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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1장 (1/71)

폐후의 귀환

1권

1장

초여름, 저녁 무렵에 비가 한바탕 퍼부었다. 어두침침한 하늘 아래 장중한 대기가 궁전 전체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항상 금빛으로 찬란한 궁전이 어두운 먹장구름에 덮여 그 광채를 잃었고, 그 탓에 궁전은 거대한 감옥처럼 보였다.

냉궁. 아주 낡고 얇은 휘장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무더운 날씨임에도 냉궁 안에는 한기가 흘렀다.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의상과 장신구는 방금 한차례 대참사를 겪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 한복판에 꿇어앉은 심묘가 고개를 들어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흔도 채 되지 않았으나 미간이 깊게 파여 노부인처럼 늙어 보였다. 두 눈은 오랜 세월 말라버린 깊은 우물처럼 바닥이 보이지 않는 원망만을 담고 있었다.

“마마, 자……. 소인은 일을 마치고 다시 보고드리러 가야 한단 말입니다.”

태감이 새하얀 비단을 여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말투에는 조급함이 가득했다.

심묘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그녀는 잠시 침묵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친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소이자, 내가 널 발탁했을 때 넌 공공 곁의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태감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약간 치켜들었다.

“마마, 지금은 이전과는 다릅니다.”

“지금은 이전과는 다르다라…….”

따라서 웅얼거린 심묘가 머리를 들고 크게 웃었다.

“지금은 이전과 다르다니! 대단하구나!”

지금은 이전과 다르기에, 공손하기 그지없었던 신하와 노복들이 지금 이렇듯 그녀를 하대하는 것이리라. 아니, 어차피 곧 흰 비단 끈에 목이 졸려 먼지가 될 처지에 대우를 따질 필요가 있으랴.

그러나 과연 어디서부터가 이전이고, 어디서부터가 지금일까? 미 부인이 입궁한 후인가, 태자가 폐위당한 후인가. 웃음이 나왔다. 아니면 완유 공주가 화친혼을 이유로 먼 곳으로 가는 길에서 비참하게 죽을 때 시작된 것인가.

어쩌면 심묘 자신이 진국에서 5년 동안 인질 생활을 한 후 돌아왔을 때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간 동안 부수의는 이 나라의 강산을 뒤집어엎으면서 모든 문신과 무신의 낯빛 또한 바꾸어버렸다. 존귀한 황후는 폐후가 되었다.

‘지금은 이전과는 다릅니다.’라니……. 참으로 대단했다.

그때 냉궁 문이 삐꺽 열리고 용무늬를 수놓은 푸른 장화가 심묘 앞에 멈춰 섰다. 그 위로 밝은 황색 장포가 보였다. 황제, 부수의였다.

“짐을 20년 동안 따른 정을 봐서 네가 온전한 시체로 남을 수 있도록 허락하마. 짐의 은혜에 감사하거라.”

심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부수의의 얼굴을, 한 폭의 그림에서 나온 듯 세상과 동떨어진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세월이 그의 얼굴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아 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늠름하고 출중했다.

부수의는 정당한 명분을 가진 황제이자 명군이었다. 심묘가 20년간 맹목적으로 사랑한 남자이기도 했다. 갖은 곤경 속에서 목숨을 내놓고 도운 남편이건만, 지금 그는 그녀에게 ‘온전한 시체로 남을 수 있도록 베푼 은혜’에 감사하라 말하고 있었다.

“어째서죠?”

심묘가 힘겹게 입을 뗐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째서 심가 전체를 멸족하려 하십니까?”

심묘는 이를 악물고 다시 물었다.

20년 전, 부수의는 선황 문혜제의 아홉 번째 황자 정왕(定王)이었다. 첫 번째 황자가 태자로 내정되었으나 워낙 몸이 약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형제간에 ‘황위 쟁탈전’이라는 피바람을 몰고 왔다. 부수의 역시 용포를 입기까지 줄곧 가시밭길을 걸었다.

심묘는 부수의의 용모와 재능에 반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와 혼인했다. 그녀는 전심전력으로 부수의를 내조했고, 조정의 일에도 직접 참여했다. 부수의가 제왕의 자리에 올라 천하를 호령하게 된 날, 그녀는 육궁의 주인인 황후가 되었다. 부수의와 함께 피 흘린 끝에 쟁취한 자리이니 스스로를 가장 영예로운 황후라고 여겼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다.

황자의 반란이 막 평정되어 나라의 기반이 확실치 않을 때, 이웃 나라 흉노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국경을 침범해왔다. 그녀는 진국의 병사를 빌리기 위해 스스로 인질이 되었다. 당시 그녀는 출산 직후 몸조리를 하던 중이었다.

“짐이 직접 널 데려오겠노라.”

부수의는 분명 그렇게 약조했으나…….

5년 후 그녀가 명제로 돌아왔을 때, 부수의의 총애는 아름답고 재치가 뛰어난 미 부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미 부인은 부수의가 친히 동쪽 정벌에 나섰을 때 만난 신하의 딸로, 재치가 있다 하여 궁으로 데려온 여인이었다. 얼마 후 그녀는 황자 부성을 낳았고, 부성은 깊은 성총을 받았다.

그에 반해 심묘의 아들인 부명은 태자임에도 부황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부수의는 조정 백관 앞에서 “부명은 성격이 너무 여리고, 부성이 날 닮았다.”라고 공공연히 말하곤 했다. 태자를 바꾸겠다는 의도가 명백했다.

부수의의 노골적인 편애에 심묘는 미 부인에게 큰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심묘와 미 부인은 궁중에서 10년 동안 첨예하게 대립했고, 미 부인은 심묘에 맞서 여러 번 승리를 거머쥐었다.

미 부인은 부수의를 부추겨 심묘의 딸 완유 공주를 흉노로 시집보내 버렸다. 황제의 적출인 공주가 오랑캐의 배필이 된다는 것도 당혹스러운 일이었지만, 더욱 당혹스러운 일은 따로 있었다. 완유 공주는 가는 도중 갑자기 병을 얻어 명을 달리했고 그 즉시 화장되었다. 모두 숨겨진 배후가 있음을 알았으나, 어미인 심묘조차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

부수의는 심가가 모반을 꾀했으니 태자를 폐하고 그 스스로 목을 잘라 사죄하라는 성지를 내렸다. 폐후가 된 심묘에게 남은 것이라곤 자신의 목을 조를 흰 비단 끈뿐이었다.

그녀는 재차 물었다.

“폐하, 양심이란 것이 있긴 하십니까? 전 폐하와 20여 년간 부부로 살면서 폐하께 누가 될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되려 폐하께서 제위에 오르실 수 있도록 심가가 앞장서 폐하를 도왔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흉노가 침범하여 폐하가 출정하실 때 전 폐하를 대신해 항복 문서를 썼죠. 폐하의 편으로 삼고자 하신 대신에게는 제가 직접 무릎을 꿇고 도와달라 부탁했습니다. 진국에 인질로 가서 온갖 고초에 시달리기도 했지요. 그러나 폐하는 그런 저에게 무슨 보답을 하셨나요? 미 부인이 화친이라는 미명하에 완유를 흉노로 보내 완유는 그 어린 나이에 병사했어요. 폐하께서 부성을 총애하시고 부명은 냉대하시는 것을 온 조정이 다 압니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폐하께선 이제 제 가문마저 역사에서 지우려 드시는군요. 죽음이 눈앞에 닥쳤으니 꼭 알아야겠습니다. 폐하, 어째서인가요?”

부수의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으나 곧 표정을 지웠다.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그는 냉혹한 조각상 같았다.

“심묘, 부황께서 살아계실 때 몇몇 대세가에 어떻게 대처할지 짐과 상의한 적이 있었다. 부황께서는 심가의 공로가 높아 황실을 가릴 지경이니 오래 둘 수 없다 하셨지만, 짐이 부황께 말씀드려 심가를 20년 넘게 존속하게 해준 것이야. 하지만 더는 은혜를 베풀 수 없군.”

심묘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러나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이미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너무 많이 들은 탓이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한 글자씩 힘주어 물었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에 심가를 그대로 두셨습니까? 폐하께서 인자하시기 때문도 아니고, 은혜를 베푸신 것도 아니죠. 폐하는 심가의 병권을 이용해 황위 다툼의 저울추를 자신에게 기울이려 하셨을 뿐이지 않습니까? 토사구팽이라더니. 강산이 안정되었다고 이런 배은망덕이 있을 수 있습니까. 폐하, 정말 흉악하십니다!”

“심묘!”

부수의가 노하여 큰소리쳤다. 아픈 곳을 찔린 듯했으나 곧 차갑게 대꾸했다.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거라.”

부수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나가버렸다.

심묘는 바닥에 엎드렸다. 주먹 쥔 양손이 벌벌 떨렸다. 그녀가 평생에 걸쳐 사랑한 남자였다. 그의 총애를 얻기 위해 미 부인과 그토록 다퉜는데, 저 남자의 마음에 단 한 번도 그녀가 없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그동안 나눈 정담과 귓속말은 모두 연기이자 우스갯소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심묘는 선혈을 한 움큼 토했다.

* * *

“마마,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꽤 난처해 보이시는데.”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연꽃 같은 얼굴, 버드나무 같은 허리, 선녀를 능가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담황색 경장 차림으로 서 있었다. 최후의 승리를 만끽하는 미 부인이었다.

미 부인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고, 그 뒤로 두 여인이 따라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들. 심묘는 머리를 심하게 맞은 듯 멍해졌다.

“심청 언니, 심모 언니!”

심청과 심모는 둘째 숙부 이방과 셋째 숙부 삼방의 딸이자 심묘의 사촌 언니였다. 심묘는 그들이 어째서 궁에 있는지 의아했다.

심모가 입술을 가리고 웃었다.

“폐하께서 우리 자매를 입궁시키셨어. 심묘야, 놀라지 마. 요 몇 년간 네가 우리를 위해 중매를 섰지만, 전혀 필요 없었단다. 폐하께서 매우 잘해주시거든.”

혼란스러운 와중에 심묘는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심묘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언, 언니들이 늦도록 시집가지 않은 건, 모두 오늘을 위해서였어?”

심청이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그건 아니야. 당초 폐하께서는 대방 몰래 이방, 삼방과 맹약을 맺으셨어. 네가 폐하께 시집가기만 하면 언젠가 우리 자매도 함께 궁에 들 수 있을 거라고.”

심묘가 부수의에게 시집가는 데 이방과 삼방도 적지 않은 힘을 보탰다. 애초에 심묘가 부수의를 사모하게 된 것도 이방과 삼방 본처들의 역할이 컸다. 그녀들은 심묘의 곁에서 종일 부수의가 뛰어난 사람이라 말하며 자연스럽게 그녀가 호감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방과 삼방이 못된 생각을 품고 오늘 같은 날을 계속해서 기다려온 것일까.

심청은 심묘가 혹여나 못 알아들을까 걱정스럽다는 듯 이어서 말했다.

“폐하는 풍채가 출중하셔서 우리 자매도 사모한 지 오래되었어. 하지만 백부의 병권을 등에 업은 네가 먼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지. 너는 지금까지 많은 복을 누렸으니 억울할 게 없잖아?”

심묘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심청 언니! 폐하가 심가를 멸망시키려 하시는데, 두 사람이 입궁한들 이방과 삼방이 무사할 거라고 생각해?”

심모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럼. 이방과 삼방은 무사할 거야. 우리는 대방의 반란 증좌를 캐낸 일등 공신이거든. 모두 이방과 삼방이 나라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가족의 연까지 끊어가며 해낸 일이야. 심묘야, 폐하께서는 우리 두 방을 대관으로 봉하실 거야.”

심묘는 깜짝 놀라 자신의 두 사촌 언니를 바라보았다.

“언니들 미쳤어? 심가가 위험해지면 이방과 삼방도 무사하지 못해. 심가는 한 가족이야. 폐하께서 심가를 멸하려 하시는데, 어리석게도 자기 사람을 모함하다니…….”

심청이 냉소했다.

“자기 사람이라고? 심묘야, 우리는 대방을 우리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아. 다시 말하지만 넌 너무 많이 누렸어. 태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폐서인이고, 공주는 이미 불귀객이 되었잖아. 곧 심가도 그렇게 되겠지. 너도 어서 저승으로 가 그들을 만나는 게 좋지 않겠어?”

미 부인이 느릿느릿 앞으로 걸어 나와 빙긋 미소 지었다.

“마마, 강산이 안정되었으니 옛 황후도 물러나셔야지요.”

10년을 맞서왔지만 심묘는 엉망진창으로 패배했다는 걸 받아들여야만 했다. 너무나도 처참한 패배. 자식들을 잃었고 가문은 사라졌으며 자신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심묘는 분개해 소리질렀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는 결국 비에 불과해!”

“이 공공, 손을 쓰시게.”

미 부인이 소이자에게 눈짓했다. 그가 비대한 몸을 움직여 심묘에게 다가왔다. 그는 한 손으로 심묘의 목을 단단히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흰 비단 끈으로 그녀의 목을 옭아맸다. 힘써 조르니 뼈가 부러지며 섬뜩한 소리가 났다.

바닥에서 발버둥치던 심묘는 즉시 축 늘어졌다. 그러나 그 최후의 순간 그녀는 두 눈을 크게 치켜뜨면서 소리 없이 독하게 맹세했다.

아들, 딸, 부모, 형제, 하인. 전부 억울하게 죽었다.

부수의, 미 부인, 심청, 심모가 나와 내 사람들을 해쳤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그들의 피로 이 억울한 한을 씻으리라.

태양은 지지 않는다지만, 내 반드시 너희의 빛을 꺼뜨려 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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