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아가씨는 또 바둑을 두시는구나. 혼자서 두는 바둑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백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바둑이라도 두지 않으면 대체 뭘 하실 수 있어?”
상강이 화를 냈다.
“감금되어 온종일 사당도 나가지 못해. 이러다 대낮에 하실 수 있는 게 하나도 남지 않겠어.”
“쉬……. 그런 말 말아. 외출 금지를 당해 언짢으신데 건드리지 마.”
백로가 작게 말하자 상강이 중얼거렸다.
“우리 아가씨는 성격이 좋으셔. 화내실 리 없어.”
상강의 말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다. 그녀들은 최근 들어 심묘가 화내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화는 말할 것도 없고 기분도 뚜렷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이전의 심묘는 달랐다. 머저리 같고 모든 일에 순종적이었지만 감정 표현만은 분명했다. 기쁘면 기뻐하고 슬프면 슬퍼했다.
그러니 지금 붙어 다니는 여종들은 그녀가 모르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사람은 느리게 성장하는데 심묘의 극적인 변화는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연약하며 평범한 아가씨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변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백로.”
심묘가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은 백로가 얼른 앞으로 나가 대답했다.
“서랍 안의 은 장신구와 갑 안의 금 장신구들은 네가 시간 날 때 가서 처리하거라.”
심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했다. 이에 백로가 얼른 알겠노라 대답했지만 곧 걱정스러워졌다.
“네. 하지만 아가씨, 어제 장신구를 처리했고 이게 마지막입니다.”
심묘는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괜찮다. 쓸데가 없어. 처리 후 금권(金券, 금화로 바꿀 수 있는 지폐)을 경칩에게 주고, 곡우를 불러 들어오라 해라.”
백로가 즉시 대답하고 나갔지만 왜 이런 일을 시키는지 의문이 들었다. 심묘가 급히 장신구를 처리하는 것은 은자를 쓸 데가 있단 뜻이었다. 그런데 그 은자로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 * *
쾌활루는 정경성 중 가장 큰 음식점으로 번화가 중심에 위치했다. 쾌활루의 맞은편에는 청루초관이 있었다. 고관과 귀인은 쾌활루에서 주연을 즐기고, 대다수는 맞은편 청루(靑樓, 기루)에서 미인을 찾아 즐겼다. 청루 초관에는 다양한 청루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등급이 높을수록 높은 층에 위치했다. 가장 꼭대기에 있는 청루 여인들은 몸은 팔지 않았고 기예만 파는 순결하고 명성 있는 예기(藝妓)였다. 그들 아래로 이름 있는 기녀들이 있는 청루가 있었고, 가장 아래층이 구등 기원이었다. 이런 기원은 “루”나 “원”으로 불릴 자격 없어 “반”이나 “여관”으로 불렀다.
“삼복반”은 쾌활루 맞은편에 있는 최하등 기원이었다. 출입하는 사람은 모두 고된 노동을 하는 낮은 신분의 사람이었다. 이곳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성병을 얻어 곧 죽을 여자가 끌려 나와 길에 버려졌다. 그러면 거리를 유랑하는 거지가 이들을 데려가는데, 성욕을 배출하려고 하거나 그녀들의 의복을 팔아 동전 한 닢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쾌활루가 선계가 따로 없을 만큼 잘 꾸며놨다면 맞은편 삼복반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쾌활루 창문가에 기대 있는 젊은 남자의 새하얀 소매는 먼지 하나 묻지 않고 정갈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려 맞은편 삼복반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새로 온 여자아이를 안으로 던지는 게 보였다. 여자아이들은 발버둥 치며 계속 울었다. 또 어느 집 주인이 하인을 보내온 것 같았다. 주인마님은 젊고 예쁜 여종을 질투하곤 했다. 여종들이 통방이 되고자 침상 위에 기어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을 삼복반으로 팔아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정말 잔인하군.”
하얀 옷을 입은 고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민을 표했으나 내려가 그녀들을 도와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사경행이 술을 따르며 냉담히 말했다.
“사람은 예친왕부로 들어갔는데, 얻었는지 아직 알 수 없어.”
“찾지 못하면 어쩔 건가?”
고양이 고개를 돌려 사경행을 보았다.
“계속 찾아야지.”
사경행이 웃었다. 장난기가 가득한 웃는 얼굴은 유달리 출중해서 옆에서 악기를 다루던 여인이 넋을 잃고 음조를 틀리게 연주했다. 이에 고양이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사경행, 자네 매력은 여전히 넘치는구만. 미녀들이 모두 자네만 바라보니, 난 어찌 살아야 하나?”
그는 거듭 탄식하며 과장되게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고양도 준수하게 생겼으나 사경행처럼 천성적인 여유와 부귀가 느껴지진 않았다. 사경행의 표정은 약간 졸린 듯 나른하지만, 눈은 매우 예리해 하늘에서 작열하는 태양 같았다. 천성적으로 눈부셔서 그의 옆에 서면 자연의 빛도 가려질 정도였다.
“고양, 네가 좋다면 돌아갔을 때…… 내가 첩을 하나 하사하지 어때?”
사경행이 그를 힐긋 보았다.
“됐네.”
고양은 얼른 손을 흔들고 쓴웃음을 지었다.
“미인은 멀리서 봐야지. 예의에 어긋나게 너무 친밀하면 안 되는 법이지. 나는 그다지 대단한 정력가가 아니네. 자네야말로 방탕하게 놀 시기인데 곁에 미인이 없는 건가? 명제에는 자네가 바라기만 하면 많은 사람이 다가올 걸세.”
사경행이 웃었다.
“미인이라니. 연지를 바른 해골은 아니고?”
“그렇게 무섭게 말하지 말게.”
고양이 맞은편 청루를 가리켰다.
“저기 루의 아가씨들을 보게. 얼마나 사랑스럽나? 무슨 해골인가, 재미없게.”
청루를 보던 사경행의 눈빛이 변했다. 순간 검은색 눈동자에 의외라는 기색이 스쳤다.
“어째서 그녀가?”
* * *
삼복반에는 매일 적지 않은 아가씨가 들어왔다. 나이 어린 사람도 있고 이미 나이가 많아 쓸모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출구가 없는 건 같았다. 그녀들을 기다리는 것은 깊은 절망과 암담한 결말뿐.
오늘도 같았다. 오늘은 두 명의 푸릇한 여종이 들어왔다. 예쁘장했으나 눈물범벅에 초췌한 모습이라 이곳과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보니 따로 준비할 필요 없겠어.”
흉악한 얼굴의 마마가 까다롭게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생긴 것이 예쁘고, 피부도 곱고 부드럽네.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지만. 좋아, 이 아이들을 데리고 다실로 가도록.”
두 여종은 놀라 벌벌 떨었다. 이 두 사람은 구등 기원에 팔린 염매와 수벽이었다.
염매와 수벽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심청을 섬겼다. 그때부터 아가씨로부터 쭉 귀염을 받았기에 고통을 겪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생지옥 같은 모습이었다. 놀란 그녀들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기생 어미가 덧붙인 한마디는 그녀들의 유일한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뜨렸다.
“잘 보거라. 이 아이들이 자살하지 않도록.”
자살하지 않으면 그들은 죽을 때까지 매일 계속 손님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에 염매와 수벽은 하늘과 땅이 빙빙 도는 듯 어지러워졌다.
* * *
삼복반으로 젊은 남자가 걸어왔다. 전신을 감싼 훌륭한 기백과 도량을 보아 힘든 일을 하는 낮은 신분 같지 않았다.
입구에서 호객하는 아가씨가 말했다.
“젊은 공자께서 길을 잘못 든 거 아닌가요? 여기는 삼복반이에요. 위로 가야 루와 각입니다.”
“거기가 무슨 재미가 있나. 여기에 새로 온 아가씨 있지?”
젊은 사람이 소리를 낮춰 말하자 입구의 여자가 빠르게 남자의 의중을 눈치챘다. 이 남자는 경험한 적 없는 신선함을 찾으려고 하등의 반에 온 것일 터.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부자들은 늘 색다르게 노는 방법을 찾았다. 삼복반에 와서 놀면 비용도 비싸지 않고 누구든 마음대로 골라 놀 수 있었다. 그녀가 웃으며 맞이했다.
“젊은 공자께서 잘 오셨네요. 마침 오늘 새로 두 명이 들어왔어요. 관가에서 잘못을 저지른 여종인데, 이전에 관가 소저를 모셔서 생긴 것이 예쁘고 생기가 있답니다. 가격은 비싸요.”
“데려가다오.”
안내를 맡은 여자가 젊은 사람을 데리고 다실로 들어갔다.
삼복반이 가장 저렴한 기원인 것은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이 오기 때문이었다. 이곳 여자는 가격이 아주 쌌다. 차 한잔 마시러 오는 거지만 여자의 손재간이 좋고 말투가 온화하면 손님은 돈을 꺼내 요리 한 접시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곳에 온 손님은 차 한 잔만 마셨다. 여자들이 온화하게 대하지도 않고 손재간도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애초에 이곳에 오는 손님은 대다수가 인색해서 동전 한 푼이라도 더 쓰길 꺼렸다.
그런데 오늘 이 젊은 남자는 차 한 주전자와 간식 한 접시를 시켰다. 삼복반에서 이렇게 돈을 쓰다니 사치스러운 손님이었다. 방을 안내한 여자가 얼른 두 여종을 데려왔다.
염매와 수벽은 강제로 얇은 옷으로 갈아입은 채 다실로 왔다. 두 사람은 계절에 맞지 않는 옷차림과 굴욕감, 무엇보다 두려운 마음에 몸을 떨었다. 방으로 안내한 여자는 두 사람이 온 것을 보고 손님에게 아양을 떨며 인사했다.
“그럼 천천히 드세요. 먼저 물러갑니다.”
그녀는 염매와 수벽 두 사람의 곁을 지나갈 때 위협적인 말투로 경고했다.
“나리를 잘 모시거라.”
염매는 머뭇거리다 젊은 사람이 시종일관 무슨 움직임도 없는 것을 보고 작게 말했다.
“나리…….”
염매는 굴욕스러웠다. 그녀들은 하인이긴 했어도 심부의 주모와 그 딸을 모신 일등 여종으로서 다른 하인들보다 늘 우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사람에게 성욕의 배출구로서 능욕당할 운명이었다. 눈앞의 이 생소한 남자가 그 첫 번째였다. 이는 모두 임완운이 하사한 것이었다. 임완운은 그녀들을 하등 기원에 버렸다. 십여 년 동안 성심을 바쳐 모셔온 주인이 원수보다 못했다.
“너희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으냐?”
젊은 사람이 갑자기 입을 열어 물었다.
염매와 수벽은 멍해졌다가 정신을 차렸다. 수벽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나 염매는 흥분해 바로 무릎을 꿇고 말했다.
“만약 나리께서 저희를 데리고 나가주신다면, 나리를 좌우에서 섬기며 죽어서도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염매는 이곳에 남아 죽느니만 못하게 사느니 한 남자를 따르는 게 낫다고 여겼다. 적어도 앞으로 펼쳐질 끝없는 고난의 날들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수벽은 염매의 말에 깨달아 그녀를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저희의 목숨을 구해주시길 청합니다! 나리……. 나리께서 저희에게 무엇을 시키시든 할 겁니다!”
젊은 사람은 자칫 입안의 차를 뿜을 뻔했다. 그는 불편하게 고개를 틀었다. 그는 심부 외원 호위인 모경이었다. 오늘 그가 이 삼복반에 온 것은 순전히 심묘의 명령 때문이었다. 규방 소녀인 심묘가 어째서 기원에 대해 잘 아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오늘 그가 맡은 일은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부자연스럽고 어색했지만 주인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난 너희의 계약서를 사줄 수 있다. 하지만 너희는 날 따를 필요 없이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
염매와 수벽은 모경을 주시했다. 그녀들은 모경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곳에 오는 남자는 당연히 모두 쾌락을 좇았다. 게다가 모경은 고된 일을 하는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염매는 무언가 깨달은 듯 물었다.
“나리는 저희 둘에게 무엇을 시키려는 건가요?”
“별것 아니다. 듣자니 너희는 본래 심부 이방 적출 소저의 여종이라던데, 어째서 이런 처지에 떨어졌지?”
수벽이 입술을 깨물고 원망스러운 듯 말했다.
“잘못을 저질러 심부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하인은 주인이 하라고 하면 따라야 하니 별수 없이 여기에 온 것뿐입니다.”
수벽은 중요한 내용은 숨긴 채 상황을 설명했다.
모경이 물었다.
“그럼 너희는 그 주인을 원망하느냐?”
두 사람은 침묵했다. 원망하냐고? 당연히 원망했다. 독주를 하사받아 죽으면 모든 일이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하게 만들었다. 임완운은 그녀들을 살아 있는 송장으로 세상에 존재하게 했다.
그러나 그녀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 그 밤에 그런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심청은 영문도 모르게 사라졌는데 그것이 전부 자신들의 잘못이라 했다. 여러 해 모시던 아가씨에게 사고가 나서 마음이 아픈 것과는 별개로 모든 책임을 전가하다니 성인군자가 아니고서야 마음속 응어리가 없을 리 없었다.
“원망할 것 같구나. 염매, 듣자니 네 자매가 심가 이방 채운원의 이급 여종으로 있었다지? 수벽, 넌 심부에서 인기가 많아 주위 자매가 적지 않고.”
염매와 수벽은 그녀들의 내력을 명확히 말한 모경 때문에 놀랐다. 염매와 수벽이 심부에 팔려올 때 고아라 말했으나 그녀들은 선발되려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염매의 친자매는 임완운의 채운원 안 이급 여종이고, 수벽은 성격이 활발해 채운원 중 사이좋은 자매(친하게 지내는 동료)가 많았다.
“세상에 대가 없는 거래는 없다. 내가 너희를 데리고 나가면 너희는 방법을 찾아 내게 심부 이방의 소식을 알려줘야 한다.”
두 사람은 고개를 들었다. 염매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마님과 맞서려는 거군요!”
남자는 두 사람을 이미 다 조사한 듯했다. 이방의 소식을 원하면 이방 안에 첩자를 둬야 했다. 염매와 수벽은 이방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자매들은 아직 심부 채운원에 있으니, 비밀리에 소식을 듣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했다.
“무엇을 하시려는 건가요?”
수벽이 물었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지? 심가 둘째 부인은 너희를 구등 기원에 판 사람이야. 죽느니 못해 살게 하는 건 원수에게나 할 짓이다. 설마 너희는 아직도 그녀를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게냐?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게 본성인데도 너희가 충실한 하인으로 살다 여기서 죽어도 괜찮다면 나도 더 권하지 않겠다. 이 거래를 하고 싶지 않다면 관두지.”
그가 일어나 나가려는 자세를 취했다.
“나리, 잠시만요!”
염매가 갑자기 외쳤다.
“저는 응하겠습니다. 나리께서 이곳을 나가게 해주신다면 저는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염매…….”
수벽은 여전히 고민했다.
“수벽, 네가 마님을 어떻게 대했고, 마님은 또 널 어떻게 대했는지 잘 생각해봐! 이 나리의 말씀이 맞아.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게 본성이야. 설마 넌 평생 이곳에 있을 거야? 몹쓸 병을 얻고도 손님을 받는 이곳의 여인들처럼?”
염매의 말은 빠르고 조급해 흉악한 기운을 띄고 있었다. 그 말에 병을 앓아 비실비실한 여인들을 떠올린 수벽도 몸서리치며 얼른 말했다.
“저도 나리를 따르겠습니다!”
“그럼 거래는 성립이다.”
모경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심묘가 예상한 상황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 놀랍기도 했다. 이곳으로 오기 전 심묘는 임완운이 대단하고 수완도 고명하다고 말했다. 사람을 매우 잘 구슬리기 때문에 채운원 안 하인들은 모두 그녀에게 충성스러웠다. 이런 곳에 던져졌어도 염매와 수벽을 바로 설득하려고 하면 어려울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고, 삼복반 여인들의 처참함이 그녀들을 일깨울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임완운에게 원한이 있고, 무엇보다도 처한 상황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에 모경의 제안을 선뜻 수락할 것이라고 말이다.
“나리, 언제 우리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실 수 있나요?”
염매가 초조해하며 말했다.
“오늘 바로 가능하다. 난 너희와 너희 자매들이 만날 자리를 마련할 것이다. 너희는 이방의 소식을 하루걸러 나에게 보고해야 한다. 잔꾀를 부릴 생각은 말아야 할 것이다. 설령 너희가 이 일을 이방에게 말해 공을 세워 속죄하려 해도 이방은 믿지 않을 것이다.”
모경은 목소리를 짐짓 낮추어 한마디를 더했다.
“그리고 난 너희를 이곳에서 데리고 나갈 수도 있지만 다시 이곳으로 데려올 수도 있다. 그때는 당연히 너희를 아무도 구해주지 못하게 할 테다.”
염매와 수벽은 모경의 눈에서 피어오르는 살기를 보았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방에 남아 있던 최후의 충심도 사라졌다. 둘 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모경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감히 그러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나리가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모경은 찻주전자의 차를 다 마시고 다실을 나갔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마는 그가 예상보다 일찍 나오는 것을 보고 염매와 수벽이 잘 섬기지 못한 모양이라고 걱정했다.
“젊은 공자님, 언짢으셨나 봐요. 그 망할 년들이 오늘 새로 와서 규칙을 모른답니다. 며칠 가르치면 좋아질 거예요. 만약 원하시면 다른 아가씨도 있어요.”
“필요 없소. 그녀 둘, 내가 사겠소.”
마마는 당황했다. 삼복반의 아가씨는 지금까지 팔지 않았다. 이것은 규칙이었다. 대다수가 죄를 지은 몸으로 그들을 이곳에 보낸 목적도 괴롭히기 위해서이기 때문이었다. 난처했다.
“공자님, 이곳의 규칙이 있습니다. 우린 아가씨들을 팔지 않습니다.”
“일백 냥.”
모경이 소매 안에서 금권을 꺼내 포주 앞에 흔들었다.
“계집 두 명.”
마마의 눈빛이 빛났다. 그녀는 모경 손에 있는 금권을 빼앗았다. 그가 마음을 바꿀까 두려운 듯 그녀는 웃음꽃을 피우며 말했다.
“젊은 공자님이 데려가신다니, 두 계집의 복이네요. 노비 계약서를 가져올게요. 그러나 잘 기억해 두세요. 두 계집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야 할 거예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삼복반에도 공자님께도 말썽이 생길 거예요.”
은자 일백 냥이라니. 많은 추종자를 가진 청루의 여자들도 이런 가격을 받기는 힘들었다. 염매와 수벽이 먹지도 자지도 않고 늙어 죽을 때까지 손님을 받아도 그 돈의 반도 회수하지 못할 것이었다. 마마는 장사치니 은자를 싫어할 리 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발견될까 걱정이었다. 게다가 둘을 팔아버린 원래 주인이 알아채면 큰일이었다. 일단은 두 사람이 죽었다고 거짓말할 수밖에 없었다.
마마가 기뻐하며 염매와 수벽을 데리고 나왔을 때 모경은 후회했다. 이 일백 냥은 경칩이 심묘의 장신구를 다 팔아 바꿔온 것이었다. 지금 이 여종들을 사 첩자로 심으려 사용하는 건 좋지만 심묘의 씀씀이가 너무 크니 모경은 내심 이 일에 찬성할 수 없었다.
* * *
맞은편 쾌활루 창문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주인님, 조사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심부의 외원 호위로 두 여자는 심부 이방 적녀의 일등 여종입니다. 여종을 산 걸로 보아 누군가 이방 안에 눈과 귀를 배치하려는 것 같습니다. 배후의 결정자는 모르겠습니다.”
모경과 염매, 수벽의 대화를 숨어서 분명히 들었다니, 이 사람의 솜씨는 아주 뛰어났다. 모경 역시 실력자임에도 몰래 듣는 사람이 있음을 발견하지 못했다.
고양이 실눈을 떴다.
“심부도 태평하진 않는구먼. 그 배후 사람은 여종도 놓아주지 않는다니. 쯧쯧, 너무 틈을 파고드는걸.”
“주인님, 그를 조사해볼까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사경행에게 물었다.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필요 없다. 누군지 아니까.”
“안다고? 누군가?”
고양이 그를 보았다.
미소 짓는 사경행의 눈빛은 깊고 고요했다. 심묘는 무공이 출중한 호위를 데리고 있었다. 사경행의 수하와는 비교할 수 없으나 심부의 사람들 정도는 쉽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지금 삼복반 여종도 놓아주지 않는 걸 보니, 본격적으로 이방, 삼방과 싸우려는 생각인 듯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경행 자신과 일말의 관계도 없었다.
“고양. 계우서에게 편지를 써. 그에게 수도로 빨리 돌아오라고 해.”
“자네…….”
고양의 표정이 엄숙했다.
“물건을 찾지 못한 거 아닌가? 무엇 하러 그들을 돌아오라고 하는 건가?”
“먼저 행동을 취하는 편이 유리하거든.”
사경행이 담담히 말했다.
* * *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심부는 완전히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심묘는 여전히 외출 금지인 터라 오랫동안 광문당에 가지 못했다. 곡우와 경칩은 그녀의 공부가 뒤처질까 걱정했으나 심묘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광문당에서 시와 사(詞)를 배우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다. 부 안 사건사고를 줄이느니만 못했다.
그간 모경이 사들인 염매와 수벽이 자매들을 만났다. 염매의 여동생 춘도는 염매가 기원에 팔린 것을 안 후 자매의 복수를 하려고 했으나 하인의 신분으로서는 그럴 힘이 없었다. 염매와 만나 무탈함을 안 그녀는 두말하지 않고 모경에게 이방의 소식을 전달하기로 약속했다. 운 좋게도 염매와 수벽이 떠난 후 심청 곁 일등 여종의 자리가 비어 임완운은 춘도에게 그 일을 맡겼다. 춘도가 영리하고 정교하게 일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심묘는 이방의 동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쉽게 파악하게 됐다.
심청의 건강은 점점 호전되었으나 정신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지만, 때때로 정신이 얼떨떨해지고 몇몇 단어를 떠올릴 때 두려워 벌벌 떨었으니 더 요양해야 할 터였다.
임완운은 또 방에서 성질을 부렸다. 바닥은 전부 깨진 찻잔 조각들로 덮여 있었다. 임완운의 성격은 점차 나빠졌다. 심청이 그렇게 된 이후로 침착함을 가장하던 모습은 이미 모두 버린 터였다. 이전에는 모든 일을 순조롭게 처리한다고 존경받았으나 지금은 걸핏하면 사람을 벌하니 채운원은 늘 살얼음판이었다.
“양심도 없는 인간!”
임완운이 분노해 외쳤다.
“온종일 그 여우 같은 것 방에 뛰어갈 줄만 알지. 심청이 이런 상태인데 몇 번 와보지 않다니, 정말 양심이 없어!”
그녀가 심귀를 매섭게 욕하면 방의 여종들은 숨도 감히 크게 쉬지 못했다. 임완운이 심귀에게 분노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심묘와 심청이 바뀌었다고 예친왕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심귀에게 걸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귀가 무슨 방법을 썼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도 예친왕은 이 일을 모르는 것 같았다. 예친왕을 이용해 심묘를 벌하려 했는데, 심귀에게 저지당해 허사로 돌아갔으니 임완운은 몹시 언짢았다. 그녀는 화를 전부 심묘에게로 돌렸다.
그때 방 안에서 한바탕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임완운은 안색을 가라앉히고 서둘러 들어가 보았다. 죽은 사방에 뿌려져 있었고, 심청은 허리를 굽혀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춘도가 작은 사발에 담긴 죽을 심청에게 먹이려다 이 사달이 난 것 같았다.
“어찌 된 일이야? 아가씨를 잘 보살피랬더니 게으름을 피운 게냐!”
임완운이 매섭게 소리치며 춘도에게 눈을 부라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춘도가 얼른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근래 무엇 때문인지 늘 토하셨고, 방금 죽을 드실 때도 미친 듯 구토하셨습니다. 제가 감히 한말씀 드리자면, 의원을 불러오시는 게 어떨는지요? 배탈이 나신 건 아닐까요?”
의원은 요새 들어 심청을 진찰하러 오지 않았다. 심청의 외상은 거의 나았고 휴양이 필요할 뿐이었으니 구태여 올 필요가 없었다. 임완운이 온종일 곁을 지켜주자 심청은 점점 이성을 회복했다. 그런데 지금 춘도의 말을 들으니 임완운은 초조해졌다. 채국을 불러 의원을 데려오게 하려다 임완운은 갑자기 멍해졌다. 무언가 의식한 듯, 춘도를 보며 천천히 물었다.
“심청이 요 며칠 계속 구토했다고?”
“네. 하지만 음식은 모두 주방에서 특별히 만든 신선한 것입니다. 게다가 아가씨는 가끔 어지러워하십니다.”
임완운은 떨리는 손으로 가슴 부근을 짚었다. 마음속에서 한층 거친 파도가 일었다. 나이가 어린 춘도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녀는 경험했던 일이었다. 심청이 임신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쳤다. 임완운은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며 쓰러질 뻔했다. 곁의 향란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마님!”
“어서 진 의원을 모셔오너라.”
임완운은 잠시 숨을 돌렸고 명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심청을 보는 시선에 놀람이 가득했다.
춘도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 속에는 웃음기가 있었다. 춘도는 오늘 심청의 구토를 알아챈 것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 알았으나 그녀가 가장 먼저 알린 사람은 임완운이 아닌 모경이었다. 모경도 그녀에게 임완운이 발견 못 하면 잠시 이 일을 숨겨두고 시일이 지나 다시 말하라고 했다.
춘도는 운이 좋았다. 긴 시간 임완운은 심청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 발견치 못했고, 오늘까지 왔다.
바깥 진 의원이 향란의 재촉에 허둥지둥 채운원에 도착했다. 이전 심청의 외상도 그가 보았다. 그는 임완운의 출가 때 친정에서 딸려 보낸 의원으로, 종종 임완운이 처리하고 싶은 첩실이 있거나 하기 불편한 일을 모두 도왔다. 진 의원은 임완운의 심복이니 당연히 입이 무거웠다.
임완운은 진 의원이 심청을 진맥하는 것을 곁에서 눈이 빠지게 지켜보았다. 심청은 두려운 듯 임완운의 품속에 움츠렸다. 진 의원이 손을 거두었다. 그는 심청을 한 번 보고 임완운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 모두 나가거라.”
임완운이 방 안 하인에게 말했다.
향란, 채국, 춘도가 얼른 물러갔다.
하인들이 나간 후 진 의원이 탄식하며 진맥 결과를 임완운에게 전했다.
“소저에게 잡히는 맥이 임신맥입니다.”
이미 예상했으나 의원이 말하는 것을 들은 임완운은 하늘과 땅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진 의원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확고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심청의 아이를 뗄 수는 없겠나? 심청은 아직 어리네…….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안 되네.”
그저 순결을 잃은 거라면 잘 숨기면 됐다. 그러나 아이가, 사생아가 생긴다면 심청과 아이는 모두 연못에 잠기게 될 터였다!
“아가씨는 몸이 약하며, 나이도 어립니다. 아이를 없애면 건강이 크게 상할 겁니다. 조심하지 못하면 장래 다시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될지도…….”
임완운은 연달아 머리를 맞은 듯 멍했다. 아이를 한 명도 낳지 못하는 여인이 최후에 어떻게 되는지 임완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이가 없는 여인은 전쟁터에서 무기 없는 병사와 같았다.
“게다가 아가씨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강행하면 아주 위험합니다.”
진 의원이 말했다.
“유…… 유산을 시킬 수 없다.”
임완운은 얼이 빠졌다. 그녀는 품 안 심청을 한 번 들여다보고 슬픔에 목이 메었다.
“심청아!”
아이를 유산시키면 심청도 황천길로 향할 수 있었다. 설령 목숨을 부지해도 장래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아이를 유산시킬 수 없었다. 그러면 대체 어찌해야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임완운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춘도가 문을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향란 언니, 아가씨…… 혹시…….”
“쉿. 말을 줄여. 부인께서 아시면 넌 끝장이야.”
향란이 경고했다.
“아. 이제 어쩌지.”
채국은 걱정스러운 듯했다. 향란 역시 무슨 일인지 걱정했다. 만약 심청이 임신했다면 채운원의 장래는 또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춘도만이 눈 속에 득의가 스쳤다.
진 의원은 채운원에서 나와 심부를 떠났다. 그는 그가 거주하는 북쪽 서원으로 돌아갔다. 막 집으로 들어가 부인과 아이가 달려오는 것을 본 진 의원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오늘 그는 왕진을 가기 전 누가 보낸 것인지 모를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그에게 심청을 진찰할 때 반드시 심청의 아이를 유산시키면 안 된다고 말하라고 했다. 어떻게 해서든 심청이 아이를 낳도록 만들지 않으면 그의 가족을 죽일 거라고 협박했다. 그 편지에는 자기 아내의 비녀가 끼워져 있었다. 두려워진 진 의원은 심청을 진찰할 때 편지대로 따랐다.
그는 임완운의 친정이 거금을 들여 임완운 대신 일을 처리하도록 고용한 사람이었기에 지금 주인을 배신한 것을 들키게 될까 두려웠다. 그는 암암리에 정경성을 떠나는 일을 알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임완운도 오늘에서야 심청의 입덧을 안 것 같은데 협박한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이 일을 알았을지 의문스러웠다.
* * *
서원.
곡우가 탁자 앞 바둑을 두는 심묘의 귓가에 몇 마디 말을 전했다. 심묘가 웃었다.
“잘했다. 진 의원에게 은자는 주었느냐?”
“모경이 이미 보냈습니다. 아가씨, 무엇 때문에 그에게 이리 많은 은자를 주십니까? 목숨으로 위협했으니, 은자는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
심묘는 손 안 바둑돌을 내려놓고 살짝 웃었다.
“사람은 변해. 단순한 위협이라면 진 의원은 조만간 온 가족을 데리고 정경성에서 도망칠 테니 이후 처리가 어렵다. 그러나 만약 많은 은자를 받는다면 그가 어찌할 것 같으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곡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이 이미 배신을 했기 때문에 차라리 철저히 배반하고 더 많은 돈을 얻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주인이 배신을 알아챌 때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하겠지. 그때까지 그는 이 거짓말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곡우는 심묘가 어디까지 생각하는지 듣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심묘가 언제 이렇게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된 건지 의아했다. 의혹이 든 곡우가 물었다.
“거짓말을 유지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심묘가 미소 지었다.
“넌 모경더러 춘도에게 심청 언니의 아이가 잘 자라도록 도우라고 말하라고 하거라. 아이가 잘 클수록 좋다. 우리에게 유리해지니까.”
* * *
점점 날씨가 추워졌다. 늦가을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고 겨울이 왔다. 올해 심부는 유달리 적막했다. 심묘는 심부에서 외출 금지를 당했고 심청은 앓아누웠으니 매일 심모 혼자서 광문당에 다녔다. 진약추가 심모만 데리고 간 중추연회에서 심모는 한껏 재능을 과시했다. 그러나 심묘는 이에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임완운은 심청의 입덧을 가라앉히기 위해 진 의원에게 약을 쓰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심청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과연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대로 가면 안 돼.”
임완운이 눈살을 찌푸리고 이마를 문질렀다.
“심청이 나가 다른 데 숨어 있게 해야 해.”
심청에게 아이가 생긴 것은 되돌릴 수 없었다. 임완운은 사람들 이목을 피하기 위해 심청이 악질(惡疾, 고치기 힘든 병)에 걸렸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후 아이를 낳을 때까지 잠시 거처를 바꾸면 모든 일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아가씨는 지금 임신 중인데 나가시면 고생을 면하기 어려울 겁니다.”
향란이 걱정했다.
“게다가 나갔다 오면 아가씨가 좋은 시기를 놓치실 테니…….”
임완운이 미간을 찡그렸다. 명제에서 방년 전의 여인은 출가하기 딱 좋은 나이였다. 심청은 이미 계레이니 혼인을 염두에 둬야 했다. 더욱이 심청은 심부의 적녀이니만큼 당연히 높은 관직의 가문에서 혼처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심청이 나갔다 돌아오면 공훈 귀족 자제 중 괜찮은 사람은 다 혼인했을 수도 있었다. 이게 걱정이었다.
“심원은 연말이 되어야만 돌아올 테고, 지금 심청에겐 시간이 없다.”
임완운의 미간이 사납게 구겨졌다.
“마님. 중서시랑 위부 셋째 마님께서 근래 연락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 부에 위가 적장자의 혼담을 넣었는데 심묘 아가씨를 얻길 바라는 듯합니다.”
곁에서 줄곧 말이 없던 채국이 말했다.
“심묘! 아주 운이 좋구나!”
임완운이 이를 갈았다.
중서시랑은 정사품의 관직이었다. 정일품 무장인 심신에게 구혼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위가 적장자 위겸은 재학과 용모 모두 뛰어난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심묘를 아내로 얻으면 적어도 인재의 장래를 볼 때 절대적으로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위겸은 어린 나이임에도 이미 벼슬에 올랐다. 장래 반드시 대성할 터였다. 그런 그가 구혼하다니, 심묘에게 큰 행운이었다.
“듣자니 위가가 우리 심부에 빌붙어 앞날을 도모하는 것 같답니다. 아들을 희생해서라도 심부와 친교를 맺을 기회를 잡겠다는 거지요.”
채국의 말은 심묘가 대단히 저속한 사람이어서 위 공자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운인 셈이지.”
임완운의 얼굴이 흉악했다. 심신의 명성이 아주 높음에도 심묘에게 혼담을 꺼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묘가 너무 연약하고 어리석다고 소문이 파다했으니 당연했다. 심신의 공명이면 심묘의 남편을 찾을 때 반드시 똑같이 높은 관직 대부호여야 했다. 그러나 고관 대부호 중 명제의 웃음거리인 심묘를 받아들일 곳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위부가 갑자기 혼담을 꺼냈다. 채국은 빌붙어 높은 관직을 얻으려 한다 말했지만 사실 사람들은 시험장에서 심묘를 다시 보게 되었다. 심묘가 소문과 달리 아둔한 것 같지 않자 위부가 나선 것이었다.
평소에도 임완운은 심묘가 이런 기쁨을 누리도록 놔두지 않았다. 더욱이 지금은 심묘 탓에 심청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심묘가 이익을 보게 두고 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혼사를 노부인 마님께서 결코 찬성하실 리 없습니다.”
향란이 말했다.
심부 사람 중 대방을 가장 증오하는 사람은 단연 심 노부인이었다. 심신을 어찌 못하니 노부인은 암암리에 심묘의 혼사를 손바닥에 쥐고 대방을 곤경에 빠뜨리려 했다. 온 명제가 심묘를 머저리 취급하도록 여태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데 지금 심묘가 그 어리석은 별호를 벗자마자 혼인을 청하러 오는 사람이 있었다. 노부인은 반드시 방법을 찾아 이 혼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심묘, 그런 천한 것이 어디 그런 복을 누리려고? 출가 전 집에서 죽을 게다.”
임완운의 말은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뒷방의 꼭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심청은 종일 방 안에서 있으며 사람을 만나길 원치 않았다. 임완운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나리는 아직도 심청을 시집보내길 바라시지!”
심귀는 심청의 임신 사실을 몰랐다. 임완운도 그에게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심귀같이 박정한 사람이 심청이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되면 심청의 건강은 고려치 않고 유산을 강행시킬 터였다.
심귀는 심청이 겪은 일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전에 심청을 시집보내야 한다고 임완운을 독촉했다. 그에게 심청이 일찍 출가해 높은 가문에 들어가는 건 심청의 건강 문제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서 고른 남편감은 소부감의 막내아들 황덕흥이었다.
황가는 위가보다 직급이 높아 더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황가 부부는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애당초 아는 사람이 적을 뿐 황덕흥은 남자를 좋아하는 남색가였다. 그래서 황부는 며느리를 고르는 데 그다지 따지는 게 없었고 단지 성미가 온화한 사람만을 바랐다. 며느리가 부군의 방탕한 생활을 보고도 못 본 척할 수 있기만 하면 다른 것은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심귀는 심청이 순결을 잃었으니 황부에 시집가는 게 그나마 최선이라고 여겼다. 여인에게 흥미가 없는 황덕흥은 심청을 건드릴 리 없으니 그녀의 비밀은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지 않을 것이었다. 심청은 황부의 며느리라는 허명 아래 앉아 부귀영화를 누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심귀는 황가의 인척 관계에 기대 더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될 것이었다.
심귀가 좋다고 내놓은 의견을 임완운은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순결을 잃었어도 임완운은 심청에게 좋은 혼사를 찾아주려 했다. 황덕흥에게 시집가면 평생 과부나 다름없이 독수공방하며 살아야 할 터였다. 그녀는 딸에게 이런 혼사를 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심귀와 임완운은 여러 번 다퉜다.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최근 심귀는 거의 채운원에 오지 않았다. 그는 매일 소첩의 방에 묵었다.
“심묘 아가씨와 심청 아가씨의 남편을 서로 바꾸면 좋을 텐데.”
채국이 분노해 중얼거렸다. 채국은 그저 바람을 말한 것이지만 임완운은 바람을 현실로 만들 힘이 있었다. 임완운은 채국의 말을 듣고 박수를 쳤다.
“뭐라고 했느냐?”
채국은 놀라 더듬거렸다.
“제 말은 심묘 아가씨와 심청 아가씨의 혼, 혼처를 바꾸면 좋겠단 겁니다.”
임완운의 얼굴에 한없이 기쁜 기색이 떠올랐다.
“맞아! 심청과 천한 것의 혼사를 바꾸기만 하면…….”
그녀가 웅얼거렸다.
“심청의 기회야. 이번에는 그 천한 것의 자업자득이지! 내 피풍의를 가져오너라. 송경당에 가야겠다.”
“송경당으로 가셔서 무얼 하시게요?”
채국과 향란은 임완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다.
임완운이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당연히 노부인께 혼사를 넘겨달라고 해야지.”
* * *
서원.
겨울 햇빛은 창턱에 놓인 화초를 비춰 푸른빛을 반사했다. 그러나 그 빛은 아주 옅어 금세라도 사라질 듯했다.
심묘는 아름다운 나비 두 마리가 물 위를 날고 있는 장면이 수놓인 치마를 입고, 어깨가 좁은 자주색 상의를 입고 있었다. 짙은 자주색은 그녀의 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였다. 눈썹은 먹물로 그린 듯 깔끔해 부귀함이 몸 전체에 희미하게 감돌았다.
백로와 상강은 멍해졌다. 그녀들은 어려서부터 심묘를 곁에서 섬긴 여종이었다. 심묘의 얼굴을 여러 해 보았으나,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지금 심묘는 볼 때마다 낯선 사람 같았다. 희미한 광채가 치기 어린 나이의 소녀에게 덧씌워져 영리함이 위엄으로 변하고 여린 분위기가 스산하게 바뀌었다.
“아가씨는 자주색 의복을 입는 것을 아주 좋아하시는 것 같아. 입은 모습이 아주 아름답지만 보통 소녀들은 모두 남색, 분홍색 등의 밝은색을 좋아하지 않아?”
백로의 말대로 자주색은 장엄하고 무게가 있어서 궁중의 황후, 비빈을 제외한 규방 소녀들은 이런 색채를 거의 입지 않았다. 소화하기 힘들어 노숙해 보이거나 자칫하면 어른 옷을 빌려 입은 어린아이같이 우스워 보이기에 기피하는 색이었다. 그런데 심묘는 생긴 것이 여리고 몸집이 자그마한데도 자줏빛 의상을 입으면 기백과 도량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지니 신기한 일이었다.
백로와 상강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으나 심묘는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심묘는 살짝 웃었다. 그녀가 자주색 옷을 좋아하는 것은 이 색채가 시시각각 자신을 일깨우기 때문이었다. 마음가짐을 냉정하며 진중하게 하고 손길이 무뎌지지 않게 하라고.
전생 궁중에서는 매일 황후의 조복을 입었다. 금사를 아낌없이 사용한 명황색 조복의 찬란한 자태는 못된 꿍꿍이를 품은 비빈들을 위협할 수 있었다. 황후의 위엄을 보여 비빈들이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경고하고 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으나 사실 그런 색채는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어려서 부수의에게 시집가 그녀의 나이에 겪을 수 없는 일들을 겪었다. 이 때문에 그녀의 아둔함에 가까운 천진한 성격은 날카롭게 단련되어 파도가 치지 않는 잔잔한 바다가 되었다. 그녀는 후궁에서 미 부인과 총애를 다퉜다. 부명과 완유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는 언제든 조복을 벗지 않았다. 그러나 그 노력은 헛되어 결국 무엇도 지킬 수 없었다.
‘사악한 자주색이 붉은색을 빼앗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권력 찬탈, 즉 반란을 의미했다. 지금 그녀가 곧잘 자주색 옷을 입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녀 역시 명제 황실의 권세를 빼앗고 거기에 속한 악한 사람들을 밟을 날을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순간 심묘는 자주 자주색 옷을 입는 또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 사가의 그 신비하고 헤아릴 수 없는 남자도 나처럼 역모를 꾸미고 있는 게 아닐까. 심묘가 사경행을 생각하고 있을 때 경칩이 급히 바깥에서 달려왔다.
“아가씨, 큰일입니다! 모경이 춘도에게 들었답니다. 중서시랑 위부가 혼담을 꺼냈는데, 노부인 마님이 사주단자를 받았답니다.”
상강이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렇게 서두르다니, 위부가 누구에게 혼담을 꺼냈는데?”
“아, 아가씨요.”
경칩은 조급해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위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노부인 마님은 어떻게 아가씨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사주단자를 받으실 수 있나요? 주인어른과 마님도 모르시게. 이는 강제로 사고파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경칩은 심 노부인을 불쾌해했다. 게다가 그녀는 노부인이 심묘에게 이롭게 행동할 리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좋은 남편감이라면 노부인이 이렇게 쉽게 허락할 리 없었다.
“아가씨, 어찌할까요? 이번에는 정말 서둘러 주인어른께 편지를 써야겠습니다.”
백로도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방 안 여종들이 모두 허둥대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심묘는 다만 침묵했다. 잠시 후 그녀가 여종들의 의아한 시선 속에서 작게 웃었다.
“이거 참 희한하구나. 중서시랑은 사품 관직이지만 위가 집안은 좋은 편이고, 적자 위겸은 훌륭한 인물이다. 이런 경사를 조모께서 내게 내려주신다니, 과분한 총애에 놀랍고도 기쁘구나.”
백로는 멍해졌다.
“아가씨? 위부가 좋은 집안이라구요?”
심묘는 담담히 말했다.
“좋다 뿐일까? 아버지가 돌아오셔도 이 혼사를 아시면 절대 거절하지 않으실걸? 위겸은 확실히 일생을 의탁할 만한 좋은 사람이다.”
“아가씨, 어찌 아세요?”
경칩은 의심스러웠다. 평소 심묘는 생활 반경이 좁아 심부를 벗어나지 않았다. 외출은 거의 광문당뿐인데 거기에서도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했다. 그러니 다른 관가의 집안 형편이나 적자의 성격을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자세히 알고 있는 듯하니 종잡을 수 없었다.
규방에서 지내던 심묘는 어느 집 아들이 좋은 사람인지 당연히 몰랐다. 그러나 황후가 된 후로는 어느 관가 자식에게 덕이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위겸은 이견이 없을 만큼 훌륭한 인재였다. 성격도 단정했다. 위가의 혼담을 심 노부인이 받아들였다니 심묘는 믿을 수 없었다.
바로 이때, 곡우가 바깥에서 달려 들어왔다. 얼굴 위 불안한 기색이 보였다.
“아가씨, 송경당의 희아가 노부인 마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가씨께 서둘러 송경당으로 오시랍니다.”
“정말 빠르구나. 그럼 가 볼까?”
심묘가 초승달같이 고운 눈웃음을 지었다.
* * *
송경당.
심원백은 심 노부인의 곁에 기대 있었다. 임완운은 심청을 돌보느라 바빠 아예 심원백을 송경당에 뒀다. 심 노부인은 심원백을 대단히 귀여워했다. 원래도 임완운을 아꼈으나 심원백을 낳은 이후로는 더욱 그녀에게 상냥하고 친절했다.
진약추와 심모는 없었다. 임완운이 부에서 심청을 돌보는 데 열중해 있는 동안 진약추는 집안 권력을 대신 잡았다. 심가를 대표해 각종 부인 응대와 공무를 담당하는 이런 좋은 기회를 진약추가 놓칠 리 없었다. 그녀는 매일 심모를 데리고 외출했다. 얼마 전 중추연회에도 심모만 데리고 참석했다. 여러 높은 가문 부인 앞에서 미모와 재능을 선보였으니 장래 혼사에도 이득이 될 터였다.
임완운은 대청 아래쪽에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낼 수 없는 무거운 시선이었다.
심묘는 심 노부인의 여종 희아를 따라 송경당으로 와 심 노부인에게 인사했다. 심묘는 외출 금지를 당해 매일 사당 안에서 불경을 베끼고 위패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동안 노부인은 그녀가 보기 싫어 이곳으로 문안도 못 오게 했다. 그래서 노부인을 마지막으로 본 날은 외출 금지를 명령받은 날이었다.
“심묘야, 근래 사당에서 불경을 베껴 쓰니 마음은 편안하느냐?”
심 노부인이 갑자기 고상한 말을 하는 것을 들으니 심묘는 실소할 뻔했다. 심묘에게 심부에서 가장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첫째는 단연 노부인이었다. 심묘는 살짝 웃었다.
“조모님께서 바라시는 대로입니다.”
“그거 잘됐구나.”
노부인이 허세를 부려 가볍게 기침했다. 그러자 복아가 얼른 뜨거운 차를 올렸다.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야 심묘를 바라보았다.
“전의 일은 네 잘못은 아니나 너로 인해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네 성격은 너무 강하고 고집스러워서 네게 외출 금지와 불경을 베끼는 처벌을 내렸지. 넌 날 탓하느냐?”
“제가 어디 감히…….”
“그래, 난 네가 철 들었을 줄 알았다.”
노부인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네가 이처럼 철이 들었으니 난 널 더욱 널 아낀단다. 그러나 아쉽게도 너도 이제 출가할 나이지. 오늘 중서시랑 위부 적자가 네게 혼담을 꺼냈다. 넌 괜찮은 것 같으냐?”
심묘는 하마터면 소리 내 웃을 뻔했다. 심 노부인의 견문은 심부 안이 전부일 터였다. 집안 어른이 이처럼 손녀에게 괜찮은 것 같냐고 묻는 일은 어느 일가에도 볼 수 없는 모습일 것이었다.
“부모의 명에 따르고 중매인을 통해야지요. 제 혼사는 당연히 부모께서 마음 써주실 겁니다.”
“요 계집애가!”
심 노부인은 심묘의 완곡한 거절에 자칫 분노할 뻔했다. 임완운이 작은 기침소리로 노부인을 일깨웠다. 노부인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평온한 표정을 가장했다.
“정말 제멋대로구나. 이전에 네가 사모한……. 됐다. 근래 정신이 든 듯하니 분별을 알 거라 생각된다. 중서시랑 가문은 우리와 걸맞다 할 수 있고, 위가 공자 위겸도 외모 단정하고 행동이 대범해 문무 모두 뛰어난 인재가 틀림없다. 이 혼사는 네 아버지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심가의 적녀이긴 하나 이 정도 집안에서 혼담을 꺼낸 것은 처음이다. 이 기회를 잘 잡지 않으면 그 위가 공자는 다른 사람의 남편이 될 것이다.”
심 노부인은 집안 어른으로 삼기에는 적절한 인물이 아니었으나 중매 솜씨는 좋았다. 가녀 출신이라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잘 알았다. 게다가 노부인은 웬일로 심묘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위겸은 확실히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심묘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위 공자는 확실히 괜찮은 사람이지만 제 염원에는 맞지 않으니 조모님께서는 관두시지요. 제 혼사는 당연히 부친과 모친께서 절 위해 정해주실 겁니다.”
인내심이 없는 노부인은 여러 번 거절당하자 마침내 참을성을 잃었다.
“너! 넌 이 조모가 네 혼사까지 손을 너무 길게 뻗었다 의심하는 것이냐?”
“저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심 노부인은 켕기는 것이 있어 먼저 의중을 드러낸 셈이었다.
심 노부인은 분노로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심묘의 고집스러운 태도는 사람을 답답하게 했다. 노부인은 심신을 미워해도 그가 두려워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저주했다. 그래서 심묘에게도 친근하게 대하지 않고 엄숙하며 공정한 조모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뿐, 그녀는 심묘를 때릴 수 없었다. 딸의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심신에게 질책의 말을 들을 게 겁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부인은 아쉬운 대로 임완운과 진약추가 심묘에게 쓸모없는 것을 가르치고 자만에 빠지게 해 장래를 망쳐 놓는 것을 그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바보처럼 길러지던 심묘가 어느 날 갑자기 영리해졌다. 영리해졌을 뿐 아니라 어떤 충고도 듣지 않았다. 노부인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예의가 없구나!”
심묘는 이 상황이 재미없었다. 심 노부인의 인내심과 정력으로 볼 때, 노부인이 궁중에 있었다면 이틀도 살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심묘는 전생에 후궁에서 대단한 수완가들을 많이 보았다. 노부인처럼 시야가 좁고 세상 물정 모르는 여인은 심묘의 안중에도 없었다.
“다시 묻겠다. 이 혼사를 어쩔 테냐?”
심 노부인은 겨우 오늘의 목적을 상기한 듯 음침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좋다, 좋아, 좋구나.”
담담한 심묘의 말에 노부인은 연이어 좋다고 비아냥거렸다. 복아와 희아가 얼른 노부인을 어깨를 받쳐 그녀가 쓰러지지 않게 했다. 노부인은 대로한 얼굴로 웃었다.
“보아하니 진심으로 네 잘못을 뉘우친 게 아니구나. 오늘부터는 아예 사당에서 지내며 매일 독경을 하거라. 너의 사납고 고집스러운 성격이 누그러질지 보자꾸나!”
사당에서 산다는 건 깜깜한 밤에도 선조의 위패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연약하고 어린 아가씨는 겁을 잔뜩 먹을 터였다. 게다가 사당은 그늘진 곳에 있어 시일이 지나면 병에 걸릴 것이었다.
심 노부인도 분노에 못 이겨 순간적으로 내뱉은 말이지만 그녀의 눈빛에 득의가 스쳤다. 그녀는 심묘가 용서를 빌길 기다렸다. 그러나 심묘는 미간도 찌푸리지 않았다.
“네, 돌아가 물건을 챙겨 바로 가겠습니다.”
하늘거리는 한마디에 노부인은 자칫 졸도할 뻔했다. 심묘는 노부인에게 인사한 후 떠났다.
“저 불효녀! 규율을 몰라!”
심 노부인은 출신이 낮아 말을 우아하게 하지 못했다. 어휘도 빈곤했기에 험한 욕을 잘했다.
“천한 것! 과연 그 늙은 천한 것의 피를 이어받았구나!”
그녀가 말한 늙은 천한 것은 심신의 친어머니로 심묘의 친조모였다. 임완운이 고개를 들어 문밖을 바라보니 심묘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반드시 이 일에 동의할 거라고 하지 않았더냐? 저 성격에 어디 동의하겠느냐? 앞으로 또 어찌할 테야?”
심 노부인이 분노의 창끝을 임완운에게 겨눴다. 임완운도 매우 의아했다. 위겸의 조건이라면 심청이라도 흔들렸을 텐데 심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잠시 고려해보지도 않았다. 임완운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지금 아직 마음이 정왕 전하께 있는 겁니다. 마음에 두지 않는 척하지만 사실 사심을 버리지 않은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이런 남편감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혼사 얘기를 듣고 부끄러운 기색도 없는 걸 보니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 어찌해? 그녀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면 어떻게 심신에게 편지를 쓰게 할 테야?”
노부인이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두 사람은 심묘를 잘 속여 심신에게 편지를 쓰게 하려고 했다. 그녀가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드러내도록 할 속셈이었다. 그 편지를 받은 심신이 정경성으로 돌아오기 전에 심묘의 혼사를 끝내고 신부를 바꿔치기하면 될 터였다.
그 후 모든 실수는 전부 심묘 탓으로 돌릴 것이었다. 이미 혼인을 했으니 아무리 심묘라고 해도 진상을 함부로 퍼뜨릴 수는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심신은 심묘와 심청의 혼사가 바뀐 것을 알 수 없기에 심묘가 마음에 둔 사람이 황덕흥이라고 여길 터였다. 황덕흥이 남색가인 사실은 황가와 가까운 사람 외에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바깥에서 볼 때, 황덕흥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심묘가 위가 혼사에 불만을 드러냈으니, 그녀가 자발적으로 심신에게 편지를 쓸 리 없었다. 심묘가 혼사를 동의하지 않으면 무엇 하나 계획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부드럽게 해서 안 통하면 강경하게 해야지요.”
임완운의 눈빛이 흉흉했다.
“심묘가 사당 안에 갇혀 있으니 바깥에는 저희 생각대로 말하면 됩니다. 하여간 빠르게 혼사를 정하고 심청으로 바꿔 보내지요.”
빨리 혼사를 치르지 않으면 첫날밤은 속여 넘길 수 있어도 심청의 배는 속일 수 없었다. 심청의 배가 나오지 않을 때 서둘러 일을 마쳐야 했다.
심 노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심신이 재수 없는 일을 당하길 아주 바랐으나 강행 후 일이 틀어진다면 노부인도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것이었다. 임완운은 노부인의 생각을 알고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안심하세요. 모든 건 제가 책임질게요. 어머님께 피해가 가지 않을 겁니다.”
“그럼 네 말대로 하마.”
* * *
백화루.
음악 소리가 들렸다. 준수한 소년이 자줏빛 비단 옷소매를 펄럭이자 가장 높은 하늘인 구천에서 별빛이 반짝이는 듯했다. 그의 속눈썹은 길었고 눈은 도화(桃花)처럼 아름다우나 잔혹한 냉기가 스며 나왔다.
“아이코.”
가벼운 신음이 정자의 고요를 깼다. 화려한 차림의 귀공자가 부채를 가슴 앞에 가로로 두고 용서를 구하는 손짓을 했다.
“미안해, 늦었어.”
“너도 늦는군. 정말 신선한데.”
사경행이 그에게 눈을 흘겼다.
소명풍이 자신의 코를 어루만졌다. 사경행이 가장 싫어하는 건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와 자신의 우정은 얕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었다면 사경행은 향이 탈 시간도 기다리지 않고 소매를 털고 일어났을 것이었다.
“오늘 위겸이 평소와 태도가 아주 달랐거든.”
소명풍이 쓴웃음을 지었다.
“중서시랑부 공자, 위겸. 너도 알 거야. 아주 불쌍해. 마음에 둔 소저가 있는데 가문에서 그에게 다른 소저와 혼사를 꺼냈다는군. 사주단자도 받았다니 아마 혼사가 빠르게 치러질 거야. 위겸은 마음이 언짢아서 날 끌고 술을 마시려 했지. 하지만…….”
소명풍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난 지금 ‘중병에 걸린 몸’. 술을 마실 순 없으니 부득이 반 시진만 있자 했지.”
“시시하군.”
사경행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사경행은 소명풍이 그런 시시한 일을 하느라 자신을 기다리게 했다는 사실이 불만스러웠다.
소명풍 역시 유감스러웠다. 사경행은 무엇에도 초연한 듯 늘 비웃는 얼굴이지만 사실 그는 예민하고 까탈스러웠다. 요 며칠 순조롭지 않은지 유독 냉담한 표정이었다. 사경행이 쌀쌀맞은 눈빛으로 조용히 바라보니 소명풍은 조금 두려워졌다.
“사실 위겸도 재수가 없지. 집안에서 그에게 정해준 처가 정왕 전하를 사모하는 것을 명제 사람이 다 알아. 위겸은 당연히 유감스러울 거야.”
소명풍은 이 화제가 사경행의 흥미를 일으킬 수 있길 바랐다.
“넌 그녀가 누군지 알겠지? 심신의 적녀야. 그 소저 입장에서야 아주 운 좋은 일이지.”
“네가 말한 게 심묘?”
사경행이 천천히 반문했다.
“맞아.”
소명풍은 사경행의 태도가 의아했지만 무언가 떠오른 그는 음흉하게 웃었다.
“지난번 시험장에서 네가 구한 그 아가씨 맞지? 그러고 보니 그녀는 담력이 있었지. 위겸 이 녀석, 행복 속에 있으면서도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거구먼.”
주절거리던 소명풍은 생각에 빠진 사경행을 보고 놀랐다.
“이봐, 너 정말 그 아가씨가 마음에 든 건 아니지?”
사경행이 비웃었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소명풍을 훑어보았다.
“너 아주 심심하구나?”
소명풍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심심하지. 난 지금 ‘중병에 걸린 몸’이라 일을 볼 수 없어. 종일 부에서 고양이를 건드리고 개를 놀리지. 근래 자네도 얼굴을 잘 내밀지 않잖아. 그 고양이라는 태의와 아주 가깝게 지내던데, 너 내게 속이는 일이 있는 거 아니야?”
어린 시절부터 알았으니 우정은 얕지 않으나 사경행은 갈수록 신비해지는 것 같았다. 평남백부의 일을 귀띔해 주었으나 소명풍은 가끔 사경행이 낯설게 느꼈다. 사경행이 간식을 소명풍에게 던졌다.
“먹기나 해.”
사경행은 이 화제로 얘기를 이어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소명풍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걸렸다.
* * *
위부의 사주단자를 받고 오래지 않아 임완운은 향란을 시켜 심귀에게 채운원으로 와주십사 부탁했다. 심청의 일 이후 심귀와 임완운 사이에는 틈이 생겼다. 두 사람은 이전만큼 대화를 나누지 않을뿐더러 관계가 얼음처럼 냉담했다. 그러니 임완운이 먼저 고개를 숙인 셈이었다.
향란과 채국이 심귀를 안으로 청했다. 임완운은 우울한 얼굴로 탁자 옆에 앉아 있었다.
“또 뭐 하자는 게요?”
심귀의 말투는 부드럽지 못했다. 임완운이 그가 심청에게 무정하다고 욕한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임완운이 안과 밖의 일 처리를 잘하는 것은 좋지만 아내에게 삿대질당하고 욕을 먹어도 참을 만큼 그의 마음은 넓지 않았다.
“나리, 오셨네요.”
임완운이 노곤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임완운의 안색은 매우 초췌했다. 원래 늘 영리하고 원기 왕성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심귀는 임완운을 보고 마음이 여려졌다. 그도 임완운이 심청을 아끼고 근래 심청을 위해 몸과 마음을 혹사한 것을 알았다. 그래도 임완운이 본처기에 심귀는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했다. 그는 향란과 채국에게 준엄하게 꾸짖었다.
“부인이 어째서 이렇게 초췌한 것이냐? 너희는 주인을 어찌 모신 게야?”
임완운은 심귀의 누그러진 기색을 알아채 기뻐했다. 그녀는 이마를 문지르며 불쌍한 척했다.
“그녀들 탓이 아닙니다. 제가 심청에게 마음을 쓴 거예요. 근래 밥맛이 없고 잠을 못 이루니 아주 괴롭습니다.”
“심청의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 너무 많은 생각은 무익하오. 몸과 마음을 정양하시오. 부는 당신의 관리가 필요하오.”
심귀가 임완운을 보았다. 임완운이 집안을 관리했을 때 그는 아주 편안했다. 심신의 자산이 태반인 공동 자금을 빼돌릴 때마다 임완운이 적당한 명목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임완운이 심청을 돌보느라 진약추가 집안을 관리하게 됐으니 당연히 일 처리가 전같이 편하지 못했다. 자신이 누려야 할 바를 모두 삼방이 독차지하니 몹시 언짢았다.
임완운은 이를 갈았다. 역시 심귀는 자신의 관직을 위할 뿐 심청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청의 곁에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황부로 시집보내자는 거잖소.”
심귀의 말투는 누그러졌지만 부드럽지 않았다.
“여인은 머리카락은 길지만 견식은 짧지. 심청이 저 모양이니 황부가 딱 맞소. 황부의 가업은 크고 심청은 본처가 되는 일인데, 그대가 승낙하지 않는다니.”
임완운은 냉소했다. 심귀는 정말 박정한 아버지였다. 다 알면서도 황덕흥을 좋은 남편감이라고 말하다니. 심귀가 이익과 관련된 일에만 목을 매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나 임완운은 새삼 분노해 눈가가 떨렸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것들을 다툴 때가 아니었다. 임완운이 눈을 비볐다.
“나리 말씀이 맞습니다. 이전에는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종일 집에 있어서 이런 큰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나리가 고른 남편감, 당연히 아주 좋을 테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심청에게 아주 좋은 일 같습니다.”
심귀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임완운을 바라보았다.
“승낙하는 거요?”
임완운의 얼굴 위 슬퍼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네. 심청이 저 모양이니 어느 집안에서 그녀를 받아주겠습니까? 생각해보니 황가가 좋을 듯합니다. 적어도 시집가면 심청은 의식주 걱정이 없을 테지요. 만약 그러고도 불행하다면 그것은 그녀의 운명이지요…….”
임완운은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낮게 울었다.
심귀는 임완운의 눈물을 믿고 마음을 내려놨다. 심청은 이미 순결을 잃었다. 황부는 높은 가문의 적녀를 황부의 소부인 자리에 앉혀 세상 사람의 눈을 속이기만을 바랐다. 심청이 황덕흥에게 시집가면 평생 입고 먹는 것에 걱정 없으니 가장 좋은 결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인으로서 평생 애정을 얻을 방법은 없지만 황부가 아니라면 그녀를 원할 곳은 없을 터였다.
심귀는 탄식하며 임완운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잘 생각했소. 심청은 결국 내 딸, 나 역시 그녀를 위하오. 황 대인과 나는 우정이 깊으니 그에게 심청을 잘 돌보아달라고 부탁할 거요. 심청이 출가 후 절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임완운은 심귀의 겉만 번지르르한 구실을 경멸했으나 얼굴 위에는 믿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나리께서 황 대인과 상의해 황가가 사람을 보내 사주단자를 교환하자 하십시오.”
“이렇게 빨리?”
심귀는 놀라자 임완운이 탄식했다.
“심청이 저 모습인데 지체할 수 있겠어요? 오래 끌면 누군가가 알아챌 겁니다. 심청은 오래 외출을 하지 않았어요. 황가에 시집가면 적어도 숨길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임완운이 명치를 문질렀다.
“오래 끌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에요. 심청에게 일이 난 후 전 늘 두렵습니다.”
두려워하는 임완운을 본 심귀가 낮게 말했다.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소. 일은 지체할 수 없지. 이럽시다. 내가 오늘 황 대인에게 편지를 보내 이 일을 거론하겠소. 사주단자를 교환하면 상의할 시간도 필요 없을 거요.”
“모두 나리께 맡기겠습니다.”
임완운이 온순하게 말했다.
심귀는 만족스럽게 떠났다. 임완운이 고개를 숙여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의 말을 따르겠다고 했다. 근래 고민거리가 모두 해결됐으니 기분은 상쾌하고 발걸음은 순풍에 돛 단 듯했다.
심귀가 채운원을 떠나자 향란은 바깥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운 듯 말했다.
“마님, 이 일을 주인어른께 숨겨도 정말 괜찮을까요?”
임완운은 심귀를 속여 자신이 심청이 황덕흥에게 시집가는 데 진정으로 동의했다고 여기게 했다. 심청과 심묘의 혼사를 바꿀 생각인 걸 일체 숨겼다. 이렇게 되면 심청은 진정 좋은 사람인 위겸과 혼인하고 심묘는 그 방탕한 남색가인 황덕흥과 혼인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이 일을 심귀가 알게 할 수 없었다. 결말이 어떨지를 떠나서 심귀는 그의 관직에 나쁜 일이 생길 가능성을 절대로 감수하지 않았다. 임완운은 딸을 불구덩이에 밀어 넣을 수 없었다.
“당연히 숨겨야지. 저 같잖은 비양심은 심청을 팔아 관직을 사려는 거야. 내가 원하는지 마는지는 묻지도 않겠지.”
임원운은 냉소했다. 딸에게 사고가 났는데 심귀는 줄곧 냉담했다. 심청의 일 이후 임완운은 많이 늙은 티가 났다. 주름살이 더 늘어났고 인자하고 선했던 얼굴에는 음험한 표정만 남았다.
“이 일은 작은 실수도 없어야 한다. 나리가 발견해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이러면 아가씨께 불리한 게 아닌가요? 성공해도 진상을 안 황부와 위부가 달가워하지 않을 텐데요…….”
채국이 물었다.
“안심하거라. 황부는 평판을 원할 뿐 며느리가 누구든 상관없다. 위부에서 뭐라고 하면 난 먼저 위부가 순결한 여인을 더럽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입을 다물 테지. 게다가…….”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나의 심청이 어디가 나쁘냐? 설마 심묘 그 천한 것보다 못하려고! 심묘가 심청으로 바뀌면 위부의 복이지!”
심묘를 말하니 임완운은 원한에 온몸이 떨렸다. 향란과 채국은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말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임완운이 입을 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두 혼사를 서둘러 정하는 것이다. 대방이 수도에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야 해.”
“큰 주인어른은 연말에야 돌아오니, 아직 몇 달 남았습니다. 그런데 혼사가 정해진 것을 심묘 아가씨가 알면 야밤에 도망칠지도 모릅니다. 심묘 아가씨는 예법을 모르잖아요. 그때는 어찌하지요?”
향란이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이에 임완운은 표독스럽게 말했다.
“도망? 흥, 그럴 능력이 있는지 봐야지. 그녀는 지금 사당에서 외출 금지를 당하지 않았더냐? 난 그 사당에 자물쇠를 걸 것이다!”
향란과 채국은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과거 심부는 심묘를 핍박했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효과는 적고 오래 걸리는 방식이었다. 이제 착한 숙모의 가면을 벗어 던진 임완운은 거리낌 없이 심묘에게 강한 수단을 쓰려고 했다.
“그 천한 것은 속임수를 잘 부리니 자물쇠를 걸어야 해. 때가 되면 한 잔 술을 가마로 보낼 테니 하늘을 찾든 땅을 찾든 소용이 없을 것이다. 황부도 만만하지 않은 곳이니 며칠 잘 교육한 후 보내면 얌전해질 거야.”
임완운은 악랄한 의중을 숨기지 않았다. 음험하게 미소 지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게다가 우리에겐 예친왕 전하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