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비는 늦은 새벽에나 그쳤다. 축축한 비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은 상당히 쌀쌀했다.
사원의 중이 종을 치기 시작했다. 음울한 종소리가 깊이 잠든 임완운을 깨웠다. 그녀는 편안히 잠들지 못했고 해가 뜰 때쯤에야 잠들었다. 이마가 땀범벅이었다.
“마님, 깨셨군요. 얼굴 닦으세요.”
향란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임완운이 머리를 빗고 세수를 한 후 바깥을 보았다. 창밖을 보니 비는 이미 그쳤고 들려오는 새소리 역시 유쾌했다. 임완운은 미소 지으며 채국에게 분부했다.
“밝은색으로 바꿔 입자. 그리고 홍옥주화(진주로 만든 꽃 모양의 머리 장식)를 꽂아다오.”
그녀는 평소에 중년의 나이에 걸맞게 어두운 의상을 자주 입었는데 오늘은 밝은 의상을 입겠다고 했다. 이에 채국이 웃었다.
“마님,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밝은색을 입으니 한층 즐거워 보이십니다.”
임완운이 거울을 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채국 말마따나 즐거웠다. 아니, 기뻐 날뛴다고 할 수 있었다. 모든 준비를 끝낸 임완운은 걸음을 뗐다.
“가자, 내 ‘피곤’한 질녀를 불러 식사해야지.”
* * *
북쪽 누각 가장 깊숙한 방은 아주 고요했다. 여종의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곧 자기 두 눈으로 나락에 떨어진 심묘를 볼 수 있을 거라는 흥분에 사로잡힌 임완운은 무언가 수상한 낌새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아마 예친왕이 여종도 내쫓았겠거니 넘겨짚을 따름이었다. 여종이 곁에 없었으니 하인의 입으로 심묘의 일을 천하에 알리지 못한 게 아쉽긴 했으나, 자기가 가장 먼저 심묘의 고통을 조롱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가서 문을 두드리거라.”
임완운이 향란에게 말했다. 임완운의 눈에는 혐오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몸을 더럽힌 여인을 경멸했다. 심묘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본인임을 잊은 상태였다.
“심묘 아가씨, 둘째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향란이 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안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향란이 이어 말했다. 그러나 문을 오래 두드려도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임완운이 한숨을 쉬고, 웃으며 말했다.
“심묘는 정말 아이 같구나. 하늘이 밝았는데도 아직 일어나지 못했다니. 아침잠 때문에 향을 올릴 시간을 늦춰선 안 된다. 내가 하마.”
임완운은 문 앞으로 걸어가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심묘야, 일어나 식사하자꾸나. 식사하고 향을 올려야지. 제멋대로 굴어서는 안 된다.”
방 안에는 여전히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임완운은 몸을 돌려 유감스러운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됐다, 직접 문을 밀고 들어가자. 심묘는 그렇다 쳐도 그 여종들도 이리 제멋대로니. 돌아가면 반드시 처벌해야겠다.”
임완운은 문을 밀어 들어가려 했다.
“둘째 숙모.”
그때 하늘거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임완운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때 향란과 채국이 나란히 인사했다.
“어머, 심모 아가씨, 심묘 아가씨.”
임완운이 의아해 고개를 돌리니, 심모와 심묘가 함께 서 있는 게 보였다.
심묘는 눈처럼 하얀 얇은 비단 치마에 겉에는 흰 모란이 수놓인 피풍의를 걸쳐 상복을 입은 것 같았다. 심묘는 원래 원색적인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시골 처자처럼 꾸미길 좋아했는데, 저번 국화연회 때도 그렇더니 오늘도 품위 있는 차림새였다. 거기에 쌀쌀맞은 표정을 더하니 가히 매혹적인 자태였다.
심모의 눈 속에 질투가 스쳤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심묘가 외모로 뒤처지지 않았다. 이전에는 말로 달래서 평범하고 속되게 입혔는데 지금은 말을 듣지 않으니 용모가 점점 피어나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임완운도 심묘의 단장에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렸다.
“심묘야, 어째서 그렇게 불길하게 입었느냐? 흰색이라니. 누가 보면 우리 집안에 장례가 있는 줄 알겠다.”
“둘째 숙모는 오늘 아름답게 입으셨네요.”
심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임완운은 자신의 의상을 잠시 살피더니 갑자기 심묘를 세심히 관찰했다. 그녀는 심묘가 어떻게 밖에 나와 있는지 영문을 알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심묘는 보기에 마음 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젯밤 일은 다른 사람은 속여도 그녀는 속일 수 없었다. 임완운은 심묘 앞에 서서 빙긋 웃으며 심묘의 팔을 끌어당기고 관심 있는 척했다.
“심묘야, 어젯밤 잘 잤느냐?”
“둘째 숙모의 관심 덕에, 잘 잤습니다.”
심묘는 살짝 웃었다. 임완운은 심묘의 표정을 더욱 세심히 관찰했다. 그녀의 표정이 거짓이 아닌 듯해 놀랍고 의심스러웠다. 심묘가 언제 이런 침착함을 배웠는지 기이한 일이었다. 평범한 여인이 그런 일을 겪으면 비통해 울부짖을 텐데 심묘는 왜 이토록 평온한지 의아했다. 계 유모가 분명 여자 비명소릴 들었다고 했는데.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이렇듯 평온할 수 있는 걸까.
심묘의 평소와 같이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임완운은 갑자기 불안이 치솟았다. 임완운은 허둥지둥 심묘에게 다가섰다.
“네가 잘 잤다니 나도 안심이구나.”
이때 임완운은 심묘의 목이 여전히 백옥처럼 하얀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원래 피부가 희고 깨끗한데, 오늘 역시 얼룩도 없었고 상처는 더욱 찾을 수 없었다.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친왕의 여인을 희롱하는 수완은 잔학했다. 심묘의 몸에 흔적이 남지 않을 리 없었다.
심모는 심묘와 임완운을 교대로 바라보았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실마리조차 알지 못하니 답답했다.
임완운은 불안이 점점 커졌다. 그녀는 심묘의 손을 꽉 붙들고, 더욱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날씨가 정말 추운데, 이렇게 얇게 입었더냐? 춥지는 않으냐?”
임완운은 다급하게 손을 만지는 척하며 심묘의 소매를 높이 걷어 올렸다. 심묘의 하얀 팔목이 드러났다. 팔뚝은 희고 깨끗하여 매우 좋은 양지옥(윤택 있는 흰 옥) 같았다.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임완운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심묘가 미소 지었다.
“둘째 숙모, 무언가 검사하시는 듯하네요.”
“아니…… 방금은…… 손이 미끄러졌단다.”
임완운이 간신히 웃었다. 그녀는 얼떨떨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예친왕이 아니더라도 남자라면 많든 적든 여인의 몸에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심묘의 몸에 손길이 전혀 남지 않았는지 의아했다. 혹시 예친왕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수완을 부린 게 아닌가 싶었지만 심묘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충격도 읽어낼 수 없었다. 만약 심묘가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모습을 가장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임완운의 시선이 주위를 훑었다. 심모 곁의 황앵과 청란만 보이고 심묘의 경칩과 곡우는 보이지 않았다. 임완운이 그 두 사람을 찾았다.
“네 여종들은 어디 갔느냐? 아침부터 보이지 않다니.”
“그들에게 죽을 쒀오라고 했습니다. 오늘 일찍 일어나니 목이 불편해서요.”
임완운이 웃으며 말했다.
“녀석도. 직접 한마디 하면 될 것을. 주방은 남쪽 누각에 있지 않으냐?”
“맞습니다. 남쪽 누각에서 오는 길입니다.”
심묘가 임완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임완운은 불안한 마음을 억눌렀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어젯밤 넌 북쪽 누각에서 자지 않았느냐?”
임완운은 심묘가 웃는 것을 보았다. 심묘는 물에 빠졌다가 깨어난 후 표정이 매우 냉담해서 미소를 잘 짓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미소는 진정으로 가슴에서 우러나온 듯 매우 찬란했다. 임완운의 마음이 납이 쿵 떨어진 듯 가라앉았다.
“마님, 큰일 났습니다. 아가씨가 보이지 않습니다!”
뒤이어 여인의 허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두 여종의 초조한 표정이 보였다. 다른 사람 아닌 심청의 여종인 염매와 수벽이었다.
“무슨 소리야!”
임완운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심모는 멍해졌다. 심청이 보이지 않는다니 심모는 몰래 심묘를 바라봤다. 심묘의 표정은 평탄하고 조용해서 안부를 묻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심청이 어째서 보이지 않는 게야?”
임완운이 염매의 옷깃을 잡았다. 시선은 자식을 잃은 어미 곰처럼 흉악했다.
“음, 그건 제가 알아요.”
심묘가 갑자기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다들 조용한 가운데 심묘가 작게 웃었다.
“전 어제 남쪽 누각에서 잤기 때문에 그쪽에서 왔잖아요? 사실 어젯밤에 전 잠들지 못했고, 심청 언니를 찾아갔어요. 그리고 나와 방을 바꿔줄 수 있냐고 물어봤어요. 심청 언니가 허락했는데, 언니는 둘째 숙모가 옆방에 계시니 자기도 더 좋다고 흔쾌히 바꿔줬어요. 오늘 아침 일찍 나와 심모 언니를 만났고, 심청 언니에게 어제 고마웠다고 인사할 겸 같이 온 거예요.”
심묘가 입을 여닫을 때마다 임완운의 심장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듯했다. 임완운은 절망했다. 뺨도 떨렸고 눈언저리가 붉어져 발광 직전의 맹수 같았다.
임완운의 모습을 본 심모는 두려웠다. 큰일이 벌어졌다고 추측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던 임완운에게 문제가 생겨서 기쁘기도 했다. 심모가 심묘의 말을 두둔했다.
“맞아요. 오늘 아침 심묘가 옆방에서 나오는 걸 보고 심청 언니와 함께 식사를 하러 온 거예요.”
그들의 깃털처럼 가벼운 목소리는 임완운을 가슴을 계속 내리쳤다. 임완운은 피를 토할 것처럼 괴로워했다.
“어젯밤, 이곳에서 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심청 언니예요.”
임완운은 명치께를 움켜쥐고 두 걸음 물러났다.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어젯밤 이곳에서 잔 사람이 심묘가 아니라 심청이라니! 예친왕에게 희롱당한 그 여인은 그녀의 딸 심청이었다! 처절하고 비참한 통곡소리는 바로 딸인 심청이 낸 것이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딸이 모욕당하는 걸 그냥 뒀다니……. 임완운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드시 거짓이어야 했다.
임완운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꽉 닫힌 방문을 바라봤으나 다가가 그 안을 들여다볼 용기가 있을 리 만무했다. 어떠한 참상이 벌어졌을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하늘과 땅이 빙빙 도는 중에도 그녀는 심모와 심묘가 안의 모습을 봐선 안 된다는 걸 떠올렸다. 만일 소문이 나면, 만일 소문이 난다면……. 그녀는 간신히 우느니만 못한 미소를 쥐어 짜냈다.
“너희는 먼저 돌아가거라. 심청이는 아직 자고 있는 것 같으니 너희는 기다리지 말거라.”
심묘가 웃었다.
“둘째 숙모는 정말 농담도 잘하시네요. 모두와 함께 식사하고 향을 올리러 가자고 찾아오신 거 아닌가요? 왜 저희를 보내시려고 하세요. 언니가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나요?”
“아니다!”
임완운이 큰 목소리로 딱 잘랐다.
심모는 더욱 의아했다.
심묘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녀는 다른 쪽에서 걸어 나온 사람을 향해 말했다.
“계 유모! 수고스럽겠지만 둘째 숙모를 도와 이 문을 열어줘.”
계 유모는 허리를 굽혀 걸어오고 있었다. 오늘 그녀도 일찍 오라 분부를 받아 온 것인데,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이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심묘의 말을 듣고 심묘가 이미 임완운과 이야기를 다 했다고 여겼다. 켕기는 탓에 계 유모는 임완운 쪽을 살피지 않았다. 만약 임완운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그녀의 안색이 흙빛임을 보고 주저했을 터나 그러지 않았다. 더욱이 계 유모는 문과 가까웠기에 임완운이 저지하려 했으나 한발 늦었다. 끼익, 음산한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일순 만물이 고요해졌다.
문이 열렸는데도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다. 방 안의 공기는 어딘가 스산했다.
와룡사의 참배자가 머무는 방은 넓으나, 화려함은 심부, 특히 동원과 비할 바가 못 됐다. 특별한 의도를 품고 고른 방은 한층 넓었으나 휑하여 큰 침상만 덜렁 가로로 놓여 있었고 가리는 병풍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방 안의 상황을 모두 다 볼 수 있었다.
심모가 가장 먼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바닥에는 찢어진 의복 조각이 널렸고, 침상 위 깔개는 옆으로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탁자 위 책은 전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찻주전자도 깨져 있었다. 대참사를 겪은 듯했다.
침상 위는 더욱 엉망진창이었다. 여자는 몸을 가로로 누워 이불을 덮지 않은 채로 침상에 반 엎드려 있었다. 등 위에는 얼룩덜룩한 붉은 상처들이 즐비했고 혈흔과 푸른 멍이 가득해 보기만 해도 몸서리가 절로 쳐졌다. 침상 아래에는 온통 피로 물든 가죽 채찍이 반토막 나 있었다. 여자의 몸에 가혹한 흔적을 남긴 바로 그 물건이었다.
“세상에!”
심모가 입을 가리고 뒤로 물러났다.
“저, 저게 누구야……. 설마 심청 언니는 아니겠지요?”
심모는 고개를 돌려 임완운을 바라보았다. 심묘가 심청과 방을 바꾸었다 말했으니 당연히 이 방에는 심청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눈앞의 상황은 심청에게 큰일이 났음을 알려줬다. 출가 전인 심모도 이 상황이 여인이 능욕당한 후 흔적임을 알고 있었다.
계 유모는 방 안에 아직 사람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방금 심묘가 밖에 나와 있었기에 심묘가 이미 임완운과 이야기를 다 나눴고 그저 방으로 들어간다고 여겼다. 그런데 방 안에 여인이 있어서 의아했다. 설마 어젯밤 다른 여인도 예친왕에게 희롱당한 건가 싶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임무를 실패한 셈 칠지도 모르니 불안했다. 하지만 계 유모는 이어지는 심모의 말을 듣고 혼비백산했다. 심청이라니, 안에 있는 여인이 심청이라니!
염매와 수벽은 심청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에게 이런 일이 생겼으니 살아남을 방도가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았고, 상대방 눈 속에서 깊디깊은 절망을 보았다. 둘은 즉시 무릎을 꿇고 임완운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임완운은 멍청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둘째 숙모, 앞으로 가서 보지 않으세요?”
심묘가 작게 말했다. 그 말투는 평온해 마치 그녀에게만 눈앞 이 참상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임완운이 고개를 돌리니 심묘가 고요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임완운은 마음에 성난 파도가 솟구쳤으나 겨우 억눌렀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빠른 걸음을 옮겨 침상에 있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여인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고, 바닥 위에도 많이 떨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을 마구 잡아 뜯은 듯했다. 임완운은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 여인의 몸을 뒤집었다.
우르릉, 하늘에서 거대한 우레가 쳤다. 임완운의 심정을 반영하는 듯했다. 그때 그쳤던 비가 다시 쏟아졌다. 켜켜이 쌓인 먹구름에서 번개가 쳤다. 임완운은 고통에 눈을 감고 여인을 끌어안았다. 품 안의 몸은 바로 심청이었다!
가까이서 볼수록 더욱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다. 심청의 얼굴은 심하게 맞아 잔뜩 부어 있었다. 게다가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한쪽 손은 기이한 자세로 꺾여 부러진 듯했다. 잔학한 예친왕의 행태에 치를 떨면서도 임완운은 예친왕보다 심묘가 더 원망스러웠다.
이 모든 것은 심묘가 겪었어야 했는데! 심청이 이렇게 끝장나버리다니. 임완운은 심묘의 목을 물어뜯고 피를 마시고 살을 뜯어 먹지 못해 한이 맺혔다.
그래도 임완운은 심부의 주모였다. 이런 일이 벌어졌어도 그녀는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향란에게 분부했다.
“가서 마차를 찾거라, 바로 하산하자.”
“하지만…… 지금 큰비가 내려 하산할 방법이 없습니다.”
향란이 두려워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산이 험하고 계곡이 깊은 양경봉은 평소에도 길이 울퉁불퉁한데 비가 이렇게 오니 더욱 질퍽거릴 것이었다. 만약 하산을 강행한다면 길이 미끄러워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이런 날씨에는 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럼 심청은 어찌해?”
임완운은 더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향란의 뺨을 때린 후 다시 한번 표독스럽게 외쳤다.
“그럼 나의 심청은 어찌하냐고?”
심묘는 이 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비의 장막에 산수가 가려지듯 추악한 간계도 가려진 듯했다. 원래 이 모욕을 받을 사람은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 심청이 이런 모욕을 당하게 만든 사람도 그녀였다.
임완운은 딸을 구할 수 있었으나 수수방관했다. 심묘는 완유의 병사 소식을 들은 후로 완유를 생각하면 뼛속 깊이 스며든 고통에 가슴이 미어졌다. 임완운도 앞으로 이날을 떠올릴 때마다 그런 아픔을 느낄지 궁금했다. 지금 심청을 데리고 심부로 돌아가 치료하려 해도 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머물러야 했다.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다. 이번에는 자신이 임완운의 절망을 곁에서 지켜볼 차례였다.
“의원을 찾아와! 무슨 방법을 쓰든 상관없으니 의원을 찾아오라고! 만약 의원을 찾아오지 못하면 넌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임완운이 향란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향란은 임완운을 여러 해 따르며, 지금까지 이렇게 심히 질책받은 적이 없었다. 억울하고 또 두려워서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대답한 후 나는 듯 뛰어나갔다. 뛰어나갈 때 심묘를 곁눈질했다.
분명 모두 잘 계획되었다. 어젯밤 이곳에서 잠들었어야 하는 사람은 심묘인데 어째서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을까? 심청은 심묘에게 마음속 응어리가 있으니 심묘의 밤중 방문을 반길 리 없고, 그녀와 방을 바꾸는 건 더욱 허락할 리 없었다. 모두 다 이상했다. 향란은 심묘의 날씬한 몸매를 바라보았다. 수려한 용모임에도 무엇 때문인지 흉악해 보였다.
“채국, 넌 가서 사람을 불러와 방문을 닫고 지키게 해라.”
임완운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방문이 닫혔다. 문 안과 밖, 마치 두 개의 세계로 분리된 것 같았다.
심모는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심묘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심묘, 언니가 나쁜 사람에게 능욕을 당한 거야?”
심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친왕은 심청을 희롱하고 동트기 전에 떠났다. 그도 높은 가문의 여인이 이름 모를 사람에게 순결이 훼손되는 것이 가장 나쁜 일임을 아주 잘 알았다. 그러나 예친왕도 바보는 아니니 자신이 심묘를 안은 게 아니라는 것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었다. 심묘는 그 생각에 몰두해서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랐다. 심묘의 모습을 본 심모는 몸이 떨렸다.
“심묘, 네가 심청 언니를 해친 건 아니겠지……?”
분명 어젯밤 심청이 남쪽 누각에 머무르고, 심묘는 북쪽 누각에 머물렀다. 두 사람이 위치를 바꿨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 방을 바꾸지 않았으면 이곳에 누워 있을 사람은 심묘였다. 그런데 심모가 알고 있는 한 심청은 절대로 심묘와 방을 바꿔줄 사람이 아니었다. 설마 이 모두 심묘의 계략이라면……. 심모의 시선은 아주 귀신이라도 보는 듯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심묘가 작게 웃는 것이 들렸다.
“심모 언니, 밥은 마구 먹어도 되지만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돼. 내가 어디 그런 능력이 있어서 심청 언니를 해치겠어? 날 너무 과대평가했어.”
“하지만…….”
심모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심모는 연못 일 이후로 늘 심묘에게 괴이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 일은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심묘와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는 듯했다.
“여기서 이런 일에 마음 쓰지 말고 언니나 걱정해.”
“나? 내가 무슨?”
심모가 긴장했다.
“언니는 언니 여종들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심청 언니의 저런 모습을 봤는데?”
“뭐라고?”
“심모 언니는 세상이 험악한 걸 모르는구나.”
심묘는 살짝 웃었다.
“주인의 비밀을 안 하인. 심지어 그 비밀이 추악한 일이라면 그 하인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아?”
심모 곁의 황앵과 청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들은 대갓집에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추악한 일이 많으며 그것을 알거나 본 하인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단 것을 알고 있었다. 하인은 죽어야만 비밀을 지킬 수 있었다. 그녀들은 심청이 능욕당한 일을 목격했으니 당연히 살길이 없었다.
심모가 대경실색했다. 심모는 정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제대로 자신을 받들 여종 한 명을 키우는 데 적지 않은 힘이 드는 것쯤은 익히 알았다. 이 일로 두 여종이 사라진다면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 둘만이 아니야.”
심묘의 시선이 염매와 수벽, 계 유모를 스쳐 지나갔다. 눈빛은 의미심장했다.
“하나도 도망칠 수 없어.”
심묘의 미소에 계 유모와 두 여종은 혼절할 뻔했다. 한 사람이 득세하면 주변 사람도 그 덕을 보는 법이었다. 주인과 하인도 그러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주인이 잘못되면 하인도 도망칠 수 없었다. 전생에 심가의 가산이 몰수당할 때 이방과 삼방 세력을 믿고 후안무치하던 교활한 하인들은 외부와 내통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어떤 주인을 따르기로 했다면 반드시 따라오는 결말도 받아들여야 했다.
심묘는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쓸 생각이 없었다. 칼을 꺼내 크게 휘둘렀으니 최대한 많이 도륙할 셈이었다. 심묘가 몸을 돌려 떠나려 하자 심모는 그녀를 서둘러 불러 세웠다.
“너 어디 가?”
“와룡사에 온 것은 향을 올리기 위해서 아니야? 나도 아주 곤혹스러워. 당연히 불조께 물어봐야지. 이곳에 헛되이 온 게 되지 않게 향을 올릴 거야.”
심묘는 담담히 말했다. 심묘의 뒷모습에 머뭇거림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오늘 이곳에서 세상 놀랄 큰일이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와룡사에 방문한 이유를 잊지 않고 향을 올려 평안을 빌려고 했다.
“이상해! 심묘의 두 여종은 왜 없지?”
심모의 말에 계 유모도 멍해졌다.
심모가 아침 일찍 심묘를 만났을 때 경칩과 곡우는 주방으로 먹을 것을 가지러 갔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공교로울 수 있을까. 심청과 심모의 여종들은, 심지어 자신까지 모두 추악한 일을 목격해 재난을 피할 수 없는데 심묘의 여종은 하나도 자리에 없다니. 분명 심묘가 일찌감치 다른 곳에 보낸 것일 터. 심묘는 분명 이 일을 미리 알았을 것이다. 심청의 일도 바로 심묘가 꾸민 일이리라.
심모가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심묘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맑고 투명한, 칼날을 숨긴 눈빛이 여전히 자신을 주시하는 듯해 심모는 자기도 모르게 한기를 느꼈다.
* * *
비는 정오 무렵이 돼서야 겨우 그쳤다.
향란은 온 산봉우리를 뛰어다녀도 의원을 찾지 못했다. 평소 이곳에는 드문드문 오는 참배객뿐이었고 향란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다. 사원 안 승려는 병에 걸려도 약초를 캐서 끓여 먹을 뿐이었다. 의원을 찾지 못한 향란은 하는 수 없이 승려에게 마음을 안정시키는 약제와 환부에 바르는 상처약이라도 달라고 했다.
방 안은 약재와 모종의 기이한 냄새로 가득했다. 깨끗이 정리해도 피 냄새는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았다. 심청은 두 눈을 꼭 감고 있고, 임완운은 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임완운의 얼굴은 그새 십 년은 늙은 듯했다.
방 안 여종들은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이런 큰일이 생겼으니 임완운이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하지 않을 거라 보장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임완운이 주렴을 멍하니 바라볼 때, 침상 위 기척이 있었다. 임완운이 얼른 고개를 숙여 심청을 바라보았다.
“심청아?”
심청은 눈을 떴다. 그녀는 임완운을 얼핏 보고는 놀라 두려운 기색을 드러냈다. 한 손으로 임완운의 얼굴 위를 할퀴려 했다.
“날 놔줘요, 저리 비켜! 살려줘!”
“심청아, 어미다! 엄마야! 어미가 여기 있으니 두려워 말아라!”
임완운은 심장을 칼로 에는 듯했다. 심청은 알아듣지 못하는 듯 계속해서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그녀는 계속 천장을 주시하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
향란과 채국은 얼른 심청을 붙잡았다. 심청은 이성을 완전히 잃고 임완운도 알아보지 못했다. 심청이 발버둥 치자 상처에서 다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임완운의 얼굴은 절망을 토하고 그 입은 악 하고 고통을 질렀다.
“마님.”
향란과 채국 역시 놀라고 두려웠다. 그녀들은 임완운을 여러 해 따랐는데, 임완운은 큰일이 일어나도 일을 처리하는 수완이 뛰어나 금세 문제를 해결했다. 그 덕에 향란과 채국도 오랫동안 마음 편히 지냈으니, 이렇듯 임완운이 어찌할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심묘는 어디 있느냐?”
잠시 후 임완운이 노기등등해 말했다.
“심묘 아가씨는 사당에 있습니다.”
채국이 조심스레 말했다.
“심청을 잘 돌봐라. 만약 또 무슨 착오가 있으면 너희 둘은 더 살 필요가 없겠지.”
임완운이 몸을 돌려 문을 나갔다.
* * *
불전 안에는 아주 큰 금불상이 우뚝 솟아 있었다. 불상은 인자하고 선한 얼굴로 중생을 굽어보고 있었다.
심묘가 손에는 향을 들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이곳에서 꼬박 몇 시진을 꿇어앉아 있었다.
“아가씨, 일어나 쉬세요. 몸을 망가뜨리면서까지 꿇어앉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불조께서 아가씨의 성심을 보셨으니 원하시는 일이 분명 이루어질 겁니다.”
경칩이 권했다.
심묘는 경칩의 말을 듣고 쓴웃음이 났다. 그녀의 희망은 이미 실현 불가능했다. 다시 살 기회가 생겼다 해도 전생의 착오로 만날 수조차 없게 된 이들이 있었다. 그녀의 완유, 부명. 번잡한 세상 속 작은 빛조차 남지 않게 된 것인지 두려웠다. 더구나 심묘는 불조를 믿지 않았다.
심묘가 고개를 들어 금불상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조각상일 뿐, 정말 중생을 구할 수는 없었다. 만약 하늘이 사람을 구해준다면 어찌 좋은 사람에게 그런 참혹한 결말을 얻게 할까. 악랄한 이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게 하고…….
심묘가 이곳에 꿇어앉아 계속 향을 올리고 절을 하는 것은 불조가 아닌 전생에서 그녀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다시 살아난 이래,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아들딸을 포함해 그들에게 제사를 지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향불을 올리고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었다.
“심묘!”
격노한 목소리가 들렸다.
심묘가 미소 지었다. 속세의 사람은 참 참을성이 없었다. 심묘는 시큰거리는 무릎을 주무르고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눈앞의 임완운을 보며 방긋 웃으며 불렀다.
“둘째 숙모.”
심묘의 웃는 얼굴에 임완운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손바닥을 세워 심묘 뺨을 때리려 했다. 경칩과 곡우가 막으려 할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뺨을 때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심묘가 임완운의 팔을 잡았기 때문이다. 손바닥은 심묘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췄다.
“둘째 숙모, 이렇게 흥분하시다니,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숙모께서 부모님을 대신해 절 가르치실 수 있겠지만, 반박할 여지도 주지 않고 사람을 때리는 규율은 평범한 집안에도 없어요.”
임완운은 심묘가 손을 막을 거라 예상치 못했다. 더욱이 심묘는 가냘픈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손아귀 힘이 상당했다. 본래 네네 거리고 속이기 쉬워 수중에 꽉 쥐고 있던 조카가 언제 이렇듯 머리가 커진 걸까. 더는 굽어보는 시선으로 심묘를 볼 수 없었다. 부주의했다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심묘의 흉계에 당할 터였다. 임완운은 이를 갈며 마지못해 손을 내렸다.
“심묘, 멍청한 척하지 말아라. 심청의 일, 네가 한 거지?”
직접 심청에게 물어보면 되겠지만 정신을 도통 차리지 못하니 일이 어떻게 흘렀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임완운은 이 일이 반드시 심묘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묘가 무슨 방법을 썼는지 모르지만, 심청을 저렇게 만들었으니 자비를 베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심청 언니가 나쁜 사람에게 해를 당해서 저도 매우 유감이에요. 둘째 숙모는 어떻게 절 의심하실 수 있나요?”
심묘가 살짝 웃었다.
“만약 심청 언니와 방을 바꾸지 않았다면 모욕을 당한 사람은 바로 저예요. 전 이런 위험한 일은 하지 못해요.”
임완운은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손을 힘을 주었다. 시선은 음험하고 악독한 뱀 같았다.
“본래 네가 받을 일을 네가 심청이 대신 당하도록 한 거겠지.”
경칩과 곡우는 줄곧 온화하던 임완운이 실상은 이렇게 흉악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음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젯밤 심묘의 눈치가 빠르지 않았다면 오늘 심묘와 자신들이 끝장났을 것이다. 끔찍한 일을 계획해놓고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고 되려 심묘를 책망하다니.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쓴 야차와 다를 게 무엇일까.
“둘째 숙모, 절대로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이곳엔 불조님이 계십니다.”
심묘는 가볍게 웃었지만 눈에는 기이한 광채가 반짝이는 듯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정론이 있습니다. 어젯밤 사고가 난 게 제가 아니라 심청 언니인 것은 아마도 운명이겠지요. 둘째 숙모, 이 일을 행한 사람과 운명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절 탓하는 것이 도리에 맞다고 여기시나요?”
임완운는 노기등등한 얼굴로 냉소했다.
“말솜씨가 참 좋구나. 이전에는 내가 널 과소평가했어.”
“오, 둘째 숙모, 절 그렇게 보셨군요.”
심묘는 임완운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고 가볍게 웃어넘겼다.
임완운은 심묘를 보았다. 심묘의 표정과 태도는 온화했고 얼굴은 풋풋함을 벗고 수려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아둔한 머저리 심묘로 보이지 않았다. 임완운은 여러 해 권모술수를 부렸는데, 처음으로 제 꾀에 제가 넘어가 비통한 대가를 치렀다. 심지어 계례도 치르지 못한 어린 아가씨 손에 쓰러지다니. 심묘가 도리에 맞게 행동할수록 임완운은 더욱 침상 위 심청이 가련해 견딜 수가 없었다.
“심묘, 네가 공연히 어리석은 척한다면 나도 네게 솔직히 말해줘야겠지.”
임완운이 갑자기 비꼬듯 웃었다. 가면을 벗었으니 자애로운 척을 할 필요도 없었다.
“넌 이 일이 이렇게 끝날 거라 여기나 본데, 조모께서 널 용서치 않을 것이다. 네 둘째 숙부도 널 용서치 않을 게다. 수많은 사람에게 깔려서 영원히 상류에 오를 수 없는 천한 사람으로 전락할 것이다! 반드시 심청보다 몇만 배는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될 거야!”
“마님, 신중하게 말씀하십시오!”
경칩과 곡우가 외쳤다. 평소 온화하고 고귀한 사람인 양하던 임완운이 이렇게 악랄하며 거칠고 저속한 저주의 말을 내뱉다니. 원수라 해도 심묘는 어리니 이렇게 더럽고 지저분한 말로 귀를 더럽힐 수 없었다.
임완운은 경칩과 곡우를 보며 냉소했다.
“넌 잔꾀를 부려 이 두 여종을 보호했지. 네가 이 애들을 얼마나 오래 보호할지 봐야겠구나!”
임완운은 심묘를 한 번 노려본 후 몸을 휙 돌려 빠른 걸음으로 떠났다.
경칩과 곡우는 당황해 심묘를 바라보았다. 곡우가 걱정하며 말했다.
“아가씨, 둘째 마님과 이렇게 안면을 몰수해도 정말 괜찮을까요?”
“어차피 이리될 일이었어. 표면상 잘 유지해봤자 아무 소용없어. 헛된 일을 왜 해?”
황궁에서는 적이 양지에 있었다면 양지에 있게 두고 음지에 있었다면 방법을 찾아 양지에 있게 하라고 말한다. 심묘는 임완운과 집안에서 화목한 가족 놀이를 하려는 게 아니라 그녀를 들판으로 끌어내 사나운 바람과 모진 비를 맞게 해줄 생각이었다. 임완운은 지금 이미 그녀에게 분노해 이성을 잃었으니 종일 보복할 기회만 노릴 터였다.
“그러나…… 부로 돌아가면 노부인 마님께선 반드시 그녀를 두둔하실 건데…….”
경칩이 작은 소리로 우물거렸다.
심 노부인은 이방을 가장 편애했다. 심귀는 심 노부인이 제 배로 낳은 자식인 데다 며느리 임완운이 금쪽같은 손자를 둘이나 낳아줬기 때문이다. 막내인 심원백은 말할 것 없고, 지방에 부임한 이방의 장자 심원도 연말이 되면 수도로 돌아올 것이었다. 그러니 심 노부인이 이방을 편애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임완운은 심 노부인의 비위를 맞춰 방향을 분간 못 하게 만드니, 무조건 임완운의 편을 들 것이었다.
“편애하라면 하라지. 본래부터 그런 사람이 날 위해 줄 거라 기대하지 않았어.”
심묘가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에 곡우는 코가 시큰해졌다.
“만일 정말 그렇게 된다면 저는 이 일을 소문낼 거라 협박하겠어요. 만약 아가씨께 무슨 나쁜 일이 생기면 저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 일을 천하에 퍼뜨릴 거예요.”
경칩의 표정도 엄숙했다.
“맞아요! 삼천의 적을 죽이려면 스스로 만 가지 방법의 손실을 본다고 했어요. 그들도 결코 잘 살지 못할걸요!”
심묘는 곡우와 경칩이 이리 박력 있을지 예상하지 못했다. 이에 심묘가 조금 놀랐으나 곧 미소 지었다.
전생에서도 곡우는 심묘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황궁의 옥 세공품을 훔쳤다는 죄명을 써 진국 태자에게 죽임을 당했다. 경칩 역시 심묘를 위해 미인계를 써 권신의 첩이 되었고 권신의 본처에게 맞아 죽었다. 두 사람은 심묘에게 충성심이 깊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전생의 심묘는 그녀들에게 무엇도 해주지 못했다. 심묘는 다시 돌아왔으니 이 두 사람을 보호하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괜찮아. 난 원래 소문낼 생각이 없었어. 둘째 숙모도 소문내지 않을 테고.”
“그 일을 어찌 계속 숨기겠어요? 종이로 불을 감쌀 수는 없을 거예요. 심청 아가씨가 출가하게 되면 당연히 발각될 거예요.”
곡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는 감춰도 평생을 감출 수는 없었다. 심청이 평생 시집가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녀가 출가하면 그녀가 순결하지 못한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어마어마한 사기를 칠 방법을 찾을 거야. 아마 그 사람을 찾아 도움을 청하겠지.”
“그 사람요? 그 사람이 누군가요?”
경칩이 캐물었다.
“당연히 심청 언니를 능욕한 나쁜 사람이지.”
심묘는 가볍게 웃었다.
“혹시 어젯밤에 정말 의외의 사고가 생긴 거라 여기는 건 아니겠지?”
경칩과 곡우의 몸이 굳었다. 그녀들 역시 사건의 전말을 대략 추측했으나 믿기엔 꺼림칙했다. 이렇게까지 심묘를 해치려 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악독해도 너무 악독했다. 그래서 일부러 더 심묘가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믿지 않았다. 이런 일을 벌인 게 설마 이방이라고는 더욱 여기지 않았다. 동원의 사람이니만큼 성정이 곱지 않단 건 진작 알았으나, 이런 정도까지일지 예상 못 했다. 원수에게도 쉽사리 하지 쓰지 못한 독수를 가족에게 뻗치다니.
“아가씨……. 정말로 둘째 마님이 명령한 일일까요?”
곡우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어제 일이 의외의 사고라면 그녀들은 심묘가 재난을 피해 천만다행이라고만 느꼈을 것이었다. 하지만 고의라면 이방은 자업자득이었다.
“하지만 아가씨, 어째서 둘째 마님이 그 사람을 찾아 도움을 청할 거라 하십니까? 그 사람…… 아무 사람이나 데려온 것이 아닙니까?”
심묘의 순결을 더럽힐 사람으로 아무나 데려왔는데 일이 잘못됐으니 임완운은 그 사람을 죽이지 못해 한스러울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할 것이라니 경칩은 혼란스러웠다.
“그 사람이 예친왕 전하니까.”
경칩과 곡우가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혼란이 한마디로 다 정리되었다. 만약 그 사람이 예친왕이면 모든 일이 분명해졌다.
이전 국화연회에서 예친왕은 심묘에게 흥미가 있는 듯했다. 그러나 예친왕은 평범한 여인이 얼굴만 봐도 길을 돌아갈 정도의 악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만약 예친왕이 비공식적으로 임완운과 거래를 했다면 임완운은 예친왕이 심묘를 능욕하려는 것을 알았고, 한술 더 떠 적극적으로 도왔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일이 뜻한 대로 풀리지 않았다. 만약 임완운이 이 일을 예친왕에게 알린다면 예친왕은 반드시 심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아가씨, 그럼 지금 주인어른께 편지를 써야지 않을까요?”
곡우와 경칩 모두 허둥댔다. 예친왕은 대항할 수 없는 존재였다. 잔혹한 성격은 둘째 치고라도 권세, 즉 황실이라는 방패가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심청 언니는 발단일 뿐이야. 내가 상대하려는 건 원래 예친왕이었어.”
심묘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심묘는 고개를 돌려 불단 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완유를 떠올렸다.
완유야, 네 삶은 너무 파란만장했구나. 심지어 꽃 같은 나이에 죽어버렸지. 공주라는 자리는 지푸라기만도 못했어. 어미가 널 위해 무엇도 해줄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일생을 바쳐 널 괴롭힌 것들에게 하나하나 갚아줄게.
* * *
정경성 밖.
어느 건물에서 고양이 자기 잔을 손으로 가지고 놀며 호기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 심가 여자가 예친왕과 원수가 된 건가? 사촌 언니를 이용해서 예친왕을 함정으로 끌어들이다니, 수완이 고명해. 그래도 여인으로서 잔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걸.”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우 안타까워하는 모습이었다.
“예친왕?”
그의 맞은편에 있는 사경행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눈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내가 볼 때 그녀가 상대하려는 건 예친왕이 아니야.”
“예친왕이 아니야? 그럼 누구인가?”
고양은 손장난을 잠시 멈췄다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자네…….”
사경행이 담담히 대답했다.
“예친왕을 선두로 해서 명제 황실을 역사에서 지운다. 어때?”
* * *
한바탕 온 가을비 때문에 날씨는 계속 쌀쌀했다. 여름의 더위는 하나도 남지 않았으나 하늘에 뜬 태양은 적막함을 드러냈다.
심부 안 동원은 여전히 바빴다. 연말에는 심 노부인의 생일이 있었다. 노부인은 사치하길 좋아해 매번 몇 달씩 앞당겨 축하 연회를 준비했다. 지출은 당연히 적지 않았다. 공동 자금은 모두 임완운이 관리했다. 임완운이 적지 않게 가로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부인의 생일축하 연회가 호화롭지 않은 적은 없었다.
각 부 부인과 아가씨들에게 서신을 보내는 일은 삼방 부인 진약추가 담당했다. 중년이지만 진약추는 여전히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했고 학자풍 기질을 고수하는 재녀였다. 풍만한 임완운도 못난 인물은 아니었지만 진약추의 용모가 더욱 아름다웠다.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부드러운 성격, 시 짓는 뛰어난 재주 때문에 삼방 심만은 그녀에게 푹 빠졌다. 혼인 후 여러 해, 진약추에게 아들 없이 딸 하나 심모만 있어도 심만은 심 노부인이 채워 넣은 통방(通房, 첩을 겸한 하녀) 둘 외엔 첩을 얻지 않을 만큼 그녀를 아꼈다.
대방, 이방, 삼방의 성격은 각기 달랐다. 첫째 아들 심신은 의지가 굳고 정직했다. 굳이 따지자면 너무 호방한 게 탈이라 세심함이 부족했고 단순했지만, 한결같이 의로웠다. 둘째 심귀는 아첨을 잘해 조정에서 순조롭게 지냈다. 재물을 탐내고 여색을 밝혀, 임완운 외에도 첩실이 몇 명 있었다. 그러나 임완운의 수완이 대단해 첩실이 많아도 서녀 하나만 있었다. 그렇기에 적출 자식의 지위를 위협하지 못했다. 셋째 심만은 비교적 재능이 있고 학문을 쌓았다. 심신이 노장군을 따라 무관의 길을 걸었다면 심귀와 심만은 문관의 길을 걸었다.
심만은 심귀보다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심만에게 결점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 역시 심귀만큼 권세를 중요하게 생각해 위로 올라가는 데 혈안이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자신의 상사도 얼마든지 밟고 오를 수 있었다.
진약추는 조심스레 초대장을 쓰고 있었다. 볕이 창문을 통과해 그녀의 몸 위로 비스듬히 비췄다. 그녀의 얼굴은 소녀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심만은 옷깃을 정리하다가 진약추를 보고 웃었다. 그는 그녀의 곁으로 걸어가 껴안았다. 진약추가 그를 나무랐다.
“왜 그러십니까? 글씨를 잘못 써서 초대장 하나를 공연히 낭비했습니다.”
“나도 봤소.”
심만이 그 초청장을 들어 보는 척하고 평론했다.
“글씨체가 아름다워 글을 쓴 주인과 같군. 잘 쓰지 못한 데가 어딨소?”
진약추는 곱게 얼굴을 붉혔다. 심만의 마음이 흔들렸다. 여러 해가 지나도, 그의 아내는 여전히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이에 그는 다른 여인을 바라볼 수 없었다.
진약추도 고명한 사람이었다. 그녀만이 남편의 마음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다른 이유가 아닌 그녀의 인내 덕이었다. 심만이 어떤 모습의 여인을 좋아하면 그녀는 그런 모습으로 변했다. 성격은 가장할 수 있었고, 의복 역시 바꿔 입을 수 있었다. 비위를 잘 맞춰서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자신만 보게 만들었다.
“둘째 형님이 오늘 돌아올 거예요.”
진약추가 심만 품속에 다정히 기댔다.
“심모가 사원의 음식을 잘 먹었을는지. 산길은 걷기 힘든데 마차가 흔들리진 않았을지 모르겠어요.”
심만이 실소했다.
“무슨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오? 둘째 형수가 심모를 굶기거나 동상에 걸리게 하지는 않았을 거요.”
진약추가 여전히 걱정을 내려놓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웃었다.
“늘 심모를 아이로 여기는데, 지금 심모는 몇 년만 지나면 출가할 것이오. 그때는 어찌하려고?”
“심모의 출가……. 당연히 모든 방면에서 완벽한 혼처를 찾아줄 거예요. 가문과 인품, 모두 훌륭한. 그러나 심묘처럼은…….”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심 노부인이 임완운과 진약추에게 암암리에 심묘를 예친왕에게 보내겠다고 말한 밤, 진약추는 돌아와 심만과 이를 이야기했다. 예친왕의 바람을 이뤄준다면 예친왕은 심가 이방, 삼방의 일을 도와줄 것이었다.
심만은 당연히 동의했다. 그는 권세에 심취했으나 권력과 명성 모두 심신만 못했다. 그는 심신을 여러 해 질투했고, 심묘에 대해 일말의 정도 느끼지 않았다. 예친왕이 심묘를 얻어 기뻐해 관직에서 그를 돌봐준다면 그야말로 의외의 수확이었다. 심묘가 그 후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었다.
“둘째 형수가 이 일을 적절히 처리했는지 모르겠군.”
심만이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진약추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임완운이 갑자기 와룡사에 향을 올리러 간다고 하는 순간, 어떤 일을 꾸미는지 대번에 눈치챘다. 진약추는 심만이 권세를 제일로 생각함을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남편을 따라 대방에게 냉담했으나 같은 여인으로서는 심묘에게 약간의 측은지심이 들었다. 그러나 일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면 이따위 하찮은 감상은 바로 잊힐 것이라고 자신을 다잡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진약추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둘째 형님은 줄곧 일을 잘 처리했으니, 이 일도 반드시 일말의 빈틈도 없을 겁니다.”
“그러길 바라오.”
심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여종인 시정이 달려왔다.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마님, 둘째 마님께서 세 분 아가씨와 돌아오셨습니다.”
시정의 표정을 보고 진약추는 일이 성사됐다고 여겨 안심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적녀들의 안부를 시정에게 물었다.
“세 아가씨는 괜찮고? 지쳤겠구나?”
“큰, 큰일입니다. 심청 아가씨가 실성하셨습니다.”
시정이 더듬거리며 말하자 진약추의 웃는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 * *
질서정연한 심부가 난장판이 되었다.
심청이 미쳤다.
임완운은 평소 집안일을 도맡은 주모의 풍채가 있어 늘 빙그레 웃는 얼굴이었지만, 탁월한 수완이 있음을 사람들 모두 알고 있었다. 여러 해 심부에 문제가 생기지 않자 살림꾼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그러나 오늘, 늘 침착하고 자애로운 얼굴이었던 임완운이 처음으로 하인들 앞에서 이성을 잃은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에 여종이 없었다면 어디서 뛰어나온 미친 여인이라 여겼을지도 몰랐다. 그녀 품 안의 심청 역시 미친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계속 날카롭게 소리치고 발버둥 쳤다.
이 소란에 심 노부인도 놀랐다. 무엇이 원인인지 몰라도 심청이 실성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심부는 이 일이 사람들 입에 오르지 않게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일단 심청이 미친 모습을 본 여종은 전부 팔려나갔다. 말로는 팔았다지만 실은 생매장을 한 것일지도 몰랐다. 심청 곁의 두 여종, 심모 곁의 두 여종, 계 유모는 전부 창고에 갇혔다. 아무 해도 입지 않은 것은 심묘의 사람들뿐이었다.
* * *
송경당.
심 노부인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사람을 잡아먹는 독사처럼 심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났다. 당했어야 할 사람은 이곳에 멀쩡히 서 있고, 이방의 심청이 대신 벼락을 맞았다. 몹시 분노한 심 노부인은 명치에 돌덩이를 올려둔 듯 답답했다.
진약추와 심만은 옆에 서 있고, 심모가 진약추 옆에 억울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 곁의 두 여종이 아무런 이유 없이 잡혀갔다. 이전 심묘의 말을 듣고, 황앵과 청란을 보호하려 했으나 허사였다.
임완운은 심 노부인의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심귀는 조정에 일이 있어 아직 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아직 자신의 적녀에게 일이 생긴 것을 몰랐다.
“어머님, 심청을 위해 책임지고 결정해주셔야 합니다.”
임완운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줄곧 잘난척하던 임완운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심만은 못내 당황스러웠으나 진약추는 놀라긴 했어도 기쁨과 위안이 더 컸다. 임완운은 언제나 집안 권력을 손에 쥐고 흔들었는데 지금 딸에게 사고가 생겨 강아지처럼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심묘야, 난 널 친자식처럼 여겼고 심청도 너에게 매번 양보했다. 너희는 같은 피가 흐르는 자매인데, 서로 돕기는커녕 이렇게 악랄하게 해칠 수 있느냐? 심청의 평생을 네가 망친 것이다. 알긴 아느냐? 정말로 마음이 흉악하구나!”
심모는 심청이 악인에게 능욕당한 일을 이미 진약추와 심만에게 말했다. 게다가 이곳은 하인을 모조리 몰아냈으니 임완운도 사람이 들을까 걱정하지 않았다. 심묘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뒤에서 분노에 찬 호통소리가 들렸다.
“불효녀구나. 자매를 해치다니, 독사 같구나. 감옥에 갇혀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
심묘는 냉소하고 몸을 돌려 큰 걸음으로 걸어오는 남자와 마주 보았다. 심청의 부친인 이방, 심귀였다.
심귀가 대청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관복 차림인 걸 보니 심청의 소식을 듣고 급히 온 것 같았다. 심귀를 본 임완운이 더욱 비통해하며 울었다.
“대인…… 심청이…….”
임완운과 심귀 사이의 감정은 그렇게 깊진 않았다. 깊었다면 심귀가 첩실을 여럿이나 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심귀는 임완운을 존중했는데, 임완운이 심부를 정연하게 관리하고 심귀 동료들의 부인과 친교를 잘 맺기 때문이었다. 심귀는 어진 아내 역할을 잘 해내는 임완운에게 상당히 만족했기에 남들 앞에서 임완운의 체면을 세워주곤 했다.
“심묘!”
심귀는 분노하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임완운이 이번 세 명의 적녀를 데리고 와룡사에 간 연유를 그도 알고 있었다. 세 명 모두 데려간 것은 오로지 사람들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고가 난 것은 그의 딸 심청이었다. 말을 전하러 온 남종이 몰래 그에게 말하길 이는 모두 심묘의 음모라 했다. 불가사의하다 느꼈으나 그는 무조건 분풀이를 해야 했다. 모든 죄는 대방에게 있다고 밀어붙여야 했다.
심귀가 크게 소리쳤다.
“넌 자매를 해쳤고 그 수법이 악랄하다. 오늘 큰형이 없으니 내가 대신 널 훈계하마! 가법으로 처벌합시다!”
가법으로 처벌이라니, 진약추와 심만이 서로 바라보았다. 진약추는 심가에 시집온 후 심부의 가법 처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심가 가법은 모두 잘못을 저지른 이낭에게 사용했으며, 지금까지 심부 자손에게는 쓴 적은 없었다.
심부는 장군 가문으로 가법은 당연히 가혹했다. 남종이 빠른 걸음으로 기다란 나무 상자를 가져왔다. 심모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상자가 열리자 사람들은 등골이 서늘해져 숨을 들이켰다.
모습을 드러낸 건 기다란 말채찍이었다. 여러 해 담금질한 것인지 검은빛에 광택이 났다. 게다가 성인 남자 팔목의 반 정도 되는 굵기로, 눈으로만 봐도 얼마나 힘 있고 튼튼한지 알 수 있었다. 한 대만 맞아도 실신할 수도 있고, 만약 매질이 호되다면 황천길로 갈지도 몰랐다.
“좋다.”
심 노부인은 거드름을 피우며 심귀의 말에 동의했다. 그녀는 아들이 돌아온 것을 보고, 더욱 의기양양해 몸을 더 곧게 세우고 앉았다. 그녀는 자신이 아끼는 이방이 사고를 당한 데 분개했다.
“심묘가 잘못을 했으니 넌 당연히 큰형을 대신해 그녀를 훈계할 수 있지. 우리 심가 규율은 줄곧 엄격했다. 잘못을 범하면 가법으로 처벌해야지. 심묘야, 넌 네 둘째 숙부의 마음이 착하고 너를 아끼니 다행이라 여겨라. 그렇지 않으면 이리 간단히 가법으로 처벌할까? 가문 장로에게 심판을 요청해 심가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심 노부인은 눈을 굴렸다. 순간 정말 심묘를 심가에서 쫓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샘솟았다. 노부인의 표정을 보고 진약추는 그녀가 미련하다고 몰래 욕했다. 심묘가 심부에서 쫓겨나면 심신도 함께 나가버릴 것이었다. 대방을 보지 않는 건 좋으나, 지금 많은 일을 대방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노부인의 생각이 이리 부족하니 과연 가녀 출신을 비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임완운도 노부인의 의중을 추측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심묘가 심부에서 쫓겨나길 바라지 않았다. 그리 간단히 심묘를 놓아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녀는 심묘를 심부에 남겨두어야 했다. 그래야 더 많은 방법으로 더 오랫동안 심묘에게 보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문에서 쫓아내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각자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심묘가 가볍게 탄식하는 게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심귀를 바라보았다.
심귀는 심묘의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에 놀라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평소 관직에서 언제나 잘난척하며 위세를 부렸다. 평범한 사람이 그에게 이리 주시당하면 기세에 놀라 먼저 힘이 풀릴 것이었다. 그러나 심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과 태도는 평온했고, 시선은 편안했다. 심귀로 하여금 심묘가 높은 사람이고 그가 하인 같다는 황당한 착각을 들게 할 정도였다.
이런 착각은 심묘의 한마디에 끊어졌다.
“둘째 숙부, 정말 다정하시군요. 심청 언니가 와병 중인데 그녀의 병세를 보러 가시지도 않고 제 아버지 대신 절 훈계하시려 하다니. 둘째 숙부께서 정말 절 아끼시나 봐요. 심청 언니보다 더요.”
그 자리 사람들은 모두 침묵했다. 진약추의 눈에 비웃음이 스쳤고, 심만은 눈살을 찌푸렸다. 심모는 입을 들썩였고, 심 노부인은 안색이 변했다. 임완운은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대방 심신은 심묘를 진심으로 아꼈다. 삼방 심만은 진약추를 아끼고 사랑해서 진약추가 낳은 심모도 보물처럼 사랑했다. 하지만 이방 심귀는 달랐다.
심귀는 재물을 탐내고 여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부친으로서의 책임감이 없었다. 두 아들에게도 그러했으니 딸인 심청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심귀에게 심청은 장래 부귀한 가문에 출가해 그의 권세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심청의 사고에 심귀가 분노한 이유도 딸의 처참한 처지에 마음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계획이 엉망이 되어 예친왕이 이 일을 알고 분노할까 두려웠고 장래 조정에서 자신의 출세를 도울 좋은 수단이 없어졌으니 속상했을 뿐이었다.
그는 늘 이익을 최우선으로 했다. 정말 딸을 아끼는 부친이라면 이 일을 안 후 먼저 돌아와 딸을 살폈을 것이다. 이렇게 돌아오자마자 조카를 먼저 단속할 정신이 있을 리 없었다. 그 자리에 모인 자들이 심묘의 말을 듣고 심청을 동정했다.
심귀의 얼굴에 곤란함이 스쳤다. 심묘의 말이 그의 마음을 꿰뚫고 있으니 난처했다. 임완운을 보니 그녀는 이미 고개를 돌려 그를 보지 않고 있었다. 심귀는 한마디로 부부의 마음을 멀어지게 한 심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이간질은 정확하고 흉악했다. 심청은 임완운의 소중한 딸이었지만 심귀에게는 이용 가능한 도구일 뿐이었다. 이를 이용해 공공의 적을 미워하던 부부가 서로에게 불만을 느끼게 하다니 심묘가 관직의 수완가처럼 노련한 셈이었다.
수려한 외모와 부드럽고 고분고분한 분위기를 가진 심묘에게 은은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감히 가까이 가서 볼 수 없을 정도였으나 심귀는 그에 짓눌리지 않으려고 되려 목소리를 드높였다.
“심묘, 넌 지금도 반성을 모르는구나. 오늘 널 잘 가르치지 않으면 난 앞으로 네 부친을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그가 손을 내밀어 채찍을 잡았다.
심모는 심귀를 주시했다. 심모는 심묘의 불행을 보며 기뻐했지만 긴장했다. 심귀가 심묘를 정말 때릴까, 심묘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버틸까 흥미진진했다.
“둘째 숙부, 절 어떻게 가르치시려구요? 채찍으로 때리시게요? 반 죽여서 마을로 보내시겠다는 건가요?”
심묘의 말에 심귀가 주춤거렸다. 심만도 멍해졌다. 심묘가 이리 드세게 나올 줄은 예상치 못한 것 같았다. 근래 심묘가 변했으나 사람들은 계속 그녀가 강한 척 연기하고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심부 사람 앞에서 감정을 폭발시켰다.
“이 불효녀,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노부인이 분노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설마 네 둘째 숙부가 널 모살할 작정이라는 게냐? 그야말로 천리를 무시하는구나!”
“그래, 심묘야, 넌 어찌 그렇게 말하느냐? 네가 심청을 해쳐놓고 왜 아직도 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남에게 뒤집어씌우느냐? 어디서 배워온 규율이야?”
진약추도 입을 열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불난 데 부채질했다. 진약추는 심묘와 이방이 싸워 쌍방이 모두 피해를 보면 심모가 심부에서 물 만난 고기 같이 도약할 거라고 기대했다. 심만의 권세는 심신만 못 하고 아들이 없어 심귀만 못 하니 이렇게 잔꾀를 부려서라도 이익을 챙겨야 했다.
임완운은 울며 심 노부인에게 무릎을 꿇고 땅에 조아렸다.
“보십시오. 심묘가 이렇게나 우리를 미워합니다. 심청을 해치고 반성도 하지 않고, 심지어 대인의 명성을 더럽히려 합니다. 이렇게 날뛰는 것은 분명 아주버니의 권세에 의지해 우리를 얕보는 겁니다. 만약 아주버니를 보고 배우지 않았다면 심묘 같은 어린 아가씨가 어디 이리 많은 걸 알겠습니까? 배후에 그녀에게 이리하라고 시킨 사람이 있을 겁니다. 저희와 아주버니는 서로 보살펴야 하는데, 아주버니 일가는 어떻게 이처럼 저희를 대하는지…….”
임완운은 울면서 하소연하며 이방을 약자라고 주장했다. 평소 강했던 그녀가 일부러 약한 척하면서 사람들의 동정심을 유발해 모두가 그녀의 말을 정말이라 믿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일부러 심신을 연루시켰다. 용에게 역린이 있는 것처럼 심신은 심묘의 역린이었다.
심묘는 송경당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가족이면서 검은색을 흰색이라 말하고 죽었는데 살아 있다고 말한다. 입만 열면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었다. 그 모습이 한 덩이 비계를 둘러싼 굶주린 이리 떼 같았다.
그러나 임완운처럼 말재주가 뛰어나면 끝이 좋지 않았다. 궁 안에서 말솜씨 좋은 많은 여인 중 오래 목숨을 부지한 경우는 몇 없었다. 대다수는 어화원 무성한 꽃나무 아래 묻혀 백골이 되었다.
“둘째 숙모, 자꾸 제가 심청 언니를 해쳤다고 하시네요. 둘째 숙모에게 몇 가지만 여쭐 테니 제 의혹을 풀어주실 수 있나요?”
임완운은 심묘의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와 마주했다. 자신에게 양심의 가책이 있을 리 없는데도 어딘가 켕겼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고 안심했다. 이곳은 완전히 그녀 세상이었다. 심묘가 전세를 역전할 가능성은 이번에야말로 없을 것이었다.
“물어보거라.”
그녀가 눈물을 닦았다.
“그날 둘째 숙모는 심청 언니 옆방에서 지냈고, 아주 가까운 위치였어요. 만일 무슨 일이 생겼다면 둘째 숙모는 어째서 듣지 못했나요?”
임완운이 당황했다.
“심청 언니가 반항했다면 반드시 소리를 냈을 거예요. 그날 심청 언니의 몸은 상처투성이였죠. 발버둥 치고 살려달라 소리를 질렀다면 둘째 숙모는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어째서 듣지 못했나요? 들었는데 너무 피곤해서 나가보지 못했나요?”
“너…….”
임완운은 입을 벌려 반박하려 했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필시 둘째 숙모가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 걸 테지요. 왜 그랬을까요? 심청 언니는 애당초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렇다면, 혹시 그 나쁜 사람과 원래 알고 지냈던 건 아닐까요?”
“헛소리!”
임완운은 더는 견딜 수 없어 날카롭게 소리쳐 심묘의 말을 끊었다. 심귀와 심만은 생각이 섬세하지 않아 깨닫지 못했지만, 진약추와 임완운은 심묘의 말뜻을 깨달았다. 진약추는 놀라 심묘를 바라보았으며, 임완운은 심묘가 두려웠다.
심묘의 말은 무서운 뜻을 담고 있었다. 그날 임완운과 심청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심청이 구조를 요청했으면 충분히 들릴 거리였다. 소리가 들렸는데도 임완운이 일부러 가서 보지 않았다? 임완운이 제 딸을 그렇게 방치할 리 없었다. 그 당시 방을 바꾸지 않았다면 그곳에 있었을 사람은 심묘였다. 설마 임완운이 일부러 그녀를 해치려고……? 심묘의 말은 임완운의 은밀한 계획을 만천하에 알리고 있었다.
이뿐 아니라 심묘는 다른 가능성도 제시했다. 심청이 남자와 몰래 정을 통한 게 아니라면 어째서 도와달라고 외치지 않았을까? 달리 말하면 심청이 남자와 사통했다는 죄명을 씌울 수 있단 이야기기도 했다. 이 사회는 자유분방한 듯해도 여성에게는 엄격했기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여자들과 그 부모들은 한 번의 실수도 생겨선 안 된다고 늘 노심초사했다. 쏟은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 일단 소문이 나면 돌이킬 수 없었다.
심묘가 살짝 웃었다.
“둘째 숙모, 전 이 일에 의문점이 아주 많다고 여기고 있어요. 둘째 숙모는 공정하고 사리를 잘 아시니, 절 관아 순무(巡撫, 지방장관)께 보내 신문을 받게 하시면 어떨까요. 전 제가 아는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대인께 말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나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안 된다!”
임완운과 심귀가 동시에 외쳤다.
임완운이 안 된다고 한 것은 당연히 곤란한 일이 생길까 걱정해서였다. 심묘의 말이 소문나면 통찰력 있는 사람은 말속의 내막을 알아볼 것이었다. 정경성 안에는 심부 외에도 대부호 집안이 많았다. 혹 소문이 난다면 그녀가 조카를 모해하려 한 진상을 알아챌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일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면 심청의 인생은 끝장이었다. 심청은 흰 천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을 것이었다. 임완운은 그게 두려웠다.
반면 심귀가 안 된다고 한 것은 임완운의 이유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이 일이 예친왕과 연루될까 두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심묘를 넘기려는 계획이 실패해 심묘와 심청이 바뀌었다. 예친왕이 진상을 알게 되면 대로할 것이었다. 다시 무슨 사건이 연루되어 예친왕을 성가시게 만들면 안 될 것이었다. 심귀는 자신의 관직이 곤란해질까 두려웠다. 아무튼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연유에서 심묘의 제안을 저지했다.
“그럼 어쩌실 건가요?”
심묘의 시선이 심귀 손에 있는 두껍고 긴 말채찍을 스쳤다. 그녀가 무심하게 물었다.
“여전히 가법으로 처벌하실 건가요?”
그 자리 사람들은 침묵했다. 심모는 알 수 없는 존재를 바라보듯 심묘를 보았다. 심모도 그녀가 심부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사람들의 놀람을 반영하듯 심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둘째 숙부께서 가법대로 처벌하시겠다면 방법이 없지요. 그러나 전 본디 강하고 고집 센 성격이라 그 나쁜 사람이 저에게 제 것이 아닌 죄명을 짊어지게 한다면, 부친이 돌아오셨을 때 반드시 관아에 알릴 겁니다.”
심묘는 오늘 심귀가 때린다면 심신이 돌아왔을 때 반드시 상소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 심신이 관아로 가게 꼬드겨 상부에 나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 달라고 요청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둘째 숙부, 가법으로 처리할지 말지 정하세요. 하시려면 빨리 해주시구요.”
심묘의 맑은 눈동자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말속에 있는 듯 없는 듯 비꼬는 기색이 있었다.
“사람이 이리 많으니 전 도망 못 갑니다.”
심묘는 송경당 사람들을 도적 떼로 만들어버렸다. 죄 없는 아가씨를 흠씬 두들기고자 채찍을 꺼내 들었으니 도적 떼와 다를 것도 없긴 했다.
여태껏 심귀는 조정에서 상대방을 보아가면서 어떠한 상황에도 적절히 대응했다. 한마디로 임기응변이 그를 아직 관직에 있게 해준 셈이었다. 그런데 핏덩이나 다름없는 조카에게 협박당하다니. 그는 끝내 대응할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고, 심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심묘의 칼끝은 더욱 맹렬하고 기세등등하게 자신을 노리고 있었으니 피할 방법이 없었다.
심만은 심귀가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게 의아했다. 심귀는 조정에서 정적을 물어뜯는 노련한 수완가다. 그런 그를 이 지경으로 몰아붙인 사람이 아직 어린 심묘라니. 그 부친 심신은 과연 넘을 수 없는 산인가 싶어 심만의 눈빛이 흐려졌다.
“너…….”
심귀의 피부가 붉어졌다. 오늘 그는 순간적인 분노에 행동을 취했다. 심묘가 변함없이 무조건 응낙하는 속이기 쉬울 조카라고 생각했다. 가법으로 처벌해도 달랜다면 심묘는 감히 이 일을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심묘는 크게 변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참지 않고 제 생각을 얘기하게 되었는지 몰랐다. 게다가 심묘는 그를 궁지로 몰아넣어 진퇴양난에 빠트렸다. 심신만 두렵지 않았어도 심묘를 요절냈을 텐데. 심귀는 심묘를 요절내지 못해 한이 맺혔다.
줄곧 앉아 침묵하던 심 노부인은 아들이 핍박을 당하며 이런 처지에 몰린 것을 보고 심묘를 노기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심귀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사람들은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심 노부인은 조정과 바깥일은 아무것도 모른다지만 집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암투를 꿰고 있고 술수에 능했다. 심귀 부부를 향한 심묘의 날카로운 칼날이 노부인의 심기를 건드렸다. 심묘의 행동이 총명하고 슬기로울수록 노부인은 더욱 그녀가 미웠다. 하지만 지금 심묘는 심청의 명성을 쥐고 있으며 심귀의 앞날도 위협할 수 있었다. 노부인은 경솔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심묘야, 네 숙부의 말은 도리가 있다. 네가 아직 어리다 해도 이 일은 분명 너로 인해 벌어졌다. 그러나 가법으로 처리할 필요까지는 없다. 큰아이가 너 대신 재난을 입었으니 넌 사당으로 가 무릎을 꿇고 대신 죄를 씻거라. 오늘부로 외출을 금한다. 매일 사당 안에서 무릎을 꿇고 불경을 베껴 쓰거라. 큰아이가 나아야만 너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심묘를 계속 가둬두겠다는 의미였다.
심모는 실망했다. 그녀는 심묘가 가법에 따라 채찍질을 당해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거나 가문에서 추방당하길 바랐다.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닌 외출 금지라니, 몇 개월이 지나 심신이 돌아오면 심묘의 금족령(禁足令, 외출을 금하는 명령)은 자연히 풀릴 터였다. 심신이 있는 집안은 지금과 같을 수가 없었다.
임완운도 불만스러우나 걸리는 게 많았고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 수도 없었다. 심 노부인의 결정이 불만스러웠지만 임시변통의 계책임을 알기에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참았다.
“오…….”
심묘가 작은 목소리를 길게 끌었다. 분명 아주 온화한 말투지만 무엇 때문인지 모르게 듣는 사람이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알겠습니다. 불조님 앞에서 언니 대신 ‘죄를 씻도록’ 하지요.”
심묘의 모든 말들은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 같아 임완운은 한층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녀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또 얼굴을 가리고 훌쩍거릴 수밖에 없었다.
“됐다, 됐어.”
심 노부인은 참을성이 없었다. 오늘 심묘를 곤경에 빠뜨리지 못해 가슴에 돌무더기를 또 더한 듯했다. 임완운이 훌쩍이는 모습을 보니 노부인은 더욱 답답해져 말했다.
“심귀야, 네 부인을 데리고 가거라. 송경당에서 온종일 울려고 하는 게냐! 너희 모두 나가거라! 심묘, 넌 지금 바로 사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오늘 밥도 먹지 말거라!”
사람들은 순서대로 물러났고, 심묘도 이 일에 대해 더 따지지 않았다. 심묘는 송경당을 나와 서원으로 갔다. 심묘는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든 말든 걸음만 재촉했다.
심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심묘가 성장했군.”
진약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게요. 심묘가 이번에 많이 놀라게 하네요.”
“어머니…… 심묘가 두려워요.”
심모가 작게 말했다.
와룡사에서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심청을 저런 꼴로 만든 심묘에게 심모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까지 아둔하다고 말하던 심묘에게 언제 이런 능력이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심모야, 무엇이 두려우냐?”
심만이 심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애로운 표정이지만 나온 말은 음산했다.
“어린아이에 불과해. 세상 물정을 모르니 조만간 대가를 치를 것이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