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최후, WS 7차전
“사흘 쉬고 등판, 그리고 또 사흘 쉬고 등판입니다. 1차전과 4차전 모두 투구 수도 100개에 육박했었죠. 컨디션이 어떤지 묻고 싶습니다.”
“음, 좋습니다. 물론 피곤하긴 합니다. 한 시즌 내내 공을 던졌고, 가을 야구에 들어와서도 꽤 많이 던졌죠. 하지만 단기전에서 마운드에 오르는 주기가 짧아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영광이기도 하고요. 컨디션을 떠나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려는 마음뿐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등판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팀의 명운을 건, 70년의 저주를 건 마지막 경기에서 조쉬 톰린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클리블랜드의 입장은 단호했고, 지혁도 등판을 바라 마지않았다.
그만큼 기합도 단단히 들어 있었다. 월드시리즈에 등판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평생의 꿈 중 하나였다. 1차전과 4차전을 거치며 월드시리즈 무대 역시 똑같은 야구를 펼치는 곳이라는 걸 실감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7차전은 느낌이 조금 다르다. 그야말로 최종의 최종, 최후의 최후. 그런 경기니까 말이다.
“다음 질문 하나 더 괜찮을까요?”
“아뇨, 죄송합니다.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조금 집중하고 싶네요.”
“오케이, 행운을 빌어요, 문.”
심지어는 기자들조차도 선수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경기. 지혁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카메라와 마이크들이 우수수 빠져나가는 걸 보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뭐 하고 있어? 너, 설마 졸아?”
잠깐 명상하면서 평정을 좀 찾으려고 했더니 멘데스 녀석이 다가왔다. 아직 땀이 채 식지 않은 걸 보니 지금까지 러닝을 하다 돌아온 게 분명해 보였다.
“뭐 하긴, 명상 중이지.”
“하하, 아미고. 긴장했나 봐?”
“흐읍- 휴. 솔직히, 응. 당연하잖아? 이런 상황에서 긴장하지 않는 놈이 어딨겠어?”
“그건 그렇지. 진짜 마지막 경기니까.”
멘데스도 말은 유쾌하게 했지만 사실 긴장했을 것이다. 확실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고 행동하는 녀석이 다리를 떨긴 왜 떨어?
이건 굳이 멘데스뿐만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언제나처럼 낄낄대는 린도어도 그렇고, 혼자서 조용히 영상을 돌려 보고 있는 브랜틀리도 그렇고, 엔카나시온도, 킵니스도, 라미레즈도. 모두 그렇다.
평소처럼 보이려고 무던히 애쓰고들 있지만, 다들 스스로의 감정을 억제하고 경직된 몸을 컨트롤하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라커룸 안의 분위기가 그렇다.
“좋아! 녀석들 라인업이 나왔다!”
프랑코나 감독이 직접 다저스의 선발 라인업을 가져 와 벽면 한구석에 꽂았다. 오늘 클리블랜드의 라인업과 나란히 붙은 다저스의 라인업 쪽으로 모든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2018 월드시리즈 7차전 LA 다저스 선발 라인업.
1. 저스틴 터너 3B
2. 야스마니 그랜달 C
3. 코리 시거 SS
4. 코디 벨린저 RF
5. 아드리안 곤잘레스 1B
6. 닐 워커 2B
7. 키케 에르난데스 CF
8. 크리스 테일러 LF
9. 클레이튼 커쇼 P
“그대로네, 4차전이랑.”
“응. 버듀고만 빠지고 나머지는 똑같아.”
다저스의 선택은 4차전과 똑같았다. 제법 일리 있는 선택이었다. 이 라인업으로 다저스는 지혁에게서 4득점을 뽑아냈으니 말이다. 물론 지명타자가 없어지고 투수가 타석에 서기는 했지만, 다저스는 이 라인업에서 짜임새를 발견한 게 틀림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짜임새를 발견했다고 믿은 것이겠지만.
“자, 다들 주목.”
프랑코나는 순식간에 선수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올해도 이 자리에 왔군. 월드시리즈, 시리즈의 승패를 가릴 마지막 한 경기에 말이다.”
“YEAH!”
선수들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서 대답했다. 지혁은 잘 몰랐지만, 이게 3년 동안 연속으로 월드시리즈에 합류한 클리블랜드 녀석들 사이에서는 뭔가 있는 시그널이었던 모양이다. 린도어와 멘데스가 서로 낄낄댔다.
“너희들이 1시간 뒤에 경기장에 올라가기 전에,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마 작년에도 같은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는 월드시리즈 무대에 올해로 다섯 번째 올라왔다. 이번이 다섯 번째라고. 믿어지나, 이 애송이들아?”
“우우-.”
선수들이 야유를 뿜어냈다. 프랑코나는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볼을 씰룩거렸다.
“흐흐, 다들 알다시피 보스턴에서 두 번, 그리고 여기서 세 번째지. 보스턴에서는 월드시리즈에 올라가서 두 번 모두 트로피를 들었다. 무려 86년의 저주를 깼지. 베이브 루스가 남겼다는 그 지독한 저주를 말이야. 그래서 내가 클리블랜드에 온 거다.”
프랑코나는 지난 2년의 실패를 가장 담담하게 말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작년과 재작년 월드시리즈를 떠올리다 보면 선수들은 누구나 인상을 찡그렸고 고통스러운 기억임을 회고했다. 몇몇은 분노했고, 몇몇은 좌절했다. 클리블랜드에게 있어 지난 2년의 기억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반면 프랑코나 감독만큼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난 실패들을 돌아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지혁조차도 잠시 착각하고 있었다. 프랑코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구단의 보드진들도, 팬들도, 그리고 너희들도.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을 거다. 흔히들 하는 착각이지. 이전에 무언가를 극복해 냈던 사람이 합류하게 되면 보이지 않는 역학 관계를 끊어 낼 수 있을 거라는 착각 말이다. 그 착각은 내게 상당한 부담이었다.”
프랑코나는 7차전을 앞두고 자기 고백의 시간을 갖기로 한 듯했다. 감독이라는 자리에서 가져야 할 위엄이나 카리스마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두 번의 실패는 우리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의 경기 결과에 따라 우리는 또다시 고통의 1년을 보내야 할 수도 있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내년에는 이 자리에 못 올라올 가능성도 있지. 고통의 1년이 아니라, 평생의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나는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어떤 누구도 그걸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하죠! 설마 올해도 지고 나서 헤헤 웃을 수 있는 놈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항상 웃고 다녀서 ‘스마일 가이’라는 닉네임까지 있는 린도어가 대답하자 그게 더 웃겼다. 심지어는 잔뜩 무게를 잡던 프랑코나 감독까지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흠, 흠. 내가 1시간 뒤의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너희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어차피 쏟아지는 부담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린 70년에 달하는 부담을 어깨에 안고 있다. 너희도 그렇고, 나도 그렇지. 나는 심지어 다섯 번째 월드시리즈를 치르고 있지만 이 부담감에서 손톱만큼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너희들 모두.”
“부담을 즐겨라! YES!”
“……작년에 내가 말했던가?”
“그렇습니다!”
“김이 조금 빠지는군. 어쨌든 작년의 그 말을 반복해야겠다. 모두들 지금의 이 부담을 즐기길 바란다. 너희들은 선택받았고, 선택받았기 때문에 이 고통스럽고, 무겁고, 숨도 못 쉴 것 같은 압박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이 느낌을 온전히 받아들여. 그리고 이겨 내라. 이 부담을 이해하는 건 서로밖에 없다. 경기장 위에서 뛰는 녀석들, 벤치에서 응원을 해야 하는 녀석들, 그리고 나까지. 우리의 감정은 우리밖에 알 수 없다. 서로 믿고, 서로 돕고, 서로 격려해라.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모든 것들을 결국 깨부수고 나갈 방법은 그것뿐이다! 알겠나!”
“예아!”
“좋아! 다들 모여!”
프랑코나는 그 어느 때보다 전투적이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대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코치들까지 포함해 서른 개 가까이 되는 손이 한자리에 모였다.
“One, two, three에 Get the trophy다. 자!”
“One, two three!”
“Get the trophy!”
클리블랜드의 라커룸은 모두가 내지른 비장한 외침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 비장한 외침을 어깨에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선수인 지혁은 질끈 눈을 감았다. 지금, 최후의 최후인 이 자리에 모인 모든 감정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
- 가게가 꽉 찼어. 널 응원하지 않는 녀석들은 다 내쫓았으니까 잘해라. - from, 티미.
- 형, 파이팅. 꼭 우승해요. - from, 후지 미유타.
- 우리 버리고 나갔으니까 진짜로 우승해야 돼. 못하기만 해, 죽어! - from, 이연두.
- 행운을 빌어. 슈퍼 문. 너는 해낼 수 있을 거야. - from, 에반 롱고리아.
지혁은 경기장으로 올라가기 전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쓱 훑었다. 어젯밤부터 지혁에게 날아든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만 수백 통에 달했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메시지들이 괜히 지혁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회귀한 이후의 삶은 정말 치열했다. 전생의 삶만큼이나 그랬다. 전생의 삶에서는 생존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면, 두 번째 삶에서는 증명하기 위한 치열함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모든 치열한 과정을 거쳐 드디어 마지막 무대에 섰다. 이제는 진짜로 뒤가 없는 마지막 경기를 해야 한다. 고맙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했다가 다시 냉정해지기도 했다.
짧은 순간 동안 온갖 감정들이 지혁을 위아래로 훑고 지나간다. 그 모든 감정들을 온몸으로 느끼며, 다저 스타디움의 어두운 통로를 지나 눈부신 조명이 쏟아지는 다저 스타디움에 발을 내디뎠다. 꿈을 이루러 간다. 승부의 시간이 왔다.
***
[ 기습 번트! 3루수 앞으로 절묘하게 흘렀습니다, 린도어가 1루에서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 선두 타자가 출루합니다. 3루수 터너가 송구하지 못했습니다. 1회 초 선두 타자가 출루하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 하하, 인디언스. 정말 절박해 보입니다. 선두 타자부터 1루에 슬라이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말이죠. 대단합니다. ]
[ 클리블랜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3년 연속 준우승을 차지할 수도 있으니까요. 린도어의 허슬 플레이로 7차전의 막이 오릅니다! ]
프랑코나의 경기 전 긴 연설을, 선수들은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중 린도어를 비롯한 몇몇은 심지어 ‘몸을 바쳐서라도’ 스스로를 내리누르는 압박감을 깨부수고 싶어 하는 타입이었다.
린도어가 시작하자마자 보여 준 허슬 플레이는 선수들의 투지에 불을 붙였다. 곧장 타석에 들어선 마이클 브랜틀리는 가슴팍 앞쪽으로 날아오는 커쇼의 패스트볼을 피하지 않고 어깨를 들이대는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공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브랜틀리의 어깨를 강타했다.
[ 이런, 힛 바이 피치. 브랜틀리도 출루합니다. 방금은 완전히 공에 어깨를 들이밀었어요! ]
[ 시작하자마자 클리블랜드의 투지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네요. 브랜틀리는 오랜 시간 동안 부상으로 고생한 선수 아니겠습니까? 그런 선수가 커쇼의 패스트볼에 어깨를 들이밀고 있네요. ]
[ 박수를 치면서 1루로 달려 나가는 브랜틀리. 1회 초의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습니다. 다저스가 1회부터 위기를 맞습니다. 클레이튼 커쇼, 아웃 카운트 하나를 잡지 못하고 두 명의 주자를 내보냈습니다. ]
[ 클리블랜드는 선취점이 정말 중요합니다. 만약 커쇼에게 선취점을 뽑아낼 수 있다면 경기 양상은 완전히 다르게 흘러갈 겁니다. ]
[ 타석에는 3번, 페르난도 멘데스. 이제는 클리블랜드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선수가 된 멘데스가 중요한 상황에 들어섭니다. 시리즈 6차전에서 결승 쓰리 런 홈런을 터뜨리며 7차전까지 이끌고 온 선수죠. 과연 커쇼를 상대로는 어떤 타격을 보여 줄지. ]
지혁은 난간에 기대어 경기장 안쪽의 뜨거운 기류에 몸을 싣고 있었다.
평소의 지혁이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여유를 바탕으로 감상자 혹은 관람자에 가까웠다면, 오늘의 지혁은 완전한 참가자였다. 시야가 조금 좁아지더라도 경기의 흐름에 탑승하는 게 훨씬 더 좋은 선택이라는 본능적인 예감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선택 덕분에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마 모든 선수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한 점을 내는 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설령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하더라도 이 기회에 한 점은 내야 한다.
커쇼 특유의 이중 키킹에서 초구가 뿜어져 나간다. 패스트볼, 바깥쪽, 낮은 코스. 공이 날아가는 순간 지혁의 감각이 번뜩였다. 멘데스라면 이 정도는 노리고 있지 않았을까?
따아아악!
[ 때렸습니다! ]
멘데스의 타구가 좌익수 쪽으로 총알같이 날아갔다. 벤치의 모든 선수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시점. 코리 시거가 몸을 날렸다. 그는 왼손에 낀 글러브를 쭉 뻗었다. 마치 슈퍼맨이 된 듯한 자세였다.
[ 잡아냅니다! 코리 시거! 일어나서 2루로! 2루로! 아하- 더블 아웃! 잘 때린 타구가 라인드라이브로 유격수 시거에게 빨려들었습니다, 오 마이 갓! 환상적인 수비입니다! ]
[ 정말 큽니다, 방금의 이 수비는 정말 커요! 윌리 메이스의 ‘더 캐치’만큼 인상적인 수비입니다! ]
멘데스가 1루로 뛰다 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완벽한 안타성 타구에 스타트를 끊었던, 2루로 미처 복귀하지 못한 린도어도 허망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멘데스의 타구가 뿜어나간 순간부터 시거의 글러브에 공이 들어간 순간, 그리고 2루에서 더블 아웃이 된 순간까지 아마 3초도 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쉽게 가 줄 수는 없다는 거냐.”
클리블랜드 벤치에서 누군가가 하늘을 원망하듯 중얼거렸다. 커쇼는 급격하게 안정을 찾았다. 투수라는 존재는 원래 그런 법이니까. 호수비가 나온 이후에는 기적처럼 투구가 살아난다. 하물며 그게 커쇼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엔카나시온이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며 1회 초의 결정적인 득점 찬스가 날아가 버렸다.
잘될 줄 알았던 기회에서 마지막 벽을 넘지 못하게 되면, 그것도 지금처럼 하늘이 도운 수비 같은 것에 걸려서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저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클리블랜드의 선수들이 아무리 나쁜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써도,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건 정말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혁은 일부러 소리를 쳤다.
“헤이! 나만 믿어!”
한 점의 여유가 있었다면 더 바랄 게 없었겠지만. 아쉽지만 괜찮다. 지혁은 꿈을 이루기 위한 마운드로 어느 때보다 빨리 뛰어나갔다. 그의 어깨에는 클리블랜드의 70년 묵은 숙원이 짊어져 있었고, 그의 허리춤에는 수명을 2년이나 가져간 신의 손길이 남아 있었고, 그의 다리에는 지난 18년 인생의 꿈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을 이겨 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