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장 (34/71)

14장

문혜제가 회조연을 거행했다. 문무백관은 가족을 데리고 참석했다. 군주와 신하 모두가 즐거웠으나 신하들은 이번 회조연이 황제가 심신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축하 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가는 손에 병권을 쥐었고, 또 심신과 심구는 용맹하니 잘 쓰면 명제를 지키는 좋은 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황제 자리를 위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명제 황실은 심가에 의존하면서도 경계했다. 하지만 오늘은 숙청의 날이 아니었고 심가는 아직 안전했다.

심가가 황위 쟁탈에 참여하지만 않으면, 새 황제가 즉위하기 전에는 황실이 심가에게 손쓸 이유가 없었다. 이는 조정의 말단 관직에 있는 사람도 아는 바였다. 그러나 심묘가 부수의를 짝사랑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그 예측은 완전히 달라졌다. 심가는 얼마 가지 못할 거였다. 그런데 또 갑자기 심묘가 부수의에게 관심을 거두니 심가는 황위 쟁탈의 폭풍에 말려들 일이 없었다. 심가는 한동안 평안할 것이었고 위무대장군 심신의 명성은 많은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할 터였다.

나설안은 아침 일찍 심묘를 보러 갔다. 심신과 나설안은 심부에서 1년간 발생한 일을 조사했으나 임완운이 일을 아주 잘 숨겨놓아서 크게 이상한 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대수롭지 않은 작은 일밖에 없었다. 하지만 심신 부부는 의혹을 풀지 않았고 여전히 심 노부인과 다른 심가 사람들에게 소원하게 대했다.

심묘는 부모님에게 심청이 순결을 잃은 일을 말하지 않았다. 임완운과 진약추 역시 그 일을 말할 수 없었다. 계 유모의 일도 그녀가 손이 야무지지 못해 쫓아냈다는 핑계를 대 죽음을 감추었다. 구실을 말하면서도 임완운은 심묘가 사실을 털어놓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왜인지 심묘는 임완운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임완운은 심묘에게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고 확신했다.

“아가씨, 갑 안 비녀의 수가 너무 적습니다.”

백로가 심묘의 머리를 만지며 한탄했다. 심묘는 점점 날씬해지며 여인의 태가 나타나고 있었지만, 이전에는 어린 소녀처럼 단장하여 이도 저도 아니게 만들었다. 백로는 그 점이 여태 안타까웠었다. 더구나 오늘은 입궁하는 날이니 단장에 한층 공을 들여야 했다. 그러나 임완운이 준 금은 장신구를 다 팔았으니 심묘의 장신구 갑은 텅텅 비었다.

“어제 주인어른께서 폐하의 하사품을 가지고 오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가서 고르시겠어요? 궁중 하사품이니 좋은 물건일 거예요.”

“됐어.”

상강이 밝은 얼굴로 제안했으나 심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궁중 물건에 피가 묻지 않은 건 없었다. 심묘는 그런 물건을 몸에 착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처참한 세월을 상기시켰다. 심묘는 장신구 갑 안 비밀 공간에서 비녀 하나를 꺼냈다.

“오, 비녀가 너무 예뻐요! 아가씨, 이 비녀는 언제부터 있던 건가요? 마님께서 주신 건가요?”

백로가 놀라고 기뻐서 외쳤다.

심묘는 그 비녀를 세심히 살폈다. 비녀는 시험날 매화 숲에서 사경행이 심묘 머리에 꽂혀 있던 진짜 해당화와 바꾼 매화 비녀였다. 백로가 장신구가 없었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심묘는 이 비녀를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옥으로 만들어진 비녀에는 화려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자홍색 꽃송이가 매우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차갑고 보드라운 촉감이니 상등의 옥이었다.

비녀의 가치는 천금 이상일 것이었다. 심묘는 궁중에서 좋은 물건을 많이 보았기에 이 비녀의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선물로 준 비녀가 이렇게 대담하니 임안후부가 부귀해도 이렇게 사치한다면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었다.

심묘가 넋을 잃고 보고 있자 백로는 치장이 늦어질까 걱정했다.

“아가씨, 그 비녀 예쁘네요. 제가 꽂아드릴게요.”

심묘는 정신을 차렸다. 마지막으로 상강이 그녀의 뺨 위에 연지를 살짝 발랐다. 곡우는 토끼털 피풍의를 걸쳐주며 웃었다.

“아가씨, 정말 아름다우세요. 마님께서 보시면 반드시 좋아하실 거예요.”

나설안과 심신이 문밖에서 심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구가 잎사귀를 뜯고 있었다.

“어머니, 왜 교교에게 하사받은 의상과 장신구를 착용하게 하지 않으세요? 그러면 편할 텐데.”

“네가 뭘 아느냐. 하사품은 옷감이지 어디 완성된 옷인 걸 봤느냐? 행여 있어도 비빈마마께서 입고 오실지 누가 아느냐? 감히 교교에게 입으라 할 수 없다. 머리 장신구는 얘기도 꺼내지 말아라. 교교가 원하는 걸 고르도록 두는 게 낫다.”

나설안은 속된 의상을 좋아하는 심묘 때문에 골치 아팠다. 어떻게 권유하든 심묘는 과하게 장식해 오히려 조악해 보이는 금은 머리 장신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설안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나설안은 알고 있었다. 연지와 분을 바른 꾸민 겉모습은 진짜가 아니라는 걸. 나설안은 아름다웠지만 용맹한 기개를 좇는 여장부였기 때문이었다. 겉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구는 혀를 내민 후 작게 중얼거렸다.

“만약 교교가 이번에도 금빛 찬란하게 입으면…….”

심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교, 교교야…….”

심구는 입을 벌려 멍하니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자주색 주름치마를 입고 토끼털 피풍의를 걸치고 있었다. 연청색 토끼털은 심묘의 작은 얼굴이 더 작아 보이게 했다. 하얀 심묘와 연청색은 잘 어울렸다. 밝은 눈동자와 흰 치아, 구름처럼 담백하고 바람처럼 가벼운 몸가짐이 사람의 눈길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조용하고 존귀한 분위기가 일품이었다. 희미한 위엄이 느껴졌다.

나설안과 심신은 심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귀한 금 봉황이 눈앞에 서 있는 듯했다. 그러나 금 봉황도 지금의 심묘만 못했다. 이전 금은 장신구를 좋아하던 심묘와 달리, 단순하게 치장했음에도 고귀함이 드러났다. 이런 심묘의 품위 있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설안은 그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서북 큰 사막에서 태어난 그녀는 심신과 혼인해 심부에 온 후 고관 여인들에게 저속하며 예의를 모른다는 모욕을 들었다. 이후 교육을 받아 겉모습은 배울 수 있었지만 세밀한 우아함은 배울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심묘에게 정경성 어느 귀녀보다 고귀한 위엄이 보이니 나설안은 놀라면서 기뻤다.

“하하하.”

심신이 먼저 침묵을 타파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크게 몇 번 웃었다. 웃음기 가득한 눈빛에 긍지가 담겨 있었다.

“내 딸이 다 컸구나. 우리 교교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구나!”

외부 사람이 있는데도 심신은 채신머리없이 심묘를 크게 칭찬했다. 나설안은 그를 한 번 흘겨본 다음 심구가 데려온 군중 호위를 보았다. 그들은 모두 심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설안은 득의양양했다.

“됐어요, 우리 먼저 마차에 올라요. 늦으면 안 돼요.”

나설안은 심묘를 끌어당겼다. 심묘는 이렇게 어린아이 취급당하는 것이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심신과 나설안의 총애하는 눈빛을 볼 때마다 멈칫했다. 하지만 부모님과 오라비에게 그녀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작은 심교교였다.

나설안이 심묘의 머리 위 매화 비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교교야, 이 비녀 너무 예쁘구나. 네가 고른 거니?”

심묘는 그렇다는 식으로 모호하게 대답했다.

입구로 가니 마차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심귀와 심만은 어색한 표정으로 심신 일행을 보았다. 근래 심신은 그들이 어떻게 설명한들 듣지 않고 두 사람에게 냉담하게 굴었다. 게다가 심 노부인에게 문안할 때마다 나설안은 공무를 보는 것처럼 딱딱하게 행동했다. 그 같은 모습이 며칠이고 계속되자 노부인은 분노로 거의 혼절할 뻔했다.

“형님.”

심만은 어떻게든 전처럼 원만하게 지내고 싶어 살갑게 심신에게 인사했다. 심신은 숨을 크게 쉬고 마차 옆으로 걸어가 심묘와 나설안에게 말했다.

“부인, 교교, 먼저 타시오.”

심신과 심구는 마차에 타지 않고 말을 탔다. 면전에서 무시를 당한 심귀와 심만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심귀의 눈에 노기가 스쳤다. 그때 마차 한 대에서 심모와 진약추가 얼굴을 드러냈다. 심모가 부드러운 말투로 심묘에게 권했다.

“심묘, 우리 마차에 같이 타지 않을래? 마차가 커서 큰 숙모까지 타셔도 충분해.”

“필요 없다. 우리 마차에 앉아야 안심이니.”

이에 나설안이 차가운 얼굴로 대꾸했다. 심묘는 마음속으로 나설안에게 박수를 보냈다. 나설안은 시원시원한 사람이라 웬만한 사람에게 각박하게 굴지 않았다. 대신 전쟁터에서 적을 대할 때는 인정사정없었다. 이미 진약추와 심모는 그녀에게 전쟁터의 적이었다.

다른 마차에 있던 심청과 임완운도 바깥 인기척을 들었다. 심청의 안색은 아직 창백했다. 그녀도 모르게 임완운의 손을 잡으면서 힘을 주었다. 임완운은 낮게 신음소리를 냈다. 임완운이 심청의 손을 풀어내자 손에는 손톱에 찍힌 흔적이 있었다. 임완운은 자신의 걱정은 하지 않고 심청을 품에 끌어안았다. 심청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심청아…….”

임완운이 낮은 소리로 위로했다.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임완운의 품속에서 심청은 이를 갈았다. 그녀는 점점 이성을 회복했고, 와룡사에서의 무서운 경험을 전부 회상해냈다. 모두 심묘가 꾸민 일이었다. 게다가 심청은 아이까지 배게 되었다. 몸이 약해 낙태를 할 수도 없었다. 강행한다면 심청은 평생 어머니가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심청은 심묘에게 그녀가 받은 고통을 돌려주지 못해 한이 맺혔다. 아니, 심묘는 자신이 받은 것보다 열 배는 더 고통스러워야 했다.

“어미가 대신 복수해주마…….”

임완운은 마음이 아팠다. 한 마리의 이리가 되어 심묘의 목덜미를 물어뜯지 못해 한이 맺혔다. 심청이 눈물을 보이자 심장을 칼로 찌르는 것 같았다.

“어미가 대신 복수해주마…….”

임완운은 몇 번이고 읊조렸다.

심모와 진약추는 마차 안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나설안에게 면전에서 타박당한 심모는 불만스러웠다. 심모는 거친 무인인 나설안을 경시해왔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자신이 그녀에게 모욕을 당하다니. 분노에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에 진약추가 눈살을 찌푸렸다.

“심모야, 내가 얼마나 말했니. 저런 사람은 네가 상대할 필요도 없단다. 구태여 네가 기백과 도량을 잃을 필요가 있느냐?”

“어머니, 그저 눈에 거슬리는 거예요.”

심모가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심묘는 우리 앞에서 설설 기었는데 가족이 돌아오자마자 거만하게 굴고 있어요. 개가 주인을 믿고 사납게 군다더니 딱 그렇잖아요.”

심모의 말에서 질투가 드러났다. 진약추는 탄식했다.

“내가 일찍이 네게 어찌 되었든 평온을 유지해야 한다 가르쳤지. 넌 아직 나이가 어려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분별이 없구나. 심묘를 너무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지금 네 백부와 숙부는 대립하고 있다. 게다가 심묘는 네 둘째 숙모에게 밉보였으니 반드시 대가를 치를 거야.”

심모가 진약추를 보았다.

“하지만 둘째 숙모도 여태 심묘를 어쩌지 못한걸요.”

진약추는 멍해졌다. 확실히 임완운과 심묘가 대치한 지 오래되었다. 긴 시간 임완운은 이익을 챙기기는커녕 본전도 찾지 못하고 오히려 큰 사고를 당했다. 게다가 심신이 돌아왔다. 영리하고 노련한 임완운이 어린 아가씨 하나를 이기지 못하고 있으니 확실히 기이했다. 진약추는 마음속 의아함을 거두고 말했다.

“네 둘째 숙모가 계속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엔 큰일을 도모할 것이다. 막다른 처지에 몰렸으니 반드시 심묘를 처리하기 위해 온 힘을 짜내 모험을 할 테지. 네 백부가 보호한다고 해도 심묘는 독 안에 든 쥐 신세일 게다.”

심모는 의아했으나 무언가 깨달은 듯도 하여 빙긋 웃었다.

“우리는 앉아서 구경만 하면 될 일이네요.”

“맞아. 그게 바로 내가 네게 가르치려는 것이다. 손을 쓸 수 없으면 쓰지 말아야 한다. 다른 것을 이용해 목표를 달성해야지, 절대 직접 나서지 말아야 해. 잘 이용하면 중간에서 손쉽게 이득을 얻을 수 있으니.”

“가르침 감사해요. 반성할게요.”

심모는 자세를 똑바로 했다.

* * *

심묘 일행은 심귀, 심만 일행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심구와 심신은 말을 타고 있어 그들을 알아차린 백성들은 탄복의 시선을 보냈다. 백성들 사이에서 위무대장군의 명성은 대단했다.

마차 안 나설안이 심묘를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심묘의 평안하고 진중한 모습에 나설안은 기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교교, 지금 너무 예쁘구나. 1년 만에 다 컸네. 정경성 안에 너처럼 예쁜 사람은 없을 거야.”

나설안이 감탄했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웃음거리가 될 말이었지만 나설안은 정말 그렇다고 믿었다. 부모는 늘 딸이 제일 예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늘 자신에게 없는 것에 호감을 가진다. 오늘 심묘는 평안하고 부귀한 기운을 풍겼다. 더욱이 왜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가족들에게 친근하게 변했다. 한층 보물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심묘는 살짝 웃었다. 그녀에게 자긍심을 느끼는 사람은 가족뿐일 터였다.

나설안은 문득 생각난 듯 화제를 돌렸다.

“어젯밤 나와 네 아버지가 상의했단다. 네가 네 아버지에게 정경성에 반년 머물러달라 했지. 나와 네 아버지는 평소 부에 없으니 이번에는 너와 시간을 많이 보내기로 했다. 오늘 폐하께 아버지께서 요청할 거다.”

심묘는 멍해졌다. 심신이 그녀의 말을 들어줄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나설안이 그녀를 껴안고 웃으며 말했다.

“반년 동안 교교의 성장을 볼 수 있겠네.”

나설안은 적군 앞에서 흉악한 명성이 혁혁했지만 심묘의 앞에서는 매우 자애로웠다. 그녀의 옛 적수가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본다면 놀라 앞니가 떨어질 것이었다.

“고마워요, 어머니.”

심묘는 나설안에게 기대어 작게 말했다.

오늘 저녁 연회는 축하연이었지만 뒷면에 위태로움을 감추고 있었다. 대국을 할 때 누구든 상대의 군대를 가지려 한다. 포진을 잘하고 잘 숨긴 채 상대방이 올가미에 걸려들길 기다려야 했다.

물론 그녀의 일생을 속박하고 그녀의 자식들과 친인을 매장한, 원수로 가득하며 살육의 냄새가 짙게 밴 구중궁궐에 돌아간다는 것도 중요했다. 천하가 누구의 수중에 들어갈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문혜제를 비롯한 궁중 옛 친구들의 면면을 살펴볼 기회였다. 심묘의 맑고 깨끗한 눈 깊숙한 곳에서 어두운 빛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 *

궁궐은 높고 크며 웅장했다. 유리 기와와 붉게 칠한 기둥에 금색 용이 똬리를 틀듯 앉아 있었고 봉황이 빙빙 돌며 춤을 추었다. 실로 금빛 찬란하나 쓸쓸하고 엄중했다. 화려한 모습의 이면, 궁궐 깊숙한 곳에는 무수한 백골이 묻혀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미인들이 뼈가 되었다. 궁궐이 미인처럼 아름답다고 하나 그 속은 그 말로처럼 잔혹했다.

화원에서는 매우 앳되어 보이는 궁녀와 태감이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육체노동은 모두 새로 오거나 지위가 낮은 태감과 궁녀가 도맡는다. 궁녀가 말했다.

“오늘 연회에 많은 사람이 와. 내가 잘못을 범해 여기로 쫓겨나지 않았다면 귀인의 시중을 들었을 거야. 매년 회조연에서 하사받은 돈은 일 년이나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커.”

“회조연……. 얼마나 크게 하사를 받길래요? 아주 대단한가 봐요?”

소태감이 열망의 시선을 드러냈다. 궁녀는 자랑하듯 입을 삐죽였다.

“넌 견문이 넓지 않은가 봐. 이번 회조연은 폐하께서 위무대장군의 공로를 논의하고자 특별히 신하들을 초대해 여는 거야. 참석자가 모두 대관과 그 가족이니 당연히 대범하게 손을 쓰지. 너도 운이 좋으면 몇 년 안에 한 번쯤은 볼 수 있을 거야. 그분들은 은자를 한 덩이씩 하사해줘.”

“은자 한 덩이?”

소태감은 놀라 소리쳤다.

“그 위무대장군은 위세가 대단한가 봐요. 전하께서 그를 위해 특별히 저녁 연회를 열다니. 가문의 영광일 거예요.”

“영광이 무슨 소용이야. 머저리 딸이 있어서 체면을 다 잃었는데, 영광은 무슨.”

궁녀의 말에는 멸시가 담겨 있었다.

“머저리 딸? 위무대장군의 딸이요?”

소태감이 물었다. 궁녀는 태감의 무지를 타박했다.

“넌 몰라? 심 장군은 영명한 무신이야. 심 부인도 여장부고 그 아들도 용맹하고 싸움을 잘해. 하지만 위무대장군의 딸은 완전히 머저리야. 금기서화(琴棋書畵, 금·바둑·서예·그림) 전부를 못 하는 건 둘째 치고, 매우 저속한 금 장신구를 좋아한다고. 심 장군은 늘 회조연에 딸을 데려오는데, 그 딸이 집안 망신을 다 시켜. 작년 회조연엔 내가 시중을 들었는데, 그녀는 정말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더군. 오죽하면 발을 헛디뎌 치맛자락을 밟고 층계 아래로 굴렀어. 귀인들이 가장 비웃길 좋아하는 게 바로 그 딸이야. 심가가 보호하려고 애를 쓰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나. 모두가 그 심가 소저를 무시해.”

“그런……. 여식이 모두 그렇다면 심가 명성을 저버릴 텐데요.”

소태감은 자기 일처럼 크게 탄식했다.

“그건 아니야. 그 소저 혼자 심가의 결함인 거지. 두 사촌 언니는 출중해. 심 장군의 체면은 모두 그녀가 떨군 거야. 게다가 분수도 모르고 정왕 전하를 짝사랑했는데, 정경성의 모두가 이를 알고 있어. 시끌시끌했지.”

“확실히 저속한 여자네요.”

소태감도 혐오의 기색을 드러냈다. 소궁녀는 매일 궁 안에 있었고, 관가 부인이나 소저처럼 출궁할 수 없으니 아는 것은 모두 궁 안에서 발생한 일뿐이었다. 그녀는 시합장에서 심묘가 머저리의 가면을 벗은 것도 몰랐다.

맞은편에서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은 얼른 일에 몰두하는 척했다. 그 사람이 앞으로 걸어와 날카롭게 말했다.

“새로 왔느냐?”

“맞습니다. 고 공공.”

누군가 옆에서 대답했다. 소태감이 용기를 내 고개를 들어보니 세 사람이 서 있었다. 태감총관 고 공공과 곁을 따르는 태감 둘이었다. 고 공공은 소태감에게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소이자라고 합니다.”

소태감은 영리해서 얼른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자로 하지.”

고 공공이 곁의 태감에게 명했다.

“연회에 주전자를 들 사람이 하나 부족해. 영리하게 생겼으니 아마 귀인들 눈에 들 수 있을 거야. 그로 바꿔.”

“네.”

소이자는 흥분했다. 방금 궁녀의 말처럼 큰 은자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게다가 어느 귀인의 눈에 들면 단박에 신세가 필지도 몰랐다. 궁궐 안에선 누구든 모두 온갖 수를 짜내 위로 기어오르려 했다. 가장 낮은 노비라도 하늘로 날아오르는 단꿈을 꾸었다.

* * *

바깥 대청에는 이미 많은 부인과 소저가 와 있었다. 궁중 비빈과 관계된 사람들을 제외한 여인 대부분은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 부인과 심 장군은 어째서 아직 안 올까요? 오늘 주인공은 그들인데 고의로 늦게 오는 건 아니겠지요?”

광대뼈가 높은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심 부인이 자기 딸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싫어서 일부러 감춘 거겠지요.”

다른 둥근 얼굴의 부인도 웃으며 말했으나 말속에는 조롱이 가득했다. 심신은 공로가 탁월한 위무대장군이지만 첩을 얻지 않았고, 나설안에게 변함없이 지조를 지켰다. 여기 앉은 고관 부인 중 남편이 첩실을 두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남편의 총애와 출중한 아들, 둘 다 가진 나설안의 운명에 질투했다.

나설안이 행복할수록 다른 부인들은 샘이 나 어떻게든 그녀를 깎아내릴 방도를 찾았다. 심묘가 유일하게 나설안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허점이었다. 심묘는 아둔하고 재능이 없고 저속해 궁중에 올 때마다 망신을 당했다. 부인들은 매년 이맘때를 가장 즐거워했다. 심신 부부가 딸로 인해 치욕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대단한 이익을 챙기는 것마냥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올해 심묘는 또 무슨 의상을 입고 올지 모르겠네. 작년 그녀의 금잎을 붙인 의상은 참 예뻤지. 그녀의 금 장신구와 배합하니 정말 부귀한 기운이 넘쳤어. 올해는 은잎이 아닐까?”

역패란의 얼굴 위로 비웃음이 떠올랐다. 주위 소녀들은 역패란의 말을 듣고 함께 조롱했다. 바로 이때 듣기 좋은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심묘는 심 장군님의 재능을 물려받았어. 활쏘기에서 채가 공자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걸 봤잖아? 만약 심묘가 너희와 활쏘기를 하자고 하면 어쩌려구?”

소녀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많은 부인과 소저가 그날 시험장에서의 심묘를 보았다. 채임도 심묘에게 당했는데 만약 자신에게 활을 쏜다면……. 잠시 상상한 그들은 몸서리를 쳤다.

이 말을 한 사람은 풍안녕이었다. 풍 부인은 그런 딸을 좋지 않게 보았다. 많은 부인에게 노여움을 사는 것은 좋지 않았다. 어머니의 시선을 본 풍안녕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코를 찡그렸다. 뒤에서 심묘를 험담하는 사람들은 감히 심신 앞에서 방귀도 뀌지 못했다. 달려가 아첨하는 주제에 뒤에서는 몰래 딸을 흉보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

불편한 분위기 속 태감이 소리치는 게 들렸다.

“위무대장군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 쪽을 향했다. 가장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심신과 심구였다. 심신은 위풍당당했다. 대대로 장수의 피가 흘러 늘 위엄이 있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부인들은 소름이 돋았다. 심구는 단단한 체구와 작은 보조개를 얹은 따사롭게 웃는 얼굴로 소녀들을 견딜 수 없게 했다. 두 사람은 바깥 대청에서 멈추지 않고 남자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나설안은 감색 연갑에 허리띠가 달린 장포를 입었다. 부인들의 장황한 머리 모양과 달리 그녀는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뒤로 넘겨 묶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은 부드럽게 움직였고, 괄괄하며 용맹한 기개는 평범한 부인과 완전히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녀의 뒤로 섬세한 그림자가 보였다.

요란했던 좌중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이 나설안의 뒤를 따르는 그림자를 주목했다. 소녀는 피풍의를 걸치지 않아 자주색 비단 꽃무늬 치마로 아름다운 몸매를 드러냈다. 그녀는 턱을 들어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피부는 혈관이 비칠 만큼 희고 깨끗해서 수려한 용모를 돋보이게 했다. 투명하고 빛나는 눈동자는 사람을 가장 끌어당기는 부분이었다. 얼핏 보기에 갓 태어난 어린 짐승처럼 순수하고 깨끗했으나 수십 년의 세월을 겪은 듯 고요했다. 세상 풍파를 다 겪은 듯한 분위기와 여린 생김새가 대조되어 그녀에게 모순적인 아름다움을 주었다.

그녀는 나설안을 따라 대청 안으로 걸어왔다. 나설안의 빠른 걸음과 달리 소녀는 가슴에 양손을 단정히 포개고 있었다. 그 동작을 이미 수천수만 번을 해서 익숙한 듯, 양손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걸으면서도 위엄이 있었고 긴 치마는 걸음을 따라 작게 흔들려 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이 자리에 있는 부인들은 모두 높은 가문의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호된 가르침을 받아 예법을 익혔다. 그렇지만 어린 소녀가 이토록 궁중 예법을 정확히 행하다니. 절로 감탄이 새어 나올만큼 놀라웠다. 아주 훌륭한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절대 이렇게 아름답게 걸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형상은 모방할 수도 있어도, 분위기는 모방할 수 없었다.

자주색 옷을 입은 소녀는 표정 변화 없이 침착한 태도로 걸었다. 육궁의 주인이 자신의 후원을 걷는 듯 담담하고 차분하니 부인들은 대경실색했다. 저 소녀가 머저리 심묘라니.

물론 다들 이전 국회연화 때 시험장에서 변화한 심묘를 보았다. 하지만 그 이후 심묘는 심청과 함께 병을 구실로 관저에 머물렀다. 게다가 채임을 패배시킨 시험장에서 심묘가 보여준 것은 대담함이라 오늘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러한 예법과 품위는 하루아침에 몸에 배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전의 심묘는 심각한 수준이었기에 교정하려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심묘는 이전과 다른 사람인 듯 복장과 행동거지가 우아했다. 온 전당에서 독보적일 정도였다.

나설안의 뒤를 따라온 심묘의 입가는 뻣뻣했다. 마침내 그녀는 이곳에 다시 돌아왔다. 서로 싸우고 죽이고 전력을 다해 분투했던 곳이었다. 심묘는 이번 생에도 이곳이 그녀를 잡아 가둘 수 있을지 시험해볼 요량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아도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정왕비가 된 이후로 날마다 궁중 예법을 들먹였기에 예법은 골수에 새겨질 정도였다. 대청 안에서 눈을 감으면 완유가 웃으며 그녀에게 과자를 먹이려는 모습, 부명이 머리를 흔들며 국책을 읽는 모습이 떠올랐다. 사랑과 증오가 함께하고 고통과 행복이 뒤섞였다. 이곳에 다시 오니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복수의 화염이 활활 타올랐다.

소이자는 늠름한 부인 뒤에서 걸어오는 자주색 옷을 입은 소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그는 화원에서 심신의 적녀가 저속하고 머저리라고 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고귀한 기운이 감도는 엄청난 위엄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때 그녀의 시선이 소이자를 향했다. 심가 사람과 만난 적이 없는데 혹시 궁중 노인이 말하듯 첫눈에 자신이 마음에 들었나 싶어 긴장했다. 그녀가 자신을 눈여겨본 건지 놀라고 두려워 흥분했다. 하지만 심묘의 시선은 금방 멀어졌다. 소이자는 안타까웠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게 그는 심묘에게 빌붙으면 큰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 듯했고, 지금 그 큰 행운을 눈앞에서 놓친 것 같아 크게 아쉬웠다.

전당의 가장 앞에서 키 큰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심 부인,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나설안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시원하게 웃었다.

“오는 중 지체했습니다.”

“심묘는 정말 갈수록 예쁘고 생기가 도네요. 과연 목전에 혼사를 앞둔 사람이에요.”

그 부인은 심묘를 보며 참과 거짓을 절반씩 섞어 말했다. 이에 나설안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웠다. 나설안에게 심묘의 혼사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심부 사람이 심신과 그녀 몰래 승낙한 일이니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위가에 미움을 사는 것은 겁나지 않았다. 가세를 논할 때 위가는 부족하지 않지만 심신과 비교할 수 없고, 가문보다도 심묘의 행복이 중요했다.

마침 자리에 위 부인이 없었다. 나설안은 심묘를 위해 일을 분명하게 하려고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교교는 아직 어려서 빨리 출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교를 제 곁에 더 둘 생각이에요.”

나설안의 말에 부인과 소저는 모두 멍해졌다. 근래 심묘의 혼사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심 노부인의 생일축하 연회에서도 거의 묵인했는데 어째서 나설안은 일언지하에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지 의아했다. 키 큰 부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웃는 얼굴은 더욱 의미심장해졌다.

“오? 심 부인은 심묘를 곁에 더 두려 하시는군요? 그러나 며칠 전 심묘가 정혼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부인, 정말 농담도.”

나설안은 체면이 두렵지 않았다. 심가 내부 갈등이 사람들 앞에 폭로되어도 두려울 게 없었다. 자신의 가족을 제외한 심가 사람의 체면은 유지하고 보호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큰 소리로 말했다.

“딸의 정혼을 부모가 모르는 도리가 어디 있답니까? 저와 남편은 부인의 말을 전혀 알지 못하겠군요. 정혼은 누가 말한 겁니까?”

주변에서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키 큰 부인은 나설안이 이렇게 반응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얼이 빠져 멍하니 있었다. 나설안 말대로 세상에 딸의 정혼을 모르는 부모는 없었다. 나설안과 심신이 심묘의 정혼을 모른다면 심부 사람들이 그들을 속인 것이었다. 왜 그렇게 한 것인지 그에 대한 추측은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었다.

그때, 임완운과 진약추가 등장했다. 심귀와 심만은 당연히 남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심청은 병으로 앓아누운 후 처음으로 외출했다. 그녀는 많이 초췌해서 실제 나이보다 약간 더 들어 보였다. 그 초췌함을 감추기 위해 그녀는 두꺼운 연지와 향분을 바르고 붉은색 의상을 입었다. 이런 화려한 색채는 원래도 피부가 누런 심청에게 어울리지 않아서 꾸미지 않느니만 못했다. 게다가 전력으로 숨겼으나 배 속에 있는 아이 때문에 걸음이 비틀거렸다.

심모는 지난날과 다름없이 분홍색 긴 치마를 입고 옅게 화장했다. 학자풍이 짙게 풍기는 연약한 아가씨로 꾸민 것이다. 이전 같으면 그녀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걸음은 어설프고 뻣뻣했다. 표정도 긴장으로 굳었고, 모은 양손에도 힘을 너무 주었다. 심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장 영광스러웠던 심모가 언제 심묘보다 뒤처진 것인지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겼다.

심모는 나이가 어려 눈치채지 못해도 진약추는 부인들의 시선이 다른 걸 민감하게 알아챘다. 이전이라면 그 시선은 질투와 흠모 혹은 칭찬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트집을 잡는 듯 평가하는 시선이었다. 진약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에 대단한 긍지를 가졌고, 자신을 쏙 빼닮은 심모도 아름답게 꾸미니 정경성 안에서 그녀의 딸보다 아름다운 소녀는 없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의 시선은 심모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을 본 듯했다. 그녀는 그 사람이 바로 코앞에 있음을 몰랐다.

심묘는 나설안 옆에 가까이 앉았다. 나설안 역시 이 회조연의 주연이었지만 고립된 것 같았다. 남자들은 벼슬길에서 서로 엇갈림이 있을 때 속으로는 싫어해도 상대방을 면전에서 무시하진 않았다. 하지만 여자들은 자만심이 넘쳐나 남자들과 달랐다. 적출 여인들은 서출들과 함께 놀길 원하지 않았고, 정경성 출생은 외지 출신을 무시했다.

나설안은 외지 출신이었다. 그나마 풍요로운 지방 출신이라면 좀 나았을 테지만 나설안은 서북 가난한 지역 출신이었다. 그녀가 막 혼인해 정경성에 왔을 땐 표준어도 잘 구사하지 못했다. 그때 부인들은 뒤에서 그녀의 고향 사투리를 오랫동안 비웃었다. 그녀들은 서북 사막 여인은 피부가 거칠고 길을 찾을 줄 모르고 좋은 견직물을 입어본 적도 없다고 비웃었다. 그 속에 과장이 있지만 나설안을 겨눈 것은 확실했다.

더구나 이 많은 여인들 중 전쟁터로 가는 건 나설안이 유일했다. 자신이 알고 있지 않은 분야의 일이 더군다나 아주 희소하기까지 하면 사람들은 그 일을 꺼리고 밀어냈다. 여자와 남자 모두 그랬다. 그래서 나설안은 수도의 귀족 여성 테두리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게다가 그 딸 심묘마저 머저리이니 모녀는 부인들이 몰래 비웃는 대상이었다.

백미의 모친 백 부인이 진약추를 불러 자신의 옆에 앉혔다. 그녀와 진약추는 같이 자란 친구였다. 백미도 심모를 자신의 옆으로 끌었다. 임완운은 역 부인에게 가서 앉았고, 역패란은 심청을 보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아프다며? 어, 아파서 말랐구나. 얼굴은 또 부었네?”

심청은 허둥거리며 고개를 숙였고 대충 둘러댔다.

“아마 침대 위에 오래 누워 있어서 그런가 봐.”

임완운은 그녀에게 유산방지약을 시시때때로 달여 먹었다. 심청은 배 속 아이를 미워했지만 혹 유산하면 아이를 영영 못 가질까 두려워 이를 갈며 부득이 약을 마셨다. 몸을 챙기니 자연스럽게 살이 올랐다. 배 역시 옷 위로는 뚜렷이 드러나지 않을 뿐 꽤 부풀었다.

역패란은 심청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너, 건강 잘 챙겨. 정혼을 했는데 몸이 상하면 안 되지.”

심청은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임완운에게 황가와의 혼사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황덕흥이 청년 준걸인 걸 알았으나 속으로 이 혼사를 반대했다. 산뜻하고 아름다운 혼사 아래 남모를 위험이 도사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패란의 목소리는 작지 않아 옆에 앉은 황가 부인도 들었다. 황 부인은 까탈스럽게 심청을 한 번 훑었다. 그녀는 아들을 위해 명분상 부인을 찾아줄 생각일 뿐이니 심청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 쇠약한 모습은 좀 걸렸다. 하지만 약간 병약하다고 해서 황가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줄 수 없는 건 아니니 상관없었다.

백 부인이 진약추에게 귓속말을 했다.

“심묘 문제는 간단하지 않을 것 같아.”

진약추가 호기심에 물었다.

“응? 왜 그렇게 말하는 건데?”

“누군가 뒤에서 심묘에게 일러주는 사람이 있나 봐. 방금 들어올 때 모두 봤어. 차림새와 예법이 궁중의 비빈들과 비교해도 더 뛰어나더라. 내 말이 듣기 좋진 않겠지만 심모는 많이 뒤처졌어.”

진약추가 멍해져 말했다.

“무슨 소리야, 심묘가 예법의 기본도 모르는 건 다 알잖아.”

백 부인과 진약추는 선비 가문 출신으로 예의에 무척 고명했다. 그런 백 부인이 심묘를 높게 평가하니 진약추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얼토당토않다고 느끼면서도 나설안이 앉은 곳을 바라보았다.

나설안은 멀리 떨어져 앉아 있었다. 심묘도 그녀 곁에 있었다. 나설안은 부인들이 상대해주지 않는 데 이골이 났는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눈앞의 태산이 무너져도 안색을 바꾸지 않을 사람처럼 전쟁터를 지키는 장수의 기세만 보였다. 심묘 역시 단정히 등을 똑바로 세우고 앉아 있었다. 모녀의 위세가 대단해 다른 사람의 일부러 그녀들을 냉대하는 게 아니라 감히 말을 건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진약추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 * *

정전 안에서는 심신의 한마디가 큰 파도를 일으켰다.

“심 장군, 정말인가?”

문혜제가 물었다. 문혜제는 환갑에 가까운 나이지만 아주 노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걸렸으나 눈은 영리하고 예리해 젊었을 때의 맹렬한 기세를 볼 수 있었다.

방금 문혜제가 심신을 표창하자 심신은 정경성에서 반년간 머물며 부에서 아내와 자녀와 함께 지내길 윤허해주십사 요청했다. 심신은 매년 군말 없이 전쟁터로 나갔고 지금까지 이런 요구를 꺼낸 적이 없었다. 반년간 수도에 머문다는 것이 정말 단지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서인가 싶어 군주와 신하들의 표정이 변했다.

문혜제는 심신을 살폈다. 황자 간의 황위 쟁탈은 계속되고, 국세는 끊임없이 변화했다. 심신이 어느 쪽 세력과 손을 잡느냐에 따라서 온 국면이 변할 것이었다. 이전 심신의 적녀 심묘가 부수의를 짝사랑한 일로 공론이 분분했다. 그 당시 문혜제는 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심가가 부수의의 손에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그런데 심묘가 부수의를 연모한다는 소문이 돌연히 사라져 의아한 가운데 지금 심신은 갑자기 이런 요구를 하니 혹시 다른 계획이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심신을 세심히 관찰했다.

심신의 피부는 검고 시선은 의연했다. 작은 산처럼 똑바르게 섰으나 문혜제를 대하는 행동은 공손했다. 확실히 충성스럽고 용감한 충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신하에게서 봐야 하는 것은 표면이 아니라 실제 가치였다. 심신이 큰 공로가 있어도 강산에 위협이 된다면 문혜제는 망설이지 않고 즉시 제거할 것이었다.

관찰을 마친 문혜제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심 장군이 이렇게 오랫동안 서북을 지켰고 적을 대패시켰으니 짐은 매우 안심되고 기쁘다. 이런 장군은 명제의 복이고 신하의 귀감이다. 심 장군의 요구를 윤허하겠다!”

심신이 은혜에 감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심신을 곁눈질했다. 문혜제는 심신의 요구를 윤허한 후 바로 정전을 나갔다. 심신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평생 심가와 경쟁한 사정은 심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비꼬았다.

“심 장군, 나이가 드시면서 전쟁터가 두려워지셨나요? 설마 그래서 정경성에 반년 머물며 즐기겠단 건 아니겠지요?”

심신은 화내지 않고 웃으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말했다.

“사후야는 저를 부러워하시는 것이오? 아, 사후야는 처자식이 없으니…….”

“심 장군!”

사정의 안색이 변했다. 심신은 꿍꿍이가 없는 건장한 대장부처럼 보여도 사실 독설을 잘했다. 옥청 공주가 죽고 사경행이 그와 연을 끊은 것처럼 구는 부분은 사정의 아픈 곳이었다. 심신이 사정없이 그곳을 찌르니, 사정은 창으로 심신을 찔러 죽일 듯 노려보았다.

부수의는 심신을 바라보았다. 심신의 얼굴에서는 활력이 넘쳐났다. 심가는 재차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전 심묘가 그를 연모한다고 했을 땐 성가셨지만 심가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심묘가 마음을 접은 듯했고, 부수의는 부수현과 부수안에게 여인에게 외면당했다며 비웃음을 샀다.

거기다 지금 심신은 뜬금없이 정경성에 반년 머물고 싶다고 하니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다 파악했다고 생각했던 심가가 갑자기 변하고 있었다. 이 심가가 미래에 무수한 변수를 만들고 온 대국에 영향을 줄 것 같았다.

심신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군주는 물론 신하들도 영문을 몰랐다. 하지만 오늘 표창은 모두 질투했다. 사람들은 분분히 앞으로 나가 심신에게 진심이거나 거짓으로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들은 심신에게 서북의 재미난 일을 듣느라 몸 뒤의 음험한 시선을 주의치 않았다.

그 시선은 심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독사가 덤불 안에서 꽈리를 틀고 먹잇감에 달려들어 물어 죽일 기회를 기다리는 듯했다. 예친왕이었다.

* * *

바깥. 심구는 복도에서 위겸의 걸음을 막았다. 위겸의 생김새는 훌륭했고 태도는 겸손했다. 건강하고 생기 충만한 심구와 비교할 때 문약하긴 했지만.

“심 소장군, 절 막으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심구는 위겸을 관찰했다. 심구는 명랑하며 우호적인 성격이라 위겸을 이전에 만났다면 친구가 됐을 것이었다. 그러나 심묘에게 위겸이 이미 사모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무척 화가 났다. 심구가 볼 때 심묘는 다른 사람보다 백배 천배 나았다. 그런데 위겸은 왜 동생을 좋아하지 않는 건지 의아했다.

“그대가 위겸인가?”

불만을 품은 심구의 말투는 딱딱했다. 위겸은 영문을 몰라 당황스러웠지만 지금 이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심구가 위겸의 어깨를 토닥였다.

“별일 아니네. 단지 그대랑 한마디 해보려 한 거야. 이전 내 동생과 그대의 위가가 정혼했단 소문이 돌았는데, 유언비어일세. 우리 심가도 마음에 두지 않으니 그대 위가도 마음에 둘 필요 없네.”

심구는 한걸음 물러나 무심한 듯했지만 사실은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내 동생의 남편감은 당연히 먼저 내 맘에 들어야지!”

심구는 위겸이 어떤 표정인지 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 큰 걸음으로 떠났다. 위겸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있었다. 심구의 말은 분명 위가와 관계를 분명히 구분 짓겠다는 것이었다. 위겸은 마음을 준 사람이 있었고, 심구는 여동생을 위해 나설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심구는 이 혼사에 참견할 기회가 없었던 것을 보상받듯 맹렬하게 쏟아냈다.

복도 밖, 고양이 멍하니 서 있는 위겸을 즐겁게 바라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가는 사람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구먼. 거만해서 위가는 안중에도 없네.”

“봤는가? 다 봤냐고.”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렸고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투에서 불쾌함이 새어 나왔다.

“위겸은 자네의 사람이지. 그가 저렇게 얕보임을 당했는데, 자넨 나서지 않을 건가?”

“하고 싶으면 네가 가.”

사경행은 고양에게 눈을 흘겼다. 고양도 지지 않고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어디 감히. 그 심가 여자는 이리 많은 사람이 보호해주니 자칫하다간 말썽이 생기겠어. 하지만 오늘 예친왕이 자리에 있어 일이 잘못될까 걱정일세. 예친왕은 왕비를 맞을 작정이라는데, 생각해보게. 그가 심가 어느 아가씨를 아내로 삼을까?”

그의 웃는 얼굴은 온화했지만 짓궂은 장난꾸러기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왕비를 얻지 못해.”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화원 안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달려 나온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소태감과 무슨 말을 하더니 향낭을 쥐여줬다. 그림자는 분명 심묘의 여종이었다.

고양이 사경행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았다. 꽃 덤불 안, 심묘의 여종이 소태감에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많은 은자를 얻어 잔뜩 들뜬 소태감이 여종에게 뭐라 말하고서 떠났다.

제자리에 서 있는 여종은 경칩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의심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심묘는 그녀에게 반드시 저 소태감에게 물건을 전하라 분부했다. 그러나 저 소태감은 새로 입궁한 사람으로 심묘와 아무 관련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특별히 분부한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 경칩은 고개를 가볍게 가로젓고 자리를 떠났다.

“심 소저는 담력이 정말 크네. 궁궐 안에서 감히 수를 쓰다니. 게다가 심신도 모르는 것 같은데.”

고양이 심묘를 평가했다. 이에 사경행은 가부를 단언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갇혀 있는 사당도 불태우는 사람이었다. 어느 곳에서든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일은 해내고야 마는, 담력과 추진력이 대단한 여자였다.

“가지. 우리도 구경하러 가봐야 하지 않겠나.”

사경행의 입가에 기이한 웃음이 걸렸다. 고양이 그 표정을 지켜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난 안 가겠네. 지금은 일 처리에 조심해야 해. 더군다나 계획에 변동이 있으니 더욱 신중해야 하지.”

“맘대로 해. 만약 시간 있으면 태의원으로 가서 늙은이에게 물건이 있는지 수소문해봐.”

사경행이 나른하게 말했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존명.”

고양이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한 후 서두르지도 여유를 부리지도 않고 걸어갔다.

* * *

시간이 흘러 회조연이 시작되었다. 여자들은 대전 아래에 남자들은 대전 위에 앉았다. 좌측 가까이 정중앙에는 황자들이 높이 앉아 있었다. 주왕 부수안, 정왕(静王) 부수현, 정왕(定王) 부수의 세 사람은 이미 와 있었다. 리왕, 양왕, 성왕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부수안과 부수현은 친형제이니 당연히 한패였고, 양왕과 성왕은 리왕을 우두머리로 한패였다. 태자는 헌왕과 초왕의 지지가 있었다. 아홉 황자 중 부수의는 태자 일파와 친교를 맺고 있었으나 파벌을 만들지 않아 보기에 제일 세력이 약소한 중립 같았다. 세 왕의 출현에 따라 시끄럽던 대전은 조용해졌다.

문혜제의 아홉 아들은 전반적으로 우수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이렇게 우수한 아들이 많았다면 즐거웠을 테지만 귀족 집안에서 우수한 아들이 많으면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그런데 이 우수한 아홉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무정한 황실에서 태어났다. 그들에게 뛰어난 형제는 손톱 밑의 가시일 뿐이니 서로 최대한 빨리 처리하려 했다.

태자는 이미 있었으나 병약했고 아홉 황자가 모두 장성했으니 각 세력은 대치 중이었다. 문혜제가 있는 지금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 거대한 용은 늙었고 조만간 죽을 터였다. 지금부터 술렁거리는 명제 황실은 때가 되면 참혹한 살육이 일어날 것이었다.

주왕 형제 일파, 리왕 일파, 태자 일파 중 태자가 표면상 가장 세력이 컸다. 그러나 태자는 몸이 허약했다. 문혜제는 허약한 아들이 용좌에 앉는 것을 허락할 리 없었다. 그래서 태자의 세력은 정통성은 갖추었으나 가능성은 적었다. 단지 아래의 헌왕와 초왕 두 사람이 이득을 취하는 구조일 뿐.

리왕 일파는 사람 수가 많아서 세력도 컸다. 문무백관 중 적지 않은 사람이 몰래 그의 아래 몸을 의탁했다. 주왕과 정왕은 정통성에서 태자보다 못하고 세력도 리왕만 못했다. 하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는 모친인 서현비와 서가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다.

부수의는 사람들의 안중에 없었다. 혼자서 싸우는 셈이니 항상 웃음거리였다. 게다가 그의 생모 동숙비는 매우 소극적이라 부수의를 낳지 않았다면 비의 위치에 앉을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부수의는 우수하고 겸손하지만 혼자서는 한계가 명백하니 사람들은 그의 전망이 밝다고 보지 않았다. 부수의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며 황위 쟁탈에 흥미 없는 듯했으나 이 깊은 궁궐 안에서 방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안 됐다. 그의 형제들은 그를 경쟁자에서 제외했으면서도 경계의 고삐를 아주 풀진 않았다.

여자들은 남몰래 부수의의 뛰어난 외모를 관찰하며 살짝 얼굴을 붉히고 낮은 소리로 대화했다. 황실 사람 모두 용모가 좋았지만 부수의가 가장 출중했다. 황실은 그에게 비범한 기백과 도량을 하사했다. 그는 늘 담담한 태도를 보였고, 대중들과 동떨어져 턱을 쳐들고 우쭐거리지 않았다. 여자들에게 이런 ‘친근’하고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남자는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었다.

“정왕 전하는 확실히 너무 잘생기셨어.”

귓가에 낮은 중얼거림이 들려 심묘는 고개를 돌렸다. 언제인지 풍안녕이 옆에 앉아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웃음기를 거둔 풍안녕은 정색하며 말했다.

“넌 왔으면서 어째서 날 찾아오지 않은 거야? 나더러 찾아오란 거야?”

심묘는 풍안녕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풍안녕은 언제부터인가 엿가락처럼 달라붙으려 했다. 심묘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풍안녕이 언제부터 태도를 바꾼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심묘의 내면은 이미 소녀가 아니었기에 풍안녕과 친교를 쌓을 마음이 없었다. 게다가 심묘는 다른 사람의 선의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풍안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변명을 했다.

“못 봤어.”

만약 심묘가 이전의 아둔한 소녀였다면 풍안녕은 쳐다도 보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심묘는 명제 궁중에서 핏물로 목욕한 황후였다. 사람은 자신보다 강한 사람을 따르고 숭배하려고 한다. 풍안녕은 은연중에 심묘의 강대함을 느껴 무의식중에 따르려고 한 것이다. 풍안녕은 입을 삐죽이다가 갑자기 놀리듯 조용히 말했다.

“정왕 전하께서 오셨어. 어쨌든 네가 좋아했던 사람인데 어째서 한 번도 보지 않는 거야?”

풍안녕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의 말을 증명하듯 강효훤이 소리 높여 말했다.

“심묘야, 정왕 전하께서 오셨네!”

강효훤은 심묘가 망신당하는 걸 보고 싶었다. 사람들이 보고 있고 황실 사람들 앞이니 심묘도 화를 내지 못하고 나설안도 참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심묘가 부수의를 짝사랑한 일을 명제 모두가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나설안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강효훤이 고의로 심묘를 분노케 하려는 것을 알아챘다. 심묘는 부수의를 사모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나설안은 사람을 좋아하는 게 그리 쉽게 포기되지 않는 걸 알았다. 심묘가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해도 가슴은 매우 아플 것이었다. 나설안은 고개를 돌려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가 괴로울까 걱정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교교…….”

남자들의 시선이 매우 빛났다. 채임은 입꼬리까지 올리며 기뻐했다. 원수 같은 심묘의 체면이 바닥으로 떨어질 상황이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그 자리에는 소명풍과 소명랑도 앉아 있었다. 소명랑이 소명풍이 소매를 잡아당기며 놀람과 기쁨이 반씩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심묘 누나도 왔나요?”

소명랑의 키는 너무 작아서 심묘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소명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명랑이 왜 심묘에게 호감을 느끼는지 몰랐다. 만약 소명량이 너무 어리지 않았다면 소명풍은 소명랑이 심묘에게 이성 간의 호감을 품었다고 여겼을 것이었다. 소명풍은 고개를 돌려 심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라니. 심묘는 과연 어떤 얼굴로 부수의를 마주할까.

구석에는 소박한 청색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다른 귀족들처럼 부귀한 옷차림이 아니었으나 전혀 위축돼 보이지 않는 그에게서 옛 이름난 선비의 소탈함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는 심묘를 그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배랑이었다. 사실 배랑은 이런 곳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으나 오늘, 광문당 감독관에게 급한 사정이 생겨 배랑이 대신 광문당 대표로 이곳에 참가하게 된 것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이런 장면을 볼 줄은 몰랐지만.

부수안과 부수현은 부수의 곁에서 강효원의 말을 들었다. 부수안은 웃으며 부수의의 어깨를 토닥였다.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홉째, 정말 대단도 하지…….”

부수의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그의 입가에는 미미한 웃음이 걸렸다.

“형님은 농담도.”

하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심묘를 보고 있었다.

심묘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나왔다. 사방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 웃음소리로는 그녀의 기분을 알아챌 수 없었다. 비웃음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가볍고 부드러웠고, 즐거운 웃음이라기엔 매우 평온했다. 오래 침전한 독한 술처럼 온갖 맛이 섞여 있었다. 번잡한 천 가지 생각이 하늘거리는 담담한 웃음이 된 것 같았다.

심묘는 고개를 들었다. 시험장에서 채임과 마주해 활을 쏠 때처럼 그녀는 뒷짐을 지고 선 부수의를 바라보았다. 부수의는 약간 멍해졌다. 심묘의 시선 속에는 사모함이나 기뻐함이 없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평온만이 있었다. 100년을 살고 윤회한 노인처럼 오랜 세월을 사이에 두고 그를 보는 듯 슬픔도 기쁨도 없었다. 부수의는 불안해졌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는 아주 아름다웠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꿀을 맛보듯 달콤한 기분이 들 정도로. 그러나 조용히 부수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조금도 달지 않았다. 부수의는 밀림 속 깊숙한 덤불에 숨은 거대한 맹수의 눈동자에 주시당하는 것과 같다고 느꼈다. 그 불안은 점점 강렬해졌다. 그는 웃음기를 지우고 심묘를 주시했다.

심묘는 가볍게 또 웃었다. 그녀의 불그스름한 입가는 작게 호를 그렸으나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냉소였다. 아마도 사모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어 증오가 생긴 듯, 희미한 불평이 응집되어 냉소로 변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직설적으로 불만을 표현한 심묘가 의아했다. 궁중에서 황자에게 냉소를 하는 담력이라니.

부수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심묘의 냉소에서 희미한 살기를 보았다. 전력을 다해 숨겼지만 그 안의 맹렬한 기운은 모두 숨기지 못했다. 기세가 대단할 정도인 냉담함은 그를 움츠리게 했다.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살기를 뿜는 것도 과한데, 심지어 그 살기는 위협적이었다. 자신이 착각한 것일 테지만 안심이 되질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심묘 쪽을 쳐다보았으나 심묘는 이미 고개를 돌려 풍안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묘의 눈 속 희미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시험장에서도 부수의와 멀리서 얼굴을 마주했다. 그와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졌다고 살기가 새어 나오니 심묘는 부수의에게 접근한 후 자신의 세찬 증오를 감추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강효훤의 도발을 심묘는 두 번의 영문 모를 가벼운 웃음으로 넘겼다. 그녀의 첫 번째 웃음은 애매모호했고, 두 번째 웃음은 차가웠다. 하지만 바보도 두 번째 웃음으로 그녀가 부수의에게 일말의 정도 남지 않았음을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곁의 아가씨와 대화하며 부수의를 완전히 무시했다.

부수안이 눈을 빛내며 부수의에게 말했다.

“부수의, 보아하니 너도 가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는 건 아니구나?”

부수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심묘를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허, 심가 적녀. 기백 있네.”

소명풍이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중병’은 이미 많이 좋아졌으나 여전히 힘든 일은 할 수 없어 그는 아직 복직하지 않았다.

“심묘 누나는 본래 훌륭했어.”

소명랑은 그에게 눈을 흘겼다.

배랑은 고개를 숙여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깊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잠시의 침묵을 깨고 명랑하고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 여러분, 좀 늦었습니다!”

작은 산 같은 대한, 심신이었다. 심신의 뒤를 바싹 뒤따르는 사람은 심구였다. 중요 인물이 온 것을 보고 관리들은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심신은 부수안을 비롯한 몇 명에게 인사 후 자리에 앉았다. 심신과 심구가 직전의 일을 보았다면 심신이 손을 쓰지 않아도 심구부터 강효훤이 여자라는 걸 조금도 개의치 않고 끝까지 책임을 지게 했을 것이었다.

심신 이후, 리왕 파 세 명, 태자 파 세 명도 잇따라 도착했다. 몸이 허약한 태자보다 태자비가 대범해 보이고 위엄이 있었다. 심묘도 태자비를 보았는데, 그녀의 시선에는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

태자비의 부친은 승상이었다. 사실 태자는 태자비의 친정 세력을 등에 업고 지위를 공고히 했다. 그 후 태자비가 임신하자 문혜제는 태자비 일가 외척이 태자를 앞세워 세력을 잡을까 걱정해 비밀리에 태자비를 유산시켰다. 태자비는 태자와 정이 깊었고, 또 황제가 자신의 골육에게까지 살수를 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범인을 알았으나 친정에 알리면 친정에 재해를 불러올까 걱정을 하며 나날이 쇠약해졌다. 태자비가 죽고 3년 후에야 승상부는 진상을 알게 되었다. 부친은 딸의 복수를 하려 했고, 부수의와 손을 잡았다.

심묘는 자신 눈앞의 잔을 바라보았다. 황실 사람은 하나하나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했다. 부씨 남자는 모두 박정해서 그녀와 태자비는 다른 처지가 아니었다. 모두 황제의 책략 아래 희생양이 되어 무고한 아이를 잃었다. 지금 그녀는 바둑을 두고 있었다. 누가 와서 상대로 나선다면 그 사람은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할 것이었다!

태자비가 자리에 앉은 후, 시집가기 전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 담소를 나눴다. 남자 쪽 좌석에 예친왕도 등장했다. 예친왕이 도착하자 여자들은 모두 침묵했고, 소녀들은 놀라 안색까지 창백해졌다.

예친왕은 이전에는 회조연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는 조정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 문혜제도 예친왕에게 너그러웠다. 물론 예친왕이 젊을 때 목숨을 걸고 그를 구한 공로도 있지만, 예친왕이 이렇게 오래 조정 일에 손대지 않은 게 더 큰 이유였다. 지금 예친왕을 제외한 형제는 모두 문혜제의 손에 죽고 없었다.

줄곧 회조연에 참여하지 않던 예친왕이 출연하지 여자들은 불안해했고 남자들은 의심했다. 몇몇 황자는 그가 왜 왔는지 아는 듯 웃는 낯이었다. 태자비와 사담을 나누던 부인이 말했다.

“예친왕 전하께서는 어떻게 오셨나요?”

말속 탐색의 뜻이 보였다. 태자비가 미소 지었다.

“왕숙부는 여러 해 아내 없이 홀몸이었으니 그의 생활을 돌봐줄 사람을 찾아야지요.”

예친왕의 왕비를 선출하려는 말에 여자들은 모두 기겁했다. 예친왕의 왕비가 되는 건 집안의 번영을 위해 산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녀들의 몸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태자비께 여쭙겠습니다. 어느 댁 소저에게 행운이 있을는지요?”

그 부인이 웃으며 물었다. 태자비는 고개를 가로젓고 웃으며 대답했다.

“잠시 후면 알게 될 겁니다.”

태자비의 말에 여자들은 교착된 국면에 접어들었고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예친왕비라니, 명을 재촉하는 부적과 같았다. 빨리 죽는 일인데 뭐가 좋은 일일까…….

풍안녕이 심묘에게 접근해 물었다.

“새로운 예친왕비마마는 누굴까? 추측해봐.”

“모르겠는데.”

“너 정말 재미없다.”

풍안녕은 입을 삐죽였다.

심청은 옷자락을 팽팽히 잡았다. 예친왕을 본 찰나 그녀는 예친왕이 그녀에게 준 고통이 떠올랐다. 임완운이 그녀를 꼬집지 않았다면 심청은 크게 비명을 질렀을 것이었다. 임완운은 심청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심청아, 무서워할 것 없다. 오늘 예친왕이 온 것은 널 대신해 그 여인을 손봐주려는 거야. 그녀가 예친왕부에 들어간다면 당연히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할 거야…….”

진약추는 곁의 임완운과 심청의 동정을 살핀 후 앞의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살짝 웃었다.

예친왕까지 도착하자 황제 외 모든 사람이 다 왔다 여길 때 갑자기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풍안녕은 심묘와 이야기하다가 인기척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대전 문밖에서 안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자금색 장포, 검은색 장화, 명려하고 출중한 외모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서두르지도 여유를 부리지도 않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임안후 사정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아들아!”

그러나 그는 바로 무언가 생각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사경행의 그림자를 보며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오늘 회조연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사람들은 놀라고 의아해했다. 궁중연회에 나온 적 없는 예친왕뿐만 아니라 사가 소후야 사경행도 등장했다. 부수의가 나왔을 때보다도 많은 여자가 매혹당한 표정을 지었다.

소년의 자세는 곧았다. 한가하고 자유로운 걸음이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위압감이 있었다. 사경행은 본디 출중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자금색 장포는 은근한 위압감을 풍겨 함부로 가까이 가서 볼 수 없게 했다. 눈같이 하얀 얼굴, 강물 같은 눈동자, 칼같이 뚜렷한 눈썹. 약간 올라간 입술은 눈얼음 속 활짝 핀 황매화처럼 고운 색채가 있었다. 여자보다 더 세밀한 눈썹은 막 솟아오른 태양처럼 환했다. 찬란한 궁전에 서 있자 그의 뼛속 깊이 새겨진 고귀함과 오만함이 더욱 위세를 더했다.

사경행이 혼자 걸어왔음에도 온 문무백관이 조연이 된 듯했다. 하도 출중해서 세상도 색을 잃을 정도였다. 작열하는 태양 같은 예리한 시선, 세상을 하찮게 생각하는 듯 나른하게 웃는 얼굴. 세심하게 살펴보면 냉담하고 잔혹해 보이는 점까지 매혹적이었다.

“사가의 소후야, 언제 저렇게 출중해졌지…….”

풍안녕이 중얼거렸다. 사경행은 매우 빼어난 용모를 드러내놓고 자랑했으나 오늘 그는 이전과 달랐다. 이전에는 고의로 빛을 가렸던 것처럼 현재 사경행은 더욱 뛰어났다. 부수의보다 빼어난 풍채는 최고봉에서 중생을 굽어보는 황가 사람처럼 느껴졌다.

놀란 심묘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사경행은 앞으로 걸어가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과 마주해 눈썹을 추켜세우며 웃었다.

“오늘 저도 구경하러 왔습니다.”

사경행은 사정과 가까이 앉지 않고 소명풍과 가깝게 앉았다. 소명풍은 입을 삐죽거리며 옆으로 비켜줬다. 주위 사람들은 수군거렸지만 사정은 안색만 어두워졌을 뿐 저지하지 않았다. 아들이 이런 곳에 여태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 흥미가 생긴 모양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다.

“사가가 대단한 인물을 내놨네.”

나설안의 표정은 진중했다. 그녀는 사람을 볼 때 용인지 뱀인지 벌레인지 아주 정확하게 판단했다. 사경행은 기백이 대단해서 이유 없이 위협적이었다. 전쟁터에 갔던 사람은 이런 위험한 느낌에 더욱 민감했다.

사경행을 본 심구는 눈빛이 밝아지며 자칫 일어날 뻔했지만 바로 머리를 긁적였다. 행동을 숨기듯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런 거칠고 우악스러운 행위는 시선을 끌었지만, 그는 얼른 헤헤 웃었다.

“사가 저 녀석 괜찮군.”

심신은 매우 만족했다. 그의 오랜 경쟁자에게 번민을 가중시키는 사경행을 매우 즐겁게 바라보았다. 사경행이 사가 사람이 아니라면 공동의 적을 압박하는 친구가 됐을 것이었다

몇 명 황자의 시선이 동시에 음험해졌다. 임안후부의 소후야, 너무 출중해 보였다. 벼슬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법도 무시하고 하늘도 꺼리지 않는 태도는 다른 사람 아래에서 참고 있지 않을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이런 인물은 거둘 방법이 없었다면 빨리 죽이는 게 가장 좋았다. 병부를 가진 후부가 강대해지고 거기서 큰 인물이 나오는 걸 황실은 원치 않았다.

바로 이때 태감이 길게 말을 길게 늘어뜨렸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황후마마 납시오!”

마침내 황제와 황후가 천천히 등장했다. 문혜제는 기분이 좋아 보였으나 황후에게서는 이유 모를 맹렬함이 드러났다. 여인으로서 그녀의 얼굴은 수려했다. 젊은 시절에는 품위 있는 태도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녀의 뺨은 움푹 팼고 각박함이 드러났다.

황후의 아들 태자가 병을 앓았기에 그녀의 수완은 매우 맹렬했다. 심묘가 부수의에게 시집온 후 황후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황후의 손에서 고통당한 것은 일일이 셀 수도 없었다. 황후의 괴롭힘으로 심묘는 궁중에서의 생존 수법을 깨달았다.

지난 일을 모두 품고 심묘는 복수를 위해 돌아왔다. 황실을 철저하게 전복할 것이었다. 하루살이가 거목을 흔들고, 한잔의 물로 수레의 장작에 붙은 불을 끌 수 있음을 저들은 아직 모르고 있다. 게다가 저 자리는 본래 자신의 것. 다시 가질 수 없다면 저 자리에 올라서 있는 모든 이를 끌어 내릴 것이다.

심묘는 긴 쌍꺼풀을 드리우며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자리와 멀지 않은 곳, 심청이 미소를 드러내며 그녀와 함께 경축하듯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웃는 얼굴은 더욱 후련해 보였다. 그에 심묘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눈과 눈썹이 달콤한 모양으로 휘며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다. 맞은편 남자 좌석에서 몇 명이 심묘의 웃는 얼굴에 넋을 잃었다.

배랑은 줄곧 긴장을 풀지 않고 심묘를 주시했다. 그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몰랐다. 그러나 저 소녀에겐 어떤 특별한 게 있어 계속 그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몇 개월 전만 해도 심묘는 광문당의 머저리에 불과했으니 기묘한 일이었다. 전에도 배랑은 그녀에게 온화하게 대했으나 예의를 갖춘 것일 뿐 그 역시 내심 그녀를 무시했었다.

황제가 자리에 앉자 연회가 시작되었다. 소위 군주와 신하가 함께 즐거워한다는 말은 사실 겉치레에 불과했다. 군주는 여전히 군주, 신하는 여전히 신하였다. 그들은 신분과 지위에 맞게, 무례를 범하지 않는 선에서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어쨌든 천자와 백성이 함께 즐거운 것 같이 보이기는 했다.

소명풍이 사경행을 툭 건드렸다.

“어떻게 온 거야?”

“떠들썩한 자리 구경하러 왔지.”

사경행이 입가를 끌어올리자 여자들은 헉 하고 낮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렇게 시시한데, 무슨 구경거리가 있다고?”

소명풍은 예측불가의 친구 덕에 골치가 아팠다. 그때, 예친왕이 입을 여는 게 보였다.

“황제 폐하…….”

그의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대전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모두 예친왕을 두려워했다.

“얼마 전 제 비를 선출하는 일을 승낙하셨지요. 오늘 기쁜 일이 있으니 겹경사가 나게 하는 건 어떠합니까?”

예친왕의 웃는 얼굴은 괴상했다.

“저는…… 심가 소저가 마음에 듭니다.”

그는 매우 느리게 말했고, 독사들이 뒤엉켜 우글대는 사악한 눈빛이 단정히 앉아 있는 심묘에게 닿았다.

대전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사람들은 세 명의 심가 소저를 바라보았다. 심청은 이미 정혼했으니 남은 것은 심모와 심묘였다. 심모는 온화하고 매력적이며 재능도 출중하다는 명성이 널리 퍼져 있었다. 심묘는 원래 재녀가 아니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환골탈태했다. 지금은 전신에서 기백과 품위가 넘쳐 눈을 뗄 수 없는 날씬한 소녀였다. 무엇보다도 심묘의 뒤에는 위무대장군 심신이 존재했다. 사람들은 예친왕이 주시한 사람은 바로 심묘인 걸 분명히 알아챘다.

일순간 모든 사람이 괴이한 표정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기뻐하는 사람과 동정하고 연민하는 사람이 뒤섞여 있었다. 예친왕의 전 왕비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이 석연치 않음은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 예친왕의 흉악한 성정도 모두 알고 있으니 어림잡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예친왕은 황실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아무리 당당한 위무대장군이라고 해도 상대방은 황제의 목숨을 구한 친동생. 황제가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뻔했다.

심신의 안색이 흉포해졌다. 심지어 이마에는 혈관도 튀어나왔다. 위무대장군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라서 일순간 흉악한 기운이 뻗쳤다. 심신은 충신임과 동시에 딸을 지극히 아끼는 아비였다. 심묘를 보호할 수 있다면 목숨을 건 공로를 모두 걸어서라도 예친왕에 대항할 생각이었다.

심구도 입꼬리를 팽팽히 당겨 매섭게 예친왕을 노려보았다. 예친왕이 심묘의 이름을 꺼내기만 하면 예친왕 손에 죽을 생각으로 덤빌 생각인 듯했다.

나설안은 심묘의 손을 꽉 끌어잡았다. 상쾌하게 웃는 얼굴은 이미 사라졌다. 그녀의 눈은 깊고 결연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 늑대처럼 한 치도 양보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심가의 태도에 탄식했다. 문혜제가 눈앞에 있는데도 심가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들은 의심 많은 문혜제의 마음속에 심가가 황실의 위엄에 도전하려 든다는 의혹을 남기는 게 두렵지 않은 것인가 싶었다.

부수의도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놀라움이 있었다.

“심묘 소저는 과연 심 장군의 보물인가 봐. 그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다니.”

소명풍이 소리를 낮춰 사경행에게 속삭였다. 예친왕과 맞서는 것은 바로 황실에 척을 지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이든 관계없이 심가는 이미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백히 밝혔다. 문혜제가 혼례를 올리라는 성지를 내린다 해도 심가는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사경행은 그저 웃고 있었다. 그는 소명풍의 말에 가부를 단언하지 않았다.

찻잔을 든 배랑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시험장에서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활을 쏘던 그녀는 어찌할까 싶었다.

문혜제 역시 그저 웃고만 있으니 그의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심가를 보는 시선은 차가웠다.

“왕제, 심가의 어느 아가씨가 마음에 드는가?”

모든 사람이 예친왕의 대답을 기다릴 때, 심청의 얼굴 위로 다시 한번 후련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때 심청은 배 속에서 맹렬한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고 배를 감싼 채 바닥으로 넘어졌다.

“무슨 일이지?”

“심청아!”

갑작스러운 심청의 동작에 사람들은 놀랐고, 임완운은 바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심청의 안색은 빠르게 창백해졌다. 심모는 겁을 먹고 저도 모르게 진약추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진약추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단정히 탁자에 앉아 있었다. 진약추와 눈이 마주치자 심묘는 싱긋 웃었다. 그것도 잠시, 표정을 굳힌 심묘는 나설안을 보며 걱정하며 물었다.

“심청 언니가 왜 저럴까요? 혹시 중독된 건 아니겠지요?”

심묘의 말에 주위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심묘는 작정한 듯 말을 이었다.

“혹시 자객이 섞여 들어온 걸까요?”

남자들과 황자들, 문혜제의 안색이 그 즉시 변했다. 문무백관 모두가 한자리에 모인 회조연에 자객이 섞여 들어오면 황실이 위험했다. 즉시 외부에서 지키던 시위가 전부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손을 허리의 검 위에 두고 주위의 수상한 인기척에 주의했다.

자객의 침입 가능성은 사람들의 관심을 돌렸다. 예친왕의 말보다 목숨이 더 중요했다.

소명풍이 입을 벌렸고, 탄복하며 낮게 말했다.

“좋은 수단이군.”

사경행은 자매를 ‘걱정’하는 소녀를 힐끗 보고 가볍게 흥 소리 냈다.

심묘는 한마디로 사람들의 주의를 돌렸다. 심묘의 눈빛이 살짝 움직였다. 황궁에서 여러 해 살았던 그녀보다 황실 사람의 의심 많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문혜제의 생명을 노린 암살 시도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목숨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니 문혜제는 더 이상 친왕의 혼사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머니, 심청 언니를 위해 태의를 불러와야겠어요. 저렇게 두면 안 되겠어요.”

심묘의 말에 나설안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임완운과 심청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았다. 딸이 고통으로 뒹구는데도 임완운이 의원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나설안은 문혜제에게 달려가 예를 갖추고 말했다.

“폐하께 간청합니다. 태의를 불러 심청의 병을 진찰하여 위기를 넘기게 해주십시오.”

그때 임완운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안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의아한 눈빛으로 임완운을 바라봤다. 많은 시선과 마주한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제, 제가 어찌 태의를 움직이게 하겠습니까……. 모두의 흥을 깨뜨릴 수 없으니, 제가 심청을 데리고 떠나면 됩니다…….”

나설안은 정색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무엇도 생명보다는 중요치 않네. 설마 심청의 생명보다 연회의 흥이 더 중요하다는 거야?”

사람들의 표정은 더욱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친어머니인 임완운은 태의를 찾는 것을 꺼리고 되려 숙모인 나설안이 나서서 심청의 생사를 챙겼다. 심귀는 가라앉은 얼굴로 임완운을 주시했다. 저 모녀 둘이야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지만, 이로 인해 문혜제가 불쾌한 기억을 가진다면 장래 벼슬길에 문제가 생길 것이었다.

“심 대부인의 말이 맞다. 심 대소저의 상태가 심각한데 회조연이 뭐라고.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황후가 담담히 말하며 임완운을 한 번 보았다. 임완운은 놀라 허둥거렸다. 심청을 태의가 진찰하면 사람들 앞에서 복중 태아가 폭로될 것이었다.

“폐하, 하오나…….”

“난 괜찮아요…….”

심청은 비 오듯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안색은 종이처럼 창백했다. 고통에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태의를 불러서는 안 됨을 알기에 복부를 가린 채 한마디를 겨우 내뱉었다.

“하지만, 심청 언니. 언니의 안위만 관련된 게 아니라 지금 전당 안 모든 사람의 안위와 관련이 있어. 만약 정말 중독된 거라면 자객이 들어왔다는 의미니 모든 사람이 위험해. 언니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또 폐하를 위하지 않는 거야?”

심묘의 평온한 목소리가 울렸다.

문혜제의 시선이 무거워졌다. 심묘의 말에 심청은 억울하여 미칠 것만 같았다. 황제를 끌어들이니 심청은 무슨 말을 할 수 없었다. 황제 앞에서 감히 황제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었다.

몇몇 황자는 심묘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리왕이 말했다.

“저 심가 소저는 세 치 혀가 대단히 무섭군!”

문혜제가 단호하게 분부했다.

“여봐라, 태의를 불러오라. 심가 소저가 궁 안에서 사고를 당했으니 짐은 하나하나 확실히 조사해야겠다!”

“심청 언니, 함부로 행동하지 마. 분명 그 흉수(兇手)는 사람들 안에 섞여 들어왔을 거야. 태의가 오면 언니를 진맥할 거야. 그때까지 가만히 있어. 기혈이 움직이면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

심묘의 말에 임완운이 대답하기 전 문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황제의 말에 임완운 모녀의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태의가 심청을 진맥한다면…… 심청의 임신 사실이 모든 문무백관 앞에 폭로될 것이었다. 임완운의 몸이 계속 떨렸다. 그녀의 두려움은 심청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고통에 필적하는 공포가 샘솟았다.

“어머니, 하지만…….”

일개 부인이 황제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임완운은 거스를 수 없었다. 집안에서는 횡포를 부릴 수 있으나 황제와 관리들 앞에서 임완운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절한 눈빛으로 심귀를 바라보았다. 심귀가 지푸라기라도 던져주길 바랐다. 그러나 심귀의 눈에는 책망과 분노만 가득했다. 일순간 임완운의 손발이 매우 차가워졌다. 깊은 절망이 솟아났다. 품 안 심청을 위로하긴커녕 눈이 풀려 바닥에 푹 쓰러졌다.

풍안녕이 심묘에게 귓속말했다.

“너희 숙모 왜 저러셔? 잔뜩 겁먹으신 것 같은데?”

심묘는 웃었고, 나설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임완운을 보며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어 진약추와 심모를 바라보았다.

심모는 여전히 진약추의 옷자락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진약추는 꼼짝하지 않고 임완운을 주시했다. 임완운과 오래 지낸 진약추는 그녀가 각종 문제를 여유 있게 처리하고 대응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계략에 걸린 것이었다. 심모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심청 언니가 정말 중독됐을 리는 없어요. 어머니, 심묘가 혹시…….”

“심모야!”

진약추가 매섭게 그녀를 제지했다. 진약추는 심묘를 흘깃 보았다. 사람들 때문에 심묘의 시선을 분명히 볼 수 없었지만 심묘의 입꼬리가 작게 올라간 듯 보여 진약추는 소름이 끼쳤다. 대담하게 궁중에서 독을 쓰다니 보통 담력이 아니야. 오늘 일은 반드시 심묘와 연루된 게 틀림없다. 진약추도 이번 일의 전말을 추측할 수 없었으나 어찌 되었든 간에 오늘 심청이 명성을 유지할 수 없을 거란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발생한 변고에 예친왕도 안색이 가라앉았다. 방종하고 오만하긴 했지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아는 그는 지금 자신의 일을 꺼낼 좋은 시기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오늘 심묘는 재난에서 도망치려 했다. 심묘가 심청에게 독을 썼든 말든 이렇게 그와 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심묘가 세상살이를 너무 쉽게 보는 것이었다. 일이 마무리된 후 문혜제에게 이 일을 다시 청할 수 있었다. 이런 소란은 기껏해야 일각 정도의 시간을 벌어줄 뿐. 예친왕은 느긋이 심묘가 준비한 여흥을 즐겨보기로 했다.

태의는 서둘러 왔다. 궁중 태의는 모두 나이가 많았는데, 이는 풍부한 경험이 있어야 태의원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엔 이십 대 정도로 보이는 태의가 나타나 예상 밖이었다. 매우 준수하게 생겨서 긴박한 상황임에도 관가 소저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심묘는 그 태의를 본 순간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그 태의를 세심히 관찰했다. 젊은 태의는 황제와 황후에게 인사한 후 임완운의 곁으로 걸어갔다. 겨우 정신을 차린 임완운이 막으려 할 때 태의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듣기 좋아 사람의 마음이 편해지게 했다.

“부인, 제가 심 소저의 진맥을 할 수 있도록 소저를 놔주십시오.”

많은 사람을 비롯해 황제와 황후가 예리하게 보고 있었다. 임완운은 감히 맞서지 못했다. 심청은 이미 혼절한 상태였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나 태의가 심청의 맥을 짚는 것을 보았다.

심묘가 그 태의를 보며 넋을 잃자 곁에서 풍안녕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너 태의를 마음에 둔 건 아니지? 저쪽이 마음에 든다면 안목이 나쁘진 않네.”

심묘는 살짝 멍해져 물었다.

“저 사람을 알아?”

풍안녕이 놀라 말했다.

“응? 너 처음으로 내 말에 이렇게 흥미를 보이네. 내가 특별히 말해줄게. 저 태의는 태의원에 새로 온 의원이야. 의술이 대단해서 덕비마마의 고질병인 가슴 통증도 치료했대. 폐하께서 그 실력을 높이 사 상례를 깨고 태의원에 넣었지. 지금 태의원에서 가장 어리고 생긴 것도 잘생겨서 많은 아가씨가 좋아해.”

“너도 저 사람을 좋아해?”

심묘의 말에 풍안녕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내가 어찌 그를 좋아하겠어? 의술이 고명하고 잘생겼어도 태의야. 배후에 가족의 지지가 없는 혈혈단신인데 어떻게 우리 가문과 어울리겠어? 너도 마음에 둘 수는 있지만 어울리기엔 격이 안 맞아.”

풍안녕은 집안에서 총애를 받으며 성장했기에 영향력이 대단한 인물이 자신의 남편이 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하찮은 태의는 정말로 안중에 없었다.

“이름이 뭐야?”

심묘의 물음에 풍안녕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설마 정말로 좋아하게 된 건 아니지? 고양이라고 해. 방금 말했듯이 정경성의 관리 가문에 고씨 성은 없지.”

고양이 명문가 출신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심묘는 그 젊은 의원을 주시하느라 심청과 임완운을 소홀히 했다. 그녀의 마음속 풍랑이 일었고 심묘는 고양이 자신에게 익숙한 느낌을 주는 걸 깨달았다. 어디서 만난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러나 전생 태의원에는 고양이라는 인물이 없었다. 태의원이 아니라면 어디서 그를 보았을지 고민에 빠졌다.

고양은 진맥을 끝냈다. 그가 고개를 들자 심묘의 주시하는 시선과 마주했다. 그는 심묘의 시선에 약간 멍해졌으나 빠르게 정신을 차렸고, 임완운에게 인사했다.

“고 태의, 심가 소저는 중독된 건가?”

고양은 잠시 혼절한 심청을 보고 또 창백한 안색의 임완운을 바라보더니 두 손을 맞잡고 황후에게 고개를 숙였다.

“마마, 심가 소저는 중독된 게 아니옵니다. 소저는 청련차를 마셨습니다.”

그는 머뭇거리듯 잠시 멈췄다가 이어 말했다.

“심 소저가 마신 청련차에는 독이 없었고, 심 소저도 중독된 게 아니옵니다.”

문혜제가 고양을 다그쳤다.

“중독이 아니라면 어째서 저러느냐?”

고양은 탄식했다.

“폐하, 청련차를 보통 사람이 마시면 확실히 탈이 없으나 임부가 마시면 태기를 보이게 됩니다……. 심 소저는 회임 중이옵니다.”

고양의 말에 주위는 떠들썩해졌다. 심귀가 놀라 입을 벌렸고 안색은 순식간에 자홍색이 되었다. 그는 임완운을 매섭게 바라보았지만 임완운은 이미 넋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힘을 모두 잃은 듯 미동도 없었다.

“대단하군!”

입을 연 사람은 황가 부인이었다. 그녀는 황제의 앞임에도 불구하고 임완운을 가리키며 욕했다.

“우리에게 음탕한 여자를 시집보내려 하다니. 다른 사람의 아이를 기르라니. 임완운, 정말 뻔뻔스럽구나!”

황 부인의 말에 더욱 시끄러워졌다. 심청은 황가와 정혼했는데, 혼인도 하기 전 임신이라니 이는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다 큰 처녀가 임신이라니 사통한 게 아닌가. 감히 다른 남자의 아이를 품고 황가에 시집가려 했다니. 명제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황 부인의 욕설에 임완운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심청의 곁으로 기어가 그녀를 품에 껴안았다.

“심 부인, 나도 알고 싶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높은 자리에 앉은 황후가 냉랭히 말했다.

명제는 남녀 간의 일에 큰 제약을 걸지 않았지만 혼인 전 사통한 일은 가족의 체면을 깎는 일이었다. 사통이 적발되면 당사자를 연못에 빠트리는 게 국법이었다. 더욱이 심가는 명제 관리 중 높은 위치에 있었다. 심귀의 관직은 심신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낮다고 할 수도 없었다. 심청의 신분 때문에라도 이 일은 영향력이 클 테니 더욱 나쁜 일이었다. 황후는 명부의 주인이니 규수가 몸가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앞장서서 엄벌했다. 그녀의 목소리 속 냉기를 모든 사람이 알아챘다.

임완운은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그녀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심청이 사통한 게 아니라 강간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어느 것이든 순결을 잃은 건 매한가지였다. 더욱이 예친왕의 이름은 한 글자도 꺼낼 수 없었다. 예친왕은 하찮은 일까지도 꼼꼼하게 따져 대갚음하는 사람이니 그에게 원한을 산다면 더욱 비참한 앞날이 닥칠 것이었다.

“심 부인이 말하지 않으면 심 소저가 말해보라. 가서 심 소저를 깨워라. 내가 물어볼 게 있다.”

황후는 더욱 맹렬한 눈빛으로 임완운을 노려보며 곁의 궁녀에게 분부했다. 궁녀의 동작은 매우 신속해 임완운이 저지하기도 전에 심청을 거칠게 꼬집어 깨웠다. 깨어난 심청은 여전히 내장이 뒤틀리는 심한 통증을 느껴 고통스러워했다. 황후는 일말의 동정도 보이지 않고 차갑게 물었다.

“심청, 네 아이의 아비는 누구지?”

심청의 몸이 굳었다. 도움을 청하듯 임완운을 바라봤지만 임완운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력했지만 어떻게든 그녀를 구할 방법을 생각할 테니 절대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심청은 임완운의 뜻을 알 수 없었으나 감히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어 우물쭈물 말했다.

“저…… 저는…….”

심묘가 조용히 탄식했다.

“심청 언니, 말해버려. 언니는 지금 중죄를 범했어. 언니 혼자서 그 목숨을 책임질 수는 없잖아.”

임완운이 매섭게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심묘의 입을 찢어버리지 못해 한이 맺혔다. 심청은 몸이 굳었다. 그녀의 눈에 놀람과 두려움이 보였다. 심묘는 그녀가 죽음에서 도망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심청은 이성을 잃고 소리 높여 말했다.

“아…… 안 됩니다……. 제 아이는 예친왕 전하의 혈육입니다! 제 배에는 예친왕 전하의 혈육이 있어요!”

대전에 또다시 한차례 파도가 일었다. 회조연에서 많은 일이 드러났다. 예친왕의 아이라니……. 사람들은 예친왕을 바라보았다. 예친왕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심청을 바라보았는데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심청아, 허튼소리 말아라!”

임완운이 달려들어 심청의 입을 막았으나 이미 쏟아진 물은 어찌해도 도로 담지 못하는 법.

심청은 눈을 크게 뜨고 예친왕을 주시했다. 그녀의 생각은 간단했다. 혼례를 올리기 전에 외인과 사통해 임신하면 연못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이는 예친왕의 혈육이니 황실의 혈통이었다. 목숨을 보전할 부적을 배 속에 보유한 셈이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황제도 자신의 조카를 죽이라 명령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심묘는 심청을 보았다. 그녀는 심청이 가소로웠다. 심청의 얄팍한 생각 따위는 뻔히 읽혔다. 그러나 심청은 세상에 자식만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궁중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심청은 정말로 혈육에 기대서 무사히 지낼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걸까. 죽음을 재촉하는 악수를 두었을 뿐인데. 심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황제와 황후의 표정은 짐작할 수 없었다. 예친왕이 연루된 일이라면 일은 확실히 간단하지 않다.

심구와 심신이 서로 바라보았다. 심구는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심묘는 줄곧 그에게 심청을 강간한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다. 어쩐지 심묘가 말하길 원치 않더니 범인은 예친왕이었다. 그때 심묘가 운이 좋지 않았다면 지금 심청의 처지에 떨어진 것이 심묘일 거라 생각하니 심구는 새삼 분노가 샘솟았다.

예친왕은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거의 인정인 셈이었다. 사람들은 심청을 동정했다. 연민도 가득했다. 예친왕은 각종 추잡한 수단으로 비밀리에 소녀들을 학대했다. 관리 집안의 딸도 예외가 아닌지라 심청처럼 재수 없는 일을 당한 아가씨가 한둘이 아니었다.

조용한 대전 안, 심묘의 목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어쩐지 좀 전에 친왕 전하께서 심가 소저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 하신 게 알고 보니 심청 언니에게 명분을 주려고 하신 거네요.”

사람들은 문득 깨달았다. 어쩐지 방금 예친왕이 왕비를 맞고 싶다며 심가 소저를 얘기하더니, 그 소저가 바로 심청이었다. 심청을 보는 시선은 또 변했다. 예친왕이 그녀를 강간한 게 아니라 심청이 왕비가 되겠다고 자원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심묘 소저, 정말 대단하네. 사실을 왜곡하는 능력이 남달라.”

소명풍이 놀라 말했다. 대다수가 심묘의 의도대로 생각했지만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순 없었다. 머리가 명석한 사람은 예친왕이 심가 소저가 마음에 든다고 말할 때 심묘를 봤던 것을 기억했다. 사경행은 팔짱을 끼고 웃는 듯 마는 듯한 눈빛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궁중 연회의 모든 사람이 심묘에게 끌려다니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은 모두 그녀의 계획대로였다. 그 계획에 위험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대담하게 큰 도박을 단행해 확실히 손을 썼다. 탁월한 한 수였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사경행도 이 한 수가 판을 완전히 뒤집는 데 한몫하기로 했다. 사경행이 입을 열었다.

“애정도 있고 명분도 있으니 좋구나.”

황제는 미간을 찡그렸다. 예친왕은 함부로 굴어도 이런 일을 양지로 끌고 오진 않았기에 암암리에 늘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 앞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예친왕을 처벌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이 일로 예친왕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윗사람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무조건 친족을 비호하면 성군의 명예는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었다.

때마침 심묘와 사경행이 좋은 방법을 제시했다. 남녀가 서로 마음이 맞아 한 일이라면 너그럽게 봐줄 수 있었다. 황제는 황후를 한 번 바라보았고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제가 말한 사모하는 소저가 심청 소저였군. 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 함부로 행동했네. 이런 큰일을 일으키다니, 앞으로 어찌할 텐가?”

심청은 크게 한시름 놓았다. 통증은 개의치 않고 황제 앞으로 기어갔다. 그녀가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그러나 저는 배 속 아이와 헤어지기 아쉬우니, 전하와 폐하께서 제 아이를 봐서 한 번만 용서해주시길 간청합니다.”

야유하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심청에게선 일말의 존엄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녀는 심부의 체면을 바닥까지 떨어뜨렸다. 황후는 그녀를 혐오스러운 벌레처럼 힐긋 보더니 담담히 말했다.

“처벌은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오늘은 회조연이니 기쁜 일만 논해야지. 왕제도 오래 홀몸이었으니 본궁이 오늘 혼사를 정해주마. 두 사람의 혼사를 허락하니 금과 옥 같은 좋은 인연이 되어라.”

심청은 얼른 기쁘게 대답했다.

“황공합니다, 폐하. 이뤄주심에 감읍합니다, 황후마마.”

심청의 행동은 망신스러웠다. 와룡사에서 임완운은 심묘에게 결코 상류사회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악담을 퍼부었지만, 정작 수많은 사람들에 깔려 상류에 오르지 못하게 된 심가의 적녀는 그녀의 딸, 심청이었다.

예친왕은 음습한 눈빛으로 심청을 쳐다본 후 시선을 돌려 심묘를 바라보았다. 높은 자리에서 황제가 경고하듯 그를 주시했고, 예친왕은 부득이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한 후 느리게 말했다.

“이뤄주셔서 폐하와 황후마마께 감사드립니다.”

말속에는 그만이 알 수 있는 오싹함이 담겨 있었다.

심묘는 웃고 있었다. 예친왕의 주시는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는 기쁨이 빛나고 있었으나 기쁨 속 맹렬함을 감추고 있었다. 오늘은 간단한 요리를 한 것일 뿐이었다. 예친왕부에 아직 남긴 것이 있었다. 예친왕의 계획을 수포로 돌렸으니 예친왕은 반드시 분노했을 것이었다. 사람은 분노하고 다급할 때 실수를 가장 많이 하는 법. 그리고 이 실수는 바둑판에 돌을 잘못 놓듯 돌이킬 수 없는 패인(敗因)이 될 터였다.

심묘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지금 이 승세를 몰아 추격하면 졸은 물론이고 차를 잡아 장군을 목전에 두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심묘의 입가에 머금은 웃음은 세심히 보면 춥지 않은데도 떨리게 하는 무서운 분위기가 있었다.

예친왕, 오늘 일은 시작에 불과하다.

* * *

회조연은 갑자기 발생한 변고 속에 유야무야로 끝났다. 문혜제는 흥이 깨져 오래지 않아 가버렸고, 황후도 떠났다. 황제와 황후가 떠나니 신하들 역시 오래 머물지 않고 분분히 구실을 찾아 떠났다. 오늘 연회는 심가 큰 아가씨가 예친왕부로 시집간다는 결말로 끝났다. 그러나 통찰력 있는 사람은 이 일이 깜짝 놀랄 추악한 일임을 눈치챘다. 심청이 예친왕부로 시집가면 흉한 것이 많지 길한 것은 적을 것이 명백했다.

나설안은 심묘의 손을 꽉 잡아끌었다. 심청과 예친왕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몰랐으나 심묘의 안위가 더욱 걱정스러웠다. 정경성 내 위험이 서북 사막과 비등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심구는 떠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늘 밝은 그였기에 심신은 심구가 심청의 일로 탄식한다고 여겼다. 심구가 심묘의 일로 분노했으나 답답함을 풀 곳이 없어 괴로워하는 줄은 몰랐고, 심가 이방의 악랄한 마음씨를 증오하며 여색을 밝히는 예친왕의 뻔뻔함을 증오하는지는 더욱 몰랐다.

임완운은 심청을 데리고 급히 떠났다. 심귀의 안색은 기쁜 듯 슬픈 듯 알아보기 어려웠다. 사람들의 그를 보는 시선도 의미심장했다. 조정에서 사이가 나쁜 동료들은 어려움을 틈타 해를 가한다. 동료들은 그를 향해 인사한 후 웃으며 말했다.

“심 대인, 축하합니다. 예친왕 전하와 혼사를 맺다니, 대단히 큰 복이지요.”

심청이 예친왕과 혼인한다면 심귀에게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의 벼슬길에 도움이 되기만 하면 딸의 행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심청의 태도는 예친왕에게 말썽을 불러왔다. 예친왕이 화풀이를 하진 않을까 심귀는 초조했다.

나설안과 심묘는 궁 밖으로 걸어 나왔다. 복도를 걸을 때 심묘가 작은 소리로 조언했다.

“조심하세요. 이곳 바닥 돌이 느슨해요.”

나설안은 무장이라 발걸음이 크고 무거웠다. 바닥 돌을 잘못 밟았다면 비틀거렸을 것이었다. 나설안이 자세히 살펴보고 크게 웃었다.

“자칫하면 넘어질 뻔했네.”

그러다 멍하니 심묘를 바라보았다.

“교교, 어떻게 알았어?”

심묘는 숨이 막혔다. 그녀는 궁중에서 십수 년 생활했기에 어디가 어떠한지 다 알고 있었다.

“1년 전 이곳에서 넘어져서 기억하고 있어요.”

나설안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그랬구나. 교교는 똑똑하기도 하지. 넘어진 곳은 기억해두고 다시 넘어지지 않는구나.”

심묘는 두근거렸지만 나설안이 그대로 믿는 듯해 안심했다.

두 사람은 시위 둘이 소태감을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소태감의 입은 천으로 막혀 있었다. 기를 쓰며 발버둥 치는 듯했으나 체구가 크고 훤칠한 시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들 세 명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태감총관 고 공공이었다.

“심 부인, 심 소저.”

고 공공이 멈춰 그들과 인사했다.

“고 공공, 이게…….”

나설안은 소태감을 보며 물었다.

“신입이라 규칙을 몰라 잘못을 범했습니다. 데리고 가 처벌을 할 겁니다.”

고 공공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태감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심묘의 몸 뒤 경칩에게 떨어지자 갑자기 미친 듯 발버둥 쳤다. 당장에라도 경칩에게 달려들고픈 눈치였다.

“얌전히 굴어!”

고 공공이 소태감의 다리를 걷어차자 소태감은 신음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고 공공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어디 귀인에게 달려들려고.”

나설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궁중의 이런 인간미 없는 처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 공공을 더 방해하지 않겠네.”

고 공공은 얼른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때 심묘가 갑자기 입을 열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요.”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태감은 몸을 떨었다. 심묘를 보는 시선 속에 한 오라기 증오가 스쳤다. 심묘는 그를 상대하지 않고 나설안을 끌어당겨 떠났다. 떠날 때 담담히 한마디를 던졌다.

“규칙을 모르면 가르쳐야 하지. 궁중은 궁 밖과 다르고 지금은 이전과 같지 않으니.”

심묘 일행의 그림자가 점점 멀어졌고, 고 공공이 시위에게 말했다.

“뭘 기다리느냐, 가자.”

소태감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범했는지도 몰랐다. 회조연의 작은 화원에서 경칩이 그에게 은자를 주며 심 대소저의 몸이 불편해 연회에 준비된 감주를 마실 수 없으니 청련차 한 잔이 필요하다고 했다. 번거롭겠지만 그에게 바꿔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간단한 일로 은자를 얻을 수 있으니 그는 당연히 한다고 했다. 게다가 심가 소저의 비위를 맞추면 장래 더 큰 행운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심청이 임신 중이었고, 그 청련차가 모든 일을 일으킨 재난의 원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차 한잔 때문에 자신은 재난을 불러온 원흉이 되었다.

소이자가 수천 번 해명해도 그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심부가 무엇하러 그에게 그런 짓을 시킨단 말인가. 게다가 그가 증좌로 내민 은자도 나라에서 발행한 은이 아닌 보통의 은이었다. 관가 소녀가 보통의 은자를 쓸 리가 없었다. 그는 순식간에 죄를 짓고도 반성은커녕 거짓말만 늘어놓는 악인이 되었다. 그를 기다리는 건 무엇일까.

심묘는 조용히 걸었다. 소이자를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궁중은 사실을 쉽게 왜곡하는 곳이었다. 지위가 높다면 손쉽게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켰다. 반면 지위가 아주 낮은 쪽에선 진실이 거짓으로 바뀌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부수의가 막 황제에 등극했을 때, 소이자는 고 공공 곁의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가는 개였다. 심묘는 소이자를 불쌍히 여겨 궁중에서 그의 체면을 세워줬고, 그 덕에 소이자는 더 이상 하찮은 소자(小子, 소이자는 이름이 아니고 이씨 성을 낮추어 부르는 것)가 아닌 이 공공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폐후가 되었을 때 그녀가 발탁한 그는 직접 그녀에게 최후를 선고하며 친절하게 충고를 한마디 했다.

“지금은 이전과는 다릅니다.”

심묘는 이 말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 셈이었다. 이번 생은 전생과 같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지금 높은 가문의 적녀고, 상대방은 하찮은 먼지와 같아서 마음 쓸 가치도 없었다.

구불구불한 복도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탄식했다.

“심가 소저는 저 소태감과 원한이 있나?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구만.”

사경행이 냉소하며 고양을 보았다.

“너 언제부터 자애롭게 변한 거야?”

“의원 된 자로서 부모의 마음이 있는 걸세.”

고양이 부채를 흔들었고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표정이 무겁게 변했다.

“심가 소저는 평범하지 않네. 방금 전당에서 나를 아주 오래 쳐다봤어, 혹시…… 내 신분을 알아챈 걸까?”

“불가능해.”

고양은 턱을 매만졌다. 그는 잠시 진지하게 사색하고서 말을 이었다.

“날 보는 시선은 분명 의미심장했어. 혹시 날 좋아하나?”

사경행은 무표정하게 그를 보고 한마디 내뱉었다.

“꺼져.”

“자넨 정말 재미없네. 지금 큰일로 상황이 긴박하다곤 하지만 자네 성격은 갈수록 흉악해지는구만. 좀 풀어도 두게.”

고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매우 유감스러워했다. 사경행은 먼 곳을 보며 그에게 알렸다.

“계우서가 왔어.”

“응? 언제?”

고양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어제.”

고양의 표정이 점점 진중해졌다.

“설마 자네…….”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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