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심묘가 매화 숲에서 빠져나오고 나서야 입구를 지키고 있던 곡우와 경칩이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칩은 주변을 둘러봤지만, 숲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어째서 사람이 보이지 않을까요?”
심묘도 바라보니 울창한 매화 숲에는 바람만 불고 있었다. 사경행은 무공을 하는 사람이니 빠르게 사라졌을 터였다.
자리로 돌아가니 풍안녕이 나무랐다.
“나 기다리라고 했잖아. 잠깐 다녀온다고 했는데 넌 도대체 어딜 갔던 거야?”
“국화 핀 거 보러 갔다가 좀 걸었어. 이미 시작한 거야?”
심묘가 무대를 바라보았다.
“네가 너무 오래 가 있는 바람에 조 추첨은 이미 끝났다구. 지금은 선택 순서야.”
풍안녕은 입을 삐죽거렸다. 남자들의 ‘추첨’은 지나갔지만 심묘는 그 결과가 궁금하지 않았다.
심묘의 시선이 맞은편 자리 가장 왼쪽에 있는 녹색 의상을 입은 소년에게 떨어졌다. 그 소년은 피부가 검고 튼튼하게 생겼다. 얼굴은 괜찮으나 지나치게 큰 체구 때문에 거칠어 보였다. 게다가 녹색 의상을 입은 탓에 까만 피부가 볼품없이 두드러졌다. 그는 머리에 관을 쓰고 대나무 장신구를 꽂았는데, 고대 군자의 품격을 흉내 내려고 한 듯했다. 그러나 투박한 생김새 탓에 이도 저도 아닌 모양이었다. 청렴하여 세속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으나 전신에서 천박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경전사부의 고연이었다. 고연은 지학(志學, 열다섯 살)을 넘었으나 아직 날개가 튼튼하지 못했다. 부수의가 등극하고 난 후에야 고연은 고진의 바람을 타고 날개를 펼쳤다. 하늘을 날며 남자를 깔보았고 여자를 차지하는 데 몰두했다. 완유 공주에게까지 대담하게 침을 흘렸으니 담력 하나만은 칭찬할 만했다.
완유가 고연에게 말로 희롱당한 것만 떠올려도 심묘는 노여움을 억누르기 힘겨웠다. 그녀는 멀리 고연을 바라보았다. 사냥감 하나가 함정 안으로 껑충껑충 뛰어들길 기다리고 있었다. 고연은 기쁨에 찬 얼굴로 고진과 이야기 중이었다. 독특한 책론 답안지를 얻어 당연히 기쁠 터였다. ‘추첨’에서는 ‘서예’를 뽑았고 보통 수준의 결과를 얻은 그는 ‘선택’ 시간에서 이 책론 답안지로 이 자리의 모두를 놀라게 할 수 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묘는 냉소했다. 그녀는 고연이 책론 답안지를 가지고 한시라도 빨리 부수의 곁으로 가길 기도했다. 고진이 높은 자리에 오르기 전 고연이 벼슬길에 들도록 도와주면 그로 인해 경전사부가 망할 터였다. 이것이 심묘가 경전사부에 주는 선물이었다.
심묘는 고개를 돌려 부수의와 멀지 않은 곳에 앉은 청색 옷의 남자를 보았다. 지금부터 그는 그가 과거에 진 빚을 상환해야 할 터였다.
“심묘야, 남자 조 끝나고 여자 조의 ‘선택’ 때 너도 참여할 거야?”
풍안녕의 물음에 심묘가 빠르게 답했다.
“아니.”
‘추첨’ 시험은 모든 학생이 반드시 참여해야 했다. 반면 ‘선택’은 희망에 따라 하는 것이기에 원치 않으면 안 해도 되었다. 즉, ‘선택’은 장기를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추첨 시험보다 선택 시간에 더욱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이전 심묘처럼 장기가 없다면 아예 선택 시험에 참여하지 않는 게 나았다. 해봐야 망신만 당할 뿐이니 몸을 사리는 게 현명했다.
“왜? 너 그림 잘 그리지 않았어? 그래도 장점이 아예 없진 않을 텐데, 어째서 아예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
풍안녕이 아쉬워하며 물었다.
“응, 괜찮아.”
심묘는 탁자 위 바둑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그녀는 머리도 들지 않고 풍안녕에게 말했다.
“앞에 나서면 어떻고, 나서지 않으면 또 어때? 두 가지 모두 큰 차이는 없어. 더구나 난 원래 어느 과목이든 모두 정통하지 못해. 방금은 운이 좋았을 뿐이야.”
“너…….”
풍안녕은 심묘를 꾸짖었다.
“어떻게 자신을 그런 식으로 말해.”
그때, 웬 목소리가 끼어들어 둘의 대화를 끊었다. 심모가 그녀들 앞에 서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심묘. 다음은 ‘선택’ 시간이야. 너 참가하지 않는 건 아니지?”
“심모 언니는 내가 참가하길 바래?”
심묘가 반문했다. 심모는 말문이 막혔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심묘는 아예 대놓고 그녀와의 관계를 어그러뜨리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심모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직도 물에 빠진 일로 이방, 삼방을 원망하는 건가 싶기도 했으나 심묘의 행동은 도를 넘었다. 심모는 겨우 분노를 삼키고 입술을 깨물었다.
“난 당연히 네가 참가하길 바라지. 방금 그림도 너무 좋았어. 너한테 재능이 있으니 그림을 선택해서 좋은 그림을 그린다면 유언비어도 사라질 거야.”
심모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사촌 동생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척했다. 목소리가 작지 않아 주위 모든 소녀와 부인들은 분명히 들었다. 그녀의 말은 표면상 문제가 없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 의혹을 크게 일으켰다. 방금 심묘가 1등을 하긴 했으나 오랫동안 무능했으니 사람들이 가진 인상은 딱히 변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들은 모두 심묘에게 누군가 가르쳐줬다 생각했다.
심모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니 두 번째 선택 시험에서 심묘가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다면 주변의 가르침도 없을 테니 반드시 망신을 당할 것이라고 여겼다. 풍안녕이 심모가 숨긴 의미를 알아듣고 비꼬았다.
“말은 참 쉽네. 그림은 의미가 중요한데. 누구든 연거푸 그림을 그리진 못할걸. 우린 아직 학생이지, 서예와 그림의 대가가 아닌걸.”
“난 지금 심묘가 크게 발전한 것을 보고 말한 거야. 방금 그 멋진 그림을 그려냈는데, 다시 한 폭 그리는 게 뭐가 어려울까?”
심모가 부드럽게 웃었다. 심묘는 자신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바둑돌을 바둑판에 놓는 것에 집중했다.
“흥미 없어.”
심묘는 모두의 의심을 사더라도 심모의 도발을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심모는 심묘가 이렇게 뜨뜻미지근하게 대답할 거라곤 생각도 못 해 난감해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화나는 일은 자신이 준비한 함정에 상대방이 빠지지 않는 일일 터였다. 이에 심모는 그 그림이 심묘의 실력이 아니라는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결국 심묘가 망신을 당하게 되리라 생각한 심모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네가 그렇다면 나도 더 뭐라 하긴 어렵지.”
채임은 계속 몰래 심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심모가 멀리서 그를 향해 웃어 보였고, 예상치 못한 행운에 채임의 가슴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 * *
남자 조의 ‘선택’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시는 어느 정도 정해진 형식이 있어서 선택하는 사람이 많았다. 기억력이 좋고 열심히만 하면 일반적으로 빛을 보기 쉬웠다. 이에 반해 책론을 선택하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책론은 당면한 정치 문제를 논하는 것으로 대단히 실용적이었다. 그렇지만 조정의 일과 가장 근접한 항목이라, 시험 보는 이가 아직 모두 관직에 오르지 못한 젊은 학생이니 좋은 책략과 제안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자신의 부에서 야간에 가르침을 받는 관문 자제 몇은 예외였지만 대다수가 조정 일에 대해 우둔하며 무지한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책론은 가장 어렵지만 재능을 보이면 벼슬길에 발을 들이기 가장 유리한 과목이기도 했다.
심묘는 눈앞 바둑판을 보았다. 전생 배랑의 <행률책>은 세 번째 단계 ‘지목’에서 나왔다. 지목 단계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지목할 수 있고, 여자가 남자를 지목할 수도 있으며, 학생이 선생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배랑이 시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배랑은 재능이 넘쳐서 무대로 올라가는 몇 걸음 만에 책론 하나를 완성했다. 경전의 어구나 고사를 인용하면서 허풍을 떨지 않았으며 말하는 모든 것이 중요한 안건이어서 사람들을 무척 놀라게 했다.
그때 몇 황자가 그를 눈여겨보았으나, 배랑도 현명한 사람이라 광문당 선생으로 계속 지내고 싶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의 태도는 확고해서 부수의가 몇 번이나 찾아가 예의와 겸손으로 대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벼슬에 들지 않았을 터였다.
이번 생에서 심묘는 다시 한 판을 두기 시작했다.
고연이 소매를 매만지고 머리의 관을 정리한 후 남종에게 물었다.
“보기에 어떠하느냐?
“공자님은 호방하고 운치가 있으신 데다 출중하고 멋스러운…….”
남종이 허세 부리기를 좋아하는 주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열렬히 찬양했다. 고연은 득의만만한 얼굴로 일어나 무대 위로 걸어갔다. 형 고진이 상황을 목격하고 그를 붙잡고 물었다.
“뭘 하려고?”
“선택해야지.”
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고연이 자신의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다. 능력이 없을 수는 있으나 나서길 좋아하는 게 문제였다. 지금 경전사부는 날로 번영하는 중이니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네가 뭘 할 줄 안다고?”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경전사부를 언급할 때면 가장 먼저 첫째 아들 고진을 칭찬했다. 고진은 수려하게 생겼으나 고연은 거칠고 우락부락했다. 고진은 어린 나이부터 부친을 대신해 일을 처리했으나 고연은 부친과 조정 일을 논하고 싶어도 부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성가셔했다.
사람들의 평가는 결코 틀리지 않았으나 이로 인해 결국 우애가 돈독하던 형제 사이에 틈이 생겼다. 고연은 고진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고진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더욱 화가 났다. 자신이 받은 글이 너무 빼어나 의심을 살까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으나 그런 말을 들은 지금 일말의 망설임도 모두 사라졌다. 고연은 딱딱하게 대꾸했다.
“형님, 제가 형보다 똑똑하지 않지만 바보는 아닙니다. 절 막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형님의 풍광을 망치지는 않을 테니까요.”
고진은 고연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고진이 잠시 망설이는 사이 고연이 그를 밀고 무대로 올라가 크게 외쳤다.
“전 ‘책론’을 선택하겠습니다!”
광문당에서 고연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고연은 실력이 특출하진 않지만 광문당에서의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다. 매번 다른 사람의 글을 가져올 수 있으니 재능이 뛰어나진 않아도 우수한 셈이긴 했다.
그러니 사람들은 크게 의아해하지는 않았다. 선택은 자신이 가장 잘 준비한 것을 드러내는 시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론은 몹시 어려운 과목이기에 떠들썩한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단 위 고연을 바라보았다. 앞서 책론을 선택한 학생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책략을 말했다. 그러나 좋은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고연이 책론을 고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네. 고진이 한다면 모를까.”
풍안녕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심묘는 바둑돌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단을 보았다.
고연이 종이를 꺼내 느리게 읽기 시작했다.
“법이란, 국가의 토대이며 하늘을 향해 솟아…….”
그는 말의 고저와 속도를 다채롭게 하며 책론을 읽기 시작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조금 더 위쪽에 앉은 관리들은 매우 엄숙한 얼굴로 단 위 소년을 바라보았다.
“과연 고진의 동생도 고진 못지않군. 조정 대인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통찰력 있는 견해는 많지 않지.”
부수안의 시선에 경탄의 빛이 스쳤다.
“대단히 멋지군. 게다가 나이가 아직 어리니 앞으로 자라면 반드시 큰일을 펼치겠어.”
부수현도 고개를 끄덕여 칭찬했다. 부수의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무의식중에 손가락끼리 비비고 있었다. 그가 생각에 골똘히 잠길 때나 방안을 세울 때, 자신도 모르게 하곤 하는 동작이었다. 그는 고연의 책론에 새로운 계획을 생각해냈다.
배랑은 몸이 굳었다. 분명 고연의 책론을 어디서 본 듯싶었다. 평소 기억력이 출중한데도 아무리 생각해도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잘못 생각한 것이겠거니 하고 넘기기엔 이 기묘한 익숙함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고연이 읽는 문장의 다음 문장을 듣지 않아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나 익숙하여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가 의심될 지경이었다.
심묘가 살짝 웃었다. 심묘는 고연을 보지 않고 고개를 숙여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둑돌 하나를 집어 가장자리에 놓았다.
“이게 무슨 바둑이야. 함부로 놓는구나? 왜 바둑돌을 이리 먼 곳에 놓는 거야?”
풍안녕이 물었다.
“멀다고?”
심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둑돌은 저마다 신묘한 역할을 갖고 있었다. 보기에는 쓸모없는 돌이어도 역할이 없는 돌은 없었다. 지금 이 쓸모 없어 보이는 돌은 몇 국 떨어져 있어도 조만간 장군에게 반드시 필요한 돌이 될 것이었다.
* * *
누각 위.
“고연이 어디서 저 책론을 찾아온 건지 모르겠어. 매우 품위가 있는데? 저 책론을 쓴 사람을 알고 싶어지네.”
소명풍이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알면 뭐 하려고?”
맞은편에 앉은 사경행이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누각 창문 앞에 기대어 앉았는데, 몸을 반쯤은 눕힌 자세였다.
“반드시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은 대인일 거야. 그 대인과 교제할 수 있다면 반드시 얻는 이익이 많을 거야.”
소명풍의 말에 사경행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그는 단 위 고연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해당화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해당화는 막 뜯어낸 듯 싱싱했으며 아름답고 그윽한 향기를 내뿜었으나 스산함을 품고 있었다.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을 테지.”
* * *
고연이 <행률책>을 다 읽었다. 주위는 여전히 고요했고, 여러 곳에서 작은 소리로 의견을 나누었다. 학생들은 이 책론 속에 담긴 뜻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구가 극히 화려하고 고사 인용이 뛰어나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고관대작들은 진정한 의미를 파악했다. 그가 제시한 책론은 지금 명제 법률의 허점을 지적하며 메우고 고치는 방법이었다. 확실히 학생은 이해할 수 없을 만한 책론이었다.
시험관들도 고연이 보인 뜻밖의 재능에 곤혹스러웠다. 규정상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면 일단 확인을 해야 했다. 심묘의 그림 시험 때 모두 모여 갑론을박을 벌인 것과 같은 이치였다. 하물며 이 <행률책>은 심묘의 그림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책론이었다. 문예 방면의 재능과 실용성 모두 완벽했기에 시험관이 추궁하듯 고연에게 물었다.
“방금 책론에 의거한다면 명제의 법률의 범위를 세세히 구분 필요가 있다. 어떻게 세밀히 분류할 것이냐?”
고연이 받은 답안지에는 <행률법> 내용 외에 한 가지 질문과 답이 있었는데, 이 시험관의 물음과 똑같았다. 그는 그 답안지를 써준 사람에게 감사해 마지않았다. 장래 반드시 많은 은자로 상을 주리라 다짐했다. 덕분에 그는 당황하지 않고 가슴을 쭉 편 채 고개를 들어, 외운 답을 말했다.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상(상인)도, 관(관리)도, 민(백성)도 모두 마땅히 구별해야 합니다.”
경전사부 고 대인은 웃느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지금의 관직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황제의 도움과 넓은 인맥에 기댔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의 능력은 보잘것없었다. 다행히도 똑똑한 고진이 그의 일을 적지 않게 도왔다. 그런데 지금 둘째 아들 고연도 비범한 구석을 드러내니, 귀가하자마자 사당을 찾아 조상께 향을 피워드릴 참이었다.
고진은 고 대인과 달리 똑똑해서 고연에게 저런 지혜가 있었다고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시험관의 질문에 당당하고 차분하게 답을 하는 것을 보고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고 여겼다. 시험관까지 매수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배랑은 탁자 위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손이 떨렸다. 고연의 모든 말들은 누군가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후 그대로 베껴 쓴 듯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배랑은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초조해하고 있었다.
소명랑은 한참 졸다가 고연이 <행률책>을 다 읽었을 때야 겨우 눈을 떴다. 사람들이 고연을 보며 감탄의 표정을 짓고 있자 부친 소욱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물었다.
“아버지, 저 사람이 이야기를 잘한 건가요?”
“영재로구나.”
소명랑은 입을 삐죽였다.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고개를 돌려 소명풍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물었다.
“형님은 어째서 아직 돌아오지 않을까요?”
소욱이 작게 기침했다.
“네 형은 지금 몸이 약하다. 오늘도 간신히 온 것이니 오래 쉬도록 놔두거라.”
부수의는 인기척을 느끼고 소욱을 한 번 바라보았다. 소욱이 소명풍을 거론하면서도 기색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는 시선을 돌렸다. 부수의의 차분한 옆모습을 보아 무슨 생각에 잠긴 듯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고연은 오늘 시험에서 훌륭했다. 시험관의 질문에도 기다렸단 듯 편안하게 답하니 더는 의혹을 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반박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1등을 차지했다. 그러나 석차는 부차적이었다. 앞으로 경전사부에 고진 외에도 준걸인 둘째 공자 고연이 있음을 만천하에 알렸기 때문이었다. 고연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단을 내려갔다.
* * *
남학생들의 선택이 마무리되자 여학생들의 선택이 시작되었다.
풍안녕은 단에 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금이 장기인데 이미 추첨에서 금으로 시험을 보았기에 단에 다시 올라갈 필요가 없었다. 계산을 잘하는 심청은 계산은 바둑에서도 유리하게 써먹을 수 있기에 바둑을 선택했다. 심모는 예상대로 금을 선택했다.
심모의 모친 진약추는 금 연주를 잘할 뿐만 아니라 악보와 가사도 쓸 줄 알았다. 진약추에게 이를 배운 심모는 매년 금에서 거뜬히 1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애초에 금을 선택하지 않았다. 심모와 비교당하는 수모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자리에 앉아 심모의 연주를 감상만 하는 게 훨씬 속 편한 일이었다.
금을 겨룰 시간이 되자 시험장은 다시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심모가 느리게 단 위로 올라 향으로 손을 씻었다. 입가에 얌전한 미소를 머금은 것이 정말 작은 선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심모는 이렇듯 금 연주 때마다 속세를 초월한 분위기를 풍기려고 애를 썼다.
심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영월(咏月, 달을 읊다)>을 연주했다. <영월>은 아주 어려운 곡으로 먼 곳의 방랑자가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내용이었다. 앞부분은 애잔하게 시작해 점점 격렬한 슬픔이 드러나고, 마지막은 듣는 이가 흐느껴 울도록 만드는 곡이었다. 악곡 자체가 금 연주 능력을 최대한 선보일 수 있게 구성된 곡이기도 했다.
전생에도 심모는 이 곡으로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명예를 얻었다. 심묘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단 위의 심모를 응시했다.
심모가 금을 타자 줄은 살아 있는 듯, 그녀의 손 아래에서 매우 유연하게 움직였다. 노래는 웅장하면서 변화가 많았으며 우아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나비가 꽃밭을 왕래하며 날아다니듯 금 위에서 부드럽게 춤추었다.
풍안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심모를 좋아하지 않는 것과 별개로 심모의 금 실력이 출중한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에 자신이 연주한 곡과 비교해 보면 자신이 기량이 확실히 부족했다.
<영월>은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이기에 가만히 듣고 있던 심묘도 점점 주먹을 그러쥐었다. 한평생을 다시 산다고 해도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들까지 살아나게 할 수는 없는 법. 심묘는 완유와 부명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심모가 선택한 곡은 심묘에게 ‘죽음과 원한의 보복’의 곡이라 할 수 있었다. 심묘는 피맺힌 한을 음미했다.
채임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갔다. 마음에 둔 사람의 모든 표정을 다 볼 수 있었으면 했다. 그는 아름다운 금 음조에 도취했는데, 누군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심모 아가씨는 정말 재수가 없으신 거야. 여태껏 2등을 한 적이 없는데, 심묘 아가씨가 잔꾀를 부려 1등을 뺏기신 거잖아.”
날씬한 몸매의 여종이 말했다. 채임은 그녀가 심모 곁의 여종인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여종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서향, 네 말이 맞아. 게다가 심묘 아가씨는 ‘선택’도 하지 않았어. 일부러 심모 아가씨를 노린 거야.”
“아, 애석하게도 우리 심모 아가씨는 마음씨가 고와서 심묘 아가씨에게 화를 낼 줄 모르시잖아. 심묘 아가씨는 큰 주인어른을 믿고 그런 거지. 그런 게 아니라면 감히 심모 아가씨에게 이랬겠어? 심모 아가씨는 정말 가련해. 그리 오래 준비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성과를 뺏기다니.”
“누군가 심모 아가씨를 대신해 복수해주면 좋을 텐데. 예를 들어 지목 시험에서 심묘 아가씨를 단에 오르게 한다든가.”
“무슨 헛소리야.”
서향이 그녀 말을 끊었다.
“심묘 아가씨가 네 과목 모두에 정통하지 않은 것은 모두가 알아. 심묘 아가씨를 선택하면 등급이 내려가는걸. 아가씨들은 그러실 수 없을 거야. 만약 심모 아가씨의 억울함을 생각해주시는 공자님이 계셔서 대신 심묘 아가씨를 선택하신다면 모를까.”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채임은 심모를 슬쩍 바라보고 곧 마음을 정했다.
* * *
심모의 연주에 사람들이 빠져들었다. 금 실력이 출중한 여인은 어디서든 사랑받는 법이었다. 더욱이 심모는 아름다웠다. 국이, 국삼 학년 소년들의 흠모하는 눈길이 심모에게 닿았다. 외모만 논하면 진청이 한층 위지만 진청은 도도했다. 부드러운 심모와 비교할 수 없었다.
“심모, 정말 잘한다. 어느 금 선생에게 배운 건지 모르겠네. 내일 나도 어머님께 유명한 선생을 불러달라 해야겠어.”
풍안녕 역시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나이가 어려 남을 이기지 못해 안달복달이었다.
심묘가 막 황후가 됐을 때 그녀는 어떠한 일에도 겁먹지 않았으나 부수의의 마음에 관한 일만은 항시 긴장했다. 부수의가 다른 여인에게 조금이라도 친근하게 굴면 조마조마했다. 게다가 육궁에서는 배후에서 온갖 계략이 펼쳐지곤 했다. 당하면 갚아주는 성격인 심묘는 적지 않은 사람에게 미움을 샀다. 이 성격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으나 이젠 드러내놓고 행할 필요는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심가 넷째 소저는 남들이 갖기 어려운 용모와 재능을 모두 갖췄군.”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부수안처럼 말할 터였다. 그가 심모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애석하군.”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자들이 모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모처럼 아름다운 꽃이 늘 곁에 함께한다면 그 삶은 매우 좋을 터였다. 그러나 심모는 애석하게도 심가 대방의 딸이 아니었다. 병권을 손에 쥔 심신은 심묘라는 머저리를 낳았다. 오늘은 조금 다르게 보이지만 사람의 인상이 하루아침에 변할 리 없었다. 그들은 오늘 심묘의 모습은 누군가 도움을 준 덕일 뿐이며, 여전히 심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얼간이라고 여겼다.
배랑은 고연이 단에서 내려온 후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 맞는 상황에 놀라고 당황했으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부수안의 말을 들은 배랑은 심묘를 한 번 보았다.
그녀는 바둑돌을 쥐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너무 멀어 눈빛은 똑똑히 보이지 않으나 그 눈빛이 맑고 깊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던 그때처럼 말이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머저리일 리 없었다. 그러나 사람은 확실히 하룻밤 사이 변할 수 없었다. 이전 아둔한 모습이 꾸며낸 거라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배랑은 총명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답답했다.
여학생들의 선택 시험은 심모의 <영월>로 끝났다. 심모는 당연히 1등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1등이 마냥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당혹스러웠다. 심묘는 바둑에 심취해 자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모는 심묘가 바둑에 정통하지 않으니 바둑판을 봐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진지하게 바둑판을 보는 듯 가장해 일부러 자신을 도발하는 게 분명했다.
진약추가 심모의 표정을 보더니 낮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심모야, 예의가 없어 보이는구나.”
진약추는 심모에게 어떤 상황이든 무슨 일이 발생하든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하고 침착하길 요구했다. 기분을 막론하고 사람들 앞에서는 늘 침착해 보여야 좋은 평판을 얻는다고 거듭 타일렀었다.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일 경우 귀족다운 기백과 도량이 없다는 얘기를 듣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심모는 어리고 지금까지 실패를 겪어보지 못해 당혹스러움을 숨길 줄 몰랐다. 진약추의 말을 들은 심모는 얼른 얼굴 위 분노를 거둬들였다. 그때, 여종 서향이 차를 그녀에게 넘겨줬다.
“아가씨, 차로 목을 축이세요.”
심모는 차를 받으며 서향을 바라보았다. 서향이 웃자 심모는 서향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녀는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
“뜨거우니 ‘지목’ 시험 때 마실게. 재미있네.”
‘바둑’으로 1등을 해 기분이 좋은 심청이 웃으며 말했다.
“올해는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학년을 구분하지 않으니 확실히 시합이 더 격렬하겠네.”
‘지목’ 시험은 세 시험 항목 중 사람들이 가장 기대하는 시험이었다. ‘추첨’은 실력보다는 운이 좌우했고, ‘선택’은 자기가 가장 잘하는 과목을 고르게 되니 긴장감이 없었다. 이와 반면 지목은 가장 우수한 두 사람이 선택되는 시험이었다.
여학생들의 ‘지목’은 그다지 격렬하지 않았는데, 여인은 늘 온화해야 한다고 교육받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결과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듯한 담담한 태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남자는 달랐다. 승부욕이 넘치는 혈기 왕성한 소년들이니만큼, 매년 ‘지목’ 시험은 가장 격렬했다.
그러나 올해 지목 시험은 남녀 구분 없이 모든 학생이 함께했다. 누구와도 겨룰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도전하는 것은 없지 않을까 싶었다.
문예 유형은 올해에도 도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무예만 남았으니 지목 시험에서 여자가 참여할 가능성은 더욱 적어졌다. 무장가문 태생의 무술을 익힌 여자가 없는 것은 아니나 여자와 남자가 겨루면, 힘에서부터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채임이 가장 먼저 나서서 단으로 올라갔다. 시험 시험관이 그에게 무엇을 도전하냐고 묻자, 채임은 나무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걸으면서 활 쏘기.”
사람들은 채임이 무술 쪽으로 출중한 편임을 알고 있었다. 그중 걸으면서 활 쏘기에 가장 뛰어났다. 작년 시험에서도 1등을 차지한 실력이었다. 오늘 그가 누구에게 도전할지는 공통된 관심사였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보다 이 종목에서 더 출중한 사람은 없었다.
채임이 손을 뻗어 여자 좌석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그가 남자가 아닌 여자 쪽을 가리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그가 가리키는 사람을 보고선 더욱 경악했다. 사람들은 입을 크게 벌렸고 순간 장내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채임은 있는 힘껏 큰 소리로 외쳤다.
“도전! 심묘에게!”
바둑에 몰입해 있던 심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치 안부 인사를 받은 양 표정에는 기복이 없고 눈빛은 차분했다. 이 놀라운 선포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진약추는 그녀가 온 정성을 다해 심모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심묘는 완벽하게 익힌 듯하자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먼 곳 누각 위에서 차향을 음미하던 사경행이 차를 뿜었다. 무심한 얼굴에 드디어 감정이 드러났다.
“채가 녀석이 미쳤나?”
심묘는 바둑판 안 맞은편 검은 돌이 쌍방 경계를 넘어 그녀 쪽을 향하도록 했다. 소졸(小卒)의 출동이었다. 그녀는 흰 돌을 내려 검은 돌을 먹고는 바둑통에 던졌다.
“받지.”
가을바람이 선선했다. 긴장된 분위기 때문인지 꽃향기도 농밀하게 변한 것 같았다. 심모가 입을 가리고 놀란 듯 말했다.
“심묘는 여자인데, 어떻게 이런 종목에 심묘를 지목하는 사람이 있는 거지?”
“맞아. 심묘야, 억지로 하지는 말거라. 대방께서 무장이실 뿐이지, 넌 이런 것들을 해보지 않았잖니?”
진약추도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러나 실상 진약추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여인이라고는 하지만 대장군의 딸 심묘가 활쏘기를 못 한다니. 물론 여인이 검무를 추기 싫어한다든지 무술에 정통하지 못하든지 하는 것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하지만 문예도 무술도 닦지 못했다면 그건 그저 멍청이일 뿐. 모든 사람 앞에서 심묘는 하나도 잘하는 게 없다고 깎아내린 데다가 심신도 얕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합의 규정은 고칠 수 없는걸.”
심청의 얼굴 위로 초조함이 비쳤다. 그러나 목소리는 어떻게 들어도 심묘가 난처한 상황에 맞닥뜨린 게 기쁜 것 같았다.
“일단 상대에게 지목당하면 시합을 진행해야 해. 그런데 지목은 우수한 사람끼리 겨루는 건데. 심묘, 네가 채임에게 뭐라고 한 거야? 채임이 어째서 널 고른 거지?”
확실히 귀에 거슬리는 말이었다.
임완운이 웃으며 말했다.
“심청아, 무슨 헛소리니? 심묘가 어떻게 걸으면서 활을 쏠 수 있겠어? 심묘야, 시합하고 싶지 않으면 내가 직접 시험관과 이야기하마. 네 나이가 아직 어리니 대방의 얼굴을 봐서라도 널 난처하게 하지 않을 거다.”
임완운의 말은 언뜻 심묘가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처럼 들렸으나, 구렁이 같은 속셈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누구도 시험의 규정을 깬 적 없었다. 지금 심묘가 규정을 깨뜨리면 반드시 말이 일파만파로 퍼질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심신이 자신의 공로를 믿고 특권을 행사한다고 떠들어대는 사람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었다. 심묘는 아버지 심신을 향한 안 좋은 말이 떠도는 것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숙모님, 감사합니다만 필요 없습니다.”
심묘는 자리에서 일어나 느리게 단 위로 걸어갔다. 주위는 점점 조용해져 소녀의 목소리만 또렷했다. 그 목소리는 사방에 울려 퍼져 파도를 일으켰다.
“이 도전, 응하죠.”
채임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단지 심모를 위해 분풀이를 하려 한 것이었다. 무과에서 남자가 여자를 지목해 겨루다니,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에게 한바탕 훈계를 들을 테지만 채임은 이걸로 심모가 위안을 얻는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묘가 이 시합을 받아들일 리 없으니 자신은 그녀를 매섭게 비웃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묘는 뜻밖에도 맞서 싸우겠다고 나섰다. 거리낌 없이 침착하게 걸어오는 심묘를 보며 채임은 뜨악해졌다. 심묘가 활쏘기를 못 하는 것은 그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금까지 무술을 익힌 적 없는 사람이니 당연했다. 심묘는 활을 어떻게 쥐는지조차 모를 가능성이 다분했다. 성공할 자신이 없는 일을 맞닥뜨렸을 때, 심지어 지금까지 해본 적 없는 것을 해내야 할 때 허둥대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심묘는 두려움을 모르는 듯 차분했다.
채임이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돌연 시선을 느꼈다. 심모가 그를 보고 있었다. 심모는 그가 바라보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채임은 그녀의 수줍어하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든 소년에게는 영웅이 되어 미인을 구하고자 하는 낭만이 있었다. 지금 채임은 자신이 그 미인을 곤경에 벗어나게 하는 영웅이고 심묘는 악랄하고 추한 소인배라고 여겼다. 어차피 오늘 심묘가 시합에 응하고 말고를 떠나 반드시 그녀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몹시 난처하게 만들어 체면을 잃게 해줄 계획이었다. 다시는 심묘가 심모 앞에서 제멋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일반적으로 ‘지목’은 도전자가 따르는 게 규정이었다. 단 위에 올라간 자가 말한 항목을 도전자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후는 어떻게 진행될지 아무도 몰랐기에 매년 이 시험은 늘 사람들의 이목을 샀다.
상황이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자 시험관도 난감했다. 심묘는 어린 나이였고, 문과라면 여자와 남자 사이에 ‘지목’을 해도 괜찮겠지만, 무과를 선택하다니. 시험관은 채임이 고의로 심묘를 망신을 주려는 건가 싶어 두려웠다.
“오늘 아주 재밌는 구경을 하네. 심가 대방의 명성이 땅 밑으로 떨어질까 걱정이군.”
부수안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아주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부수현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심 장군은 전쟁터에서 명성이 드높은데, 어떻게 딸은 변변치 못한 건지.”
부수현은 돌려 말했지만, 심묘가 아주 어리석다고 비꼰 셈이었다. 도전에 응하든 하지 않든 비웃음을 당할 테지만 도전에 응했으니 더욱 비웃음을 당하리라 판단했다.
채임이 의기양양한 태도로 입을 놀렸다.
“올해 재미난 규칙을 생각했어. 단순히 걸으며 과녁을 맞추는 건 너무 재미없잖아. 올해 활쏘기는 나와 네가 서로에게 쏘는 거야. 네가 먼저 머리 위에 사과를 얹고 내가 화살로 그걸 맞추는 거지. 그 후 다시 내 머리 위에 사과를 얹고 네가 화살을 쏘는 거고. 어때?”
채임의 말에 관중은 떠들썩해졌다. 시험관은 더욱 깜짝 놀랐다. 이러다 정말 인명 사고가 날지도 몰랐다. 심묘는 누가 뭐래도 위무대장군 심신의 딸이었다. 정말 사고가 난다면 연말에 심신이 돌아와 일을 면밀히 추궁할 것이었다.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시험관은 서둘러 말했다.
“채 학생…….”
채임이 손을 휘둘렀다.
“선생님, 광문당은 여태껏 특정 인물의 편의를 봐주는 일 없이 규정을 잘 지켜왔습니다. 도전자가 말하는 대로 시합하는 게 이 시험의 규칙입니다. 설마 당당한 대장군의 딸이 담이 작은 소인배겠습니까?”
풍안녕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심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맞는 말이다.”
옆에서 줄곧 눈을 감고 있던 예친왕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흉악한 얼굴에 괴상한 웃음이 어리었다.
“당연히 특정인을 위해 규칙을 바꿔서는 안 되지. 전쟁터에서 적군이 강하다고 심 장군이 잠시 피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예친왕은 말을 마치고 스스로가 재치있다고 느꼈는지 크게 웃었다.
심묘의 시선이 돌연 맹렬해졌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심신을 풍자하지 못해 안달이었고, 심묘를 심가 대방의 약점으로 여겼다. 그녀는 웃음거리를 보는 듯한 채임의 시선과 악의에 찬 조롱을 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오랫동안 조금씩 쌓였던 분노가 폭발했다. 어린 심묘는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육궁의 주인이었던 심묘는 하찮은 원한도 반드시 잊지 않고 갚아주었다. 심묘가 냉랭하게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렇듯 화려한 국화연회가 있을 수 있고, 학생들이 시험에서 재능을 겨룰 수 있는 건 모두 그 덕이지요.”
심묘의 눈에 비꼬는 기색이 스쳤다.
“오늘 여기서 이 시합에 이기고 지는 것 따위를 진정한 전쟁터와 비교할 수 없지요. 게다가 채 공자가 말한 규칙을 제가 따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멍해졌다.
“제가 왜 못하겠습니까? 채 공자는 궁술이 뛰어나니 당연히 사과를 맞출 겁니다. 하지만 전 궁술이 뛰어나지 못하니 잘못 쏠 수 있지요. 목숨을 걱정해야 할 건 제가 아닌 것 같군요.”
그녀가 살짝 웃었으나 목소리에는 강한 힘이 있어 사람들은 귓가에 천둥이 치는 듯했다.
“자, 그러니 다치든 죽든 결과는 스스로 책임진다는, 죽어도 좋다는 서약서인 생사장을 쓰도록 합시다. 괜찮겠습니까? 채 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