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최후, WS 7차전 (2)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목이 조여 오는, 온몸이 움츠러드는 무대다. 시리즈의 결정을 좌우할 7차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렇다. 그런 데다가 너무 많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월드시리즈 우승. 70년의 저주. 선수 개개인의 꿈까지.
지혁은 왜 커쇼가 1회에 난조를 겪었는지 알 수 있었다. 마운드에 올라오자마자 말이다. 오늘의 마운드에는 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깊숙한 늪에 두 발을 담가 놓은 듯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무겁고, 축축하고, 답답했다.
주위를 둘러본다. 모두가 비슷하다. 내야에서 공을 돌리는 내야수들도, 외야에서 잔스텝을 밟아보고 있는 외야수들도. 모두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는 듯 조금씩은 몸이 무거워 보인다. 다저스의 선수들도 그랬을 것이다.
“후아.”
지혁은 고개를 격하게 털어 봤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껑충껑충 뛰며 양발로 박수를 치듯 몸을 풀어도 봤다. 여전히 찝찝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가시지는 않지만, 억지로라도 괜찮다고 스스로 믿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라운드에 음침하게 내리깔린 분위기의 이유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평소와 완전히 똑같은 야구장인데도 느낌이 이렇게까지 다른 건 야구 때문이 아니다. 야구 외적인 것들이 선수들을 내리누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승부는 얼마나 빨리 이 느낌에서 벗어나 평소의 상태로 돌아오느냐에 달렸다. 지혁은 여기까지도 금방 캐치했다. 그가 전생에 월드시리즈 무대에 서 본 적은 없었지만, 이건 모든 야구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요소였으니까. 누군가의 말처럼 야구는 인생과 같고,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살아다가 보면 언제나 중요한 지점이 온다. 인생의 결정을 내려야 할 때나, 연인과의 결혼을 선택해야 할 때나, 혹은 그에 필적할 만큼 중요한 무언가를 좌우해야 할 때. 그럴 때마다 외부의 시선이나 주위 환경의 문제,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정말 중요한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럴 땐 아무 생각도 않고 눈앞에 닥쳐 있는 과제만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적어도 지혁의 인생에서는 그래 왔다.
- 플레이 볼!
구심이 지혁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고, 다저스의 저스틴 터너가 타석에 들어섰다.
“눈앞의 것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지혁은 냉정하게, 또 하던 대로. 아가리를 잔뜩 벌린 채 존 근처에서 지혁의 공을 기다리는 멘데스의 미트에만 집중하려 노력했다.
***
[때립니다. 제법 멀리 갑니다만 우익수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브랜든 가이어가 잡아내는군요. 스리아웃! 코리 시거를 상대로 볼넷을 내줬습니다만, 벨린저를 처리합니다. 문, 첫 이닝을 그래도 꽤 깔끔하게 넘어갔습니다.]
[커쇼에 비해서도 좋았죠. 지난 1차전, 4차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4차전에서 문이 좋았던 때 말이죠. 공이 가벼운 느낌도 없고 컨트롤도 좋아요. 로케이션도 아주 좋은 지점에 형성되고 있죠. 적어도 1회만 놓고 봤을 때는, 문의 컨디션이 아주 좋아 보입니다.]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컨디션이 좋다는 것. 정말 대단한 일 아니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만큼 마인드 컨트롤이 좋다는 뜻이죠.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습니다만 이런 중요한 경기에서는 초반을 넘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평소의 마음가짐과 다르기 때문인데요. 문은 모든 걸 초월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리그에서 손에 꼽히는 선수들만 가능한 일이죠.]
노력한다고 모든 일이 다 잘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봐야 맞다. 코리 시거를 상대로 제구가 연속으로 어긋나며 볼넷을 준 게 그 증거였다. 어깨에 힘을 빼고 제구에만 온 신경을 쏟는다고 쏟았는데, 공이 자꾸 빗나갔다.
하지만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결코 타개할 수 없다. 경기에 나서고 있는 열여덟 명의 선수들 중에, 지혁은 평정심을 찾기 위해 가장 부단히 노력한 선수였다.
벨린저를 상대로도 투 볼 카운트에 몰렸지만 어떻게든 꾸역꾸역 평소의 싱커를 집어넣었다. 분위기에 잡아먹히는 바람에 마지막 공을 끝까지 누르지 못했다면 밋밋한 공이 들어갔을 것이고, 그럼 넘어갔을 터다.
“오케이! 좋았어! 좋아! 다들 목소리를 좀 내!”
코치들은 선수들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지금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고, 프랑코나 감독까지 직접 나서서 선수들이 목소리를 내고 장난도 좀 치기를 독려했다. 단지 1회만 치렀을 뿐인데도, 양 팀 모두 딱히 흠잡을 데 없는 플레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평소보다 착 가라앉아 있었으니까.
“짊어진 부담을 직시하면서도 그걸 부숴야 돼. 그건 우리가 평소처럼 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야!”
팀 내에서 가장 문학적인 표현을 좋아하는 불펜 투수 앤드류 밀러가 선수들 사이사이를 독려하고 다녔다. 벤치에 있는 선수들 모두가 마치 클러비라도 된 듯 주전 선수들에게 음료수를 건네고 수건을 가져다준다. 심지어는 야수들이 끼우고 있는 목토시를 점검해 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아마 코치들의 지시였겠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지혁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양팔을 좌우로 척 벌리고는 방금 전까지 마운드에서 느꼈던 감정을 되살렸다. 단언컨대 지혁이 겪었던 그 어느 경기보다 지독한 경기였다. 퍼펙트게임을 기록했을 때, 9회 2아웃이었던 때의 기분이 경기 내내 지속된다고 해야 할까?
플레이 하나 하나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긴장이 요구되는 경기. 공 하나 하나를 던질 때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의 경기.
지혁은 간절히 바랐다. 이 감정을, 세계 최고의 투수라고 하는 클레이튼 커쇼도 똑같이 느끼고 있기를 말이다.
***
[2회 초에도 선두 타자를 출루시켰습니다만, 후속 타자를 처리해 내는 클레이튼 커쇼. 초반을 잘 넘어갑니다.]
[점점 감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2회 말을 삼자범퇴로 막아 냅니다. 삼진, 2루수 플라이, 3루수 앞 땅볼입니다. 문은 특유의 안정감을 보여 줍니다.]
[환상적인 피칭이에요.]
***
3회 초. 선두 타자는 9번, 그러니까 지혁이었다.
“스윙하지 않아도 돼. 혹시 모르니까 타석에서 조금 떨어져 서도 돼.”
“옙.”
“문, 다시 말하지만 공격에서조차 네가 뭔가 하려는 마음은 버려. 정말이야. 1차전에서 좋은 기억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나서지 마. 네가 무너지면 투수진이 같이 무너지니까.”
“아, 코치님, 알겠어요, 그만 좀. 저 이제 나가야 해요.”
“조심해!”
프랑코나 감독과 캘러웨이 코치는 신신당부했다. 웬만해서는 스윙하지 말라고. 지혁은 2회 말이 끝난 뒤 짧은 대기 시간 동안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어야 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실제로 방망이를 휘두를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커쇼의 공을 타석에서 보는 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세계 최고의 투수라는 커쇼의 공이 대체 어떤 정도인지. 타자들이 왜 그렇게 혀를 내두르는지.
지혁은 타석에서 헬멧을 쓰윽 눌러쓰고는 마운드의 커쇼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자, 와인드업. 이중 키킹…….’
……응?
“스트라이크!”
공이 언제 나오는지 발견도 못 했다. 지혁은 그동안 타자들이 수차례 표현해 왔던 수식어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문자 그대로, ‘중간부터 갑자기 휙 나타나는’ 공이었다.
‘이중 키킹과 디셉션에서 오는 착시인가? 이게 대체 뭐지?’
“스트라이크, 투!”
순식간에 스트라이크 두 개가 쌓였다. 포수에게서 공을 이어받자마자 곧장 3구를 던지려는 커쇼를 상대로 지혁은 타임을 한 번 걸었다.
“헤이, 뭐야?”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서 투수를 상대로 타임을 거는 일은 흔하지 않다. 지혁이 타임을 걸자마자 다저스의 포수 그랜달이 퉁명스러운 불만을 내뱉었다. 지혁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혁의 신경은 오로지 커쇼의 특이한 투구 폼에서 나오는 공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스윙을 하지 않아도 좋다. 같은 투수로서 타석에 들어서면 상대 투수의 타이밍이 더 잘 잡히는 부분이 분명히 있고, 그걸 캐치해서 타자들에게 알려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두 개의 공을 너무 허탈하게 날려 버려서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배터, 타석에 빨리 서. 경기 재개다.”
“아, 예, 예. 갑니다.”
지혁이 한참을 알짱거리고 있자 구심이 독촉했다. 지혁은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그냥 타석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아, 모르겠다. 코치님은 휘두르지 말라고 했지만…….’
투수에게 있어 공 세 개를 던져서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다. 지혁도 누구보다 그 쾌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커쇼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더구나 오늘 같은 경기에서는 더더욱. 그럴수록 평소의 감을 더 빨리 되찾을 테니 말이다.
커쇼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지혁은 공을 보고 치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방금 전 그 공의 타이밍대로, 그러니까 평소의 배팅 타이밍보다는 훨씬 빠른 시점에 방망이를 한번 내 보기로 했다.
부웅-.
방망이를 부여잡은 손끝에는 힘을 단단히 줬다. 혹시라도 빗맞아서 손이 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리고 마지막 임팩트 순간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딱!
소리가 났다. 나무 배트에서 이렇게 청아한 소리가 나도 되는지 의아할 정도로. 그리고 신기하게도 손에는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지혁은 배트에 공이 맞는 순간 본능적으로 달려 나갔다. 공이 어디로 갔는지는 솔직히 확인하지 못했다. 타구가 맞아 나가는 순간 단번에 공을 쫓아가는 건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지혁은 1루 베이스 옆에 서 있는 코치만 바라봤다.
[멀리 가는데요! 멀리 갑니다! 우익수, 키를! 넘깁니다! 우익수 벨린저의 키를 넘겨서 원 바운드로 펜스를 때립니다! 오 마이 갓! 문이 해냈습니다!]
[1차전에서도 선취 득점을 뽑아내는 좋은 타격을 선보였었죠. 와, 커쇼를 상대로도 안타를 때립니다. 하하하, 어메이징하네요. 클리블랜드의 분위기는 이 선수가 끌고 가고 있습니다. 마운드에서만 보여 주는 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나요? 놀라울 정도로 깔끔한 밀어치기였습니다.]
베이스 코치가 오른팔을 있는 힘껏 휘두르길래 어설프게 베이스를 밟고 2루까지 뛰었다. 내야 흙 사이에 오똑하게 나와 있는 2루 베이스 위에 올라서고 나서야 외야에서 공이 연결되었다. 지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벤치 쪽을 바라봤다.
“우와아아앗! 하하하!”
“이 미친 녀석아! 하하, WTF!”
이미 벤치를 박차고 튀어나와 있는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수건을 빙빙 휘두르면서 난리가 나 있었다. 그들은 지혁이 타구를 외야로 보낸 순간부터 저러고 있었을 것이다.
벤치의 한쪽 구석에서는 캘러웨이 코치가 손 쪽을 가리키며 뭐라고 시그널을 보내고 있었다. 손이 괜찮냐는 물음이겠지. 지혁은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시그널을 보냈다.
“타임 걸어! 타임!”
지혁은 깜빡 잊고 2루심에게 타임을 걸지 않고 있었는데, 멘데스가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알려 주었다.
지혁은 곧장 2루심에게 타임을 요청했고, 받아들여졌다. 지혁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던 시거가 아쉽다는 듯이 글러브에 숨겨 놓은 공을 커쇼에게 전달하는 모습이 보인다.
클리블랜드 벤치 쪽에서 멘데스가 직접 달려 나왔다. 지혁은 다리에 찬 보호대와 배팅 장갑, 팔꿈치 보호대를 슬렁슬렁 풀어서 멘데스에게 건넸고, 멘데스는 투수용 바람막이를 지혁에게 주었다.
“야, 미친놈아. 커쇼 공마저 때리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하하하, 우리 죄다 난리 났잖아. 보여? 하!”
“눈 감고 돌렸어, 진짜야. 이게 왜 저기까지 가는 거야?”
“니가 친 게 얼마짜리였는지 알아? 96마일이야! 커쇼가 던진 96마일짜리 패스트볼을 저 끝까지 날렸다고! 하하하, 이 자식!”
멘데스는 잔뜩 신이 나서 지혁의 헬멧을 쾅쾅 두드리더니 기어이 2루심의 제지를 받고 나서야 벤치로 돌아갔다.
“……뭐야, 이게?”
지혁은 아직도 얼떨떨한 상태로 베이스 위에서 중얼거렸다. 마운드 위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커쇼의 거대한 등판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가 2루 쪽으로 몸을 돌려 지혁을 슬쩍 보고는 2루수, 유격수와 수비 사인을 맞춘다. 순간적으로 스쳐 간 커쇼의 눈빛은 분명히 엄청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 하늘이 도와주나?”
지혁은 그저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벤치의 프랑코나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은 하늘이 도와주는 녀석인가 본데.”
“그렇다면 진짜 마지막 퍼즐이네요. 안토네티 단장이 일을 잘했어요.”
“그러게. 우리 팀에 하늘이 돕는 녀석이 올 줄은 몰랐으니까. 죄다 하늘이 버린 녀석들만 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지, 우리 팀에 오고 나서 하늘에게 버림받은 거였나?”
프랑코나는 LA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약간은 허탈하게 중얼댔다. 하지만 그 허탈한 느낌과는 다르게 입꼬리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70년 동안 내려져 있던 클리블랜드의 저주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사람이 바로 2루에 나가 있는 지혁이라는 걸 확신하는 듯한 미소였다.
***
[당깁니다, 2루수가 1루 쪽으로 움직이며 건졌습니다. 린도어는 2루 땅볼로 물러납니다. 하지만 2루에 있던 주자 문은 3루까지 들어갑니다.]
[클레이튼 커쇼, 1사 3루의 위기 상황을 맞았습니다. 삼진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 하지만 브랜틀리가 끈질기게 버텨 내고 있습니다. 다시 파울. 네 개 연속 파울로 커트해 내는 마이클 브랜틀리.]
[클리블랜드의 타순도 빛을 발하네요. 상황이 이렇게 됐지만 말이죠. 클리블랜드 타선에서 가장 컨택이 좋은 선수 앞에 걸려 버렸으니까요.]
[프랑코나 감독이 이걸 의도했을까요? 하하.]
[말도 안 되는 일이죠. 문이 커쇼에게 2루타를 뽑아낼 걸 미리 예상했더라면 그는 신이에요!]
[자, 브랜틀리. 다시 파울. 뒷그물을 때립니다.]
“문, 무리한 주루는 시키지 않을 거야. 하지만 과감하게 뛰기는 해야 해.”
“네.”
무슨 말인지 지혁은 잘 몰랐다. 그저 3루 코치의 시그널만 잘 따르면 될 일이다. 무리함과 과감함 사이의 미묘한 경계선은 숙달된 주자라야만 알 수 있는 직감 같은 것이니까. 지혁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8구. 브랜틀리가 바깥쪽 공을 억지로 당겨 치려는 듯이 한 손을 놓으며 따라갔다. 살짝 둔탁한 소리가 났다.
“GO!”
3루 코치의 외침이 울리는 순간 지혁은 스타트를 끊었다. 공은 3-유간이 아니라 2루 베이스 쪽으로 향했다. 커쇼가 그 공을 잡았더라면 아마 지혁은 런다운에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마운드 앞쪽 경사면을 맞은 공은 미묘한 불규칙 바운드가 걸리며 커쇼의 글러브 아래를 빠져나갔다.
“HOME! HOME!”
3루에서 홈까지의 거리 18미터. 지혁의 스킵 동작을 감안하면 대략 15미터 내외의 거리. 그 거리가 이렇게까지 멀어 보인 건 처음이었다.
지혁이 반쯤 갔을 때 포수 그랜달이 일어서서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다. 미트를 힘껏 벌리면서 마치 공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위협하고 있었다.
몸이 움찔거렸다. 주자들이 존경스러워질 정도다. 어떻게 저렇게 위협적인 장비를 찬 포수들과 매번 상대하는 것일까? 지혁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있는 힘껏 자세를 낮춰 포수의 옆으로 빙글 돌아가려 했다. 지금이라도 공이 귀 옆을 스치며 날아들 것 같은 긴박한 공포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정작 지혁의 귀에 들어온 것은 공이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아니었다. 지혁이 마지막 발을 내딛기 직전에 그랜달이 홈플레이트를 막고 있던 왼발을 빼 길을 텄다. 지혁의 귀에 들려온 것은 클리블랜드 벤치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이었다.
지혁은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경쾌하게. 무려, 클레이튼 커쇼를 상대로 뽑아낸 선취점이었다.
문지혁 vs 클레이튼
커쇼한 점의 리드가 이것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질 때는 없었다.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의 선취점이었기에 더 그랬고, 클레이튼 커쇼를 상대로 뽑아낸 점수였기에 더 그랬다.
고작 한 점뿐인데도, 클리블랜드의 더그아웃에 은근하게 퍼지는 기대감이 모락모락할 정도였다. 모두가 ‘아직 한 점이야. 그냥 없다고 생각하는 게 나아.’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 한 켠에는 7부 능선을 넘었다는 생각을 쌓아 두고 있으니까.
선수들이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는 중심에는 지혁이 있었다. 시즌 내내 믿음직하다는 말로도 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활약했다. 단기전에서도 그렇다. 지금까지 지혁이 믿음을 저버린 적은 없었다. 그리고 대망의 월드시리즈에서조차도 이미 2승을 거뒀다. 선수들과 코치들이 지켜본 그 어느 선수보다도, 월드시리즈에서 통용되는 저주에 가장 내성이 강한 선수다.
그런 선수가 7차전 마운드에 서 있고, 리드를 가져가는 점수까지 기록했으니. 선수들의 마음속에 자신감이 자리 잡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선취점이 중요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설명을 거꾸로 적용한다면, 다저스의 선수들 역시 커쇼에게 경외에 가까운 믿음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만약 상황이 정반대였더라면 클리블랜드에게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있었을까? 커쇼를 뚫고?
물론 야구는 모르는 일이지만, 지혁은 그건 비관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점에 걸린 무게감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스윙! 배터 아웃!”
손에서 살짝 빠진 하이 패스트볼에 크리스 테일러가 삼진으로 물러났다. 방금은 제구에 실패한 공이었는데 운이 좋았다. 멘데스도 재빨리 침착하라는 제스처를 보내며 지혁을 독려해 줬다.
다음 타자는 클레이튼 커쇼. 커쇼도 지혁을 상대할 때 그랬겠지만, 지혁도 커쇼를 상대로 일반적인 타자를 상대하듯이 전력을 다했다. 커쇼의 공을 쳐 낸 건 절대적인 운이었고, 그런 운이 커쇼에게는 찾아가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결과는 좋았다. 어설프게 빗맞은 타구는 유격수 린도어 앞으로 흘렀다. 투아웃. 이어진 저스틴 터너의 타석에서는 2루수 킵니스의 호수비가 지혁을 도왔다. 애매한 위치로 흐른다 싶었는데 환상적인 역동작 캐치와 송구로 이닝을 마무리했다.
[3회 말에도 삼자범퇴. 일곱 타자 연속 범타 처리 중입니다. 문, 스스로 뽑아낸 한 점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습니다. 경기는 이제 중반부로 접어듭니다. 여기는 LA, 2018 시즌의 야구가 끝나는 날입니다. 광고 보고 다시 뵙죠.]
3회 말을 무사히 넘어갔다. 여느 때 같았으면 그냥 평범한 한 이닝, 가장 약한 하위 타선을 상대한 기록이었겠지만. 지혁은 토해 내는 듯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뒤가 없는 승부에서 한 점 리드를 가졌다는 사실은 엄청난 부담을 동반한다는 걸 깨달은 듯한 한숨. 오늘의 이 경기는 그야말로 지독한 싸움이다.
***
커쇼는 커쇼다. 불의의 일격을 맞아 화가 난 듯한 피칭을 이어 갔다. 놀랍게도 4회 초 타석에 나선 클리블랜드의 세 타자가 공에 스윙을 맞추지도 못했다. 그게 클리블랜드의 4-5-6번, 에드윈 엔카나시온, 호세 라미레즈, 브랜든 가이어라는 걸 감안하면 정말 엄청난 피칭이었다. 몸 쪽과 바깥쪽을 자유자재로 찌르는 패스트볼, 모든 타자들이 ‘악마의 커브’라고 표현한 커브. 두 개의 공만으로 만들어 낸 퍼펙트 이닝.
지혁은 지혁이다. 커쇼와의 기세 싸움에서 물러나고 싶지 않았고, 물러날 수도 없었다. 다저스의 2-3-4번인 야스마니 그랜달, 코리 시거, 코디 벨린저를 모두 내야 땅볼로 처리했다. 카운트 초반에 너클 포크를 던져 타이밍을 흔들고, 결정구를 던져야 할 때는 이 악물고 싱커를 던졌다. 방망이에 빗맞은 타구들은 3루수 앞, 유격수 앞, 1루수 앞으로 하나씩 흘렀다. 지혁의 스타일대로 뽑아낼 수 있는 최고의 이닝.
[양 팀 투수들의 각오가 눈에 보입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백이 느껴지는 투구네요. 이제 5회 초 클리블랜드의 공격으로 이어지겠습니다. 7번 브랜든 가이어부터 시작합니다. 자, 이닝이 시작하기 전에 현재 SNS에는 어떤 글들이 주목받고 있는지 알아보죠.]
[email protected]roMartinez
두 사람의 피칭은 정말로 흠잡을 데가 없어. 시리즈 마지막 경기의 품격을 높여 주는 피칭이야. 모든 야구팬들은 저 두 명에게 감사하다고 얘기해야 해.
[페드로 마르티네즈입니다. 저 트윗이 3회가 끝나고 올라왔는데, 한 이닝 동안 리트윗이 5천 회가 넘어갔다는군요. 다음 건요?]
[email protected]
내가 역사상 최고의 좌완 투수야. 그건 확실해. 하지만 저 두 녀석도 정말 엄청나네.
[랜디 존슨입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력적인 좌완 투수였죠. 오늘 이 무대에 선 두 명의 좌완, 클레이튼 커쇼와 문 모두 랜디 존슨의 멘션을 넘어서기 위한 피칭을 보여 주는 중입니다.]
[페드로와 랜디. 두 사람 모두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손에 넣었었죠. 그리고 다저스의 커쇼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에게도 반지가 필요할 텐데 말이죠. 커쇼가 물러설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문이 조금 유리해 보이네요. 그렇다면 네 선수 모두 반지를 갖게 되는군요.]
[하하, 아직 이릅니다. 이제 막 5회를 시작할 뿐이니까요. 커쇼가 킵니스를 맞이합니다. 초구, 스트라이크. 95마일입니다.]
킵니스는 공 세 개를 골라내며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까지 몰아갔지만, 배팅 타이밍이었던 카운트에서 커브에 헛치고 말았다. 풀카운트로 몰린 상황에서 커쇼는 과감한 패스트볼 승부로 킵니스를 찍어 눌렀다.
이어진 타자는 8번 짐머. 패스트볼에 철저하게 타이밍을 맞춘 짐머는 파울 세 개를 만들어 내며 끈질기게 따라붙었지만 마지막 체인지업에 농락당하며 헛스윙 삼진. 투아웃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지혁도 이번에는 정말 스윙을 하지 않고 루킹 삼진으로 물러났다.
[5회도 K-K-K! 클레이튼 커쇼! 두 이닝 연속 K-K-K입니다. 무려 여섯 타자 연속 탈삼진! 자신의 이름값을 톡톡히 보여 줍니다. 보고 있나, 랜디? 이런 느낌이군요!]
[하하, 이 선수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좌완 투수라는 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그걸 부인하고 싶을 한 선수가 아직 반대편 마운드에 있죠. 5회 말로 갑니다.]
커쇼의 피칭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정작 중요한 가을 야구에서 새가슴이라며 어처구니없는 비난을 들었던 재작년을 떠올리면 허탈해질 정도다. 작년 가을에 팀을 리그 최정상으로 이끈 커쇼는 이제 가을이 익숙하다는 듯한 피칭을 선보였다.
투구 하나하나가 압도적이었고, 결과 하나하나가 위압이었다. 리드를 갖고 있는 건 클리블랜드인데, 경기를 지배하는 건 커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헤이, 문.”
“왜?”
“한 점을 냈던 게 저 고릴라 같은 녀석에게 불을 붙였나 본데?”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상대 팀 투수이자 오늘의 쇼다운을 진행 중인 지혁조차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피칭. 멘데스는 지혁의 기를 살려 주려고 말을 붙여 왔다.
“하지만 난 네가 최고라고 생각한다고.”
“농담은 됐어. 오늘은 농담할 기분이 아니야.”
“헤이- 아미고! 진짜라니까. 너도 커쇼한테 뒤지는 녀석이 아니야. 나는 네 공을 계속 받고 있잖아. 엉? 자신감을 가지라고.”
“야, 그런 소리는 커쇼한테 안타라도 하나 뽑아내고 해. 엉? 내가 던지면 이렇게까지 못 칠 수 있겠어?”
“하하하! 좋아, 평소대로 돌아왔구만. 솔직히, 네가 던진다고 하면 난 최소한 세 개는 담장 밖으로 보낼 수 있지.”
지혁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멘데스가 천하태평하고 낙천적인 녀석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농담을 하며 낄낄댈 줄은 몰랐다. 하지만 멘데스의 그런 멍청할 정도로 낙천적인 모습이 선수들에게 묘한 안정감을 준다. 중요하고 지대한, 뒤가 없는 이 경기를 평소와 같은 경기로 만들어 버리는 재주. 이 재주를 멘데스라는 녀석은 타고났음이 분명하다.
멀리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좌익수 수비를 향해 달려 나가야 할 브랜틀리가 마운드에 들러 지혁의 엉덩이를 툭 쳤다. 1루 수비를 위해 뒤뚱거리며 뛰어가던 엔카나시온도 육중한 체구를 돌려 지혁에게 특유의 세리머니를 보냈다.
“Man! 나도 멘데스랑 같은 생각이야!”
아마 엔카나시온은 지금 린도어가 외친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린도어는 밤인데도 선글라스 고글을 모자챙에 끼워 놓고 환하게 웃었다. 이들은 모두 커쇼의 벽에 막혀 있지만, 그럼에도 마운드에 선 지혁에게 ‘네가 최고’라는 말을 해 주고 있었다.
지혁은 내야를 쓱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믿어야 한다. 어려운 길을 돌고 돌아, 수많은 벽에 부딪히고 깨지면서 다시 평소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운드 위에서 싸울 때는 상대가 커쇼가 아니라 커쇼 할아버지더라도. 심지어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였다는 사이 영이나 크리스티 매튜슨이 마운드 위에 있더라고 하더라도. 내가 그보다 낫다는 마음으로 던지는 것.
그제야 프랑코나의 말이 조금은 이해되기 시작했다. 커쇼와 싸운다는 부담감을, WS 7차전이라는 부담감, 지면 끝나 버린다는 부담감을 안고 싸우면서도 결국 그걸 이겨 내야 하는 것이다. 평소처럼 던져서 말이다.
***
[13! IN-A-LOW! 1회 말 세 번째 타자부터 13타자 연속 범타입니다! 2회, 3회, 4회, 5회까지 퍼펙트 행진을 이어 가는 클리블랜드의 슈퍼 문. 클레이튼 커쇼와 지-혁 문의 환상적인 쇼다운입니다!]
[정확히 그렇습니다. 오늘 경기는 투수전의 백미네요. 볼 수 있는 최고의 투수전을 감상하고 있는 겁니다.]
[경기의 절반이 지나갔습니다. 양 팀의 스코어는 1 대 0. 클리블랜드가 나머지 4이닝만 버텨내면 70년의 저주를 끊어 낼 수 있습니다. 그 최선봉에 한국에서 온 슈퍼 문이 서 있습니다. 6회로 갑니다!]
커쇼와 지혁 모두 불이 붙었다. 누구라도 한 명이 먼저 무너지면 이 게임에는 지진이 일어날 것이다. 두 선수 모두 판을 뒤흔들 지진의 끝자락에 서 있었지만, 두 발을 땅에 굳건하게 디디고 재앙을 막아 내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커쇼가 한 발을 헛디뎌 살짝 밀린 정도? 어쨌든 한 점을 허용하긴 했으니 말이다. 이게 5회까지의 경기 양상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경기 내내 투수들만 빛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타자들 역시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수준이라는 것 역시 틀림없으니까 말이다. 경기 내내 잘 풀어 가다가도 단 하나의 플레이, 단 하나의 스윙으로 경기를 뒤바꿀 수 있는 타자들이 라인업에 가득 차 있고, 그건 양 팀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6회 초. 클레이튼 커쇼는 1번 린도어를 잡아냈다. 하지만 2번 브랜틀리에게 중견수 앞으로 향하는 깔끔한 안타를 허용했다. 이어지는 페르난도 멘데스는 어려운 승부를 하다가 볼넷으로 출루하는 데 성공했다.
[오랜만에 두 명의 주자를 출루시킨 인디언스. 엔카나시온이 결정적인 한 방을 때려 줄 수 있을지 지켜보시죠.]
[이 장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는 장면입니다. 만약 다저스가 한 점을 낸다면 다저스는 ‘좋아, 원점이야.’라고 생각하겠지만, 지금 인디언스가 한 점을 더 뽑아낸다면 인디언스는 ‘두 점이면 끝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만큼 큰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처럼 불붙은 문을 상대해야 할 땐 말이죠.]
당연한 말이지만 커쇼도 사람이다. 경기 전반부의 그는 마치 야구의 신이라도 되는 것 같은 퍼포먼스를 선보였지만. 그에게도 지혁이 느끼고 있는 것만큼의 부담이 쏟아져 있었을 터다. 천하의 커쇼조차도 이제는 지칠 때가 되었다.
[볼. 구심의 손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풀카운트가 됩니다.]
[엔카나시온의 선구안이 돋보였네요. 방금 공은 따라 나올 만했어요. 커브가 아주 아슬아슬한 지역에서 잡혔거든요. 그랜달이 필사적인 프레이밍을 선보였습니다만 헛수고였네요.]
[자, 원아웃에 주자 1, 2루. 엔카나시온이 볼넷 출루를 한다면 루상이 꽉 채워집니다. 다저스에게는 상상하기 싫은 결과일 텐데요. 커쇼, 7구째를 준비합니다. 7구!]
구심은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주지 않았다. 바깥쪽, 반 개 정도 빠졌을까? 투수 입장에서는 땅을 치고 아쉬워할 법한 공. 커쇼도 마찬가지였던 듯 무릎에 손을 대고 허리를 숙였다.
“됐다!”
“오케이! 한 점만 내자, 한 점!”
지혁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동료들이 쉰 목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순간적으로 지혁은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다는 기쁨보다는, 커쇼에 대한 안쓰러움이 먼저 밀려오는 걸 느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마치 이 경기를 독재하려는 사람처럼 보였었지만, 커쇼도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에게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지혁이 그렇듯이.
[원아웃 만루! 주자가 꽉 찼습니다! 다저 스타디움에 악몽이 찾아들기 직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