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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2/71)

4장

국화연회 날이 밝았다. 광문당 시험은 종전과 다르게 재능 경합장으로 변했다. 재능 있는 사람만이 마음대로 무대에 올라 다른 학우와 경쟁할 수 있었다. 소년들은 왕성한 생기를 과시했다. 이 시험은 자신의 가치를 드러낼 기회였다.

남학생과 여학생은 같은 무대를 사용했다. 즉, 예전처럼 남자 조와 여자 조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원한다면 여자도 남자의 장기인 책론, 말 타고 활쏘기 등에 도전할 수 있었고, 남자도 여자들 장기인 금, 바둑, 서예, 그림에 도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 남녀가 서로의 종목에 참여하는 일은 없었다.

심부는 일찍부터 바빴다.

상강이 심묘의 머리에 세심하게 은비녀를 꽂으며 말했다.

“아가씨, 됐어요.”

상강이 머리를 잘 만져서 심모는 늘 그녀를 데려다 자신의 머리를 만지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상강은 심 부인이 직접 심묘 곁에 남긴 여종이라, 심묘가 허락하지 않으면 심모도 어찌할 수 없었다. 예전과는 달리 상강은 심묘의 치장을 도왔다.

“아가씨, 정말 아름다우세요.”

백로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살짝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머리 장식이 너무 점잖네요.”

상강은 심묘의 검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틀어 올려 우아하고 색다르게 보이도록 했다. 성년이 된 후에도 심묘는 여종처럼 양쪽으로 쪽을 찐 모양을 유지했었는데, 모양새를 바꾸니 꽤 성숙해 보였다.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이 수려하고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은비녀 하나만 외로이 머리 위에 꽂혀 있으니, 매우 가련해 보였다.

곡우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심부의 재산이 풍족하건만 지금 심묘는 장신구 하나 살 돈이 없었다. 심부 모두 심신에게 기대 살면서, 이처럼 몰염치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다. 하지만 심묘는 뭐라고 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이미 심묘에게 장신구를 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낮은 품질의 금장식을 착용한다면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 뿐이었다.

심묘는 곡우의 얼굴을 흘깃 보고는 곡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측했다. 심묘는 고개를 가로젓고 가볍게 웃었다. 사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심가의 이방, 삼방은 자신이 저속한 취향을 갖게 하려고 온갖 꾀를 다 짜냈다. 갖은 방법으로 금빛으로 찬란한 것이 가장 좋다고 믿도록 했다. 이렇게 해야 이방, 삼방이 고의로 대방의 딸을 난처하게 한 게 아니라, 그녀가 원래부터 이런 저급한 금장식을 가장 좋아한다고 외부에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묘가 저급한 장신구를 과하게 착용한 채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심가 대방 적녀가 탐욕스레 재물을 밝히니 속되기 짝이 없다고 속삭이곤 했다. 금은은 귀한 것이긴 하나 치장하는 데 마구잡이로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곡우는 심묘가 상심할까 두려워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화낭은 정말 손재간이 있네요. 아가씨, 정말 예쁘세요.”

심묘를 동정해서인지 화낭이 보낸 옷은 자수 작업이 특별히 세밀했다. 심묘가 유난히 동안인 점을 고려한 듯 자주색 치마 하단에 해당화를 송이송이 크게 수를 놓았다. 꽃은 살아 있는 듯 생생하고 화려하게 피어나, 아주 아름다웠다. 게다가 옷 자체도 심묘의 체구에 딱 맞아 조금도 불편한 곳이 없었다.

상강과 백로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상대방 눈 속에 깃든 의아한 기색을 엿볼 수 있었다. 심묘 나이에 이런 짙은 색을 소화할 수 있다니,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가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선 안 돼.”

심묘가 일어났다.

정원을 나와 화원을 향하자 해당화가 피어 있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작은 송이를 꺾어 새까만 쪽 안에 꽂았다. 아름다운 검은 비단 위에 꽃을 수놓은 듯했다.

“아가씨, 정말 아름다워요.”

곡우가 찬탄했다.

그때 주방에서 계 유모가 마차 위에서 먹을 간식이 든 바구니를 준비해 들고 나왔다. 그녀는 심묘를 보고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녀는 심묘를 여러 해 동안 시중들었고, 심묘는 그녀의 젖을 먹고 자랐으니 심묘의 성장 과정을 다 보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심묘는 아주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심묘에게서 고요하고 진중한 분위기가 흘러넘쳐 품위 있는 자주색 옷이 아주 잘 어울렸다. 가히 공주라 말해도 될 듯했다. 계 유모는 멍하니 심묘를 바라보다 하마터면 바구니를 떨어뜨릴 뻔했다.

백로가 웃으며 말했다.

“계 유모, 어때요?”

계 유모는 습관적으로 예쁘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다 문득 오늘 국화연회에서 심묘가 이렇게 출중하면 심모와 심청이 돋보이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칭찬의 말을 삼키고 표정을 바꿔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아가씨, 의상의 색상이 확실히 너무 무겁네요. 아가씨 나이에 구태여 이런 색상을 입을 필요가 있을까요? 아가씨의 좋은 혈색이 다 가려졌어요. 돌아가셔서 이전에 입었던 꽃가지에 까치가 앉은 그림을 수놓은 분홍색 겹저고리를 입으시는 게 어떨까요? 살결도 더 희어 보이고 인상도 부드러워 보일 겁니다. 그리고 제가 기억하기에 둘째 마님께서 화려한 비녀를 하사하셨는데, 그런 비녀를 하고 가시면 심부 아가씨가 너무 소박하다고 말들이 있을 거예요.”

곡우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 분홍 윗옷은 임완운이 보낸 것으로 색이 유치했다. 거기에 금은 장신구를 착용하면 꼭 시골의 딸부잣집 아가씨 같았다. 국화연회에 그렇게 치장하고 가면 심묘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이었다. 분명 계 유모가 나쁜 생각을 품고 아가씨를 해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곡우가 심묘를 대신해 질책하려 할 때, 심묘가 가볍게 대꾸했다.

“명제는 지금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누리며 즐겁게 생활하고 있으나, 폐하께서는 검소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셔. 또한 지나치게 겉치레에 재물과 인력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하시니 우리 심부도 해야 할 도리를 다해야겠지. 소박하면 또 어떠해서? 사람들은 심부가 청렴결백하며 가풍이 단정하다 말할 테니 오히려 좋은 일이지. 의상에 대해서는 더는 말이 없었으면 좋겠어.”

심묘는 잠시 계 유모를 쳐다보았다가 말을 이었다.

“또한 오늘 연회는 학생들의 재능을 다투는 자리니 의상은 중요치 않네.”

그녀의 말은 온유하고 친절하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계 유모는 심묘의 분노를 사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심묘가 언급한 심부의 도리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심묘는 평소 공부를 좋아하지 않아 지혜롭지 못했는데 그처럼 심오한 말을 하니 계 유모는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

백로는 참지 못하고 풉 하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서둘러 입을 다물고 엄숙한 표정을 가장했지만, 눈썹 사이로 후련하다는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계 유모는 심묘의 말에 반격도 못 한 데다 다른 여종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자 속이 상했다. 최근에 심묘와 대화할 때마다 어째서 자신이 열세에 처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묘의 말투는 아주 온화했지만,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계 유모는 난처해하며 바구니를 곡우에게 건넸다.

“아가씨께서 길 위에서 드실 간식이네. 국화연회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니 아가씨를 굶기지 말게.”

그러고는 심묘를 향해 말했다.

“저는 먼저 원으로 돌아가 일하겠습니다.”

“가보게.”

심묘는 경쾌하게 대답했다. 계 유모가 등 떠밀리듯 떠난 후 곡우와 백로는 즐겁기 그지없었다. 심묘가 주인다운 모습을 찾고 있으니, 앞으로 심부 안에서 전처럼 그녀를 얕볼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입구로 걸어가니 두 대의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첫 번째는 이미 출발 준비가 되어 있었고, 두 번째는 비어 있었다. 심청의 여종 춘도가 첫 번째 마차 앞에 서 있었다.

춘도가 심묘를 보고 얼른 마차로 다가가 마차 안 사람에게 뭐라고 말했다. 마차의 발이 연달아 들어 올려졌다. 마차 안에는 심모와 심청, 그리고 임완운과 진약추가 앉아 있었다. 네 명은 심묘의 모습을 보더니 동시에 입을 벌렸다. 진약추의 시선이 반짝였고, 임완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심묘, 어째서 그렇게 수수하게 입었지?”

“맞아. 보기에 너무 안 좋네. 조금 화려하게 입는 게 좋아. 내 방에 연노란색 새 옷이 있어. 춘도, 네가 심묘를 데려가서 그 옷으로 바꿔 입히도록 해. 그리고 머리 장신구는 어째서 하지 않았지? 사람들이 심부가 널 푸대접한다고 욕할지도 몰라.”

심청도 급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남몰래 치미는 질투를 억눌렀다. 사실 심청도 심모보다 못할 뿐 수려한 미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명랑하고 대범한, 예의 바른 명문가의 귀녀였으나 그녀는 자신의 피부가 그다지 희지 않고 누런 편이라는 점이 늘 마음에 걸렸다. 심모의 피부가 하얀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원래도 피부가 흰 편인 심묘가 자주색 옷을 입어 눈보다 더 하얗게 빛나니 자신의 피부가 한층 어두워 보였다.

심모는 심묘를 세심히 관찰했다. 한쪽으로 정교하게 쪽 찐 머리는 자주색 의복과 잘 어울렸고, 매우 단정해 보였다. 금은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아 소박했지만 고귀한 인상을 풍겼다. 심모가 미소 지었다.

“심묘, 의상은 그렇다 하더라도 머리 장식은 반드시 착용해야 해. 우리 부의 체면이 걸렸잖아. 조모께서 네 모습을 보시면 불만스러워하실 거야. 또 어째서 그런 머리를 한 거야? 네 나이는 아직 많지 않잖아? 예전처럼 양쪽으로 쪽을 올려놓은 모양이 가장 좋아.”

곡우는 분노로 안색이 창백해졌으나 하인의 신분이라 주인에게 대들 방법이 없었다. 그냥 이를 악물 뿐이었다. 심가의 이방과 삼방 모두 새까만 속내를 가지고서는 주저 없이 심묘를 곤경에 빠뜨리는 게 괘씸했다. 그들은 심묘가 촌스럽게 단장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심묘는 심모가 노부인을 거론하자 속으로 냉소했다. 심묘가 노부인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으름장을 놓은 셈이었다. 심묘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심모가 나이를 트집 잡는 건 어이없는 일이었다. 심모 역시 높게 쪽을 올린 머리에 선녀 같은 분홍색 비단옷을 입어 절색 재녀로 보이게 꾸몄기 때문이다.

심모와 심청의 말에도 심묘는 한마디 대꾸 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심청은 심묘의 시선이 불편해 마차 옆에 서 있는 여종을 향해 날카롭게 꾸짖었다.

“춘도, 멍하니 뭘 하는 거야? 서둘러 아가씨를 모시고 가 옷을 갈아입히지 않고?”

“그럴 필요 없어.”

심묘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얼굴 위로는 시기적절하게 비통한 표정이 떠올랐다.

“오늘 이 복장에는 이유가 있어. 둘째 숙모께서 주신 머리 장식은 매우 맘에 들어. 착용하지 않은 데는 까닭이 있으니 알려줄게.”

모두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심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곡우와 경칩도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지금 멀리 서북에서 많은 장병을 인솔하며 처절하게 싸우고 계셔. 흉노는 아직 물러나지 않았고, 장병들은 차가운 철갑을 입고 있지. 그런데 난 이곳에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며 한가한 심정으로 꽃을 감상하고 시를 짓자니 부끄러워.”

심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더불어 목소리도 작아졌다.

“어젯밤 보살께서 꿈에 나타나시어 경건하고 정성스레 기도하라 하셨어. 그래서 난 점잖고 어두운 색채 옷을 입으며, 아버지께서 개선하여 돌아올 때까지 고운 의복이나 머리 장식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심묘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평소 나약하고 겁이 많아 말을 분명히 하지 못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심묘가 이렇게 진지한 어투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본 적도 없었다. 심모와 심청은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진약추는 관자놀이를 만지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임완운은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심묘만 심신을 위해 경건하게 기도한다고 하면 나머지 심부 사람들 입장이 어떻게 되는가. 심묘는 이미 단순하고 수수한 차림으로 국화연회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니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임완운은 이를 악물고 자애롭게 권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어린데 구태여 생각을 그리 무겁게 할 필요 있겠니? 국화연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해도…….”

심묘가 갑자기 임완운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둘째 숙모, 저의 효심을 살펴주세요.”

심부 입구에는 오가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심묘가 큰절까지 올리자 길 가던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심묘에게 심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화려한 복장은 강요하면서, 심묘의 효심은 무시하는 건가?”

“말마따나 심신 대방은 서북에서 전쟁 중인데 딸의 효심조차 이해해주지 못할 건 뭐람? 자기들보고 똑같이 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임완운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녀는 심묘가 이런 대답을 할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 일을 안 된다고 할 묘책도 없어 더욱 답답했다. 임완운은 얼른 춘도에게 심묘를 부축해 일으키라고 명했다.

“내가 어떻게 네 효심을 무시하겠느냐. 네 나이에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해내기가 어렵지. 됐다. 수수하게 입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심청은 상황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으나, 모친 임완운이 허락했으니 반박하기 어려웠다. 진약추 모녀는 무언가 알아차린 듯 아무 말도 없었다. 대신 심묘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임완운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 마차는 이미 꽉 차서 더 앉을 수 없구나. 특별히 너를 위해 집사에게 얘기해서 다른 마차를 준비하도록 했단다. 심묘는 두 번째 마차에 편하게 앉아서 우리를 따라오도록 해라. 도착하면 함께 들어가자.”

매년 국화연회에 심묘는 이 두 모녀와 한 마차를 타고 갔었다. 지금도 자리는 충분해 보이니 한 명이 더 들어간다고 해도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임완운에게는 따로 생각이 있었다. 심청도 남편을 찾을 나이지만, 심신의 관직이 심귀보다 높으니 만약 부귀한 집안이라면 먼저 심묘를 고려할 터였다. 그러니 심묘를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어야 했다.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아둔한 심묘는 비웃음을 당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심청의 대범함이 돋보일 터였다. 이것이 그녀가 특별히 마차 두 대를 준비한 이유였다. 진약추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라 당연히 이견은 없었다.

“네, 둘째 숙모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심묘가 살짝 웃었다.

임완운은 심묘가 이리 쉽게 승낙할 거라 예상치 못했기에 의아했다. 심묘는 의존적이어서 이전에는 늘 심모와 심청에게 들러붙었었기 때문이다. 심묘 혼자 마차를 따로 타고 가면 난감해할 거라 여겼는데, 예상과 다르게 흔쾌히 수락했다.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저는 먼저 마차에 오르겠습니다.”

심묘는 네 사람에게 인사한 후 아주 편안한 얼굴로 자신의 마차에 올랐다. 별도로 준비된 마차는 넓긴 했지만 임완운의 마차처럼 고급스럽지는 못했다. 이에 결국 곡우가 분노를 터트렸다.

“단독 마차를 주어 사람을 뒤에서 따라오게 하는 건 무슨 심보일까요?”

경칩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심묘를 바라보며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묘는 무거운 시선으로 탁자 위 꿀에 절인 과일을 바라보았다. 주먹을 쥔 손이 점차 새하얘졌다. 그들은 대방의 체면을 깎아내리고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감히 대방의 평판을 낮추려 하다니. 마지막에 웃는 자가 누가 될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 * *

올해 국화연회는 공친왕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안북당에서 열렸다. 안북당은 명제를 개국한 태조가 직접 설립한 곳으로, 토지 몇천 묘(畝, 30평)에 웅대한 관저와 훌륭한 화원이 조화로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수도에서 먼 곳에 황궁의 일부를 따로 떼어 놓은 듯 세심하게 꾸며져 있기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또한 뒤에 산이 있고 물 또한 가까이 있어 주변 풍광을 둘러보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더구나 진귀한 국화 종자를 전담하는 관리자가 따로 있어, 매년 10월이면 각양각색의 국화가 앞다퉈 피어나니, 가히 선경에 버금간다고 일컬을 수준이었다. 이런 곳에서 시험을 친다니 매우 풍치가 있다 할 만했다.

심부에서 안북당까지는 마차로 대략 한 시진이 걸렸다. 시험을 앞두고 출출해지면 안 되니 곡우가 계 유모가 준비한 간식 바구니를 열어 심묘에게 권했다.

“아가씨, 좀 드세요. 길이 멀어 뭘 드셔야 힘이 날 겁니다.”

심묘는 바구니 속을 보았다. 차가운 양젖으로 만든 유락, 파를 올려놓은 꽃빵, 고추기름으로 볶은 닭다리 등 선명한 색채와 향기로운 냄새가 식욕을 돋웠다. 하지만 이런 음식은 자칫 정성 들여 치장한 화장을 지워지게 하고, 조심하지 못하면 의상을 더럽힐 수도 있었다. 계 유모는 정말이지 ‘정성’을 들여 이런 음식을 준비했으리라.

후원 여인의 다툼은 정면 승부라기보다는 몰래 덫을 놓고 상대가 밟게 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심묘는 황후로서 갖가지 계략을 다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자잘한 수법은 우습지도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고 경칩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간식은 경칩에게 있어.”

경칩이 조심스럽게 작은 천 가방을 꺼냈다. 천 가방에는 한입 크기의 정교한 간식이 들어 있었다. 심묘 손가락 정도의 크기에 꽃 모양인 간식은 먹기 아까울 정도로 보기 좋았다. 심묘는 심부의 주방을 믿을 수 없어, 경칩에게 시켜 물건 구매를 담당하는 집사를 매수케 했던 것이다.

경칩은 집사에게 자신이 광복재 간식을 먹고 싶으니 따라나서고 싶다고 말했고, 대가를 받은 집사는 순순히 응했다. 여종인 경칩이 광복재에서 간식을 사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식탐이 강한 편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넘겼다. 광복재는 정경성에서 제일가는 간식 상점으로 궁중 후궁들도 즐겨 먹었다. 전생에 심묘는 광복재 간식에 흥미가 없었으나, 딸 완유는 얼마나 좋아했는지 하루도 빼먹지 않고 먹었다.

심묘는 간식을 곡우와 경칩에게도 나눠주었다. 둘은 차마 주인의 간식에 손을 못 댔지만, 심묘가 강건하게 나오니 결국 한입 먹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눈을 반짝였다.

“아가씨, 이 간식 정말 맛있어요!”

심묘는 살짝 웃었다. 그래 봐야 간식이니 그 맛이 대단한 수준까지는 못되었으나, 워낙 정교하게 빚어 보는 맛이 있었다.

흉노와의 화친이 결정되자 심묘는 거금을 들여 광복재의 간식 요리사를 고용해 완유를 따라나서게 했다. 추운 곳에서 외로이 지낼 완유가 자신이 좋아하는 간식이라도 맘껏 먹을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흉노 땅에 도착하기도 전에 완유는 목숨을 잃었다. 화장을 해버린 탓에 시체도 찾지 못했다.

심묘는 눈을 감았다. 완유의 죽음은 진약추와 미 부인이 공모한 일이고, 부수의가 명령한 일이었다. 현생에서 그들은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완유를 해친 그들에게 백배 천배로 갚아줄 테니까!

곡우가 행복한 얼굴로 간식을 먹다가 심묘의 서릿발 같은 시선을 느끼고는 흠칫 놀랐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귀부인을 보는 듯도 하고, 얼핏 심신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듯도 했다. 심신은 전쟁터를 누비며 적의 피를 손에 묻히는 대장군답게 화가 났을 때는 온몸에서 흉악함을 맹렬히 내뿜고는 했다. 지금 심묘의 눈빛이 딱 심신과 같았다. 곡우는 간식이 목에 걸릴 듯하여 힘써 삼키고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 잠시 생각했을 뿐이야.”

심묘가 다시 눈을 내리감았다. 오늘 국화연회와 시험장에는 부수의도 있을 것이다. 부수의뿐 아니라 다른 황자들도 일부 참석할지도 몰랐다.

아홉 황자는 각자 장점이 달랐기에 자연히 진영도 나뉘어 있었다. 부수의는 개중 태도가 가장 무난하여 이렇다 할 세력을 규합하지 않고 태자 일파와 친교 정도만 맺고 있었다. 하지만 문혜제는 결국 태자를 폐위하고 부수의를 후계자로 세웠다. 그럴 줄 누가 알았을까?

명제의 황실은 무정하고 무정해 강산 평정에 헌신한 권문세가를 그저 늙은 개로 취급했다. 분명 사냥개가 주인을 대신해 토끼를 잡았는데, 토끼를 주머니 속에 넣자마자 개가 자신을 물어 죽일까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황실은 개의 피를 최후의 한 방울까지 짜낸 후 삶아 먹을 계획을 품고 있었다.

황제는 인자하지 않고 후계자는 의롭지 못한데, 무슨 권리로 모든 사람에게 충성을 요구하지? 악인들끼리 서로 배척하는 꼴을 보는 건 어떨까? 앞으로 자신이 벌일 일에 심묘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 * *

안북당에는 이미 관리들과 귀족들이 적잖이 와 있었다. 오늘은 성별을 나누어 시험을 보지 않긴 해도 연당에는 여전히 남자 좌석과 여자 좌석이 구분되어 있었다.

남자 좌석 쪽은 서로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다. 그건 관리들뿐 아니라 소년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언젠가 가문을 이어받을 걸 대비해 미리 많은 친구를 사귀어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가문 간에 좋은 관계를 맺어두면 자신이 든든한 아군을 얻는 셈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여자 좌석도 시끌시끌했다. 부인들은 잘 아는 사이끼리, 소녀들은 친한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소녀들은 오늘 국화연회에 긴장하면서도 저마다 기대를 품고 있었다. 가끔 눈을 들어 흠모하는 소년을 흘깃 바라보기도 했다.

역패란이 국화 몇 송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너희들, 오늘 시험 자신 있니?”

역패란 옆에 앉은 백미가 웃으며 대답했다.

“난 없어. 내 자질은 보통인걸. 아무도 절대 날 뽑지 않았으면 좋겠고, 누구도 날 무대로 끄집어내지 않길 바랄 뿐이야. 두각을 보이는 건 바라지도 않아. 그저 망신만 안 당했으면 좋겠어.”

역패란은 입을 삐죽였다.

“적어도 시도는 해봐야지. 오늘은 정왕 전하도 계시는걸. 게다가 네가 흠모하는 이가 공자도 여기 있지 않아? 이가 공자는 문장이 출중하니 분명 무대에 오를 거야. 기회를 잡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걸?”

백미는 역패란을 툭 치면서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별소리를 다 해.”

강효훤이 옆에서 듣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백미야. 너무 겁내지 마. 언제나 꼴등을 면하지 못하는 심묘가 있잖아. 네가 아무리 망친다 해도 걔만큼 심하겠어?”

역패란도 따라 웃으며 꽃가지를 어지러이 흔들었다.

“맞아. 매년 시험 때마다 심묘가 자진해서 웃음거리가 되어줬잖아? 참석할 체면이 남아 있다는 게 참 대단하지 않니? 올해는 또 얼마나 바보같이 굴지, 상상만으로도 우습다 정말. 그러고 보니 오늘은 대체 어떤 옷을 입었을까? 작년처럼 꿈에 볼까 무서운 붉은 저고리에 촌스러운 자홍색 금비녀를 꽂았으려나?”

주변 소녀들이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그만해. 이게 재밌니?”

풍안녕은 더 참지 못하고 타박했고, 이에 당황한 역패란이 따지듯 물었다.

“풍안녕, 너 최근 좀 이상하다? 정말로 그 바보랑 친해진 거야?”

풍안녕이 언짢은 얼굴로 한마디 쏘아붙이려 할 때, 다른 이의 말이 들려왔다.

“오, 심부 사람들이 왔다.”

역패란의 모친은 평소 임완운과 친분이 있었다. 역패란의 부친과 심귀가 관직에서 서로 협력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때로 임완운이 심청을 데리고 역부를 방문하기도 하면서 역패란은 심청과 무척 사이좋게 지냈고, 심모와도 그럭저럭 괜찮은 사이였다.

역부의 부인과 남자들이 심부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심귀와 심만은 최근 업무로 바빠 오늘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심귀와 심만 두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위무대장군 심신은 조정에서 명망이 높았다. 문혜제가 살아 있을 때 심신은 문혜제의 총애를 받았고 그 덕에 심부는 꽤나 큰 특권을 누렸다. 심신이 평소 정경성에 없긴 했으나 누가 병권을 쥐게 될 때마다 심부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언급될 만큼 심신은 대단히 존경받았다. 그 덕에 심귀와 심만의 벼슬길도 순조로웠다 할 수 있었다.

남자들은 위풍당당한 무장세가의 권력을 보았으나, 여자들은 웃음거리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부인들은 가문의 입장을 생각해서 형식적으로나마 늘 심묘에게 몇 마디를 건네곤 했지만, 어린 아가씨들은 달랐다. 멍청한 심묘가 그 유명한 심신의 하나뿐인 적녀라는 신분 덕에 공주와도 견줄 수 있단 사실을 대놓고 질투했다.

거기다 심묘는 아둔하고 무지하며 담이 작고 나약한 주제에 황족인 정왕 부수의를 사모하여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그녀의 짝사랑을 알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재능과 미색이 유난히 뛰어난 심청과 심모 옆에 있자면 시골 처녀 같아서 모두 입을 가리고 웃기 바빴다.

“오늘 또 무슨 좋은 구경을 할까나? 정왕 전하께서 오시니 심묘도 정성 들여 단장했을 텐데.”

역패란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심묘는 시험 때 더 우스워지지 않니? 뭐 하나 제대로 못 하면서 자발적으로 무대에 오르잖아. 이번에는 또 무슨 장기가 있다고 말할지 내가 다 겁난다!”

강효훤도 따라 웃었다.

“심 장군께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딸을 낳으셨나 몰라.”

백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안북당의 하인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걸어오는 사람 중 가장 앞에서 시선을 끄는 사람은 임완운과 진약추였다. 임완운은 꽃무늬가 수놓인 금박 장포로 풍만한 몸매를 감싸 부귀함과 단정함을 드러냈다. 한 집안을 장악한 부인다운 영예로운 풍채였다. 진약추는 다 큰 딸 심모가 있으나 여전히 젊은 부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학자 가문의 온유한 여인처럼 기품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심청과 심모가 보였다. 심청은 도홍색 꽃무늬 치마를 입어 여느 때보다도 한층 활기차고 명랑해 보였다. 팔목에 착용한 비취 팔찌는 투명하여 언뜻 보아도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반면 심모는 연분홍색의 얇고 긴 치마를 입고 머리를 끌어올려 쪽을 찐 다음 분홍색 진주 장식을 착용했다. 진주는 우아한 광택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한 명은 대범해 보이고, 한 명은 부드러워 보였다. 예쁜 얼굴에 고급품으로 몸을 휘감기까지 했으니 적지 않은 소년들이 시선을 보냈다. 남자 좌석에 있던 한 대인이 찬탄했다.

“심부 딸들의 용모가 아름답구먼.”

“한 명이 더 있습니다.”

사모하는 심모를 보고 내심 반가워하던 채임은 심묘를 놀리고 싶은 마음에 비꼬듯 말했다.

“심부 심 장군에게 딸이 있는데, 그녀가 가장 예쁩니다.”

대인은 심묘에 대한 소문을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는 채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심 장군의 딸이니 분명 그럴 테지.”

채임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건 아니…….”

순간, 그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심청과 심모 뒤로 한 사람이 따라 걸어왔다. 그녀는 심청, 심모와 함께 걷지 않고 홀로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초승달이 수놓인 어두운 자주색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치맛자락의 해당화 자수 덕분에 걷는 걸음걸음마다 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조금 추위를 느끼는 듯 청색 피풍의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 또한 위엄이 있었다.

심묘가 가까이 다가와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살짝 미소를 띤 듯했으나 또 어찌 보면 웃지 않는 듯도 했다. 평소의 움츠러들고 겁먹은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정갈한 머리에는 은색 비녀와 작은 해당화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짙고 점잖은 색들에 밝은 색채가 더해지면서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원래도 희고 깨끗한 피부가 짙은 자주색과 대비돼 더욱 희고 매끄러워 보였다. 한 쌍의 눈은 맑고 투명하게 반짝거려 마치 어린 짐승 같았다. 코는 오뚝했고, 볼과 입은 붉었다. 꽤 사랑스러운 용모였지만 전처럼 마냥 어리게 보이지도 않았다.

어떤 사람은 태생적으로 아름다운 용모를 가져도 분위기가 없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용모가 아름답지 않아도 분위기로 마음을 뒤흔들기도 하는 법이다. 심묘의 모습은 수려하고 사랑스러웠지만 절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만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도 남았다. 그녀는 턱을 살짝 든 채 걷고 있었지만 치맛자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당당한 자세와 우아한 걸음걸이에는 허점을 찾을 수 없었다.

임완운과 진약추, 심청과 심모는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심묘의 조연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저게 누구지?”

역패란이 웅얼거렸다. 같은 여자인데도 그녀를 보자 자연스레 눈이 풀렸다.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기품이 있을 수 있나 싶었다.

“심부의 손님인가?”

백미가 물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사람 같은데.”

소녀의 등장에 남자 좌석도 조용해졌다. 남자들이 사람을 보는 기준은 여자들과 달랐다. 그 자리에 있는 남자들 모두 관리들이라 소녀의 남다름을 알아챘다. 소녀는 큰 풍랑을 헤쳐온 듯 온화하고 고요하면서도 대범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아무도 경시하지 못할 위엄이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넘쳤다. 표범이 양 떼 무리와 마주치기라도 한듯,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비범한 상이었다.

“저 소녀가 심 장군의 딸인가?”

채임과 대화하던 대인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확실히 아름답군! 좋은 기품이야! 후대가 전대를 능가하는걸.”

채임은 멍해져 집중해 바라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심묘……? 심묘라고?”

때로는 돌 하나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는 법. 좌중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저 사람이 정말 심묘라고? 풍안녕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자신은 광문당에서 심묘와 한 책상을 사용하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심묘의 생김새를 더 잘 알고 있었다. 깜짝 놀라 제대로 살피니 그녀는 확실히 심묘가 맞았다.

심묘는 물에 빠진 이후 병치레를 하면서 살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평소에는 자세히 보지 않아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턱이 갸름한 것이 계례(笄禮, 15세가 된 여성의 성인식)를 치른 성숙한 여인 같았다. 그러고 보면 최근 심묘의 성격도 적잖게 조용해졌다. 예전에도 조용한 편이긴 했으나 지금은 심모와 심청의 뒤를 따라다니지도, 아둔하고 무지한 말을 하지 않으니 달라진 모양새가 나쁘지 않았다. 동굴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어린 맹수가 마침내 깨어나 발톱을 꺼내고 이를 세웠다는 사실을 모르는 풍안녕은 그저 그렇게만 여겼다.

배랑도 남자 좌석 쪽에 앉아 있었다. 명성이 있다 해도 아직 광문당의 계산 선생일 뿐이었지만, 평소 그를 눈여겨본 고급 관리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재능이 넘치니 조정에 들어가게 되면 분명 높은 관직에 오를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심묘의 시선이 남자 좌석 위 배랑에게 일순 멈췄다. 심묘는 오늘 시험에서 자신의 재주를 과신한 학생 하나가 배랑에게 계산 문제로 도전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에 배랑은 <행률책>을 제시해 맞붙는데, 문체도 화려하지만 이치와 근거가 타당해 부수의의 눈에 들게 된다. 이후 부수의는 인재를 중시하는 행보를 보이면서 배랑 외에도 많은 인재를 끌어모았다. 절대로 그 일이 다시 발생하게 해서는 안 된다.

배랑은 심묘의 시선을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심묘는 사냥감의 가치를 따져보는 맹수의 눈빛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 순간 마음이 불편해진 배랑이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심묘는 이미 고개를 돌린 뒤였다.

“심 장군의 적녀는 어린 나이에도 기품이 있군. 얕보아서는 안 되겠는걸.”

옆에 있던 대인들이 찬탄했다.

“얼굴은 확실히 괜찮네. 절세가인이라 칭해도 과하지 않은걸. 전에는 어째서 몰랐을까?”

소년들은 소녀들의 용모만 보는 법이다.

“그럼 뭐해. 우둔한걸.”

채임은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비꼬듯 흥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사람들이 심묘를 보느라 심모에게 소홀한 것이 불만이었다.

“그쪽이야말로 아둔합니다!”

갑자기 큰 소리가 들리자 채임은 놀랐다. 붉은 옷을 입은 아이가 화를 내며 채임에게 눈을 부라렸다. 흰 찹쌀경단처럼 귀여운 얼굴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불그스레해져 씩씩댔다. 푸른 옷을 입은 소년이 채임을 바라보고 웃었다.

“미안해. 내 동생이 무례했어.”

채임은 욕하려다가 그가 평남백부 첫째 공자 소명풍임을 알아차렸다. 경단처럼 생긴 아이는 바로 둘째 공자 소명랑이리라. 채임은 말을 삼켰다. 소명풍은 사경행의 제일 친한 벗이라서 감히 건드릴 수 없었다.

소명풍은 광문당의 국삼 학년이지만, 아직 병치레 중이라고 알린 터라 이번 시험에는 참여하지 않고 지켜만 볼 예정이었다. 소명랑이 소명풍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형님, 저 누나 예뻐요. 그녀를 형수로 삼아줘요.”

소명풍의 입가가 굳어졌다. 다행히 소명랑의 목소리는 아주 작아 주위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가 작게 몸을 굽히며 물었다.

“동생아, 심 소저를 아느냐?”

“몰라요.”

소명랑은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며 딴청을 부렸다.

심묘는 임완운 일행을 따라, 여자 좌석으로 걸어갔다. 일반적으로 여자 좌석의 부인들은 친한 이들끼리 붙어 앉았고, 아가씨들도 마찬가지였다. 광문당의 누구도 심묘와 친하길 원하지 않았음으로, 심묘는 같이 앉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담담히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녀는 소녀들 사이에서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고요함을 누리고자 했다.

소녀들은 심묘의 아름다움에 질투가 났다. 그녀가 망신당하는 것을 보고 싶어 일부러 모른 척했으나, 심묘는 편안해 보일 뿐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탁자에는 소녀들이 심심하지 않도록 바둑판과 엽자패(叶子牌, 마작과 비슷한 화투)가 준비되어 있었다. 심묘는 잠깐 생각한 후 바둑통 안 바둑돌을 꺼내 혼자 대국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금을 타고 바둑을 두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에 뛰어나지 못했다. 과거 이방, 삼방은 최대한 그녀가 그것들을 멀리하도록 가르쳤고, 부수의에게 시집가서는 배울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국에서 돌아왔을 때,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영리한 미 부인에게 열등감을 느꼈었다. 궁의 모든 이들은 그녀와 미 부인을 비교하며 ‘황후가 무장세가 출신의 거친 사람이라 정취를 모르고 촌스러우니 황제가 관심을 두지 않는 게 당연하다’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바둑은 규칙을 잘 모른다 해도 둘 수 있었다. 심묘는 부수의를 위해 진국에 몇 년 동안 인질로 가 있는 사이, 여러 병법을 깊이 연구했다. 그녀는 바둑은 둘 줄 모르나, 용병술을 활용해 바둑으로 전쟁을 할 수 있었다.

공훈가 아가씨들이 멀리서 보니 심묘는 차분하고 느긋하며 냉담해 보였다.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듯한 존귀함이 흘러넘쳐 그녀와 다른 사람들이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지금 보니 심묘가 적지 않게 변한 것 같네요. 이젠 어엿한 아가씨가 되었군요.”

역 부인은 심묘가 심모와 심청보다 나아 보인다고 말하기 어려워 완곡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임완운은 그 뜻을 모를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의 말투와 안색을 살펴 심중을 헤아리는 것에 능숙했다.

그들이 걸어오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분명 제일 뒤에 있는 심묘에게 집중되었다. 임완운은 이를 갈았다. 심묘가 부수의도 시험장에 나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방법을 바꿔 부수의의 주의를 끌어 심청과 우열을 다투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임완운은 찻잔을 들고 웃으며 맞은편 남자 좌석을 보았다.

“지금 나이도 적지 않지요. 노부인께서 심묘를 무척이나 아끼십니다. 아주버님께서 곁에 없으시니 제게 적합한 사람이 없나 찾아보라고 말씀하셨어요.”

바로 옆에 앉은 진약추가 곰곰이 생각했다. 심모와 심청이 심묘보다 나이가 많은데, 먼저 심묘의 배필감을 찾아보겠다니. 당연히 노부인이 선의로 그렇게 말했을 리는 없었다. 진약추의 시선이 역패란과 대화하는 심청에게로 향했다. 진약추는 심신이 돌아오기 전에 심묘의 혼처를 정하려는 건지, 심청도 부수의를 사모하니 심청을 위해 제일 큰 위협을 제거하려는 건지 임완운의 의중을 짐작하고자 했다.

또 남자 쪽 좌석이 한바탕 떠들썩해졌다. 이에 한 부인이 소식을 전했다.

“예친왕께서 도착하셨대요.”

바둑돌을 잡은 심묘의 동작이 멈췄다. 심묘는 백색 돌을 내려놓고 눈을 들어 남자 좌석을 보았다. 눈빛은 매우 평온했다.

예친왕. 전생에 노부인이 그녀를 시집보내려 했던 방탕한 절름발이 홀아비로, 현재 마흔두 살이었다. 그 당시 심묘가 부수의와 혼인하겠다고 가출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예친왕부의 백골이 되었을 것이다.

멀리서 걸어오는 중년 남자가 보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앉지 않고, 특별 좌석에 앉았다. 그 남자는 피부가 검고 야위었으며 흉악한 상이었다. 화려한 의복으로 부귀함을 드러냈지만 애석하게도 다리 하나만 멀쩡했다. 문혜제의 친동생, 예친왕이었다.

예친왕은 황제인 문혜제와 어머니가 같았다. 그는 어릴 때 자객의 손에서 문혜제의 목숨을 구하다가 왼쪽 다리에 깊은 부상을 입었다. 다친 다리는 잘라내야 했기에 그때부터 절름발이가 되었다. 이때부터 예친왕의 성정이 크게 변해 잔학하고 흉악해졌다고 했다. 첩실로 들어가 예친왕 손에 죽은 여인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은 외부 사람은 잘 몰라도 황실 사람은 모두 알았다.

예친왕비는 7년 전에 죽었다. 죽음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으나 황제와 태후가 예친왕을 보호하니 왕비 일가는 쓴 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근래 예친왕이 비를 맞으려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예친왕이 지위가 높고 황제와 태후의 총애를 받으니 왕비도 지위와 형편이 걸맞아야 하지 않겠냐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고관 대부호 중 진심으로 딸을 아끼는 집안은 딸이 이리 굴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았고, 딸을 상품쯤으로 여기는 집안은 딸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부귀영화와 바꿀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전 예친왕비 일가가 딸 하나를 잃긴 했으나 황제가 일을 덮어두려고 일가를 더 번영시킨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심묘의 시선이 예친왕을 스쳐 임완운에게로 향했다. 임완운은 환한 표정으로 역 부인에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예친왕 전하에게 아주 잘하시네요.”

모두 후원 안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기에 역 부인은 곧 임완운이 무슨 생각인지 알아챘다. 임완운이 너무 지나치다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자신의 남편과 심귀가 한배를 타고 있으니 그녀를 돕기로 했다. 역 부인도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나이는 좀 많으나 사람을 아껴줄 겁니다.”

진약추는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간식을 먹었다. 입가가 실룩거렸다. 사람을 아껴준다니. 설령 사람을 아껴주고 권세가 높다 해도 절름발이 홀아비에게 시집보낸다는 건 딸을 불구덩이로 미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심묘를 보았다.

심묘는 침착하게 바둑돌을 하나하나 놓고 있었다. 주위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태연하니 진약추는 앞으로의 일이 조금도 예측되지 않았다. 물에 빠진 후 깨어난 심묘는 심신의 피가 마침내 각성한 건지 사람이 변한 듯했다. 심신 일가는 모두 불의를 참지 못하는데, 심묘가 임완운의 뜻을 얌전히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심묘는 진약추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냉담한 심묘의 눈빛은 10월의 찬 새벽 공기처럼 삽시간에 진약추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심묘는 다시 고개를 숙여 바둑판을 보았다. 전생의 국화연회에서 그녀는 망신을 당했고, 부로 돌아가자마자 임완운은 노부인에게 예친왕부와의 혼사 얘기를 꺼냈다.

“심묘의 행동에 훌륭한 점이 없는 건 둘째 치더라도 그녀 때문에 심부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어느 집에서 이런 아가씨와 혼담이 오가는 걸 원하겠어요. 다행히 예친왕부에서 혼사를 논의한다니 심묘가 시집간다면 왕비가 되는 겁니다. 폐하와 태후마마의 돌봄을 받을 테니 복이지요. 다리가 좋지 않고 나이도 좀 많지만, 심묘도 딱히 내세울 만한 게 있는 건 아니니 손해는 아닙니다.”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악랄하기 그지없는 속셈. 전생에 심묘는 우연히 이방 여종들의 얘기를 엿듣고야 이를 알 수 있었다. 원래부터 심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노부인이지만, 심신은 공로가 높아 도저히 건드릴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심묘에게로 화살을 돌린 것이다. 좋지 않은 곳으로 시집가는 것보다 여인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은 없으니.

노부인과 임완운의 의견이 단번에 일치하여, 즉시 예친왕부로 사람을 보내 혼담을 꺼냈다. 심묘는 분노했고 동시에 두려워했다. 당시 심묘는 부수의를 무척 연모하였기에 마음을 굳게 먹고 짐을 싸 정왕부로 향했다. 그녀는 정왕부에 자신을 받아들여 달라 요청했다.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예친왕비가 되느니 차라리 부수의의 첩실로 들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에 노부인은 분노했고 혼란을 수습하기 어려웠다. 부수의는 마음속으로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겉으로는 심묘에게 나쁘게 대하지 않았다. 심부 병권이 그에게 어떤 가치인지 알았기에 심묘에게 아주 친절하지는 않아도 쌀쌀맞지도 않았다.

심신이 연말에 정경성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처음 맞이한 것은 딸이 가출했다는 어이없는 소식이었다. 심묘가 단식까지 하며 부수의에게 시집가겠다고 버티자 방법이 없는 심신은 자신의 군 공로로 딸에게 정왕비 지위를 주었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것이 진정한 악몽의 시작이라는 것을. 심묘는 눈을 감았다. 전생의 모든 잘못이 오늘로부터 시작된 듯했다. 오늘이 그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날이었다. 그녀에게 빚진 사람들은 지금부터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었다!

“심묘, 혼자서 뭐 하고 노는 거야?”

귓가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풍안녕이 어느새 그녀의 앞에 와 있었다. 심묘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으나 풍안녕은 아랑곳하지 않고 심묘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와 대국하는 건 어때? 그런데 너 바둑은 둘 줄 알아?”

풍안녕은 고개를 숙여 바둑판을 보았다. 빈말이긴 했지만 막상 바둑판을 보자 흥미가 생겼다. 바둑판을 세심히 보았지만 기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건 무슨 방법으로 둔 거야? 지금껏 본 적 없는 건데?”

“이건 바둑이 아냐. 이건 전쟁이지.”

심묘가 웃었다.

“뭐라고?”

“지금은 보이지 않을 거야.”

심묘는 담담히 말했다.

“이런 바둑돌은 삼켜질 때 비로소 보이는 법이거든.”

무엇 하나 도망칠 수 없는, 튼튼하고 빈틈없는 그물을 칠 것이다.

심묘의 말에서 살기를 느낀 풍안녕은 몸을 떨었다.

“무슨 괴상한 소릴 하는 거야? 이상해.”

그녀는 남자 좌석을 보더니 갑자기 눈을 빛내며 심묘를 쳐다보았다.

“정왕 전하께서 오셨어.”

정왕 부수의는 옥관을 쓰고 소나무가 수놓인 장포를 입은 데다 훌륭한 청색 장화를 신고 있어 매우 멋있었다. 준수하게 생기고 기품이 있으며 아랫것들에게도 친절하여 여느 황자 같지 않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여자 좌석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심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쥔 손톱이 손바닥을 찔렀다. 20년을 함께하고 온 마음을 다해 도왔지만, 그 대가로 자신이 받은 것은 얼음처럼 흰 비단 끈뿐. 멸문의 피맺힌 한이 그를 향했다. 부수의의 겉모습은 어질고 착하게 보이지만 내심은 잔인했다. 공명정대해 보일 뿐 실제로는 매우 모질었다.

전생의 부수의는 심묘가 온전한 시체가 될 수 있도록 성은을 베풀었다. 이번엔 심묘가 보은의 뜻으로 그 시신조차 온전하지 못하게 해줄 차례였다.

부수의, 내가 돌아왔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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