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장 (32/71)

12장

겨울은 점점 추워졌다. 서북 사막에서는 승전보가 연달아 들려왔다. 심신이 인솔한 군대는 용맹하게 싸우기로 유명했고 그만큼 적을 물리친 공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적군은 그들의 소문을 들은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정경성 사람들은 연말에 심신이 돌아오면 또 황제로부터 무수한 하사품을 받으리라 추측했다. 심신의 영광은 여러 고관대작의 질투를 샀지만 모두 심신이 직접 전쟁터에서 칼을 휘두르고 피를 흘리며 최선을 다해 이룬 성과였다. 흉노는 물러나지 않고 있고 주위 이웃 국가 역시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명제 황실은 당연히 심신을 아껴야 했다.

그러나 황실은 줄곧 신하들을 사냥개로 여겨 하루빨리 토끼를 잡기만을 기다렸다. 더욱이 심신의 명성이 날로 높아짐을 경계하니 심가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또한 황제가 바뀌면 신하도 모두 바뀌는 법이었다. 심지어 지금 명제 황실에는 아홉 황자가 있어 배후에 불온한 움직임이 샘솟으니 심가는 더욱 한 치 앞을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셈이었다.

명실상부한 공훈 귀족 심부의 혼사는 정경성을 떠들썩하게 만들고도 남을 큰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무엇 때문인지 잘 알려진 게 없었다. 중서시랑부 위가와 소부겸부 황가가 혼담을 꺼냈다는 소문만 들렸다. 이 두 가문은 부귀한 대부호며 두 공자는 젊은 인재이니 심부와 걸맞다고 할 수 있었다. 심모는 매일 광문당에 나왔기에 사람들은 혼인할 사람은 심가 대방 적녀 심묘와 이방 적녀 심청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심청의 혼사는 이해가 돼도 심묘의 혼사는 예상외라는 평이 많았다. 지금 무관 중 심신과 대등한 사람은 사정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정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황명으로 장수 인장을 손에 넣을 때를 제외하면 쭉 정경성에 있었다. 그에 반해 심신은 1년 내내 변경의 관문을 지켰다.

심신처럼 큰 권력을 손에 쥔 자의 여식과 혼인한다는 것은 남편 집안이 조력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명제 황실의 눈이 계속 지켜보고 있었지만, 다행히 지금 혼담을 꺼낸 두 가문은 모두 문신의 길을 걸어 무신 가문끼리 합쳐지는 일은 아니었다. 동시에 위가와 황가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 황위 쟁탈에 구정물을 튀길 염려가 적었다. 그래서 이 혼사는 이전 심묘가 정왕을 사모하는 일에 비한다면 매우 순조롭게 보였다.

* * *

광문당.

역패란이 심모에게 물었다.

“심청 언니와 심묘는 정말 혼인하는 거야? 광문당도 오지 않고.”

와룡사를 다녀온 후부터 심묘와 심청은 심부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그러니 광문당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심묘는 외출 금지를 당했고, 심청은 정양해야 했기 때문이다.

심모는 태연하게 웃었다.

“나도 잘 몰라. 그런데 아마 맞을 거야.”

“네 자매들은 운도 좋다. 특히 심묘가. 위 공자 황 공자 누구든 괜찮잖아. 어째서 네게는 혼담이 나오지 않은 거야?”

강효훤이 묻자 심모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난 아직 부에 몇 년 더 있고 싶어. 혼사는 생각 없어.”

하지만 심모 역시 의혹과 근심은 있었다. 심모의 나이 정도면 혼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때였다. 게다가 심묘는 심모보다 어린데도 혼사가 정해졌다. 심청은 몸이 상했기에 말할 것 없으나 심묘가 좋은 혼사 자리를 찾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심모는 말하기 어려운 질투를 느꼈다. 심묘가 좋은 것을 갖는 것을 두고 봐야만 하다니 몹시 분했다.

게다가 시험 때 그녀는 심묘보다 못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위가가 먼저 혼담을 꺼냈다는 건 사람들이 심묘를 인정하기 시작한다는 소리기도 했다. 만일 진약추가 그녀를 타이르지 않았다면 심모는 계속해서 이 문제에 깊게 파고들었을 것이었다.

백미가 그녀의 이마를 찔렀다.

“지금 시기가 딱 좋아. 자기부터 챙겨야지. 아니면…… 저쪽은 어때?”

백미는 채임을 가리켰다. 심모는 채임을 바라봤다. 심모와 눈이 마주친 채임은 잠시 그녀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거북한 얼굴로 피해버렸다. 심모의 눈 주위가 단시간에 붉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연모의 정을 깨닫는 나이가 되고부터 그녀에게 온 마음을 다하던 소년이 지금 뱀이라도 본 듯 자리를 피하자 거만한 심모는 말로 다 못할 치욕을 느꼈다.

채임은 심모의 규탄하는 시선을 모른 체하며 근심했다. 시험장에서 심묘에게 잊지 못할 교훈을 얻은 후 심묘를 볼 때면 그는 늘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날의 공포는 생생해서 채임은 감히 심묘와 한자리에 있지 못했다. 게다가 그날 사경행은 심묘를 도와준 것 같았다. 채임은 광문당의 소패왕이지만 사경행에게 반항할 수는 없었다. 사경행이 심묘를 도와준 것이 맞든 아니든 채임은 심묘를 피해 다녔다.

무엇보다, 그날 심모는 채임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조금도 염려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심모를 향한 채임의 열렬한 마음은 전부 식어버린 차였다.

심모가 언짢아하는 것을 본 역패란은 입을 삐죽였다. 그녀는 화제를 돌리며 웃었다.

“곧 너희 집안 노부인의 생신이지. 나도 선물을 골라야겠어.”

다음 달 노부인의 생일축하 연회가 있을 것이었다. 역패란을 비롯해 명제의 좋은 관가는 모두 심부의 초청을 받았다. 생일에는 당연히 선물을 준비하는 법이었다.

심 노부인의 생일에는 늘 아주 화려한 연회를 열었다. 연회가 얼마나 호화로운지 황실 사람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노부인은 과거 자신이 천한 신분이었던 데 자격지심이 있어서 생일축하 연회를 웅장하게 해야 체면이 선다고 여겼다. 그녀는 매년 수많은 관가 사람을 초대했다. 심귀와 심만은 당연히 즐거워했다. 은자는 순전히 다 심신의 주머니에서 나왔지만, 실제 세를 과시하면서 여러 동료와 친교를 맺는 건 자신들이기 때문이었다.

백미는 그제야 기억난 듯했다.

“맞다. 잊을 뻔했는데 얘 덕에 알았네. 심모야, 넌 노부인께 무슨 선물을 준비했어?”

심모는 생일축하 연회마다 재주를 부린 선물로 심 노부인의 체면을 세워줬다. 심청이 비싼 물건을 꺼내면 심모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정교한 물건을 꺼내는 식이었다. 반면 심묘가 준비한 선물은 매번 사람들이 이가 빠지도록 웃게 만드는 것이었다.

“수놓은 초상화에 불과해.”

심모가 겸손하게 말했다. 강효훤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네 동생은 또 무슨 선물을 준비했을까? 혼례복에 수를 놓는다고 노부인 생신 선물을 깨끗이 잊은 거 아니야?”

탁자 위 엎드려 있던 풍안녕이 차갑게 흥 소리를 낸 후 자리를 떠났다. 수업을 모두 마친 후 물건을 정리하던 배랑 역시 역패란 무리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 역시 심묘의 정혼 소식을 듣고 괴이한 기분이 들었다. 그 맹수 같은 눈동자의 소녀가 이리 일찍 숨게 된다니 과연 그녀가 그리할지 지켜보고 싶었다.

* * *

심부 사당.

심묘는 바둑알을 길게 늘여놓고 있었다. 사당은 응달진 곳에 있어 청회색 석판에 무릎을 꿇고 있으려니 찬 기운이 무릎뼈에 스며들었다. 경칩과 곡우가 부드러운 깔개를 가져왔으나 깔개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들은 심묘의 분부로 약초를 끓였다. 심묘는 약초를 방구석에 두고 연기를 쐬면 추위를 쫓아 병이 걸리지 않는다고 알려주었다.

경칩과 곡우는 처음에는 미심쩍어했으나 직접 연기를 쐬면서 이 방법이 효과적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심묘에게 어디서 이런 비방을 알았는지 물었다. 심묘는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고 말했으나 사실 진국에 인질로 있던 몇 년간 몸소 터득한 것이었다. 당시 돈이 부족했던 심묘는 추운 날씨에 가장 저렴한 민간요법으로 체온을 유지하곤 했었다.

“아가씨, 아직도 바둑을 두세요?”

경칩은 발을 동동 굴렀다. 경칩이 안절부절못해도 심묘는 태연한 얼굴로 바둑을 늘여놓을 뿐이었다. 검은 돌이 승기를 잡기도, 흰 돌이 승기를 잡기도 했다.

“춘도가 모경을 통해 말을 전했습니다.”

경칩은 심묘를 보며 채근하듯 이어 말을 전했다.

“둘째 마님께서 아가씨와 심청 아가씨의 혼사를 바꾸려 한답니다. 그 황가 도령은 남색가라는데, 이걸 어찌합니까. 어째서 계속 바둑만 두시는 거예요?”

위가의 혼사를 좋다고 생각했으나 심묘는 송경당에서 심 노부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래서 벌로 사당에 갇혔다. 그러나 춘도가 알아본 결과 심부는 심묘 몰래 혼사를 받아들였다. 서원 사람들만 모르는 일이었다. 심묘와 그녀의 주변 사람들만 빼고 심묘가 시집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겸에게 시집가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그가 덕행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덕흥은 남색가였다. 그에게 시집을 가면 과부가 되는 셈이었다.

심묘의 여종들은 미칠 것만 같았다. 어찌할 바 모르는 여종들을 보고 모경은 심묘가 원하면 그녀를 데리고 도망칠 수 있다고 말했다. 모경은 강호인이니 도망가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망친 후 일이 얼마나 참혹하게 흘러갈지는 몰랐다. 그녀가 도망친다면 사람들은 이야기를 마음대로 날조하며 손가락질할 터였다. 진상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이 없었던 심묘는 모경의 제안을 단숨에 거절했다.

“적어도 모경이 아가씨를 대신해 주인어른께 말을 전하게 하시지요. 그들은 이 일을 주인어른께 숨기고 주인어른이 돌아오기 전 서둘러 아가씨를 혼인시키려 합니다. 엎지른 물은 어떻게 해도 주워 담을 수 없으니 그 전에 서두르셔야 해요.”

곡우도 심묘에게 권했다. 곡우는 심묘에게 어떤 생각이 있음을 알았지만, 그녀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니 걱정과 근심은 매 순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에 심묘는 담담히 말했다.

“뭐라고 전할까? 지금 서원 바깥에는 둘째 숙모의 사람이 지키고 있어서 파리도 나가지 못해. 내가 도망치면 이곳에 남을 사람은 어찌해? 내가 인자한 사람은 아니지만 서원 사람들은 대부분 부모님께서 특별히 내게 남겨준 사람이야. 내가 가고 나면 숙모는 바로 온 서원 사람들을 죽일 거야.”

경칩과 곡우는 멍해졌다.

“게다가 말을 전하는 것을 간단히 여기는데, 이곳은 온종일 사람이 지키고 있어. 이렇게 나를 가둬두는데 기회가 있을 것 같아? 너희가 둘째 숙모를 너무 얕보는구나.”

심묘가 보기에 임완운의 수완은 겁낼 것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한 법. 임완운은 심청의 행복을 위해 기를 쓰고 이 일을 성사시키려고 했다. 전력을 다하고 있는 셈이었다. 심묘는 혼사를 바꾸는 일은 심귀와도 상의하지 않고 그녀 혼자 진행하는 일이라고 추측했다. 실패하면 이후 임완운은 심부 안에서 설 곳이 없게 될 것이었다.

“아가씨, 그렇다고 그냥 이렇게 가만히 계시려고요? 저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아가씨가 그 남색가에게 시집가시지 않게 할 거예요!”

경칩이 조급한 듯 외쳤다.

“너희는 이 바둑 형세를 어떻게 보느냐?”

심묘는 탁자 위 바둑판을 가리켰다. 바둑판 위 흰 돌과 검은 돌이 분명하게 두 줄로 구분되어 정렬되어 있었다.

“저는 바둑을 모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곡우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네가 볼 때는?”

경칩은 대담하게 대답했다.

“흰 돌과 검은 돌을 한 줄씩 매우 분명히 늘어놨네요.”

심묘의 눈에 예리한 빛이 스쳤다.

“맞아. 이것은 바둑돌의 조건을 다 밝힌 거야. 서로 상대의 돌들을 다 아는 것이지. 최후 승패는 각자 능력에 달렸어.”

경칩과 곡우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심묘의 말뜻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숙모는 내 모든 바둑돌을 알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아.”

그녀가 몸 뒤에서 다시 검은 돌을 꺼내 흰 돌 옆에 놓았다.

“나에겐 아직 마지막 돌이 남아 있지. 노부인의 생신이 다음 달이지?”

경칩이 대답했다.

“네. 춘도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둘째 마님은 노부인 마님의 생일축하 연회에서 아가씨의 혼사를 공포할 거랍니다.”

“그 전에 부친께서 서둘러 돌아오셔야 할 텐데.”

심묘는 살짝 웃었다.

“맞아요, 연말은 아직 한참이나 남아서 걱정이에요.”

곡우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심묘는 그 말에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심신의 군대가 개선해 돌아오는 시일은 거의 연말이었다. 그러나 명제 68년. 심신은 서북 적군에게 대승했다. 적군은 도주하며 항복 서신을 보냈다. 그래서 전생 심가 군은 특별히 연말 전에 정경성으로 돌아왔다.

우연이 빚어낸 공교로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심신이 효심을 보이기 위해서였기도 했다. 심 노부인의 생일날마다 심신은 수도에 없었다. 그 횟수가 쌓여가니 심신이 불효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명제 68년, 심 노부인 고희 연회에 맞춰 심신은 돌아왔다.

그날 심신은 갑자기 돌아왔다. 그는 부로 돌아와 가족과 단란한 한때를 누리려 했으나 딸 심묘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왕부에 숨어 있었다. 딸이 예의에 맞지 않은 일을 저질렀음을 안 심신은 그길로 정왕부로 갔으나 심묘는 부수의의 위선적인 온정에 기대 집으로 돌아오라는 심신의 말을 못들은 체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부수의에게 시집보내 달라고 심신을 협박했다. 지금 생각하니 전부 심묘 자신의 업보였다. 일 년에 한 번 정도나 가족들과 즐거이 지낼 수 있는 심신이 돌아와 마주한 것은 바로 이런 불효한 딸이었다. 그 딸이 심가를 이리 굴에 끌어들였고, 다시 되돌릴 길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지금은 전생이 아니었다. 그녀는 예친왕을 피하려고 달아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수의에게도 미련을 두지 않았다. 심신이 돌아오면 전생의 죄업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까. 심묘는 눈을 뜨고 담담히 말했다.

“부친은 줄곧 노부인을 존경하셨어.”

심 노부인은 가녀 출신으로 숙련된 연기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애로운 모친 시늉을 완벽하게 했다. 그러나 노장군이 살아 있을 때도 그녀는 심신에게 셀 수 없이 잘못했다. 하지만 정을 중시하는 무장인 심신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려고만 했지, 심 노부인이 악랄한 마음을 품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둘째 숙모가 날 도와준 거야. 잘됐어. 천하 사람들이 보도록 가면을 벗겨내자.”

심묘는 미소를 머금었다. 눈에는 놀랍도록 형형한 광채가 어렸다.

* * *

11월 초삼일, 태양이 높게 떴다. 겨울에 좀처럼 보기 힘든 좋은 날씨였다.

심부는 심 노부인의 생일축하 연회를 맞아 안과 밖을 청소했고, 공동 자금에서 꺼낸 은자로 새로운 물건들을 구입했다. 생일축하 연회는 당연히 동원에서 진행했다. 동원은 그윽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었다. 정갈하게 다듬은 꽃을 이곳저곳에 배치해 한층 멋스러워 보였다. 하인들 역시 생김새가 수려하고 귀여운 데다 깨끗한 옷을 입었다. 오늘은 더욱 말과 행동이 예의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당부를 들은 그들은 몸가짐도 조심스러워 대부호 집안의 하인다웠다.

심 노부인은 송경당 안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많은 부인과 소저가 그녀에게 안부를 물었다. 심가는 명제에서 손꼽는 무장세가이기에 고관과 귀인들이 방문했고 임완운도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없었다.

지금은 잠시 진약추가 집안일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이전에는 쭉 임완운이 심 노부인의 생일축하 연회를 준비했다. 그래서 귀부인 상대는 임완운이 진약추보다 잘했다. 귀부인 대응에는 도가 튼 임완운 덕에 송경당 안에는 즐거운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심원백은 심 노부인 품에 기대어 벌꿀이 들어간 유당(乳糖, 우유로 만든 사탕)을 먹고 있었다. 부인들은 곁에서 수시로 그가 어린 나이임에도 이처럼 영리하니 반드시 장래가 유망할 거라고 아첨했다. 심 노부인은 싱글벙글 웃었다. 임완운도 와룡사에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심청을 걱정하지 않고 다디단 아첨을 즐기고 있었다. 심청 일로 어두워진 마음이 오랜만에 맑게 개었다.

진약추는 사람들이 구구절절 이방의 심원백과 외부로 부임한 심원을 칭찬하는 것을 보고 매우 불편했다. 그렇지 않아도 진약추는 아들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진약추가 심만에게 시집온 지 여러 해 지났으나 아들이 없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심 노부인이 일찍 심만에게 여러 첩실을 두어 대를 이으라고 했으나 심만은 다른 여인에게 관심이 없다며 거절했다. 노부인은 진약추에게 분풀이를 했고 어부지리로 아들이 둘이나 있는 임완운은 심 노부인의 환심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심청과 심묘가 보이지 않나요?”

역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임완운은 부인들 접대를 책임졌고, 심모는 소저들을 응접했다. 역 부인의 말대로 심묘와 심청이 보이지 않았다. 임완운과 심 노부인의 안색이 동시에 어두워졌고, 진약추는 입을 삐죽거렸다.

심청은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았다. 이제 겨우 사람을 응대할 수 있게 되긴 했으나 아무 데서나 심묘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외부 사람이 듣게 할 수는 없었다. 임완운은 심청이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않도록 심청에게 심묘의 참혹한 결말을 약속하며 위로했다.

심묘는 어디서 심 노부인이 비밀리에 위가의 사주단자를 받았다 들었는지 몰라도 이후 미친 듯이 반항하며 혼사를 거부했다. 심지어 억지 혼사를 피해 집을 나가겠다고 외쳤다. 심 노부인은 큰일이라고 걱정을 늘어놨으나 임완운은 여러모로 방법을 궁리했다. 근래 심묘는 고집을 꺾을 줄 모르니 혼인을 거부해 가출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했다.

임완운은 노부인에게 심묘가 절대 나와서는 안 된다고 했다. 심묘가 사고를 치면 심청과 혼례를 바꾸는 계획도 틀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노부인과 임완운은 일을 철저히 하려고 아예 사당에 자물쇠를 채웠다. 사당은 심부에서 가장 깊숙한 서남쪽 뜰 안에 있어 보는 눈이 별로 없었다. 그들은 호위도 반 정도 더 늘렸다. 게다가 심묘의 일급 여종 네 명을 포함한 서원 안 하인들의 노비 계약서는 모두 노부인이 쥐고 있었다. 심묘가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서원의 여종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심묘는 심부 사당에 갇혀 매일 기도하고 독경했다. 임완운은 사당에서 심묘가 교훈을 얻어 사납고 고집스러운 성격을 버리고 예전처럼 온순해지길, 더는 사달이 생기지 않길 희망했다. 그래도 불안이 가시지 않았던 임완운은 심 노부인의 생신날 심묘가 사람들 앞에서 큰일이 날 말을 하지 못하도록 미리 노부인과 상의해 심묘가 아예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 없도록 했다.

심묘를 생각하니 임완운은 골치가 아팠다. 심부에서 오랜 시간 지냈지만 이번만큼 심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묘를 머저리라 여겼건만 그녀는 표정 한 번 바꾸지 않고 심청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그토록 자신을 숨기면서도 혼사를 피하기 위해 도망가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도저히 다음 수를 예측하지 못하니 그녀를 가둘 수밖에 없었다.

진약추는 임완운의 난처한 표정을 감상하며 웃는 얼굴로 대신 대답했다.

“심청은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아 지금은 나올 수 없습니다. 노부인의 생일 예식 때는 나올 거예요. 심묘는 전염병에 걸려 바람을 쐬면 안 됩니다. 마진(痲疹, 홍역)이 얼굴까지 올라왔는데 여기는 아가씨들이 많아서 옮길까 걱정돼 방 안에 있도록 했습니다.”

심묘가 병에 걸렸다 하면 호기심에 한번 가보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 수 있다고 하면 감히 방문할 용기를 내지 못할 터였다.

강효훤의 모친인 강 부인이 웃었다. 그녀는 탐색하는 듯했다.

“그렇군요. 난 두 아가씨가 혼사로 바빠 우리도 만나길 원치 않는다 여겼어요. 아가씨들을 잘 보살펴야 해요. 장래 시집갈 때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해야지.”

주위 부인들도 강 부인의 말에 맞장구쳤다. 정경성에서 위부, 황부의 혼사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막상 심부는 지금까지 말이 없어서 부인들은 궁금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임완운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녀는 당연히 강 부인의 의도를 알아챘다.

“별말씀을. 혼사로 바빠도 노부인의 생신인데 당연히 나와 효를 다해야지요. 두 아이가 정말 병난 게 아니라면 어째서 여러 부인을 뵙지 않겠어요?”

혼사가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부인들은 임완운의 말을 알아듣고 축하의 말을 계속했다. 심 노부인은 여전히 심원백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자애로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손님과 주인이 극히 즐거운 모양이었다.

* * *

추수원의 극장.

소녀들은 한데 모여 있었다. 그들은 바둑을 두고 엽자패를 하며 간식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심모야, 심청 언니와 심묘가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데 정말로 아픈 거야?”

강효훤의 말에 심모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정말로 아파. 심청 언니의 몸은 나아졌지만, 심묘의 질병은 무서워. 마진에 걸려서 심묘 곁의 여종도 감염됐어.”

백미가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어쩐지. 서원은 바깥에서 여러 사람이 지키고 있더라니. 그곳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어. 그곳 하인들이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까 걱정해서 그런가 보다. 배랑 선생님께서도 말하신 적 있지. 이전에 전염병이 곳곳으로 번지는 것을 예방하고자 병자들을 분리했다고.”

“바로 그거야.”

역패란은 자신의 두 어깨를 문지르며 몸서리쳤다.

“정말 무섭다. 우리에게 옮길라.”

“걱정하지 마. 서원 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전해. 봐봐, 난 감염 안 됐잖아?”

심모는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어 보였다.

“이 상황에서도 걜 챙기다니 넌 정말 마음이 넓다. 심묘는 액운이 함께하는가 봐. 늘 이런 일이 생기네.”

역패란은 입을 삐죽였다. 풍안녕의 눈 속 분노가 스쳤으나 억누르고 작게 욕했다.

“심묘가 재앙을 불러오는 것인지 다른 사람이 재앙을 불러일으키는지는 알 수 없지.”

풍안녕이 말하는 ‘다른 사람’은 바로 심모였다. 진청만이 풍안녕의 이야기를 듣고 차갑게 흥 소리를 냈다. 진청의 표정은 여전히 도도했고 심모를 보는 시선은 날이 서 있었다. 풍안녕은 심묘와 사이가 좋은 편이니 심모를 배척했고, 진청은 광문당에서 심모의 적수였다. 심모는 집안의 입장을 생각해 두 소녀를 부르긴 했으나 소홀하게 대했다. 그래서 진청과 풍안녕은 심모와 떨어져 함께 앉아 있었다.

“진짜 병난 것인지 누가 알겠어?”

진청은 심모에 대한 경시를 숨기지 않고 풍안녕의 말을 듣자마자 말했다. 이에 풍안녕이 진청을 바라보았다.

“너도 그렇게 느꼈구나. 우리 심묘를 보러 가보자.”

“난 걔한테 관심 없으니 원하면 너 혼자 가.”

진청은 단박에 거절하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심부는 지금 서원에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어. 마진 감염이 걱정되나 봐. 너도 들어가지 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모두 심부의 자녀인데, 무슨 이유로 심묘는 심 노부인의 생신연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거야? 혼자 서원에 갇혀 있으면 옥살이와 무슨 차이가 있어?”

풍안녕은 분개했다.

“다른 사람 일에 너도 관여하지 않는 게 좋아. 어쨌든 너와 나랑은 무관하니까.”

진청은 풍안녕을 한 번 흘겨보았다. 풍안녕은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아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심모를 노려보았다. 그때 창밖에 어떤 그림자가 꽃 무더기 속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 * *

서북쪽 뜰.

심부의 서북쪽 구석의 뜰은 지세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많은 잡초가 자라 황폐했다. 새와 길고양이를 제외하면 평소 사람은 오가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담장 아래 몇 명이 서 있었다.

개중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사람이 극장을 등진 채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상념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두머리 뒤에 있는 사람이 말했다.

“주인님, 동원을 지나왔는데 심부 서원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이미 조사했는데, 서원을 지키는 호위는 없습니다. 심부의 사당 밖은 많은 고수가 지키는데, 혹시…….”

“서원을 치는 척하면서 사당을 치자.”

우두머리가 고개를 돌려 출중한 얼굴을 드러냈다.

“물건은 심부 사당에 있군.”

* * *

심부 동원은 대단히 떠들썩했다. 손님들이 오고 가며 생일을 축하하고 선물을 주니, 본격적인 연회의 막이 오르기 전인데도 이미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심 노부인은 외부인 앞에서 늘 사치스러운 모습을 고수했기에 아가씨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생일을 축하하면 답례로 귀중한 선물을 줬다. 부인들은 그걸 지켜보면서 더욱 환하게 웃었다. 임완운은 그들이 받아가는 선물을 보며 몰래 이를 갈았다.

임완운은 공동 자금을 관리해 평소 심부의 주모를 맡고 있었다. 이렇게 노부인이 돈을 헤프게 쓰면 그녀가 중간에서 가로채는 돈이 적어졌다. 더구나 심귀는 관직을 위해 뇌물을 뿌리길 좋아했으니 추후 형편이 곤궁해질까 걱정이었다.

연회장은 대단히 복작거렸지만 심부 서남쪽 사당은 쓸쓸했다. 문밖에는 호위들이 서 있었다. 난데없이 사당을 지키라니 이상한 임무였으나 그들은 책임지고 심묘를 지키며 그녀가 사당 안에서 도망치지 않도록 감시하고 있었다.

사당은 오랜 세월 태양을 보지 못한 위패들로 가득해 음산했다. 볕이 거의 들지 않아 겨울에는 찬바람이 뼛속까지 들어오는 추운 곳이었다. 주위는 향과 재 냄새가 가득했다. 불단 앞에 훈향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곡우가 두 손을 비볐다.

“아가씨, 오늘은 노부인 마님의 생신인데도 아가씨를 여전히 가둬두다니. 사람을 너무 괴롭히네요!”

심묘에게 나오라고 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안부를 물으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잘못을 저지른 하인의 대우보다 나은 바가 없었다.

“뭐가 급하느냐.”

창문 앞에 서 있는 심묘가 말했다. 창밖 앙상한 겨울나무는 적막함을 드러냈다. 경칩은 계속 화롯불을 헤집었다. 화롯불과 약초를 끓이는 연기만이 차가운 사당을 따뜻하게 해줬으니 불씨가 꺼져서는 안 됐다. 그 모습에 곡우는 여러 날 참아온 울분을 터트렸다.

“아가씨는 어째서 태평하신 거예요?”

평소 말을 아끼던 곡우였으나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아가씨를 이곳에 가두어두고 혼사로 핍박하고 있습니다. 연말에 주인어른과 마님이 돌아오셔서 아가씨를 보호하려 해도 아가씨는 이미 황가에 시집가셨을 테니 돌이킬 수 없을 거예요!”

살짝 가려진 뒷방 안에서 심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불을 가져가 바깥에서 햇볕에 한 시진 쬐거라.”

“아가씨!”

곡우는 심묘의 무심한 태도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투명한 심묘의 눈을 마주한 곡우는 입술을 깨물긴 했으나 분부대로 방 안 이불을 안고 나와 바깥 햇볕에 쬐었다.

“오늘 드물게 날씨가 좋구나.”

심묘가 창밖을 보니 햇살은 사당 안을 쬐지 않고 뜰 중간까지만 비췄다. 사당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으니 햇살을 멀찍이 떨어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셨죠. 주인어른과 마님께서 정말 오늘 서둘러 오실까요?”

경칩은 화롯불을 헤집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 심묘는 경칩에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일러뒀다. 연말이 오기 전, 노부인 생일 당일에 심신 부부가 수도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러나 지금까지도 심신은 돌아오겠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았으니 이는 엉터리라고 볼 수 있었다. 그래도 경칩은 심묘의 말에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사당에 갇혀 있는 심묘가 어디서 이런 소식을 듣는지 의문이 들었다.

“조금 이따가 호위에게 달라붙어서 그들이 사당에서 떨어지게 해. 아예 떨어지지는 않을 테니, 그저 멀어지게만 해.”

“알겠습니다.”

경칩은 심묘가 왜 이러는지 몰랐으나 사당 안에서 지내는 동안 심묘는 단 한 번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심묘가 당황하지 않는 까닭은 아둔해서이거나 대응할 책략이 있거나, 이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일 것이었다. 경칩은 심묘가 아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곡우처럼 걱정은 해도 심묘가 반드시 이 일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다.

심묘는 경칩의 시선을 보며 탄식했다. 그녀의 일급 여종 넷 중 곡우가 제일 총명하고, 백로가 가장 진중했다. 상강이 가장 충성스럽고, 경칩이 가장 대담했다. 경칩은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일은 곡우와 백로, 상강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경칩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과연 경칩이 자신이 하려는 일을 알고도 계속 도와줄지…… 심묘는 알 수 없었다.

경칩이 작게 말했다.

“사실 모경이 방법을 찾아 아가씨를 데리고 나가는 것도 안 될 것 없습니다.”

모경의 솜씨는 심부 호위보다 위였다. 두 손이 네 손을 이길 수 없다지만, 모경에게는 기회를 잘 보면 한 사람 정도는 데리고 도망칠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그러나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문했다.

“그 후에는? 천지는 넓어. 그냥 도망만 치면 끝일까? 너희 네 명의 노비 계약서는 노부인에게 있어. 내가 가면 너희는 어쩔 거지?”

경칩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저는 아가씨께서 저희의 목숨을 지켜주시려고 이곳에 남은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희로 인해 아가씨가 불행해진다면 저희는 정말 만번 죽어도 속죄할 수 없을 겁니다. 주인어른과 마님께서 친히 저희 네 명을 뽑아 아가씨 곁에 뒀습니다. 저희가 아가씨를 모셔야지, 어떻게 반대로 주인이 하인을 돌봅니까?”

심묘는 감동했다. 부모님께서 확실히 사람을 잘 고르셨다. 이 네 명 여종들은 전생에서도 가장 힘들 때 배신하지 않았다. 세상일은 간단한 이치다. 은혜가 있으면 갚고, 원한이 있으면 복수한다. 자신의 곁을 끝까지 지켜준 여종들을 포기해서는 안 되었다. 심묘가 미소 지었다.

“안심해. 너희와 나 모두 괜찮을 거야. 오늘은 조모의 생신이야. 듣자니 심모 언니는 관세음보살 그림을 조모께 드릴 거라더군. 그들은 날 이곳에 두고 잊어버린 모양인데, 그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둘 수 없지. 나도 큰 선물을 조모께 드려야겠어. 그런데 과연 조모께서 복을 누릴 수 있으실지 모르겠는걸.”

* * *

정경성에서 몇십 리 떨어진 곳.

얼어붙은 시내 옆에서 말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초원은 쇠락을 드러냈다. 병사들은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병사들과 거리를 둔 곳에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전쟁터에서 볕에 그을린 그의 피부는 고동색으로, 피부색만으로도 강인함이 명확히 드러났다. 체구는 작은 산같이 단단했다. 얼굴은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 구레나룻이 있어 매우 호방하고 솔직해 보였고, 미간은 기품과 위엄을 품고 있었다.

그의 옆에 앉은 여인은 풀을 뜯어 먹는 말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 중년 여인은 청색 짧은 솜저고리에 금색 승마용 바지를 입었다. 간단히 머리를 틀어 올렸고 아름다운 눈은 생기가 있었다. 수려하게 생겼으나 그보다도 늠름하고 씩씩한 기상이 더욱 사람들을 매료했다. 그녀는 팔목에 쌍황 은팔찌를 해 말을 쓰다듬을 때마다 팅팅 퉁기는 소리가 났다.

“부인, 아마 한 시진 후면 정경성에 도착할 거요. 수도로 돌아오니 날씨도 단 것 같소.”

중년 남자가 웃으며 여인을 바라보았다.

“서북이 수도보다 뭐가 나빠요? 난 서북의 몹시 추운 곳에서 자랐어요. 단 걸 좋아하면 왜 날 아내로 맞이했어요?”

여인이 아름다운 눈을 크게 뜨며 괄괄하게 따졌다. 사내는 얼른 표정을 바꿔 용서를 빌었다.

“부인의 말이 맞소. 정경성의 달콤함은 우리 같은 거친 사람들에게 적합지 않소. 서북이 좋지. 겨울이 되면 깊은 산에 들어가 사냥합시다. 은색 여우가 곳곳에 뛰어다니니 잡아다 부인의 옷을 만들 수 있을 거요.”

“또 관료적인 말투!”

이 두 사람은 위무대장군 심신과 그의 부인 나설안이었다. 오늘 그들이 급히 돌아온 것은 심 노부인의 생일축하 연회에 참가를 위해서였다. 일찍이 적군의 항복문서를 받아 승리했지만 그들은 일부러 정경성에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기쁨을 주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한 번도 어머니의 생신연회에 참여한 적이 없어요. 여태 늘 연말에 돌아와 폐하의 하사품을 어머니께 드려 생신 선물을 대신했지요. 이번에 준비한 화서(火鼠) 피풍의가 어머니의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어찌 마음에 안 드실 수 있겠소? 그것은 좋은 물건이오. 전쟁터에서도 보물이라오. 그것만 있으면 창과 칼에 찔리지 않지. 화서를 사냥하기 위해 산에서 7일 내내 있었소. 만약 당신이 어머니께 드리자 하지 않았다면 난…… 당신에게 줬을 거요.”

심신이 나설안을 안심시키며 마지막 말을 할 때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명백히 불효였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 저울은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었다. 심 노부인은 심신의 친어머니가 아니었다. 혈연관계가 아니니 심신은 당연히 자신의 아내인 나설안을 더 아꼈다. 게다가 나설안은 평소 그와 함께 전쟁터에 있으니 이 불에도 타지 않는 피풍의는 그녀에게 더 가치가 있었다. 나설안이 심 노부인에께 드려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다면 심신은 나설안에게 선물했을 것이었다.

나설안이 눈을 부라렸다.

“당신이 뭘 알아요? 당신이 연말에 돌아가서 폐하께서 내리신 하사품을 전한다곤 하지만, 매년 노부인의 생신을 놓치니 누가 진심으로 위한다고 보겠어요. 지난번 우리가 정경성으로 돌아갔을 때 당신이 일부러 어머님과 거리를 두고 지낸단 말도 들었어요. 다 당신을 위한 거예요. 당신은 명성을 걱정하지 않겠지만 우리 교교(심묘의 아명)에게 불효한 아버지를 짊어지게 할 수는 없어요.”

심신은 잠시 침묵했다. 정경성은 서북처럼 몹시 춥지 않고 적의 칼과 함정이 없으니 태평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정경성에 없다고 유언비어가 분분하니 화가 날 일이었다.

“당신도 내가 심부 안 잔꾀를 모르는 걸 알 거예요. 우리 나 가문에는 그런 일이 없어요. 난 가장 간단한 방법을 쓰는 거예요. 이 화서 피풍의는 진귀하니, 어머니가 기뻐하는 걸 사람들이 보면 유언비어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거예요.”

“부인의 생각이 세심하오.”

“당신이 아니라 교교를 위해서예요.”

나설안은 새침하게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우울해졌다.

“우리 두 사람은 평소 심부에 없지만, 서북은 너무 위험하니 어린 교교를 데리고 갈 수도 없지요. 이리 여러 해 함께해주지도 못하고 직접 가르치지도 못하니 미안해요.”

심신도 탄식했다. 고개를 숙인 그의 눈 속에 슬픈 기색이 스쳤다. 세상에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을 터였다. 그와 나설안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사람으로 심묘와 동행할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는 적군이 친척과 친구를 납치해 살육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 딸과 떨어져 지냈다. 적어도 수도 안에서는 심묘의 안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설안은 상심한 듯 울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늘 생각해요. 교교를 심부에 두는 게 정말 안전한 것일까요? 부모가 곁에 없는데도 정말 즐거울까요? 연말에 만날 때마다 교교는 늘 우리에게 냉담한데, 그건 모두 교교를 홀로 둔 우리 잘못이에요. 교교를 탓할 수 없어요.”

심묘는 심신 부부는 물론이고, 심지어 오라버니인 심구와도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심구 역시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심묘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심 노부인, 임완운, 진약추였다. 이들은 늘 그녀와 함께 지낸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심신 부부는 늘 심묘를 상냥하게 대했다. 심묘가 아둔하다는 명성이 멀리 퍼져도 그녀를 꾸짖지도 않았다. 직접 뿌린 씨앗이니 별수 없다고 안타까워했을 뿐.

심신이 나설안의 어깨를 토닥였다.

“언젠가 교교도 우리의 고충을 알게 될 거요.”

“그 애가 정말 알게 될까요? 가끔 난 이런 생각도 해요. 누군가 우릴 냉담하게 대하도록 가르친 건 아닌지. 심부…….”

나설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번민하는 눈빛으로 심신을 바라보았다. 심신은 그녀의 의중을 알아채고 안색이 변했다. 그는 탄식하며 애처의 손을 잡았다.

“부인의 생각이 많은 거요. 어머니와 제수씨 모두 교교를 잘 교육하고 있소. 아니라면 교교도 그리 그들과 친근할 리 없을 거요.”

확실히 이방과 삼방을 대하는 심묘의 태도는 두 사람이 질투할 정도였다.

“내가 생각이 너무 많았나 봐요.”

나설안은 서북 나가의 보배이자 적녀였다. 삼품 무관이지만 대대로 무장을 배출해낸 가문의 적녀답게 전장의 피가 흘렀다. 나설안에게는 두 명의 오라버니가 있었다. 가문 안에 추악한 일이 거의 없었기에 그녀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나쁜 일을 겪어보지 못했고 후원의 험악함을 몰랐다. 알았다면 반드시 심묘를 데리고 다녔을 것이었다. 절대로 그 무서운 심부에 심묘를 혼자 두지 않았을 터였다.

그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심신이 엄한 목소리로 답했다.

“외부 사람이 있을 때는 나를…….”

“심 장군님!”

사내가 얼른 바꿔 말했다.

“네 아버지는 상대하지 말거라. 허세 부리는 거야.”

나설안은 심신에게 눈을 흘겼다. 다가온 사내는 나설안과 닮은 단정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밀짚 같은 피부색은 건강해 보였고 웃는 얼굴에는 두 개의 보조개가 있었다. 심신의 적자 심구였다. 심구는 약관을 넘은 나이로 어렸을 때부터 심신이 전장에 데려가 경험을 쌓게 했다. 엄격한 스승 밑에서 훌륭한 제자가 나온다는 말처럼 심구는 용맹했다. 공로도 여러 번 쌓아 지금은 사품 소장군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은 선물을 정하신 거지요? 저는 무엇을 준비할까요?”

심구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 녀석아, 네 선물을 왜 우리에게 묻느냐! 대장부가 이런 작은 일도 결정 못 하다니. 이래서야 어떻게 전쟁터에서 지휘를 맡기겠느냐!”

심신이 기회를 잡아 아들을 꾸짖었다.

“전 오랫동안 조모의 생신 연회에 참여하지 않았잖아요. 뭘 마련할지 모르겠어요. 적군을 죽여 바치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런 건 생신날에 불길하니.”

나설안은 심구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전 폐하께서 네게 천사 비단을 하사하셨지. 그것을 어머님께 드려라. 듣자니 정경성에는 천사 비단이 극히 모자라 궁중 마마도 보시질 못한다니 어머님께 한 필 드리면 당연히 기뻐하실 게다.”

“하지만 그건 교교에게 줄 겁니다!”

심구가 급히 외쳤다.

“됐다. 언제 네 동생이 그런 비단을 좋아하는 걸 본 적 있더냐?”

심신은 손을 저었다. 여자아이의 심리를 모르는 심신도 심묘가 고아한 옷감을 좋아하지 않고 무조건 금처럼 번쩍이는 물건만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유감스러웠지만 심묘가 좋아하는 것을 줄 수밖에 없었다. 천사 비단은 아름다우나 심묘가 기뻐할 만한 선물은 아니었다.

심구는 부친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그는 쪼그려 앉아 작게 말했다.

“이번에는 급히 돌아가서 동생에게 선물도 가져가지 못하다니 생각할수록 창피합니다.”

어릴 적에는 심구와 심묘의 사이가 아주 좋았다. 오누이 둘이 서로를 보살펴 보기 좋았다. 하지만 심구가 성장하고 나서는 매년 심신을 따라 전쟁터에 가게 되었다. 이에 심묘와는 1년에 한 번 겨우 만났다. 심구가 심묘에게 친근하게 대해도 심묘는 그에게 친절하지도 냉담하지도 않고 무관심했다. 오누이 사이는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구는 심묘가 왜 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진 것은 심모와 심청, 계 유모의 이간질 때문이었다. 그들은 심묘에게 심신 부부가 심구만 데려가는 것은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는 경시하기 때문이라고 알려줬다. 아들은 대를 이을 수 있어 중요하지만 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린 심묘는 단순하여 주변 사람의 말에 쉽게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오라비가 부모의 관심을 전부 빼앗았다고 생각해 그를 미워하고 친하게 지내려고 하지 않았다.

심신이 몸 위 먼지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됐다. 형제들에게 일어나라고 하거라. 길을 재촉하자. 한 시진 안으로 반드시 정경성에 도착해야 한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생일축하 연회의 막이 올랐다. 부인과 아가씨들은 이미 모두 앉아 있었다. 정경성에서 품계를 받은 관가 부인들은 빠지지 않고 참석해 탁자 열 개를 모두 채웠다. 그만큼 심가의 명성은 대단했다. 사실 그들은 심 노부인의 얼굴을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위무대장군 심신의 명성 때문이었다.

심모는 흰색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달빛같이 은은한 색채는 그녀의 부드러움과 얌전함을 두드러지게 했다. 그녀가 이렇게 특별히 신경 써 단장한 것은 까닭이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부인들은 아름다운 심모를 보며 그녀와 혼인하면 얼마나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계산했다. 심청과 심묘는 이미 남편감이 있으니 심모는 심가를 잡기 위한 마지막 패였다.

노부인에게 선물을 건넨 남자들은 자연히 심귀와 심만의 손님이 되었다. 심귀와 심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리는 왁자지껄했다. 그 자리에는 평백부 소욱도 있었다.

소욱은 골치가 아파 술잔을 들었다. 소가와 사가는 관계가 좋았지만 심가와 사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도 심가는 그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소욱은 누구에게나 잘해 미움을 사지 않는 사람이었다. 초대장을 받았으니 거절할 수 없던 그는 무리해서 연회에 참여했다. 그는 ‘병으로 침상에 누운’ 큰아들이 부러웠다. 그는 적어도 이렇게 꿍꿍이를 품은 능구렁이들 사이에 있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소명랑이 눈을 깜빡거렸다. 오늘 소명랑도 정중한 예복 차림이었지만 흰 찹쌀경단처럼 귀여운 인상은 여전했다. 그가 소욱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나가서 돌아다니고 싶어요.”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

소욱이 소명랑에게 경고했다. 이런 자리에 일체 흥미를 보이지 않던 작은아들이 갑자기 연회에 참석하고 싶다고 해 소욱은 당황했다. 속내를 끝내 알지 못했지만, 소명랑이 계속 조르자 소욱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왔다.

소명랑은 속상해하며 소욱의 소매를 놓았다. 그는 심 노부인이 생일축하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노부인이 심묘의 조모임을 알았다. 광문당에 도통 나오질 않는 심묘를 볼 수 있으니 연회에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기회를 틈타 심묘를 만나려고 했는데 심묘는 오늘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고 했다. 소명랑은 심묘가 보고 싶어서 심장이 간지러웠다. 소명랑은 친구가 적었다. 모두 그가 어리석다고 싫어했다. 다만 심묘만이 처음부터 그를 따뜻하게 대해줬다. 심묘는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여자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강 부인이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황 부인과 위 부인은 특별히 노부인께 술을 한 잔 올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결국…….”

그들에게 심 노부인은 사돈댁이 될 것이었다. 구태여 밝히지 않아도 부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곱게 화장한 황 부인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혼사는 자식들이 한 쌍의 기러기로 행복하게 지내라고 맺어주기 위해서 치르는 게 아니었다. 가문끼리 필요한 것을 교환하는 거래에 불과했다. 심가 역시 기풍과 위엄이 있어 딸을 아낀다면 이 혼사를 수락할 리 없었다. 소위 말하는 탁 트인 도량과 솔직한 마음씨는 결국 체면치레에 지나지 않음을 모두가 깨달았다. 이로 인해 모인 부인들의 시선에는 비꼬는 기색이 스쳤다.

위 부인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심가는, 특히 대방은 확실히 좋은 가문이었다. 심가를 자신의 편으로 둔다는 것은 높은 가지에 오르는 것이었다. 다만 심묘가 아둔해 집안의 주모를 감당할 그릇이 못 된다는 점이 문제였는데……. 이유는 몰라도 갑자기 심묘의 성격이 많이 차분해졌기에 아들을 위해 혼담을 꺼냈다. 그런데 거의 직후에 심묘는 마진에 걸렸다고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다. 위 부인은 심묘의 병세가 깊어 혹여 아들의 일생을 망치는 건 아닐지 걱정했다.

위 부인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며 진약추는 속으로 냉소했다. 진약추는 임완운이 자매 혼사를 바꿔치기하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 노부인과 임완운이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어도 진약추는 속여 넘길 수 없었다. 그러나 일이 정말 그렇게 흘러간다면 진약추에게는 경사였다. 임완운이 규범을 어지럽힌다면 심신이 돌아온 후 크게 분노할 것이었다. 대방과 이방이 서로 다툰다면 심모가 더욱 두각을 나타낼 기회가 될 것이었다.

임완운이 웃으며 일어나 말했다.

“이렇게 됐으니 제가 먼저 두 부인께 한 잔 올리겠습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풍안녕은 미간을 찌푸린 채 불만스러운 표정을 비췄다.

* * *

사당 안의 여종은 모두 쫓겨났다. 심묘는 홀로 위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모래시계를 주시했다. 모래는 거의 다 바닥에 쌓였다. 그녀는 향 세 개를 피우고 가볍게 절했다. 바로 그때 작은 기척이 들렸다. 전생에 진국에서 항상 주변을 경계하는 습관을 갖게 된 심묘가 바로 일어났다.

“누구냐?”

“어린 여자아이의 감각이 예리하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심묘가 고개를 돌렸다. 자줏빛 옷을 입은 소년이 창문에 기대어 그녀를 보는 게 보였다. 그는 심묘의 눈을 마주한 뒤 창문을 훌쩍 뛰어넘어 사당 안으로 들어왔다. 늘 침착한 심묘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경행이 대낮에 다른 부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닌다니. 그는 당연히 초청받지 않았을 터였다. 심가와 사가의 관계는 살얼음을 걷는 것 같기 때문에 심귀와 심만이 미치지 않는 이상 초청하지 않을 터였다. 심묘는 하마터면 사당 밖 뜰은 호위가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들어왔냐고 물어볼 뻔했다.

“심부의 호위는 큰일을 맡기 어렵겠군. 난 걸어 들어왔을 정도니.”

심묘가 눈살을 찌푸렸다.

“뭘 하러 온 건가요?”

사경행은 그녀를 보며 웃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향 한 개가 탈 동안 방 안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심묘는 그런 그에게 의혹을 품었다. 사경행의 행동은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슨 물건이 필요하기에 이렇듯 큰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곳곳 찾아다니는 것일까. 심부 안에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는가 싶어 심묘는 의아했다.

“뭘 찾으십니까? 말씀하시면 도와드릴 수 있을지도요.”

사경행이 동작을 멈춰 고개를 돌려 그녀를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아주 흥미로운 듯했다.

“심가 여자, 난 심가 사람 중 네가 가장 총명한 것을 알아. 내 이익을 나눠 먹으려고?”

“당신이 대낮에 우리 집에 와 물건을 훔치는 건 심가의 이익을 잘라먹는 것이 아닌가요?”

심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경행의 빈틈없음에 분노했지만 그녀는 화내는 대신 호위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 잘못을 떠올렸다. 어쨌든 그가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사경행은 경계하며 그녀에게 기회도 주지 않을 셈 같았다.

“훔쳐?”

사경행은 웃긴 이야기를 들은 듯 가볍게 웃었다. 그의 아름다운 도화 눈에서 위험한 빛이 반짝였다.

“그건 원래 우리의 물건이니 가져가야지.”

심묘는 무언가 알 것도 같았지만 그 느낌은 빠르게 사라져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사경행이 사당을 한 번 둘러보고 심묘를 보며 말했다.

“이곳에 호위가 많기에 그 물건을 지킨다고 생각했는데 널 지키는 거였나 보네. 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사당에 갇힌 거야? 여기는 아가씨가 지낼 곳이 아닌데.”

“당신과 무슨 상관인가요?”

심묘가 모래시계를 바라보니 모래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사경행은 아직 가지 않았다. 와룡사 때처럼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 때문에 일에 차질이 생겨선 안 되었다. 심묘는 인내심이 바닥났다.

“소후야, ‘당신의 물건’을 못 찾았다면 빨리 떠나주시길 바랍니다. 심가의 열조들은 도둑의 늠름한 자태를 보길 꺼릴 테니까요.”

지금껏 사경행을 이렇게 비꼰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화내는 대신 야유로 되받아쳤다.

“확실히 심가 선조는 자신의 후예가 혼사 문제로 핍박당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할 거야. 후손을 아끼는 모습이지. 넌 어때. 위겸과 혼인하는 걸 바라지 않는 것이냐?”

“바라면 어떻고, 바라지 않으면 또 어떤가요?”

심묘가 반문했다.

“위겸은 좋은 사람이다. 넌 어진 아내감이 아닌데, 널 데려가려고 하다니. 이렇게 사리가 어두운 사람은 처음 봤어.”

사경행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입가의 짓궂은 웃음마저 출중해서 보는 사람의 눈앞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가 가볍게 말했다.

“혹 나를 그리워해서 위겸에게 시집가길 원치 않는 건 아니겠지?”

심묘는 기가 차서 웃을 뻔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사경행을 노려보았다.

“저도 잘못이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신 걸 너그럽게 봐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소후야께 한말씀 드리지요. 제 일에는 끼어들지 마세요. 후회하실 때는 이미 늦었을 겁니다.”

심묘의 얼굴은 창백했다. 턱이 뾰족한 걸 보니 사당에서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해 야윈 듯했다. 그러나 눈은 매우 맑고 깨끗했다. 하지만 사경행은 그녀의 눈 속에서 타오르는 열화를 보았다.

“아가씨!”

경칩이 달려 들어오다가 사경행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심묘 앞을 막아서며 사경행을 가리켰다.

“공, 공, 공자께선 어떻게 들어오신 건가요?”

사경행은 어깨를 으쓱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소후야께서 안 계신다고 생각해. 어찌 처리했느냐?”

심묘는 그를 상대하기 싫어 경칩에게 물었다.

“술안주를 사 와서 생신 연회에서 보낸 거라고 말했습니다. 호위들은 먹느라 즐거워 호위를 게을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자리를 비울 기미는 전혀 없지만요.”

경칩은 순순히 대답했지만 계속 사경행을 힐끗힐끗 살폈다.

“좋다. 경칩, 넌 날 믿을 수 있느냐?”

심묘가 경칩을 보았다. 경칩은 심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가씨께 평생 충성해 왔습니다. 아가씨께서 분부하시면 저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너와 곡우, 백로, 상강 넷 모두 이곳을 나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돌아오지 말거라. 나를 찾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심묘는 경칩의 손에 모래시계를 쥐여줬다. 그녀가 유리 위 작은 표시를 가리켰다.

“모래가 이곳에 닿을 때, 넌 혼란한 틈에 뛰어나가 동원의 연회로 가거라. 모든 사람 앞에서 크게 소리쳐. 넌 똑똑하고 대담하니 내가 말하지 않아도 어찌 하는 게 가장 좋을지 알 것이다.”

“어…….”

경칩은 심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심묘의 표정을 보며 모든 의문을 삼키고 비장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좋다, 그럼 넌 지금 나가거라. 기억해라. 무엇을 보든, 무엇이 일어나든 들어오면 안 된다.”

심묘는 무거운 표정으로 당부했다. 경칩은 이를 악물며 사경행을 힐긋 쳐다본 후 다시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사당을 떠났다.

사경행은 권태로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뭘 하려고?”

“내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십니까?”

심묘는 사경행을 보았다. 사경행의 아름다운 눈은 칼처럼 예리해 주시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비밀을 모두 캐낼 것 같았으나 심묘는 자신만만했다.

“소후야, 말려들기 싫으시면 먼저 나가세요.”

심묘가 차갑게 경고했다.

“천하에 나를 말려들게 할 사람은 없어.”

사경행의 말은 아주 거만했지만 거짓이 아니었다.

“같이 순장되고 싶다니, 나도 더 할 말이 없네요.”

심묘는 몸을 돌렸다. 사경행이 심묘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해 눈살을 찌푸릴 때 심묘가 위패 앞으로 다가섰다. 사경행은 가만히 눈으로 그 행동을 좇았다. 갑자기 심묘는 정연히 배열된 위패들을 집어 들어 바닥의 화로 안으로 던졌다. 꺼져가던 불꽃이 확 일었다.

“미쳤어?”

늘 여유를 잃지 않던 사경행이 놀란 얼굴을 했다. 선조의 위패를 훼손하는 것은 몹시 불경한 일로 가문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행위였다. 백 년 후 저승에서 선조를 만나도 용서받지 못할 짓이 있다면 바로 지금 심묘가 하는 행동이었다. 사당에 가둔 데 불만이 있다 해도 이런 행동은 더 큰 처벌을 불러오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사경행이 보아온 심묘는 순간적인 분노로 이성을 잃을 사람이 아니었다. 사경행은 심묘의 의도를 종잡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심묘는 쌀쌀맞은 시선으로 화로 속에서 점점 까맣게 타는 위패를 바라보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위패는 불길에 삼켜져 위패의 이름이 불길 속에 보일 듯 말 듯 했다. 선조의 영령을 모욕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였다. 그녀 자신과 심신의 앞날, 심가의 미래를 지켜야 했다. 몇 날 며칠 선조들께 기도드렸으니 선조들도 그녀가 심가를 위기에서 구해내기 위해 이렇게 했음을 아실 터였다.

“소후야, 지금 가셔도 늦지 않았습니다.”

심묘는 사경행의 경악한 시선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은 위패도 모두 껴안아 화로 안으로 던져 넣었다. 불꽃이 더욱 맹렬해졌다. 그래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듯 곡우가 말려놓은 이불까지 껴안고 나왔다. 사경행이 낮게 외쳤다.

“심묘! 죽고 싶은 건가!”

심묘는 솜이불을 전부 펴서 바닥에 깔았다. 사당은 대부분 목재로 이루어져 불에 타기 아주 쉬웠다. 그녀는 불이 붙은 위패를 들어 이불 한쪽에 놓았다. 이불에서 검은 그을음이 나기 시작했다. 사당 안에는 점점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경칩은 이를 악물고 바깥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 주위가 붉어졌다. 모래가 심묘가 표시한 곳에 닿았을 때, 호위들도 사당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을 발견했다. 놀란 그들이 불을 끄러 달려올 때, 경칩은 소란스러운 틈을 타 사당을 벗어났다.

그녀는 단숨에 생일축하 연회가 한창인 동원으로 달려갔다. 손님이 가득했고, 손님과 주인 모두 즐거워하느라 아무도 사색이 된 경칩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경칩은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사납게 소리쳤다.

“큰일입니다. 큰일 났어요! 사당에 불이 났습니다! 심묘 아가씨가 불 속에 갇혔습니다.”

경칩의 외침에 연회장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심묘는 서원에서 쉬고 있었다고 했는데 왜 사당에 있는 것일까. 불이 났다는 건 무슨 소리인가.

놀란 임완운은 빠르게 일어났다. 사당에 왜 불이 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사람을 불러 얼른 불을 끄게 하려고 했다. 그때 경칩이 호흡을 가쁘게 몰아쉬는 걸 보고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심묘가 화재로 죽으면 그녀는 정당하게 심청을 위부로 시집보낼 수 있었다. 황부에는 예를 갖춰 사과하면 될 일이었다. 심묘의 죽음 역시 의외의 사고로 돌리면 그만이었다. 거기까지 계산을 마친 임완운은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여기 계세요. 불은 그다지 크지 않은 듯합니다. 아마 불장난을 하다 조심치 못해 불이 난 것 같습니다. 제가 먼저 가서 보겠습니다.”

임완운은 괜히 향란을 질책했다.

“너희, 빨리 호위를 찾아 불을 끄러 가거라!”

연회의 흥이 깨져 심 노부인은 불만스러웠다. 원흉인 심묘가 증오스러웠다. 하지만 노부인은 손녀를 걱정하는 자애로운 모습을 가장하고 임완운에게 분부했다.

“심묘가 무슨 상황인지 빨리 가서 보거라!”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다 가릴 수 없듯, 추악한 연기가 진실을 전부 가릴 수는 없었다. 그들이 정말 심묘를 아낀다면 이렇게 냉정할 리 없었다. 심지어 진약추와 심모는 자리도 떠나지 않았으니 심부에서 심묘의 위치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부인과 아가씨들은 바보가 아닌지라 심묘에게 동정표를 던졌다.

바로 이때, 바깥에서 갑자기 맑고 우렁찬 웃음소리가 울렸다.

“심 장군, 심 부인, 심 도령께서 부로 돌아왔습니다! 문을 열고 마중하십시오.”

“뭐라고?”

모든 사람이 당혹스러움을 내비쳤다. 특히 심귀와 심만은 얼빠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심신이 부로 돌아오다니? 누군가의 못된 장난 아닐까? 연말까지는 아직 시일이 많이 남았다.

* * *

불길에 포위된 사당.

바깥 호위들은 불을 끄려고 했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불길이 맹렬해서 누구도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심가 여자, 넌 죽을 생각이냐?”

사경행은 대들보도 타오르기 시작한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소후야, 빨리 떠나십시오. 사람이 점점 많아지면 가려고 하셔도 못 가실 겁니다.”

심묘는 우뚝 서서 사경행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쓸데없는 말 말도록. 가자!”

사경행이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손 놔요.”

심묘는 그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완강했다.

“난 미래를 위해 내 생명을 걸고 도박하는 겁니다.”

심묘의 눈빛은 치솟는 불길보다도 더 사나워서 화마(火魔)를 품은 듯했다. 또 한편으로는 바위에 필적하는 단호함을 보이며 조금도 요동치지 않았다.

“죽고 나서 미래가 무슨 소용이지? 너무 위험해.”

사경행의 가혹한 말에 심묘가 웃었다. 그녀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저와 소후야는 다릅니다. 소후야는 수완이 비상해 무언가 얻기 위해 많은 힘을 소모할 필요가 없으실 테지만 전 달라요. 전 목숨을 걸지 않으면 죽느니만 못한 결말을 얻을 거예요. 그러니 전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찌 불 따위가 무섭겠습니까?”

심묘는 고개를 당당히 치켜들었다.

“가세요.”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리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익이 없다면 손을 써서 사람을 구하는 행위는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방금 심묘를 잡아 끌은 건 의외의 사고였다. 정신을 차린 그는 순간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자신을 비웃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아직 타지 않은 대들보 위로 뛰어올라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너라면 당연히 물러나갈 능력이 있겠지. 내가 잠시 그걸 잊었다. 나도 보고 싶구나. 네게 도대체 어떤 능력이 있을지.”

사경행의 자줏빛 옷이 불빛에 반사돼 반짝였다. 옷보다 더 눈부신 건 그의 웃음이었다. 사경행의 그림처럼 준수한 얼굴은 전통극의 다정한 공자 같았다. 하지만 눈빛에는 냉담함과 잔혹함이 스며 있었다. 특유의 세상을 하찮게 대하는 음산하고 냉정한 태도가 더해지니 잔악무도한 악역처럼도 보였다.

* * *

동원.

심신 부부가 돌아왔다는 말에 임완운은 더욱더 당황했다. 그녀는 하인의 되먹지 못한 장난이길 빌고 빌었다. 그러나 갈피를 못 잡고 서 있을 때 하인이 객지를 떠돌며 고생한 심신 부부를 데리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선두의 사람이 멀리서 노부인을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어머니, 아들이 생신을 축하하러 수도로 돌아왔나이다! 늦게 왔으나 모친께서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사람을 향했다. 기골이 장대한 남자와 그 곁의 미녀는 바로 심신과 나설안이었다. 그들 뒤의 미소가 따사로운 청년은 심구였다. 이전이라면 환호와 반가운 담소가 여기저기서 들렸을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심신 부부의 등장은 갑작스러웠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하필 불은 심신이 돌아온 이때 났다. 심묘는 아직 사당 안에 갇혀 있으니 임완운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심 노부인도 임완운과 처지가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집안에서만 위풍을 뽐내는 늙은 호랑이였다. 계례도 넘지 못한 심묘에게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방법을 쓴 것도 그보다 나은 수완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그녀는 허둥대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진약추도 초조했다. 그녀는 이방과 대방이 싸워 두 사람 다 피해 보길 바랐으나 이 자리엔 자신과 남편이 있었다. 심신이 돌아오지 않고 심묘가 큰불에 죽었다면 그 진상을 알 수 없으니 마음대로 꾸며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심신이 돌아와 그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으니, 통찰력 있는 심신은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아볼 것이었다.

심모는 원래부터 심신을 두려워했다. 심신은 무장으로 늘 살기와 맹렬한 기운을 풍겼다. 자신의 모친도 심신을 보며 두려워하자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심귀와 심만은 서로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여러 해 동안 그들은 그들의 악행을 잘 덮어 숨겼고 예상외의 일은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심신은 심부를 정성껏 챙겼기에 집안에서는 화내는 모습을 보인 적 없었다. 그러나 오늘 만약 심묘가 죽는다면……. 지금까지의 온화함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서북의 대장군이 검을 뽑을 터였다.

심신 부부와 심구는 심 노부인 자리까지 걸어왔다. 손님들은 모두 한마디도 없는 데다 그들을 보는 표정도 괴상했다. 나설안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어디가 잘못된 건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 심구는 세심하게 주변 사람들을 살핀 후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에, 어째서 동생이 보이지 않나요?”

심신과 나설안도 심묘가 이 자리에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모와 심청, 심지어 이방의 서녀 심동릉도 있었으나 심묘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심신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웠다.

“어머니, 교교는 어디 갔나요?”

심 노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임완운에게 호위를 부르라 말했으나 임완운의 움직임이 굼떴고 그녀 역시 독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이 자리를 떠나지도 않았다.

풍안녕이 튕기듯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다.

“심 장군님! 잘 돌아오셨습니다. 지금 사당에 불이 났는데, 심묘가 거기에 갇혀 있습니다!”

그녀는 분노에 가득 차 외쳤다. 풍안녕은 풍부에서 총애를 받았기에 오늘 같은 상황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부에서 넘어지기만 해도 모든 사람이 달려와 살뜰히 보살펴주었다. 그런데 심묘는 불이 난 사당에 있는데도 어린아이의 불장난이라고? 냉담한 심부 사람들을 보니 심묘가 너무나도 불쌍했다. 하지만 심신이 이렇게 딱 맞게 돌아왔으니 이제 되었다.

심신과 나설안이 모두 멍해졌다. 사당에 불이 났다는 것도 의아했지만 심묘가 그 속에 있다니. 심묘가 사당에는 왜 갔을까. 무엇보다 심묘가 타죽어 가는 상황에서 심가 사람들은 아직 연회에서 술을 마시고 즐기고 있었다는 것인가!

임완운은 정신을 차리고 얼른 해명했다.

“아주버니, 형님, 제가 호위를 찾으려는데, 오…….”

임완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신은 그녀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심신이 임완운을 한 번 흘겨보자그 살기에 임완운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나설안과 심구도 정신을 차리고 심신을 따라 사당으로 달려갔다.

* * *

사당을 태우는 불은 맹렬해 사당 전체가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었다. 심묘는 준비해둔 젖은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경행은 코를 찌르는 연기와 먼지 속에 있어도 일말의 난처함을 보이지 않았다. 사경행은 심묘에게 말했다.

“지금도 안 나가면 정말 이곳에서 죽을 거야.”

“나가지 않으면 당신도 저와 순장되는 거예요.”

심묘는 조언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도리어 위협했다.

“말솜씨가 좋군.”

사경행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넌 무얼 기다리는 거지?”

그가 말을 마치기 전, 바깥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교교!”

사경행은 창가로 이동했다. 불길 속 작은 틈으로 심신 부부와 심구가 보였다. 심신과 나설안은 불길이 이렇게 맹렬할 거라고까진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사당의 호위들은 물통을 찾아 물을 부어 끄려고만 하고 있었다. 누구도 안으로 뛰어 들어가 심묘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심구는 이를 갈며 외쳤다.

“동생을 구하러 가겠어요!”

심구가 거침없이 달려들려 했지만 두 걸음을 채 떼기 전 불에 탄 사당의 일부가 앞에 떨어졌다. 타오르는 불이 앞길을 전부 막았다.

“교교!”

“동생아!”

사경행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네 아명이 연약함의 상징인 교교구나. 너랑 하나도 안 어울리네.”

“기다린 사람이 왔으니 소후야께서도 방법을 찾아 나가세요.”

심묘의 얼굴은 흉악했다. 이 상황은 모두 그녀가 꾸민 연극이었다. 보기에 화목하고 우애로운 심부가 실상 어떤 상황인지, 그녀를 귀여워한다고 말하는 심부 사람들은 어떤 악의를 가지고 있는지 심신이 볼 수 있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설계된 것이었다. 무신은 정과 충성을 중시했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지만 사람의 악랄한 마음을 들여다보길 꺼렸다. 그래서 심묘는 심신이 제대로 볼 수 있도록 가장 과격하고 직접적인 방법을 쓴 것이었다.

심묘는 불붙은 나무 토막을 들어 팔뚝 위를 사납게 눌렀다. 심묘의 기행을 보자 제아무리 사경행이라도 일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심묘는 고통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이마에 땀이 베어 나왔다. 그녀가 나무를 버리자 흰 팔뚝에는 화상의 흔적이 선명히 남았다.

사경행은 놀란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그는 이렇게 잔혹한 여인을 만난 적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여인이라지만 이렇게 자신을 험하게 다루다니. 게다가 심묘는 죽음을 각오한 병사가 아니라 높은 가문의 연약하고 어린 아가씨였다. 그녀의 삶은 그녀의 아명처럼 연약하고 부드러워야 했다. 지금처럼 스스로 자신을 지지는 삶이어선 안 됐다.

사경행은 심묘가 불길로 뛰어들어 바깥을 향해 달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지만 불길이 없는 곳으로만 달렸다. 사경행이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비좁긴 해도 길이 나 있었다. 타지 않는 물건을 미리 준비한 후 그를 이용해 순조롭게 도망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렇듯 심묘의 준비는 완벽했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으로 판돈을 걸어 미래를 도박했고 도박에서 이겼다. 재수 없는 일을 당하는 것은 다른 사람일 것이었다. 사경행은 입가를 올려 웃으며 심묘의 뒷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본 후, 사당 후문으로 갔다. 그는 제비처럼 가볍게, 눈 깜짝할 사이에 불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그의 수하들이 빠져나온 사경행을 보고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물건은 사당에 없었다. 심신이 돌아왔으니, 가자.”

사경행은 재빨리 몸을 돌려 사당 뒷산의 나무숲 안으로 사라졌다.

심묘가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뛰어나왔다. 심묘의 모습을 보고, 심구가 재빠르게 뛰어갔다.

“교교야!”

심신과 나설안은 기뻐 눈물을 흘릴 뻔했다. 불길을 무릅쓰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사당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대로 하나뿐인 딸을 잃는가 싶어 낙담했는데 심묘가 스스로 달려나오니 그들에겐 큰 기쁨이었다.

“교교!”

심묘는 다리가 풀려 쓰러졌다. 심구는 얼른 그녀를 잡았다. 심묘의 왼 팔뚝에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화상 흔적을 본 심구는 눈 주위가 붉어졌다. 심묘는 심구의 품속에서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웅얼거렸다.

“날 놔줘요, 난 시집가지 않을 테야…….”

심신과 나설안은 심묘의 말을 듣고 대경실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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