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10장 (4/71)

폐후의 귀환

3권

10장

심묘는 심 노부인이 명령한 대로 심부의 사당으로 들어갔다.

심가는 무장세가로 사당 안에 역대 선조를 모시고 있었다. 선조들은 말 등에서 심가를 위해 기초를 닦았고 가업을 번창시켰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재 심가는 겉으로는 선열(先烈)을 기리는 듯해도 속으로는 딴마음을 품어 쇠락이 멀지 않았다.

심 노장군 시절이 가장 흥성한 시기였다. 애석하게도 전쟁 중 심가 형제가 전사했고, 노장군만 살아 도망쳐 왔다. 노장군은 세 명의 아들을 낳았으나 한 명만이 무장의 길을 걸었다. 지금 심부는 표면상으로 이전의 영광을 계승한 것 같으나, 심신을 제외하면 영락없는 문신세가니 모순이었다.

“아가씨, 다리는 저리지 않으세요?”

곡우가 물었다. 경칩과 곡우도 사당으로 따라 들어왔다. 심묘는 임완운이 몰래 손쓸까 걱정해 와룡사에서 미리 경칩과 곡우을 쫓아냈고, 두 사람을 죽음에서 도망치게 했다. 지금은 임완운의 수완이 악랄하다고 해도 밝은 곳인 심묘 앞에서 손을 뻗치지 않을 터였다.

경칩이 분노하며 작은 창을 바라보았다.

“지금 비가 내려 바닥에 습기가 가득한데 이렇게 꿇어앉아 계시게 하다니. 병이 나시면 어찌하죠? 아무런 죄 없는 아가씨를 탓하다니. 그런 일과 아가씨가 무슨 상관이라고……. 적반하장이에요. 주인어른께서 돌아오시면 그들이 감히 그러나 보자구요.”

“말을 삼가도록 해. 남들이 들으면 아가씨만 손해 볼 거야.”

곡우가 나무랐다. 심묘는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경칩은 꿋꿋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오늘은 사람들의 예상을 초월한 셈이네요. 송경당엔 아가씨 편이 없었는데 아가씨가 큰 곤란을 입지 않았잖아요. 사당에 무릎을 꿇고 있는 건 좋지 않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단 가벼운 처벌이라 다행이에요.”

송경당에 들어갈 때 심묘는 여종을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심묘의 여종들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아가씨, 혼자서 그들을 설득하신 거지요?”

곡우가 탄복했다.

“그리 많은 사람과 마주하고 두려워하지 않으시니, 아가씨는 점점 더 주인어른의 품격을 닮아가시네요.”

심묘는 실소했다. 심부에서의 일은 황궁에 비하면 턱없이 조그만 일이었다. 당시 부수의가 태자를 바꿔 세울 때 군신은 모두 미 부인과 부성의 곁에 섰다. 부명은 거의 연금당해 있었고 그녀는 황후의 최고 예복인 조복을 입고 금란전(황제가 관료들을 접견하던 정전)에서 군신과 마주했다. 그녀는 그들과 얘기하며 말마다 피눈물을 쏟았다.

그녀는 분명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힘은 보잘것없었다.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아들은 마땅히 얻어야 할 자리도 지킬 수 없었다. 그녀 곁에는 한 사람도 서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후퇴할 수 없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심묘는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 더욱 격렬한 수완을 사용했다. 잔인함? 무정함? 거짓됨? 교활함? 그건 모두 상관없었다. 칼날을 원수에게 겨누고 상대를 쓰러뜨리기만 한다면 과정이 잔혹해도 죄업은 그녀 혼자 감당할 수 있었다.

심묘는 눈을 감았다. 선조의 위패 앞에서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선조님, 만일 영령이 여전히 계신다면 부탁이니 제게 가장 날카로운 화살과 가장 빠른 말을 하사해주십시오. 제가 원수를 죽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

기도하고 눈을 뜨니 경칩이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경칩은 품 안에서 간식 한 보따리를 꺼냈다.

“아가씨, 이리 오래 굶으시면 안 됩니다. 제가 간식을 가져왔으니 배를 채우시는 게 좋겠습니다.”

현생의 심묘가 순순히 노부인의 명령을 따를 리 없었다. 그녀가 종이봉투를 받아 열어보았다.

“이건…….”

“이건 제가 와룡사 아가씨 방 안에서 발견한 겁니다.”

경칩은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운 듯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당시 간식을 제게 주셨지요. 한 덩이 먹어본 후 그동안 이렇게 맛있는 간식을 먹은 적 없어서 먹기가 아쉬워 남겨두었습니다. 바깥에 먹을 것을 가지러 갈 시간이 없어서 이것만 남았습니다.”

심묘는 세밀하고 조그만 간식을 바라보았다. 사경행이 그녀와 밤에 이야기할 때 남겨둔 것이었다. 빗속에서 사람을 압박하던 소년의 출중한 얼굴이 떠올랐다.

“사경행…….”

심묘가 낮게 읊조렸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 * *

채운원.

의원이 막 떠났고 안정시키는 약을 먹은 심청은 잠들었다. 심청의 상처를 볼 때마다 임완운은 견딜 수 없었다. 의원은 그녀의 사람이니 당연히 말은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임완운에게 심청의 몸 상처가 너무 심하고 정신도 맑지 않아 얼마나 요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걱정스레 말했다. 심하게 놀랐기 때문에 이성도 잃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심청이 어떤 고통을 당했을지 임완운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날 밤 그녀는 옆방에 지냈다. 심지어 계 유모가 심청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들었다고 전했을 때 자신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딸이 죽어가는지도 모르고 다음 날을 기대하며 잠들다니. 임완운은 후회로 온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심귀가 침상 위 심청을 힐끔 보고, 몹시 골치 아프다는 듯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거기 서요!”

임완운이 그를 멈춰 세웠다.

“심청이 지금 이런 모습인데, 당신은 그 여우 같은 년 방에 가려는 거예요?”

심귀는 호색가로 집안에 첩실 몇 명을 뒀는데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 온순했다. 임완운은 이런 첩실을 온당히 손보았다. 심귀는 호색한이지만 임완운만이 그의 관직 생활이 순조롭도록 도와줄 수 있었다는 걸 알았기에 그는 임완운이 첩실을 손보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 평소 임완운은 첩실에게 가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심귀가 첩실을 노리개로 취급할 뿐임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이상했다.

“당신은 까닭 없이 나와 다투려 하지 마시오.”

심귀는 초조했다. 오늘 조카에게 말문이 막혔고, 예친왕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예친왕이 자신에게 화풀이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심귀는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 거기다 누워 있는 심청까지 보니 불에 기름을 끼얹은 듯했다. 심귀는 무엇 하나 마땅찮은 상황에 임완운까지 상대하자니 성가셔 죽을 지경이었다.

“내가 여기 남아도 무슨 소용이 있소? 내가 홀로 다음을 어찌할지 생각하게 두느니만 못하오.”

“생각!”

임완운은 전체적인 국면을 관망하는 성격임에도 이번만은 참지 못했다.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저 생각할 줄만 아시나요? 대체 당신에게 심청은 무엇입니까? 지금 심청이 이런 모습이 되었는데, 당신은 아버지로서 관심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잖습니까! 당신 마음속에 심청이라는 딸이 아예 없을까 걱정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잔인한 아비가 있답니까?”

임완운 곁의 여종 향란과 채국은 멍해졌다. 평소 임완운은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하고 침착했다. 심청이 와룡사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조차 전체적인 상황을 중시했다. 게다가 심귀에게 이렇게 심한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냉정하고 교활한 사람이 오늘은 몰상식한 부인처럼 심귀와 말다툼을 하니 믿을 수 없었다.

임완운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심귀의 모습을 보니 송경당에서 심묘가 한 말이 그녀의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심귀가 심청의 사고 소식을 듣고 제일 처음 한 행동은 심청의 부상을 살피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심묘를 훈계하려 했다. 부친이라면 절대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심귀에게 심청은 가치 있는 도구에 불과했기에 이제 가치가 없어졌으니 들여다볼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심묘의 이간질은 좀 전 송경당에서는 효과가 미미했으나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점차 퍼져 나가고 있었다.

“몰상식한 여편네 같으니!”

심귀는 아첨을 잘해 관직에서 손가락질을 당하거나 욕을 먹은 적이 없었다. 그는 분노했으나 임완운과 감정싸움을 할 필요 없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나보고 좋은 부친이 아니라는데, 당신은 어미 노릇을 잘했소? 심청은 당신이 와룡사로 데려갔으니 마땅히 잘 보살폈어야 했소. 그 아이 곁에 있으면서 당신의 눈 아래서 사고가 났소. 그날 밤 당신은 그 애 옆방에서 지내지 않았소? 만일 진심으로 그 애를 아꼈다면, 그리 가까운 거리에서 어째서 아무것도 모른 거요?”

심귀의 냉소에 임완운은 곧 멍해졌다. 심귀가 꼬집은 일은 그녀가 가장 후회하고 증오하는 일이었다. 북쪽 누각에서 심청은 분명 어미에게 살려달라 울부짖었을 것이다. 구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자신은 되려 그 비명소리를 직접 듣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런 어미가 세상에 있단 말인가. 심귀의 말이 그녀의 심장을 칼로 찌르고 그 위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아서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심귀는 임완운이 말 없는 것을 보고 차갑게 흥 소리 낸 후 몸을 돌려 소매를 털고 떠났다. 임완운은 잠깐 멍하니 서 있다가 두 다리가 풀려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작게 흐느껴 울었다.

향란과 채국은 두렵고 놀랐다. 지금까지 주인의 이런 모습을 본 적 없었다. 하룻밤 사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임완운에게서 이전의 득의만만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두 여종은 임완운을 위로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알 수 없을 때, 임완운이 눈을 비비고 겨우 일어났다.

“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 심원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심원, 이방의 장자로 임완운의 큰아들이었다. 지금 류주에 부임해 있고 임기를 채우면 연말 수도로 돌아와 관직을 받을 것이었다. 삼방에게 심모가 가장 자랑할 만하다면 이방에게는 심원이 있었다. 심원백은 나이가 어리고 심청은 자질이 떨어지지만, 심원은 좋은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관직 시험에 합격해서 일도 잘하니 심귀도 이 아들 앞에서는 상냥했다.

“아비를 믿을 수 없다면 오라버니가 있지.”

임완운은 침상 위 심청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심원은 여동생을 가장 아낀다. 심묘, 이 천한 것. 반드시 평생 후회하게 해줄 것이다!”

향란이 얼른 종이와 붓을 가져왔다. 임완운은 호흡을 가다듬고 채국에게 말했다.

“여종은 아직 있느냐?”

“여종 넷과 계 유모 모두 땔감 창고에 있습니다. 마님, 벙어리 약을 주실 것인지 아니면 직접…….”

임완운이 묻는 이들은 그때 심청이 사고 난 것을 본 여종들이었다. 심청의 여종 염매와 수벽, 심모의 여종 청란과 황앵, 그리고 계 유모였다.

“심모의 여종은 벙어리 약을 먹여 추수원으로 보내. 어찌 처리할지는 진약추가 알아서 하게 하라. 심청의 두 여종은…….”

임완운이 잔인하게 말했다.

“구등 기원에 팔아라. 그냥 죽이면 그 둘에게 너무 좋은 처사가 아니겠느냐. 주인을 보호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채국은 몸서리쳤다. 기원과 청루는 다르다. 청루의 여자는 기예를 팔고 몸은 팔지 말지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원의 여자는 전부 몸으로 장사했다. 게다가 구등 기원은 모든 기원 중 가장 등급이 낮았다.

그곳에서 접대하는 손님은 아주 질 낮은 거친 사람이었다. 고된 노동력으로 벌어 먹고살아 그들은 여자를 아낄 줄 모르며 아주 거칠게 대했다. 여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손님을 받는 것을 멈출 수 없으며, 은자도 모두 기원의 마마(妈妈, 기생어미)가 가져갔다. 만약 성병에 걸리면 약도 먹지 못하고 쫓겨나 산채로 얼어 죽거나 굶어 죽거나 개에 물어뜯겨 죽었다.

비참한 객사가 아주 평범한 일로 여겨지는 곳이니 일반적으로 구등 기원에 팔려가는 하인은 용서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었거나 주인에게 원한을 산 경우였다. 염매와 수벽은 어릴 때부터 심청의 곁을 따랐다. 두드러지는 공로는 없어도 여러 해 고생했건만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에 등 떠밀리게 된 것이었다.

“그럼 계 유모는…….”

채국이 탐색하듯 물었다. 계 유모는 일찍이 그녀들에게 투항해 채운원의 사람인 셈이었다.

“계 유모…….”

임완운은 고개를 숙여 냉소했다.

“그날 밤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겠다. 계 유모를 만나봐야겠다. 그녀가 처음과 끝을 모두 아는 사람이니.”

* * *

오랫동안 방치된 땔감 창고.

칠흑같이 어두운 이곳에 썩은 냄새가 가득했다. 며칠 연거푸 비가 내려 바닥에는 이끼가 생겼다.

이 땔감 창고에는 무수한 사람이 갇혔었다. 그들은 모두 심부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으로 주인도 있고 하인도 있었다. 신분은 달랐으나 결말은 대동소이했다. 이곳에 한동안 갇혔다가 쥐 죽은 듯 심부에서 사라졌다. 세상에 나타난 적조차 없는 듯이.

땔감 창고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누군가 힘써 발버둥 치고 발로 무언가 차는 듯했다. 드문드문 울음 섞인 말소리도 새어 나왔다.

등롱이 땔감 창고를 비췄다. 어스레한 등불 아래 땔감 창고의 음침함이 더욱 드러냈다. 키가 크고 나이 많은 여자 하인 두 명이 각자 여종의 목을 잡고 병에 담긴 약물을 입안으로 붓고 있었다.

두 여종은 발버둥을 멈추지 않았으나 작고 여윈 몸은 거센 손아귀에 붙들린 한 마리 닭이나 다름없었다. 턱이 붙잡혔으니 강제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두 여종은 마침내 발버둥을 멈췄다. 그들은 목을 감싸고 고통스러워했다.

“끌고 나가라.”

늙은 여인이 명령했고, 두 남종이 들어와 두 여종을 끌고 나갔다.

“저 둘은…….”

그들이 끌려나가는 것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본 여인은 다른 쪽 두 여종도 가리켰다.

“끌고 나가라. 그러나 마님이 그녀들을 잘 보살피라고 특별히 통지하셨다. 어차피 팔아넘길 것이니 너희 마음대로 해도 좋다.”

두 남종은 말을 듣고 군침을 흘렸다. 두 여종의 얼굴엔 절망만 남았다. 두 여인은 거의 수습이 끝난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 했다.

“마, 마님께서 저를 어찌할지 말씀 없었소? 저는 어찌 됩니까?”

어두운 구석에서 갑자기 사람 그림자가 나타나 여인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계 유모였다. 여인은 계 유모의 손을 자신의 다리 위에서 떼어내고 괴상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조급해 마시게. 마님은 유모를 아끼시니 반드시 유모를 위해 완벽한 계획을 짜실걸세. 기다리게나.”

그들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났다. 땔감 창고는 또다시 깊은 어둠에 잠겼고, 계 유모는 구석에서 웅크린 채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죽길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 * *

음침한 땔감 창고. 어둠 속 때때로 쥐가 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썩은 땔감을 갉아먹는 소리가 인기척 없는 밤중에 들려오니 오싹했다.

계 유모는 홀로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일개 유모였지만, 대방이 직접 고른 사람인 데다 이방과 삼방이 그녀에게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여러 해 동안 심부에서 편안히 지냈다. 어떤 때에는 그녀의 삶이 부유한 평민들보다 더 안락하기도 했다. 고통스러운 나날에 익숙하지 않건만 여종처럼 땔감 창고에 갇히는 신세를 피할 수 없었다.

얇은 옷으로는 밤의 찬 기운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몸보다 더 추운 것은 마음이었다. 계 유모는 두려웠다. 심모의 여종들은 벙어리 약을 먹었고, 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심청의 여종들은 죽지 못해 사는 구등 기원에 팔려갔으니 임완운의 악랄한 수완에 계 유모는 벌벌 떨었다.

계 유모는 임완운이 쉽게 그녀를 용서해줄 거라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심청의 추악한 일을 목격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심묘가 해를 입어야 할 일을 심청이 입었으니, 모든 일이 순조롭다고 보고한 그녀에게 살길이 보이지 않음이 당연했다. 그러나 계 유모는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갑자기 바깥에서 신발 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밤중이라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계 유모의 몸이 굳었다. 계 유모는 겁먹은 채 어둠 속에서 문을 주시했다. 임완운이 보낸 사람일지 아니면 그녀의 살길을 터줄 사람일지, 계 유모에게 문 뒤의 사람은 희망이자 절망이었다.

발걸음은 서두르지도 여유를 부리지도 않았다. 발소리가 사람의 명을 짧게 만드는 저주의 부적처럼 계 유모의 심장을 쳤다. 그녀의 비대한 몸은 질퍽하게 늘어졌다. 계속 손이 떨리고 등허리는 축축해졌다.

삐꺽, 문이 천천히 열렸다.

입구에 흰색 피풍의를 걸친 사람이 서 있었는데 손에 푸른 등롱을 들고 있었다. 도깨비불 같은 푸른빛은 일순 들고 있는 이가 사람을 집어삼키는 악귀인지 착각하게 할 만큼 기묘한 색채였다. 계 유모는 깜짝 놀라 휘청였으나 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들어와 천천히 문을 닫았다. 피풍의를 벗고 수려하고 보드라운 얼굴을 드러내니 바로 심묘였다.

심묘의 몸매는 호리호리했다. 매끄럽고 온화한 얼굴은 푸른 등불 때문에 기이해 보였다. 불빛에 비친 구름처럼 옅고 바람처럼 가벼운 용모가 오히려 지옥에서 돌아온 망자 같은 느낌을 풍겼다. 계 유모는 잠시 멍해졌다가 기뻐 소리쳤다.

“아가씨!”

심묘가 등롱을 바닥에 놓았다. 심묘는 서두르지도 여유를 부리지도 않고 계 유모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쪼그리고 앉은 후, 살짝 웃었다.

“유모, 괜찮은가?”

“아가씨, 오셨군요! 저는 아가씨께서 반드시 저를 구하러 오실 걸 알았습니다! 아가씨는 마음이 착하셔서 저를 죽게 내버려 두실 리 없지요!”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계 유모는 심묘의 치맛자락을 꼭 붙잡았다. 눈물이 마구 흘렀다. 정말 대단히 억울한 일을 겪은 듯했다. 그녀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 심묘인 것마냥. 심묘는 치맛자락을 꽉 쥔 계 유모의 손을 힐끗 쳐다보고 살짝 웃었다.

“계 유모는 이곳에서 고생한 것 같군.”

계 유모는 나비처럼 가벼운 말소리에 세심히 심묘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심묘의 웃는 얼굴은 온화했고 태도도 평온했다. 그러나 계 유모는 자신이 여러 해 보살핀 심묘가 무슨 생각인지 하나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저는 평생 아가씨를 섬겼고, 지금도 아가씨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와룡사 그날은 저도 몰랐습니다. 아가씨, 저는 결백합니다.”

“계 유모는 내게 희망을 거나 보네.”

심묘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담았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유모를 구하지? 부에서 누가 내 말을 들어주기는 해? 동원 사람의 명령인데 내가 무슨 능력으로 유모를 지키겠어?”

“아닙니다! 아가씨, 반드시 방법이 있을 겁니다.”

계 유모는 조급해했다. 그녀도 심묘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알았다. 이방과 삼방은 대방에게 표면적으로 좋은 척 대하지만, 그렇다고 심묘 혼자서 판도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계 유모가 지금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심묘였다. 결단코 놓을 수 없었다.

“아가씨, 노부인 마님께 부탁하시면……. 확실히 소용없겠네요. 그러면 아가씨, 주인어른께 편지를 써서 주인어른의 답변을 부로 보내게 하시지요. 주인어른의 말을 듣지 않을 방법은 없을 겁니다.”

더할 나위 없는 방법을 찾았다 느낀 듯 계 유모의 눈빛이 빛났다. 희망이 충만한 눈으로 심묘를 올려다보았다.

심묘가 작게 웃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계 유모를 보며 느리게 말했다.

“아버지의 말은 확실히 유모를 구해줄 수 있지. 그러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계 유모가 다시 한번 멍해졌다.

“무슨 이유로 내가 유모를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동분서주해야 하지?”

그녀의 목소리는 눈앞 사람이 안중에 없는 듯 희미하게 조롱을 품고 있었다.

계 유모는 허둥댔다. 심묘가 이런 말을 할 거라 예상치 못했다. 그녀는 심묘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근래 심묘가 그녀에게 냉담했으나 어린아이의 변덕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계 유모는 심묘의 마음이 여린 것을 매우 잘 알았다. 그리고 그날 와룡사에서 그녀가 자신에게 깊은 정을 표했으니 당연히 자신을 도와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선 또 거리를 두는지 알 수 없었다.

계 유모는 곡우와 경칩이 심묘에게 무슨 말을 한 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녀들은 심묘의 측근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니 이때를 틈타 자신에게 해를 가하려 했을 터였다. 심묘 앞에서 뭔가 이야기한 게 분명했다. 계 유모가 허둥거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아가씨, 저는 아가씨와 여러 해 함께해 왔습니다. 아가씨가 태어난 후 저는 아가씨의 성장을 지켜보았죠. 여러 해 동안 주인어른과 마님께서 집안에 안 계셔서 저와 아가씨가 서로 굳게 의지하며 살아…….”

그녀의 목이 메었다. 몹시 마음이 아픈 듯했다.

“아가씨께서 지난번에 말씀하셨지요. 아가씨께서 밤에 열이 났을 때 제가 빗길을 무릅쓰고 아가씨를 위해 의원을 찾다가…… 미끄러져 병이 난…….”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절절히 이전의 정을 상기시켰다. 계 유모는 말하면서 계속 심묘를 곁눈질했다. 심신 부부를 비롯해 대방 사람들은 모두 온정을 매우 중시했다. 은혜를 알고 보답하는 것을 아주 중시하는 무장세가다웠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지금 계 유모는 은혜를 가지고 보답을 부탁했고, 심묘의 마음이 움직이길 바랐다.

그러나 심묘는 고개를 숙인 채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저 재미난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흥미로운 표정으로 작게 속삭였다.

“계 유모가 예전에는 확실히 나에게 잘해줬지. 그럼 심가 대방과 나는 계 유모에게 또 어떻게 했지?”

계 유모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주인어른은 제게 아주 잘 해주셨고, 아가씨도 잘해주셨습니다. 안으로 밖으로 제 안면을 세워주고, 월은(月銀, 월급)도 매우 후했습니다. 저를 대하실 때도 책망하거나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심묘가 그녀의 말을 이어받았다.

“그뿐 아니지. 유모의 아들, 손자도 도울 수 있는 한 모두 도왔어. 온 서원에서 유모를 가장 중시했지. 난 유모를 유모로 여기지 않고 친척처럼 여겼어. 유모를 신임했고 친하게 지냈고, 대체로 유모를 우선시했지. 그렇지 않은가?”

“맞습니다.”

확실히 어릴 적 심묘는 속이기 쉬웠다. 그녀는 심묘를 속여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뭐라고 얘기하든 심묘는 그대로 믿었다. 주인어른 내외가 없는 서원에서 사실상 주인 노릇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난 자네에게 그리 잘해줬는데 어째서 자넨 날 배반한 거지?”

잠시 회상에 잠겨 있던 계 유모는 혼비백산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다급히 외쳤다.

“무슨 그런!”

“유모, 그런 의아한 표정을 지을 것 없네. 난 유모에게 배반하려는 마음이 있는 걸 알고 유모보다 일천 배, 아니 일만 배는 더 놀랐으니까.”

심묘가 웃었다.

“아가씨, 누군가 이간질한 겁니다. 저는 지금껏 아가씨를 배신한 적 없습니다. 제가 어찌 아가씨를 배신할 수 있습니까? 아가씨, 반드시,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계 유모는 빠르게 억울함을 토로하며 전력으로 충성심을 증명하려 했다.

“됐네.”

심묘는 지겹다는 듯 손을 휘둘렀다. 그녀의 얼굴 위로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분노와 혐오가 드러났다.

“와룡사에서 젯밥과 훈향에 최음제를 넣었지. 둘째 숙모의 수완은 줄곧 고명했어. 계 유모를 불러 시키다니, 정말로 유모를 신임하나 보군.”

계 유모는 한마디 해명도 꺼내지 못했다. 그녀는 멍하니 심묘를 바라보았다. 두려움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유모는 글자를 모르니 세상에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니 참새가 뒤에서 기다리고 있더라는 말이 있는 걸 모를 거야. 유모는 두 명의 주인을 섬겼지. 지금 유모의 안중에 둘째 숙모의 수단이 고명할지, 아니면 내가 한 수 위일지 듣고 싶은데?”

“설마…….”

계 유모는 힘들게 내뱉었다.

“맞네. 바로 나지.”

심묘는 목소리를 매우 낮췄다. 계 유모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리였다.

“원래 유린당했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어째서 심청 언니로 바뀌었을까? 당연히 우연은 아니지. 모두 내가 한 거야.”

추측했던 일이 모두 다 들어맞자 계 유모는 심장이 떨어지는 듯했다. 심묘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빙긋 웃으며 계 유모를 보고 있었다.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는 맹수의 눈동자처럼 빛났다. 분명 귀엽고 보드라운 얼굴인데, 이렇게 두렵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계 유모 역시 임완운만큼이나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민했다. 땔감 창고에 갇혔으니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처음엔 심묘가 움직이지 않았을까 추측했으나 황당한 생각이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심묘의 성장을 지켜보았던 계 유모는 누구보다 심묘를 잘 알았다. 심묘는 성격이 아둔하고 마음이 여려 이런 무서운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심묘가 그녀 앞에서 모두 자신의 짓이었음을 인정했다. 조금의 숨김도 없이.

“아가씨…….”

계 유모는 운을 뗐으나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심묘가 이미 모든 일을 알고 있다면 자신을 구해줄 리가 없었다.

“둘째 숙모의 수완은 본래 흉악했네. 유모를 중시한다지만 이 일이 발생했으니, 유모의 밝은 미래도 사라졌군. 정말 애석해.”

애석함을 말하는 심묘의 말은 마치 정말로 계 유모의 처지를 동정하는 것 같았다. 심묘의 말이 계 유모의 꺼져가던 희망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계속해서 심묘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아가씨, 저를 한 번만 구해주십시오. 고의로 아가씨를 해친 것은 아닙니다. 둘째 마님이 저의 아들과 손자를 인질로 삼았습니다. 저도 협박당한 겁니다. 아가씨, 주인어른과 마님의 얼굴을 봐서, 제가 아가씨를 십여 년 시중든 걸 감안해서 저를 구해주십시오!”

그녀는 머리를 바닥에 부딪쳐 쿵쿵 소리를 냈다. 이전의 심묘였다면 계 유모가 머리를 찍기는커녕 허리를 굽히지도 않게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심묘는 명제 심 황후였다.

“사실 오늘 밤 내가 온 건 계 유모의 은정에 보답하기 위해서네.”

계 유모는 소리를 높이며 더욱 머리를 숙였다.

“저는 아가씨께서 선량한 분인 걸 진작 알았습니다. 이렇게 정과 의리를 중시하시니, 장래 보살께서 보우하사 아가씨의 평생은 순조롭고, 아가씨를 해치려는 사람들은 전부 곱게 죽지 못할 겁니다!”

심묘는 기회주의자의 표본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계 유모의 행태에 실소했다.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녀도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이번만 아니라, 그날 와룡사에서 계 유모는 나와 마음을 터놓지 않았나? 그때부터 난 이 세상에서 계 유모가 나에게 진심으로 잘한다는 걸 알았네.”

계 유모는 어쩔 줄 몰랐다. 방금 그녀를 원망하더니 지금은 또 어째서 이렇게 위로하는 건지 심묘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희망에 찬 그녀는 심묘의 말에 혼신의 힘을 다해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가씨의 편입니다. 아가씨만이 제 주인입니다. 저는 반드시 아가씨께 평생 충성할 것입니다!”

창문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깨지는 듯했다. 계 유모는 크게 놀라 바깥을 바라봤지만 칠흑같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심묘를 바라보았고, 최대한 슬프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지금 저를 데리고 나가주실 수 있나요? 이곳은 너무 어둡고 습합니다. 제 몸이 얼마 못 버틸까 걱정입니다.”

“걱정하지 말게. 오래 버틸 필요 없네. 어쨌든 유모는 곧 죽을 거니까.”

“뭐라구요?”

계 유모는 고개를 들어 심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는 아가씨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방금 바깥의 사람, 둘째 숙모가 보낸 사람이야. 아마도 내가 계 유모를 보러온 것을 발견했겠지.”

심묘가 웃으며 말했다.

“이러니 계 유모에게 무슨 살길이 있겠는가?”

“저, 저는 이해가…….”

계 유모는 엉겁결에 몸을 세웠다. 아까부터 심묘의 말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해 극도로 불안했다.

“모르겠다고?”

심묘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잠시 생각했다.

“계 유모가 방금 큰 소리로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는가?”

계 유모는 안색이 변해 창백해졌다. 그녀는 방금 큰 소리로 외쳤었다. “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가씨의 편입니다. 아가씨만이 제 주인입니다.”라고.

물론 이 말은 심묘를 속이기 위한 것일 뿐, 단지 구출해주길 희망해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만약 임완운의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애초에 이유 없이 심청과 심묘가 위치가 바뀌어 이 사달이 난 것이었다. 이에 임완운은 심묘가 손을 썼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아둔한 심묘에게 그 정도의 선견지명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워 줄곧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계 유모가 그때 심묘에게 계획을 알려서 심청에게 계략을 쓰자 공모했다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지만 임완운의 생각 속에서는 진실이 되어버릴 터였다.

계 유모가 두려움을 수습할 틈도 주지 않고 심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유모에게 보답하려고 이렇게 큰 예를 갖췄네. 유모, 괜찮은 것 같은가?”

계 유모는 말을 잃고 심묘를 응시했다. 그녀는 그제야 그녀가 심묘에게 끌려다녔음을 깨달았다. 심묘가 뭐라고 하든 그녀는 덥석 믿었다. 그러나 그녀와 심묘 사이는 이미 진작에 끝나 있었다. 그렇지만 계 유모는 여전히 심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태도를 몇 번씩 바꿔 말하니 심묘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내가 온 목적은 하나야. 바로 계 유모를 보내주는 거지.”

계 유모의 의혹을 추측한 듯 심묘가 웃으며 말했다. 이에 계 유모는 몸을 떨었다. 그녀는 다시금 울면서 해명하고 싶었으나 찍소리도 꺼내지 못했다. 포대기 속 아기가 모르는 사이에 똑똑한 소녀가 되었다. 이 또 다른 면을 지금까지 발견한 사람이 없었고 그건 계 유모도 마찬가지였다. 계 유모는 큰 소리로 욕하고 싶었으나 맹수 같은 눈동자 앞에서 그저 떨 수밖에 없었다.

“우리 심가는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은 키우지 않네. 유모가 황천길로 가서 악귀가 되어 날 찾아 복수해도 두렵지 않지. 그저 유모와 다시 한번 싸우면 되는 것을.”

그녀의 말은 웃는 얼굴보다 더욱 차가웠다.

“내가 자네를 저버린 게 아닐세, 유모가 날 저버린 거야. 유모의 손자와 아들은 불쌍하게 됐군. 둘째 숙모는 극단적이라, 유모는 곧 그들과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겠어.”

“안 돼…….”

계 유모는 몸을 떨었다. 그녀는 눈물 콧물을 흘렸다. 울음은 유달리 가련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그들을 구해주세요…….”

“주인을 배반한 하인을 위해 내 시간과 기력을 낭비할 가치가 없다고 일찍이 말했네. 수수방관이 나의 가장 큰 자비야.”

심묘의 말은 잔인하고 냉혹했다. 곧이어 그녀는 느긋하게 몸을 기울여 계 유모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린 시절 계 유모와 다정히 귓속말하듯 했으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십여 년간 주인과 하인으로 지낸 정분을 봐서 계 유모를 한 번 보러온 걸세. 계 유모, 잘 가시게.”

심묘의 백옥처럼 윤기 있는 얼굴 위로 매력적인 웃음이 피어났다. 귀엽고 수려한 작은 얼굴이 무섭도록 잔인했다. 계 유모가 무어라 말하려 할 때, 심묘가 일어나 다시 피풍의를 걸쳤다. 어둠 속 피풍의 자락의 창백한 빛이 관 위에 던져지는 백색의 은자 같았다. 푸른 등롱은 밖을 향해 걸어갔다. 문이 닫히자 땔감 창고는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계 유모는 절망 속에 빠졌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로와 상강이 심묘가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심묘를 뒤따라 몸을 돌려 떠났다.

그녀들이 떠난 후, 창고 뒤편에서 한 여자가 나와 심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곧 고개를 돌려 꽉 닫힌 땔감 창고 문을 바라보며 분노와 원망의 표정을 드러냈다.

* * *

연일 가을비가 내렸고, 마침내 하늘이 활짝 개었다.

심부는 이전의 평온을 되찾은 듯했으나 동원에서 수시로 풍기는 약 냄새가 심부의 불행한 일을 일깨웠다.

심청은 이성을 점점 찾아가는 듯했다. 적어도 이전처럼 사람을 보며 발광하지는 않았다. 임완운은 그녀가 다시 자극을 받을까 걱정해 채운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고, 혹여나 자진할까 노심초사하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심부의 집안일은 전부 진약추가 처리했다.

임완운이 채운원에서 나오는 일이 극히 적었기에 심묘는 오랜만에 며칠이나마 편안하게 보냈다. 그러나 그동안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었다. 계 유모는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 죄명은 암암리에 나쁜 사람과 결탁해 심청의 모해를 의도했단 것이었다.

심부에는 심청의 일을 심묘 앞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이 다 정리되어서가 아니라 심묘가 송경당에서 한 말 때문이었다. 심묘는 감히 건드릴 수 없으니, 심묘 곁의 계 유모에게 손을 쓴 셈이었다. 계 유모는 가법에 따라 곤장에 맞아 죽었다. 일반적으로 하인이 잘못을 저질러 죽임을 당할 때 죄가 유난히 크면 곤장형에 처했고, 평범할 때는 독약을 먹였다. 이러나저러나 노비 계약서가 주인의 손에 있으니, 하인이 죽든 살든 마음에 두는 사람은 없었다.

계 유모의 죽음은 사지가 산 채로 뜯긴 듯 무척이나 처참했다. 전신의 뼈는 하나도 성한 곳이 없고 일곱 구멍에서 모두 피가 흘러 보기에 매우 끔찍했다. 시체를 운반한 남종도 감히 시체 보기를 꺼렸는데, 임완운은 일부러 심묘에게 그 시체를 거두라 했다.

임완운이 보낸 여종 향란이 말했다.

“마님께서 말씀하시길 계 유모는 죄를 범해 처벌받았으나 어쨌든 심묘 아가씨의 하인입니다. 그래서 수습도 아가씨께서 하셔야 합니다. 계 유모의 시신은 서원으로 옮겼으니 빨리 가서 보십시오.”

모든 사람은 심묘가 놀라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보고 싶은 것 같았다. 심부의 하인들은 계 유모가 심묘의 심복임을 알고 있었다. 계 유모가 비참한 죽음을 맞았으니 임완운은 심묘가 자기 때문에 계 유모가 죽었다고 자책하리라고 여겼다. 굳이 향란을 보낸 것도 심묘가 비통해함을 보고 듣고 돌아와 보고할 것을 기대해서였다.

심묘는 온 서원 하인들 앞에서 계 유모의 시체 곁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처참한 모습의 시체를 바라볼 뿐, 미간도 찡그리지 않았다. 향란이 심묘의 평온함을 의아해할 때, 심묘가 차갑게 말했다.

“계 유모는 이전에 서원에서 세력을 믿고 제멋대로 날뛰어 윗사람을 기만하고 아랫사람을 속였다. 하인이 주인을 깔보다니, 오만방자하다. 이런 하인은 실수가 없어도 서원은 거두지 않는다. 오늘 너희는 분명히 보거라. 계 유모의 이런 행동을 배운다면 장래 전부 이런 결말을 맞을 것이다!”

서원 안 대다수가 이방, 삼방이 배정한 첩자였다. 심묘의 최측근인 계 유모의 죽음조차 심묘가 이렇게 냉담하게 말하니, 모두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솟구쳤다.

향란은 상황을 보고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심묘가 놀라는 것을 보려고 했는데 심묘는 계 유모의 죽음으로 위엄을 세웠다. 그녀는 채운원으로 돌아가 임완운에게 이 일을 보고했다.

“아차! 계략에 빠졌구나!”

임완운은 손에 힘이 풀렸다.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부서졌다.

“마님…….”

채국은 곤혹스러웠다.

임완운이 이를 갈았다.

“계 유모는 함정이다. 그 천한 것은 계 유모를 제거하는 데 우리 손을 빌렸구나. 지금 그 일로 서원에서 위엄을 세웠으니 천한 것의 계산이 아주 영악하기 그지없어!”

심청의 일에는 어머니이기에 냉정을 찾기 어려웠지만 임완운은 어리석지 않았다. 계 유모를 찾으러 간 사람이 바깥에서 심묘가 먼저 계 유모를 찾아온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때 그 사람은 계 유모가 심묘에게 충성을 한다고 분명히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임완운은 그날 사고가 계 유모와 심묘가 공모한 것으로 심청이 억울하게 당한 것이라고 여겼다.

심묘와 계 유모에 대한 원망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심묘는 건드릴 수 없겠지만, 계 유모는 하인이니 건드릴 수 있었다. 그래서 임완운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계 유모를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였다. 심묘가 계 유모의 죽음을 보면 반드시 가슴 아파 견디기 어려울 거라 여겼다. 그러나 향란의 말을 듣고 임완운은 자신이 심묘에게 우롱당했을 뿐임을 깨달았다.

모두 심묘가 안배한 일이었다. 남의 손을 빌려 적을 제거하는 방법에서 심묘를 따라올 자가 없음을 모르고 있던 자신이 보기 좋게 넘어간 것이다. 임완운은 치를 떨었다. 그녀는 심부에서 여러 해 순풍에 돛단 듯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지금 여자아이 손에 여러 번 패배했으니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친왕 전하께 편지는 보냈느냐?”

임완운이 물었다.

“보냈습니다. 그러나 마님, 주인어른께서 아시면 틀림없이 화내실 겁니다.”

채국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심귀는 갖은 방법을 써서 심청의 일을 예친왕에게 감췄다. 그는 예친왕이 진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임완운은 예친왕이 바로 이를 깨닫지 못해 한이 맺혔다. 예친왕의 성격상 누군가 자신을 속였음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곱게 죽지 못할 것이었다. 설령 이 일로 인해 심귀와 말다툼을 하더라도 임완운은 심청의 복수를 해야만 했다. 온 심부 사람을 위협하는 심묘가 과연 예친왕도 위협할 수 있을지 생각하며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심묘가 죽을 때 묻힐 곳도 없게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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