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25/71)

2장

검은색과 흰색이 분명하게 대조되는 대저택.

푸른빛 석판과 주황빛 기둥, 복잡한 해당화 무늬가 새겨진 난간이 그 위엄을 더했다. 한밤에 내린 비로 진주 같은 빗방울이 처마에서 굴러떨어져 흙으로 스며들었다.

방 안 탁자 위에는 작은 짐승이 세밀하게 새겨진 향로가 올려져 있었다. 향로에서 나는 향기로운 수목 향이 초겨울 냄새를 보다 담백하게 만들었다. 침상 위 네 모퉁이에는 장식용 술이 달린 색채가 아름다운 향낭이 걸려 있고, 키 큰 여종 두 명이 침상에 누워 있는 이를 위해 조심스레 부채질하고 있었다.

“차가운 날씨에 물에 빠지신 탓에 열이 너무 오르셨어. 꼬박 하룻밤을 주무셨으니 곧 깨어나실 거라고 했는데 어째서 기미조차 보이지 않을까? 게다가 반 시진이 지났는데 의원은 왜 아직 오지 않는 거지?”

청색 옷의 여종 곡우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며 침상 위로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둘째 마님 쪽을 잘 살펴야겠어. 이런 추악한 일이 벌어졌는데 모두 쉬쉬하다니.”

자색 옷을 입은 경칩 역시 언짢음을 드러냈다.

“주인어른과 주인마님께서 정경성에 안 계신데 큰공자님까지 자리를 비우시다니. 의원을 찾으러 간 백로와 상강이 여태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노부인께서 가지 말라고 하신 게 아닐까? 노부인께서는 동원(東院)을 편애하시니까. 아가씨를 막다른 곳으로 몰아가시는 거야! 안 되겠다. 나가봐야겠어.”

그때, 침상에 누운 사람이 희미하게나마 소리를 냈다.

“아, 아가씨, 깨셨네요!”

밖으로 나가려던 경칩이 기뻐하며 얼른 침상 쪽으로 달려갔다.

심묘가 이마를 문지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경칩…….”

심묘는 작게 웅얼거렸다.

“여기 있습니다.”

경칩이 웃으며 심묘의 손을 잡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온종일 주무셨어요. 보아하니 열은 물러간 듯한데 도통 깨어나시질 않아서, 이리저리 궁리 끝에 다시 의원을 찾아가려 했었다고요.”

“아가씨, 물 좀 드시겠어요?”

곡우는 따뜻한 차를 한 잔 따라 심묘에게 건넸다.

심묘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눈앞의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전생에서 그녀에게는 네 명의 일급 여종이 있었다. 경칩, 곡우, 백로, 상강. 하나같이 총명하고 영민한 여종들이었으나 애석하게도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곡우는 심묘가 진국에 인질로 있을 때, 심묘가 진국 태자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다가 그의 손에 죽었다. 백로는 흉노와 화친을 맺으러 떠난 심묘의 딸 완유 공주를 따라나섰다가 객사했고, 상강은 심묘와 미 부인의 내궁 암투에 휘말려 죽고 말았다.

개중 용모가 제일 아름다운 경칩은 부수의가 제위에 오르는 것을 돕기 위해 권세 있는 신하를 포섭하고자 기꺼이 그 신하의 첩이 되었다. 하지만 경칩 역시 그 신하의 본처가 꾸며낸 구실에 맞아 죽었다. 경칩이 죽었다는 소식에 심묘는 크게 상심했다. 그때 그녀는 임신 중이었는데,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슬퍼하다 하마터면 배 속의 아이마저 잃을 뻔했다.

그런데 그 경칩이 지금 온전한 몸으로 자신 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그림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곡우도 곁에서 따라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두 여종 모두 어린 나이로 보여 심묘는 얼떨떨해졌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죽기 전 환각인가 본데, 너무 사실 같은걸.”

“아가씨, 무슨 말씀이세요? 열 때문에 정신이 혼미한 건 아니시죠?”

곡우가 찻잔을 옆에 놔두고 손을 내밀어 심묘의 이마를 짚었다.

이마를 짚은 손은 차가웠지만 손길은 따뜻했고, 무엇보다 진짜 같았다. 심묘는 황급히 눈을 떴다. 그녀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희고 보드라우며 호리호리했다. 귀엽게 생긴 둥근 손톱은 정연하고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부귀한 신분을 대변하는 손.

이 손은 그녀의 손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은 부수의를 도와 조정 일을 처리하고 시국을 연구하면서 거칠어졌다. 붓으로 한 권 한 권 장부를 써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손은 차츰 그 아름다움을 잃었다. 그러나 이는 앞으로 겪을 고난의 시작에 불과했다.

진국에 있을 때는 여종처럼 일하기도 했다. 궁중에서는 부명과 완유를 위해 싸웠고, 냉궁에서는 의복을 빨고 풀을 먹이는 등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한 탓에 굳은살이 잔뜩 박였다. 관절이 붓고 검게 변하기까지 했으니 이렇게 여릴 리 없었다.

“거울을 가져오너라.”

심묘의 목소리는 아직 아주 약했으나 말투는 단호했다.

곡우와 경칩은 어리둥절했지만 재빨리 거울을 가져와 심묘에게 쥐여주었다.

거울에 비친 소녀의 얼굴은 둥글었다. 볼록한 이마, 약간 붉은 기가 감도는 크고 둥근 눈, 매끄러운 코, 작은 입. 여전히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름답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귀여운 상인 데다 얌전하고 수줍어 보임에도 영리함이 깃들어 있었다. 언젠가 황실 사람에게 ‘남편을 출세시킬 얼굴’이라 칭찬을 들은 용모였다.

들려 있던 거울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거울이 깨지는 소리는 심묘의 마음속에 거대한 파도를 일으켰다. 그녀는 매섭게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계속 흘렀다.

하늘이 그녀를 저버리지 않았다! 돌아온 것이다!

곡우와 경칩은 심묘의 눈물에 깜짝 놀랐다. 곡우는 혹여나 심묘가 다칠세라 얼른 바닥의 거울 조각을 치웠다.

“아가씨, 조각을 밟으실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아가씨, 왜 우세요?”

경칩은 부리나케 수건을 들고 와 심묘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심묘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돌아왔어…….”

심묘가 다급히 경칩에게 물었다.

“지금이 몇 년이지?”

경칩은 심묘의 낯선 모습이 조금 두려웠으나 순순히 대답했다.

“명제 68년이요. 아가씨, 왜 그러세요? 역시 몸이 불편하신 거죠?”

“명제 68년, 명제 68년…….”

심묘는 눈을 크게 떴다. 명제 68년은 첫눈에 반한 부수의에게 맹목적으로 빠져든 해였다. 그리고 그에게 시집보내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부친을 협박했던 바로 그해다!

그때, 불안해진 곡우가 심묘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아가씨, 왜 저희를 놀리고 그러세요. 열은 내려갔는데, 정신이 조금 분명치 않은 건 아니시죠? 아무튼, 셋째 아가씨는 너무 장난이 심하세요. 이건 아가씨 목숨을…….”

전생의 심묘는 많은 시간 부수의를 위해 뛰어다녔다. 심부에서의 날들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은 부수의와 관련된 일이었기에 모두 다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이방의 적녀 심청이 부수의가 동원의 이방과 삼방을 방문할 거라며, 심묘에게 남몰래 부수의를 보러 가자고 꼬드겼다. 심묘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기쁜 마음으로 심청을 따라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화원에 도착하자마자 심청은 연못 옆의 인공산에서 심묘를 밀었다.

겨우 연못에서 건져진 심묘는 물독에 빠진 생쥐마냥 형편없는 꼴이었다. 그 모습에 부수의와 함께 온 관원은 심부의 웃음거리를 보았다고 비아냥거렸다. 심묘가 부수의를 사모한다는 이야기가 이미 반년 전에 온 정경성에 퍼진 마당에 한 번 더 웃음거리가 되고 만 것이었다.

심묘는 심청이 자신을 연못으로 밀었다고 강하게 항변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았다. 억울했지만 심 노부인이 불당에서 근신하라며 외출 금지를 명했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중추절이 다가왔지만 심묘는 여전히 갇혀 있는 신세였다. 그때 삼방의 적녀 심모가 몰래 그녀를 풀어주었다. 그녀가 자매를 걱정하는 어진 마음에서 도운 건 아니었다. 심모는 심묘를 매년 안북당에서 열리는 국화연회에 데려가 더 큰 웃음거리로 만들 심산이었다.

심묘는 눈을 감았다.

심가는 여러 대에 걸쳐 장군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게다가 장성한 형제들이 분가하지 않고 화목하게 함께 지내니 그 점 역시 수도 정경성 내에서 심가의 이름을 드높였다.

형제가 셋이니 방도 셋이었다. 대방 심신, 바로 심묘의 부친으로 심 노장군의 본처가 낳은 첫째 아들이다. 노장군은 본처가 중년에 병사하자 후처를 얻었다. 후처는 둘째 심귀와 셋째 심만을 낳았고 노장군이 눈감은 후 심 노부인이 되었다. 그 자식들은 성장해 지금의 이방과 삼방이 되었다.

심신 대에 이르러 대방이 병권을 쥐자 이방과 삼방은 문관에 줄을 대었다. 심신은 전쟁터에 나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부인 나설안 역시 남편을 따라 전쟁터로 향했기에 노부인과 이방과 삼방의 본처들이 심묘를 가르쳤다. 조모와 숙모들이 직접 교육했음에도 심묘는 배운 것도 별로 없고 재주도 딱히 없는 머저리로 컸다. 심지어 체면을 모르고 사모하는 남자에게 달라붙었으니 정경성 안에서 ‘유명한’ 규수였다.

심묘는 숙모들과 노부인이 자신만 특별히 여겨준다고 생각했었다. 심모와 심청에게는 규율과 예의를 엄격히 가르치면서 그녀에게는 전부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심묘를 자만에 빠지게 해 장래를 망쳐놓으려는 저속한 수단에 불과했다.

사실 그들은 심묘의 부모와 형제가 곁에 없다고 심묘를 깔보았다. 마주하는 얼굴과 뒤에서 보이는 얼굴이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심신과 나설안은 매해 연말 심부로 돌아와 딸이 나날이 장난만 심해지고 무능해지니 그 앞날을 걱정했다.

심묘는 노부인과 이방, 삼방의 본처들이 벌이는 만행을 그저 두고 볼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그때, 바깥에서 뜰을 청소하던 여종이 들어왔다.

“아가씨, 넷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경칩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몸이 아직 낫지도 않으셨는데 이렇게 불쑥 찾아오시다니?”

곡우가 경칩의 팔을 살짝 쳤다. 그러나 곡우도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심묘는 두 사람을 슬쩍 쳐다보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 곁의 일급 여종 넷은 모두 심신과 나설안이 직접 골라 가르쳐서 충성스럽고 영리했다. 심부가 어떤 상황인지, 이방과 삼방이 어떤 계략을 꾸미고 있는지 어린 심묘는 알지 못했으나 낌새를 알아챈 여종들은 어린 주인을 걱정했다.

앳된 얼굴의 소녀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국화무늬가 수놓인 엷은 분홍색 윗옷과 담청색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용모 자체가 수려하고 고아한 데다 피부가 희고 깨끗해 누구나 미인이라고 할 만한 소녀였다. 무엇보다 온몸에 책 냄새가 짙게 배어 지체 높은 신분임이 잘 드러났다. 그녀는 심묘를 보자 빠른 걸음으로 침상에 다가왔다.

그녀가 걱정스레 말했다.

“몸은 괜찮아? 네가 물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몰라. 당장에라도 찾아오고 싶었지만 옥요원의 사람이 네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해서 감히 방해할 수 없었어. 지금 네가 깨어났단 말을 듣자마자 바로 온 거야.”

심묘는 눈앞의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심모였다.

심가에는 세 명의 적녀가 있었다. 이방의 적녀 심청은 적출 셋째로 명랑하고 대범하기로, 삼방의 적녀 심모는 적출 넷째로 재주와 학식이 깊기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에 비해 적출 다섯째인 대방의 적녀 심묘는 재능도 없고 나약하지만, 성격은 순박한 편이라는 평을 들었다. 사람들은 얌전하고 정숙하다고 돌려 말했으나 사실상 아무 장점이 없다고 흉을 본 것이다. 한마디로 심묘는 심가에서 가장 상류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딸이었다.

전생의 심묘는 출가 전까지 심모와 관계가 가장 좋았다. 심모가 오랫동안 자신을 도와 좋은 의견을 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 심묘는 심모의 의견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분간조차 하지 못할 만큼 미욱했다. 그저 사촌 언니가 성심껏 자신을 도와준다는 사실에 감격할 뿐이었다.

오늘 심모가 찾아온 것은 심청을 너그러이 용서하라고 말하기 위함일 터였다.

“심묘야, 그날은 심청 언니가 실수한 거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긴 했지만, 그래도 네가 심청 언니를 한 번만 용서해줘. 심청 언니도 네가 열이 났다는 얘기를 듣고 대단히 자책했어. 심묘야, 다 나으면 심청 언니를 용서해주지 않겠니? 아무렴 심청 언니가 일부러 너를 정왕 전하 앞에서 망신을 주려 했겠어.”

과연 생각했던 대로다. 그녀 말의 시비는 둘째 치더라도, 심모는 굳이 부수의를 언급했다.

정경성 내 사람들은 심묘가 부수의를 무척 흠모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평소엔 온순하여 조금 억울하더라도 덮고 넘어가는 편이나, 부수의와 관련된 경우에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러니 늘 심묘 곁에 있는 심모는 당연히 그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심모가 부수의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심묘는 심청을 용서했을 것이다. 심모가 부수의의 이름을 입에 담은 건 심묘와 심청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

그때도 심묘가 막 깨어나자마자 심모가 달려왔었다. 그녀는 심청을 너그러이 용서하라 하면서 오히려 심묘가 벌컥 성을 내게 부추겼다. 평소 순종적인 성격의 심묘가 노부인 앞에서 심청이 자신을 물에 빠뜨렸다고 따지고 들게 덫을 놓은 것이다.

심청은 당연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주위 사람들도 한입으로 심청이 심묘를 미는 것을 보지 못했노라 말했다. 평소 이방과 삼방을 두둔하던 노부인은 심묘를 엄하게 꾸짖고, ‘적출 언니를 터무니없이 모독했을뿐더러 자애도 갖추지 못했다’라는 이유로 외출 금지를 명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심가 자매들이 다니는 학당 광문당에도 퍼져, 심묘는 학우들 사이에서도 웃음거리가 되었다. 부끄러운 나머지 심묘는 그 후 광문당에 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정경성 안 지위 높은 여인들의 모임에서 그녀는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 당시 심묘는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속이기 위해 꾸며낸 거짓된 말과 행동만을 자신의 세계로 삼았다. 그녀는 스스로 선량하고 얌전하며 덕이 있다고 여겼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연약하고 무지하게 비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또한 부수의를 사모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용감하고 솔직하다 여길 뿐, 다른 이들이 그녀가 염치를 모른다며 혀를 내두르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이렇듯 심부 사람들이 심묘가 어리숙하게 크도록 교묘하게 가르쳤기에 그녀의 생활은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었다. 부수의에게 시집가는 데는 어찌어찌 성공했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황실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흉보았다. 심지어는 미 부인과 비교하며 심묘가 아둔하고 무지하다고까지 헐뜯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이었다.

심묘의 의중을 알 도리가 없는 심모는 걱정스럽다는 듯 심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검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입가에 살며시 웃음기가 어리는 것까진 숨기지 못했다. 심모는 심묘를 다 안다고 자부했기에 이번에도 부수의를 거론하기만 하면 심묘가 바로 참을성을 잃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기대했던 반응이 없자 심모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심묘를 쳐다보았다.

심묘는 미소 띤 얼굴로 심모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아주 창백하고 입술도 말라 있었지만, 새까만 포도 같은 눈은 생기가 돌아 무척 아름다웠다. 심묘는 원래 눈이 가장 아름다웠다. 크고 둥글어서 막 태어난 강아지처럼 조심스럽고 온순했다. 그러나 평소 표정이 순박하여 총기를 느끼기는 어려웠다.

지금도 아름다움은 변함없었으나 눈빛은 매우 달랐다. 차가운 냉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순박하기는커녕 감정을 한 톨도 드러내지 않는 냉담한 눈. 높은 곳에서 사람을 굽어보는 보는 듯도 했고, 사람의 속을 다 꿰고 있는 듯도 했다.

심모는 깜짝 놀랐다. 형용할 수 없는 섬뜩함에 소름이 돋았다. 마주 앉은 심묘가 아둔한 동생이 아니라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처럼 보였다. 심묘가 이런 위압감을 풍기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으니 그 연유를 알 방법이 없었다.

심모는 자신이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하는 처지에 처했음을 아직 몰랐다. 눈앞의 심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황위 쟁탈, 전란, 내궁의 암투, 자식의 죽음, 멸문지화까지 모두 겪은 심묘이자 복수의 칼날을 갈며 다시 돌아온 심묘였다. 그녀는 또한 황제 다음으로 가장 존귀한 존재이기도 했다. 심묘는 바로 명제의 황후, 심 황후였다.

한참 시간이 지나 심묘가 이마를 더듬으며 작게 말할 때까지 심모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언니 말이 맞아. 이 일은 심청 언니와 관련이 없어. 내가 발을 헛디뎌서 빠진 거야.”

심모는 심묘가 이렇게 말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더욱 당혹스러웠으나, 이대로 심묘가 심청을 용서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심모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심묘야, 그렇다고 너무 참진 않아도 돼.”

“그렇게 억울할 일은 아니지 않아?”

심묘가 웃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사소한 일이야. 나 머리가 아직 어지러워. 오늘은 이만 쉬고 싶으니까 다른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조모와 함께 있을 때 말해.”

이에 심모는 말을 더 잇기가 어려워졌다. 심묘가 평소와 달리 자신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게 못내 의아했으나, 그저 부수의 앞에서 망신을 당한 일이 불만스러워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몇 마디를 더 나눈 후 심모는 방을 떠났다.

심모가 나가길 기다렸던 곡우가 그제야 말을 꺼냈다.

“우리 아가씨는 물에 빠져 자칫 잘못되실 뻔했는데, 셋째 아가씨 대신 용서를 바란다며 오시다니요…….”

곡우는 말을 얼버무렸지만 심모의 의중이 좋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심모 언니는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한 거겠지.”

심묘가 담담히 말했다.

곡우는 심묘가 드디어 심모의 진면목을 똑똑히 보게 된 것 같아 기뻤다. 하지만 심묘의 말이 명확히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들어 심묘를 보았다. 심묘의 사랑스러운 용모가 유난히 차가우면서도 숙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곡우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우러러보았다.

심묘는 자신의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다. 손끝에 시선을 두며 심청이 왜 자신을 밀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곧 그 당시 심청에게 “연말에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면 정왕 전하께 시집갈 수 있게 해달라 부탁드릴 거야.”라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그때 심묘는 천진난만했고, 심청을 자기 사람이라 여겼기 여겼기에 그 앞에서 전혀 거리낌 없이 말하고 행동했다. 게다가 아버지 심신은 조정의 중신이었다. 그에게 딸을 황자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심묘는 심모가 그녀와 심청을 이간질하려 든 이유가 무엇일지도 고민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심모도 심청처럼 부수의를 사모하고 있는 것이다.

전생에서 심모와 심청은 심묘가 죽기 직전에야 자신들이 부수의를 오래전부터 사모했음을 알려줬다. 모든 것을 다 알고 보니 이때부터 이미 배신의 낌새가 있었다.

두 자매가 모두 부수의에게 매료되었다라……. 그 염원을 이뤄주지 않는다면 무척이나 섭섭할 테지. 심묘는 그녀들이 마음속으로 바라 마지않는 일을 반드시 성사시켜 주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의 피맺힌 원한을 지금부터 모조리 갚아줄 셈이었다.

* * *

초가을, 북방의 기러기가 광활한 하늘을 가르며 따듯한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여름 내내 뜰 안에 무성했던 나뭇잎이 말라 떨어지기 시작했고, 연못 안 색색의 물고기는 어딘가 생기를 잃은 듯해 대저택은 이전보다 적막해 보였다.

심묘는 새까만 긴 머리를 빗어 틀어 올린 다음 정교한 산호 비녀를 꽂았다. 구름과 거위가 수놓인 진홍색 옷은 섬세한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백로가 심묘의 어깨 위에 피풍의를 가볍게 걸쳐주었다.

“아가씨,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으셨어요.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모와 심청은 늘씬했지만, 심묘는 키가 작았다. 거기에 나약하고 겁 많은 성격과 동그란 얼굴이 더해져 실제 나이보다 몇 살은 더 어려 보였다. 그러나 오늘은 이전과는 분명 달라 보였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백로도 위화감을 느꼈다.

백옥 같은 심묘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어 조금 쌀쌀맞아 보였다. 생각에 잠긴 듯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은 단정하고 기품이 있었다. 온화한 듯 점잖았으나 대범한 느낌도 들어, 하룻밤 새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백로는 황당한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내젓곤 웃는 낯으로 심묘에게 말을 건넸다.

“아가씨, 무엇을 보고 계셔요?”

심묘는 아침식사를 한 후 줄곧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기러기들이 남쪽으로 날아가면서 서북쪽의 황무지를 지나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

심묘가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서북쪽 황무지는 아버지 심신의 주둔지로 어머니 나설안과 오라버니 심구가 함께 있는 곳이었다. 정경성은 이제야 서늘해졌지만, 지난달 어머니가 보내준 편지에는 서북쪽은 이미 풀이 시들고 간혹 눈도 내린다고 쓰여 있었다.

옆에 있던 상강이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주인어른과 주인마님이 그리우시군요. 연말에 주인어른 내외께서 돌아오셔서 아가씨께서 이렇게 많이 자란 것을 보면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심묘도 따라 웃었지만,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생 이맘때, 대장군 심신은 변방을 지키며 고작 일 년에 한 번 정도 수도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딸과 회포를 풀기도 전에 그녀는 부수의에게 시집을 보내달라며 염치없이 떼를 썼다. 심지어 딸은 시집갈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제 목숨을 걸고 협박했다. 그 상황이 달가울 리 만무했다.

더구나 심신의 눈에는 딸이 시집가고 싶어 하는 남자는 심가의 병력을 이용해 황위 쟁탈전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소인배에 불과했다. 애초에 심신은 형제끼리 칼을 겨누는 상황에 좋은 편, 나쁜 편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아예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사랑에 눈이 먼 심묘가 가문을 끌어들였고, 결국 심가는 멸문이라는 참혹한 결말을 맞이했다.

심묘는 눈을 감았다. 부모님이 돌아오시기까지 대략 반년이 남았다. 반년이라는 시간은 짧다면 짧지만, 운명을 바꾸기에 부족함 없는 긴 시간이기도 했다.

“아가씨, 아가씨?”

심묘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피풍의를 움켜쥔 손끝이 하얗게 변하자 당황한 백로가 심묘를 연거푸 불렀다.

백로의 목소리에 심묘가 다시 정신을 다잡았을 때, 곡우가 달려왔다.

“아가씨, 송경당에서 사람이 왔어요. 어서 오시랍니다.”

송경당은 심 노부인이 머무는 거처였다. 아침 일찍 노부인은 여종을 보내 심묘의 상태를 살펴보게 했다. 심묘가 그런대로 건강을 되찾은 듯 보이자 여종은 몸이 괜찮아졌으면 문안 오라는 노부인의 말을 전했다. 말이 좋아 문안이지, 사실상 엄하게 질책하기 위한 자리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심묘는 가볍게 비웃으며 피풍의를 제대로 걸쳤다.

“가자.”

* * *

심부 안에서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에 대한 평판과 대우는 극과 극이었다.

심 노장군은 살아생전 늘 서원의 빈 뜰에서 검무를 추고 권법을 연마했다. 노장군이 세상을 떠난 후, 심신은 그 뒤를 이어 무관의 길을 걸었고 심귀와 심만은 문신의 길을 선택했다. 심신이 자연스럽게 서원을 물려받으면서 심귀와 심만, 노부인은 서원보다 훨씬 넓은 동원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서원은 동원보다 조금 더 외진 곳에 있었다. 볕도 충분히 들지 않는 데다 크기가 동원의 반도 안 되어 확실히 지내기에 아주 훌륭하다고 찬미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심신은 자신의 부친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그 빈 뜰이 마음에 들었다. 또한 심신과 나설안은 모두 장군 가문 출신이어서 취향도 비슷했다. 흰 담장, 검은 기와, 꾸밈없는 순박함을 좋아했다. 화려하게 보수한 동원과 달리 서원은 소박한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전생의 심묘는 수수한 서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동원의 심청과 심모처럼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내심 서원을 택한 심신을 탓하고는 했는데, 지금은 그때의 무지를 마구 비웃어주고 싶었다.

서원의 집은 소박하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서원 곳곳에서 심신의 넓은 도량이 그대로 드러났다. 겉은 번지르르해도 따져보면 실상 안은 터무니없기만 한 동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심묘가 서원의 아름다움을 곱씹으며 긴 복도를 돌아 정성스럽게 가꾸어진 화원을 거치고서야 송경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인 집안의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함인지 입구는 운치 있게 꾸며져 있었다. 대나무 고견 편액은 고상했고, 구리 손잡이는 소나무와 학 모양으로 정교했다.

“심묘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심 노부인의 여종 희아가 고했고 심묘는 송경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송경당에는 모든 사람이 모인 듯 화기애애했다. 이방 본처 임완운과 삼방 본처 진약추가 노부인 아랫자리에 서 있었다. 노 부인 곁에는 간식 접시를 들고 있는 심청과 어린 남동생 심원백이 앉아 있었다.

다섯 살배기 심원백이 서툰 몸동작으로 간식을 집어 노부인의 입에 대어주자, 노부인은 기뻐하며 웃었다.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몸이 앞뒤로 크게 흔들렸다.

아무도 심묘의 등장을 주시하지 않을 때, 심모가 웃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왜 지금에야 온 거야? 원백이가 유락(乳酪, 치즈)을 다 먹어치울 뻔했잖아.”

심묘가 차분히 대답했다.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았거든. 두 걸음만 걸어도 현기증이 나서 좀 쉬어가며 오느라 늦었어.”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모는 심묘가 일부러 늦게 온 게 아니냐고 면박을 주고 싶었으나 우선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임완운이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심묘는 정말 몸이 약하구나. 요 며칠 의원을 두 번이나 불렀던데. 지금 보니 별 탈은 없는 듯해 다행이네.”

“몸은 괜찮으냐?”

노부인의 잠긴 듯 엄한 목소리에는 귀찮은 기색이 가득했다.

심묘는 고개를 들어 심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노부인의 얼굴에는 좀 전의 웃음기가 싹 가셔 있었다. 노부인은 거만하게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일흔의 나이이건만 여전히 꽉 끼는 얇은 치마와 목둘레를 녹색 옥송석 단추로 장식한 도홍색 상의를 입고 있었다. 흰 목련 자수를 놓아 장식한 머리띠를 했으며, 흰머리는 구름같이 쪽을 지어 옥진주로 장식했다.

그녀는 겉모습을 매우 중시하는 여인이었다. 전생의 심묘는 노부인이 가장 고귀한 여인이라 여겼다. 이 사람을 아주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여겼다니. 지금 와서는 우습기만 했다.

심신의 모친은 명문가 출신이지만 애석하게도 중년에 병사했다. 그 후 어느 지방을 지나가던 심 노장군은 지역 불량배에게서 가녀(歌女)를 구했고, 갈 곳이 없던 그녀는 심 노장군에게 자신을 첩으로 삼아 달라 간청했다. 심가에 들어온 그녀는 심귀와 심만을 낳으면서 본부인이 되었다.

일개 가녀에서 명문세가의 본부인이라는 지위와 명성을 얻었으나, 뼛속 깊이 밴 소인배 기질은 여전했다. 심묘는 전생에 노부인이 절름발이 예친왕에게 시집가라고 자신을 핍박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오로지 심청의 기반을 닦아주기 위해서였다.

심묘는 눈앞의 여인을 정면에서 응시했다. 젊은 시절 심 노부인은 갸름한 얼굴에 눈이 크고 생기가 도는 미인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든 그녀의 두꺼운 피부는 북 가죽 같았고, 눈은 사납게 치솟아 있었다. 운명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듯 노부인은 고운 색의 연지를 바르고 있었지만, 거친 피부와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추하게만 보였다.

심묘는 황후의 시선으로 무심히 노부인을 평가했지만, 겉으로는 겸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약을 먹어 많이 좋아졌습니다. 조모의 관심, 감사드립니다.”

그때 불현듯, 노부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불효한 것 같으니라고. 무릎을 꿇지 못할까!”

심 노부인의 불같은 일갈에도 심묘는 태연자약했다. 그에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신이 거의 일 년 내내 전쟁터에 있었기에 노부인이 심묘를 대신 키우다시피 했다. 노부인이 엄한 태도로 일관하기도 했고, 심묘 역시 성격이 유약하고 순박해 지금껏 노부인의 명에 반항한 적이 없었다. 그랬던 심묘가 지금은 노부인의 매서운 불호령에도 무릎을 꿇지 않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사람들은 부수의와 관련된 일이라 심묘가 대단한 용기를 낸 것 아닐까 속으로 생각했다.

“조모, 제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심묘가 조용히 말했다.

“심묘야, 혹시 열 때문에 정신이 없는 거야? 조모께서는 잠시 언짢으신 거지 정말 널 벌하시려는 게 아니야. 네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될 일인데, 어째서 고집을 부리는 거야?”

결국 더는 봐줄 수 없다는 듯 심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얼굴에 염려하는 기색이 언뜻 비쳤다. 자기 잘못을 알고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 한마디로, 심묘는 집안의 큰 어른에게 대든 불효막심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건방진 것! 천리를 무시하는구나!”

노부인은 허리를 곧게 펴며 다시금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가 찢어질 듯 날카로웠다. 유락을 먹는 데 온 정신이 팔렸던 심원백이 노부인의 고성에 놀라 유락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엉엉 크게 울기 시작했다.

“원백아, 울지 말거라.”

임완운이 얼른 아들을 품에 안아 달랬다. 그녀는 눈빛에 나무람을 가득 담아 심묘를 쳐다보았다.

“심묘야, 미쳤느냐? 누가 너에게 어른께 대들라고 가르쳤느냐?”

심묘는 임완운을 바라보았다. 임완운은 통통하면서 풍만한 몸매에 안색도 불그스름해 복스러운 인상을 풍겼다. 그녀는 온화하고 친절해 보였으며 평소 늘 웃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심 노부인 밑에서 온 집안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녀의 일 처리가 공정하고 분명하다며 존경을 표했다.

심묘도 예전에는 그렇게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심묘가 황후였을 시절, 혼수 문제로 정왕부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괄시당했는지 모른다. 모두 임완운 때문이었다.

공동 자금은 거의 쓰지 않고 대부분 심신의 재산으로 준비한 혼수가 정왕부에 도착했으나 그 수량이 많지 않았다. 임완운이 ‘공정함’을 핑계로 혼수 중에서 값어치 있는 물건을 차압하고 보내주지 않은 까닭이었다.

“숙모, 그 말씀은 제가 잘못을 했다는 건가요? 잘 모르겠는데, 제가 무슨 잘못을 한 거죠?”

심묘가 작게 말했다.

“바보 같은 것!”

노부인이 참지 못하고 재차 목소리를 드높였다.

“염치도 없이 정왕 전하를 훔쳐봐 우리 심부의 체면을 깎은 것도 모자라 감히 나에게 말대꾸를 하다니! 누가 그런 식으로 네게 예절을 가르쳤더냐? 너 같은 건 상류사회에 내놓을 수조차 없겠구나!”

심묘는 속으로 살짝 탄식했다. 전생의 심묘는 느끼지 못한 부분이나, 황후 생활을 하고 나니 노부인의 천한 기질이 손바닥처럼 훤히 들여다보였다. 노부인의 언행이야말로 상류사회에 걸맞지 않은, 격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제가 정왕 전하를 훔쳐봤다고요?”

심묘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심모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심묘, 네가 정왕 전하를 사모하는 것은 알지만 전하를 훔쳐보기 위해 스스로 물에 빠지다니. 확실히 가문의 명성을 먹칠했어. 게다가 전하도 기분이 좋지 않으셨을 거야. 기회를 봐서 꼭 정왕 전하께 사과드리도록 해.”

연모하는 부수의를 찾아가 직접 사과하라니. 어이가 없었다. 어느 여인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체면이 깎이고 싶지 않을 터였다. 전생에서도 심모는 부수의에게 사과하라 했고, 노부인 역시 심모 말이 옳다고 맞장구쳤다. 심묘가 난감해하며 한사코 찾아가기를 거부하자 노부인은 격노하여 외출 금지를 명했다.

심모는 심묘가 부수의를 사모해 염치를 모르고 자신의 명성을 실추시킨 것도 모자라 가문 전체에 불명예를 안겼다고 말하고 있었다. 심모는 이처럼 늘 고매해 보이는 언행으로 자신의 비열함을 감추었다. 그 교활한 모습에 심묘의 마음 깊숙한 데서 분노가 솟구쳤다.

심모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심묘와 눈을 맞췄다. 포도알 같은 검은 눈동자가 유달리 환해 마치 특별한 의미를 품은 듯했다. 심모는 자기도 모르게 멍해지고 말았다. 그 순간, 심묘가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다.

“심모 언니, 내가 정왕 전하를 사모한다는 허튼소리는 함부로 하면 안 돼. 그렇게 말하면 내 명성이 실추되잖아.”

심모는 깜짝 놀랐다. 심묘가 부수의에게 연모의 정을 품은 것은 정경성 내 명망 있는 귀족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심묘가 대놓고 표현한 것은 아니나, 말과 행동을 통해 부수의를 향한 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곤 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한사코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심모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심묘야, 우린 모두 한 식구야. 그런 일로 심하게 질책하지는 않을…….”

“심모 언니!”

심묘가 목소리를 높여 심모의 말을 끊었다.

“심모 언니, 신중하게 말해. 모든 화는 입에서 나온다고. 정왕 전하는 황실 자손이셔. 우리 역시 고관세가이니 더욱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해. 예전에는 내가 어리고 철이 없어서 오해할 만한 일들을 벌인 것 같아. 하지만 이전의 일을 교훈 삼아 이제부터라도 언행을 조심하기로 했어. 그러니 앞으로 언니도 그런 말은 삼가길 바랄게.”

심묘의 단호한 말에 심모뿐 아니라 노부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놀라 얼이 빠져버렸다. 심묘는 평소 온순하고 겁이 많아 이렇듯 큰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얌전히 대답하거나 우물쭈물하면서 말을 흐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렇게 격분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진약추의 눈이 빛났다. 심모는 나이가 어려 아무래도 실랑이에 능숙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진약추는 선비 집안 출신으로 머리가 비상하고, 평소 야심이 커서 무언가를 양보하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딸이 밀린다는 생각이 들자 불만스러웠으나 잘 감추고 부드럽게 말했다.

“사모하고 말고는 네 한마디면 분명히 할 수 있는 거란다. 여자아이 마음속을 어느 누가 알 수 있겠니. 그러나 심묘야, 내 말을 들으렴. 심모의 말이 맞아. 정왕 전하는 고귀하신 분이니 어찌 되었든 반드시 그분께 사과드려야 해.”

노부인도 정신이 돌아온 듯 차갑게 덧붙였다.

“그게 맞지. 내일 정왕부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보내고, 직접 가서 사과드리거라.”

심묘는 기가 차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세상 물정 모르던 전생의 심묘는 속일 수 있었다 해도 지금은 아니었다. 무장세가의 적녀인 심묘도 고귀한 신분이다. 그녀가 황자를 만나 직접 사과한다면 정경성 전체로부터 비웃음을 살 테고, 대방의 체면 역시 깎일 게 불 보듯 뻔했다.

노부인은 자신의 아이가 아닌 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대방이 망신당하길 원했고, 재수 없는 일을 당해 하루라도 빨리 무너지길 고대했다. 그를 위해 노부인은 심묘를 수도에 없는 심신과 나설안 대신 재수 없는 일의 제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어찌 마음에 드는 일만 일어난단 말인가.

심묘는 살짝 웃으며 지금까지 한마디 말도 없는 심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심청 언니, 그날 내가 물에 빠질 때 언니만 내 곁에 있었죠.”

심청이 머리를 들어 의연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청은 이미 다음 말을 준비하고 있던 참이었다. 심묘가 자신이 그녀를 연못으로 밀었다 이야기할 테지만 심청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지금 심부를 책임지고 대소사를 결정하는 이는 바로 노부인과 자신의 모친 임완운이기 때문이었다.

심묘 역시 가문의 적녀이나 자신뿐만 아니라 동원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하찮게 여겼다. 그러니 단지 “아니야.”라는 한마디면 노부인과 임완운 모두 심청의 편을 드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노부인은 심묘가 거짓말을 한다고 심묘에게 무거운 처벌을 내릴 터였다.

심청은 심묘가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다. 심묘같이 교양 없고 무지한 여자가 자신의 부수의를 원한다는 게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수를 모르는 심묘가 그날 연못에 빠져 익사하지 않은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심청 언니, 그날 정왕 전하를 보았어?”

그러나 심묘의 말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보았지.”

“그래, 그저께. 분명 나는 언니와 연못가에서 놀다가 조심치 못하고 물에 빠졌어. 그런데 마침 거기에 정왕 전하가 계셨을 뿐이야. 내가 정왕 전하를 몰래 보러 간 거라고 치면 내가 어디서 그 소식을 들었을까? 이방과 삼방의 하인들은 동원의 말을 나에게 전하지 않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정왕 전하께서 갑자기 둘째 숙부의 서예와 그림을 보러 심부에 오실 줄 알았겠어? 선견지명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니면…….”

심묘는 웃는 낯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설마 정왕 전하가 우리 부에 방문하겠다며 소식을 보내셨겠어?”

심청과 심모는 심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리면서 반격하려 했다. 그때 임완운이 재빨리 딸의 입을 막았다.

“심청!”

그녀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심묘는 창백한 안색의 임완운과 긴장한 표정의 진약추를 훑어본 후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두 사람은 그 나름대로 똑똑하니 심묘의 말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저께 부수의는 심부 앞을 지나다가 갑자기 들른 것이었다. 심귀와의 장기 내기에서 이겼던 게 불현듯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묘는 부수의가 미리 방문하겠다는 전갈을 보낸 것이냐 물었다. 이는 위험한 물음이었다. 현 황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신료와 황자가 가까이 왕래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늘 황자가 신료들과 어울려 황태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갖는 게 아닐까, 더 나아가 황위를 차지하겠다는 역심을 품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귀와 눈이 있다. 심부 안에 황실의 첩자가 있지 않을 거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러니 그런 말은 절대 해서도, 들어서도 안 되었다.

심묘의 말 한마디로 여인의 품행 문제가 황제와 신하 간의 충심 문제로 전환될 여지가 생겼다. 심신은 서북쪽에 있으니 당연히 뒤탈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심귀와 심만은 수도에 남아 있고, 두 사람 모두 조정에서 낮은 직책을 맡고 있으니 문제가 생긴다면 후환이 클 터였다.

아직 어린 심모와 심청은 몰라도, 임완운과 진약추는 그 자리에서 바로 심묘의 의중을 파악했다. 심묘는 그녀들이 자신의 명성을 짓밟으려 들면 심귀와 심만의 목숨을 가지고 승부를 겨룰 작정이었다.

남편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면서까지 자신과 맞서 싸울 배짱이 있을는지. 심묘는 냉소했다.

심청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임완운의 만류가 달갑지는 않았으나, 심청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심모도 심묘의 말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길래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진약추의 긴장한 표정을 보고는 무언가 있다고 생각해 얌전히 제자리에서 입을 다물었다.

심 노부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노장군을 여러 해 따랐으나, 그의 빙빙 돌려 말하는 화법에 도통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녀의 세상은 집안의 네 귀퉁이에 국한되어 있었기에 심묘가 숨긴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심묘가 오늘 약을 잘못 먹기라도 한 듯 여러 번 대드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신에게 무례를 범했다 여겨 혼을 낼 생각이었다.

임완운은 노부인이 질책하려는 낌새를 알아채고 웃으며 저지했다.

“심묘의 말이 맞습니다. 오해에서 벌어진 일이에요. 전당에서의 일이 어떻게 후원에 전해지겠어요? 우연이 거듭돼 불행한 일이 생긴 겁니다. 정왕 전하는 마음이 넓으시니 이런 어린애 장난을 담아두지 않으실 거예요. 다시 말하지만 모두 오해예요. 불쌍한 우리 심묘, 물에 빠져 놀란 데다 억울한 처지가 되어 많이 심란했겠구나.”

노부인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임완운이 갑자기 자신의 말을 끊어 불만스러웠으나 임완운의 친정은 명제에서 명성 높은 상인 집안이었다. 평소 이 둘째 며느리에게서 많은 자금을 받아왔던 터라 불만이 있다 한들 이를 입 밖으로 내 임완운의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노부인은 차갑게 흥 소리를 내고는 이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진약추도 무언가 깨달았는지 얼른 임완운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래. 심모야, 심청아. 앞으로 다시는 이런 말을 꺼내지 말도록 해라. 심묘가 조심치 못하고 물에 빠졌는데 마침 정왕 전하가 지나가다 우연히 보셨을 뿐이야. 모든 게 우연인 거지.”

진약추가 웃으며 심묘에게 말했다.

“심묘야, 조모께서 널 아끼셔서 그렇단다. 정말 네게 화나신 건 아니야.”

심묘는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심모는 진약추의 얼굴과 성격을 많이 닮았다. 진약추는 선비 집안 출신으로 온화하고 수려한 용모를 지녔으며, 평소에도 온유하며 점잖았다. 하지만 저 서책 냄새 짙은 여인의 속마음은 알 수가 없었다.

전생에 흉노 사신이 화친을 명목으로 통혼을 요구했을 때 궁중에서 적령기의 공주는 단 한 사람, 완유 공주뿐이었다. 그때 진약추는 심모를 대신 보내주기를 자청했다. 다 큰 딸이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해달라며. 부수의는 심모를 월여 공주로 봉해 격식을 갖추었으니 화친의 정당성이 확보됐다.

그러나 끝내 흉노로 시집을 간 사람은 심묘의 딸 완유 공주였다. 완유는 화친 가는 길 위에서 죽었고 완유가 기거하던 궁은 월여 공주, 즉 심모의 것이 되었다. 월여 공주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완유가 누리던 모든 것을 이어받았다.

심묘는 눈을 감았다. 완유는 방년(芳年, 여자 나이 약 스무 살)도 되지 못한 나이였다. 그 과정에 진약추가 관여하지 않았을 리 없다. 진약추와 미 부인은 아마 아주 오래전부터 손을 잡았을 것이다.

진약추의 웃는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마주한 심묘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둥근 얼굴, 둥근 눈, 둥근 코. 이런 얼굴이니 심묘는 평소 겁 많고 유약해 보였고, 한 발 더 나가면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상이라고 낮잡아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갑자기 나약함이 얼굴에서 사라졌고 그 자리를 엄숙함이 채웠다. 긴장해서 나타난 엄숙함이 아닌, 내심에서 나온 단정함이자 일종의 거리감이었다. 순간 진약추는 눈앞의 소녀가 대방 심신의 아둔한 딸이 아닌, 고귀한 황후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토당토아니했으나 이 기묘한 느낌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진약추의 온몸이 갑자기 떨렸다.

그때 심묘가 진약추를 향해 눈웃음 지었다.

“셋째 숙모도 제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아신다고 믿어요.”

진약추는 멍해졌다. 하지만 불만스러운 표정의 노부인을 보고 겨우 입을 열어 대꾸했다.

“네가 잘못하지는 않았지만, 연못에 빠진 건 확실히 조심치 못한 데서 온 일 아니더냐. 네 곁의 여종들은 네가 그렇게 될 때까지 보살피지 않고 뭘 한 거냐? 아주버님과 형님이 곁에 계시지 않다고 하인이 주인을 깔보는 게야? 여종들을 바꿔야겠구나.”

순간 임완운이 피식 웃었고, 진약추는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임완운의 입가에는 분명히 냉소가 걸려 있었다.

임완운은 진약추가 책만 읽고 사리 분명한 사람인 척하지만, 사실은 아주 영악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 진약추는 바보 같은 심묘를 속여 심묘 곁의 사람들을 삼방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려 드는 듯했다. 심모도 혼사에 신경 써야 하는 나이니 자꾸만 심묘를 걸고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심묘가 아둔하다 알려져 명성이 낮다 한들, 심신이 병권을 쥐고 있는 한 심모는 심묘만 못했다. 임완운은 삼방이 분수에 맞지 않는 걸 누리려 한다고 비웃었다.

심묘는 고개를 숙였다.

“셋째 숙모는 어째서 제 여종들을 바꾸려 하세요?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가 남겨주신 사람들이에요. 지금 서원은 사람이 너무 바뀌었어요. 며칠 전 무더기로 온 이급 여종들은 한 명도 모르겠어요. 제 곁의 여종들마저 바꾸면 누구에게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를 거예요.”

임완운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평소 심신 내외가 정경성에 없었기에 뜰 안 하인들을 모두 노부인, 이방, 삼방의 사람으로 바꾸었다. 이방이 집안일을 맡고 있었기에 이방의 사람이 가장 많았다. 그런데 심묘가 집 뜰 안 하인들을 한 명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바깥으로 흘러나간다면 사람들이 이방과 삼방을 어떻게 생각할지 뻔했다.

임완운은 머리를 빠르게 굴려 웃으며 진약추를 노려보았다.

“심묘야, 셋째 숙모가 농담한 거란다. 네 여종들이 세심치 못해 소홀히 했다곤 하지만 우리 심부는 인의가 있어서 그런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은 하지 않아. 너무 걱정 말거라.”

임완운의 말에 진약추는 사레가 들렸다. 심원백은 자신의 모친을 보고 또 진약추를 본 후 하품했다.

노부인은 둘째 며느리와 셋째 며느리 사이의 설전이 이제 조금 귀찮아졌다.

“됐다. 자질구레한 일에 불과하니. 둘째 며느리야, 원백이를 안아 오너라. 모두 해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시끄러우니 어지럽구나.”

임완운은 서둘러 심원백을 안아 노부인의 침상 위에 올려두었다.

“어머니, 그럼 며느리는 먼저 물러갑니다. 원백아, 할머니와 얌전히 놀거라.”

진약추는 심원백을 바라보며 양손으로 아랫배를 쓰다듬다 느리게 송경당을 걸어 나왔다. 딸만 가진 진약추는 아들을 가지길 소망했다. 이방은 아들이 있으니 노부인의 애정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자신이 능력이 있든 없든 친정이 부유하든 말든 그건 부가적인 문제였다.

조만간 대방의 것들을 빼앗을 때, 아들이 있다면 적어도 절반씩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계속 모든 게 이방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도록 그대로 뒀다간 무엇도 가져오지 못할 터였다. 게다가 대방에게는 적자가 있다. 심신과 함께 변경에 있으나 돌아와서 재산을 나눠 가질지는 알 수 없었다.

고민을 거듭한 진약추는 고개를 들어 서원으로 향하는 몇몇에게 시선을 보냈다.

* * *

다음 날, 심묘는 진홍색 긴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예전 심묘는 줄곧 연한 색의 의복을 입길 좋아했으나, 유약해 보이는 외양에 연한 색 의복이 더해지면 촌스러운 인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진홍색 옷은 그녀의 백옥같이 고운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게다가 심묘에게서 풍기는 위엄도 한층 더하니 일석이조였다.

곡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몸이 아직 다 나으시지도 않았는데 구태여 광문당에 가실 필요가 있어요? 아프신데 며칠 공부는 쉬어도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안 돼. 바로 마차를 준비해.”

심묘가 곡우의 말을 잘랐다. 분명 큰소리를 낸 것도 아니나 왠지 모를 위압감에 곡우는 감히 더 토를 달지 못하고 분부대로 마차를 준비했다.

광문당은 정경성 내의 명망 높은 학당으로, 명제 고관과 귀족들은 모두 아들과 딸을 광문당에 보내고 싶어 했다. 광문당의 선생은 모두 이름난 선비거나 재주가 뛰어난 준걸이기에 공훈을 세운 귀족의 자녀들도 광문당에 들어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심묘도 광문당에서 공부했다.

애석하게도 심신과 나설안은 장군세가 출신이라 책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라버니 심구 역시 책만 보면 머리가 아픈 사람이었다. 심묘는 어려서부터 심 노부인이 가르쳤지만, 노부인은 가녀 출신이라 글자를 읽고 쓸 줄도 몰랐다.

심묘의 기초 지식은 진약추가 가르친 결과였다. 진약추가 선비 집안 출신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심묘를 가르칠 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교재만 골라 사용했다. 이에 어린 심묘는 배우면 배울수록 책을 읽고 글 쓰는 것을 싫어하게 됐고 노는 데만 관심을 두게 됐다. 진약추 역시 책 읽기를 등한시하는 심묘에게 더는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고, 먹고 입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가르치며 유약한 아가씨로 생활하게 했다.

그런 심묘이니 당연히 광문당의 높은 수업 수준을 따라갈 수 없었다. 이미 몇 년이나 다닌 국이 학년이었지만 지식 수준은 나이가 훨씬 어린 국일 학년 학생만도 못했다. 심묘는 더욱 공부를 싫어하게 됐고, 점차 무지하고 아둔한 사람이 되어갔다.

심가의 세 적녀 중, 삼방의 심모가 가장 평판이 좋았다. 금기서화(琴棋書畵), 즉 금(거문고와 비슷한 현악기), 바둑(장, 차, 졸 등 장기와 비슷한 부분이 있는 중국 전통 바둑), 서예, 그림, 이렇게 네 가지 재주를 갖추었고, 개중 무엇 하나 훌륭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방의 심청은 심모처럼 출중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두루두루 잘하는 편이었다. 자수, 글쓰기와 계산에서는 곧잘 1등으로 뽑히곤 했다. 글을 잘 쓰고 계산이 뛰어나면 시댁의 환심을 쉽게 살 수 있으니 심청도 유능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심모와 심청의 재능이 빛을 발할수록 심묘는 무능하다고 더욱 손가락질받았다. 심지어 이방의 서녀 심동릉만도 못하다는 평을 받았다.

경칩이 물었다.

“아가씨, 어째서 심청 아가씨, 심모 아가씨와 동행하지 않으세요?”

평소 심묘는 늘 심청, 심모와 같은 마차에 탔었다. 심묘는 자매들과 함께할 때면 용기를 얻었다. 반면에 심모와 심청은 아둔한 심묘가 있어야 자신들의 뛰어남이 돋보이니 함께 지냈던 것뿐이었다. 그 검은 속내를 다 간파한 지금 심묘는 겉치레로도 자매들과 어울리려 들지 않았다.

“한 처마 아래 사람이 아니니 걷는 길도 서로 달라야 해. 왜 동행해야 해?”

경칩은 혀를 내밀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심묘의 말을 알아듣기가 갑자기 어려워졌다. 그렇지만 경칩은 심묘의 변한 모습이 더 좋았다. 심묘의 성격은 지나치게 연약해 모든 일에서 이방, 삼방이 주도권을 쥐곤 했다. 하지만 연못에 빠진 후부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심묘는 대방의 정당한 적녀였다. 신분과 지위를 논할 때 누구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마차 안에 있던 심모가 몰래 뒤를 훔쳐보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심청 언니, 심묘가 뒤에서 오고 있어.”

“심묘가 나 보라고 성질을 부리는 거야.”

심청은 차갑게 흥 소리를 냈다. 심청은 심모 앞에서는 심묘를 업신여기는 태도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라고 해. 어쨌든 체면을 잃는 건 내가 아니니까.”

심모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심묘는 감기를 앓았어. 게다가 정왕 전하의 일은 또…….”

“심모,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좋은 사람인 척하지 마. 정말 심묘가 걱정스러우면 심묘의 마차에 가서 앉으렴. 구태여 여기서 나와 말을 나눌 필요가 있어?”

심모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가는 내내 심청에게 다시는 말을 걸지 않았다.

마차는 반 시진을 달려 광문당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수업이 시작되려면 멀었지만, 학생들은 이미 여기저기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심모와 심청이 도착하자 여자아이들이 둘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광문당의 여자아이들 중 심모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겸손하고 온유해 보이니 자연히 사람들이 열렬히 추종했다. 심청은 심모만큼 재학에 출중하지는 않으나, 유능한 일 처리와 원만한 대인관계로 귀족 여인들의 호감을 얻고 있었다.

분홍색 의복을 입은 소녀가 물었다.

“심모, 오늘은 어째서 심묘가 보이지 않지? 늘 심묘가 여종처럼 너희를 따라다녔는데 웬일로 오늘은 곁에 없으니 의아한걸?”

“아마 부끄러워 못 왔을 거야.”

예쁘고 귀엽게 생긴 다른 소녀가 대신 말했다. 목소리가 꽤 컸고, 입가에는 살짝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정왕 전하를 훔쳐보다 물에 빠졌다잖아. 감기가 아직 낫지 않은 게 아닐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을 수도 있고.”

“패란, 그런 건 아냐.”

심모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 나름 동생을 옹호했다. 역패란이 웃으며 말했다.

“너, 너무 네 여동생을 보호한다. 그런 아둔한 아이가 너희 심부의 아가씨라니. 바보 같은 짓만 하는데도 넌 아직도 그렇게 싸고도는구나. 아무튼 심묘 때문에 내가 별구경을 다 한다 싶어. 평소엔 맥없이 쭈뼛거리는 주제에 정왕 전하만 만나면 돌변해서 용감해지던데. 가난한 집에서나 딸을 그리 교양 없이 키우지. 정말 알 수가 없다니까.”

심청이 듣기에도 심한 말이라 그녀는 심묘를 두둔하는 척했다.

“심묘는 그냥 장난이 심했던 것뿐이야.”

“내가 보기에는 심 장군과 심 부인께서 곁에 계시질 않아서 그런 것 같아. 단속하고 가르치는 데 소홀하니, 자연히 아가씨가 알아야 할 예의와 염치를 모르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소녀가 한마디 했다.

“효훤, 그 말은 틀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께서 수도에 안 계시지만, 심묘는 쭉 조모 곁에서 자랐어. 내 어머니와 둘째 숙모님도 교육에 전념하셨고. 결코 단속하고 가르치는 데 소홀한 적은 없어.”

심모가 부드럽게 말했다. 심모의 말은 심묘가 천성적으로 염치를 몰라 교육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얘기였다. 역패란이 이때다 싶어 말을 이었다.

“정말 이상해. 같은 집안에서 자랐는데, 너희와 심묘는 정말 천지 차이야. 스승님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실 거야. ‘타고난 바는 바뀌지 않는다’라고 말이야.”

역패란이 제 말에 깔깔 웃자, 부근에 있던 다른 여자아이들도 전부 웃음을 터트렸다. 몇몇 남자애들도 웃음을 참으며 곁눈질하고 있었다.

“봐, 심묘가 왔어!”

그때, 누군가 외치는 게 들렸다. 학생들 모두 정경성의 조롱거리를 보기 위해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입구에서 심묘가 천천히 걸어왔다. 구름이 수놓인 진홍색 옷을 입고, 진한 파란색 자수를 놓은 피풍의를 두른 심묘는 자못 성숙해 보였다. 느린 걸음에 치맛자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걸음은 무척 가벼우면서도 무게감이 있어서 온화하고 대범한 느낌을 주었다.

심묘는 턱을 약간 든 상태였다. 그 때문인지 강아지 같은 눈동자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연못처럼 깊었다. 그 속에 알 수 없는 힘을 품고 있어 마치 발톱을 숨긴 맹수 같기도 했다. 이목구비는 여전히 둥글어 어질고 귀여워 보였으나, 평소의 아둔함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용모와 단정한 자태가 합쳐지니 의외로 조화로웠다. 높은 지위의 귀부인이나 한 가문을 이끄는 수장과 같은 대범하고 결단력 있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광문당 학생 아무나 붙잡고 심묘가 어떠하냐 물으면 대답은 한결같을 것이다. 아둔하고 나약한 주제에 얌전하고 어진 척한다고. 그리 특별하지 않은 용모에 자질이 출중하지도 않고 공부도 소홀히 하며 부수의에게 맹목적으로 빠져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광문당에서 가장 출중한 여인이 누구냐 물으면 당연히 심모고, 가장 궁색한 여자가 누구냐 하면 당연히 심묘였다. 같은 심가 여인인데 인상도 분명하게 달랐다. 사람들은 심모 옆에 여종처럼 붙어다니는 심묘에게 익숙했기에 오늘 심묘가 보이는 낯선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역패란이 심모를 살짝 밀며 말했다.

“심모, 네 동생 설마 병으로 이상해진 거야? 오늘 어째 사람이 바뀐 듯한걸?”

심모도 심묘를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연못물에 빠졌다 깨어난 후에 심묘의 천성과 기질이 많이 변한 듯했다. ‘부수의 앞에서 창피를 당한 게 큰 충격이었나 봐’라고 막 이야기하려 할 때, 옆에 있던 강효훤이 물었다.

“심묘, 듣자 하니 너 물에 빠졌다던데 어떻게……. 지금 감기는 나았니?”

이렇게 공개적인 질문은 사람을 몹시 난처하게 만든다. 평소 심묘라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심모가 대신 답해주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심묘는 담담한 눈빛으로 강효훤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관심 가져줘서 고마워.”

강효훤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멍해졌다. 심묘가 친절하지도 냉담하지도 않은 태도로 선을 그었다. 이렇게 차분한 태도로 응수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강효훤은 심기가 아주 불편했다.

“감기도 다 나았는데 정왕 전하께 사과드리러 가지 않고 학당에 오다니, 좀 이상하지 않니?”

심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누구도 심묘를 도와주거나 말을 거들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심묘는 광문당 내에서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심묘가 망신당하는 일은 귀족 자녀들에게 재미있는 유희거리였다. 심묘는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심청을 바라보니 난처한 심묘를 보고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심묘가 입을 떼려는 찰나, 심모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정왕 전하는 도량이 넓으셔서 그런 사소한 일로 심묘를 탓하지 않으셔. 심묘가 이렇듯 배움에 의욕적인 자세를 보이면 좋은 일이잖아.”

“뭐가 좋은 일이란 거야?”

한 소년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년은 심모를 마음에 두고 있어 평소 심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동생이 있다는 건 훌륭한 심모에겐 큰 결함, 아니 대단한 비극이라고까지 여겼다.

“배움에 의욕적인 자세라고? 심모, 아무리 심묘를 돕고 싶다고 해도 그런 말은 안 하는 게 좋아. 배움에 의욕적이라니. 국일 학년 수준의 글도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야. 너무 우습잖아! 게다가 심묘가 고의로 물에 빠진 게 아니라고 어찌 확신할 수 있어? 연극 같은 걸 보면 물에 빠진 미녀를 영웅이 구하고 평생을 함께하지. 하지만 현실은 다를 거야!”

소년은 악의적으로 심묘를 깎아내리며 스스로의 말에 재미를 느낀 듯 크게 웃었다. 그는 남자아이들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였다. 소년의 말에 주위 소년들이 일제히 따라서 떠들썩하게 웃었다. 심모를 포함한 주위 여자아이들도 쿡쿡대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심묘를 향한 비웃음이 물결쳤고, 그녀를 향하는 시선은 모두 악의에 가득 찼다.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가장 예리한 무기는 말이다. 전생에 이런 장면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그녀는 멸시당하고 모욕당하고 비웃음거리가 되는 데 익숙했다. 이전에는 이런 모욕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심모, 심청과 어떻게든 친하게 지내려고 했었다. 비굴하게 굴수록 자신은 친구들과 멀어져 외톨이가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전생에서는 학당에서 이렇듯 조롱거리로 지내는 게 가장 큰 불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황후가 된 후 자신과 가족들에게 벌어진 비극에 비하면 이 일은 재수 없다고 말할 수준도 못 되었다. 학우들은 심모와 심청의 교묘한 부추김으로 자신과 적대적인 관계를 맺었을 뿐. 딸과 아들을 모두 잃게 만든 자들을 생각하면 이건 원한의 원 자도 붙일 수 없는 아이들 장난에 불과했다.

이들은 대부분 귀족 신분으로 명문대가 출신이 많았다. 명문대가는 심묘가 황후였을 적 전부 문혜제와 부수의에 의해 멸족당했다. 지금 눈앞에서 그녀를 비웃고 있는 소년은 봉랑 채가의 대공자 채임이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채가는 탐관 사건에 말려들어 집안이 망했고, 채임도 강제로 군역을 치르게 됐다. 채임은 심모를 여러 해 사모했으나, 일이 그렇게 되자 심모는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 그와의 관계를 분명히 정리했다.

심묘와 이 무리는 결코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며, 심지어 일부는 같은 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단지 황제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세가 사이에 불신을 조장하여 서로 미묘하게 대립했을 뿐이다. 동맹군을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전생에 황후로 생활하며 심묘는 적지 않은 것을 배웠다. 잠깐 감정이 상했다고 불필요하게 적을 만드는 건 수지에 맞지 않는 일이다.

사람들의 웃음이 멎자 심모가 심묘를 변호하듯이 입을 열었다.

“채임, 어떻게 심묘한테 그렇게 말해. 심묘는 그런 사람 아냐.”

“채임.”

심묘가 심모의 말을 끊었다. 평온한 목소리에는 조금의 언짢음도 섞여 있지 않았다.

“내가 물에 빠진 게 정왕 전하를 사모해서라고 누가 말했지?”

심묘가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면 다들 더욱 무시하고 조롱했을 테지만, 심묘의 어조는 차분하다 못해 매우 냉담했다. 이는 주변을 당혹스럽게 했다.

채임은 말하자면 이 무리의 소패왕이기에 평소 심묘는 그 앞에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와 눈을 마주치지도 많은 말을 건네지도 않았으니 이렇게 캐묻는 듯한 말투를 사용한 적은 당연히 없었다. 지금 심묘의 말투는 마치 아랫사람에게 명령을 하는 듯했다. 하지만 채임은 그런 심묘에게 욕을 퍼붓는 대신 자신도 모르게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설마 아니란 거야?”

심묘는 살짝 웃으면서 심모와 심청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여기야 당연히 사정을 잘 모르겠지만, 언니들도 모르는 거야? 왜 나를 위해 해명해주지 않는 거야?”

심모와 심청은 멍해졌다. 집을 나서기 전에 어머니에게 불려가 심묘가 물에 빠진 일에 대해 절대 말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며 당부를 들은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심청은 빠르게 이것저것 따져본 다음 대답했다.

“그래, 너희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않았으면 해. 그때 나와 심묘가 함께 있었어. 내가 직접 봤어. 심묘가 조심하지 못해 물에 빠졌는데, 마침 정왕 전하께서 지나가시다 우연히 보신 거야. 심묘의 연정과는 완전히 무관해.”

학생들은 좀처럼 믿지 않는 듯했으나, 그렇다고 조금 전처럼 바로 반박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심묘가 말을 덧붙였다.

“직접 보지도 않고 함부로 말하다니. 광문당은 학문에만 치중하지 말고 인품과 덕성도 같이 가르쳐야겠어. 게다가 사모한다는 건 본래 좋은 말인데 왜 이렇게 감당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 나는 한 사람을 사모할 때 존엄을 지키며 사모할 거야. 게다가 정왕 전하는 황실 자손이신데 내가 어떻게 함부로 깊은 감정을 갖겠어? 모두 잘못 생각한 거야.”

단시간에 인상을 바꾸기는 힘들다. 게다가 심묘가 부수의를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지금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들 아무도 믿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당장 판도를 바꿀 수 없더라도 늘 경계는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심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찬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한 사모의 존엄이구나!”

검은색 장포를 입은 젊은 남자가 바깥에서 들어왔다. 나이는 얼추 약관(弱冠, 남자 나이 스무 살)이 넘은 듯했고 대범하고 단정한 용모였지만 몸은 다소 문약해 보였다. 남자가 태평하게 말했다.

“좋은 말이야. 사모하는 마음은 모두 존중받아야지, 조롱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지. 광문당은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지만, 학생이라면 모름지기 덕행도 부지런히 연마해야겠지?”

남자의 등장에 학생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심묘는 그 청년을 빤히 주시했다. 배랑. 광문당의 계산 선생으로 덕과 재능을 겸비한 자였다. 광문당에서 유일하게 집안이나 신분을 따지지 않고 지식만으로 발탁되어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게다가 배랑은 성미가 온화하고 참을성이 뛰어나 다른 엄한 선생들에 비해 학생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배랑은 심묘같이 늘 꼴찌인 학생도 책망하지 않고, 인내심을 갖고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그뿐이었다면 이 사람은 확실히 좋은 선생이었을 것이다. 그의 인품, 덕성, 재학은 많은 사람 중에서도 순위를 다퉜으니까. 하지만 심묘는 그의 또 다른 모습을 알고 있었다.

배랑은 부수의가 가장 의지한 사람이었다. 부수의가 황제로 등극하고 나서 국사로 봉했을 정도였다. 국사 배랑은 순풍에 돛 단 듯, 관료 중 제일 높은 위치까지 올라갔다. 그는 확실히 국사 역할을 잘해냈다.

심묘 역시 배랑이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정직한 사람이라 여겨 심묘와 배랑의 개인적 친분은 좋은 편이었다. 심묘에게 진국에 인질로 가라고 제의한 것도 배랑이었다. 배랑은 “이 모두 명제를 위한 것입니다. 만일 마마께서 폐하의 다급한 상황을 해결하실 수 있다면 장래 강산 만리에 걸쳐 마마의 그림자가 드리울 것이고, 천하의 모든 사람이 마마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읍할 것입니다.”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심묘가 5년 후 돌아왔을 때, 미 부인이 내명부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심묘를 존중해주던 배랑과 배랑의 수하들은 태도를 완전히 바꿔 그녀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심묘는 배랑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태자의 폐위를 앞두고 그녀는 무려 무릎까지 꿇어가며 배랑에게 부탁했다. 배랑은 부수의에게 있어 입 안의 혀 같은 심복이니, 그가 말만 잘해준다면 황제가 반드시 재고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랑은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면서 그녀의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마마, 폐하께서 이미 결정하신 바는 소신도 어찌할 도리가 없나이다.”

“배랑! 그대는 설마 이렇게 태자 폐위를 보고만 있을 건가? 분명 옳지 않다는 걸 알지 않나!”

심묘가 분노해 다그쳤지만 배랑은 탄식만 내뱉었다.

“이것은 이미 대세의 흐름이니. 마마, 운명으로 여기십시오.”

운명으로 여기라니. 어떻게 운명으로 여길까? 아들이 억울하게 폐서인이 되는 걸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설령 다시 한세상을 누릴 수 있다 한들 그 비통함을 감내할 수 있을까?

심묘는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배랑을 주시했다. 그는 얼핏 광명정대하고 온화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냉혹하고 매정한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언제든 나라를 위하여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면에서 배랑은 충신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번에도 그가 부수의 곁에 선다면 죽기 전까지 그녀와 계속 대립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부수의가 배랑을 거두기 전이다. 둘 사이를 싹부터 잘라낼 수 있는 기회였다. 배랑을 자신의 곁에 세울까 아니면 아예 그를 짓밟아 높이 오를 엄두도 못 내게 만들까. 심묘는 여러 가지 묘책을 짜내며 각각의 결과를 계산해봤다.

배랑은 책을 쥐며 심묘의 속을 도통 알 수 없는 시선을 마주했다. 심묘가 앉아 있는 위치는 비교적 뒤였지만, 그녀가 완고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 그 감각은 무척이나 기이했다. 시선은 자신을 관찰하며 판단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도 같았다.

그는 심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심묘는 탁자 위 붓을 들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배랑은 속으로 살짝 웃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과한 생각을 한 게 틀림없었다. 저 아가씨가 어떻게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심묘는 광문당 전체에서 가장 아둔하고 나약하기로 소문이 난 아이였다. 사람을 판단하거나 관찰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책상 위를 정리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원래 글쓰기와 계산은 쉬이 재미를 붙이지 못하는 어려운 과목이었다. 설령 배랑의 가르침이 뛰어나다 해도, 학생들은 고작해야 모두 열네다섯 살 먹은 소년, 소녀들이다. 다람쥐마냥 통통 튀어 다닐 나이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 건 고역일 터였다. 더구나 가을 특유의 청명한 하늘도 한몫했다.

다른 선생이라면 목판을 들고 엄하게 꾸짖었을 테지만 배랑은 온화한 편이어서 학생을 벌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계산 수업에는 늘 1등을 도맡는 심청만 진지하게 임했고, 다들 몰래몰래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오늘 심묘는 평소와 아주 달랐다. 그녀는 눈을 깜박거리며 선생을 주시했다. 단정히 앉아 있는 모양새가 마치 진지하게 수업을 듣는 듯했다. 놀라운 장면이었다. 심묘는 대놓고 공부를 싫어했고, 복잡한 계산에는 더욱 흥미가 없었다. 심묘가 졸지 않은 것만으로도 신기하건만 진지하게 강의를 들으려는 모습은 기적에 가까웠다.

심묘와 한 책상에 앉은, 국화꽃을 수놓은 의복을 입은 수려한 외모의 소녀는 도도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처음 보는 심묘의 모습에 노골적으로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심묘가 진지하게 수업을 듣는 모습을 몇 번이고 곁눈질했다.

전생에 심묘는 계산에 흥미가 없었으나 후에 황후가 되자 얘기가 달라졌다. 처음에는 조정이 안정되지 않아 내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세밀하게 계산해 생활해야 했다. 그녀는 직접 해본 후에야 계산이란 게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굵직굵직한 큰 항목부터 작게는 비빈의 간식까지 모두 포함된 장부는 항목이 많고 복잡했으나 그것들 하나하나를 따져 계산했던 그녀다. 그러니 학당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볼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다.

다만 심묘가 이렇게 집중하는 이유는 배랑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더 분명히 알고자 함이었다. 많이 알수록 저 사람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접근할지 또 어떤 수완을 쓰는 게 더 적합할지 잘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곁의 소녀는 심묘가 수업에 집중하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그녀에게 비범한 기운이 풍긴다는 걸 깨달았다. 계산 수업이 끝난 후 배랑이 떠나고서야 심묘는 시선을 거뒀다. 곁의 소녀가 심묘를 툭 쳤다. 말속에는 놀람이 가득했다.

“심묘, 너 귀신 들렸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심묘는 소녀에게 눈을 맞추며 차분히 대답했다. 눈앞의 소녀는 광록훈가의 적녀 풍안녕이었다. 풍가는 수도의 공훈 관리로, 풍안녕은 어려서부터 도도한 성격이었다. 전생에 풍가는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부수의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면직당하고 말았다. 풍가는 풍안녕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먼 사촌에게 일찌감치 시집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풍가는 몰락했다.

풍안녕의 출가 후 삶도 그리 안녕하지 못했다. 혼인한 사촌은 겉으로는 훌륭하나 속은 보잘것없는 남자여서 풍안녕과 혼인하고 1년도 되지 않아 첩을 만들고 그 사이에서 아들도 보았다. 심지어 그는 풍가가 자신에게 떠넘긴 짐이나 다름없다고 아내를 공공연히 욕하기도 했다. 풍안녕은 억울함을 참는 성격이 아닌지라, 가위를 들어 첩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전생의 사건들을 떠올려 보니 모두 흩날리는 연기처럼 덧없었다. 눈앞에 있는 도도한 표정의 풍안녕에게서는 쇠락한 결말을 떠올릴 수 있는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묘는 다른 학우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들의 천진한 얼굴에 가엽게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들 부명과 딸 완유가 겹쳐 보였다. 그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음에도 화가 나지 않았다. 심청과 심모 등 천성부터 악독한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그저 버릇없는 아이일 뿐이었다. 이렇게 응석받이로 자란 소년, 소녀는 머지않아 10년 안에 운명의 잔혹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심묘가 말이 없자, 풍안녕이 뾰로통 입을 내밀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너 일부러 날 무시하는 거야? 심묘, 너 오늘 이렇게 애쓰는 건 한 달 후 있을 시험 때문인 거 아냐? 네 언니에게 들으니 시험 날 나서서 정왕…… 아니 다른 사람들이 널 주시하도록 할 거라던데?”

풍안녕은 별생각 없이 부수의를 언급하려다 배랑의 말을 떠올리곤 급히 말을 바꾸었다.

“시험?”

심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광문당의 시험은 매년 10월에 있었다. 모든 학생이 시험을 봐야 했으며, 특히 우수한 학생들에게는 갈고닦은 재능을 자랑하는 날이기도 했다. 자신의 기량을 남들에게 선보이는 날이니만큼 학생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온 힘을 다해 시험을 준비했고, 좋은 평가를 받길 바랐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날 많은 선비와 조정 관리는 물론이고, 황제도 참관한다는 점이다. 재학이 출중한 학생은 이날을 통해 관직에 오를 기회를 얻기도 했다.

요 몇 년간 가장 성적이 뛰어난 사람은 단연 심모로, 그녀는 매년 시험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심청은 심모에게 비할 수는 없지만 계산 시험에서만큼은 이름을 당당히 알렸다.

열등생 심묘는 모든 분야에서 꼴등을 담당하다시피 했다. 금, 바둑, 서예, 그림이 모두 수준에 미치지 못했으니 계산, 책론(策論, 정사와 관련하여 묻는 책문)은 엄두도 못 냈다. 시험 날마다 망신을 당하곤 했는데, 재능을 펼치는 건 둘째 치고 시험 통과부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전생의 심묘는 매년 시험 날이 가장 두려웠다. 단 위의 득의양양한 심모, 심청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부러워하기만 했다. 하지만 모두 아이들의 같잖은 경쟁일 뿐이다. 전생에서 실제 생사가 오가는 전쟁을 숱하게 보아온 터라, 심묘는 학당의 시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심묘는 풍안녕을 바라보았다.

“시험? 순위를 두고 다투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해서 뭘 얻어?”

풍안녕은 당황했다. 심묘가 거리낌 없이 자신이 순위에 들지 못하리라 말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풍안녕은 의아한 눈빛으로 세심히 심묘를 관찰했다.

“너 정말 상심이 큰 거 아냐? 성격이 크게 달라진 것 같은데?”

심묘는 하룻밤 사이 사람이 변한 듯했다. 평탄, 대범. 모두 지금 나이에는 볼 수 없는 평안함이었다. 본래 한 책상에 앉았기에, 확연한 성격 변화를 더욱 뚜렷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

심묘는 웃기만 할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이 나이의 소년, 소녀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보다 성숙한 사람에게 존경 혹은 흠모의 감정을 느끼곤 한다. 풍안녕 또한 무의식중에 심묘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고 있었다.

* * *

계산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은 광문당 화원에서 휴식을 즐겼다. 여자애들이 장기를 두거나 새로 쓴 시를 읊고 있을 때, 바깥에서 말이 흥분하여 날뛰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지?”

역패란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봤다.

“밖으로 나가 보자.”

강효훤이 일어나면서 심모를 끌어당겼다.

심묘는 굳이 나설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풍안녕이 두어 걸음 먼저 가다가 고개를 돌리더니, 잠시 생각한 후 심묘의 손을 잡아끌었다.

“같이 가서 보자!”

이번엔 심묘가 당황했다. 풍안녕은 지금껏 그녀를 깔보기만 했을 뿐, 이런 식으로 친근하게 군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놀란 심묘가 머뭇거리는 사이, 풍안녕은 심묘를 끌고 학당 입구로 향했다.

이미 많은 학생이 소란스러움을 듣고 입구에 모여 있었다. 학생들은 풍안녕이 심묘를 끌고 나온 것을 보고 전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심모의 시선이 조금 흔들렸다. 심청은 그 모습을 보더니 남몰래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심청은 심묘가 부수의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부터는 화목하게 지내는 것처럼 가장하기를 싫어했다.

무리에서 빠져나온 채임이 바깥의 사람을 확인하고 놀라 크게 외쳤다.

“사 소후야다!”

사 소후야? 심묘도 바깥을 내다보았다.

광문당의 붉은 대문 밖에 대추색의 준마가 보였다. 윤기 나는 밝은색 털을 가진,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명마였다. 말은 거만하게 앞발굽을 치켜들고 있었다. 말의 우아한 외양은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래 봐야 말에 탄 사람만큼 눈부시지는 않았다.

검은색 구름무늬가 수놓인 경장에 자색 담비 모피를 걸친 소년이 나른한 표정으로 말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썹과 별 같은 눈이 아주 아름다운, 빼어난 얼굴이었다. 입가는 조금 휘어져 웃는 듯 마는 듯했으나 눈빛은 아주 냉담했다.

소녀 중 한 명이 얼굴을 붉히더니, 대담하게 손수건으로 꽃을 접어 그의 품속으로 던졌다. 명제는 본래 풍속이 개방적이기에, 이런 대담한 행동도 용납되었다. 비단으로 만든 조화가 그의 품에 툭 떨어졌다.

사 소후야는 손을 뻗어 손수건을 들어 올리며 입꼬리를 올려 살짝 웃었다. 꽃을 던진 소녀는 황급히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았다.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진 것을 보니, 이미 넋이 나간 듯했다.

그러나 소년의 장난스러운 미소는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비단으로 만든 꽃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말발굽에 마구 짓밟혔다. 그에게는 나른한 태도와 빼어난 미모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강한 흡입력이 있었다. 사람들이 눈을 뗄 수 없는 매혹적인 존재로 타고난 그는 실상 냉담하고 인정사정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역패란이 중얼거렸다.

“사가 소후야.”

심묘는 눈썹을 찡그렸다. 사가 소후야, 사경행.

지금의 고관세가들은 모두 문혜제가 강산의 기초를 다지는 데 공로가 컸다. 세대가 바뀌면서 몇몇 세가는 단지 이름만 남은 반면 몇몇 세가는 더욱 번영했다. 풍가의 문관이나 심가의 무장들은 후자였다. 심가가 대를 이어서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서 승리한 공인된 충신이라면, 사가는 뱃속에 불충한 야욕을 품은 존재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가 사람은 후퇴하는 적의 뒤를 끝까지 추격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그 자리에서 무시하는 불충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는 “전장에서는 상황에 따라 군령의 실행을 판단할 수 있다.”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황제는 사가 사람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사가가 병권을 손에 쥐고 정경성 안과 밖에 흩어져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전투에 아주 뛰어나기에 그들을 잃는다면 전력은 크게 줄어들 게 뻔했다.

심가와 사가는 본래 대립 관계였다. 물론 문혜제가 두 가문이 합세하여 자신에게 대들지 못하도록 이간질한 탓도 있었다. 황제는 가문 간 힘겨루기를 유도해 군주 중심의 중앙 집권 통치를 탄탄히 했다.

게다가 심신과 사정은 정치 견해에서 차이를 보이며 지금껏 많이 충돌했다. 심신은 사정이 전쟁 때 급진적이고 교활하며 정통적이지 않은 수완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점을 탐탁지 않아 했다. 반대로 사정은 심신이 전쟁 때 병서를 읽고 구습에 얽매인 고루한 작전을 쓰며 임시변통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주 눈에 거슬렸다. 양가는 조정에서 하는 말다툼 외에는 왕래가 없어, 문혜제의 불안을 한결 덜어주었다.

사정의 아내는 일찍 죽었지만, 그는 다시 아내를 얻지 않았다. 그에게는 한 명의 첩실만 있었는데, 그 첩실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즉, 사경행에게는 서출 남동생이 둘 있었다. 사정은 적자의 모친이 일찍 죽은 것이 안타까워서인지, 그 빈자리를 보상이라도 하듯 어려서부터 사경행을 총애했다. 그래서 사경행은 법도 무시하고 하늘도 무서워하지 않는 건방진 성격으로 자라났다.

안하무인이라고는 해도 사경행은 뛰어나기로 따를 자가 없었다. 냉담한 본성에 총명함과 용모가 가세하여 명제에서 손꼽히는 유명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많은 아가씨가 그를 몰래 흠모하지 않았으리라. 심묘는 속으로 탄식했다. 이 특별한 소년 준걸의 최후에 마음이 아플 정도였다. 그는 가슴에 활을 맞고 피부가 벗겨지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었다.

심묘의 시선 속에 연민이 너무 뚜렷한 탓인지, 사경행이 갑자기 심묘를 돌아보았다. 그의 깊은 별 같은 눈이 조금 반짝거렸다.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였다.

심묘는 고개를 숙이며 부끄럽다는 듯이 행동했다.

사경행은 약관을 조금 넘은 나이에 죽었다.

명제의 황실은 해가 가면 갈수록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무능해졌다.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다스리고 국력을 키울 것인지 고민하는 대신, 황실만 보호하려고 했다. 그래서 황실은 높은 관직에 올랐던 권문세가를 모두 위협으로 여겼다. 부수의가 자기 입으로 부황이 심신같이 고지식한 충신조차 꺼려 심가를 치우려 했을 정도라고 했으니 황실 말을 잘 듣지 않는 사가는 당연히 눈엣가시였다.

마침 흉노가 침범해 사가가 출병했다. 전쟁터를 집 안뜰처럼 거침없이 휩쓸고 다니던 사가군은 놀랍게도 그 한 번의 출격에 전멸했다. 사경행은 정경성에서 부친의 금의환향을 기다렸으나 돌아온 것은 차갑게 식은 시신 한 구뿐.

이 일은 단순히 사정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정의 장례를 치를 때 온 백성이 그를 애통한 마음으로 배웅했고, 떠난 영웅을 그리워하는 이가 전국 각지에 가득했다. 이는 황실에 크게 두려운 일이었다.

오래지 않아, 젊은 사경행도 부친을 대신해 출병을 명 받았다. 사경행은 이미 출정 경험이 있었다. 이 젊은 장수는 사가 사람이 천부적으로 전투에 능함을 증명하며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화려한 전적도 있었다. 그러나 사정의 죽음에 쉬이 납득하지 못할 부분이 있었기에 황실의 명령은 사경행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는 것과 같았다.

사경행은 성지를 받아 전장에 나갔고, 패배했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적군에 둘러싸였고 결과는 참담했다. 수많은 화살이 그의 가슴에 박혔다. 그것도 모자라 흉노는 잔혹하게도 피부를 벗겨낸 그의 시신을 성루에 내걸었다.

처참한 결말이 되풀이되자, 명제 전국에 통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성들은 흉노의 잔악함과 사가 부자의 용맹함만 보았을 뿐, 그 아래 용솟음치는 음모와 암류는 보지 못했다.

당시 문혜제는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들고 있었기에 부수의가 조정 일을 이어받아 처리하고 있었다. 사가의 비극에 유감을 표한 부수의는 사가 부자에게 관직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명을 달리한 사가 부자에게 조정의 위로가 무슨 소용일까. 그 첩실과 두 서출 아들만 덕을 본 셈이 되었다.

심묘는 사경행의 죽음을 전해 듣고 애통해하던 심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심가와 사가는 적대 관계였기에 사가가 재수 없는 일을 당했어도 부친은 별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 여겼으나 아니었다. 그때 심신은 비록 대립을 거듭하긴 했으나 전우로서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가 부자의 죽음에 슬픔을 표했다.

사가가 쓰러지고 양가의 균형이 무너져 내리자 심가도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심묘는 전심전력으로 심가를 황위 쟁탈의 진흙탕 속으로 끌어들였다.

심묘는 사가에 아무런 악감정이 없었기에 눈앞의 잘생긴 소년의 운명에 탄식했다. 저렇게 뛰어난 사내가 살아남았다면 분명 명제 역사에 굵은 획을 그었을 텐데. 그렇게 비참한 꼴로 퇴장할지 그 누가 알았을까? 게다가 그는 출정하라는 황제의 명에 따르면 그게 곧 자신의 마지막이 되리란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황명에 따른 건 사가의 존엄성을 지키고, 국가에 충성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을 터.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책무를 다한 사경행. 그는 자신이 겉모습은 장난기가 가득한 소년일지언정 심성은 굳건한 영웅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때 채임이 군중 속을 비집고 나와 보따리를 사경행에게 넘겨주며 공손히 말했다.

“소후야, 이것이 바로 당신의 분부대로 제가 찾은 의서의 유일본입니다.”

소패왕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겸손하게 행동하다니. 다들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채임과 비교하면 사경행은 대패왕이라고 할 수 있으니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사경행이 패왕 중의 패왕이라 생각하면, 채임이 사경행을 대하는 태도 또한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풍안녕이 남몰래 심묘에게 귓속말을 해왔다.

“사 소후야와 정왕 전하를 비교하면 어떤 것 같아?”

심묘는 말문이 막혔다. 풍안녕이 이렇게 갑자기 자신에게 친밀하게 구는 게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심묘는 목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

“사 소후야가 더 앞섰지.”

과연 단순하게 앞섰다고 하는 게 맞을까. 속은 시꺼먼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 부수의를 어떻게 영웅인 사경행과 함께 논할 수 있을까? 전생에 완유와 부명은 명제의 역사를 공부하던 중 사가에 관한 단락을 읽은 후, 사경행 같은 영웅의 기개를 가진 남자가 죽어서 애석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심묘는 자신의 자녀들이 존경심을 표한 사경행이 좋았다.

풍안녕은 자못 놀란 듯 심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아주 상심했구나.”

심묘는 뭐라고 더 설명하기 싫어 입을 다물었다.

말 위의 사경행이 보따리를 받아 안장에 묶었다. 그는 채임을 한 번 보고는 아무 말 없이 품위 있게 채찍을 휘두르더니 몸을 돌려 떠났다. 말이 세차게 먼지를 일으켰으나, 소년의 품위 있는 뒷모습을 가리지는 못했다. 하늘에 막 솟아오른 태양처럼 소년은 타고난 눈부신 광채를 발산했다.

채임은 실망한 나머지 어깨를 떨어뜨렸다. 주위 소녀들도 실망을 감추기 어려웠다. 사경행이 조금 더 이곳에 머물길 바랐기 때문이다. 사경행은 소녀들 사이에서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소년들이 질투하지 않는 유일한 이였다. 다른 사람과 완전히 다른 품격을 가진 그는 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다.

심묘는 사가와 사경행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사가가 쓰러지면 심가도 쓰러지고 만다. 양가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니 이제부터라도 원만한 관계를 도모하는 것이 현명했다. 심가는 항상 성실하고 관대했지만, 사가는 거만하고 횡포하게 굴어 이미 황실의 눈 밖에 났다. 추후 황실이 가장 먼저 사가를 내치려 할 때, 거래를 할 기회가 찾아올 것이었다.

* * *

사경행은 술집 앞에서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는 말에서 내려 바로 술집의 가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술집 안에 있던 용모가 수려한 공자가 그를 보고 미소 지었다.

“셋째!”

“가져가! 앞으로 이런 일로 날 찾지 마.”

사경행이 보따리를 던졌다. 고양이 의서 유일본을 찾아 달라 하지 않았다면 사경행은 채임을 찾아가지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광문당에서 바보처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구경거리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비단으로 만든 조화가 생각난 사경행은 더러운 것이 몸에 닿기라도 한 듯 괜히 옷을 털었다.

고양은 사경행이 결벽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살짝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네 그런 성격 때문에라도 움직여야 해. 학생들이 너랑 비슷한 나이대니, 그들의 생기와 활력을 배워야 한다고.”

말을 멈춘 그의 얼굴 위로 짓궂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게다가……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있을 거라고. 넌 딱 좋은 나이에 계속 혼자잖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사경행은 장난기 심한 고양이 떠는 너스레에 익숙했다.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돌린 채 머릿속으로 조금 전 본 한 쌍의 눈을 떠올렸다. 어린 짐승같이 맑고 투명한 눈은 분명 깊은 연민과 유감을 표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사경행은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어 소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 눈의 주인은 고개를 숙이며 마치 부끄러운 듯 행동했다.

하지만 사경행은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각지를 돌아다녔기에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익힌 터였다. 그 여자아이는 자신의 연기가 그럴싸하다고 믿는 눈치였지만, 애석하게도 자신의 눈이 저수지에 고인 물처럼 전혀 일렁이지 않았다는 것은 몰랐을 것이다.

일이 아주 재밌어지고 있었다.

* * *

심묘가 수업을 마치고 심부로 돌아왔을 땐 이미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심모와 심청은 여전히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고, 심묘도 그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노부인은 휴식 중이라 심묘는 바로 서원으로 돌아갔다. 서원으로 걸음을 옮기는 중, 친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아가씨께서 물에 빠지셨단 말을 듣고 아주 걱정했어요. 아가씨께서 괜찮으신 걸 보니 이만 마음속 돌을 내려놓아도 되겠네요.”

고개를 돌려 보니 중년 부인 한 명이 이곳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뚱뚱하고 피부가 검은 부인은 대략 마흔서너 살로 보였고, 청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얼핏 보기엔 평범한 차림이었으나 옷감은 고급이었고, 팔목엔 무거운 은팔찌를 차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계 유모.”

심묘가 담담히 말했다. 계 유모는 심묘에게서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듯 계속해서 자기 말을 이어갔다.

“조금 더 일찍 오려 했는데 손자가 아파서 계속 고민만 했어요. 방법이 없어 손자는 며느리에게 보라 하고 먼저 부로 돌아왔는데, 아가씨께서 괜찮으신 것을 보니 안심이네요.”

심묘의 환심을 사고자 아양을 떠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심묘가 자신의 친손자보다 더 중요한 셈이었다. 전생의 심묘였다면 크게 감동하여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은자를 쥐여주며 돌아가 손자가 의원의 진찰을 받게 하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세상을 살게 된 심묘는 눈앞의 부인을 보며 자신을 비웃었다. 전생에 얼마나 사람 보는 눈이 없었으면 이런 사람을 충복으로 여겼을까.

나설안은 심묘를 낳고 오래지 않아 심신을 따라 출정했다. 심묘는 나이가 어려 함께 갈 수 없었기에 나설안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심부에 남겨 두어야 했다. 나설안은 그녀를 위해 유모를 데려왔고, 그게 바로 눈앞의 계 유모였다. 마을 농가 출생인 계 유모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눈여겨보던 차, 계 유모에게 심묘를 먹일 젖이 충분하자 나설안은 더욱 안심하고 그녀를 심묘의 곁에 뒀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하는 법. 심부 안에서 서원의 사람 수는 적었고, 모든 것을 책임지고 결정하는 것은 노부인과 동원의 이방이었다. 처음에는 성실하게 심묘를 챙기는 듯했으나, 곧 계 유모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동원의 노부인에게 의지했다. 이후 계 유모는 주구(走狗, 앞잡이) 노릇을 톡톡히 했다. 심묘가 부수의에게 시집가겠다고 굳게 결심하게 된 계기에는 계 유모가 그녀를 꼬드긴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가장 가증스러운 일은 당시 노부인의 종손녀가 심부에 의탁했을 때였다. 그녀는 심묘의 오라버니 심구에게 정조를 잃었다고 말했다. 오라버니가 누명을 쓴 게 분명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심묘의 새언니가 되었으며, 이후 오라버니의 후원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그녀가 심구에게 정조를 잃었다고 주장하자 계 유모가 그녀 측 증인으로 나섰었다. 지금 생각하니 가소로운 연극에 불과했다.

한 번 불충했던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줄 필요는 없다. 게다가 계 유모는 백 번도 넘게 불충했으니 당연히 도려내야 했다. 제 주인도 몰라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배를 까 보이는 개는 더 기를 필요가 없었다. 아니, 죽여야 마땅했다.

계 유모는 기다려 봐도 심묘의 칭찬이 들리지 않자 짓고 있던 자애로운 표정을 일순 굳혔다. 심묘는 그녀를 냉담히 바라보고 있을 뿐,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계 유모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왜인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심묘는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오, 정말 고생했네.”

어느새 심묘의 곁에 다가온 곡우는 가볍게 흥 콧방귀를 끼며 계 유모를 흘깃 쳐다보았다. 곡우는 원래부터 계 유모가 아첨을 잘하는 소인배라며 싫어했다. 계 유모는 자신이 심묘의 유모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서원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려 했고, 갖가지 속임수로 어리숙한 심묘를 매번 속여 넘겼다. 순진한 심묘는 유모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고 그 탓에 종국에는 유모의 중상모략 때문에 서원에 남아 있던 하인들마저 떠나고 말았다.

다행히 심묘가 물에 빠졌다 깨어난 후, 확실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듯했다. 계 유모를 대하는 태도가 아주 냉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처럼 친절하지도 않은 걸 보니, 곡우는 마음이 한결 놓였다.

계 유모는 멋쩍게 웃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심묘의 태도가 묘하게 냉담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곧 심묘가 물에 빠진 일로 기분이 좋지 않아서일 거라고 여기고 억지웃음을 지어가며 말했다.

“제가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아가씨의 몸부터 추스르는 게 먼저지요. 아가씨의 꽃 같은 사람 됨됨이를 정왕 전하께서는 반드시 좋아하실 겁니다. 언젠가는…….”

그녀는 심묘가 듣고 싶어 할 만한 말만 골라 입에 담았다. 주인이 좋아하는 말을 하면 환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심묘의 안색이 변하는 게 보였다.

“유모, 내 정조를 더럽히려는 건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금 심부에 계시지 않지만 나도 심부 적녀이자 서원의 주인이야. 평범한 집안에서조차 정조와 평판의 중요함을 아는데, 유모는 일부러 날 모함하는 거야?”

당황한 계 유모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 아가씨,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다만 아가씨를 위해서…….”

“그 말은 내가 틀렸다는 얘긴가?”

심묘는 냉소하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좋아. 노부인께 가서 분명히 여쭙지. 난 지금 계 유모가 심부 딸의 정절을 저잣거리에서 배추 몇 포기 살 엽전 가격으로 떨어뜨려 놓았다고 생각하지만, 유모가 그렇게 말하니 내가 너무 예의 없었던 건지 한번 여쭈어보고 싶네.”

계 유모는 심묘가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해서 자신에게 화풀이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서원에서 제멋대로 날뛰는 데 익숙한 계 유모는 평소와 다른 심묘의 태도나 눈빛 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곡우와 경칩 앞에서 체면을 잃자 분노까지 치밀어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가씨, 그 말씀은 저를 못된 것으로 몰아가시는 겁니다. 십수 년 동안 아가씨를 곁에서 모신 제가 어째서 아가씨를 해칠 마음을 먹겠습니까?”

“무엄하십니다! 아가씨는 주인이신데, 계 유모는 어떻게 아가씨께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경칩이 소리를 높이자 계 유모는 순간 멍해졌다. 자신이 충동적으로 대꾸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주위 많은 하인들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심묘가 아직도 쉽게 속일 수 있는 아가씨라 생각하고 서둘러 부드럽게 말했다.

“아가씨, 저는 진심으로 아가씨를 아껴서 그럽니다. 아가씨를 여러 해 따르면서 일찍이 마음속으로 아가씨를 친자식처럼 여겨왔습니다. 방금은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아가씨, 화내지 마세요. 화내시면 건강에 안 좋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자식처럼 대한다는 말에 심묘는 속으로 냉소했다. 계 유모는 서원에서 적지 않은 은자를 얻어놓고도 오히려 동원을 정당한 주인으로 모셨다. 게다가 심묘의 오라버니에게 큰 손해까지 입혔다.

황후였을 때 내궁에 이런 교활한 노비가 있었다면 단박에 그 노비를 때려죽였을 것이다. 계 유모가 자신을 배신하고 동원에 의탁했으니 그녀의 손을 빌려 동원에 해를 입혀야겠다고 생각한 심묘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담담하게 말했다.

“계 유모가 잘못을 인정했으니 그 벌로 석 달간 감봉하겠어.”

계 유모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심묘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은자가 필요한 계 유모는 당장 동원으로 가 충심을 보일 터였다.

* * *

차가운 바람이 부는 밤. 10월이 되자 하루하루 추워졌다. 정경성은 북쪽 지역이라 더욱 추웠다.

등불 아래에서 심묘는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 책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차가 식는 것조차 모른 채, 책에 푹 빠져 있었다.

백로는 멍하니 심묘를 바라보았다. 하룻밤 사이 심묘는 이전과 다르게 변했다. 독서를 멀리하던 아가씨께서 지금 이렇듯 책에 빠져 계시다니. 백로는 자신이 평소의 아가씨가 아니라 웬 귀부인을 모시고 있는 것 같아 어리둥절했다. 심묘에게서 어떻게 이런 분위기가 풍기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백로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상강이 다가와 백로를 밀며 작게 질책했다.

“멍하니 서서 뭐 해?”

상강은 피풍의를 가져와 심묘의 어깨에 걸쳐주며 따뜻한 음성으로 권했다.

“아가씨, 시간이 늦었습니다. 내일 광문당에 가셔야 하니, 좀 일찍 쉬세요.”

그러나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 먼저 쉬어. 난 좀 더 봐야겠다.”

주인이 자지 않는데 여종이 어찌 먼저 쉴 수 있을까? 다시 권하려던 순간, 상강은 심묘의 차를 바꿔주러 온 곡우에게 끌려나갔다. 곡우는 심묘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른 뒤, 상강과 백로를 끌고 바깥으로 나왔다.

“왜 그래, 곡우?”

백로는 곡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가씨께서 막 회복하셨는데, 어째서 쉬시라고 권하지 않는 거야?”

“나라고 어찌 안 권하고 싶겠어? 그런데 지금 아가씨께서 우리 말을 들으실 것 같아? 온종일 책만 보시는 걸 보니 선생님께서 숙제를 내셨겠지. 아가씨가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을 정하셨는데, 우리가 귀찮게 해드려선 안 되잖아.”

곡우 역시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뒷방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심묘가 나약할 때는 자신들이 늘 방법을 강구해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나약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말했고, 아무도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곡우는 심묘가 명령을 내릴 때면 위엄에 압도되곤 했다. 담담한 말투에도 위엄이 드러났다. 주인어른의 분노도 두렵지 않았던 곡우는 홀로 탄식했다.

심묘는 아직도 책을 읽는 중이었다. 그녀는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는 책은 바로 《명제 정사》였다. 책에는 개국 이래 지금까지 명제에 일어났던 큰일이 순서대로 적혀 있었다. 그녀는 몇십 년 안에 발생할 비극을 막을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정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비극의 근원지를 찾아야 했다.

황제가 세가를 뿌리째 뽑겠다고 대학살을 명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예상외의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다음 달 대참사가 벌어질 것이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높은 관직의 고관세가가 당하면 다음 차례는 심가일 터. 부친 심신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오직 그녀 혼자 버텨야 했다. 외부 일을 챙기면서 동시에 동원의 흉악무도한 자들을 경계해야 했다.

* * *

심묘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그날 밤 계 유모는 송경당에 찾아갔다. 그녀는 이번에 마을에 갔다 오면서 가져온 특산물을 노부인에게 바쳤다. 그러면서 노부인 옆의 장 유모에게 심묘의 일 처리가 점점 이상해지고 걸핏하면 다른 사람에게 분풀이한다고 하소연했다. 장 유모도 계 유모의 생각을 모르는 건 아니어서, 냉담하지도 적극적이지도 않게 몇 마디 말을 거들었다. 계 유모는 조금 더 노부인의 비위를 맞춘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 유모가 막 송경당 뜰을 나오자 임완운의 여종 향란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향란이 그녀를 보고 웃었다.

“계 유모, 마침 찾고 있었어요.”

계 유모는 실눈을 뜨고 향란을 보며 웃었다.

“향란, 날 무슨 일로 찾은 건가요?”

“큰일은 아닙니다.”

향란이 계 유모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리 마님께서 당신이 예쁜 연지를 파는 곳을 안다고 들으셨다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물으려고요.”

물론 허울 좋은 구실이었다. 임완운이 계 유모를 찾는 것은 무슨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려는 것일 터였다. 의도를 눈치챈 계 유묘가 웃는 낯으로 향란의 말에 대꾸했다.

“당연하죠. 마님께서 듣고 싶어 하시면 알려드려야지요. 그 연지는 많은 관가의 아가씨와 부인께서 애용하고 계십니다.”

향란과 함께 채운원에 도착하니, 바깥 여종은 모두 물러나고 없었다. 임완운은 침상 위에 앉아 편한 자세로 수를 놓고 있었다. 염낭(荷包, 허리에 차는 작은 주머니)에 수를 놓으며 포도를 먹고 있었다.

포도는 진귀한 과일이었다. 더욱이 요즘 같은 날씨에는 포도를 찾을 수 없었다. 이방이 자신의 권한으로 한 광주리를 차출하여 자기 후원의 여자들에게 나눠 먹으라 준 것이리라 짐작하면서 계 유모는 마음속으로 침을 뱉었다. 표면상으로 심가의 이방은 집안일을 맡고 있었고, 대방을 푸대접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심부에서 자신은 물론 심묘조차 포도를 먹은 적은 없었다.

임완운이 마침내 손에서 바늘과 실을 놓고 입을 열었다.

“계 유모.”

정신을 차린 계 유모가 대답했다.

“네, 마님.”

임완운은 이미 마흔 살이었다. 미용에 신경 쓴다지만 눈가에 가는 주름이 보였다. 하지만 마름질이 잘된 매우 고급스러운 옷을 걸쳐 우아했으며, 주모(主母, 집안일을 도맡고 있는 부인)에 걸맞은 위엄이 일거수일투족에 드러났다. 가볍게 웃는 모습에도 위엄이 서려 있었다.

“자네가 돌아왔다 들었네. 심묘의 몸이 막 회복되었으니, 그 아이를 잘 돌보게.”

계 유모는 속으로 비웃었다. 동원에서 서원이 재수 없는 일을 당하길 간절히 바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임완운이 이렇게 선의를 베푸는 양 행동하는 이유는 단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기 위함이었다.

임완운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심묘가 물에 빠져서 그런지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아. 아주버님과 형님이 안 계시니 내가 작은어머니로서 잘해야겠지. 그러니 자네에게 이런저런 소식을 들어야겠네.”

즉, 심묘의 일거수일투족을 임완운에게 보고하라는 말이었다.

“마님께서 심묘 아가씨에게 이토록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시니, 아가씨의 복입니다. 제가 볼 때 아가씨는 이번에 물에 빠지고 확실히 성이 나신 듯합니다. 요 며칠 성격도 변하셔서 저와도 소원해졌습니다. 다른 것은 둘째 치고, 오늘 이유 없이 제게 벌이라며 석 달 치 봉급을 삭감하셨습니다.”

계 유모는 걱정과 고뇌를 털어놓는 척했다.

“저는 아가씨께서 물에 빠졌단 말을 듣고 마음이 초조해 손자가 병중인데도 달려왔는데……. 아가씨께서 그런 저를 질책하실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견디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아픕니다.”

임완운은 계 유모의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계속 듣기 귀찮으니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차례였다.

“결국 마음의 병 때문이네. 계 유모, 자네가 볼 때 심묘가 정왕 전하께 품고 있는 마음 또한 변한 것 같나?”

이것이 그녀가 가장 묻고 싶은 말이었다. 계 유모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정왕 전하와 경계를 분명히 그으시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가씨를 여러 해 봤기 때문에, 아가씨의 성격을 분명히 압니다. 아가씨는 정왕 전하 일에 유달리 집착하곤 하셨으니 이리 쉽게 포기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아마 조급해서 하신 말씀일 뿐, 진심은 아닐 겁니다.”

임완운의 얼굴 위로 사납고 고약한 표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계 유모가 떠난 후 병풍 뒤에서 심청이 걸어 나왔다. 심청은 임완운 곁에 앉아 그녀에게 기댄 채 거친 말투로 물었다.

“어머니, 심묘가 정왕 전하를 포기하지 않으면 전 어쩌죠?”

심가 삼방 중, 대방의 관직이 제일 높았다. 이방, 삼방의 관직은 대방에 댈 게 못 됐다. 그러니 심묘가 심신에게 강하게 요청하면 혼사가 성사될 가능성이 컸다. 심묘가 부수의와 혼인하게 된다면 그를 사모하고 있는 자신은 어떻게 될지, 심청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부수의처럼 풍채 출중한 사람을 어떻게 용모도 대단치 않고 미련하기까지 한 심묘가 차지하려 든단 말인가. 심청은 돌아가는 상황이 아주 달갑지 않았다.

“안심하거라. 이 심부 안에서 널 넘어설 사람은 없단다. 심묘는 아둔하여 두려워할 가치가 없지. 당연히 이 어미에게 심묘가 정왕 전하께 시집가지 못하게 할 방법이 있단다. 그보다 넌…….”

임완운은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추수원의 사람들을 신경 쓰거라. 넌 심모가 좋은 사람이라 여기느냐? 넌 그렇게 생각해도 심모는 그렇지 않을지 모르지.”

“심모요? 심모도 정왕 전하를 사모한다고요? 설마요. 게다가 심모가 정말 정왕 전하를 사모한다 해도, 삼방은 이방에 비교할 수도 없어요. 혼사를 요구할 자격이 없으니 두려울 것 없다고요.”

임완운은 나무라는 표정으로 심청의 이마를 톡 찔렀다.

“네가 이러니 내가 어떻게 안심하겠느냐? 진약추는 대단한 사람이다. 애초 삼방과…….”

임완운은 심청에게 해선 안 될 말이라 의식한 듯 갑자기 입을 닫았다가 잠시 뒤 이어 말했다.

“어쨌든, 심묘에 대해서는 넌 마음에 두지 말거라. 어미에게 생각이 있단다.”

“감사해요, 어머니.”

심청의 간드러지는 아양에 모녀는 마주 보며 웃었다.

* * *

추수원.

진약추가 탁자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선비 집안 출신이어서 부인이 된 후에도 늘 글쓰기와 독서를 즐겼다. 진약추 뒤에 선 심모는 담황색 비단 치마를 입고 있었다. 심모의 몸매는 아름답고 날씬했다. 그녀의 외양은 어머니와 아주 닮아, 어린 진약추라 불릴 만했다.

“어머니, 방금 왜 계 유모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심모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계 유모가 찾아왔을 때 진약추는 심모의 예상과 달리 정왕 전하에 대한 심묘의 마음을 저지하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왕 전하가 얼마나 출중한지와 전하야말로 심묘가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이라고 설득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심묘가 정왕 전하에게 시집가겠다고 더욱 마음먹지 않을까요?”

심모는 진약추를 탓하는 것처럼 다시 물었다. 이에 진약추는 붓을 놓고 작게 탄식한 뒤, 심모의 손을 끌어 침상에 걸터앉게 하고 온화하게 말했다.

“심모야, 이 어미가 네게 말하지 않았니? 어떠한 일을 할 때, 특히 후원 안의 일은 굽이굽이 돌아서 처리해야 한다고. 이래야 추후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운명을 탓할 뿐, 아무도 널 탓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심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 이해가 안 가요.”

진약추는 웃었다. 그녀의 딸은 온유하고 재능이 있으며 머리도 나쁘지 않았으나 아직 너무 어렸다. 심만이 딸을 너무 총애해 심모는 후원의 음험함을 잘 알지 못하고 순진하게 자랐다. 게다가 지금 심모는 출가 전이라 언니, 여동생, 이낭(姨娘, 서모), 시첩(侍妾, 낮은 신분의 첩) 등 모든 사람을 신경 써야 하는 입장이었다.

진약추는 심만을 견고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움켜쥐고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들은 낳지 못했다. 심만이 얼마나 그녀를 총애하든 간에 아들이 없으니 결국 이 균형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 것이다. 심만과 첩실 사이에 아들이 생길까 두려웠다. 그러니 더더욱 딸을 잘 교육해야 했다.

“심모야, 넌 심묘를 어떻게 여기니?”

진약추가 가볍게 물었다. 심모는 잠시 골똘히 생각한 뒤 대답했다.

“계산, 책론은 물론이고, 기예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나약하고 아둔한 성격에 말주변도 없지요. 만일 큰아버지의 명성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대접해줄 사람은 없었을 거예요. 오히려 서녀인 심동릉이 더 재능 있고 도량도 넓을걸요?”

다른 사람이 이 대화를 들었다면 아연실색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심묘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온유한 사촌 언니로 알려진 심모가 심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깎아내리다니.

“예전이라면 그랬을 거다. 그런데 내가 보니 이번에 물에 빠진 후 심묘가 적지 않게 변한 듯해.”

진약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 무엇 때문에 그리 말씀하세요?”

심모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진약추도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몰랐다. 물론 송경당에서 심모가 공격을 당해 자신도 일시적으로 울컥한 면이 있었다. 그렇지만 사람 보는 눈이 임완운보다도 더 정확하다고 자부하는 진약추의 안목으로 볼 때, 심묘는 별안간 똑똑해졌다. 심묘가 송경당에서 노부인을 대하는 태도도 과거와 분명하게 달랐다. 부수의의 일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건지 아니면 곁에 조언해주는 고수가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정왕 전하 일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겠지. 하지만 심모야, 이 어미의 말을 귀 기울여 듣거라. 총명한 여인은 여인을 상대하지 않는단다. 그녀들은 남자만을 상대하지.”

진약추의 목소리는 부드러워 마치 새가 노래를 지저귀는 듯했다.

“네가 정왕 전하를 따르기로 마음을 정한 이상, 구태여 심묘에게만 집중할 필요가 있겠니? 이방에게 얼마나 권세가 있든, 황실 남자는 절대 아둔하고 무지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단다. 정왕 전하는 귀한 황자이시니, 격이 맞지 않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시지 않겠어?”

“하지만…….”

심모는 조금 억울했다.

“어미의 말을 듣거라. 넌 이 일로 인해 심묘와 멀어지지 않도록 해. 이전처럼 그녀와 친구처럼 지내야 한단다. 앞으로도 꾸준히 심묘에겐 없는 재능과 미모를 네가 갖추었음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하렴. 심묘의 아둔함이 부각될수록 너의 출중함이 더 드러날 테니까.”

진약추는 웃으며 일상 잡담을 하듯 말을 이었다.

“이 어미는 계 유모에게 심묘가 계속 정왕 전하를 사모하도록 권하게 했단다. 아둔한 여자가 온 마음을 다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꼴이지. 정왕 전하께서는 갑절로 그녀를 혐오하시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심모는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었다. 진약추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총명한 아이니 어미의 뜻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계속 정왕 전하를 사모하도록 권해 정왕 전하 앞에서 망신당하도록 해라. 그렇게 해야 정왕 전하께서 출중한 너에게 더욱 관심을 두지 않으시겠니? 설령 모두가 정왕 전하에게 심묘와 혼인하라 해도, 정왕 전하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 너라면 네가 이긴 것이야.”

“어머니……. 알겠어요.”

심모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진약추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진약추가 웃었다. 심만과 혼인할 때도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그때의 심만은 촉망받는 인재로, 많은 중매인이 혼사를 건넸었다. 그런데 어떻게 집안이 떨어지는 진약추와 혼인했을까.

진약추와 심만은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진약추는 흰색 비단옷을 입고 나무 아래서 금을 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심만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 경탄하며 결국 그녀를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그 모든 건 진약추가 사전에 세심히 준비한 것들이었다. 그녀는 심만이 금 연주를 즐겨 들으며 색 중에서 흰색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많은 여자가 심만 쟁탈전에 뛰어들었으나, 진약추는 심만이 좋아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아내 빛나는 승리를 거머쥐었다.

심가에 적녀가 세 명이면 또 어떤가? 오직 자신의 딸 심모만이 부수의를 사로잡아 최후의 승자, 존귀한 황자비가 될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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