는 130구가 넘는 공을 던졌고, 그 과정에서 허리에 근육통이 왔습니다. 투구 수가 많아서 8회가 끝나고 커쇼를 내리고 싶었지만, 본인의 의지가 강력해서 완봉승을 만들게 두었던 대가네요. 하지만 많은 휴식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7차전까지 가고 만다면, 커쇼가 7차전에 나올 겁니다.
다른 기자가 재빨리 물음을 이었다. 오늘 기자들은 물어볼 게 수천 가지는 되는 모양이었다.
- 3차전 등판 후 사흘을 쉬었지만 다르빗슈도 있습니다.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브랜든 맥카시도 있죠. 선발로 나설 수 있는 투수는 마에다 켄타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경험이 없는 유리아스를 선택하셨습니까?
- Well, 유리아스는 분명히 로테이션에 들 수 있는 선수이고, 이제는 더 이상 검증이 필요한 레벨의 투수가 아닙니다. 오랜 부상에서 돌아왔고, 후반기부터 우리 팀의 마운드에 아주 큰 도움을 줬고, 영향력을 미쳤죠. 그게 설령 월드시리즈 무대라고 해도 다를 건 없습니다. 많은 투수들이 지친 상황에서, 어리고 재능 있는 슈퍼스타를 선택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늘이 클리블랜드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모양이네.”
패트릭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혁은 패트릭의 냉정한 평가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언급한다. 단기전은 감독 싸움이라고. 데이브 로버츠는 젊은 감독이다. 젊은 감독일수록 과감한 선택을 무모하게 도전하는 경향이 있고, 이번 6차전 선발투수를 유리아스로 고른 선택도 그 일환일 것이다.
하지만 과감함의 다른 말은 무모함이다. 이 선택은 매우 무모하다고, 모두가 느꼈다. 로버츠의 이런 무모함 속에는 사흘밖에 휴식을 취하지 못한 다르빗슈를 등판시킬 배짱이 없는 소심함도 녹아 있었고, 커쇼의 몸에 문제가 조금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만 엉성함도 녹아 있었고, 다른 베테랑들 대신 어린 선수를 출격시킨 오판도 녹아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하루 더 지켜보자고요.”
지혁은 찌르르한 왼쪽 옆구리를 가리키며 허공에 대고 말했다. 신이 보고 있을 것이다. 지혁에게는, 클리블랜드에게는. 아직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
[ BAAAAM! 페르난도 멘데스! 맞는 순간 모두가 멈췄습니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상황을 결정짓는 쓰리 런! 잘 버텨 오던 훌리오 유리아스를 기어이 무너뜨립니다! ]
2018 월드시리즈 6차전 경기 결과 LA 다저스(3-3) 1 vs 5 클리블랜드 인디언스(3-3)승리투수 : 코리 클루버(8IP, 11K, 1R, 1HR)패전투수 : 훌리오 유리아스(4.2IP, 2K, 3R, 1HR)
***
결정적인 순간의 선택이 승패를 좌우한다. 지혁이 결정적인 순간을 하기 직전에, 데이브 로버츠 감독이 그걸 몸소 증명해 줬다. 고맙게도 말이다. 6차전 9회 말, 다저스의 공격이 끝나는 순간 지혁은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신을 불러냈다.
“흐흐흐.”
“선택을 할 때는 너무 소심해서도 안 되고, 너무 배짱을 부려서도 안 되고, 너무 무모해서도 안 되고 또 너무 주저해서도 안 된다. 6차전의 교훈이네요.”
“좋은 걸 하나 배웠군 그래.”
지혁은 빙긋 웃었다. 기회가 눈앞에 도래했고, 이걸 놓쳐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게 로버츠 감독이 했던 오판과 비슷한 것은 아닌지, 멘데스의 홈런이 터진 5회 이후 수천 번도 더 고민했고 이제는 과감한 결정을 내릴 때였다.
“고쳐 주세요.”
“2년이네.”
“Deal.”
마법처럼, 허리의 통증이 깔끔하게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