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28/71)

7장

안북당이 이렇게 고요해진 적은 없었다. 심묘의 작고 가냘픈 몸에서 무한한 힘이 뿜어 나오는 듯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녀는 모두를 자기 발아래에 둔 듯도 했다.

채임은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심묘의 말이 맞았다. 위험에 처한 건 다름 아닌 채임 자신이었다. 심묘가 조금만 잘못 조준해도 화살이 그의 머리에 박힐지도 몰랐다. 그러나 채임은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생각은 단순했다. 자신이 먼저 활을 쏘기만 하면 심묘의 성격에 반드시 놀라 다리가 풀리고 눈물, 콧물 흘리며 그에게 용서를 빌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때 그가 심묘를 한바탕 놀리면 그녀의 체면은 실추되니 심모를 위한 분풀이는 대성공할 것이라고.

그 이후의 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채임의 상상 속에서 심묘는 자신이 쏜 화살에 놀라 벌벌 떨 뿐, 활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설령 용기를 내 집어 든다고 해도 심묘는 활시위를 당기는 방법도 모를 테니 결국은 웃음거리가 될 것이었다.

심묘는 조용히 채임을 바라보았다. 아주 평안했다. 심묘의 시선은 아이를 놀리듯, 동정하듯, 가소롭게 여기는 듯하여 채임은 돌연 부끄럽고 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앞뒤 재지 않고 충동적으로 외쳤다.

“내가 왜 못해? 생사장 쓰지 뭐!”

“허어!”

채 대인이 다급히 탄식했다. 그는 앞으로 나가 불효자를 한 대 때려주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아들이 좀 장난이 심하다고 여기긴 했으나 심묘를 고를 정도로 철이 없을 줄이야. 채 대인은 생사장을 쓰겠다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혹여나 심묘가 다칠까 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은 결코 심신같이 거친 사람에게 맞설 수 없었다.

심모가 초조한 얼굴로 심묘를 말렸다.

“심묘, 어째서 생사장을 쓰자는 거야? 시험인데 누가 그 정도까지 해? 이러면 안 돼.”

“맞아, 심묘는 어찌 이렇게 철이 없는지.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하는 게야? 만약에 문제가 생기면 어찌하려고?”

임완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임완운은 채임이 먼저 심묘를 궁지에 몬 것은 말하지 않고, 심묘가 순간의 감정도 참지 못한다고 탓했다. 심묘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몰아가는 것이었다. 진약추 역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작게 탄식했다.

“승부욕이 너무 강하구나.”

남자들은 그녀들의 심묘에 대한 싱거운 ‘관심’이 흥미로웠다. 예친왕이 단 위의 심묘를 바라보았다. 혼탁한 눈빛에 흥미가 서렸다. 뱀이 쥐를 바라보듯, 누구에게나 몸서리쳐지는 혐오감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저 심가 아가씨는 정말이지 용기는 있으나 지략은 없군. 생사장을 적자니. 그러면 문제가 생겨도 심신이 이 일을 이야기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부수안이 지적했다.

“심가의 명성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서겠지요. 누구도 자신의 가족을 나쁘게 말하는 것은 듣길 원치 않으니까요.”

부수의가 단 위 심묘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현실은 바꿀 수 없다. 너무 충동적이야. 과연 무지하고 아둔하다고 하더니.”

부수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랑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도 심묘가 확실히 충동적이라 느꼈다. 방금 예친왕의 말은 지나쳤으나 심묘가 정말 심가를 생각한다면, 방법을 찾아 빠져나가야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나올 가능성이 있으나,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버지, 누나가 반드시 이길 거예요.”

단 한 명, 심묘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얗고 동그란 소명랑.

소명랑이 작은 주먹을 쥐고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각을 표명했다. 소욱은 작은아들을 바라보았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소명랑은 심묘에게 유달리 관심이 많았다. 소욱은 심묘가 소명랑의 눈에 든 거라고 생각했다. 소가가 소명랑의 한마디에 탁류에서 벗어난 후부터 소욱은 작은아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해졌다. 아들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아 건성으로 동의해줬다.

“그래, 이길 게다.”

* * *

소명랑과 소욱의 대화를 소명풍은 듣지 못했다. 그는 멀리 떨어진 누각 위에 앉아 시험장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자의 대화를 들었다면 소명풍은 반드시 코웃음을 쳤을 것이었다.

“심가 아가씨는 담력이 정말 크군. 생사장을 쓰자니. 설마 평소 심 장군이 그녀에게 병영 일을 가르쳤을까? 아니면 그녀가 이 시험을 저잣거리의 겨루기로 여기는 걸까? 어쨌든 너무 교양이 없는데.”

소명풍은 친한 친구인 사경행 앞에서 늘 거리낌 없이 솔직했다. 그는 자신의 가장 친한, 동시에 가장 까탈스러운 친구가 대꾸가 없자 뒤를 돌아보았다.

사경행이 해당화를 들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미풍이 불어 그의 비수(匕首, 단검)에 달린 술이 살짝 흔들렸다. 빼어난 용모와 용맹한 기개에 숨이 막히는 듯했고, 거기에 사색을 끼얹자 감탄이 절로 나오는 모습이었다.

“사경행, 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소명풍의 물음에 사경행은 해당화를 품 안에 넣었다. 갑자기 일어난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재밌네. 우리 내기를 하나 하는 게 어때?”

“무슨 내기?”

“누가 이길 건지?”

사경행이 단 위를 가리켰다. 웃는 얼굴은 재미난 것을 본 듯 반짝거렸다.

“당연히 채임이지.”

사경행이 맞장구를 치지 않자 소명풍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넌 심묘라고 생각하는 거야?”

“응.”

* * *

단에서는 시합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가 진풍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활쏘기는 시험을 위한 시합이 아니고 목숨을 건 도박이나 진배없었다.

광문당에서는 결국 생사장을 쓰는 걸 허락했다. 핏빛 필적은 눈처럼 하얀 면직물 위에서 유달리 눈에 띄었다. 심묘가 먼저 붓을 들어 이름을 썼는데, 자연스럽고 품위가 넘치는 필체였다.

이는 당연했다. 그녀는 황후로 지낸 20년간 자기 이름을 수없이 썼다. 조정일을 할 때뿐만 아니라 부수의를 대신해 흉노에 항복문서를 쓸 때, 자원해 진국의 인질이 될 때, 완유 공주가 시집을 갈 때, 태자가 폐위될 때에도 썼었다. ‘심묘’ 이 두 글자는 피와 눈물로 붉디붉게 물들었으나, 이 사실을 그녀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채임의 생사장은 서명조차 그리 수월하지 못했다. 승부욕이 가장 강할 때라고는 하지만 채임은 처음으로 생사장을 써봤다. 채임은 가족의 보호를 받는 어린 귀공자에 불과했다. 심묘의 태연한 모습이 그를 더욱 두렵게 했다. 붓이 무거워 팔이 흔들리기라도 한 양 겨우 작성한 서명은 어린아이가 쓴 것처럼 볼품없어 심묘와 더욱 대비되었다.

다 쓴 후 채임이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심묘, 넌 내가 너에게 활을 잘못 쏠까 두렵지 않아? 네 차례에 네가 날 맞출까 걱정돼서 널 상처입힐 수도 있잖아.”

심묘는 사과를 가지러 가다가 몸을 돌려 채임을 바라보았다.

“채 공자는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난 그렇게 여기지 않아. 채 공자의 활쏘기 솜씨가 출중한 것을 모두 알아. 잘못 쏘면 실수가 아니라 고의라는 뜻이지. 채 공자가 고의로 날 죽이려 한 것이 되는 거지만, 나는 달라. 내가 활쏘기를 전혀 못 하는 것을 모두 알잖아. 잘못 쏴도 이치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지.”

채임은 멍해져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마음속 깊이 무력감이 느껴졌다.

당연했다. 그가 잘못 쏘면 고의고, 심묘가 잘못 쏘면 당연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진짜로도 실수할 수 없었다. 그가 워낙 활을 잘 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가 고의로 그랬다고 수군댈 것이었다. 심묘를 덫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심묘는 그대로 채임에게 돌려주었다.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채 공자, 물론 첫판에서 날 맞춰 내 차례가 오지 못하도록 할 수도 있겠지. 생사장도 썼으니 내가 죽는다 해도 시합 중 불상사에 불과해.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제외하면 조금도 책임질 필요가 없지. 그런데 넌 감히 날 죽일 수 있겠니?”

채임은 처음 보는 심묘의 모습에 믿을 수 없는 기색이었다. 그는 광문당의 소패왕이었고, 제멋대로 행동해도 선생들의 총애를 받아서 우쭐거렸다. 오늘을 기회 삼아 심묘를 혼쭐내주고 심모의 마음을 사려 했을 뿐인데 자신의 상상과 전혀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심묘는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헤어날 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런데 넌 감히 날 죽일 수 있겠니?” 그 한마디가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오늘 심묘가 정말 채임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생사장이 있다고 해도 채가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심신이 작정하고 채가에게 죄를 인정하고 처벌을 받으라고 압박하면 종잇장 따위가 자기와 집안을 지켜줄 수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채가가 처한 상황은 논외로 두더라도 채임에게는 감히 심묘를 죽일 담력이 없었다. 그는 그저 말재주를 부린 것뿐이었다. 채임은 지금껏 전장에 가보지 않았으며 손에 피를 묻힌 적도 없었다. 활쏘기를 아주 잘하지만 쏜 것은 과일이나 동물이지,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물러날 수 없었다. 심묘 같은 가냘픈 여인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당당한 남아로서 뒷걸음질 치면 내일부터 문밖에 나설 면목이 없을 것이었다. 채임은 이를 악물고 목을 뻣뻣이 세웠다.

“자신만만한 걸 보니 활쏘기 때 네 실력이 어떨지 기대되는군! 시합이 시작돼도 그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잠시 뒤면 놀라 혼비백산할걸?”

채임은 거칠게 말했으나 당혹을 숨길 수 없었다. 심묘가 평온할수록 채임은 더욱 불안해졌다. 심묘가 당황해야만 자신도 평상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채임은 이번에야말로 심묘가 난감해하길 고대했다. 인정사정없는 말에 머뭇거리거나 울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심묘는 평범한 소녀가 아니었다. 그저 담담히 채임을 바라볼 뿐이었다. 고인 물처럼 차분한 모습에 채임은 멍해졌고, 자신이 오늘 감당할 수 없는 멍청한 일을 저지른 게 아닐까 의심했다. 머저리 심묘를 상대하는데 어째서 자신이 호랑이 앞의 토끼가 된 건지 암만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심묘는 시험관에게 사과를 건네받았다. 그 사과는 대략 성인 남자의 주먹 크기였다. 심묘는 단 위 가장 동쪽에 서서 그 사과를 머리 위에 올렸다. 장내가 점점 시끄러워졌다.

“심묘가 겉보기에 매우 침착해 보여도 사실은 간담이 서늘해졌을걸? 빨리 심묘가 혼비백산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역패란이 못된 웃음을 지었다.

“명제의 시험이 시작된 이래 여인이 남자에게 무과 도전을 받은 적은 없어. 심묘가 처음인 거지.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보는데 망신을 당하다니, 상상만 해도 정말 무섭다.”

강효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에휴, 심묘는 아직 위에서 무얼 하는 거야? 채가 공자가 잘못 쏘면 어찌할 거야?”

임완운은 난처했다. 심묘에게 사고가 생기면 아무리 평소 심부를 아끼는 심신이라도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형님은 무슨 걱정을 하세요? 어쨌든 모두 아이들끼리의 놀이잖아요. 게다가 채가 공자가 철없는 아이도 아닌데요. 심묘가 몇 마디 용서를 구하는 말을 하면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 거예요. 심묘가 순간적인 감정으로 따지지 않길 바라야 하지만요.”

진약추는 생사가 걸린 큰일을 ‘아이들끼리의 놀이’로 치부했다. 임완운이 집을 관리하니 일이 생기면 임완운의 책임이기 때문이었다. 또 진약추는 전부 심묘가 일시적인 감정으로 도전에 응했으니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덧붙였다. 만약 심묘가 용서를 빌며 채임에게 잘못을 인정하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진정하세요. 제가 볼 때 채가 공자는 심묘를 놀라게 하려고 이러는 것뿐이에요. 게다가 이런 시험에서는 모두 다 이기려고 혈안이 되니 지금 불러세워 멈추는 것도 불가능하구요.”

심청도 진약추를 따라 임완운을 달랬다.

“걱정하지 마세요. 채임은 활쏘기를 아주 잘해요. 어찌 되었든 간에 잘못 맞출 리 없어요.”

심청은 황자비가 되겠다는 심묘의 꿈을 산산이 부서뜨리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심묘가 체면을 잃길 간절히 바랐다. 아주 놀란 사람은 소변을 보기도 한다는데 심묘는 과연 어떨지. 심청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채임이 정말 잘못 쏘아서 그녀의 얼굴을 망가뜨리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심모는 심묘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래야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소망을 대신 이뤄줄 채임을 간절하게 바라보았으나, 채임은 아까와는 달리 그녀에게 시선을 줄 여유가 없었다.

채임이 손에 장궁을 쥐었다. 그는 멀리 떨어진 심묘와 마주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심묘는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의 피풍의가 바람에 휘날렸다. 위엄 있는 기백은 거대한 풍랑 후에 찾아온 평온함 같아서 그녀를 한층 빛나게 했다.

채임이 천천히 활시위를 당겼다. 채임은 심묘가 떨기를 바랐다. 지금이라도 심묘가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 눈물을 한 방울 흘리기만 하면, 그가 어떻게든 치욕을 줄 수 있다면 이 모든 상황은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심묘의 표정은 평온해 마치 그가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채임의 바람은 끝끝내 이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모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심묘가 울면서 용서를 빌지 않는 건지, 심묘가 왜 채임보다 더 침착해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심묘를 머저리로 여겼던 사람들의 인식이 지금 변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모든 아가씨가 활과 화살을 손에 쥔 사람 앞에서 태연히 서 있을 수 있진 않단 것을. 심신으로부터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강적과 맞서 싸우는 침착함을 물려받은 거라면 과연 호랑이 부모 밑에 강아지 딸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채임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평소 삼 장(丈, 사람 키 정도의 길이) 정도 거리에 있는 사과를 쏘아 맞추는 건 일도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유달리 어려웠다. 거리가 몇 배로 늘어난 듯했다. 그의 귓가로 심묘의 말이 맴돌았다.

“그런데 넌 감히 날 죽일 수 있겠니?”

할 수 있을까? 감히 할 수 있을까? 내가 감히 할 수 있을까?

순간, 화살이 바람 소리를 내며 맹렬히 날아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허공에서 툭 떨어졌다. 힘이 부족한 듯 심묘의 옷자락에도 닿지 못했다. 장내가 모두 웃음바다가 되었고, 학생들은 대놓고 놀렸다.

“채임, 너 심묘를 좋아하는 것 아니지? 평소엔 십 장 거리도 적중시키면서 오늘은 삼 장 거리도 안 되는데?”

채임이 이마 위 땀을 닦고 화살을 당겼다. 두 번째 화살은 심묘의 발밑을 맞췄다. 세 번째는 심묘의 머리 쪽을 스쳐 머리 위 사과를 넘어뜨렸다. 심묘의 쪽 찐 머리가 풀어져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화살이 얼굴을 스칠 때도 심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자색 의복을 입은 눈같이 새하얀 꽃이 바람에 흔들림 없이 아주 똑바로 서 있었다.

채임은 두 손에 힘이 풀려 장궁과 화살을 함께 떨어뜨렸다. 소란스러웠던 장내도 어느새 조용해졌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심묘가 아니라 채임인 것을 바보도 알아챌 수 있었다.

넌 감히 날 죽일 수 있어? 못 하지? 그런데 난 할 수 있어.

심묘는 살짝 웃었다. 어린 짐승 같은 밝은 눈동자에 잔인함이 드리웠다. 천진한 얼굴과 잔인한 눈빛의 조합은 기이하게 아름다웠다.

“이제, 내 차례야.”

구천을 떠도는 귀신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채임이 몸서리쳤다. 채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턱을 타고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는 땀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심묘가 앞으로 몇 걸음 나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장궁을 주웠다. 장내 모든 사람은 심묘의 행동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예상 밖의 모습이었다. 심묘가 놀라 혼절하거나 추태를 부리는 걸 구경할 기회라 여겼는데 심묘는 조금도 그런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채임이 식은땀을 흘리며 세 번 다 화살을 적중시키지 못했다.

짧은 침묵 후, 단 아래 사람들이 분분히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과연 호랑이 아비 밑에 강아지가 태어나지는 않는군! 심가 아가씨의 담력이 대단한걸!”

평소 심신과 사이가 좋았던 사람이 말했다. 이전 심묘가 머저리에 아둔하다는 말을 듣고 의심했는데 오늘 보니 모두 유언비어임을 알 수 있었다. 저런 담력과 기백이 있는데 머저리일 리 없었다. 분명 누군가가 고의로 심신과 심묘의 명성을 훼손한 것일 터였다.

“확실히 대단하군. 방금 그녀가 눈도 깜박이지 않는 것을 보았나? 그 화살이 조금만 더 갔으면 뺨에 상처가 났을걸세. 저 아가씨는 정말 기백이 대단하군. 나라면 깜짝 놀랐을 거야.”

“그녀가 어느 집안 출신인지 알지 않나? 심 장군의 딸이 어찌 유약할까? 이전 심묘에 대한 얘기들은 모두 믿을 수 없네. 유언비어야. 악의를 품고 그녀를 욕한 거지.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남에게 미움을 받게 되잖아. 어린 나이에 저리 출중하니 질투를 사고도 남겠지.”

자리의 관료들은 대부분 심묘를 좋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들은 조정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니만큼 후원의 여인과는 사물을 보는 시선도 달랐다. 심묘가 나이를 점점 먹으면서 본래의 우수한 면모를 드러내는 거라고 여겼다.

부수안과 부수현이 마주 보았다. 부수현이 고개를 가로젓고 탄식했다.

“너와 나, 모두 잘못 봤군. 그녀는 정말 대담한 사람이야.”

부수안이 웃으며 부수의를 바라보았다.

“아홉째, 지금 후회하는 거야? 저토록 비범한 여자를 왜 거절한 거야?”

부수현이 덧붙였다.

“사람이 하룻밤 사이 저렇게 변할 수는 없어. 심가 적녀가 여태 고의로 아둔한 척한 거겠지. 어느 쪽이든 아홉째는 손해 본 거야.”

부수의가 미소 지었다.

“요조숙녀네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 마음속 사람은 아닙니다.”

후회라니, 부수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단지 심묘의 고요한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그도 하룻밤 사이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전에는 정말로 멍청한 척을 한 거라면, 왜 그런 건지 궁금했다. 혹시 자신이 그녀를 싫어하도록 만들려고? 이리저리 궁리해보아도 의아하기만 했다.

배랑이 찻잔을 내려놨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배랑은 심묘 때문에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일을 예상한 듯 평온했다. 오히려 채임이 놀라 제대로 화살을 쏘지 못했다. 그녀가 원래 이처럼 대단했었나 싶었다.

“과연 현묘한 사람이군.”

예친왕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심묘를 바라보는 시선은 탐욕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떤 맛일지…… 궁금하군.”

배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예친왕이 또 추악한 일을 꾸미는 듯했다. 하지만 일개 선생인 배랑에게는 그를 막을 힘이 없었다.

* * *

누각 위 사경행이 창틀에 기대앉아 느긋하게 말했다.

“네가 졌군. 이런 결과가 나오다니 뜻밖인걸!”

소명풍이 눈을 크게 뜨고 사경행을 빤히 바라본 다음 다시 멀리 있는 단 위를 바라보았다.

“넌 알고 있었지?”

“내기를 했으면 승복해야지.”

사경행이 일어나면서 옷을 가볍게 털었다.

“알았어, 인정하지. 벌칙이 뭐야?”

소명풍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벌칙은 시합 후 나의 승리를 경축하며 술을 마시는 거야. 20년 숙성된 여아홍 어때?”

“정말 제대로 털어먹는구나.”

소명풍이 친구를 욕하면서도 무언가 의식한 듯 의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시합? 무엇을 위한 축하야? 무슨 기뻐할 일이 있어?”

“지금은 없는데 곧 있을 거야. 대단히 기뻐할, 의미 있는 일이.”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 * *

심묘가 사과를 채임에게 넘겨줬다. 사과를 받는 채임의 손이 벌벌 떨렸다. 채임이 물었다.

“활쏘기를 배운 적 있어?”

“전혀.”

심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았다.

“오늘 처음으로 활을 만져보는 거야. 세 번 쏴야 하니, 하다 보면 어찌어찌 알게 되겠지.”

채임은 몸을 떨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뱉었다.

“하다 보면 알게 된다고? 허튼소리 하지 마.”

심묘의 태도는 냉정하며 침착해서 평소에도 활을 잡아본 듯했다. 채임은 위무대장군 심신이 직접 심묘에게 궁술을 가르쳤겠거니 하고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심묘는 그런 채임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늘 처음으로 활을 만져본다고 말했다.

“너,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활쏘기를 한다는 거야? 분명 사과를 맞추지 못할 거라고. 내가 헛되이 죽는 거 아니야?”

“채 공자, 너무 우습네.”

심묘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아 말하는 내용이 잘 전해졌다. 심묘는 눈을 내리깔았으나 기세는 사람을 압박했다.

“채 공자가 날 지목했을 때, 내게 활을 쏠 줄 아느냐고 묻지 않았어. 내게 활을 쏠 때도 개죽음이 아닌지 묻지 않았지. 어째서 내가 쏠 때가 되니까 내게 해보았냐고 할 수 있냐고 묻는 거야?”

채임은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그는 심모의 분풀이를 대신 해주겠다고 고의로 활을 쏘지 못하는 심묘를 선택했다. 그의 발등을 찍은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심 소저, 어리석은 자식이 장난이 심해 본관이 그를 대신해 사죄하겠으니 넘어가 주시게나. 소저는 활쏘기를 못 하니 의외의 사고가 일어날 수 있네.”

채 대인이 단 아래에서 외쳤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으나 이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체면은 좀 잃겠지만 자식이 생명을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본관’이라는 말을 사용해 심묘를 위협했다. 어린 아가씨라고 얕보는 것은 분명 떳떳한 일은 아니었으나, 채 대인은 심묘의 융통성 없음에 자신도 모르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묘는 일개 관원인 채 대인이 뭐라고 하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심묘는 명제 황제, 흉노, 진국 황실과 접촉한 심 황후였다. 채 대인 따위는 그녀가 상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심묘는 턱을 살짝 들었다. 채 대인은 단 아래에 있는 데다 부탁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먼 곳에 있는 사람들 눈에는 채 대인이 심묘 발아래 엎드린 신하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심묘의 말에 사람들은 대경실색했다.

“채 대인, 방금 저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지금은 채 공자가 목숨을 걸 차례이지요. 생사장도 적었으니 증좌 역시 명확합니다. 제가 오늘 그를 쏴 죽여도 정당하니 시합의 결과를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심묘는 채 대인의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이어 말했다.

“채 공자가 직접 규칙을 정했고 생사장을 쓰는 것에도 동의했으니 지금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채 대인께서는 조정에서 정세가 나빠지면 바로 입장을 바꾸십니까?”

분명 시합이 시작되기 전, 채임이 말했다.

“선생님, 광문당은 여태껏 특정 인물의 편의를 봐주는 일 없이 규정을 잘 지켜왔습니다. 도전자가 말하는 대로 시합하는 게 이 시험의 규칙입니다. 설마 당당한 대장군의 딸이 담이 작은 소인배겠습니까?”

지금껏 귓가에 맴돌고 있는 그 말을 심묘가 돌려주자 채 대인과 채임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규칙을 정한 사람이 그 때문에 자신이 불리해지자 바로 말을 바꾸다니요. 이렇게 발뺌해도 되는 것입니까? 명제의 대인은 모두 이러합니까?”

그녀의 말은 날카로웠다.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채 대인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곳에는 많은 관료가 모여 있으니 당연히 그의 적도 있었다. 심묘의 말이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의 귓속에 들어가면 어떤 이야기로 변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 자리에는 황실 사람도 있기에 불필요하게 황실의 주목을 사면 채임은 말할 것 없고 채가도 재난을 당하게 될 것이었다.

“심가 소저의 말이 맞다. 채 대인, 채 공자가 스스로 세운 규칙이니 당연히 지켜야 한다.”

예친왕이 심묘를 향해 괴상하게 웃었다. 예친왕이 다른 사람이 곤경에서 빠져나오도록 맞장구를 쳐준 건 몹시 드문 일이라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은 곧 다시 심묘로 향했다. 시선에는 그녀에 대한 지지와 경시가 섞여 있었다.

부수안과 부수현은 서로 한 번 바라보았고, 부수현이 탄식하며 말했다.

“왕숙까지 입을 열었네.”

“아마도 우리가 많이 어린 왕숙모를 갖게 되겠는걸?”

부수안은 자신의 재치에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친왕의 속마음이 어떻든 겉으로는 심묘의 편을 들자 채 대인은 불만이 있어도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채 대인은 어린 소녀에게 훈계받는 상황에 몹시 놀라고 분했으나 드러낼 수 없었다.

“네…… 네. 하관의 생각이 주도면밀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채임을 한 번 노려보고 몸을 돌려 떠났다.

채임은 부친이 떠나는 것을 보며 다급해졌다. 심묘의 입만 무섭다고 생각했으나 심묘의 맑은 두 눈을 마주하자 절로 오싹했다. 심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맹수 같았다. 분명 보기에는 아직 덜 자란 아가씨인데, 어째서 이런 무서운 느낌이 드는지……. 채임은 잔뜩 긴장해 소리를 낮춰 말했다.

“네가 날 다치게 하면, 채가는 반드시 널 용서치 않을 거야.”

대장부라면 절대 하지 않을 야비한 위협이지만 채임에게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심묘가 만약 잘못 쏘게 된다면 그는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었다. 채임은 친한 친구와 사냥할 때 실수로 사냥감의 눈이나 엉덩이를 맞춘 적이 있었다. 사냥감이 고통에 겨워 발버둥 치는 모습은 정말 처참했다. 지금 자신이 그때의 사냥감이 된 것 같았다. 채임은 위협이 통했길, 그래서 심묘가 가볍게 화살을 당기길 기도했다.

채임이 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네가 이번에 분별 있게 굴면, 앞으로…… 앞으로 난 광문당 안에서 널 귀찮게 하지 않겠어.”

심묘는 가볍게 눈썹을 추켜세웠다. 채임은 긴장한 표정이었고, 그녀가 동의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심묘는 애석하게도 이런 사람을 많이 보았다. 약자 앞에 강하고 강자 앞에 약한 사람. 지금은 두려워 물고 있던 것을 놓았으나, 일단 오늘이 지나면 반드시 또 예전처럼 달려들어 이빨을 보일 것이다. 떨어진 체면 때문에 더욱 기회를 찾아 보복하려 들 게 뻔했다.

둥지를 막 떠난 오소리가 스스로 밀림의 패권을 장악했다 여겼는데, 용맹한 이리를 만나 안색이 변했다. 지금 잠시 숙였을 뿐, 앞으로도 이 오소리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덤벼들 것이었다. 하지만 심묘는 이리가 아닌 호랑이였다. 이 오소리가 영원히 앞으로 덤비지 못하게 하려면…… 그의 목을 한입 물어뜯어 감히 권위에 도전할 엄두도 못 내게 해야 했다.

심묘가 살짝 웃었다.

“내가 감히 날 죽일 거냐고 물었지. 네 활이 대신 대답해줬으니 이젠 내가 그 대답에 반응할 차례겠지?”

심묘의 작은 얼굴은 옥처럼 윤이 났다. 봄날 여린 새싹처럼 가련하고 귀여웠으나, 내뱉은 말은 흉악했고 흉악했다.

“난 할 거야.”

심묘는 단호하게 몸을 돌려 걸어갔다.

제자리에 서서 멍하니 있던 채임은 시험관이 그를 연거푸 호명해 겨우 정신을 차렸다. 주변의 얼굴들엔 어느새 비웃음이 가득했다. 채임이 급히 분홍 옷을 입은 소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심모는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데 열중한 듯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엔 무심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실망해 외면하고 있는 듯했다.

모두 그가 자초한 상황이었다. 지금 물러날 수는 없었다. 무술을 익히지도 않은 여자에게 패배하면 채가는 수도의 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었다. 게다가 앞으로 심모와 어떻게 마주할까. 채임은 심묘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그녀는 진짜 날 죽일 생각인가. 생사장을 썼다 해도 사람을 죽이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며 채임은 스스로를 달랬다. 가까스로 평온한 척 삼 장 밖의 흰 선으로 걸어가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렸다.

* * *

멀리 떨어진 누각에서 사경행이 소명풍에게 물었다.

“추측해봐. 맞출까, 맞추지 못할까?”

“당연히 못 맞추지. 채임을 화살로 맞출 담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둘째치고, 그럴 능력이 되겠어? 규방의 여자가 무술을 익히는 경우는 아주 드물어. 게다가 심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란 걸 온 수도 사람이 아는데.”

소명풍이 허튼소리를 한다며 눈을 부릅뜨자 사경행이 낮게 웃었다.

“꼭 그런 건 아니지.”

“사경행, 너 나랑 내기 한판 더 안 할래?”

“구태여 불필요한 짓을 하자고? 난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데.”

소명풍은 사경행이 어떤 일이든 묘하게 돌려 말하는 것에 익숙했기에 솔직하게 반문했다.

“무슨 결말?”

사경행이 여름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너의 패배.”

* * *

심모가 단 위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조여왔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진약추에게 물었다.

“어머니, 그녀가 채 공자를 맞출까요?”

“당연히 아니다.”

진약추는 딸이 오늘 심묘 때문에 맥을 못 추는 모습을 보고 탄식했다. 나이가 어려서 감정을 잘 억누르지 못하긴 하겠으나, 그래도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리라 기대했는데. 진약추는 아쉬웠다.

“어디 그리 쉽게 적중하겠니? 내가 네 백부님께 들었는데, 활을 쏘려면 상당한 힘이 필요하다고 하더구나. 심묘는 부 안에서 활을 당겨본 적도 없잖느냐. 아마 활시위를 당기는 것조차 버거울 테지. 그러니 너도 허튼 생각 말도록 하렴. 심묘는 그냥 장난치는 거야.”

그러나 심묘는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천천히 화살을 받치고 활시위를 당겼다. 거침없는 동작은 수백 번 연습한 듯 자연스러워 일말의 머뭇거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동작은 대단히 정연하여 그녀가 궁술에 능함을 알려주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살의를 품고 채임을 향해 날아갔다. 장내는 조용했다. 극도의 적막 속에서 바닥에 화살이 박히는 소리가 울렸다. 화살촉은 붉은색을 띠었다.

모든 사람이 숨조차 크게 내쉬지 못하고 있을 때 먼저 적막을 깬 것은 채임이었다. 그가 손을 내밀어 왼뺨을 더듬자 검붉은 피가 묻어났다. 모든 사람이 놀라 얼이 빠졌다. 심묘가 정말 쐈다. 화살은 허공에서 추락하지 않고 목표물에 도달했다. 그녀의 화살은 사과와 기껏해야 한 뼘 정도 떨어진 채임의 뺨을 스쳤다.

채임이 소리쳤다.

“심묘, 뭐 한 거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번째 화살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갔다. 화살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 그의 오른뺨을 스쳤다. 오른뺨이 얼얼하니 아파 손을 내밀어 만져보자 핏자국이 번졌다. 채임은 심묘에게 마구 눈을 부라렸다. 채 대인 역시 저지하고 싶으나 예친왕이 아직 앞에 앉아 있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임완운이 일어서서 외쳤다.

“심묘! 미쳤느냐? 어찌 감히 채가 공자에게 상처를 입혀?”

“심묘 소저는 정말 대단하네요. 여인의 몸으로 어떻게 저런 담력이 있을까요? 채가 공자를 상처 입혔으니, 앞으로 심가와 채가가 조정에서 불편해지지 않을까요?”

역 부인이 일부러 과장되게 놀란 척하자 임완운과 진약추가 몸을 떨었다. 심묘를 망신당하게 하려 했는데, 심묘는 망신을 당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채임에게 상처까지 입혔다. 채가는 문신의 연줄을 쥐고 있기에 채가가 이 일로 심가를 탓해 미움을 사게 된다면? 심귀와 심만 두 사람의 미래가 불안해질 수도 있었다.

임완운은 조급해졌다. 지금 당장 심묘를 끌고 가 채가에게 사과하게 하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임완운이 다시금 큰 소리로 심묘를 불러 저지하려 할 때, 진약추가 그녀를 붙잡았다. 임완운이 진약추를 뿌리치며 눈을 크게 치켜떴다.

“눈 뻔히 뜨고 심묘가 사고를 일으키는 걸 지켜만 보려는 거야? 돌아가 대인이 물으시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진약추는 탄식했다. 그녀는 선비 집안 출신이기에 늘 속으로 자신이 임완운보다 고귀하다고 여겼다. 남들 앞에서 천박하게 보이는 걸 가장 경시하기에 임완운의 드센 방법을 깔보았다.

“형님의 생각도 맞지만, 예친왕 전하께서 하신 말씀을 들으셨잖아요. 채 대인이 왜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시지 않고 아드님이 다치는 걸 보고만 계시겠어요? 이곳에서는 끼어들 수 없어요. 그저 아이들의 놀이로 치고 여기서 보고 있는 게 나아요.”

“그냥 보고 있자고?”

진약추의 말도 일리가 있었으나 임완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

“만약 심묘가 경중 없이 손을 써서 큰일이 벌어지면 어찌할 거야? 아무리 생사장이 있더라도 반드시 수도에 유언비어가 돌 거야.”

“형님은 뭐가 두려운 거예요? 방금 심묘가 손 쓰는 것을 못 봤어요?”

진약추는 웃으며 말했다.

“심묘는 분명 활을 쏠 줄 알아요. 일부러 채가 공자의 체면을 떨어뜨려서 보복한 거예요. 그래도 분별력은 잃지 않았는지 뺨을 노렸으니 문제없어요. 심묘가 정말 흉악한 마음을 먹었다면 찰과상 수준이 아니었을 거예요.”

심청과 심모는 임완운과 진약추의 대화를 다 들었다. 그녀들은 아직 어려서 관직의 일은 몰랐기에 그저 마지막 한마디만 이해할 수 있었다.

심모는 단 위 심묘를 바라보았다. 오늘 심묘는 차분하고 침착하며, 주제넘게 나서서 짜증 났다. 이렇게 된 이상 심묘가 아예 채임을 쏴 죽이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도 그처럼 잔인한 여자를 아내로 삼으려 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앞으로 그녀를 가까이하는 사람도 없게 될 테니. 찰과상은 의외의 사고일 뿐, 심모가 원하는 만큼 잔인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위해 나선 채임의 안위는 조금도 걱정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채임이 이 자리에서 죽어 심묘가 악명을 얻길 원했다. 심모의 눈빛이 더욱 반짝거렸다.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으나 예친왕 때문에 모두 감히 소리 내 말리지 못했다. 채가 부부는 마음이 불타는 듯 초조해하면서 자신의 아들이 과녁이 된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심묘, 뭐 하자는 거야?”

연거푸 화살에 찰과상을 입은 채임은 온 얼굴이 얼얼하고 아팠다. 이제 그는 심묘에게 분노가 아니라 두려움을 느꼈다.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지? 미치지 않고서야, 아니 미친 게 틀림없어! 심묘가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심묘의 말은 작게 들렸다. 단 아래로는 전해지지 않으나 채임의 귀에는 전해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비처럼 나풀거리는 듯도 하고 구름 끝에서 들려오는 듯도 하여 감히 그녀를 바라보지 못하게 했다.

“훈계하는 거야.”

심묘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마지막 화살이야!”

사람들은 심묘의 시위에 팽팽히 걸린 마지막 화살을 바라보았다.

채임은 심묘의 화살이 머리를 향하는 것을 보고 다리가 풀릴 뻔했지만 허벅지를 매섭게 꼬집어 겨우 버텼다. 채임은 그녀가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에 공포를 느꼈다. 공포는 파도처럼 그를 집어삼켜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으나 심묘의 화살은 하늘과 바다 끝이라도 쫓아올 수 있을 듯했다.

“심가 소저는 승부욕이 너무 강하군.”

대인들은 심묘의 침착함에 탄복했으나 분풀이가 도가 지나치다고 여겼다. 여자가 승부욕이 강한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채임을 물고 놓지 않았고, 그녀에게 도전한 채임에게 앙갚음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채임은 그녀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았는데, 심묘는 채임의 얼굴에 상처를 입혔다. 남자아이니 상처가 남아도 큰 문제는 아니었으나, 얼굴 상처는 아무래도 보기 좋지 않았다.

“이래야 심 장군의 딸이지.”

심묘를 편드는 사람도 있었다.

“얕보였는데도 되받아치지 않았단 것을 심 장군이 알면 대단히 분노할 게야.”

“그러나 자네도 보지 않았나? 지금 그녀는 화살을 채임의 머리를 겨눴네. 채임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니, 너무 잔인하다고 할 수 있으이.”

채임의 두 다리가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마주한 악귀의 용모는 온화하고 수려했다. 시선은 맑고 투명하며 심지어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손동작은 정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심묘가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세 번째야.”

심묘가 손을 놓자 화살은 순식간에 날아갔다. 맹렬한 살기가 채임의 이마를 향해오자 채임은 놀라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채임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살려줘!”

“채임!”

채 부인과 채 대인이 일제히 외쳤다. 모든 사람이 일어나 목을 뻗어 단 위 상황을 보았다.

채임은 바닥에 쓰러졌다. 그 옆에 검은색 화살에 뚫린 사과가 나뒹굴었다.

화살에 뚫린 사과는 채임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듯했다. 겁먹은 채임은 눈물을 흘리며 담담한 심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활을 거두어들이고 다가와 허리를 굽혀 사과를 주웠다. 그녀는 채임을 향해 미소 지었다.

“네가 졌어.”

심묘의 얼굴은 어렸지만, 오늘 처음부터 끝까지 지나치게 평온하여 나이를 쉬이 가늠할 수 없게 했다. 그러나 지금의 맑은 미소는 아이다운 천진함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심묘가 더 이상 예전의 그 아둔했던 심묘가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채임은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다. 쓸린 상처 위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핏자국이 얼룩졌고, 온 뺨이 붉게 물들었다. 볼썽사나운 꼴이었으나 채임에게는 자신의 얼굴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심묘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심묘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채임이 드디어 자신의 무서움을 안듯 한데, 두려우면 되었다. 오소리를 벌하여 본보기를 보여주었으니 앞으로 곁의 뱀, 벌레, 쥐, 개미들도 달라질 것이었다.

사람들이 놀라 다리가 풀린 채임을 부축해 무대 아래로 데려갔다.

시험관은 명중된 사과를 보고 놀라 의아해하며 심묘에게 물었다.

“심 소저, 이전에 활쏘기를 배웠나?”

활쏘기는 방향이 정확해야 할 뿐 아니라 활시위를 당기는 손과 팔에도 힘이 부족해서는 안 됐다. 심묘가 연약한 규중의 꽃일 뿐이라고 생각해온 모든 이들이 말을 잃었다. 더구나 심묘는 채임이 움직이는 상황에도 사과를 적중시켰다.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배웠냐는 말에 심묘는 대꾸하지 않고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진국으로 인질로 간 첫해, 진국 황실의 공주든 황자든 모두 그녀를 괴롭히길 좋아했다. 일국의 황후가 모욕을 당하는 걸 지켜보는 것보다 재미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진국이 명제에 군사를 빌려주었기에 심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과녁 맞히기는 공주, 황자가 발명한 새로운 놀이였다. 방금 전 활쏘기와 같은 규칙이었는데, 다만 목표가 사람 머리라는 게 차이였다. 진국 황실은 심묘의 머리에 과녁을 얹게 했고, 고의로 그녀의 머리카락이나 의복을 쐈다. 때때로 그녀의 팔뚝이나 목 등에 상처를 내기도 했으나 심묘는 이를 악물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매일 밤, 심묘는 방 안에 과녁 하나를 세워 꾸준히 연습했다. 그녀는 그 과녁을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으로 여기며 진지하게 임했다. 수없이 연습한 끝에 마침내 백발백중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낮에 진국의 황자와 공주들과 어울려 활을 쏠 때면 여전히 힘없이 활시위를 당기거나 일부러 빗맞혔다. 인질의 몸이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반드시 살아서 명제로 돌아가 완유와 부명을 만나야 했다. 아이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울분을 삼키고 또 삼키는 1년이었다.

오늘 채임 때문에 그녀는 그 치욕의 날들로 돌아간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그녀는 어떠한 약점도 잡히지 않았다.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쏘고 싶으면 쏠 수 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건드리면 그녀는 곱절로 돌려줄 수 있었다. 채가가 감히 심신을 가지고 떠들어댄다면 반드시 그들이 두려움에 입을 다물게 해줄 것이다!

심묘는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입을 뗐다.

“일찍이 오라버니가 뜰 안에서 꾸준히 훈련하는 걸 보았습니다. 많이 봐서 그대로 모방할 수 있었어요. 오늘 이런 좋은 결과를 얻을지는 전혀 예상 못 했습니다.”

채가 부부는 분노했다. 활쏘기에서 1등만 해오던 아들이 오늘은 하나도 적중시키지 못했고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큰 망신을 당했는데, 심묘는 그저 보고 따라 했을 뿐이라고? 처음 활을 만져보았는데 삼 장 밖의 사과를 적중시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심스러웠다.

짝, 짝, 짝. 맑고 듣기 좋은 박수 소리가 울렸다. 예친왕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멋지군.”

심묘는 그를 한 번 쳐다봤을 뿐 감사의 인사 따위는 하지 않았다.

시험관이 큰 소리로 말했다.

“활쏘기에 도전할 다른 사람 있습니까?”

이번 판은 당연히 심묘의 승리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올라가 심묘에게 도전할 수 있었다. 만약 도전하는 사람이 없다면 심묘가 1등이었다.

심모는 좀 전까지만 해도 악랄한 상상을 하며 생기가 넘쳤으나, 이제 다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급격히 무기력해졌다. 처음으로 심모가 시험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그것도 심묘에게 완전히 가려졌다. 그녀는 멀리 부수안, 부수현과 이야기를 나누는 부수의를 바라보았다. 주먹을 꽉 쥐었으나 곧 손아귀의 힘이 빠져버렸다. 심모는 속으로 장래성이 없는 채임에게 욕을 심하게 퍼부었다.

그러나 잠시 후, 누군가 외치었다.

“제가 도전하고 싶습니다!”

한 소년이 일어섰다. 얼추 지학을 넘긴 듯해 보이고 생긴 것은 괜찮으나 애석하게도 눈에서 감출 수 없는 세속적 영악함이 드러났다. 말투는 겸손하고 온화한 듯하나 마음에 없는 언행을 하는 자라는 느낌이 짙게 풍겼다.

심묘는 단번에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 가소로웠다. 소년은 바로 임안후부의 서자이자 사경행의 배다른 동생, 둘째 공자 사장무였다.

사장무는 능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준은 못 됐으나 아주 교활한 데다 아첨이라면 따라올 자가 없는 수준이었다. 전생에서 사가가 완전히 붕괴한 후 방씨 모자는 새 황제의 사가에 대한 위로 차원의 지원을 받아들였고, 그 덕에 사장무와 그의 동생 사장조는 조정 관리가 되었다.

심묘는 당시 이 두 형제를 매우 싫어했다. 미 부인과 그 아들 부성에게 충성하며 태자 부명의 앞길을 막는 데 앞장서는 자들을 어찌 좋아할 수 있겠는가. 심묘가 사경행에게 기회를 보아 서자 동생의 뿌리를 뽑으라 일깨운 이유도 전생 일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에게도 뿌리 깊은 원한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원한을 갚기도 전에 사장무가 먼저 나섰다. 심묘가 채 대인 쪽을 흘깃 보니 표정이 어두웠고 그 곁에서 사가의 셋째 공자 사장조가 그를 위로하는 듯했다.

최근 사가 두 형제는 조정 봉랑 채 대인의 밑에서 임시 직무를 맡고자 애쓰고 있었고 이를 위해 계속해서 채임과 친교를 맺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채임은 사경행과만 교제하려 했고 두 형제는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이 두 형제에겐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전에 심묘가 부친을 협박해 부수의에게 시집을 갔을 때, 사가 두 형제는 채 대인의 수하로 들어갔다. 2년 후 채가는 탐관오리 사건에 말려들어 가산을 몰수당하고 멸문했다. 이번 생에서는 많은 일이 변했으나 심묘 눈에는 앞으로 역사가 반복될 게 보였다. 결말은 아직 변하지 않은 듯했다.

사가 두 형제는 채가의 체면을 세워주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리라. 심묘가 대답하려 할 때, 갑자기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했다. 그 목소리는 낮잠에서 막 깬 듯 나른하면서도 조소를 띠고 있었다.

“평소 부에서 형과는 연습하지 않고 지금 어린아이에게 도전하는 거냐? 사장무, 갈수록 퇴보하는구나.”

사경행이 단 위로 나타났다. 그는 단 아래의 두 동생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너희 둘에게 도전하는 건 어떠냐? 내가 동생을 단속하고 가르치도록 해다오. 비겁하고 용렬한 짓은 배우지 말거라. 여인과 싸우다니 이런 망신도 없구나.”

그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넌 내려가도록.”

심묘는 움직이지 않고 그를 주시했다. 그녀가 사경행을 일깨우니 그는 무대에 오를 준비를 했다. 그러나 심묘는 지금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해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사경행이 그녀를 위해 특별히 곤경에 벗어나도록 도운 듯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사장무도 사경행이 갑자기 튀어나올 거라곤 예상 못 했을 것이다. 사장무는 오늘 채가 사람에게 잘 보이려 했다. 심묘는 이미 채가 사람에게 미움을 샀으니 자신이 채가를 대신해 심묘를 훈계하여 망신당하게 하면 채가는 당연히 자신에게 깊은 호감을 보일 것이다.

심묘가 확실히 활쏘기를 잘하긴 하지만 여자와 남자 사이의 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법. 채임이 패배한 이유는 그가 적을 얕잡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장무는 적을 얕잡아보는 사람이 아니다. 남몰래 화살이 미묘하게 움직이게 손을 봐둘 셈이었다. 심묘는 평소 무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 알아챌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계획은 완벽했지만, 사경행이 중간에 끼어들면서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사가 두 형제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놀랐다. 오늘 부친 사정이 여기에 왔다면 그 역시 놀람을 금치 못할 것이었다.

사경행은 여태 시험에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문무가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더욱이 무공 부분은 시험 따위로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그는 몇 번의 전쟁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황실의 경계심을 사지 않도록 몸을 사렸을 뿐, 아니었다면 이미 전쟁터에서의 명성은 노장 못지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매년 시험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황실의 경계를 사지 않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본인이 사소한 일에 의미를 두지 않는 반골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부친이 원하는 바와 상반되게 행동해 부친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시험에 여태 나타나지 않았었다. 기대주가 참여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부득이 임안후부의 두 서자에게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매년 시험, 사장무와 사장조는 심혈을 기울여 몇 개의 항목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올해, 사가에서 가장 냉소적인 소후야와 서출 두 형제가 시합하게 됐으니 어떤 결말이 나올지 흥미진진했다. 사경행의 명성이 높으나 사람들은 늘 자신의 눈앞의 것을 받아들이길 좋아했다. 사경행은 수도 안에서 자신의 재능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특히 여인들은 남자의 일언반구 속에서 사경행의 재능이 절정이라 들었을 뿐이었다. 소문은 뜬구름 같은 것이니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광문당의 학생들도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소년들은 사경행의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은 모습을 흠모하면서도 질투했다. 지금 사경행의 실력을 볼 수 있어 흥분하긴 했지만, 사가 두 형제는 평판이 좋았고 평소 그들과 친분 있는 사람이 많아 소년들은 모두 사장무와 사장조 편이었다.

소녀들은 사경행의 준수한 용모에 얼굴을 붉혔다. 그의 비범한 기질은 수도 대갓집 자제들과 분명 달랐다. 영민하고 용맹스러웠으며, 혈기와 냉기를 동시에 띤 듯했다. 특히 사악한 기운을 품은 듯한 웃음은 반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여자아이들은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어가며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심묘는 사람들 표정을 보던 중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사람들은 사경행이 올라와 두 동생에게 도전하는 것은 귀공자다운 기질의 발로라고 여길 것이었다. 심묘는 살짝 웃었다. 사경행은 사정을 봐줄 사람이 아니었다. 시험대 위에 올라왔으니 그는 절대 두 동생이 물러날 가능성을 주지 않을 것이었다.

사경행과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표면적으로 거만하게 행동하지만, 규칙이 있었다. 천천히 그림을 그려야 자신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경행은 임안후부를 믿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그의 뒤에는 임안후부만 있는 걸까?

심묘가 고심하는 사이, 단 아래 사장무가 소리를 냈다.

“큰형님,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뭐가 안될 것 같단 거지?”

사경행은 심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사장무를 향해 웃음을 터트렸다.

“나보다 심묘를 이기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으냐?”

이에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심묘는 내력이 없고 무공을 못 하건만, 넌 그녀에게 활쏘기로 도전하는구나. 무예를 익힌 사람이 닭 잡을 힘도 없는 여자를 골라 시합하다니. 형인 나도 이해할 수 없구나.”

사경행은 다시 한번 심묘를 빤히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낮은 음성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괜찮군. 네가 용모로 상대를 고른 거라면 납득이 가는구나.”

뾰로통한 소년은 웃음이 나왔다. 심지어 심묘를 향해 애매한 시선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확실히 아둔한 인상을 버린 심묘는 바라보는 이의 오감을 사로잡았고,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빛났다. 그녀는 생긴 것이 예쁘긴 했으며, 순진하고 귀여운 모습과 대비되는 침착한 태도는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전 인상이 너무나 뚜렷이 기억에 남아 있으니 사람들은 바뀐 상황에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사경행의 한마디 말에 소년들은 드디어 심묘가 아주 특별한 작은 미녀임을 인정했다. 반대로 소녀들은 언짢았다. 사경행의 말은 심묘의 용모를 과찬한 것이었다.

심모와 심청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지금 그녀들은 부수의를 사모하지만 세상에 출중하고 절세 남아는 많았기에 결코 부수의 한 명만 사모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경행은 수도만이 아니라 온 명제에서도 유일한, 특별한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저 머저리를 칭찬하다니. 자긍심이 대단한 심모와 심청은 질투가 났다.

역패란이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사 소후야가 눈이 멀었나, 어째서 심묘의 얼굴이 예쁘다고 느낀 걸까?”

“분명 심묘가 무슨 방법을 써서 미혹한 걸 거야.”

백미 역시 입술을 깨문 채 단 위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심묘는 정말 수치를 몰라. 종전에는 정왕 전하에게 치근거리더니 지금은 또 사 소후야에게 치근거리잖아.”

그녀들의 대화는 심묘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설사 들렸더라도 심묘는 웃고 넘겼을 테지만. 심묘는 사경행의 목적이 무엇인지 즉시 간파했다. 그 목적은 그녀를 곤경에서 빠져나가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닌, 사가 두 형제가 거절할 방법이 없는 방식으로 그들을 핍박해 단 위로 올라오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가 두 형제는 당연히 사경행과 맞서는 것을 꺼렸다. 승부는 둘째치고, 사정은 적자를 매우 아꼈다. 서자와 적자가 시합을 하면 사정은 형제 사이가 화목하지 않다고 여길 것이었고, 적자를 편애하는 사정은 반드시 그들 두 형제에게 불만을 품을 것이었다.

그래서 사장무와 사장조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사경행은 신묘한 사람이었다. 그는 위협하지 않는 대신 도발했다. 사장무가 닭 하나 못 잡는 심묘에게는 도전하면서 사경행과의 시합을 꺼린다면……. 우스운 행태였다. 사장무의 속셈이 사람들 앞에 까발려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람들의 의아함을 없애기 위해서, 자신이 채가에 붙기 위한 게 아니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장무는 사경행과 한 판 시합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심묘를 이용해 채가에 붙기 위한 계산이 허사가 되었으니 시합은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한 셈이나 다름없으나 물러날 수도 없었다. 사장무가 낙담을 감추고 일어났다.

“형님께서 이야기하시니 제가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사경행은 누군가가 자신을 탓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는 전쟁터에서 배운 바였다. 그러나 사경행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지 눈썹을 치켜세웠다.

“한 사람이 부족하구나. 셋째, 너도 함께 올라오거라.”

사장조는 사경행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게 심묘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함이겠거니 생각했다. 사경행은 원래도 범인이 쉬이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긴 했으나, 이번에는 그 정도가 더했다. 사장조는 아연실색했다. 사장무와 겨루는 줄 알았는데 도전자에 자신도 포함하다니.

이곳에 사정이 없기 때문에 사장조는 사장무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둘째 형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사장조보다 더 영리한 사장무는 사경행의 말을 듣고 분노했다. 사경행은 자신 하나로 도전하는 건 부족하니, 사장조까지 더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연합해도 그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에, 사경행이 두 사람에게 치욕을 주려는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장무는 사경행의 거만함에 치를 떨었다.

분노한 사장무는 평소의 침착함을 잃고, 표정과 말투에 노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큰형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자신만만해서 동생들은 안중에도 없으신 것 같습니다.”

사경행은 시험관 손에서 사과를 가져왔다. 그는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맞다, 확실히 아직은 안중에 없지. 너희 둘은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으나 나와는 겨뤄본 적이 없으니. 듣자니 훌륭하다던데 오늘 형의 안목을 넓혀주는 건 어떠하냐?”

사람들은 사가 형제가 화목하지 않음을 알아챘다. 임안후부의 이야기는 온 명제에 알려져 있었다. 줄곧 이 형제 사이에 대해서 사람들의 추측은 제각각이었다. 사경행은 임안후부에 냉담한 태도를 보이며 서자 두 형제와는 이야기할 가치도 없다고 여긴다더니 소문이 틀린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사경행이 오늘처럼 사람들 앞에서 두 동생의 체면을 봐주지 않은 일은 처음이었다. 사람들은 꽤 좋은 구경거리를 보겠다고 수군거렸다. 그들은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하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심묘는 제멋대로인 사경행을 유심히 관찰했다. 사경행은 확실히 기이했다. 안하무인처럼 구는 듯 보여도 실은 두 형제를 교묘하게 함정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지금 그 두 사람은 사경행에게 코가 꿰여 끌려가는데도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오늘 시합이 끝나면 사가 두 형제의 체면은 조금도 남지 않을 터였다.

사장무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겨뤄보는 것뿐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사장무의 눈에 묘한 감정이 용솟음쳤다.

“형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셋째도 함께해야겠지요. 다만 저희가 절대 형님을 업신여겼다고 말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장무는 교만했다. 그가 한 말은 사경행이 먼저 시작한 일이니 져서 웃음거리가 되도 자기들에게 책임을 돌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사장조는 머뭇거렸으나 사장무의 눈짓을 받고 정신을 차렸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시험의 ‘지목’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든, 시합이 어느 종목이든 상관없었다. 남녀 구분도 하지 않을 만큼 자유로웠다. 사경행의 요구에는 위반되는 점이 없었다. 사경행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사기를 품은 웃는 얼굴은 많은 소녀의 시선을 끌어들였다. 그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생사장을 쓰는 건 어때?”

사장조와 사장무의 몸이 굳어지며 안색이 안 좋아지자 사경행이 나른한 말투로 말했다.

“농담이야. 형제지간에 겨루는 건데 필사적일 건 없지.”

심묘의 입꼬리도 가볍게 올라갔다. 사경행의 말은 정말 악랄했다. 사가 두 형제가 단 위에 올라갔으니 심묘는 더는 볼일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정리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자기 자리로 돌아왔지만, 심모와 심청은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풍안녕만이 빠르게 달려왔다.

“활쏘기를 그렇게 잘하다니. 심 장군님 뒤를 이으려고?”

심묘의 마음속에 파문이 일었다. 지금 황실은 심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녀는 말할 것도 없고, 오라버니인 심구의 처지도 불안했다. 전생 심구는 간악한 여인 하나 때문에 삶이 망가졌다. 심가는 아직까지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으니, 심묘는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가를 보호할 생각이었다. 채임처럼 또 누가 감히 심가의 체면을 떨어뜨리려 든다면 그 즉시 백배로 돌려줄 것이다!

풍안녕이 화제를 돌리며 말을 늘어놓았다.

“넌 누가 이길 것 같아? 사 소후야의 명성은 뛰어나지만 직접 보지 못했으니 소문은 소문일지도 몰라. 하지만 사장무와 사장조는 작년에 1등을 했어. 한 사람이 두 명을 상대해야 하니 너무 불리해. 어쩌면 사 소후야가 패배하게 될지도.”

사경행이 너무 불리하다니 심묘는 속으로 실소한 후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 위의 사장무가 제안했다.

“우리 두 사람과 형님 한 사람이 겨루는 건 판정하기가 어려우니, 우리 말을 타고 창으로 겨룹시다.”

사장무의 말을 들은 심묘는 웃음이 나왔다.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마창을 하자는 게냐? 좋다!”

시험관이 빠르게 준마 세 필을 준비했다. 무대는 넓어서 제어를 잘한다면 말을 타고 달릴 수 있었다. 세 사람이 술이 달린 짧은 창을 받았다.

“사장무와 사장조는 쌍창이잖아.”

풍안녕이 놀라 소리쳤다.

사장조와 사장무는 서로 마음이 잘 통해 두 화창(火槍, 화염통을 부착한 창)을 한데로 모았다. 그들은 매년 이런 방법으로 마창 1등을 해왔기에 사장무는 마창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는 이참에 사경행을 잔혹하게 짓밟을 수 있길 기원했다.

심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명제 황실의 상소 중 사가의 전투에 대해 기록한 게 있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사경행은 혼자서도 하나의 진영과 비견될 만큼 비범했다.

화창 한 자루와 준마 한 필. 사경행은 오직 이 두 가지로 적에게 참패를 안겨줄 수 있었다. 이는 특히 장군을 상대할 때 적합했고 사경행은 패배를 몰랐다. 사가 두 형제가 어떻게 한 나라 장군에게 맞설 수 있을까? 두 사람은 오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터였다.

고수(敲手)가 북을 쳤다. 시합이 시작되었다.

사장무와 사장조는 서로 눈빛을 교환한 다음 두 필의 말이 나란히 달리게 했다. 그들은 훈련을 같이 받았기에 말의 속도는 거의 같았고 화창을 휘두르는 방식도 아주 비슷하여 멀리서 보면 한 사람의 몸이 둘로 나뉜 듯했다. 위협적인 전법.

사경행은 느긋하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검은색 준마가 돌연 발굽을 들어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사경행은 창을 몸 앞에 가로로 들었다. 재빠른 몸동작에 자색 의복의 구름이 빠르게 흘러갔다. 순간 살기가 사방으로 넘치며 사경행의 옥 같은 얼굴은 아수라를 연상시켰다.

평소 초식에서 ‘보기 좋다’와 ‘흉악하다’를 함께 이야기할 수 없었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보기 좋은 초식은 힘이 없지만, 힘 있는 초식은 흉악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경행은 그렇지 않았다. 준수하고 걸출하게 생긴 그가 말 등에 엎드려 창을 앞으로 하니 영민하고 용맹스러운 전쟁의 신 같았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숙달된 모습은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게 했다. 멋진 힘에 준수하고 흉악하니, 늑대처럼 고귀하지만 맹렬했다.

자줏빛 의복은 질풍같이 움직였다. 그 몸 아래 준마가 빠르게 질주했고 사람들은 말발굽의 소리에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에게는 사람의 기분을 고조하는 기이한 재주가 있었다.

사장조와 사장무는 한순간도 사경행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따라붙었다. 한 명은 왼쪽, 한 명은 오른쪽. 사경행의 측면에서 포위하려 했다. 분명히 두 명이 한 명과 겨루는 것이지만 인정사정없었다.

사가 형제의 모습을 보던 부수의가 말했다.

“사경행은 사가의 좋은 후계자네요.”

부수안이 웃으며 물었다.

“어디가? 저렇게나 짓궂은걸. 사정도 어찌하지 못했으니 말썽꾼일 뿐이야.”

부수의는 한 번 웃고 말이 없었다. 장난이 도를 넘은 사람처럼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음모와 역정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법이다. 사경행이 세상을 하찮게 여기는 건 두려움을 조금도 느낄 필요가 없을 만큼 강하기 때문이었다.

사경행의 행동은 부수안의 거만함과 다르고 부수현의 신중함과도 달랐다. 사람에 대한 부수의의 평가는 지금까지 정확했다. 그의 막료 중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재학이 넓으나 무척 눈에 띄지 않는 사람, 고관 집안의 자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죄인도 있었다. 재능과 쓸모가 있었다면 인품과 기질, 일을 처리하는 방식 등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부수의는 자신만만하고 재능이 눈부신 사경행을 자신의 사람으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임안후부 출신. 임안후부는 명제에서 오래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애석함도 잠시, 부수의는 감정을 지운 눈으로 사경행을 좇았다.

사경행은 두 동생의 포위를 민첩하게 왼편으로 뚫고 오른편으로 뛰어갔다. 한 마리 뱀처럼 한순간에 탈출구를 찾아냈다. 아무리 사장무와 사장조가 빽빽하게 포위해도 그는 손쉽게 빠져나갔다. 두 형제는 끊임없이 협동해 쌍창을 썼는데, 사경행의 두세 번 움직임만으로도 많은 구멍이 생겨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되었다.

보통은 시합 후에야 순위가 정해지지만, 사람들은 시합 중임에도 사경행과 두 형제의 우열을 충분히 가릴 수 있었다. 사가 두 동생은 곧 사경행의 일격에 허물어질 터였다.

백미가 입을 가렸다.

“세상에. 사 소후야가 동생들을 가지고 노는 거로 보이는데?”

역패란도 놀라 말했다.

“맞아, 두 사람은 마창을 그냥 휘두르기만 하는 것 같아.”

창을 들어본 적도 없는 소녀들도 쉬이 알아챌 수 있는 사실을 남자들이 모를 리 없었다. 사경행은 한 방에 시합을 끝낼 수 있었음에도 고의로 사장무와 사장조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다. 마치 맹수가 토끼를 유희거리로 삼아 서둘러 집어삼키지 않고 가지고 놀며 고통을 주는 것처럼.

풍안녕이 감탄했다.

“사 소후야는 정말 놀랄 만한 사람이네. 마창이 자랑거리인 사가 두 형제와 실력이 하늘과 땅 차이라니. 사가 두 형제는 처참하게 패배할 거야.”

심묘가 고개를 숙여 바둑판을 보았다. 처참하게 패배할 거라니, 그럴 리가. 이건 처참한 패배라고 할 수 없었다. 싸움은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심묘는 흰 돌을 올려 검은 돌 두 개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바둑판 위에 작은 공백이 생겼다.

사장무와 사장조는 분기탱천했다. 사경행에게 원숭이처럼 희롱당하고 있음이 치욕스러웠다. 사경행의 교묘한 전술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뿐인 자신들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사장무는 살의가 솟아 흉악하게 사경행을 노려보았다.

사경행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비범했다. 게다가 그는 임안후부의 적자로서 좋은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부친 사정의 편애를 받음에도 사경행은 지금까지 임안후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늘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사람의 살길을 틀어막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숲속을 다스리는 호랑이고, 자신은 그 옆에서 재롱을 떠는 원숭이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원망이 폭발한 사장무는 지금까지 쓰고 있던 ‘착한 동생’ 가면을 벗기로 했다. 우렁찬 기합을 내지르며 사경행을 향해 창을 던졌다. 몸이 엇갈리는 순간에 사경행이 타고 있는 말의 엉덩이를 노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상대방이 다칠 가능성이 아주 크기 때문에 마창 시합 중 지금까지 상대방 말을 공격한 적은 없었다. 말 등에서 떨어지면 운이 좋아야 한 달 휴양이고 팔이나 다리가 부러지기 일쑤였다. 정말 운이 나쁘면 목이 부러져 죽을 수도 있었다.

시험은 학생들의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장이지 피비린내를 풍기기 위한 자리가 아니였기에 지금까지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장무는 소인배이자 형제의 정을 모르는 자임이 틀림없었다.

사장조도 사장무의 행동에 놀랐으나 그의 의중을 바로 이해했다. 사장조는 머뭇거리지 않고 말을 사경행 방향으로 몰았다. 말에서 굴러떨어진 사경행을 짓밟아 죽일 셈이었다. 두 형제는 완전히 정신을 놓은 듯했다.

사람들은 이 일이 명제의 법률에 어긋나는지 아닌지를 떠나서 사정이 이 일을 알게 된 후의 결과만 생각했다. 만약 사경행이 크게 다친다면 분명 두 형제 역시 앞날을 장담할 수 없을 텐데. 그러나 사장무와 사장조는 이미 이성을 잃었으니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여자들은 소리를 질렀고, 남자들도 숨을 들이마셨다. 담력이 작은 사람은 이미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소란에 심묘도 바둑 두기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사가 두 형제는 역시 호적수가 못 됐다. 바둑돌 하나에 너무 물러졌다. 아마 사경행은 이 기회를 분명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다친 검은색 준마가 길게 울더니 앞발굽을 높이 들어 미친 듯 발버둥 쳤다. 사경행은 준마를 향해 창을 가로로 휘둘렀다. 준마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사람들이 그에 반응하기도 전에 사경행이 가볍게 뛰어올랐다. 마치 속세를 벗어난 품위 있는 신선과 같아 보였다. 사경행이 창을 내밀어 뒤집는 순간, 사장무가 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한 손으로 돌멩이를 주워 던져 사장조 말의 무릎을 맞추니 사장조는 피하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눈 깜짝할 새 두 형제가 말 아래로 떨어졌다. 사경행은 한 발로 사장조의 어깨를 밟고 다른 손으로 창을 들어 사장무의 머리를 겨눈 채 웃는 얼굴로 말했다.

“감히 기습하다니. 네 능력을 자만했구나.”

사경행은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짧은 시간에 적을 무릎 꿇렸다. 나이는 많지 않으나 태도와 풍채는 어른 못지않았다. 날뛰는 데도 밑천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그는 밑천이 확실히 두둑했다.

소녀들은 멍하니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평소 집안에서 지내기에 이런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다. 시험 때마다 한 번씩 눈요기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난 시험에서의 경기들은 오늘 사경행이 보여준 바와 비교가 안 됐다.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영웅을 사모했기에 용모와 기질이 우수한 사경행에게 다시 한번 반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소년 중에는 질투하는 이도 있으나 놀라며 감탄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소명풍은 멀리 누각 위에서 바라보며 웃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축할 의미 있었다는 일이 저거네. 저 녀석, 또 날뛰는구나.”

소명풍은 오늘 사경행이 보여준 능력이 빙산의 일각임을 잘 알았다. 그러나 사경행은 평소 자신을 깊이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데, 오늘 이처럼 과감하게 행동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지는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상념에 잠긴 소명풍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사경행의 의중을 파악할 실마리가 잘 보이지 않았다.

풍안녕의 얼굴에 숭배의 기색이 떠올랐다.

“과연 사 소후야. 확실히 비범하네. 내가 볼 때 정경성 안, 아니 아마 온 명제의 젊은 사람 중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사람은 없을 것 같아.”

사경행의 큰 장점은 전쟁 경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생에 그가 명제 황실에게 해를 당하지 않았다면 사가는 군사력과 사경행의 명망을 등에 업고 명실 황실과 국토를 반으로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가는 패배했다. 그 연유는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심묘는 탄식했다. 황후였을 때 그녀는 전심전력으로 부수의를 도우느라 사가의 일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다. 그래서 현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면 좋을지를 잠시 고민했다.

사장조와 사장무는 사경행의 놀리는 듯한 말투에 이를 갈았다. 게다가 사경행의 동작은 보기에 가벼웠지만 두 사람에게 상당한 부상을 입혔다. 하지만 그들이 기습이라는 비열한 수단을 썼기 때문인지 주위 사람들은 사가 형제를 동정하지 않았다. 시험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정과 공평함이다. 오늘 시합으로 사가 두 형제는 사람들뿐 아니라 시험관들에게도 멸시받게 되었다. 두 사람이 여태 쌓아온 명성은 모두 사라질 것이었다.

“과연, 좋은 수네.”

심묘는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사경행을 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경행은 두 형제가 이성을 잃도록 꾀었다. 이에 평소의 분별을 잃은 그들은 질 낮은 수단으로 사경행을 해치려 했다. 지금 정신을 차려봤자 늦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부정한 수완을 사용했으니, 임안후부의 적서 자식 사이의 구별이 오늘 이후로 아주 명확해질 터였다.

사경행이 두 사람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승부는 이미 정해졌군. 또 누가 도전할 테냐?”

장내가 조용했다. 사람들은 방금 사경행이 사장무와 사장조에게 대처한 수완을 다 보았다. 그는 거의 일격에 두 사람을 쓰러뜨렸다. 두 사람 역시 출중한 편이었는데, 그렇다면 사경행은 도대체 어느 수준일지. 가공할 실력에 사람들은 침묵했다. 사경행은 창을 내던졌다.

“없다면 이만 끝내지.”

사경행은 흔들리는 소맷자락을 뒤로하고 순식간에 시험장에서 사라졌다. 텅 빈 단에 또다시 한바탕 놀란 사람들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저 녀석 무공이 제법인데. 그러나 도통 굽힐 줄을 모르니 무예가 출중해도 어쩔 수 없지.”

부수안은 아쉬운 듯했다.

배랑은 탄식했다. 명제 황실은 보기에 영리하지만, 사람을 보는 것은 근시안적이고 얕았다. 사경행은 능력을 깊숙이 숨겨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금 시합에서 자기를 드러내다니. 분명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단수히 형제끼리 위계를 세우기 위한 거라고 치부하긴 어렵고, 그렇다면 황실과 관련 있을 터.

배랑은 부수안과 부수현을 바라보았다. 황실이 사경행에게 이렇게 안일하다면 장래에 그리 좋지 못할 것이다. 사경행은 한 마리의 호랑이였다. 채임에게 활을 겨누던 심묘와 마찬가지로.

시험관은 사경행이 사라져서 유감이었지만 관례에 따라 그를 1등으로 발표했다. 사가 두 형제는 남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갔다. 그들은 풀이 죽은 채 수치스러워하며 자리를 먼저 떠났다.

그 후 몇 번 도전이 벌어졌으나 사경행의 시합을 본 이후라 감흥을 느끼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모두 연방 하품을 했다.

심모와 심청은 수시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오늘 심묘 외에 심청과 심모는 모두 출중함을 뽐내지 못한 셈이었다. 심청은 부수의 눈에 띄지 못했음을 직감하고 심묘를 원망하며 이를 갈았다. 심묘가 자신의 것을 빼앗은 셈이었다. 심모는 심모대로 심묘보다 자신이 뒤처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했다.

그러나 막상 심묘는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녀는 곡우를 곁으로 불러서 조용히 몇 마디 분부했다. 곡우는 엄숙한 표정으로 빠르게 물러갔다.

거의 동시에 예친왕 역시 가볍게 손짓해 호위를 불렀다. 가까이 선 호위가 공손히 명령을 받들고 신속하게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멀리 떨어진 누각 위.

사경행이 소명풍 곁에 나타났다. 소명풍은 박수를 치며 그를 곁눈질했다.

“어째 오늘 너무 나서는 거 아니야?”

“별일 아니야.”

사경행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너 사실 두 동생을 손봐주려고 벼르고 있던 거지? 갑자기 손을 쓰다니, 너답지 않아.”

소명풍의 물음에 사경행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조언을 받았을 뿐이야. 두 사람의 일은 진작 해결했어야 했는데, 너무 오래 놔뒀어. 나도 아주 오래 기다렸지.”

소명풍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경행에게 분명 다른 숨은 뜻이 있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더 묻는다고 해서 사경행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으리란 걸 알 만큼 영리했다. 소명풍은 여러 해 우정을 쌓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의 속내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소명풍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네가 방금 구한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말썽이 생긴 거 같은데?”

사경행은 소명풍이 말한 쪽을 바라보았다. 여자 좌석 위 호위가 쪽지 같은 모양의 물건을 심부 이방 부인 임완운에게 주는 게 보였다. 그의 시선이 남이 알아채지 못하게 심묘 쪽으로 잠시 향했다.

임완운은 쪽지를 받고 급하게 움직였다.

“예친왕 전하께서 이러시니 확실히 놀랍고 두렵나이다. 심묘야, 와서 전하의 초대에 감사하지 않고 뭐 하느냐?”

심묘는 차가운 눈으로 임완운을 주시했다. 심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미 써먹은 수법을 다시 쓰겠다는 데에 냉소가 나왔다. 심묘의 불행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심모와 심청의 시선을 마주하며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곧추세웠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 속에 어두운 빛이 돌았다.

“좋아요. 제가 반드시 전하께 ‘감사’를 표할게요.”

사경행의 눈 속에 흥미가 스쳤다.

“재미난 걸 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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