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lly
“계속 두겠지?”
“당연하지. 다저스의 불펜 중 누구도 지친 커쇼보다 안정적이지 않아.”
허니컷 투수 코치가 마운드로 향하는 중이다. 커쇼의 상태를 점검하고, 커쇼의 의사를 묻겠지.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어떤 선택을 바라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지혁은 커쇼가 마운드 위에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말은 좀 건방지겠지만, 커쇼가 위기를 멋지게 탈출하기를 조금 바라기도 했다.
이건 멋진 쇼다운을 벌이고 있는 상대 투수에 대한 진심 어린 존경에서 나오는 마음이었다.
아마 지혁이 먼저 무너진다면 이런 마음을 먹고 있는 자신을 자책할 게 분명하지만, 상대하고 있는 투수가 완전히 망가지는 것보다 계속 철벽같은 모습을 보여 주기를 바라는 이상한 감정이었다.
안일한 동정 따위가 아니다. 상대에 대한 존경이라고 해야 할까, 팀의 승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마음이 자꾸 들었다.
“역시, 교체 없네.”
“자, 무너뜨려 보자! 커쇼를 두들겨 보자고! 저 녀석도 지쳤어!”
예상대로 허니컷은 그냥 내려갔다. 클리블랜드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았다.
[1 대 0의 스코어. 한 점 뒤지고 있는 다저스.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를 마운드에 남겼습니다. 다저스 팬들의 엄청난 환호가 쏟아지는 중입니다. 클리블랜드, 회심의 일격을 날릴 수 있을지. 3루에는 브랜틀리, 2루에는 멘데스. 1루에는 엔카나시온이 출루해 있습니다. 그리고 타석에는 호세 라미레즈.]
외야로만 날리면 한 점이다. 삼진을 당하더라도 최소한 한 번의 기회는 더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최악은 내야로 굴리는 것이다. 모든 루상에서 포스아웃이 적용되는 상황상, 어디로 어떤 타구가 굴러가도 더블플레이가 나올 확률이 높다.
“여기가 전환점이 되겠어.”
지혁은 오묘한 감정으로 플레이를 지켜봤다. 커쇼가 잘 막아 내기를 바라는 마음과 라미레즈가 큰 것 한 방을 때려 주길 바라는 마음이 공존하는 채로.
초구. 몸 쪽에 붙이는 스트라이크.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초구 스트라이크를 꽂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2구.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 움찔했지만 따라 나가지 않은 라미레즈의 인내심을 칭찬해야 했다.
3구. 살짝 높은 코스의 패스트볼. 투 스트라이크 원 볼. 제대로 맞았다면 장타가 나올 코스인데 이 와중에 저기를 찌르다니.
4구. 끔찍한 커브가 라미레즈의 벨트 부근에서 발등까지 떨어졌다. 튀어나가던 라미레즈의 배트가 정말 억지를 부리듯이 궤도를 바꾸었고, 배트 밑을 아주 간신히 스친 공이 파울로 선언되었다.
그리고 5구.
[주자 만루, 투 앤 투! 5구!]
라미레즈의 풀스윙은 내야로 굴리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그리고 던지는 순간 모자가 벗겨져 버린 모습은 절대로 외야로 보내지 않겠다는 커쇼의 강한 의지를 보여 줬을 것이다.
서로의 강한 의지가 맞부딪힌 결과는.
[뜹니다, 높이 뜹니다. 하지만…… 멀리 가지 못합니다. 내야를 살짝 벗어났습니다만 2루수가 자리를 잡고…… 잡아냅니다. 잡아냈습니다. 닐 워커가 잡아냅니다. 주자 움직이지 못합니다! 여전히 주자 만루, 투아웃입니다!]
라미레즈가 방망이를 두 동강 내 버렸고, 반면 커쇼는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지혁은 마음속에 공존하던 두 개의 묘한 감정 중 한쪽으로 급격하게 치우치는 걸 느꼈다. 이제는 저 악마 같은 커쇼 놈을 무너뜨렸으면 좋겠다. 제발!
[클레이튼 커쇼. 위대합니다. 위기를 탈출하려 합니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만루입니다. 타석에는 6번, 브랜든 가이어. 오늘 2타수 2삼진입니다. 이번 월드시리즈에 들어와서도 .128의 타율이죠.]
[클리블랜드는 시즌 막바지에 부상으로 물러난 로니 치즌홀이 그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매우 그립겠죠. 분명히요. 백업 외야의 뎁스가 약한 게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중견수로 나서는 브래들리 짐머 역시 .149를 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이너리그에서 올라온 아브라함 알몬테는 대수비와 대주자로만 투입되고 있죠. 클리블랜드의 외야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어쨌든 이제 바톤은 가이어에게 넘어갔습니다. 다저스, 커쇼를 남겨 놓은 선택이 아주 훌륭했던 것 같군요. 초구. 스트라이크입니다.]
불과 5분 전에 먹었던 마음가짐에 후회가 가기 시작할 무렵. 이 타이밍에 무조건 커쇼를 무너뜨려야만 한다고 마음먹었을 무렵. 그리고 모든 걸 포기하고 제발 한 점만이라도, 와일드피칭이 나오든 실책이 나오든 뭐가 좋으니까 한 점만 더 뽑아 달라고 애원하게 되었을 무렵.
브랜든 가이어의 스윙이 돌았다. 지금까지 .128을 치고 있는 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이 빠르고 벼락같은 스윙이었다. 커쇼의 2구째가 날아가는 모습부터 가이어의 스윙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리고 배트에 맞은 공이 기어이 내야를 빠져나가는 모습까지. 모든 게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뛰어!”
클리블랜드 벤치의 모두가 같은 말을 외쳤다. 투아웃 상황이었기 때문에, 배트에 공이 맞는 순간 모든 주자가 스타트를 끊었다. 그리고 타석에서부터 방망이를 집어 던지고 달려 나가는 가이어는 주먹을 불끈 쥔 채 팔을 뻗어 올렸다. 하늘로.
[내야를 빠져나갑니다! 좌익수 테일러가 미끄러지며 공을 막아 냈습니다만 3루 주자 브랜틀 리가 홈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2루 주자! 페르난도 멘데스도 3루를 돌았습니다! 홈으로! 홈으로! 홈으로!]
테일러의 수비는 칭찬받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더 빠져나가 펜스까지 구르는 걸 막았을 뿐이었다.
[들어왔습니다! 스코어 3 대 0! 두 점을 추가하는 인디언스, 70년의 저주를 풀기 위해 큰 발걸음을 성큼 내딛습니다! 그야말로 빅 샷입니다! 브랜든 가이어가 혜성처럼 등장해 존재감을 알립니다!]
이제와 새삼 떠올리지만, 브랜든 가이어는 원래 좌완 스페셜리스트였다. 계속해서 풀타임 경기를 소화하며 그 존재감이 희석되었지만,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 왼손 투수를 상대하기 위한 조커로 수차례 경기에 나섰던 선수였다. 그의 존재감을 놓친 게 다저스의 결정적인 실수다.
마운드에 주저앉은 커쇼의 눈빛에서 허망함이 읽혔다. 다저스의 어린 선수들 역시 입술을 앙다물고 참아 내고는 있지만, 허탈함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았던 선수에게서 카운터펀치를 얻어맞은 기분이란. 그것도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상상하기 싫을 만큼 끔찍하다. 그리고 정확히 반대의 감정이 클리블랜드와 지혁에게 휘몰아쳤다. 두 번 죽어도 모를 만큼 황홀한 감정이었다. 마치 마약을 주입한 사람들처럼 모두가 하늘에 붕붕 떠다니고 있었다.
이 맛에 야구 하지.
***
[기어이 커쇼를 끌어내린 인디언스. 추가점을 얻는 데는 실패했지만 가이어의 정말, 너무나도, 엄청나게 중요한 2타점 적시타가 터졌습니다. 이제 남은 건 4이닝. 그동안 3점의 리드를 지켜 내면 인디언스는 70년 만에 월드시리즈의 주인공이 됩니다.]
[정말 큽니다. 정~말 큰 점수였어요.]
[마운드에 올라오는 이 선수를 바라보면 닉의 이런 강조가 이해가 됩니다. 클리블랜드. 6회 말 수비를 위해 여전히 문을 세워 두고 있습니다. 문은 1회부터 5회까지, 열세 명의 타자를 연속으로 범타 처리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제부터 경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발걸음이 가볍다. 온몸이 경쾌하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핏줄이 울끈울끈하는 게 느껴질 정도로 예민해졌다. 극도의 흥분이다. 이게 좋은 쪽이어서 참 다행이지.
[다저스. 타순이 좋지는 않습니다. 8번 타자 크리스 테일러부터 시작합니다.]
크리스 테일러의 머릿속에는 어떤 모습이 남이 있을까? 아마 지난 이닝, 자신의 앞으로 굴러왔던 강한 타구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서 두 점을 빼앗아 간 그 타구 말이다.
테일러는 분명히 잘했다. 멋진 수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이어의 그 타구가 두 점을 추가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결코 좋은 이미지가 아니라는 소리지.’
지혁은 테일러의 스윙이 무거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자신의 손으로 타구를 처리해야 했으니, 자신의 송구로 주자를 잡아내지 못했으니. 그게 테일러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부정적인 이미지는 이미 뇌리에 각인이 되었을 터다.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빠른 패스트볼 두 개로 녀석을 궁지에 몰아넣고, 마지막에 94마일에 달하는 고속 싱커로 타이밍을 빼앗았다. 정석에 가까운 조합이었고 결과도 그랬다.
[유격수 앞으로 힘없이 흐릅니다. 선두 타자 출루에 실패하는 다저스. 인디언스의 상황이 갈수록 좋아집니다. 자, 9번. 대타가 나옵니다. 오스틴 반스로군요.]
로버츠는 시리즈 내내 지혁과 상대하지 않았던 타자를 내면서 지혁을 흔들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지혁이 반스를 상대하지 않은 만큼 반스도 지혁을 상대하지 못했다.
[파울 지역에 높이 뜨고 맙니다. 포수 멘데스가 마스크를 벗고 기다립니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안정적으로 잡아냅니다. 투아웃! 열다섯 타자 연속 범타입니다. 오늘 다저스, 문에게 완전히 틀어 막혔습니다. 이 분위기를 바꾸지 않는다면 월드시리즈 우승은 물 건너가겠어요!]
6회의 마지막 타자는 저스틴 터너. 지혁은 왜인지 모를 예감에 휩싸였다. 프랑코나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타자가 지혁의 마지막 타자일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모든 힘을 다 끌어냈다. 그뿐이었다.
[삼진! 헛스윙 삼진으로 터너를 처리하는 문! 1-2-3 again!]
해냈다. 6이닝을 책임지고 마운드를 내려오는 지혁은 엄청난 성취감에 사로잡혔다. 그가 해냈다. 모든 것을 뚫고, 지혁을 압박하던 모든 부담들을 전부 부숴 버렸다. 부숴 버려 냈다.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울컥하니 올라왔고, 콧잔등이 시큰시큰해졌다.
“오-케이이이이!”
마운드를 내려와 더그아웃 벤치 앞에 서서 지혁은 사자후를 내질렀다. 온몸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이렇게라도 발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지혁의 사자후를 이어받은 클리블랜드의 선수들도 모두 다 같이 소리를 질러 댔다.
***
[7회. 클리블랜드는 앤드류 밀러를 올렸습니다. 문을 내렸습니다.]
[1차전, 4차전, 7차전을 던졌죠. 체력적으로는 진작에 한계가 왔을 겁니다. 프랑코나 감독이 빠르게 움직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7회부터의 마운드는 밀러의 몫이었다. 지혁은 눈곱만큼도 불만을 갖지 않았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문자 그대로 이상적인 선택이었다. 지혁은 지금 자칫했다간 이성을 잃을 만큼 흥분해 있었다. 아드레날린이 그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건 굳이 지혁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었다. 벤치에 남이 있는 모든 선수들이 안절부절해서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슬라이더를 따라가지 못하고 헛 칩니다! 삼진으로 물러나는 야스마니 그랜달.]
[몸 쪽! 패스트볼에 루킹 삼진! 강하게 붙여 넣었습니다!]
[헛스윙 삼진! 코디 벨린저를 공 네 개로 처리하는 앤드류 밀러!]
이제는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가 눈앞에 만질 수 있을 만큼 성큼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
“제발! 제발!”
모두가 이성을 잃었다. 지혁도 마찬가지였다. 의미도 없는 아무 말이라도 해야지만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손을 계속 움직이고, 다리를 떨고, 발을 구르고, 모자를 벗었다 쓰고, 장갑을 벗었다 끼우고, 음료수를 마시려고 컵을 집었다가 내려놓고, 야구공을 주워 손에서 굴리다가 휙 내팽개치고.
[뜹니다! 센터 뒤로! 중견수 뒤로! 펜스 근처…… 잡아냅니다! 펄쩍 뛰며 펜스에 부딪힌 브래들리 짐머! 그가 잡았습니다! 이걸로 남은 아웃 카운트는 하나! 70년의 저주가 풀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중견수 짐머는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은 가장 어린 선수임에도 흥분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니, 아니다. 공을 잡은 뒤 모자를 벗어 하늘로 던져 버리며 미친 사람처럼 펄쩍펄쩍 뛰는 걸 보니 저 녀석도 엄청나게 흥분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넘어가려던 공을 잡아냈다. 중요한 건 그거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건, 아웃 카운트가 단 한 개 남았다는 것이다. 모두가 더그아웃 난간을 넘어갈 것처럼 그 위에 올라탔다. 몇몇은 더그아웃 앞에 나와서 육상 선수들이 준비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쭈그리고 앉았다.
[LA의 한복판, 다저 스타디움. 이곳에서 역사가 쓰이려 하고 있습니다. 타석에는 코리 시거. 오, 화면에 클리블랜드의 안토네티 단장이 나오네요. 그가 울먹이고 있습니다. 눈시울이 이미 빨갛습니다.]
[저 옆에 있는 건 르브론 제임스인가요, 설마?]
[아하, 그렇습니다. 르브론도 와 있습니다. 클리블랜드를 두 번이나 떠났지만, 그 역시 오하이오 출신이죠. 역사를 직접 바라보려 이곳에 왔군요.]
이제 LA의 밤은 완전히 어둠으로 물들었다. 캄캄한 밤하늘을 채우는 눈부신 야구장의 조명만이 번쩍거린다. 그리고 스포트라이트 핀의 한복판에 서 있는 클리블랜드의 마무리 투수 코디 앨런은 깊은 숨을 몰아쉬듯 어깨를 여러 번 들썩이고는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던졌습니다! 휘두릅니다! 우익수 쪽으로 뻗어 갑니다!]
눈부신 조명 속에 들어갔던 하얀 공이 이내 어두컴컴한 밤하늘에 나타났다. 혜성처럼 긴 꼬리를 그리던 공은 정점에 올랐다가,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서서히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공이 떨어지는 순간 많은 클리블랜드 인디언들의 눈에서 눈물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브랜든 가이어!]
우익수 가이어가 침착하게 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마침내 떨어지는 공을 움켜쥐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하얗게 되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2018! 월드시리즈! 챔피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이상하게도, 분명히 다리가 풀렸는데, 지혁은 마운드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데 뭉쳐 있는 선수들 속에 빠져들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면서, 서로가 서로의 뒤통수를 때려 대면서. 누군가 뒤에서 끼얹은 샴페인을 잔뜩 뒤집어쓰면서. 이제는 외칠 수 있었다.
저주가 끝났다.
지혁의 꿈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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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modified date: 2019.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