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심부로 돌아가는 길, 심묘는 이번에도 따로 마차에 탔다. 곁의 곡우와 경칩은 모두 그녀를 걱정했다. 예친왕의 악명은 온 명제에 자자했다. 불온한 의도로 시집을 가지 않은 아가씨를 초대했음을 통찰력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쉬이 알 수 있었다.
심신이 있었다면 반드시 결사적으로 거절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심신은 없고, 심가 두 방은 사악한 꿍꿍이를 품고 있었다. 두 방에서는 심묘가 혼사를 고려할 나이라는 점을 물고 늘어져 심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것이었다.
경칩이 참고 참다가 울분을 터트렸다.
“아가씨, 예친왕 전하…… 오늘 일은 어찌하실 겁니까? 차라리 주인어른께 편지를 보내시지요? 주인어른께서 아시면 반드시 서둘러 돌아오실 겁니다.”
곡우도 근심의 빛을 내비쳤다.
“맞아요. 지금 후원 안에는……. 오늘 일로 부 안에 많은 말썽이 생길까 걱정입니다.”
전생 심묘가 나이가 어렸기에 깨닫지 못한 일을 곡우와 경칩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방, 삼방은 대방의 명성을 질투하여 안팎으로 심묘를 옭아매었다. 오늘 심묘가 크게 두각을 나타냈으니 한층 심묘를 눈엣가시로 여길까 걱정이었다. 다른 것은 두렵지 않으나, 예친왕과 협력한다면……. 심묘 혼자서는 맞설 수 없을 터였다.
심묘가 담담히 말했다.
“뭐가 겁나? 예친왕 전하께 방법이 있다고 그걸 쓸 수 있는 능력도 있을까?”
물에 빠진 후로 심묘는 어떤 말을 하든 차분하고 느긋했으나 그 말에는 반박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곡우와 경칩은 서로 한 번 바라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모르지만 어둡게 드리운 염려가 걷히고 점점 평온해졌다.
심부로 돌아온 심묘는 지쳐서 휴식이 필요하니 먼저 서원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임완운과 진약추는 웃으며 푹 쉬라고 말했다. 심묘가 예친왕 눈에 든 것이 어떤 불행으로 이어질지 알아서인지 진약추와 임완운의 얼굴에 기뻐하는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심지어 임완운은 심묘의 머리를 쓰다듬고 친절하게 말했다.
“심묘가 나이 들더니 자태가 아주 곱구나. 더 오래 지나지 않아 시집을 가야겠는걸?”
진약추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맞아. 우리 심묘는 신분이 고귀한 사람과 혼인해야 맞지. 평범한 집안에서는 어찌해도 우리 심묘를 아내로 얻을 수 없을 거야.”
심모의 얼굴 위에도 기쁜 기색이 가득했고, 심청은 재빨리 한마디 덧붙였다.
“당연하지요. 심묘는 반드시 매우 존귀한 낭군을 얻을 거예요.”
그녀는 말을 하고 입을 가린 채 웃었다. 다 안다는 시선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암시하는 시선을 받아도 심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심청의 얼굴이 굳어졌다. 심묘의 담백한 태도에 심청은 분노가 치밀었으나 곧 가라앉았다.
오늘 예친왕이 심묘가 마음에 들어서 초대했음을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하지만 심묘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 예친왕의 무서움을 모르는 건가? 과연 머저리라고 심청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심묘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숙모와 언니들이 말씀하신 나이를 논하자면 심청 언니와 심모 언니가 저보다 많지요. 낭군을 찾는다면 저를 먼저 언급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심청과 심모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임완운이 웃으며 말했다.
“휴. 아주버니가 수도에 안 계시잖느냐? 이 숙모들이 널 아끼는 심정으로 말한 거란다. 심청과 심모는 나와 셋째 숙모가 있으니 네가 마음 쓸 필요 없단다.”
“그래요?”
심묘가 가볍게 반문했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두 눈 속에는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아 오히려 보는 사람을 떨리게 했다. 주시하는 한 쌍의 눈동자는 남의 속내를 낱낱이 파헤치는 것 같았다. 심묘가 살짝 웃었다.
“숙모들께서 절 위해 마음을 써주신다니, 장래에 저도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심묘는 가벼이 말했지만 임완운과 진약추는 순간 불안해졌다. 그러나 둘은 불안을 머리 뒤편으로 던져버렸다. 지금 심묘가 좀 똑똑해졌다고 하나, 그래 봤자 어린애였다. 큰 흐름을 뒤집을 수 없었다. 게다가 예친왕도 있었다. 예친왕을 떠올린 두 사람은 기분이 좋아졌다.
임완운은 웃으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에효, 심묘야 무슨 예의를 차리느냐, 모두 한집안 식구인 것을. 피곤하다니 먼저 돌아가 쉬도록 해라. 우리는 아직 할 일이 있단다. 곡우, 경칩. 심묘를 잘 돌보거라.”
곡우와 경칩이 대답하고 심묘를 따라 떠났다.
그녀들이 멀리 떠나길 기다렸다가 임완운와 진약추가 시선을 교환했다. 두 사람은 상대방의 의중을 알아보았다.
* * *
심묘가 동원으로 돌아가고 향이 반 정도 타들었을 무렵.
송경당의 심 노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 말은 예친왕 전하가 심묘를 눈여겨봤다는 게냐?”
심청과 심모는 이 자리에 없었다. 아가씨가 있을 만한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종들의 만류에도 개의치 않고 병풍 뒤에 몰래 숨어들어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임완운은 만면에 웃음기를 띠었다.
“그렇습니다. 심묘가 오늘 시험장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예친왕께서 다시 보게 된 듯합니다. 초대장을 보내셨으니 심묘를 원하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볼 때 우리 심부에서 예친왕비가 나올 듯합니다.”
진약추는 표정을 굳혔다. 임완운의 말은 겉만 번지르르했다. 예친왕이 심묘를 마음에 들어했으나 혼사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설사 아내로 맞이한다 해도 심묘가 얼마나 살아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아마 며칠도 못가 죽을 것이었다.
심 노부인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대방이 계속 승승장구하는 것에 가슴이 다 답답할 지경이었다. 죽은 지 여러 해 된 사람의 아들이 그녀가 낳은 자식보다 우수한 것도, 이전 노장군이 살아 있을 때도 대방만 편애한 것도,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허울뿐이라도 해도 대방이 왕비를 배출할 수도 있다니……. 노부인은 그 점이 불만스러웠다.
“심묘 성격에 어디 왕비 노릇을 하겠느냐? 시집을 보낸다면 큰애나 둘째가 괜찮지.”
노부인은 오랫동안 후원에서 편히 지내 누릴 줄만 알았다. 그래서 바깥 일에 대해 하나도 몰랐다. 그녀의 말을 듣자 진약추와 임완운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병풍 뒤에 숨은 심모와 심청도 깜짝 놀랐다. 노부인은 몰라도 그녀 두 사람은 알았다. 예친왕부 문을 넘어서는 순간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란 걸.
임완운이 서둘러 설명했다.
“어머님, 그런 게 아닙니다. 예친왕 전하는 홀아비에 나이도 많고 평판도 나쁘지만…… 가족에게는 잘합니다.”
그녀는 무언가를 생각한 듯 음흉하게 입꼬리를 일으켰다.
“장래 원백이가 컸을 때 예친왕 전하의 보살핌이 있다면 더욱 좋을 겁니다. 혹 전하께서 심묘에게 무슨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하신다면 원백이를 더욱 돌봐주실 수도 있구요.”
진약추가 임완운의 옆얼굴을 흘깃 쳐다보았다. 임원운은 상상만으로도 행복에 겨운지 평소보다도 뺨이 빨갛게 상기돼 있었다. 심묘의 목숨값으로 심원백의 앞날을 밝힐 수 있다니, 크게 남는 장사였다.
심 노부인은 임완운의 말뜻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예친왕은 마귀 같은 인물로 심묘가 그의 손에 떨어지는 건 겉으로만 좋을 뿐임을 알아챘다. 실제 득을 보게 되는 건 바로 이방과 삼방이라는 얘기였다. 게다가 애지중지하는 손자 심원백의 장래를 개척하는 데 심묘를 쓸 수 있다니. 일석이조에 노부인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듣고 보니 확실히 너희 두 사람의 말이 맞구나. 심묘를 예친왕 전하께 보내면 큰 경사겠어.”
심 노부인의 피부는 아주 두꺼워서 이런 말을 잘도 엄숙하게 했다.
진약추의 눈에는 경시가 스쳤다.
임완운 역시 노부인 못지않게 태연자약한 얼굴로 거짓말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어머님께서도 좋게 생각하시는군요. 심묘의 시댁을 고르는 건데, 낮은 신분을 고를 수는 없지요. 예친왕부, 대단히 높은 집안에 연줄을 대는 겁니다.”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떠올렸다.
“그럼 예친왕부에 사람을 보내 혼사를 논할 것이냐?”
임완운의 낯가죽이 살짝 떨렸다. 그녀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노부인이 이처럼 급하게 심묘의 혼사를 결정하려 할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이 혼사는 빠르면 빠르게 진행될수록 좋았다. 심신이 정경성에 돌아오기 전에 서두르는 게 관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혼을 한다 해도 심신이 심묘가 예친왕에게 시집가게 둘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반드시 특별한 수단을 써야 했다. 다행히도 예친왕부의 사람을 보아하니 중매인을 통한 정식 혼례를 치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예친왕의 좋아하는 저급한 수작질이었다.
임완운이 미소 지었다.
“어머님, 지금은 너무 이릅니다. 심묘는 아직 어리니 급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정하면 사람들 입에서 말이 나올 겁니다. 먼저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감정이 생길 때, 심묘가 바라면 우리도 혼사를 꺼내야지요. 이렇게 해야 우리가 심묘를 등 떠밀었단 말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
심묘가 아무리 바보여도 예친왕에게 감정을 품는 것은 불가능했다. 추한 욕망을 예쁜 말로 가릴 뿐 임완운 그 자신조차 그렇게 될 거라고 여기지 않았다.
진약추는 미소 지으며 말을 아꼈다. 진약추 역시 이 자리에 모인 누구보다도 심묘의 불행을 보고 싶었으나 그녀는 천성적으로 신중했다. 이렇게 얼굴을 내미는 일은 임완운에게 넘겨줬다. 장래 심신이 추궁하면 그녀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두기 위함이었다. 어부지리, 진약추의 장기였다.
병풍 뒤, 심모와 심청은 놀라고 있었다. 고작 짧은 몇 마디로 심묘 일생을 좌지우지할 큰일을 결정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여인에게 있어 남편은 반평생의 행복을 차지한다는데 일이 이렇게 된다면 심묘는 반드시 불행할 것이었다.
그러나 심모와 심청은 심묘에 대한 동정은 눈곱만큼도 느끼지 않았다. 조정에서 심신은 그녀들의 부친보다 위였기에 신분에서 심묘는 자매를 압도했다. 거기에 심 노부인의 매일 같은 이간질로 대방은 그녀들의 눈엣가시일 뿐. 심묘의 불행보다 기쁠 일도 드물 터였다.
심 노부인은 조정 일은 하나도 모르나, 집안 여인들 사이 다툼에는 능통했다. 더욱이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나쁜 수완에서 빛을 발했다. 그녀가 하찮은 가녀에서 심부의 주모가 될 수 있었던 것에는 요염한 얼굴뿐 아니라 흉악한 수완도 한몫했다. 임완운의 뜻을 읽어낸 노부인의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다.
“오, 그렇다면 심묘가 예친왕 전하와 아주 친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거라. 확실히 이런 일로 우리가 심묘를 윽박지른다는 얘기가 난다면 대방이 돌아와 화를 낼 터이니 좋지 않지.”
각박한 용모의 그녀가 자애로운 척 이야기를 하니, 나쁜 마음을 품고 웃는 족제비처럼 보였다. 노부인의 잔악함에 살짝 겁을 집어먹은 심모와 심청은 몸을 떨며 서둘러 병풍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물러났다.
* * *
서원.
등불 아래 심묘가 앉아 있었다. 그녀 앞에는 눈처럼 하얀 종이가 펼쳐져 있었다. 먹은 이미 갈려 있어 글을 쓰려는 듯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가볍게 탄식하더니 붓을 거둬들였다.
사전에 모든 일을 준비하면 좋겠지만 지금 그녀는 일개 규방 소녀였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얻은 정보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는 결론을 낼 수 없으니 부족한 점을 천천히 되짚어봐야 했다.
곡우와 경칩은 그녀가 탄식하는 것을 보고 예친왕의 일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여겼다. 곡우가 그녀에게 다가와 위로했다.
“아가씨, 안심하세요. 그쪽에서 정말 나쁜 생각을 품었다면 저희도 아가씨를 보호할 겁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됩니다. 정경성 안에 주인어른과 사이좋은 인물이 적지 않으니 기껏해야…….”
심묘는 고개를 저었다.
“예친왕부는 지위가 높고 황실의 보호를 받고 있어. 부친과 사이가 좋아도 황실의 원한을 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날 보호할 수는 없을 거야.”
게다가 황실은 호시탐탐 심가를 노리고 있었다. 경솔히 행동하면 의심 많은 명제 황실은 병권을 쥐고 있는 심신이 다른 신하들과 결탁했다 의심할 것이었다. 황제 입장에서는 신하끼리 너무 가까운 것은 늘 경계할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어른께 편지를 쓰시지요. 큰공자님은 인사 명령에 따를 필요가 없으니 정경성으로 돌아오셔도 상부의 처벌을 받지 않잖습니까. 큰공자님께서 계시면 아가씨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오라버니께서 서둘러 돌아오신다고 해도 서북에서 정경성까지 오는 덴 시간이 오래 걸려. 어떻게 시간을 맞추겠어? 넌 그들의 인내심이 그렇게 길 것 같아?”
경칩의 말에 심묘가 담담히 말했다. 이방과 삼방은 대방의 무력을 두려워하니 예친왕과의 일을 서두르려 할 게 당연했다. 결정을 통보하는 몇 마디 겁박만으로도 심묘가 얌전히 따를 것이라고 믿었기에 더욱 거침이 없었다. 이전의 심묘라면 그리했을 것이나, 육궁 속에서 피눈물로 목욕한 심 황후는 절대로 따르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면 어찌할까요?”
곡우와 경칩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녀들은 이 일이 좋지 않은 걸 알았지만 그렇게나 위급한 사항임은 생각하지 못했다.
예친왕의 악명은 정경성 안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한번 마음에 든 아가씨는 사악하고 음흉한 수완으로 반드시 망가뜨렸다. 고위 관리의 여식이라는 점도 전혀 방패가 되어주지 못했다. 황실은 관리 집안에 몇 마디 위로를 건네고 보상을 건넬 뿐, 그들의 딸을 지켜주지는 않았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고 마는 여인들만 가여울 따름이었다.
“어찌할 거냐고? 다른 사람은 모두 믿을 수 없어.”
심묘는 흔들리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나를 믿어야지.”
“하지만 아가씨…….”
곡우는 초조했다. 어떻게 해야 아가씨를 보호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라면 식구가 뭉쳐 저항이라도 해볼 수 있을 텐데, 이방과 삼방의 사람은 서로 동맹을 결성하여 사단을 만들었고 주인어른과 주인마님은 멀리 계시니.
“내게 방법이 있어.”
심묘는 손으로 서진(書鎭, 종이를 눌러두는 물건)을 가지고 놀았다. 예친왕부는 황제의 은정과 황실의 암묵적 비호에 의지할 뿐이었다. 황실이 그를 비호하지 않게 되었을 때 원수가 찾아오면 어떨까. 황실의 지지 없이는 예친왕부는 길가의 돌멩이에 불과했다.
예친왕도 황실의 혈통이니 그부터 손을 쓰자고 생각한 심묘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희미하게 사람의 그림자가 떼를 지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뚱뚱한 그림자는 계 유모가 아니었다. 심묘는 창밖을 보며 서원의 찌꺼기도 같이 깨끗하게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국화연회 후, 정경성 거리와 골목의 이야깃거리가 완전히 바뀌었다. 특히 두 명의 이름이 자주 입에 올랐는데, 한 명은 임안후부의 사 소후야였다. 그는 아주 강력한 위세로 두 형제를 자신의 발아래에 두었다. 행동은 거만했지만, 짧은 시간에 재능을 드러내서 ‘전쟁의 기린아’라는 별칭이 허명이 아님을 명백히 밝혔다.
다른 한 사람은 머저리라 불린 심묘였다. 그녀는 환골탈태한 듯, 혹은 심가의 내면에 있던 것이 힘을 낸 듯, 아둔하고 연약한 모습은 벗어버렸다. 활을 쏠 때 채임과 마주 서서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고, 흉악한 성격을 기세등등하게 드러내어 또래 소년, 소녀들을 아주 두렵게 했다.
광문당 안에서 심묘를 비웃던 사람들도 일시에 사라졌다. 채임은 좋지 않은 표정으로 심묘를 주시했다. 하지만 그뿐, 소패왕은 감히 경솔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풍안녕이 채임의 모습을 보고 웃으며 심묘에게 말했다.
“저 소패왕이 지금처럼 널 두려워할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심묘가 채임을 쳐다보자, 그는 얼른 눈을 돌렸다.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실소했다. 심묘에게 채임은 거만하고 악질적인 소년에 불과했다. 누가 우위에 있는지 분명히 알려주었으니 더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채가의 멸망은 멀지 않았다. 이 온실 속 화초의 공자님은 조만간 닥쳐올 파멸의 고통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사가 두 형제는 중상을 입었는데 임안후는 사 소후야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았대. 의원 치료 후 두 형제가 요양하게 했다지만 실은 외출 금지를 명한 거라는데? 임안후가 적자를 편애한다는 게 과연 사실이었나 봐.”
풍안녕이 탄식하자 심묘가 물었다.
“넌 어디서 알게 된 거야?”
“부모님 대화를 몰래 들은 거야. 하긴 내가 임안후부의 사정이었어도 사 소후야를 총애할 거야. 그는 황실 혈맥인 옥청 공주마마의…….”
풍안녕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심묘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심묘는 늘 임안후부 옥청 공주의 죽음이 이상하다 느꼈다. 사정이 지금 사가 두 형제를 대하는 태도도 그렇지만, 옥청 공주의 죽음 후에도 그는 지금까지 방씨가 편안하게 살도록 했다.
그때 배랑이 걸어왔다. 배랑의 얼굴에 온화한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마침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던 심묘와 배랑의 시선이 마주쳤다.
국화연회 이후로 배랑은 그녀를 경시하던 마음을 거두었다. 그는 심묘의 범상치 않음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심묘가 자신을 암암리에 주시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는 배랑을 늘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심묘가 아무리 대단해도 어린아이에 불과하니 자신이 너무 생각이 많다고 여겼다.
“너, 선생님은 왜 쳐다보는 거야?”
풍안녕은 자기 말에 깜짝 놀란 듯 입을 가렸다.
“너 설마 선생님을 사모하는 건 아니지?”
사람들은 국화연회에서 심묘가 부수의에게 감정이 없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의 심묘는 부수의에 대해 몹시 냉랭해서 연모의 정을 품고 있는 여성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었다. 심묘는 자신이 황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접은 것 같이 보였다. 배랑은 신분은 낮으나 품위 있는 태도와 재학을 겸비했으니 소녀들이 좋아하는 것도 당연했다.
심묘는 머리가 아파와 시선을 돌렸다.
“당연히 아니야.”
심묘는 배랑이 국화연회에서 <행률책>을 읽지 않아 부수의가 그를 염두에 두지 않게 되었으니 일단은 안심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배랑은 큰 걱정거리였다. 그가 장래 부수의를 위해 일한다면……. 심묘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후환을 남겨둔 게 아닐지 두려웠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배랑을 쥐도 새도 모르게 말살할 능력이 없기에 당분간은 새로운 계책을 고민해야 했다.
* * *
정경성 백향루에서는 춤과 노래로 명제의 태평성세를 칭송했다. 대낮이어도 얇은 발과 야명주를 온 동루에 걸어 놓아 휘황찬란했다.
때때로 바깥에서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들은 사람이 걸음을 멈춰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기도 했다. 웬만한 사람들은 백향루에 들어갈 수 없었다. 백향루는 작은 찻주전자 하나도 값이 비싸 거금을 써야 하기로 유명한 곳이었고, 드나드는 이는 모두 주머니 사정이 여유로운 부잣집 사람이었다.
백향루의 창문가에는 화려한 차림의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걸친 것은 모두 좋아 보였지만 생김새가 흉악했고 검은 피부에 여위기까지 하여 품위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지의 왼쪽 다리가 텅 비어 있었다. 예친왕이었다.
“심부에게 분명히 전했느냐?”
그의 말투는 음험했다.
“예. 전하, 심부 이방 부인과 잘 안배하였나이다. 사흘 후 심부 여자들이 와룡사에 향을 올리러 갈 터인데, 그때…….”
“사흘.”
예친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눈에 불만이 스쳤다. 그는 바로 손을 휘둘렀다.
“준비해야 할 것들을 준비하러 가거라. 이렇게 흥미로운 인물은 오랫동안 만난 적 없구나.”
예친왕은 성격이 사악하고 잔학하여, 그 손에 죽은 여인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여인들이 반항한들 그의 신변엔 어떤 풍랑도 일지 않았다. 국화연회에서 심묘가 모질음과 출중함을 드러냈으니 그가 흥미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는 심신의 흉악한 명성을 일찍이 알았으나, 오히려 그 점에 그의 딸은 어떤 맛인지 궁금했다.
예친왕은 입술을 핥았다. 음란하고 사악한 기색이 스쳤다. 반항을 아는 들고양이는 목석같은 미인들보다 더 맛있을 것이었다.
* * *
예친왕이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맞은편 유리 탁자에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대략 약관을 넘은 나이로 보이고, 생김새가 출중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예친왕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더니 재미난 구경을 했다는 듯 맞은편 사람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자네가 구한 그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또 말썽이 생길 것 같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사경행은 축 늘어진 채 무심하게 답했다.
“심가는 명성이 높으니 시비를 불러오는 거지. 이것도 심신이 불러들인 화야. 지금은 다들 눈치만 보고 있겠지만 한계가 있겠지. 조만간 심가는 그 세를 보존할 수 없게 될 거야.”
고양은 정색하며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그때 왜 그런 건가? 시험장에서 서출 동생들과 다투다니, 혹시 계획을 앞당겨 시작하려는 건가?”
사경행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앞당기면 어떻고, 앞당기지 않으면 또 어때서?”
고양이 망설이다 물었다.
“자네가 앞당겨 손을 쓰면…… 그들이 알지 않겠나?”
“고양, 자넨 모를 거야. 나는 지금 이곳에서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질 거야. 너무 오래 끌면 나에게 불리하지. 산이 내게 오지 않는다면 내가 바로 산으로 가면 되는 법.”
사경행이 담담히 말했다. 사경행의 눈빛은 낮게 가라앉아 소년답지 않았다.
“되었네, 난 자넬 보러 온 것일 뿐이야. 자넬 막을 자신은 없네. 하지만 사흘 후 와룡사에 물건을 조사하지 않을 건가? 미인을 한 번 더 구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고양이 실눈에 교활한 웃음을 띠었다.
“고양, 네 안목은 여전히 낮구나.”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심가 그 여자는 쉽지 않아.”
* * *
광문당 수업이 끝나자 심모가 심묘에게 다가왔다.
“심묘야, 오늘은 역 소저가 나와 심청 언니를 부로 초대해서 너와 함께 돌아가지 못해. 너 먼저 돌아가도록 해.”
역패란과 심모가 친하게 지내며 심묘를 따돌리는 일은 흔히 있었다. 심묘도 별다른 반응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요 며칠, 이방과 삼방은 심묘를 아주 친절히 대했다.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속을 뻔히 아는 심묘도 그녀들과 따지기 싫었다. 지금 당장 급히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돌아가는 마차는 수도의 가장 번화한 거리를 지나갔다.
“이 근처에 계화방이 있습니다. 아가씨께서 그곳 과자를 가장 좋아하시니, 제가 좀 사 오겠습니다.”
“그래.”
곡우의 말에 심묘가 미소 지었다.
곡우가 마차에서 내린 후 경칩이 마차의 발을 들어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때 경칩이 놀란 듯 소리쳤다. 심묘가 바라보니 마차가 멈춘 계화방 옆에 있는 전당포에 많은 사람이 모여 무언가 토론하는 듯했다. 전당포의 점원이 귀찮은 듯 목소리를 높여 말해서 심묘도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분명히 열 냥 은자라 했습니다. 팔지 말지는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희야 검 하나에 목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공자께선 우리를 난처하게 하지 마셔요!”
“가게 주인과 흥정이 잘 안 되는 것 같네요.”
함께 듣던 경칩이 말했다.
전당포는 매입할 때 당연히 가격을 낮춰 제시하는 법이었다. 물건을 가져온 사람이 받아들일 수 없는 가격으로 후려친 모양이었으나, 손님은 그렇다고 떠날 수도 없어서 서로 버티는 상태인 듯했다.
“무슨 볼 게 있다고.”
심묘가 시선을 거두는 것을 본 경칩은 마차 발을 내렸다.
잠시 후 곡우가 큰 종이봉투를 두 개 안고 돌아왔다. 경칩은 발을 열어 그녀가 들어오게 했는데 발이 열린 순간 전당포 점원과 논쟁하던 사람이 몸을 돌려 걸어오는 게 보였다. 손에는 검을 쥐고 있는데, 원하는 가격으로 저당 넘기는 데 실패한 듯 맥빠진 표정이었다.
곡우가 마차에 올라 경칩이 마차 발을 내리려 하자 심묘가 저지했다. 심묘는 검을 품은 사람을 세심히 주시했다. 무명옷을 입은 젊은이의 차림새와 생김새는 평범해 특이한 점이 없었다. 심묘가 생소한 남자를 주시하는 것을 보고 곡우와 경칩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저 사람이 왜 익숙한지 알지 못하는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젊은 사람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탄식했다. 검을 바라보더니 이를 악물면서 다시 전당포로 걸어갔다.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가격에 맡기기로 결정한 듯했다.
그가 몸을 돌리는 찰나, 심묘가 곡우를 불렀다.
“곡우! 내려가서 그를 붙잡고 그의 검을 내가 원한다고 하거라!”
“아가씨…….”
경칩과 곡우가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심묘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빨리!”
심묘가 차갑게 말했다.
심묘의 엄숙한 표정을 보고 곡우는 감히 더 묻지 않고, 바로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공자, 멈추십시오!”
그가 몸을 돌리니 곡우가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공자, 검을 전당포에 저당 잡히려 하십니까?”
젊은 사람은 멍해졌지만 바로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렇소.”
“마침 저희 아가씨께서 그 검을 원하십니다. 공자, 거래하시겠습니까?”
여자의 표정은 거짓 같지 않았으나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검은 정교하지 않소. 오히려 실용적이라 할 수 있소이다. 만일 부귀한 집안 아가씨가 원한다면 병기 점포로 가서 만드시는 게 좋겠소.”
여인이 왜 이런 검에 흥미가 있는지 그저 장난감으로 보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젊은 남자는 어쨌든 의외의 제안에 놀랐다. 하지만 그의 검은 너무 날카로워 조심치 못하면 다칠 수 있었다.
곡우의 표정이 풀렸다. 남자는 분명 급히 은자가 필요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상대방을 생각해주니 심성이 고운 사람이었다. 심묘가 영문을 알 수 없이 갑자기 이 사람의 검을 사려 해 걱정했으나, 지금 보니 적어도 그가 나쁜 사람 같지 않았다. 곡우의 표정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가씨는 공자와 거래를 하고 싶어 하십니다. 공자께서 이야기를 나눠보셔도 좋을 겁니다.”
곡우가 이렇게 완고하게 나오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는지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전당포를 흘낏 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인적이 없는 골목에 도착하자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곡우는 마차 앞으로 걸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왔습니다.”
젊은 사람이 마차 앞으로 걸어가 망설였지만 포기하기를 권했다.
“소저, 이 검은 여인이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소이다. 너무 무겁고 날카로워 사용자를 다치게 하기 쉽소. 그러니…….”
“이름이 어떻게 되지요?”
말을 끝맺기 전 마차 안 여인이 물었다. 목소리는 나이가 많지 않은 듯했으나, 흥망성쇠를 겪어본 고관 대인처럼 무게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나이를 추측할 수 없었다.
“모경이라 하오.”
남자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심묘는 잠시 반응이 없었다. 모경과 곡우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당황할 때 심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당신의 검에 흥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무기가 날 다치게 할 수도 없지요.”
모경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소저, 혹시 나를 놀리는 거요? 이 검의 외관은 평범해도 유명한 주검사가 만들었고 나와 여러 해 함께했소. 소저께서 날 부른 게 단지 치욕을 주기 위해서라면 더는 여기 있을 필요가 없을 테니 이해 바라오.”
모경은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그때 마차 안에서 탄식소리가 들렸다. 그 탄식소리는 어떤 감정을 품은 듯 하늘거려 사람을 이유 없이 꽉 붙잡았다.
“모경, 은자가 필요하지요?”
심묘의 말에 모경은 멍해졌고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이상한 감정이 솟아났다. 그 감정은 익숙한 듯했으나 왜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 목소리에 모경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에게는 그 목소리를 뿌리칠 힘이 없었다.
“당신의 검은 나에게 확실히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 당신의 검술은 백금 천금의 가치가 있지요.”
모경이 멍해져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저, 지나친 칭찬이오. 그저 평범한 사람이외다.”
모경은 이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검술이 출중한 것을 아는지 의아했다.
“돈이 영웅을 괴롭혀 여러 해 함께한 보검까지 팔아버리게 하다니. 당신의 검술을 헛되이 하는군요.”
마차의 발이 갑자기 들리고 안에서 심묘가 걸어 나왔다.
“모경, 당신의 무예를 장군 가문 심가에 팔 생각이 있나요?”
심묘는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옛친구를 우연히 만난 듯 희미한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 전생의 호위무사 모경……. 이별 후 별일 없었나요?
“저, 소저…….”
모경은 눈살을 찌푸리고 심묘를 바라보았다. 모경은 일부 부잣집 사람이 하인을 살 때 가축을 사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심묘가 자신을 하인으로 대하는 듯해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심묘의 눈을 보자 불만은 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묘의 시선은 거만하고 우쭐대는 경시의 빛을 조금도 띠고 있지 않았다. 희미하지만 분명 기쁨과 안심, 그리고 존중을 품고 있었다. 그는 의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혹시 소저와 제가 어디서 만난 적 있습니까?”
심묘가 가볍게 탄식했다.
“없어요.”
“그럼 무엇 때문에…….”
“당신은 용모가 단정하고, 기질이 비범해 보이니 호기로운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해 함께한 보검을 팔려고 하니 명백히 막다른 길에 다다른 거겠지요. 급히 은자를 구하는 듯한데, 설령 오늘 은자를 구해도 여전히 해결하진 못할 겁니다. 난 위무대장군의 적녀이니, 부친께서 연말 수도에 돌아오시면 당신을 추천하겠습니다. 훌륭한 무예가 은자 열 냥에 묻혀버린다면 애석한 일이지요.”
“심 장군?”
모경은 갑자기 멍해졌다. 그는 심묘가 심신의 딸일지 예상하지 못했다. 전쟁터에서 돌같이 굳은 심장을 가진 심신의 명성은 명제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남자라면 공훈을 세우고 업적을 쌓아야 했다. 일이 이렇게 풀리다니……. 모경은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경성 소문 속 심묘는 영락없는 머저리였다. 며칠 전 국화연회에서 만회한 듯하지만 그녀를 직접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소문은 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소저께서 정말 절 추천해주신다면 저도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장래 기회가 있다면 결초보은하겠습니다.”
시원하고 거리낌 없는 성격인 모경은 눈앞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에 살짝 웃은 심묘는 소매 안을 더듬었다. 심묘는 꺼낸 은자를 모경에게 던졌다.
“결초보은은 필요 없어요. 그저 당신의 무예를 나에게 팔면 됩니다. 부친은 연말에야 돌아오시니, 그동안 당신은 날 따라 심부에서 지내시죠. 내가 당신을 심부 호위로 만들 테니, 당신은 암암리에 내 안전을 보장하세요.”
심묘의 말은 들은 모경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모경도 부잣집이나 대갓집은 표면적으로 화려해도 배후에는 계략들이 끊임없다고 들었다. 심묘가 자신의 안전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녀 역시 그런 위험들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듯했다. 심묘가 심신의 딸인데 처지가 왜 곤란할까 의아했지만 모경은 괜한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소저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먼저 이 은자를 가져가 급한 것을 해결하십시오. 일을 처리한 후 사흘 안에 반드시 심부로 와야 합니다. 내가 당신이 있을 곳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모경이 고개를 끄덕인 후 인사했다. 그의 행동에는 강호 분위기가 꽤 짙게 풍겼다.
그가 떠난 후, 곡우와 경칩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가씨, 저 사람 내력이 분명치 않습니다. 만약 나쁜 생각을 품었다면 부로 들이기가…….”
심묘가 마차로 걸어가며 경칩에게 답했다.
“무엇이 두려워? 지금 부 안 사람에 비하면 훨씬 깨끗한데.”
심묘는 마차에 앉아 속으로 작게 탄식했다. 현재 서원에는 이방, 삼방의 감시자를 자처한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심신의 사람은 적었다. 게다가 모경은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현생에서도 모경을 만나게 될지 몰랐을 뿐.
전생에서 모경은 황실의 시위였다. 심신의 추천을 받을 만큼 무예가 출중했다. 심묘가 인질로 진국에서 지낸 몇 년간 모경이 시위로서 함께했었다. 모경의 도움이 없었다면 위험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던 진국에서 무탈하게 돌아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모경은 심신에게 충성했기에 심묘에게도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심묘가 명제로 돌아온 후, 심묘와의 암투 때문에 미 부인은 모경이 후궁에게 치근댔다는 누명을 씌웠다. 부수의는 모경이 억울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전부터 심신의 사람들을 제거하려 했기에 미 부인의 공작을 오히려 반겼다.
심묘 홀로 갖은 방법을 동원해 진실을 밝히려고 했지만……. 결국 심묘는 모경이 날조된 죄명 아래 죽는 것을 눈 뻔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다시 만난 모경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심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모경의 현재 상황이 궁핍했기에 이처럼 쉽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다. 모경은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이기에 사흘 뒤 와룡사에 함께 데려갈 계획이었다. 원래 다른 방법을 강구하려고 했으나 우연히 모경을 만난 덕에 일이 많이 편해진 셈이었다.
* * *
심모와 심청이 역부로 놀러 갔기 때문에 심부에는 심묘만 있었다. 막 서원에 도착하니, 계 유모가 마중을 나왔다. 계 유모는 아첨하듯 웃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돌아오셨군요. 제가 주방에 담갱(淡羹, 맑은 장국)을 하도록 했는데, 드시겠습니까?”
“좋아.”
근래 계속 차갑게 대하던 심묘가 갑자기 상냥하고 친절한 태도를 보이자 계 유모는 기뻐하며 얼른 말했다.
“제가 바로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계 유모가 담갱을 들고 오는 동안 심묘는 방 안에서 잠시 쉬었다. 계 유모는 담갱을 조심스레 탁자 위에 놓고 미소 지었다.
“아가씨, 사흘 후 와룡사에 갈 준비는 이미 다 했습니다만 또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심부에서는 사흘 후 와룡사에 심가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러 향을 피우러 갈 계획이었다. 임완운이 세 아가씨를 데리고 조촐하게 갈 것이라고 밝혔으니 계 유모는 요 며칠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바빴다.
심묘는 그녀를 힐긋 바라보고,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말했다.
“이 일에 아주 열정적이구나.”
계 유모는 순간 멈칫했다가 웃었다.
“아가씨께서 드물게 외출하시니 당연히 주도면밀히 준비해야지요.”
“계 유모가 준비하고 동행하는데 당연히 주도면밀하겠지.”
심묘가 웃자 계 유모는 괜히 불안했다.
“둘째 마님의 안배가 적절하시니 착오가 생길 리 없습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번거롭지만 계 유모가 나 대신 숙모께 감사를 전해줘. 그럼 이만 물러가.”
계 유모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물러갔다. 잘 모르겠지만 심묘는 확실히 변했다. 심묘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위엄이 새어 나와 그 앞에 서면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문을 나서며 계 유모는 허리를 펴고 심묘가 있는 방을 째려보았다. 그녀는 조용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흘 후에도 네가 감히 내 앞에서 건방을 떨 수 있을지 두고 보자!”
심묘는 계 유모가 건넨 그릇을 창가로 가지고 갔다. 그녀는 창밖으로 담갱을 버렸다.
“아가씨, 정말로 와룡사에 가실 겁니까?”
백로가 망설이다 물었다.
“가야지.”
심묘가 대답했다.
전생 이맘때쯤 심묘는 우연히 송경당 여종들이 수군거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 노부인이 그녀를 예친왕에게 시집보내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와룡사로 떠나기 전날 밤, 심묘는 정왕부로 도망쳤다. 결코 잘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덕분에 예친왕과의 혼사는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심묘는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고 와룡사로 갈 것이었다. 자신에게 올 화를 다른 이에게 넘기면 될 뿐이니 피할 이유가 없었다.
* * *
다행히 심묘의 예상보다 더 일찍 모경이 심부의 호위가 되었다. 심묘는 상강을 시켜 문지기를 은자로 매수하고 모경을 상강의 먼 친척이라고 했다. 덕분에 모경은 가장 낮은 등급의 호위이긴 해도 논쟁 없이 심부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와룡사에 가는 날이 되었다. 와룡사는 널리 알려지긴 했으나 외진 곳에 있는 데다 향불은 인접한 사원이 더욱 유명하기에 평소 향을 올리러 그곳까지 가진 않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번에는 가까운 곳을 포기하고 와룡사로 가기로 한 것이다.
이른 아침, 임완운은 모든 것을 준비한 후 여종 향란에게 심묘에 관련된 일을 분부했다. 출발 전 사람들은 송경당으로 갔다. 심 노부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규율을 준수하라고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심청은 심 노부인과 심원백을 위해 불조(佛祖)께 절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심 노부인은 한결 부드러운 태도로 심청을 칭찬했다.
이번 여행에는 호위를 데려가 심부 아가씨의 안전을 보호하기로 했다. 그런데 심묘가 출발하지 않고 마차 앞에 서 있었다. 임완운이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심묘야, 무엇 때문에 가지 않느냐?”
“호위가 적은 것 같아서요. 의외의 사고를 막으려면 호위를 더 대동하는 게 좋겠어요.”
임완운은 미간을 찡그렸다. 임완운은 심묘가 호위 문제를 지적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오늘 모든 것은 이미 안배를 마쳤기에 틀어지게 놔둘 수 없었다. 임완운은 미소 지으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야, 우리가 데려가는 사람의 인원은 적지 않단다. 심부의 모든 호위를 데려가면 사람 수가 너무 많고 오히려 더 불편할 수 있어.”
심묘는 고집스레 고개를 가로젓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심모는 뭐라고 말을 하지 않았으나 심청은 불만스러웠다.
“우리 심부가 황실도 아닌데 심묘는 도대체 얼마나 크게 외출하고 싶은 거야? 백부가 외출할 때도 이렇게 트집 잡는 건 본 적 없어.”
심청은 또 심신을 언급했다. 심묘는 심청을 투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심청은 갑자기 오싹해졌다.
“둘만 더 데려가지요.”
심묘는 문지기 옆의 두 호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이 좋겠네요.”
심묘가 두 명만 추가하겠다고 하자 임완운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 싫었다. 두 사람 정도로는 계획이 틀어질 리 없으니 다행이었으나 얼굴에는 부러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심묘야, 너 정말…… 됐다. 네 말을 이 둘째 숙모가 언제 들어주지 않더냐? 네 말대로 하자꾸나.”
그녀는 곁의 향란에게 분부했다.
“가서 저 두 하인을 불러 우리와 함께 나가자고 하거라.”
“둘째 숙모, 감사합니다.”
심묘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임완운이 결국에는 심묘의 의견을 받아들여 주자 심모는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심청은 매섭게 바닥을 찬 후 심묘를 한 번 노려보고 몸을 돌렸다.
마차에 탄 후, 심청은 일부러 심묘와 이야기하지 않았다. 심모는 심묘와 대화하긴 했지만 탐색의 기색이 가득했다. 심묘는 심모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형식적으로 대했다.
가는 길, 흥이 오른 임완운은 심묘와 몇 마디 나눴는데 아주 친근해 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심묘도 자신에게 온화하고 선량하게 대하는 임완운이 진심으로 고마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임완운은 추악한 간계를 상냥한 얼굴로 잘 숨기는 편이었으나, 황궁에서 여러 사람을 상대해 본 심묘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아침에 출발한 무리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목적지인 양경봉에 도착했다. 와룡사는 양경봉 산허리에 위치했다.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었다. 와룡사로 올라가는 길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봄날이면 이곳은 아름다운 나무들과 향긋한 풀냄새로 가득했지만, 그러나 지금은 풀과 나무가 시드는 가을이어서 쓸쓸한 느낌을 주었다. 경건하고 불심이 깊은 부인들과 마님들도 향을 피우기 위해선 다른 사원을 찾아가니 주변 역시 고요하여 쓸쓸함을 더했다.
와룡사 입구에 도착하자 젊은 승려가 바깥을 홀로 청소하고 있었다.
“이곳은 아주 청정하네요.”
심모가 가볍게 웃었다. 그 말에 심청이 코를 움찔거렸다. 심모에게 몇 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기색이기도 했으나 무언가 때문에 참는 기색이었다.
“청정하다 뿐이겠니. 듣자니 이곳의 불조는 매우 영험하시다니, 향을 올릴 때 부디 마음을 정갈히 하거라.”
임완운이 당부했다.
젊은 승려는 사람이 온 것을 보고 마중을 나왔다. 하인들은 마차에서 물건을 옮겼고, 임완운과 심청, 심모, 심묘, 그리고 여종들이 먼저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사원 안으로 들어갈수록 인기척이 드물었다. 참배자가 없고, 승려도 많다고 할 수 없었다. 사원은 유달리 넓어 텅 비었다 느껴졌다. 야밤에는 겁을 먹기 딱 좋은 스산한 분위기였다.
중년의 주지승은 임완운 일행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숙소를 배정해주었다. 원래 아가씨들은 숙소를 가까운 곳에 배정했거늘 이번 심묘가 묵을 곳은 예외였다.
“죄송합니다. 남쪽과 서쪽의 누각은 이미 시주가 묵으실 방이 없으니, 시주께서 개의치 않으시면 북쪽의 누각은 어떠하십니까?”
사람들 모두가 심묘를 보았다. 심묘가 미소 지었다.
“죄송하지만 전 아주 신경 쓰입니다.”
임완운이 작은 소리로 질책했다.
“이곳은 불문 정지(淨地)다. 어디 멋대로 하려 하느냐?”
“조금 의아하네요. 향불은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 누각이 다 찼을까요?”
심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지승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반박할 여지를 주지 않고 당차게 얘기하는 아가씨를 본 적 없는 듯했다. 게다가 교활하고 포악한 사람들처럼 큰 소리로 야단법석을 떠는 대신 조용히 이치에 맞게 말하는 심묘의 태도가 더욱 말문을 막히게 했다. 그러나 주지승 역시 녹록한 사람이 아니었다.
“젊은 시주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참배객은 많지 않아도 사원 안 승려는 많소이다.”
그가 살짝 웃으며 심묘를 위해 설명했다.
“그러나 저 혼자 있으려니 겁이 나는데, 이를 어찌하나요?”
“심묘야, 하룻밤이잖느냐. 이 밤을 지내면 부처께서 너의 성심을 봐서 내일 향을 올릴 때 반드시 바라는 일을 성사시켜 주실 게다.”
임완운이 심묘를 달래려 했다.
예전의 심묘였다면 속았을 것이다. 그녀는 상대방이 부드럽게 나오면 받아들이고, 강하게 나오면 반발하는 성격이었다. 더구나 부수의를 사모하고 있으니, 부처께서 부수의와 함께하고자 하는 심원(心願)을 이루어주시길 바라서 이런 부당함도 기꺼이 감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임완운은 머리가 아팠다. 심묘가 갈수록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적당히 달래기만 하면 심묘는 속아 넘어갔는데 지금은 빈번히 계산 착오가 생겼다. 심묘를 일찍 처리하지 않으면 장래 더욱 골치 아플 것 같았다.
심묘는 방긋 미소 지었다.
“차라리 이러시지요. 숙모가 저랑 함께 북쪽 누각에서 지내는 건 어떤가요? 누군가 함께하면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어…….”
임완운은 머뭇거렸다. 심묘와 함께 있었는데 심묘에게 사고가 나면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임완운이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해내기 전 심묘가 덧붙였다.
“숙모께서 원치 않으시면, 심청 언니와 심모 언니 중 누구든 나와 함께하지 않을래?”
심모의 시선이 흔들렸고 말이 없었다. 심청은 자신의 모친이 도대체 무엇을 준비했는지 모르지만, 이번 외출이 심묘를 겨눈 것임은 눈치채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더 이상 심묘와 우애 좋은 척 연기하는 것도 지겨웠기에 차갑게 거절했다.
“난 혼자 있는 게 편해.”
“그러면…….”
심묘가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나와 심묘가 북쪽 누각에서 지내자꾸나.”
심묘가 말을 끝내기 전 임완운이 말했다. 그녀는 심묘가 또 무슨 변고를 일으킬까 두려웠다. 그러나 함께 있어도 멀리 떨어지는 것은 가능하니 자신에게 책임을 다 묻지 않을 것이었다. 심신은 서북 멀리 있고, 황제도 정경성에 있으니 그들이 그녀에게 진상을 물어 책망할 수 없을 터였다.
“둘째 숙모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심묘는 살짝 미소 짓고는 아주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임완운은 갑자기 예의를 차리는 심묘의 모습에 되려 불편해져 미간을 찌푸렸지만 웃음을 보였다.
“한 가족인걸.”
머무는 곳 문제를 해결했으니 각자 짐 정리를 하기로 했다. 심청과 심모는 긴 여행길에 지쳐버렸다며 밥도 함께 먹지 않았다. 하인이 짐을 들고 방으로 가져갔다.
북쪽 누각에 도착하자 심묘가 임완운에게 말했다.
“저도 아주 피곤하네요. 식사는 하지 않고 먼저 방으로 가겠습니다.”
임완운은 당황했지만 바로 웃음을 보였다.
“네 뜻대로 하거라. 피곤하면 일찍 쉬어야지.”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를 맡은 젊은 승려가 심묘를 방으로 인도했다. 방에 도착했을 때 심묘는 마음속 깊이 감탄했다. 와룡사는 겉은 쓸쓸하고 소박해 보였지만 방은 아주 고아했다. 창밖으로는 숲이 보여 한적했고, 진열품은 단출했지만 세밀하게 세공된 것들이라 신경을 쓴 것처럼 보였다.
“이곳의 풍경은 정말 아름답네요.”
곡우도 의외인 듯했다.
“이 방은 사원 안에서 귀빈을 모시는 곳입니다. 부의 부인께서 귀빈 방을 시주에게 주라 분부하셨습니다.”
승려가 고개를 숙였다.
“나 대신 둘째 숙모의 호의에 감사드려 주세요.”
심묘가 담담히 말했다. 그녀는 주위를 살폈다. 이곳은 북쪽 누각 가장 깊은 곳에 위치했다. 사방이 아름답고 그윽했으나 한편으로는 너무 외지기도 했다. 아무리 소리쳐도 누구 하나 듣고 도와줄 수 없을 만큼 구석진 방. 심묘가 빠져나갈 구석을 원천봉쇄하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편의를 보아주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치밀하게 안배한 것 같았다.
“이건 무슨 향이지? 난초의 꽃 같은데 그보다 향이 더 짙네요.”
경칩이 탁자 앞 작은 향기둥(几柱香)을 들어 올려 향을 맡았다.
“이 향로도 정말 독특하네요.”
이번에는 경칩의 시선이 난화 모양의 향로를 향했다. 곡우는 이를 보고 미소 지었다.
“사원에 아가씨께서 잠드시기 전에 훈향(薰香, 태우는 향료)을 맡으시는 걸 전달한 걸까요? 잘됐어요. 밤에 잠들기 전 이것을 피우시면 편안히 주무실 수 있을 거예요.”
“와룡사도 괜찮은 것 같아요.”
경칩은 경쾌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과연 깊은 산속이지만, 복을 기원할 만하네요.”
심묘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가 경칩이 들고 있는 향기둥을 받아 코 아래에 대고 맡았다. 심묘는 미간을 더욱 깊게 찡그렸다. 이에 두 여종이 망설이다 물었다.
“아가씨, 뭐가 잘못되었나요?”
심묘는 와룡사에 도착하고부터 마음을 놓은 적이 없었다. 이곳이 그녀에게 알맞을수록 심묘는 더욱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피부로 느꼈다. 분명 심묘는 자기 전 향을 피우는 습관이 있었다. 게다가 정교한 물건을 좋아하니 이 향로를 좋아할 확률이 높았다. 이전 심묘였다면 이곳의 아름답고 그윽하며 풍아한 환경과 어울리도록 향을 계속 피울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심묘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그녀가 보통 규방 소녀였다면 당연히 이 같은 향을 접한 적이 없을 것이나 그녀는 심 황후였다. 궁중의 여인들은 각양각색의 수완으로 위로 오르려 했다. 그래서 전생 육궁의 주인이었던 심묘는 안목이 남달랐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사악한 의도를 품은 이 같은 물건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최음제를 섞은 훈향. 비빈들의 썩어빠진 수작질이었다.
“좋은 물건이 아니야.”
그녀가 손에서 힘을 빼자 훈향이 작은 탁자 위로 떨어졌다.
곡우와 경칩이 멍해져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경칩이 말했다.
“그럼 제가 이걸 버리고 올까요?”
“아냐, 괜찮아.”
심묘의 시선이 작은 탁자 위를 향했다. 임완운과 그 사람이 그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이런 정성을 헛되이 하게 되면 애석하지 않겠는가. 심묘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그대로 둬. 나중에 쓸모가 있을 거야.”
* * *
심묘의 방과 멀찍이 떨어진 북쪽 누각의 또 다른 방.
임완운이 침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 앞에 나이 많은 부인이 허리를 굽히고 서 있었다. 그 부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계 유모였다.
“오늘 밤의 일, 너도 알 것이다. 성공하면 당연히 너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 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실패하면…….”
임완운이 가볍게 코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무슨 결과가 있을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 테지.”
평소의 온화한 모습은 어디 갔는지 임완운의 시선은 사람을 오싹하게 했다.
“안심하십시오. 마님, 모두 저에게 맡기십시오. 결코 실수는 없을 겁니다.”
계 유모가 아첨하는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오늘 밤, 모두 순조로울 것입니다.”
그제야 임완운의 표정이 풀렸다.
“난 당연히 널 믿는다. 넌 심묘와 친한 사람이지 않으냐.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심부를 위해서다. 심묘가 장래 철이 들면 네가 그녀의 행복을 기원했음을 알 테고, 널 푸대접하지 않을 것이다.”
계 유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경시의 빛을 숨겼다. 심묘가 이후 이 일을 알게 되면 그녀를 극도로 증오하는 게 당연할 터였다. 좋은 의도라고 여기지 않을 게 분명했다. 실제로 심묘의 인생을 망치기 위한 술수에 불과했으니, 심묘가 아무리 바보여도 그럴 리는 없었다.
계 유모는 늘 온화한 얼굴의 임완운이 이렇게 악랄한 방법을 택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출가 전 여인에게 그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 여인은 산송장이 되어 평생 죽지 못해 살 것이었다.
계 유모는 임완운이 곁의 채국에게 눈짓하는 게 보였다. 채국은 실눈을 뜨고 향주머니를 가져와, 계 유모 손에 쥐여주며 비릿하게 웃었다.
“이번에도 계 유모께 수고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계 유모가 손에 든 향주머니를 만졌다.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계 유모는 얼굴에 웃음을 띤 채 방을 나섰다.
“마님께서 만족하시리라 보증합니다.”
계 유모가 나가고 향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님, 오늘 밤 정말 이곳에서 주무실 겁니까? 이곳과 심묘 아가씨의 방이 어쨌든 같이 있지 않습니까.”
“괜찮다.”
향란의 물음에 임완운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내일 일찍 내가 바로 뭐라고 하면 된다. 무엇보다 대방이 돌아왔을 때 세상에 이 일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알 수 없잖느냐.”
그녀의 웃음은 흉악했다.
“아주버니, 그러게 누가 내 딸의 길을 막으라고 했나요?”
* * *
해 질 무렵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빗물은 한기를 가져왔다.
곡우가 창문을 가리고 심묘를 보며 말했다.
“아가씨, 춥진 않으시죠? 감기에 걸리시면 안 돼요.”
경칩이 심묘에게 피풍의를 걸쳐주었다. 그녀는 비가 오는 것이 걱정스러운 듯했다.
“산길은 걷기 나쁜데, 한밤에 비가 오면 내일 향을 올린 후 바로 출발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진창을 걷기는 힘드니 이곳에서 하루 더 묵을 수도 있겠네요.”
“하루 더 묵으면 묵는 거지.”
곡우가 웃으며 말했다.
“이곳은 풍경이 좋고, 주위 환경도 아름답고 그윽해. 그러니…….”
곡우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심부에서 겉으로만 추종하는 사람들과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말하고 싶었다.
심묘는 탁자 앞에 앉아 바둑을 두었다. 그녀는 바둑 두길 즐겼으나, 애석하게도 곡우와 경칩은 바둑을 둘 줄 몰랐기에 그녀는 자기 자신과 대국할 수밖에 없었다. 때때로 곡우와 경칩은 그 모습이 기이하다고 느꼈다. 심묘가 혼자 대국할 때, 종종 알 수 없는 낯빛을 띄웠는데 그게 보는 사람을 오싹하게 했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고 계 유모가 웃으며 걸어 들어왔다. 손에는 약간의 먹을 것을 들고 있었다.
“아가씨, 젯밥을 가져왔습니다. 그래도 큰 사원이라 밥은 좋네요. 제가 특별히 수정과를 가져왔습니다. 심청 아가씨와 심모 아가씨도 드셨는데, 좋다고 하셨습니다.”
“오, 거기 두게나.”
심묘가 담담히 말했다.
“아가씨, 뜨거울 때 드시는 게 가장 좋습니다. 식으면 맛없습니다.”
계 유모가 친절히 그릇을 들어 심묘에게 건네주려 했다.
“유모, 뭐가 급하세요?”
곡우가 계 유모에게 그릇을 받아 다시 내려놨다.
“아가씨께서 거기 놓으라 하셨잖아요. 잠시 있다가 드실 거예요.”
계 유모는 분노했다. 심묘가 경칩의 말에 가부를 따지지 않고 그냥 두는 것에 몰래 이를 갈았다. 이전 심묘는 계 유모의 말을 중시했다. 여종이 계 유모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고집을 피우면 반드시 그 여종을 처벌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경칩, 곡우가 심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때, 심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계 유모가 나와 함께한 지도 벌써 14년이군.”
계 유모는 심묘의 예상치 못한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묘를 바라보자 심묘도 계 유모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눈동자는 지난날과 다름없이 아이처럼 순수했다. 그 눈빛에 계 유모는 얼떨떨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젖 달라 보채던 아기가 살결이 희고 어여쁜 아이로 자라더니, 지금 눈앞의 옥같이 아름다운 소녀가 되었다. 계 유모는 탄식했다. 심신 부부가 1년 내내 싸움터에 있으니 그녀에게 심묘를 잘 돌보라 분부했던 게 어느덧 14년.
“원래 유모는 나와 가까웠지.”
심묘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루는 밤에 내가 열이 났는데 지금처럼 비가 왔지. 부에 상주하는 의원을 부르러 갔으나 오질 않았어. 유모는 나를 걱정해 결국 뛰어나갔지. 미끄러져 머리를 다쳐가면서도 다른 의원을 데려왔었던 걸 기억해.”
계 유모는 멍해졌다. 그녀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아가씨, 아직 그걸 기억하세요?”
“당연히 기억하네. 유모는 나와 함께한 지 십여 해가 지났네. 부모님도 유모처럼 나와 오랜 기간 함께하지 않았지. 난 유모를 친인(친족과 인척)으로 여기네.”
“아가씨께서 저를 황송하게 만드시네요.”
계 유모가 탄식했다. 한동안 계속 그녀에게 냉담하던 심묘가 오늘 갑자기 이리 친근하게 대할지 예상치 못했다. 속으로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돌이켜보면 계 유모 역시 시작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당초 심신 부부가 그녀에게 심묘의 유모로 지내라고 했을 때, 그녀의 아들은 아직 혼례도 치르지 않았다. 그때 계 유모는 심묘를 손녀처럼 여겼다.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본디 자기 자신을 위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심묘는 결국 그녀의 친손녀가 아니다.
손자를 얻은 후 계 유모는 자기 잇속을 차리기로 했다. 심부의 은자는 이방이 쥐고 있었으니 이방을 위해 일한다면 그녀와 그녀의 일가족은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부귀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얻을 수 있다. 계 유모의 표정이 약간 변할 뻔했으나 다시 예의 그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날은 차갑고 시간은 늦었으니, 일찍 드시고 휴식하십시오. 훈향을 태워서 한숨 푹 주무시고, 내일 일찍 향을 올려 주인어른 내외를 위해 복을 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고맙네.”
심묘도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은 의미심장했다.
“먼저 물러나게. 알아서 먹겠네.”
계 유모는 더 머무르려 했으나 심묘가 내쫓아 부득이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떠났다. 계 유모는 방을 나간 후 멀리 가지 않고 방 창문 아래에서 안의 인기척을 조심스레 살폈다. 방 안에서 곡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음식이 식을 겁니다.”
“가져오너라.”
이어 그릇과 젓가락의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경칩이 물었다.
“아가씨, 수정과는 괜찮으십니까?”
“괜찮구나. 아주 입에 맞아.”
심묘가 대답했다.
“그럼 많이 드세요.”
심묘가 다 먹은 듯, 그릇과 젓가락을 거두는 소리가 들렸다. 곡우가 식판을 들고 나왔다.
“아가씨, 책을 보시겠어요?”
“조금 피곤하네. 훈향을 가져오너라.”
심묘의 목소리는 졸린 듯 기운 없었다.
계 유모는 몸을 곧게 일으키며 깊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걸음을 옮겼다. 조금 뒤 심묘가 묵고 있는 방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아가씨, 제가 흉악하다 탓하지 마십시오. 둘째 마님께서 아가씨를 처리하고자 하시니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계 유모는 뒤쪽에 한 남자의 그림자가 나타난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계 유모가 급히 떠나는 뒷모습을 보았고, 분노하는 표정을 지었다.
방 안 경칩이 걱정스레 심묘를 보았다.
“아가씨, 저는 아직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무얼 하시려는 겁니까?”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경칩은 불안했다. 조용한 깊은 산속이건만 무슨 불길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녀가 물었다.
“아가씨, 방금 계 유모를 속이신 건…… 설마 계 유모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 한 건가요?”
방금 심묘가 계 유모에게 친절한 말을 했을 때 경칩은 긴장했다. 심묘가 또 이전처럼 계 유모의 말에 모두 따를까 두려웠다.
심묘는 흔들리며 타오르는 등불을 바라보았다. 불꽃이 아주 작게 탁탁 소리를 냈다. 바깥의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와 대조되었다. 먹는 척하고, 훈향을 맡는 척한 건 임시변통의 계책에 불과했다. 계 유모에게 친절하게 한 건 그녀의 마음이 여리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번 시작된 복수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과거의 잘못 베푼 은혜는 미래의 치명적인 실수일 뿐. 악인은 영원히 악인이며 연민할 가치가 없었다. 후궁 안 승자가 패자의 목이 잘리기 전 항상 마지막으로 해주는 조언을 심묘 역시 깨달은 지 오래였다. 심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가씨, 이제 뭘 하실 건가요?”
심묘가 그녀의 말에 대답이 없는 것을 보고 경칩은 화제를 돌렸다.
“기다려야지.”
“뭘 기다리나요?”
심묘는 눈썹을 약간 움직이며 입가를 가볍게 당겼다.
“달빛이 없고 바람도 세찬 밤. 살인하고 약탈할 때를.”
* * *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사원 안 종 치는 승려가 마지막 종을 쳤을 때, 하늘은 먹을 뿌린 듯 짙은 색이었다. 빗물이 향기로운 흙냄새를 한층 진하게 만들었다.
심모는 탁자 앞에 앉아 책을 내려놓고 눈을 비볐다.
“아가씨, 주무셔야지요?”
심모는 답하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이웃한 방에 머문 것은 심청이었다. 심청의 방은 그녀의 방과 멀지 않았다. 심청의 방에 아직 불이 환한 듯했다.
“심모 아가씨, 심청 아가씨와 함께 주무시고 싶으신가요?”
여종이 망설이다 물었다.
“아니.”
심모가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고 몸을 돌렸다.
“가서 뜰의 문을 닫고 오너라.”
심청의 방 안.
심청은 물건을 가지고 놀다가 피곤한 듯 하품을 하고 밖을 한 번 내다보았다.
“늦었네……. 이제 자야겠어.”
침상에 시선을 주자 근처 탁자 위에 독특하게 생긴 향로가 있었다. 심청이 냄새를 맡아보니 맑은 향기가 났다.
“이 훈향도 좋구나.”
곧 등불이 꺼지고 방 안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 * *
깊은 산중 오래된 사원의 깊은 밤. 새 우는 소리와 벌레의 잠꼬대에 빗물이 처마를 따라 석판 위로 떨어지는 맑은 소리가 어우러질 뿐, 인기척은 전혀 없어 매우 고요했다.
북쪽 누각 가장 안쪽 방의 등불도 소리 없이 꺼졌다.
어둠 속 누군가의 발소리가 작지만 경쾌하게 들렸다.
창문 앞 탁자에는 심묘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무표정했다. 한 쌍의 눈만 어둠 속에 번뜩이고 있었다. 거대한 맹수처럼 사냥감에서 눈을 떼지 않고 뒤쫓는 듯했다.
머리 위 기와가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는 듯해, 심묘 뒤에 선 곡우와 경칩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들은 긴장한 얼굴로 심묘를 보호했다. 잠시 후 밖에서 “야옹”하는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곧 한바탕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가벼우나 졸음기가 전혀 없는 세 사람에게는 유달리 뚜렷하게 들렸다. 이어 창문이 열리고 사람 그림자 하나가 뛰어올라 들어왔다.
“아가씨, 모경입니다.”
모경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곡우와 경칩은 그제야 진정으로 한숨을 놓았다. 경칩이 얇은 초를 켰다. 빛이 바깥으로 새 나갈까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빛보다도 왜 모경의 등에 심청이 업혀 있는지가 몹시 신경 쓰였다. 심청은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 경칩과 곡우는 몹시 놀랍고 두려웠다.
심묘가 심청에게 한 번 눈길을 주고 담담히 말했다.
“아주 잘했습니다.”
모경은 불편한 얼굴이었다. 처음으로 이런 일을 해봤고, 그는 심묘가 도대체 무엇을 할 생각인지도 몰랐다. 심묘가 머무는 방에 불만이 있어 이런 방법으로 야밤에 몰래 방을 바꾼다고만 여겼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너무 거칠어서 조심치 못해 사람에게 발각되면 그는 강간범이 되는 셈이었다. 현장에서 잡힌다면 변명의 기회조차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심청과 심모의 방 밖에는 두 명의 호위만 있었다. 장군 가문 아가씨라기엔 지키는 인원이 너무 적었다. 하지만 덕분에 그는 번거로움 없이 아가씨를 쉽게 짊어지고 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해가 저물기 전에 심청이 깊게 잠들 수 있도록 훈향 속 무언가를 넣으란 분부도 쉽게 이행했다.
“그녀를 침상 위에 두세요.”
모경은 심묘의 말 그대로 행했고 이불로 심청을 덮었다. 이때까지도 모경은 심묘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아가씨, 우리 지금…….”
곡우가 탐색하듯 물었다. 모경은 심묘가 울컥해 장난을 친다 여겼으나, 경칩과 곡우는 어렴풋하게 단순한 장난이 아님을 느꼈다. 심묘는 이전에도 지금도 방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성질을 부린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깊은 밤에 방이 불편하여 행한 일치고 너무 요란했다.
심묘는 침상 위를 보며 말했다.
“가자.”
곡우가 당황했다.
“가자구요? 어디로 가나요?”
“당연히 언니의 방으로 가야지.”
모경은 탄식했다. 정말로 어린아이의 장난이었다는 생각에 몹시 불만스러웠다. 보기에 얌전하고 냉정한 심묘가 배후로 이렇게나 유치한 일로도 남을 이기지 못해 안달인 성격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작은 일을 위해 자신의 사촌 언니 방에 낯선 남자가 침입하게 하다니.
그때 모경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는 갑자기 안색을 바꾸며 목소리를 낮췄다.
“누구냐?”
곡우와 경칩이 덩달아 긴장했다.
“다른 사람에게 보였느냐?”
심묘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그 사람’이 이렇게 빠를 수는 없었다. 임완운은 모든 면에서 주도면밀하기에 반드시 정해진 시간까지 기다리게 할 터였다. 모경이 사람을 데려오는 것을 보였다면 만약……. 심묘의 표정이 몇 번이나 변했다. 이렇게 되면 가장 하등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제가 먼저 가서 보겠습니다.”
모경이 긴장해 허리의 패검을 뽑았다. 막 창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림자 하나가 스쳤다. 모경은 소리를 낮춰 위협했다.
“누구냐?”
모경은 검을 뽑아 상대를 향해 그었다. 그러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수월하게 검을 피했다. 몸놀림이 어찌나 유연하고 재빠른지 한 발로 창틀을 밟아 제비처럼 날아 들어왔는데,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움직였다. 그는 방으로 들어와 모경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가볍게 검을 빼앗았다. 빼앗은 검은 모경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갑자기 발생한 변고에 모든 사람이 놀라 얼이 빠졌다. 심묘는 의아했다. 모경의 무공은 시위통령의 위치에 오를 만큼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의 무공에 의지해 심묘는 진국에서 여러 해 자신의 신변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 사람에게 5초도 버티지 못했고 거기에 검도 빼앗기다니.
모경은 자신보다 무공이 뛰어난 자의 등장에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심묘의 안위를 염려했다.
“귀형은 저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독수를 쓰십니까?”
모경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오늘 밤 사원 안에는 중 외에 심부의 호위만 있었다. 그리고 심부의 호위 안에는 이렇게 뛰어난 몸놀림은 없어 모경은 의아했다. 이 늦은 시각에 다른 사람이 갑자기 방문할 이유가 없을 터인데…….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칼을 놓으려는 기색이 없었다. 심묘는 화섭자(火折子, 휴대용 발화용품)를 찾아 꺼지려는 촛불에 새로 불을 붙였다. 불을 밝힐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무의식중 눈빛에 살기를 발산했다.
어두운 방 안이 밝아지자 그는 더 이상 정체를 감출 수 없었다. 심묘의 쌀쌀맞은 눈 속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준수한 얼굴이 들어왔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가 여자?”
“제 호위를 놓아주실 수 없습니까? 사 소후야.”
심묘의 목소리는 바깥 가을비보다도 차가웠다.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사경행이었다. 어두운 촛불 아래 그는 그림 같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낮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분위기가 있어, 사람이 바뀐 듯했다.
경칩과 곡우는 사경행을 몇 번 봤기에 그가 누군지 알았다. 몹시 놀랐지만 일단 반사적으로 심묘의 앞을 막아섰다.
모경은 사경행을 처음 봐서 사경행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지만 심묘의 말로 미루어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 걸 알았다. 사경행은 심묘를 잠시 주시하다가 웃었다. 그는 손을 풀고 눈 깜빡할 사이 패검을 모경에게 던져준 후 천천히 입구로 물러나 팔짱을 꼈다.
“심가 여자, 이런 곳에서 다 만나다니. 너와 나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네. 인연 말이지.”
심묘는 그를 상대하지 않고 모경과 두 여종에게 분부했다.
“서둘러라.”
경칩과 곡우는 사경행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떠나려 할 때, 심묘가 그녀들에게 말했다.
“너희 먼저 가거라. 난 뒤따라가마.”
곡우가 허둥대며 외쳤다.
“아가씨……!”
“가래도!”
그녀의 명령은 매우 짧고, 침착했다. 곡우가 약간 굳어졌지만 모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곡우와 경칩을 데리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사경행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꽤 흥미롭다는 듯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탁자 앞을 더듬어 향로를 찾았다. 그녀는 탁자 위 훈향에 불을 붙이고 나서야 방에서 물러나려 했다.
그녀가 나가려 할 때 사경행이 갑자기 미간을 찡그렸다. 사경행은 재빨리 손가락을 튕겨서 촛불의 불을 껐다. 칠흑 같은 어둠 속, 그림자 하나가 심묘 앞을 스쳤다. 사경행은 심묘의 얇은 허리를 끌어안은 후 그녀를 껴안고 굴러 침상 아래로 들어갔다.
“소후야……!”
심묘는 자신이 따뜻한 품에 안겼음에 분노하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쉿. 누가 들어온다.”
사경행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신발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심묘의 몸이 굳어졌다. 심묘는 그 사람이 이렇게 빨리 들이닥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그 사람은 등불을 켜지 않았다. 이건 심묘도 예상한 일이었다. 그 사람은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불을 켜지 않을 터였다.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모두 준비하였습니다.”
“너희는 물러가거라. 밖에서 지키며 나의 흥을 깨뜨리지 말도록.”
쉰 목소리가 대답했고, 심묘의 시선이 움직였다. 역시 예친왕이었다.
“심신, 심신…….”
예친왕의 목소리는 득의가 충만했고, 변태적인 흥분을 느낀 듯했다.
“내가 잘 맛보아주마. 너의 딸은 다른 여인들과 과연 어디가 어떻게 다를까?”
신발 소리가 침상 쪽으로 향했다. 심묘는 주먹을 팽팽히 쥐었다.
사경행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사경행이 심묘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턱은 심묘 머리 위에 있어 그녀의 맑은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어둠 속 심묘의 표정을 볼 수 없으나 그녀가 긴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예친왕은 흉악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심청은 정신을 차린 듯, 미약하게 저항했으나 그 소리가 가냘프니 저항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 속 사람의 심장을 뛰게 하는 냄새가 점점 만연해지자 심묘는 걱정스러웠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방금 심묘가 최음제가 포함된 훈향을 피웠으니 자업자득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난생처음 이런 상황을 겪게 만든 불청객인 사경행을 탓했다. 사경행이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미 자리를 떴을 테니 이런 난처한 상황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심묘는 매섭게 재난의 원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빛이 없어,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심묘는 향이 자신에게 좋지 않으니 결코 마셔선 안 된다고 생각하여 사경행의 옷으로 코를 막았다. 하지만 심묘는 사경행도 남자임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경행이 훈향에 문제가 있었다고 반응했을 때는 이미 많이 흡입한 상태였다. 게다가 품에는 심묘를 껴안고 있었다. 심묘는 아직 어렸기에 몸매는 그다지 굴곡지지 않았으나, 피부는 부드러우며 따뜻하고 향기로웠다. 그의 온몸의 근육이 팽팽해졌다. 그런 그의 입장을 전혀 알지 못하는 심묘가 몸을 움직여 머리를 그의 품에 단단히 묻었다. 사경행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태어난 후 처음으로 난처해졌다.
큰 침상은 삐꺽 삐꺽 끊임없이 흔들렸다. 여인과 남자의 소리가 함께 뒤섞였다.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뛰었다. 침상이 무너지는 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이를 갈며 한 시간 정도 있었을까. 침상 위 움직임은 점점 줄었다. 중도에 지친 듯했다. 심묘의 몸도 심하게 뻣뻣했다. 이때 사경행이 그녀를 껴안고 굴러 닫히지 않은 창문 사이로 도망쳤다. 불빛이 없어 어두운데 어떻게 알고 몸을 날린 건지 대단한 재주였다.
멀리 가지 않아 초조한 기색의 곡우, 경칩, 모경을 만났다. 사경행과 심묘가 나온 것을 보고 곡우는 흥분해 달려갈 뻔했으나, 소리가 들릴까 두려워 작게 말했다.
“아가씨, 저는 걱정되어서 죽을 뻔했습니다. 방금 누군가가 들어갔는데, 발견되지 않은…….”
곡우는 말을 갑자기 멈췄다. 심묘는 아직 사경행에게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사경행은 체격만큼 체력도 좋으니 그녀를 안고 있음에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경칩이 분노했다.
“공자, 얼른 우리 아가씨를 놔주세요!”
사경행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팔을 풀자 심묘가 바닥에 쓰러졌다.
“공자!”
곡우도 분노했다. 사경행의 방식이 이렇게 거칠 거라곤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곡우는 안타까워 심묘를 부축해 일으켰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모경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출신이 비범하고 높은 집안의 공자가 이렇게 대단한 무공을 지녔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자신은 한순간에 제압당해 반항할 수도 없었다. 사경행의 뛰어난 솜씨에 모경은 자기도 모르게 그를 곁눈질했다. 이런 실력자가 야밤에 이곳에 나타난 것이 의심스럽기도 했다.
게다가 모경이 곡우와 경칩을 데리고 나오자마자 누군가 심묘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 뒤로 한 무리 호위가 따랐다. 빠르게 숨지 않았다면 말썽이 생겼을 것이다. 의문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닌 모경은 심묘를 힐긋 쳐다보았다. 심묘가 오늘 밤 낯선 이들이 찾아올 걸 알았다면 왜 심청을 자기 방에 데려다 놨을까 의아했다.
심묘는 일어나 몸 위 먼지를 털고, 평온하게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고 이슬이 많이 내렸으니 소후야께 방해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저희가 한 걸음 먼저 떠나지요.”
태도는 아주 소원했다. 비는 그치지 않은 채였다. 가랑비가 그녀의 옷을 적셨다. 사경행의 시선이 예리하게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그는 웃음거리를 보듯 웃었다.
“이곳에서 나가려면 외원을 거쳐야 해. 지금 수많은 호위가 지키고 있는데, 죽으러 가고 싶나 보지. 나는 지금까지 죽으러 가는 사람을 막은 적 없으니, 가봐.”
사경행의 준수한 얼굴에 귀찮은 듯 악질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심묘가 모경을 바라보았다. 모경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끄러워했다.
“저 혼자서는 가망이 없습니다.”
예친왕은 무능하나, 수하는 능력이 없지 않았다.
“사 소후야, 마치 준비가 되어있으신 듯하네요.”
심묘가 조용히 말했다.
사경행이 입꼬리를 끌어당겨 한 번 더 웃은 후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심묘를 도와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를 잡는 심묘의 말에 사경행이 고개를 돌려 잠시 생각했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있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네가 내게 부탁하면 너희를 데리고 나가주지.”
곡우와 경칩의 안색이 변했다. 사경행은 장난기가 심해 보였지만 워낙 인물이 준수하니 보통 여인이었다면 얼굴을 붉히며 심장이 두근거렸을 터였다. 경칩과 곡우도 심묘를 위하는 마음이 절실하지 않았다면 오늘처럼 따져야 하는 상황에서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됐을 것이다.
모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심묘가 심신의 딸이니 응석받이로 자랐을 거라고 여겼다. 보기에 강하고 고집 센 성격이니 사경행의 이런 도발에 벌컥 성질을 부릴까 두려웠다. 그러나 심묘는 모경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좋아요. 부탁합니다. 우리를 데리고 나가주세요.”
심묘가 너무 쉽고 빠르게 말해 사경행은 말이 막혔다. 부탁이라고 했으나 심묘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침착한 태도로 자신을 낮추는 모습이 아니었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하는 것 같았다.
심묘는 사경행이 말하길 기다리지 않고 이어 물었다.
“사 소후야께서는 변덕을 부리실 생각인가요?”
“넌 정말 인내심이 없네.”
사경행이 웃으며 몸 뒤를 향해 가볍게 명령했다.
“나와라.”
눈 깜빡할 사이, 곳곳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대충 세어보니 열 명이 넘었다. 예친왕이 데려온 사람 수와 대등했다.
경칩과 곡우는 깜짝 놀랐고, 모경도 놀랐다. 무공이 높은 그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숨어 있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의 솜씨가 자신보다 위인 게 명백했다. 이런 많은 고수를 쉽게 동원한 사경행의 신분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빨리 움직여라. 계획을 들켜 의혹을 살 필요 없다.”
사경행의 분부에 고수들이 고개를 숙여 답했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 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명제 집안에서 양성하는 호위 중 이런 뛰어난 자질을 가진 자를 찾기 어려웠다. 심묘가 깊이 생각할 때, 사경행이 말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듯하니, 다른 길로 가자.”
그가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는 이 사원의 구조를 매우 잘 아는 듯했다. 심묘도 따라 걷기 시작하며 명했다.
“따라가자.”
사경행 수하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도 걸으면서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심모가 머무는 남쪽 누각에 도착했을 때, 바깥에는 호위가 한 명도 없었다. 심묘가 모경에게 말했다.
“돌아가도 좋습니다.”
호위는 호위끼리 머무는 곳이 있었다. 모경은 몰래 나왔으니 발각되면 위험할 터였다.
곡우와 경칩은 심묘와 함께 방에 들어갔다. 사경행이 아직 떠나지 않자 경칩이 사경행의 발을 막았다. 경칩이 경계하며 그를 보았다.
“공자, 걸음을 멈추십시오.”
사경행은 순순히 걸음을 멈췄다. 그는 심묘의 뒷모습을 보고 미소 지었다.
“심묘, 오늘 내 하루를 낭비하게 만들어놓고 일의 설명도 아낄 것이냐?”
심묘는 걸음을 멈추고 작게 탄식했다. 사경행은 영리함을 타고난 듯했다. 매우 총명해서 질투가 날 정도였다. 그는 많은 일을 겪어본 게 분명했다. 그에게 더 이상 감추기 싫은 심묘가 경칩과 곡우를 바라보았다.
“너희는 먼저 외실로 가서 자거라. 소후야께서는 날 따라 들어오시게 두고.”
“아가씨……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곡우가 당황했다. 야밤에 낯선 남자와 한방에 있겠다니. 바깥으로 전해지면 온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이었다. 만약 발각된다면 심묘는 정말 끝장이었다. 부수의와의 일은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기에 소녀의 상사병이라 치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그녀의 명예를 한 조각도 성히 남겨두지 않을 터였다.
“아는 사람이 없는데, 맞고 틀리고가 중요할까?”
심묘는 두 여종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들어오십시오.”
사경행이 어깨를 으쓱하고 심묘를 따라 내실로 들어갔다. 경칩과 곡우가 불안하게 바라봄에도 심묘는 평온한 얼굴로 문을 닫았다.
등불을 켜고 창문을 닫아 빗소리를 차단한 후 심묘가 탁자 앞에 앉았다. 사경행은 벽에 기대어 서서 꽤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그녀가 차를 따르는 걸 보며 물었다.
“넌 왜 내가 두렵지 않지?”
“제가 왜 당신을 두려워해야 하나요?”
심묘가 반문했다.
“낯선 남자와 같이 한방에 있는데. 내가 무슨 짓을 하지 않을까 두렵지 않다고?”
등불 아래 사경행의 얼굴은 출중했으나 미소는 아주 짓궂었다.
“소후야, 방금 당신과 함께 다른 사람의 규중 일까지 들었는데, 지금 두렵다고 말한다면 너무 늦지 않았을까요?”
담담한 심묘의 대답에 사경행은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준수한 얼굴 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많은 일을 겪었다. 다른 사람이 그 나이에 겪을 것을 모두 겪었고 다른 사람이 그 나이에 보고 듣지 못할 일들까지 그는 보고 들었다. 적어도 정경성 안, 심지어 명제에서 그는 식견이 넓은 축에 속했다. 그러나 지금 여인이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규중의 일’을 언급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는 아까 어둠 속에서 심묘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곳에서 나온 후부터 심묘의 목소리는 아주 평온했고, 태도도 아주 침착했다. 그와 규방의 사적인 일을 들은 건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그는 심묘가 귀신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너, 여자가 아닌 거 아니야?”
사경행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평범한 소녀라면 규중의 일을 보고 수줍고 난처해 몸 둘 바를 몰라 했을 것이고, 다시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때에도 아무렇지 않았고, 지금도 그 일을 평탄히 꺼냈다. 수줍음도 알지 못하는 듯했다. 아무리 당당한 위무대장군의 딸이라지만 비범한 수준을 넘어서 매우 독특했다.
심묘는 사경행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경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칫하면 잊을 뻔했네. 넌 여자가 아니지, 어린애일 뿐.”
심묘는 노련했지만, 생긴 것은 여렸고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서 말하지 않을 때는 많이 어려 보였다. 사경행은 심묘가 어린 나이이기에 규방의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태도가 그렇게 편안한 거라 여겼다. 사경행은 다가가 심묘를 굽어보았다.
“방금 그 훈향에 대해서 너와 말 못 하겠네. 자칫하면 나도 휩쓸릴 뻔했다고.”
그는 심묘의 얼굴을 꽉 붙잡고 힘써 두 번 꼬집었다.
“지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
심묘는 일순 당황했다. 사경행이 자기 볼을 꼬집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사경행은 이렇게 하는 게 아주 재밌다 느끼는 듯, 또 두 번 꼬집었다. 가볍게 잡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로 여기는 듯했다.
“무엄하다!”
심묘가 낮게 호통쳤다. 사경행의 출중한 얼굴이 굳었다. 예리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눈에 순간 복잡한 표정이 스쳤다. 그가 손을 거두고 가볍게 웃더니 담담히 말했다.
“내게 무엄하다고 하다니. 이런 말은 처음 들어보네.”
심묘는 자신의 실수에 난감해했다. 사경행은 늘 이치에 벗어난 행동을 하는데 방금 그녀가 발끈하여 황후일 때처럼 행동했다. 사경행은 매우 총명하니, 이런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좋았다. 심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침묵했다.
사경행은 심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찻잔에 차를 따르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품속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봉투에는 어여쁘게 장식한 과자가 들어 있었다. 수도 광복재의 과자보다도 모양이 더욱 예뻤다.
사경행이 과자를 먹고 차를 마셨다.
“급히 오느라 저녁도 먹지 못했네. 쯧쯧, 이 차는 정말 별로다.”
지나치게 트집 잡는 게, 흡사 곱게 자란 공자님 같았다.
“사 소후야, 다과를 드시러 오셨습니까?”
심묘가 그를 보았다.
“당연히 아니지.”
사경행이 웃었고, 간식을 하나 들어 심묘의 입에 넣었다. 그의 동작은 너무 빨라 심묘가 반응했을 때 이미 달콤한 맛이 입안에서 느껴졌다. 사경행이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도는 한적하지만, 말은 매우 날카로웠다.
“내 과자를 먹었으니,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해.”
과자의 단내가 입안에 퍼졌다. 희미한 단맛과 적당한 과일 맛이 느껴졌다. 입술과 이 사이에 향기를 남겼다. 심묘처럼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맛있었다고 느끼게 할 만큼 맛있었다.
“예친왕과 넌, 무슨 관계지?”
심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 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인지 묻는 것보다 못한 질문이네요.”
“말해준다면 공손히 듣도록 하지.”
“모욕을 준 사람에게는 반드시 갚아줄 거예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사경행의 눈빛이 오락가락했다. 그는 웃었지만 말투는 오묘했다.
“아주 잔혹하구나. 네 언니를 예친왕, 그 늙은 개와 한데 묶다니.”
예친왕을 ‘늙은 개’라 말하다니, 이런 언행은 사경행같이 법도 무시하고 하늘을 겁내지 않은 대담한 사람만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들이 날 이곳에 데려왔을 때부터 더는 언니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심묘가 날카롭게 맞섰다. 그녀의 말투는 냉담했고, 그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무표정했으나 두 눈은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정말 세상 물정을 모르는 계집이네. 예친왕은 널 용서하지 않을 거다.”
사경행이 기지개를 켰다.
“그가 그럴 능력이 있는지 봐야겠지요.”
심묘는 꿈쩍도 안 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사경행이 탄식했다. 그는 갑자기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입술이 심묘의 코끝 가까이 닿았다. 심묘는 그가 너무 가까이 다가와 놀랐지만 기세에 압도당하지 않으려고 움직이지 않고 평온히 앉아 있었다.
사경행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가벼웠으나 사악한 기운을 띄었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낮은 소리로 읊조렸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말할까 두렵지 않으냐?”
“사 소후야께서 무엇을 하길 바라면 하셔야지요. 그러나 저도 임안후부에서 무슨 이유로 깊은 밤에 적자를 와룡사에 보내 근심을 없애려 하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사경행이 오늘 밤 이곳에 나타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솜씨 비범한 고수들을 데려왔다. 이 세상에 이유 없는 우연은 없었다. 사경행은 결코 그녀를 보러온 것이 아니라 어떤 일 때문에 온 것이고, 때마침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이었다.
사경행의 눈은 아주 아름다웠다. 눈에 웃음기를 머금으면 어여쁜 복사꽃이 피어나는 듯했고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었다. 그러나 차갑게 변한 눈동자는 위험한 광채를 발산했다. 순간 심묘는 사경행의 기세에 압도당했다. 그녀는 이런 위압적인 사람을 만나본 적 없었다. 진국 황실, 명제 황실, 심지어 건방진 흉노보다 사경행이 더욱 위험한 것 같았다.
“담력이 작지 않군.”
사경행은 살짝 웃었다.
“피차일반이네요.”
사경행이 일어나 그녀를 한 번 보고 담담히 말했다.
“늙은 개의 일은 관심 없다. 그러나 네가 오늘 밤 일을 누설한다면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 말할 것도 없겠지?”
그는 창문을 열어 밤중 비의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
서늘한 빗물이 바람에 나부끼며 심묘의 뺨 위로 떨어졌다. 차가운 기운이 뺨에서 머리로 전달됐다. 정신이 든 심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경행을 상대하는 건 철사로 된 길을 걷는 것 같았다. 그는 젊지만 그 속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보기에는 의미 없는 듯해도 한마디 한마디가 빙빙 돌린 탐색이었다. 위험하고 불안했다. 심묘는 임안후부가 심부를 원수로 여긴 적 없는 걸 알았지만, 현재 두 부는 친교를 전혀 맺지 않기에 사경행이라고 맺힌 응어리가 없진 않을 것이었다.
오늘 밤, 사경행은 무슨 일을 하러 왔을 터였다. 정경성 안 냉소적이고 짓궂은 사가 소후야와 오늘 와룡사에서 만난 사경행은 다른 사람 같았다. 심묘는 사경행의 능력이 출중함과 동시에 임안후부가 큰 비밀을 안고 있음을 깨달았다.
심묘는 사경행이 다 먹지 않고 남긴 과자를 바라봤다. 이렇게 흔적이 없으면 한바탕 꿈을 꿨다고 치부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일을 사색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그녀에게 사경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내일……. 모든 것은 내일 변할 것이었다.
* * *
뒷산 위 빗물이 온 산을 적셨고, 나무 아래 사람이 서 있었다.
소년의 키는 컸다. 빗물이 그를 적셨지만 그는 조각상처럼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산 아래를 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잠시 후, 산 아래 어디선가 작은 빛무리가 아주 빠르게 자취를 감췄고 순식간에 흩어졌다.
소년이 몸을 돌렸고, 말투는 평온해 기복이 없었다.
“일은 성공이군.”
“공자님,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곁의 중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경행은 고개를 숙여 팔뚝 위 막 생긴 자상을 보았다. 방 안의 훈향은 남자를 겨눈 것으로 흡입하면 이성을 잃어 미친 듯 날뛰게 하는 향이었다. 여자에게 효용이 강하지 않아 심묘는 아무렇지 않았겠지만, 사경행은 의지가 강하더라도 성인은 아니었다. 그는 그 방에서 사고가 날까 두려워 상처를 내 이성을 유지한 것이었다.
“돌아가 다시 말하지.”
“공자님.”
중년 남자가 망설이다 이어서 말했다.
“심가 소저가 오늘 본 것은…….”
“철의, 어린 여자애 하나에 손쓸 필요는 없다.”
소년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별빛이 반짝였음에도 말투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철의는 두려웠지만 용기를 내 다시 말했다.
“그러나 만약 심가가 알게 되면…….”
“심가는 모른다.”
사경행이 냉랭하게 말했다.
“심가 사람은 모두 아둔해. 가까스로 똑똑한 게 나오긴 했는데.”
그는 무언가 생각한 듯 살짝 웃었다.
“애석하게도.”
철의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움직였으나, 결국 입을 다물었다.
“가자.”
* * *
북쪽 누각.
임완운이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작은 등잔의 등불이 그녀의 마음처럼 밝았다가 어두워졌다가를 반복했다.
“마님, 이미 삼경(자정 무렵)입니다. 쉬시지요.”
향란의 말에 임완운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얼굴 위 약간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잘 수 없다.”
왜인지 모르게 그녀는 불안했다. 이 불안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듣기로 일이 아주 순조롭다 했다. 계 유모는 심묘의 방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들었다고 전했다. 비가 오기에 좀 모호하고 뚜렷하지 않긴 했지만 분명 여인이 울부짖고 발버둥 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빗소리로도 처절하고 비참한 불행을 다 가릴 수는 없었다고.
임완운은 얼굴이 상기되고 심장이 뛰어 견딜 수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예친왕이 여인을 희롱하는 수완이 많다 했다. 계 유모의 말을 들으니 심묘는 고통을 당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마음은 두려웠으나 한편으로는 즐겁고 위안이 되었다.
심가 삼방 중 심묘는 심신이라는 배경을 그늘 삼아, 무슨 일을 하든 눈에 띄었다. 심모는 수도의 재녀라는 명성이 있다. 심청은 두 사람에 비해 평범해 보였다. 분했다. 임완운은 딸 심청이 심묘의 자리를 빼앗도록, 그리고 아들 심원백이 심구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도록 할 것이었다. 반드시.
심묘가 남자에게 희롱을 당했으니 눈이 머리 꼭대기에 달린 나설안이 어떻게 반응할지 기대됐다. 딸이 이런 추한 일을 당한 것을 알게 되면 심묘를 보호할지 아니면 자결하라고 할지 궁금해하며 임완운은 왠지 모를 불안을 떨쳤다. 마음이 가벼워진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좀 쉬어야겠다.”
향란과 채국은 마침내 그녀가 쉰다고 하자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얼른 임완운을 부축해 침상 위에 눕히고 말했다.
“마님, 쉬십시오. 내일 신경 쓸 것도 많으시지 않습니까.”
“그래.”
임완운은 즐거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내일 신경 쓰려면 머리가 맑아야지.”
내일, 기다리고 기다려왔던 불행을 직접 가서 보고 마무리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