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동원이 어떻게 나오든 신경 쓰지 않고 심묘는 이방, 삼방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전처럼 심모와 심청에게 달라붙지도 않았다. 동원에서는 처음엔 심묘가 물에 빠진 일로 어린아이처럼 앙심을 품고 있을 뿐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심묘가 스스로 일을 처리하기 시작하자, 그제야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진즉 이방과 삼방에 매수된 계 유모는 꾸준히 심묘에게 동원에 분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고, 때때로 빙빙 돌려 부수의가 명제에 하나밖에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심묘는 굳게 결심한 듯, 계 유모가 부수의를 언급할 때마다 매섭게 꾸짖어 계 유모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서원에는 계 유모 외에도 이방, 삼방에 속한 교활한 노비들이 다수 있었다. 곡우는 심묘의 성격이 바뀌었으니 조만간 후원을 정리할 거라 여겼으나 심묘는 그런 데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심묘에게는 비밀스러운 한 가지 계획이 있었고 첩자들은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심묘는 꾸준히 광문당에 갔다. 학생들은 여전히 심묘를 깔보았으나 그녀는 화내지 않았다. 매일 학업을 갈고닦을 뿐이었다. 그녀의 변한 모습에 모두 흥미를 잃기 시작했고, 평안한 날들이 계속됐다.
이른 아침. 사부(辭賦, 시문) 수업이 끝난 후, 심묘는 답답함에 광문당 안 화원을 산책했다. 광문당은 학당이지만 면적이 매우 넓었다. 총 세 학년이 있었고, 심묘는 그녀의 나이에 따라 국이 학년에 배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국일 학년이 공부하는 건물 앞까지 걸어갔다.
그때 어린아이가 층계 위에 앉아 눈물을 닦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는 일고여덟 살쯤으로 보였고, 희고 통통해서 작은 공처럼 귀여웠다. 은실 자수가 놓인 파란색 윗옷을 입고 천으로 된 장화를 신었고 목에는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심묘는 놀라 아이에게 다가갔다.
“왜 우니?”
아이는 갑자기 사람이 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깜짝 놀라더니 쿵 소리를 내며 계단 위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벌떡 일어나 멍하니 심묘를 보았다. 동그란 눈은 물기가 있음에도 생기가 넘쳐 반짝거렸다. 머리는 곱슬곱슬했고, 귀엽고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심묘는 참지 못하고 풋 하고 웃었다.
아이가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심묘의 마음은 녹아내렸다. 그녀는 전생에 완유와 부명을 낳았다. 아이들을 두고 진국에 인질로 가 있는 사이, 궁중 규칙을 배운 두 아이는 돌아온 그녀를 어마마마라고 불렀다. 심묘는 진국에 가 있던 5년 동안 자신의 두 아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지 못했다. 눈앞의 아이는 당시 부명과 완유보다 커 보였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운 어리숙한 모습이 완유와 부명을 떠올리게 했다.
심묘는 쪼그리고 앉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우니?”
“선생님이 내게 질문을 하셨는데, 대답을 못 했어요. 난 손바닥을 맞았고요. 아주 아파요.”
아이는 손을 내밀어 빨간 손바닥을 드러내고 억울해했다. 심묘는 아이를 놀리고 싶어졌다.
“선생님이 너에게 무슨 질문을 했지?”
“선생님이 토사호비 네 글자를 쓰라고 하셨는데, 쓰지 못했어요.”
아이는 기분이 언짢은지 얼굴을 찌푸렸다.
국일 학년의 나이에 글자를 외워 쓰지 못한다면 확실히 실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부명은 이 아이 나이 때 이미 정사를 처리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조금은 미숙했지만 적지 않은 일에 대처할 수 있었다. 많이 조숙해야만 하는 황자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광문당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모두 귀족의 아이니 기초 지식이 부족하다면 문제가 될 터였다.
그 아이는 계속 칭얼거렸다.
“아버지께서 이 일을 아시면 반드시 호되게 혼내실 거예요. 더 살아서 뭐 하겠어요? 차라리 머리를 박고 죽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심묘는 아이의 극단적인 표현에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픈 목소리가 우습기도 했다. 요 귀염둥이가 어디서 이런 경극 대사 같은 말을 배웠을까.
“넌 어느 집 아이니?”
아이가 심묘를 올려다보았다. 심묘 역시 아직 학생이기에 생김새만 봤을 때는 아이와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왜인지 모르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진중한 분위기를 풍겼다. 거대한 풍랑을 겪은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기상.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안심하고 한 글자씩 또박또박 자신을 소개했다.
“난 평남백부 소가의 둘째 소명랑이에요. 아버지는 평남백 소욱이고, 내 형님은 평남백부 적장자 소명풍이고요.”
기다렸단 듯 아이는 자신의 신분과 경력을 분명히 말했다.
소가라니. 평남백이라니. 심묘는 멍해졌다.
전생과 현생을 포함해 소가와 심가는 교류를 나누지 않았다.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까닭이었다. 대신 소가는 사가와 관계가 좋았고, 평남백 소욱과 임안후 사정은 형제처럼 친밀하게 지냈다. 소명풍과 사경행도 어려서부터 놀며 자란 친구니, 두 사람의 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후에 소명풍이 죽었을 때 그의 시체를 거둔 사람도 사경행이었다.
소명풍이 죽는 순간, 소가 역시 멸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혜제는 소가가 병사와 군마를 매매해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증좌를 찾아냈다. 병사와 군마가 관련됐으니 문혜제의 뜻을 꺾을 명분이 없었다. 문혜제는 신속히 행동했다. 심문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군대를 데리고 가 가산을 몰수하고 그 자리에서 소가 일족을 전부 사형시켰다. 대낮, 소가의 피가 정경성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렀다.
사경행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생존자를 찾을 수 없었다. 소가와 친교를 맺은 이들 모두가 문혜제의 눈 밖에 나는 것을 두려워해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오직 사경행만이 나서서 소가의 시신을 직접 수습했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임안후 사정은 문혜제 앞에서 아들 사경행의 죄를 자인하고 처벌을 요청했다. 그러면서도 소가가 명제를 위해 세운 공적이 있으니 시신을 매장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문혜제는 이를 허락하며, 소가의 뒷일을 사가가 처리하게 했다. 심묘는 연말에 수도로 돌아온 심신이 이 일을 알고는 매우 탄식한 것을 분명히 기억했다.
소가의 멸망까지는 앞으로 고작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눈앞의 이 귀여운 아이는 문혜제의 냉혹한 칼날에 살해당할 운명이었다. 심묘의 눈빛이 냉정하게 변하며, 눈 속 깊은 곳에서 맹렬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이는 이유 없이 떨려 몸을 움츠렸다.
심묘는 감정을 갈무리한 뒤 다시 아이를 보며 따스한 말투로 물었다.
“소명풍? 최근 공로를 세운 준마관으로, 아주 멋지다는 그 소가 첫째 공자 아니니?”
“맞아요!”
아이가 고개를 쳐들고 자랑스레 대답했다.
“폐하께서 이번에 반드시 형님의 공로를 칭찬하실 거라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심묘는 웃으며 허리를 굽혀 아이에게 다가가 작게 말했다.
“네 아버지께서 네가 선생님 질문에 답하지 못한 걸 알면 널 벌하실 거라 했지? 내게 그것을 피할 방법이 있어.”
“뭔데요?”
아이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내가 알려준 거라고 말하지 않기로 반드시 약속해야 해. 그래야만 말해줄 수 있어.”
“좋아요.”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 *
소가는 병사의 군마를 관리하는 명문대가로써 병기, 병사, 군대를 관리하는 대관이었다. 명제 개국 이래 소가는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평남백 소욱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소가의 찬란한 영광은 오래도록 이어지리라 생각했다. 충심으로 일한다면 황가가 자신들을 푸대접할 리 없다 믿었다.
하지만 예로부터 군주를 모시는 것은 호랑이 옆에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세상의 일 중 변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소욱은 마흔이 넘었음에도 부인과 금실이 좋았다. 첩실도 몇 있었지만, 그녀들은 모두 딸을 낳았다. 적자는 둘뿐이라 아들 교육에 늘 극도로 엄했다. 큰아들 소명풍은 어린 나이에 관직에 올라 그의 부친처럼 병사와 군대의 관리 권한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반년 전부터는 소욱보다 앞설 만큼 능력이 출중했다. 소명풍은 태의원 수의들과 상의해 군마 규칙을 개혁했다. 이로 인해 매년 급성 전염병으로 죽는 군마 수가 반으로 줄었으니, 분명 큰 공로였다. 다음 달 조정에 군마 통계가 올라가면 소명풍은 반드시 상을 받을 터였다.
물질적인 상은 부차적인 것일 뿐, 주요한 것은 명예였다. 소욱은 이미 마흔 살이 넘었고, 소명풍이 부친의 업을 이어받기 좋은 나이가 되었으니 그의 명성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소명풍이 일찍이 출중함을 인정받는다면 다음 대 황제의 측근이 될 터였다.
큰아들이 이처럼 출중하니 소욱은 기뻤다. 그러나 작은아들은 그를 골치 아프게 했다. 작은아들 소명랑은 늦은 나이에 얻은 자식이라고 부인이 지나치게 오냐오냐 키운 감이 있었다. 큰아들처럼 남다른 두각을 보이기는커녕 동갑내기와 비교해도 늘 뒤처졌다. 그래도 소 부인은 늘 작은아들을 두둔하고 보호했다. 소명랑은 차남으로 집안을 이어받을 필요가 없으니 조금은 아둔해도 문제없다고 여겼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소욱은 강직하고 고집 센 성격이었다. 자기 아들이 남들보다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늘 광문당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소명랑을 불러다 시험을 보게 했고 그 결과를 꾸짖었다.
소욱은 서재에서 소명풍과 일을 상의하고 있었다. 부자 둘이 군마 일을 이야기할 때면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소욱은 이런 우수한 아들을 두어 의기양양했다. 화제는 다음 달 소명풍이 상을 받는 일로 넘어갔다.
“내가 볼 때, 폐하께서 이번에 반드시 네 품계를 높이실 게다. 진주, 보석 등 하사품은 말할 것도 없지. 아비는 네 벼슬길이 더욱 탄탄대로이길 바란다. 흉노가 난동을 부리고 있으니 지금은 군마의 힘이 더욱 중요시되는 때다. 명풍아, 장래 우리 소가가 더욱 장성할 수 있도록 폐하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 네 동생은 나이가 어려 철부지이니 네가 소가를 이끌어가야 해.”
소명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미간 사이에 기품과 위엄이 서렸다. 그러나 득의양양한 기색이 무의식중에 드러났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명예를 드높이려는 욕구가 강했다. 부친으로부터 인정도 받고, 그가 줄곧 관리한 일의 중요성이 드러났으니 누군들 그럴 것이었다.
그때, 남종이 문밖에서 외치는 게 들렸다.
“어르신, 둘째공자님 오셨습니다.”
어느덧 소가의 둘째 공자 소명랑의 하교 시간이었다. 소명랑은 하교 후 거의 매일 무엇을 배웠는지 보고하기 위해 소욱의 서재에 들렸다. 소욱은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꾹꾹 눌렀다. 특출한 큰아들과 있다가 다시 아둔한 어린 돼지 같은 둘째 아들을 생각하니 기가 찰 지경이었다. 소명랑의 서재 방문은 매번 소욱의 분노로 끝을 맺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소명랑이 천천히 서재로 들어와 입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아버지, 형.”
소명랑은 동그란 공처럼 둔하고 귀여웠다. 소명풍이 웃으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학당에서 즐거웠느냐?”
소명랑은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이러는 것은 잘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아마 조금이라도 잘한 부분은 없고, 선생에게 꾸지람만 들었을 것이다. 소욱이 딱딱한 얼굴로 소명랑에게 말했다.
“손바닥을 내밀어라.”
소명랑은 몸을 움츠리고 떨더니 억울해하며 손을 내밀었다. 희고 보드라운 손바닥 안, 막대기로 맞은 듯 붉은 흔적이 몇 줄 보였다. 소욱은 이를 예상한 모양이었으나, 소명풍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선생은 어째서 이리 심하게 때렸을까. 아직 아이인데.”
“너희가 종일 지나치게 오냐오냐해서 저 아일 망친 게다!”
소명풍이 동생을 두둔하자 소욱이 더욱 노발대발했다.
“오늘은 또 무엇을 틀린 게냐?”
소명랑은 가만히 있다가 우물쭈물 말했다.
“선생님이 저에게 토사호비 네 글자를 외워 쓰게 했는데, 쓰지 못해서…….”
소욱은 기가 막혀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대체 네가 잘하는 게 하나라도 있는지 말해보거라! 글자도 외워 쓰지 못하다니. 네 형을 보거라. 어디 너 같으냐? 네 형은 네 나이 때 군마 공부를 시작했다. 네가 우리 소가의 체면을 다 깎아버리겠구나!”
소명풍이 만류하려 할 때, 소명랑이 흐느끼며 말했다.
“전 비록 토사호비 네 글자는 못 썼으나, 토사구팽은 외울 수 있습니다. 같은 의미인데, 토사구팽을 외우면 되는 것 아닌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소욱은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이에 소명풍이 미소 지으며 동생에게 물었다.
“둘째야, 이 두 개 말이 같은 의미라고?”
“그럼 무슨 뜻인데요?”
소명랑은 작은 얼굴을 들어 물었다.
“토사호비(兎死狐悲)의 뜻은 토끼가 죽으니 여우가 자신과 같은 운명에 슬픔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러나 토사구팽(兎死狗烹)의 뜻은 토끼를 잡으면 가치가 없어진 사냥개를 삶는다는 것이지. 이익을 모두 챙기고 나면 이용 가치가 없어진 도구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토끼가 죽었다고 사냥개를 삶는 것은 배은망덕한 것이야.”
소명풍은 인내심을 가지고 동생의 질문에 상냥히 대답했다.
그러나 소명랑은 여전히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 토끼가 죽은 후 발생하는 일이니, 어쨌든 같지 않나요? 결국 토끼는 죽은걸요.”
소명풍이 다시 설명하려 할 때, 소욱의 표정이 변했다. 소욱은 소명랑이 한 말을 읊조렸다.
“어쨌든 토끼는 죽었다?”
소명랑의 동그란 얼굴은 여전히 천진했으나 완고한 기색을 띠었다. 소명랑은 손바닥을 내밀면서도 말을 이었다.
“맞아요. 결국 토끼는 죽었어요. 두 가지 모두 토끼가 죽으면 여우든 개든 다 재수 없는 일을 당할 거라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말의 의미는 같은 거 아니냐고요!”
토끼가 죽자 사냥개를 삶는다. 우화가 우화로서 제 나름의 가치를 갖는 이유는 큰 이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토끼가 죽자, 여우는 개보다 총명하니 자신의 말로를 예측했을 것이다. 주인을 도와 토끼를 잡은 개가 죽음 외에 어떤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까.
소욱의 표정이 점점 가라앉았다.
* * *
10월 초, 큰일이 발생했다며 정경성은 시끌시끌했다. 평남백부의 적자 소명풍이 갑자기 중병에 걸려 집에서 요양하기 시작했다는 게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아들을 끔찍이 아끼기로 소문난 평남백은 부인과 함께 집에서 큰아들을 보살피며 군마 일은 잠깐 손에서 놓았다. 황제는 하사품을 내려 평남백을 위로했고, 그의 일은 새로운 관리가 물려받았다.
정경성의 백성들은 소명풍의 일을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벼슬길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큰 공로를 세운 그가 단번에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시기에 갑자기 중병을 얻은 것에 탄식했다. 하늘은 뛰어난 인재를 질투한다 했던가. 와병 생활이 넉 달을 넘긴다면 다시 조정에 돌아갔을 때 설 자리가 없을까 그를 걱정하였다.
하지만 조정 동료들의 생각은 백성들과 달랐다.
“병은 무슨, 화를 피하려는 게지. 소가가 왕성하게 행동해 잘못하면 문제가 될 수도 있었는데, 지금 정세를 똑똑히 보아 문제를 해결한 셈이야.”
이 일이 심묘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화원에서 해당화 잎을 다듬고 있었다. 요 며칠 광문당에서도 소명풍의 일이 큰 화제였으나 그녀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는 드물게 한가한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아가씨, 요즘 이런 꽃과 풀을 좋아하시네요. 해당화가 너무 아름다워요.”
곡우가 웃으며 말했다.
진홍색 꽃잎의 해당화가 스산한 가을에 뛰어난 색채를 더했다. 심묘는 황후일 때 후궁에서 살길을 모색하는 법을 배웠고, 부수의를 도와 권신을 끌어들였다. 많은 날을 모략에 대응하고 대책을 세우면서 정신없이 보냈기에 이처럼 꽃을 다듬을 여유도 없었다.
“넌 해당화가 왜 이렇게 아름답게 피는지 아느냐?”
곡우는 심묘의 저의를 모르고 그저 웃으며 대답했다.
“바깥에서 들여온 관리의 말을 듣자니 금같이 귀하다고 하더군요. 부인께서도 해당화가 가을에 특별히 아름답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듯 심묘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옥같이 음산하고 추운 냉궁 주위에도 오색찬란한 꽃은 가득했다. 그 아래에 백골이 쌓여 꽃의 영양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가장 차가운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소가는 그 법칙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들이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 심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 * *
평남백부.
소명풍의 거처는 경계가 삼엄했다. 소욱이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남종과 친족, 인척 외에는 아무도 드나들 수 없게 했기에 외부인들은 집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다. 바깥에선 뜰의 안팎에서 나는 약재 향만 맡을 수 있을 뿐이었다.
소명풍의 친한 친구 사경행 역시 당연히 병문안을 왔다. 사가의 마차가 소부의 바깥에 정지했고, 남종이 힘껏 약재를 옮겼다. 커다란 상자에 잔뜩 담긴 약재가 사경행의 절친을 걱정하는 마음을 대변했다.
서재 안. 소명풍은 청색 무명옷 차림이었다. 조금 여윈 것 말고는 지난날과 다름없이 멀쩡했다. 중병에 시달린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사경행이 미간을 찌푸렸다.
“화를 피해?”
소명풍은 친한 친구를 보며 탄식했다.
“그래, 지금 너도 봐. 소가의 세력은 점점 커지고 있어. 소가는 이미 몇 대째 권세를 누렸고, 군마 부분에서는 더 위로 올라갈 수 없는 경지에 다다랐지. 그런데도 폐하께선 억누르시는 게 아니라 더욱 소가를 끌어올리셨어.”
“네가 공을 세웠으니까.”
사경행이 소명풍을 일깨웠다.
“맞아. 공을 세웠으니까. 그래서 부친과 나는 매우 기고만장했고, 숨겨진 위기를 잊었던 거야. 공로가 높고 은덕을 많이 베풀수록 화를 쉬이 입는 법. 내 말을 너도 이해할 거야. 종전의 소가는 눈앞의 명예에 미혹되어 전체를 보지 못했지.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야. 낭떠러지 앞에서 말고삐를 잡아챈 격이지. 확실히 아주 위험했어.”
“그렇다면 다행이군. 하지만 넌 앞으로 적어도 몇 년을 허비해야 할 거야.”
사경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했다.
“난 나의 영화보다 집안의 평온이 훨씬 중요해. 이 대화는 이만하고, 넌 어때? 소가와 사가는 어느 한 곳이 부귀해지면 함께 부귀해지고, 한 곳이 망하면 같이 망할 운명인데. 소가는 이미 위험에 직면해 돌아서기로 했지만, 사가는…….”
소명풍이 말을 흐리자 사경행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어. 넌 능력이 뛰어나지만, 난 뭐가 있어? 임안후는 늘 천하 사람의 입에 주의하지.”
사경행과 소명풍은 달랐다. 소욱은 소가를 위해 아들을 일찍 벼슬길에 올렸다. 그러나 사경행은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채 한가로이 지냈다. 몇 번 부친인 사정을 따라 출정하긴 했으나 부모와 자식 간 혈연관계에 따라 도운 것뿐이었다. 황실이 사가를 억누르려 해도, 후계도 잇지 않은 가문을 견제할 수는 없었다.
“넌 그렇게 주도면밀하게 준비했구나.”
소명풍이 웃음을 터트렸다.
“황실을 대비한 건 아냐.”
사경행이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자신의 말대로 그는 황실의 위협에 대비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와 대립했을 뿐. 잠시 상념에 빠졌던 사경행은 곧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깨달은 거야? 예전에 내가 몇 번이나 말해도 안중에도 안 두더니?”
소명풍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예전에는 감정이 고조되어 의기양양했으니 눈에 보이는 게 없었지. 그러니 어찌 그리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겠어? 이번에는 명랑이 덕분이야.”
사경행은 축 늘어져 의자에 기대 있다가 소명풍의 말을 듣고 몸을 세웠다. 흥미롭다는 듯 눈에 이상한 광채가 반짝였다.
“그 찹쌀경단?”
소명랑, 그 우둔한 경단이 무슨 진기한 방법으로 소가를 일깨웠다는 건가. 소명랑이 약을 잘못 먹은 게 아닌지 사경행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소명풍은 지난번 일을 간략히 설명하고 동생을 치켜세웠다.
“이번에 명랑이 우연히 한 말이 아니었다면 큰 재앙을 입었을 거야.”
“우연이라?”
사경행이 작게 혼잣말했다.
그때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어머니께서 간식을 전해주래요.”
소명랑이 바삭하게 구운 꽃 모양 과자를 한 접시 들고 짧은 다리로 걸어 들어왔다. 여전히 둥글고 통통한 얼굴이었고 입가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붙어 있었다. 분명히 가져오는 도중 몰래 먹었을 것이다.
소명랑이야 별 뜻 없이 한 말이겠지만, 그 말에 깨우침을 얻은 소가는 전략을 바꾸었다. 소명랑에게 불만이 많던 소욱은 처음으로 자기 아들을 인정했다. ‘총명하고 지혜로우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 어리석게 보일 뿐, 마음속에는 원대한 계획을 품고 있는 자식’이라고 칭찬을 거듭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 부인은 소명랑을 기특하게 여겨 맛있는 것을 계속 먹였고, 그는 며칠도 안 되어 더욱 통통해졌다.
소명랑은 방에 있는 사경행을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왜인지 모르게, 그는 늘 형의 준수한 친구가 무서웠다. 소명랑은 간식을 탁자 위에 놓고 형에게 몇 마디 던진 후 도망치려 했으나 옷깃을 붙잡혔다.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소명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생기 어린 아름다운 눈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으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웠다.
“토사구팽, 누가 너에게 가르쳐준 거지?”
소명랑이 기겁하며 눈을 크게 떴고, 사경행은 사악하게 웃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날씨가 점점 차가워짐에 따라 광문당의 학생들도 시험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남자아이들은 벼슬길에 들기 위해, 여자아이들은 재능을 드러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함으로써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맞는 가문의 남자와 혼례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인생과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이기에 여자아이들도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심청과 심모는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심모는 온종일 동원에서 금을 연주하고 시를 지으며 이번에도 자신의 재능이 돋보이길 희망했다.
심모와 심청은 혼사 상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명제의 여인들은 어린 나이에 정혼할 수 있으며, 대략 방년 전에 출가했다. 하지만 심모와 심청은 아직 정혼 상대를 결정하지 않았다. 눈이 높아 평범한 사람은 성에 차지 않을뿐더러, 둘이서 짜기라도 한 듯 함께 부수의를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 문혜제가 낳은 아홉 황자 중 아홉째인 정왕 부수의만이 지금까지 정혼하지 않았다. 갓 스무 살을 넘긴 그는 신부를 맞이할 때였지만 여러 이유에서 황자비 자리는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이번 시험에는 부수의도 직접 시험관으로 참석할 예정이었다. 광문당의 여자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수의 앞에서 잘 보여 그의 마음이 자신에게로 향하길 바랐다. 그래서 모두 더욱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시험 종목은 무엇 하나 출중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심묘는 전생을 겪은 후 남녀 간의 사랑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더구나 그녀는 부수의와는 절대로 얽히고 싶지 않았다. 철천지원수와 부부의 연을 맺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전생의 빚은 조만간 갚아줄 것이었다.
풍안녕이 심묘에게 말했다.
“왜 책을 보지 않는 거야? 곧 월말인데 또 꼴찌를 하면 다들 엄청 비웃지 않겠어?”
심묘는 물에 빠진 후, 많이 조용해졌다. 풍안녕은 심묘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건가 했는데, 지금 보니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아둔하고 무지했다.
“분명히 잘 못 볼 텐데, 구태여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어?”
옆에서 심묘의 말을 들은 역패란이 풋 비웃으며 비꼬았다.
“맞는 말이야. 능력도 없는데 굳이 노력할 필욘 없지.”
심모는 심청과 대화를 하며 역패란의 말을 듣지 못한 척했다. 심묘가 곤경에 빠져도 돕고 싶지 않았다. 심묘가 예전처럼 자신들을 잘 따르지 않아 이미 마음속에 불만이 가득하던 차였다. 심묘가 망신당하는 걸 보고 싶었다.
심묘는 역패란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화원에 가서 걸을래.”
심묘가 자리를 뜨자 역패란이 입을 삐죽였다.
“할 말 없으니 도망치는구나. 정말 쥐새끼처럼 간이 콩알만 하네.”
“적당히 할 수 없어?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
풍안녕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풍안녕의 집안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에 역패란은 그녀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심묘는 화원을 느리게 걸었다. 광문당의 화원은 무성한 대나무가 죽림을 이루고 있었고, 앙증맞은 연못과 인공산이 자리했다. 숲 내음을 맡으니 기분이 한결 후련하고 개운해졌다.
심묘는 안정을 취하고 싶었다. 국이 학년 학생들은 아무래도 아이들인지라 혈기왕성했다. 그러나 그녀는 전생에 어머니였고, 황후 시절에는 여러 후궁의 문안을 받는 것 외에는 봉의전 안에서 하는 일 없이 외로이 지냈다. 쓸쓸하고 고독한 게 익숙해진 지 오래였기에 아이들과 웃고 떠드는 것도 악의적인 태도에 대응하는 것도 다 귀찮았다.
그때, 눈앞에 눈처럼 하얀 찹쌀경단이 보였다. 상아색 비단 장포를 입은 작은 경단이 대나무 아래 서 있었다. 옷 자체는 고급품이었지만 아이가 워낙 토실토실한 탓에 맵시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거기에 머리카락마저 곱슬곱슬해 웃음을 자아냈다.
“소명랑.”
경단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심묘를 본 소명랑의 눈에 놀라고 기쁜 기색이 스쳤다. 다가오려는 듯 보였으나 곧 머뭇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이 아이는 너덧 살 어린아이처럼 순진하달까…… 나쁘게 말하면 좀 모자라는 구석이 있었다. 소명랑은 심묘를 보더니 입술을 달싹여 뭔가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이는 이내 눈가가 붉어지더니 작게 속삭였다.
“미안해요…….”
미안하다니,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심묘는 조금 멍해졌다. 아이가 입술을 오므린 채 울먹였다. 그때 권태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였구나.”
죽림에서 수려한 소년이 걸어 나왔다. 그는 테두리를 은색으로 장식한 상아색 비단옷을 입었는데, 소명랑에 비할 바 아니게 우아했다. 그는 심묘 앞으로 걸어와 걸음을 멈추고 높은 곳에서 그녀를 굽어봤다. 시선 속에는 탐색의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소년은 키가 컸기에 심묘의 머리가 그의 가슴 정도에 닿았다. 그는 입가에 언제나처럼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고 있었으나, 그의 빼어난 얼굴 때문에 조금도 느물댄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보통 소녀라면 그 웃음에 심장이 빠르게 뛰고 얼굴은 물론 귀까지 빨개졌을 것이다.
물론 심묘는 보통 소녀가 아니었다. 상대방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에 소년의 양 입꼬리가 올라갔다. 언제 쥔 것인지 손에는 정교한 단도를 쥐고 있었다. 그는 칼자루로 심묘의 턱을 올려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심묘는 어쩔 수 없이 상대방과 눈을 맞췄다.
소년은 대략 약관에 조금 못 미쳐 보였다. 꼬리가 날카롭게 위로 올라간 눈썹, 별 같은 눈동자, 웃는 듯 마는 듯한 모습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시선 깊숙한 곳에서는 상대방이 오한을 느낄 정도의 예리함이 빛났다. 마치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듯도 했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세상을 대충 사는 듯해도 내심은 얼음처럼 차가워 가까이하기 어려운 법이다.
심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한 걸음 물러나 단도의 칼자루를 자신의 턱에서 떨어뜨렸다. 그리고 온화하게 말했다.
“사 소후야.”
사경행이 웃었다.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투로 물었다.
“날 아느냐?”
“정경성 안에서 사 소후야의 고명한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묘가 담담히 말했다. 비꼬는 듯한 기색도 있었으나 심묘가 워낙 담담히 말해 확신하기 어려웠다.
“난 널 모르는데?”
사경행은 그녀를 훑어본 후 옆에서 벌벌 떠는 소명랑을 쳐다보았다.
“네가 소명랑을 통해 소가에 말을 전하게 했나?”
심묘는 사경행을 보고 살짝 웃었다.
“소명랑이 부친께 혼나지 않도록 주의를 돌릴 방법을 알려준 것일 뿐이에요. 무슨 말을 전하게 했다고 하십니까? 소후야의 생각이 지나치다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생각이 지나치다?”
소년은 잠시 그 말을 음미하더니 갑자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심묘는 뒷걸음쳤으나 등 뒤에는 거대한 나무가 있어 거기에 기댄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사경행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말투는 매우 단호했다.
“내가 생각이 지나치지 않았다면, 너에게 속아 넘어갔겠지.”
심묘는 미간을 찌푸렸다. 명제는 남녀 관계에 엄격한 편은 아니었지만, 대낮에 미혼 남녀가 이런 자세를 취하는 건 평판을 잃을 만한 일이었다. 더욱이 다른 공훈 자제들이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 자신의 평판이 나빠지는 것은 상관없으나, 부친 심신이 자신 때문에 창피를 당할까 걱정되었다.
전생에서 심가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멸족했다. 심묘는 그간 부모가 고심하는 것을 충분히 보았다. 다시 살아났으니 반드시 가족을 보호할 것이다. 지금의 모습을 보고 누군가 나쁜 소문을 낸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심묘는 귀찮은 듯 물었다.
“사 소후야, 엄하게 질책하시는데 도대체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경행은 심묘를 응시했다. 그가 대단히 잘나 보이는 것은 단지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직감이 대단히 뛰어난 편이었다. 몇 가지 작은 단서로 전체적인 흐름을 깨닫곤 했다. 일찍부터 부친을 따라 전쟁터에 나간 덕분에 직감은 더욱 발달하여 정경성 내의 암투나 남을 해칠 교활한 흉계들도 빨리 알아챘다.
명제에는 많은 공훈 집안과 그 자제들이 있었지만, 매년 온갖 이유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때문에 사경행은 어떠한 일이든 사소하게 여기지 않았다.
평소의 소명랑답지 않은 발언에도 소명풍은 다른 요인을 따져보지 않았고, 소욱도 소명랑이 부지불식간 똑똑해졌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사경행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복잡한 상황을 이렇게 공교롭게 깨닫다니. 진정한 우연이란 흔치 않다. 대다수 우연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는 누군가 소명랑을 가르쳐 부추긴 거라 단정했다. 그런데 도대체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만나고 보니 의외의 인물이었다.
사경행은 꾀를 부린 자가 조정의 주요 대신의 아들이거나 곧 벼슬길에 들어설 청년일 거라 예상했다. 소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일부러 귀띔해준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 뒤에서 심묘를 보았을 때는 소명랑이 자신에게 장난을 치고 있다고 여겼으나, 심묘가 소명랑을 부르는 것을 보고 그녀가 자신이 찾던 사람임을 확신했다.
심묘는 그의 가슴에 겨우 닿을까 말까 했다. 매혹적인 생김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귀여워 보이긴 했다. 주먹만 한 어린 얼굴에 눈은 컸고 입은 작았다. 마치 숲속에서 길을 잃은 어린 사슴 같았다. 하지만 단정히 서서 한마디씩 천천히 말하는 모양새는 마치 궁중의 가르침을 받은 듯했다. 잠시 심묘가 황후가 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던 사경행은 자신의 과한 생각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위로 보고 아래로 보고, 오른쪽으로 보고 왼쪽으로 봐도 평범한 여자아이에 불과했다. 아니, 그녀와 몇 마디 나누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녀는 여리게 생겼지만, 말투는 진중했고 얼굴에는 허둥대는 기색 하나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사경행과의 만남이 조금 귀찮은 듯한 눈치였다. 사경행에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다른 여자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사경행을 보았다면 부끄러워 얼굴과 귀가 빨개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안색은 담백했으며 진심으로 흥미가 없어 보였다. 나이가 너무 어려 남녀 간의 일이라곤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가도 싶었다.
그녀가 왜 소가에게 그런 말을 전했을지 고민하던 사경행은 심묘가 기댄 나무에 한 손을 얹고 주변을 흘깃 보았다. 얼핏 보면 사경행이 심묘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경행은 고개를 숙여 심묘의 얼굴에 아주 가까이 댔다.
“넌 날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소후야께서 사람을 먹는 요괴도 아닌데 왜 두려워해야 하나요? 다른 용무가 없다면 전 먼저 학당에 돌아가겠습니다.”
심묘는 담담하게 말을 마치고 바로 몸을 돌렸다.
“거기 서.”
사경행이 손을 뻗었다. 심묘의 머리카락이 그의 손바닥을 스쳤다. 개미가 기어가듯 간지러운 느낌에 사경행은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는 몇 걸음 물러나 나무에 기대 팔짱을 끼고, 특유의 낮잡아보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소가를 일깨운 목적은 뭐지?”
그의 말은 그의 시선처럼 날카로웠다. 돌려 말하지 않고 직접적이었으며,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심묘는 속으로 탄식했다. 사경행은 예상보다 더 뛰어났다. 소명랑의 한마디에 이곳을 찾아와 자신을 찾아냈고, 의도를 묻는다. 단순히 식견이 넓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사람을 훤히 꿰뚫어 보는 총명함을 지녔다. 똑똑한 사람을 상대하면서 진심을 숨기는 것은 어렵다. 게다가 숨기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스스로 보호하는 것뿐입니다.”
심묘는 사경행을 향해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한 후 바로 몸을 돌려 떠났다.
스스로를 보호할 뿐이라. 입가를 굳힌 사경행은 손안의 단도를 돌리며 소명랑에게 물었다.
“소명랑, 저 여자의 이름이 뭐지?”
* * *
정경성 임안후부는 웅장하고 화려했다. 임안후부의 주모는 선황이 가장 총애한 옥청 공주였다. 부마가 된 임안후 사정의 병권을 회수하는 것이 옳으나, 선황이 옥청 공주를 얼마나 아꼈는지 그녀의 응석에 선황은 병권을 사가에 그대로 두었다.
옥청 공주는 절세미인으로 성격 또한 온유했다. 임안후부의 보물이 된 그녀는 사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럼에도 사정은 첩실 하나를 두었는데, 바로 방 씨였다. 옥청 공주가 고귀하고 부유한 신분인 데 반해, 방 씨는 가난한 집의 딸이었다. 방 씨의 부친은 사정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었는데, 그 후 집안이 몰락하자 방 씨 부친은 사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사정은 방 씨를 양첩(良妾, 양민 신분 첩)으로 들였다.
양첩은 보통의 첩과 달라서 마음대로 죽일 수 없었다. 게다가 방 씨는 총애를 다투지도 않았기에 사정도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일반적인 귀족 자제는 삼처 사첩에 익숙했으나, 사정은 단 한 명의 양첩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첩실 문제에서 남녀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갖기 마련이다. 사정은 첩실은 노리개에 불과한 데다 자신의 마음에는 여전히 옥청 공주밖에 없으니 방 씨를 받아들여도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옥청 공주는 그렇지 않았다.
옥청 공주는 어려서부터 선황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했고, 시집온 뒤에도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는 생활을 누렸다. 또한 남편에게 정처인 자신 하나뿐이던 날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첩 하나가 생긴 것이었다. 그때 옥청 공주는 막 사경행을 낳고 산후조리를 하던 중이었는데,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옥청 공주는 건강이 나빠졌다.
방 씨는 예의를 차린다고 매일 옥청 공주에게 문안을 왔다.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루도 빼놓지 않으니 옥청 공주의 마음은 더더욱 답답해져 갔다. 옥청 공주가 보통 공주였다면 방 씨를 몰래 해쳤거나 방 씨를 거의 집 안에 유폐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금지옥엽으로 귀하게만 자란 옥청 공주는 나이가 들어서도 순수한 편이라 음험한 수단을 쓸 줄 몰랐다.
이에 공주가 혼인할 때 데려온 유모가 방법을 생각해 공주 몰래 방 씨를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사정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자신이 광명정대한 성격이라 생각한 그는 여인의 잔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매섭게 옥청 공주를 질책했다.
옥청 공주는 처음으로 그와 말다툼을 했다. 공주는 억울함을 견딜 수 없었지만 유모와 관련된 일을 말하지 않은 채 사정과 날카롭게 맞섰다. 다툼 끝에 사정은 분노하며 옥청 공주의 옷소매를 뿌리치고 방을 나가 버렸다. 옥청 공주는 며칠 이내에 사정이 돌아와서 잘못했다 사과하리라 생각했으나 그는 한 달이 지나도록 방 씨와 지냈다.
한 달여가 지나자 사정은 결국 마음을 풀고 사랑하는 옥청 공주를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애석하게도 바로 그날, 출병을 명받아 인사할 틈도 없이 급히 집을 떠나야 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방 씨가 임신했음을 알렸다.
사정이 없을 때 본처인 옥청 공주는 절대 방 씨를 해칠 수 없었다. 심지어 방 씨는 아이를 품고 있으니 보호해야 했다. 만일 뜻밖의 재난이 발생하면 그녀가 남편이 없을 때 첩실을 해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질 것이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친 옥청 공주는 점점 말라 갔다. 얼마 가지 못해 상태는 매우 심각해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유모는 초조하기 짝이 없었으나, 옥청 공주는 유모가 황실에 보고하길 허락지 않았다. 대신 사정에게 자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러 돌아와 달라 편지를 썼다.
그녀는 기다리고 기다렸으나 사정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옥청 공주는 외로이 세상을 떠났다. 사정은 전쟁에서 승리해 귀가했지만 이미 옥청 공주의 매장을 마치고도 사흘이 지난 때였다. 그는 사랑하는 부인의 시신조차 묻어주지 못했고, 다만 그녀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음을 애통해할 수밖에 없었다.
선황은 진노하여 임안후의 관직을 몰수했다. 문혜제가 즉위한 후,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며 다시 임안후로 복직시켰지만 애석하게도 서로 잘 어울리던 부부의 미담은 더는 들을 수 없었다.
사정은 후처를 얻지 않았기에 곁에는 방 씨 한 명만 있었다. 방 씨는 여전히 머리를 숙이고 지냈다. 사정은 그녀가 낳은 자녀도 잠시 돌보긴 했으나, 모든 관심을 적자 사경행에게 쏟았다. 그러나 사경행은 그런 부친의 정을 기쁘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철이 들고부터 부자 사이는 점점 소원해졌다. 정경성 내 거의 모든 이가 아는 옥청 공주와 사정의 사랑과 증오, 갈등을 그 아들 사경행이 모를 리 만무했다.
사정은 아들에게 미안해서 늘 온 힘을 다해 그를 위했다. 하지만 사경행은 보란 듯이 사정이 원하는 바와 상반되게 행동하길 좋아했다. 그래서 사정은 늘 머리가 아팠다. 이렇듯 사경행은 완고하고 냉소적인 성격을 가졌음에도 옥청 공주의 용모를 그대로 물려받은 덕에 외모가 뛰어나 명제 공훈가 딸들이 꿈속에서도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
사경행은 성큼성큼 서재로 향했다. 그의 뜰은 옥청 공주가 병치레할 때 머문 곳으로, 중앙 건물과 멀리 떨어져 한적했다. 사정이 그의 거처를 중앙 건물로 옮기려 했으나 사경행이 거절했다. 이는 사실상 부친을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렇듯 임안후부에서 사경행은 줄곧 차갑고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남종이 꽃무늬 도자기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방 이낭께서 수정연밥죽을 삶아 주셨습니다. 몇 시진을 삶았다고 하니, 주인님께서는 이로 몸을 데우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수하가 자신을 ‘소야’나 ‘공자님’이라 부르는 걸 싫어해서 ‘주인’이라고만 부르게 했다. 호칭에서조차 임안후부와 관계를 멀리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노골적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사경행은 그릇을 한 번 흘깃 보았다. 빛깔이 좋고 걸쭉한 것이 하인의 말처럼 오랜 시간 삶은 듯했다. 구수한 내음에 군침이 돌 만도 했건만, 사경행은 차갑게 말했다.
“버려.”
남종은 자주 있는 일인 듯 별말 없이 그대로 물러갔다.
그때 문 뒤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확실히 조사했습니다. 심가 대방 심신의 적녀, 심묘입니다.”
“심신?”
사경행이 눈살을 찌푸렸다. 심신과 사정은 여러 해 동안 정치적 견해가 달랐고, 자연히 심부와 임안후부도 서로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둘 다 병권을 갖고 있어 균형을 유지하는 게 어려운 일임은 물론이고 많은 이익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사가는 소가와 친한 친구이니 소가를 일깨운 것은 바로 사가를 일깨운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대립 관계에 있는 가문의 사람이 일깨워 주다니.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또 어린 심묘가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인지 사경행은 의아했다. 혹시 심부 사람이 심묘에게 시킨 것이라면 그 사람은 누구일지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심가와 사가는 사적으로 교류하는 바가 전혀 없다. 심가 사람이 아무런 연유도 없이 호의를 베푸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계속 조사해.”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운 말투였다.
* * *
속에서 어떤 풍파가 일고 암류가 용솟음치든 간에 정경성의 겉모습은 늘 태평성세였다.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국화연회가 가까이 다가왔다. 올해 광문당의 시험 날짜가 마침 국화연회와 많이 차이 나지 않아 아예 같이하기로 했다. 시험은 옛날과는 달라져 대중 앞에서 보는 시험으로 변했고, 결국 공훈 자녀가 한자리에 모이는 대연회가 됐다.
이른 아침, 노부인의 여종 희아가 심묘에게 재봉사가 왔으니 국화연회 때 입을 의상을 고르러 오시라고 전했다. 심묘는 전생에서는 시험을 볼 때 평소처럼 입고 갔었다. 뭘 해도 꼴찌인데 눈에 띄게 입어봤자 비웃음만 더 살 거라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험과 국화연회가 함께 치러지니 옷을 새로 맞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국화연회에는 각 집안 관리와 부인들이 모두 참석했다. 아들 있는 집안 대다수가 며느리를 점찍는 자리이기에, 딸을 둔 집안은 평소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회에 참석했다. 그러니 노부인은 대방이 눈에 거슬려도 심묘에게 새 옷을 지어주어야 했다. 노부인은 가문에 도움만 된다면 심묘를 아무 데나 시집보낼 생각이었다. 심묘를 팔았을 때 이문이 얼마 남는지만 따지면 되었다.
백로는 송경당으로 걸어가는 심묘 옆에서 기쁜 얼굴로 말을 걸었다.
“이렇게 빨리 국화연회가 올 거라곤 예상치 못했어요. 아가씨께서도 국화연회를 가장 좋아하시잖아요. 꽃을 감상하실 수 있으니까요.”
심묘가 국화연회를 좋아하는 건 꽃 감상 때문이 아니었다. 이런 연회에서 그녀는 늘 있는 듯 없는 듯 고립되었다. 물론 심모와 심청이 옆에서 부채질한 것도 있지만, 그녀 자신의 성격도 우둔하며 음울했기 때문이다. 치장 또한 매번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뒷전에서 비웃음을 살 뿐이었다.
그녀가 국화연회를 좋아한 것은 오직 부수의 때문이었다. 1년 전, 국화연회에 부수의도 참석했다. 그날도 심묘는 조롱거리였고 고립되어 있었다. 모두 울긋불긋한 국화 꽃밭에서 가장 붉고 아름다운 꽃을 찾고 있을 때, 그녀는 한구석에서 외로이 피어난 흰 국화를 발견했다.
원래 흰 국화는 장례 때 사용되기 때문에 상서롭지 못하다 여겼다. 게다가 그 국화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비에 맞은 것인지 바람에 날린 것인지 모르겠으나 꽃잎마저 성글었으니 당연히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심묘는 그 국화에 동병상련을 느꼈다. 외롭고, 아무도 봐주는 이 없어 가련했다. 그에 탄식하며 흐느낄 때, 화려한 옷차림의 남자가 국화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손을 뻗어 꽃송이를 잡고는 꽃잎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 꽃에 아름다운 구석이 있는가?”
남자가 웃었다. 이 한마디에 심묘는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게 됐다. 몸을 돌리자 출중한 풍채를 마주했고, 더욱 매혹되었다. 그 후 심묘는 여자들 입을 통해 그 사람이 문혜제의 아홉째 황자 정왕 부수의라는 걸 알게 됐다.
어려서 한 사람을 연모하면 사리 분별을 못 하는 법이다. 부수의는 분명 국화를 말한 것이건만, 국화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던 심묘는 자신이 은혜를 입기라도 한 것처럼 감사히 여겼다. 심묘는 그가 외롭고 처량한 꽃을 동정한 것처럼 그녀를 다정하게 아껴줄 거라고 생각했다.
애석하게도 그녀의 생각은 착각이었다. 부수의는 연약한 꽃을 동정하고 천하를 동정하고 미 부인을 동정했지만, 심묘는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그녀의 한 없는 희생은 아내로서 마땅한 ‘의무’일 뿐이었다. 그들 부부 사이의 좋은 날들은 부수의가 혐오감을 참고 펼친 한 편의 연극에 불과했다. 그는 국화인 그녀가 아닌 국화만을 애처로이 여겼다.
“아가씨?”
자기도 모르는 사이 넋이 나가 있었는지, 심묘는 송경당 입구에 도착했음을 깨닫지 못했다. 백로의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린 심묘는 희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심원백은 오늘 오지 않았고, 노부인은 청실과 금실로 수를 놓은 옷을 입고 있었다. 고희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연한 청색 옷을 걸치니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이 한층 귀신같았다. 그러나 본인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심모와 심청은 각자 모친 옆에 서 있었다. 이방에게는 서녀가 한 명 있으나, 임완운의 힘이 너무 막강하여 이런 공식적인 연회에는 준비할 때조차 얼굴도 내밀 수 없었다. 삼방인 심만에게는 정처 진약추가 낳은 심모뿐이었다. 그래서 심부 각 방의 적녀만 국회 연회의 초대장을 받았다.
심묘는 노부인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임완운이 심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심묘야, 왔느냐. 빨리 옷감을 골라라. 화낭이 너희의 몸 치수를 잴 거다.”
심청도 웃음기 띤 얼굴로 말했다.
“나와 심모는 이미 골랐어. 네가 와서 선택하길 기다리고 있었어.”
희아가 말을 늦게 전해 이제 온 것인데, 마치 심묘가 늦장을 부려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게 했다고 탓하는 듯한 어투였다. 심묘는 쓸데없이 따지기 싫어 그녀를 무시하고는 옷감을 늘어놓은 침상 앞으로 걸어갔다.
화낭은 서른 살의 부인으로, 심부는 매년 새로운 옷을 그녀의 가게에서 재단했다. 그녀는 어릴 때 궁중 여관에게 자수를 배워 아름다운 의복을 만들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눈앞에는 대여섯 종류의 천이 놓여 있었다. 파란색과 분홍색은 이미 골랐는지 옆으로 치워져 있었다. 말할 필요 없이 심청, 심모 두 사람이 고른 것이었다.
전생의 풍경이 눈에 선했다. 국화연회 날, 심청은 꽃과 구름을 수놓은 파란색 치마를 입어 자신이 열정적이고 대범함을 드러내었다. 심모는 분홍색 배꽃을 수놓은 저고리 치마를 입어 더욱 부드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때 심묘는 연노랑 의상에 노부인이 준 금목걸이와 장신구를 했는데, 사람들로부터 촌스럽다고 비웃음을 잔뜩 샀다. 그 연노랑 옷감은 바로 심모와 심청이 부추겨 고른 것이었다.
“심묘는 피부가 하얀 편이니 연노랑 의상이 어때? 활발함과 사랑스러움을 드러낼 수 있어.”
심모의 말에 심청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남은 옷감 중에서 연노란색이 심묘를 제일 돋보이게 해줄 거야.”
진약추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임완운 역시 침묵했으나 비웃는 기색이 완연했다.
심묘는 의상을 고르는 방법을 몰랐다. 어머니가 곁에 없는 아이는 불가피하게 많은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법이다. 심부 사람들 모두가 각자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으니, 진심으로 어린 아가씨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추천할 리 만무했다. 그러나 전생의 심묘는 심청과 심모 말만 듣고는 더 고민하지도 않고 그것을 골랐다.
그 연노랑 옷감은 분명 심묘의 피부를 돋보이게 했으나, 아주 유치하고 품위가 없어 보이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찬란한 금 장신구는 심묘를 상인의 딸 같아 보이게 했다. 곡우가 몇 번이나 장신구를 벗으라 권유했으나, 심묘는 고집을 부려 망신당하길 자처했었다. 정말이지 우스웠다.
심묘는 천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좋겠어요.”
자주색 옷감이었다. 규중 여인 대다수는 자주색을 선택하지 않았다. 너무 노숙해 보이기 쉽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귀티가 흘러넘치지 않는 한 꼴사나운 모습이 되기에 십상이었다.
진약추의 눈빛이 순간 빛났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심묘, 어째서 이런 짙은 색을 선택했니? 이런 짙은 색은 노숙해 보일 거야.”
“맞아.”
임완운도 따라 말했다. 대방 사람이 망신당하는 건 기쁜 일이었지만 이 자주색은 너무 과했다. 바깥사람이 보면 심가 아가씨 모두가 노숙하다 여길 수도 있었다. 국화연회에서 심청이 가장 이목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심묘 때문에 발목이 잡힐 수는 없었다.
심모와 심청은 속으로 비웃었다.
“자주색도 좋은걸요? 심묘, 이런 짙은 색 입은 적 없지 않아? 시험해보는 것도 좋지. 듣자니 이런 색은 아주 귀티가 난대.”
심청의 말에 심모가 웃었다.
“나도 이미 옷감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자주색을 한번 시도해볼 텐데.”
화낭은 교활하고 음흉한 심청, 심모와 평온한 표정의 심묘를 보며 속으로 탄식했다. 정경성 내에서 심가 대방, 심신의 적녀 심묘가 아둔하며 무지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와 반대로 심청, 심모는 선량하고 온화하기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마음 씀씀이가 이렇듯 악랄했다. 화낭의 눈에도 두 사람이 갖가지 방법을 써 심묘를 망신주려는 게 뻔히 보였다.
화낭은 심묘를 동정했다. 밖에서 나라를 지키는 심 장군은 자신의 딸이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에게 멸시당하는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심묘를 가련하게 바라보던 화낭이 완곡하게 말했다.
“이 자주색은 너무 장중합니다. 국화를 감상하는 연회라면 좀 더 가벼운 색채를 골라도 무방할 겁니다. 아가씨, 옥백색을 선택하시는 건 어떤가요?”
심묘는 화낭을 힐끗 보았다. 화낭은 심성이 고운 사람이라 전생에도 자신을 도와주려고 했으나, 당시 심묘는 두 사촌 언니와 숙모를 믿었기에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괜찮아요, 난 저 자주색 옷감이 좋아요.”
그녀의 대답은 막 미간을 찡그린 심청과 심모, 두 사람을 안도하게 했다. 심모가 웃으며 말했다.
“심묘의 안목이 과연 좋아. 화낭, 수고스럽겠지만 우리 치수를 재어 옷을 재단해 주세요.”
화낭은 또 한 번 속으로 작게 탄식했지만 더는 뭐라 하기도 어려웠다. 그녀는 순순히 아가씨들의 몸 치수를 잴 수밖에 없었다.
노부인은 침상 위에서 눈을 감고 누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시종일관 듣지 않는 척했다. 은자에 관련된 일에 그녀가 모르쇠인 양 가만히 있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오늘의 옷감과 재단 비용만 해도 모두 공동 자금에서 나오며, 그 은자는 모두 임완운이 관리했다.
화낭이 치수를 다 재고 떠나자 임완운이 웃으며 말했다.
“모두 나이가 찼구나. 우리 심부 아가씨들이 무시당해선 안 되지. 내가 머리 장신구를 준비했으니 국화연회 때 사용하거라.”
그녀는 향란에게 상자 몇 개를 가져오라 분부하더니 하나는 심청에게, 하나는 심묘에게 줬다. 심묘에게 무거운 상자를 건네주며 임완운은 특별히 자애로운 말투로 말했다.
“네가 광문당 시험 준비로 바쁜 것을 보고 장신구 점포에 갔을 때 널 위해 사둔 거란다. 가장 좋은 것으로 골랐으니 네가 만족하길 바란다.”
노부인이 잠시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뜨려는 듯했으나, 곧 계속 자는 척했다.
“둘째 숙모, 감사합니다.”
심묘가 답례했다.
임완운은 심청과 심모는 점포에 직접 데려가 장신구를 스스로 고르게 했지만, 심묘는 데려가지 않았다. 셋 중에 가장 재주가 부족하니 시험을 열심히 준비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는 좋은 핑곗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부러 교환하기에도 너무 늦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장신구를 건네주었다.
“그럼 우리는 먼저 돌아가 볼게요.”
심모가 진약추를 끌고 가면서 심묘에게 눈을 깜빡였다.
“심묘의 장신구가 제일 무거운 거네.”
심묘는 살짝 웃기만 했다.
* * *
서원으로 돌아온 심묘는 그 상자를 던져버리고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경칩이 심묘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아가씨, 열어보지 않으세요?”
“뭐 하러 열어봐? 열어봐도 다를 거 없을 텐데.”
심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무심히 대답했다.
경칩은 뭐라고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방, 삼방에게 장신구를 얻을 때마다 심묘는 장신구에서 손을 떼지 못할 정도로 좋아했었다. 그러나 항상 그 장신구는 졸부처럼 경박해 보였다. 전생에서 심묘는 이방, 삼방의 교묘한 속임수 때문에 저급한 모양새를 매우 좋아했었다.
심묘는 잠시 생각한 후 손을 뻗어 상자를 열었다. 찬란한 빛이 얼굴을 덮쳐 왔다. 안에 놓인 것은 모두 금과 은으로 만든 팔찌, 목걸이였다. 심지어 비녀에는 커다란 홍옥이 달려 있었으나 품질은 극히 낮았다.
경칩이 참지 못하고 얼굴에 분노를 드러냈으나 심묘는 실소할 뻔했다. 출가 전 그녀의 장신구는 모두 이런 식이었다. 이런 금비녀, 은목걸이는 시골 처녀도 쓰지 않았다. 매번 그녀는 화려한 색채의 옷을 입고 이런 찬란한 금 장신구를 착용했었다. 그로 인해 온유하며 부드러운 심모와 대범하며 명랑한 심청 옆에서 심묘는 마치 발을 씻겨주는 여종이 주인에게서 상을 받아 치장한 것처럼 보였다.
심묘는 우습기만 했다. 경칩은 심묘를 관찰했고, 그녀가 이전처럼 좋아하는 표정을 보이지 않는 게 의아스러웠다. 심묘가 상자를 닫고 경칩에게 밀었다.
“이걸 전당포를 찾아 맡기고 간 김에 은비녀를 사 와. 너무 좋은 거 말고, 꽃이 새겨진 거면 돼.”
경칩이 조심스레 말했다.
“아가씨…… 이걸 맡긴 게 동원 사람들에게 발견되면 트집 잡힐 겁니다.”
심묘가 예전처럼 천박한 금은 장식구를 좋아하지 않아 기쁘긴 했지만, 이런 행위는 너무 대담했다.
“이런 장신구는 어차피 쓸 수도 없는데, 갖고 있어야 무슨 소용이야? 진짜 금은만도 못하니 저당 잡혀 돈으로 바꾸는 게 더 나아.”
심묘는 담담히 말했다. 어떤 일이든 실용적인 게 중요했다. 그녀가 황후일 때 깨달은 이치였다. 심부는 매월 관례에 따라 월전을 주었는데 모든 아가씨는 한 달에 은자 두 냥을 받았다. 그러나 심모와 심청은 어떻게든 따로 보조금을 받을 것이다. 심묘는 ‘모든 아가씨’ 중에서 자신만 보조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분명 대방의 당당한 적녀이건만 그녀는 물건을 살 때 심청이나 심모처럼 대범하지 못했다. 과거에 그녀는 이방과 삼방이 자신의 딸들에게 용돈을 주었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공동 자금은 임완운이 장악하고 있었다. 심귀와 심만은 평소 조정 일 처리 시 상관에게 뇌물을 주느라 자신의 녹봉조차 부족할 테니 여분의 돈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심신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피땀을 바쳐 전장에서 활약하여 폐하로부터 적지 않은 하사품을 받았다. 그는 하사품을 혼자 차지하지 않고, 전부 공동 자금에 넣었다.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은자로 자신을 이렇게 홀대하다니. 이런 염치없는 일은 노부인만이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심묘는 아무래도 방법을 찾아 분가해야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