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첫눈이 내리고 갑자기 날씨가 맑아졌다. 한밤에 눈이 내려 날이 밝았을 때, 처마 아래 밤새 얼어붙은 얼음 결정이 반짝여 아름다웠다. 큰길에서는 장난꾸러기들이 쪼그리고 앉아 눈을 뭉쳐 서로에게 던지며 놀았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정경성의 분위기도 한껏 들떴다. 지난 1년 내내 고생한 성과를 거두는 데서 오는 기쁨이 가득했다.
풍선전당포 외부 처마에는 일제히 붉은 등롱이 걸렸다. 보통 등롱이 아니라 금색의 실이 섞인 듯 벌건 대낮에도 밝게 빛났다. 홍등 아래 장식물도 유리구슬이어서 얼음 결정과 서로 어울려 아름다운 운치를 더했다. 부자가 재물을 자랑하듯 호화로운 장식이었다. 외부는 당연히 호위가 지키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등롱을 훔치러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을 것이었다.
무명옷의 점원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손님을 맞이했다. 풍선전당포에 거래하는 오는 사람은 아주 적어서 점원은 보통 게으름 피우길 좋아했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는 달리 유달리 생기가 있었다.
풍선전당포 긴 복도 너머 다른 세상, 림강산.
1층 다실 안에는 웃는 얼굴이 요염하고 붉은 옷을 입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직접 간식을 가지고 들어가 안에다 두고 미소 지었다.
“요리사가 만든 간식입니다. 먼저 맛보십시오.”
그녀는 천천히 물러났고 다실 안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연두색 장삼을 입었고 웃는 얼굴은 친근하며 온화했다. 그의 맞은편 두 사람은 대략 약관을 넘은 것처럼 보였고, 생김새가 닮아 형제인 게 명백했다. 두 사람 모두 짙은 눈썹과 큰 눈, 허리에 검을 차서 강호인의 분위기가 다분히 풍겼다.
형제 중 나이가 좀 더 많은 진악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계 주인, 그 소식을 팔려는 사람이 우리 형제를 속인 건 아닙니까? 이렇게 늦도록 나타나지 않는다니요.”
계우서가 웃으며 달랬다.
“다급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만날 거라고만 했지, 시간은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오늘이고 너무 늦을 리는 없으니 두 분은 양해 바랍니다.”
계우서는 속으로 두 사람의 무지에 욕을 퍼부었다. 누가 이른 아침 해가 막 뜨자마자 거래를 하러 오나. 강호에서의 진가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내쫓았을 것이었다.
진악산은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우리 형제는 소식을 듣고 2주도 못 미쳐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해 몇 필의 말이 도중에 죽었을 정도지요. 저희는 그만큼 두 여동생의 소식을 알고 싶습니다. 계 주인도 알 테지만 3년 동안 여동생들을 찾는 데 온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소득을 얻지 못했는데 지금 이렇게 소식이 있으니 당연히 마음이 조급하지 않겠습니까? 계 주인은 저희를 보고 비웃지 말아 주십시오.”
진악산은 계우서가 두 사람이 너무 일찍 온 것에 불만인 것을 알아보고 해명에 사죄를 담았다. 계우서도 마음이 좀 누그러져 웃으며 말했다.
“몇 년간 저도 여러분을 도와 줄곧 소식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지금이라도 윤곽이 잡혀 저도 안심입니다.”
진가의 둘째 도령 진악해는 젊어서 성급하고 기운이 세찼다.
“이곳에서 그를 얼마든지 기다려도 괜찮습니다. 소식이 진짜라면 여기서 반 개월을 기다려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가짜라면…… 우리 강남 진가를 가지고 놀았으니, 우리 형제가 예의 없었다고 탓하지 마십시오.”
조금 풀렸던 계우서의 마음에 다시금 불만이 생겼다. 강남에서야 진가 형제가 횡포를 부리든 말든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땅에서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웃는 얼굴은 변하지 않았지만 말투는 차가워졌다.
“우리 풍선전당포는 오로지 정보를 거래합니다. 거래가 성사되면 은자로 바꾸고 성사되지 않으면 그 길로 헤어지지요. 진 형제가 무엇을 하려던 상관치 않겠지만, 우리 풍선전당포는 거래를 하는 곳이니 이곳에서 말썽을 피울 수는 없습니다.”
진악산이 매섭게 진악해에게 눈을 부라렸다. 진악산은 맞은편 친근하고 무해해 보이는 소년이 사실은 수완이 대단하며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았다. 진악해가 형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말을 잘못한 것을 깨달았다. 분위기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때, 입구에서 신발 소리가 들리고 홍릉이 웃으며 주렴을 걷어 올렸다. 그녀가 계우서에게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 손님 오셨습니다.”
진가 형제는 입구를 바라보았다. 홍릉 뒤로 심묘가 걸어 들어왔다. 소녀의 모습은 수려하면서도 귀여웠다. 얼굴만 봐서는 고작 열세네 살 먹은 듯했지만, 호수처럼 평온한 분위기는 그보다 훨씬 더 성숙해 보여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심묘는 빈 의자에 앉은 후 계우서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이…… 소저가 소식을 파는 사람입니까?”
진악산이 곤란해하며 입을 열었다. 홍릉은 웃는 얼굴로 조용히 물러났다. 다실 안에는 진가 형제, 심묘와 계우서만 남았다.
“맞아요.”
심묘의 인정에 진악해의 안색이 변했다. 그가 냉소했다.
“소저, 3년 전이면 몇 살이었지요? 우리 두 사람을 놀리는 건가요?”
“정보를 얻는 경로는 아주 많으니, 어쩌면 제가 직접 본 게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3년 전에 알았던 게 아닐 수도 있지요. 거래는 결과를 중요시하죠. 게다가 조그만 강남 진가, 놀릴 가치도 없습니다.”
계우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진악해의 좋지 않은 표정을 보고 얼른 웃지 않은 척했다.
“심 소저의 말이 맞습니다. 거래할 때 결과가 중요하지 과정이 어떠한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진악해는 심묘를 보고 친절하지도 냉담하지 않게 말했다.
“그래요? 그럼 심 소저, 어떻게 정보가 사실이라 보증합니까? 거래할 땐 거짓이 아닌 게 중요합니다. 정말 사실이라면 우리 형제 두 사람은 당연히 거금의 사례를 할 겁니다. 그러나 만약 아니면…… 결말이 어찌 될지 알고 있습니까?”
진악해의 말투는 갑자기 음산해졌다. 강호에 섞여 살면 흉악한 기운을 폭발시켜 평범한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있었다. 지금 진악해의 흉포한 기세는 적어도 어린 아가씨를 울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심묘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 탓에 진악해는 까닭 없이 남과 다투는 실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계우서는 웃음을 참느라 아주 고역이었다. 줄곧 침묵하던 진악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심 소저, 내 동생의 거친 언행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성심성의껏 이 정보를 사고 싶습니다. 소저의 정보가 진짜라면 반드시 만금으로 사례하겠습니다.”
“만금은 필요 없습니다. 강남 진가는 연줄이 넓고 사람이 많아 저도 인연을 맺으려 했을 뿐입니다. 혹 장래 재화를 당해 진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두 분께서 이 정보를 생각해 저를 보살펴주시길 바랍니다.”
심묘는 그녀보다 나이도 많고 견문도 넓은 남자를 대하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조리 있고 강호의 씩씩한 기개가 느껴지는 심묘를 진악산은 높이 평가했다.
계우서는 속으로 심묘를 악덕 손님이라고 욕했다. 소식을 판 은자는 풍선전당포에 주기로 한 걸 까맣게 잊어버린 건가. 거래 당사자가 사례를 사양했으니 풍선전당포의 이윤도 줄어들 게 뻔했다.
“정보를 말해보시오.”
심묘가 조급해하는 진악해와 눈을 마주했다.
“애초 강남 예주의 진가 자매 실종 사건은 실종이 아니라 납치입니다. 자매 두 사람을 데려간 사람은 현 폐하의 동생이신 예친왕 전하입니다.”
세 사람은 모두 침묵했다.
* * *
다실 다른 쪽 밀실.
두 사람은 모두 멍해졌다. 고양이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예친왕?”
사경행은 옥잔을 어루만지며 입꼬리를 올렸다.
“재밌군.”
심묘는 소식을 만들기까지 하며 예친왕부를 겨누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 진가에게 팔려는 소식은 똑같이 예친왕부와 관련이 있었다. 예친왕부가 원흉이라는 내용인 걸 보아하니 고양의 말이 맞았다. 심가는 예친왕부에 깊은 원한이 있고 예친왕부가 무너지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아니, 무너지도록 직접 움직이고 있었다.
* * *
계우서는 답답했다. 백효생은 거래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성실히 정보를 거래했고 이곳은 정보를 제공하는 장소기도 했다. 그런데 심묘처럼 직접 백효생을 이용한 사람은 없었다. 심묘는 백효생을 이용해 진가를 끌어들이며 예친왕부를 처리할 속셈이었다.
예친왕부는 여러 해 흉악한 명성이 있어도 황실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강남 진가의 가업이 크다 해도 피맺힌 원한이 있어야만 예친왕부를 칠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들 사람이 없을 거라고 계우서는 생각했다.
“심 소저의 말이 사실입니까?”
진악산의 목소리는 애매했다. 예친왕의 흉악하고 방종한 명성을 모두 알기에 진가 자매가 그의 손에 떨어졌다면 결말은 미루어 알 수 있었다.
“전 당신을 속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인지 어떻게 증명합니까?”
진악해가 갑자기 흥분해 외쳤다. 이 소식을 듣고 믿을 수 없는 듯했다.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을 전한 심묘가 예친왕의 수하라도 되는 것처럼 흉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진가의 자매 둘은 아름답기로 유명해 진가에서 빈틈없이 보호했지요. 예친왕 전하는 자극을 좋아해서 진가 자매를 납치하느라 대단한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납치에 성공하자마자 그는 자매를 데리고 신속히 정경성으로 떠났습니다. 진가가 예주에서 자매의 행방을 곳곳에 수소문할 때, 진가 자매는 이미 예친왕부에 있었습니다.”
심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예친왕 전하의 여자를 괴롭히는 수단은 흉악하여 진가 자매는 몇 번이나 자진하려 했으나 모두 예친왕 전하에게 저지당했습니다. 그 후 언니분은 동생이 탈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실 예친왕 전하는 두 사람의 계획을 알았으나 모른척했습니다. 그 후 예친왕은 언니분은 수하에게 하사했고, 그녀는 고통을 당한 후 맞아 죽었습니다. 동생분은 도망치는 도중에 능욕을 당해 두 눈이 멀었지만 청소 일이라도 하며 꿋꿋이 살아가기로 했지요. 언니가 목숨 걸고 도망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묘는 살짝 탄식했다.
“그녀는 사실 예친왕부 대문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청소 일의 주위 사람 모두가 예친왕이 안배한 자들로, 그는 진가 자매를 가지고 논 겁니다. 그녀가 거짓 희망을 안고 사는 것을 재미 삼아 보려구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하고 차가웠으나 말미에는 애석함을 띠고 있었다. 계우서도 매우 놀랐다. 그는 예친왕이 방종하고 여인을 괴롭히는 수완이 끔찍하단 것을 알았으나 방금처럼 상세히 말하는 것은 처음 들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간단하지만 죽지 못해 살게 하는 것은 어려웠다. 진가 여동생은 자신이 탈출했다고 생각해 희망에 차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언젠가 복수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소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희망은 다른 사람 손에 있었고,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예친왕의 놀잇감일 뿐이었다.
진가 형제는 침묵했다. 잠시 후 진악해가 천천히 손을 뻗어 머리를 부여잡더니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의 고통스러운 목소리는 상처 입은 맹수와 같았다. 계우서도 동정의 시선을 던졌다.
심묘는 작게 탄식했다. 진가 자매는 애지중지하는 가족들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천진하고 근심 없는 날을 보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으로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가혹해 한순간에 개만도 못한 신세가 되었다. 용모가 너무 아름다우면 고난을 당한다는데, 그렇다면 진가 자매는 그 아름다움이 죄란 말인가.
“심 소저…….”
진악산은 진악해보다 신중했다. 그래도 그의 목소리 역시 떨리고 있었다.
“심 소저의 말이 사실이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모두 심 소저의 말일 뿐입니다.”
신중한 사람이라도 믿기지 않는 소식은 가능한 한 마주하지 않고 피하려 하는 법이었다.
“아주 간단합니다. 진가 여동생은 지금 아직 살아 있습니다. 예친왕부는 철옹성이니 경솔히 들어가면 경계를 살 겁니다. 내 말이 진짜인지 알고 싶다면 예친왕부에서 물건을 구매하러 나오는 남종을 잡아다 부 안에서 눈이 먼 여자가 청소를 하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녀가 여동생분이시니 바로 확인할 수 있을 테지요.”
진가 형제의 몸이 동시에 흔들리며 격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계우서는 탄식했다. 소식을 전하는 심묘가 침착하고, 내용이 상세하니 거의 사실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었다.
잠시 후 진악해가 심묘를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당신……. 이 일을 알면서 어째서 그 아이를 구하지 않았습니까? 눈을 뻔히 뜨고 그녀가 불구덩이에 빠진 걸 보고도 구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곳에 와서 정보를 팔다니…….”
진악해는 탁자를 매섭게 쳤다.
“무정하기도 하지!”
“악해! 심 소저 미안합니다. 제 동생이 너무 상심해서 그러니 심 소저는 괘념치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진악산은 나지막하게 그를 꾸짖었고 심묘를 보며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맞잡아 예를 표했다. 그러나 말은 예의 바르나 진악산의 눈 역시 심묘를 원망하고 있었다.
일순 적막이 흘렀고, 심묘는 분노한 나머지 실소를 터트리며 진악해를 바라보았다.
“진 공자, 제가 반드시 도왔어야 한다고 여깁니까? 전 아무것도 없는 아가씨인데 무슨 능력으로 그녀를 불구덩이에서 구해냅니까? 안위를 고려치 않고 예친왕부로 잠입할까요? 아니면 그녀의 언니처럼 목숨을 내걸어 그녀에게 기회를 만들어 줄까요? 그 사람이 내 친언니라면 나도 구할 수 있으나, 그녀는 내게는 생소한 사람입니다. 감히 묻건대 진 공자는 생소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고 도울 수 있습니까? 할 수 있다면 공자에게 존경을 표하죠. 그러나 전 담이 작고 속이 좁은 여인입니다. 그런 제가 아무 연고도 없는 이를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았다고 비난당하는 게 과연 마땅합니까?”
그녀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진가 형제는 그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계우서는 심묘가 격렬한 감정을 드러낸 데 조금 놀랐다. 심묘의 말은 진가뿐 아니라 온 세상을 비꼬는 셈이었다. 생소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고 돕는 좋은 사람이 있다면 세상살이가 이렇게 고생스러울 리 없었다. 게다가 심묘는 어린 아가씨다. 무슨 능력으로 진가 자매가 곤경에 벗어나게 도울까.
심묘는 냉랭한 눈빛으로 맞은편 두 형제를 바라보았다. 여태 꽁꽁 싸매 숨겨둔 분노가 마음속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대의를 명분으로 자신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걸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심묘는 명제 백성을 위해, 부수의를 위해, 진국에 인질로 자원해 갔지만 대체 무엇을 위해서였는지 아무리 곱씹어도 알 수 없었다. 그녀를 기다린 것은 오직 황제의 냉대와 무관심이었다. 그녀와 심가는 나라와 대의를 위해 황제를 보좌했으나 그 대가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참형을 당했다. 무슨 이유로 대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상대방의 영화를 위해 자신은 목이 졸려야 했는지, 심묘는 알 수 없었다.
진가 자매는 몹시 안타까웠지만, 냉궁에 갇혔던 자신은? 자녀의 목숨조차 보호하지 못했던 어미는? 역시 몹시 안타까운 일 아닌가. 그러나 그녀를 도와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된 일은 바로 살아가는 것. 인생은 스스로 걸어가야 한다. 타인을 구해주는 선의 따위를 기대하는 자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진악해는 한참 침묵한 후 심묘에게 말했다.
“방금 말이 지나쳤습니다. 미안합니다, 심 소저.”
심묘도 겨우 감정을 가라앉혔다.
“제 정보는 여기까지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심 소저의 말을 믿습니다. 그러나 급한 일은 먼저 여동생의 행방을 확실히 조사하는 겁니다. 만약 동생을 찾으면 진가는 반드시 만금으로 사례할 겁니다.”
진악산이 말했다.
“이미 말한 대로 만금은 필요 없습니다. 단지 인연을 맺을 수 있길 바랍니다. 하지만…… 한마디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두 분께서는 듣기 원하실지요.”
“원합니다.”
진악산이 다시 한번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예친왕 전하는 하찮은 것까지도 하나하나 꼼꼼히 따지며 마음이 편협합니다. 누가 건드리면 반드시 보복하지요. 진가의 재산은 많지만, 황제의 동생에 비할 바는 못 되죠. 두 분은 동생을 구할 뿐 아니라 복수도 하려 하실 테지요?”
두 형제가 서로 바라보았다. 진악해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
“피맺힌 원한이니 원수와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진가와 예친왕부는 공존할 수 없으니 반드시 이 빚을 갚을 겁니다.”
“설령 두 분께서 여동생만 데려가신다 해도 예친왕은 진가가 자신에게 칼끝을 겨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친왕부와 맞서면 뒷일 걱정이 없도록 예친왕부를 일망타진해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심 소저의 뜻은?”
진악산이 망설이다가 물었다.
“강호 문파는 인맥이 넓고 각지의 영웅을 잘 알지 않습니까. 예친왕부는 고귀하나 실력 면에서는 떨어지니 멸문하고자 한다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멸문!
계우서는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했으나 결국 찻물을 풉 하고 뱉었다. 계우서가 심묘를 보는 시선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어린 아가씨가 평온한 표정으로 ‘멸문’이라는 말을 꺼내니 가공할 일이었다.
진가 형제도 멍해졌다. 진악산은 심묘를 관찰하자 한기가 도는 것 같았다. 강호를 돌아다니며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한 사람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눈앞 어린 아가씨는 그중에서도 출중했다. 생존자를 하나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 말하니 매우 흉악했다. 그러나 그들도 심묘의 말이 도리에 맞다 느꼈다. 권세가는 망해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으니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다면 강남 진가에게 복수할 것이었다.
진악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멸문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황실에 맞서면…….”
당연히 여동생들을 해친 예친왕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못해 한이 맺혔다. 그러나 진가에는 강호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힘없는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가 있으니 황실에 반기를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게는 폐하께서 이 일을 추궁하지 않게 할 방법이 있습니다. 단지 당신들이 예친왕 전하의 소굴을 소탕할 담력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심묘의 말에 진악해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심 소저, 우리는 당신의 대단함을 압니다. 우리는 3년 동안 찾지 못한 소식을 당신이 찾았으니까요. 그러나 황실의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 자신을 해칠 겁니다.”
“제가 간 후 당신들은 제 신분을 추측할 테지요. 전 정경성 심부, 위무대장군의 적녀입니다. 두 분은 제 신분으로 조정에 아무 말도 못할 거라 여깁니까?”
진가 형제는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심묘의 신분을 예상치 못한 듯 침묵했다. 그들은 강호 민간 출신이다. 거액의 재물이 있어도 관직에는 영원히 오를 수 없었다. 멀리서 조정의 일을 바라봤기에 그 속 깊이를 몰라 심묘가 멋대로 속여도 속을 사람들이었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도우려는 겁니까? 이렇게 있는 힘을 다해 우리를 도우면 소저에게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진악해가 경계하는 기색을 띠고 물었다.
“참 이상하네요. 방금은 내가 돕지 않았다고 탓하더니 지금 내가 돕겠다니 의심부터 하는군요. 이해할 수 없네요.”
심묘의 비꼬는 말에 진악해는 분노했다. 진악산이 손을 휘저어 그를 막고, 심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심 소저는 거리낌 없는 성격이시네요. 그러나 이 일은 매우 중대해 만약 심 소저를 연루시키면…….”
심묘는 담담히 말했다.
“당신들만을 위해 돕는 건 아닙니다. 나도 예친왕부에 피맺힌 원한이 있습니다. 나의 사촌 언니가 곧 예친왕부로 시집을 가서 고통을 당할 겁니다. 후일 당신들이 예친왕부를 멸문하면 청컨대 내 사촌 언니의 목숨은 살려주시길 바랍니다.”
진가 형제는 마음속 의혹이 거의 사라져 심묘에게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두 분은 먼저 여동생의 소식을 알아보러 가셔도 됩니다. 다만 알아본 후 절대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사흘 후 이 자리에서 저와 다시 상의하시지요.”
진가 형제는 고개를 끄덕였고, 심묘의 말속 내쫓는 기색을 알아채고 시원스레 일어났다. 진악산이 말했다.
“여동생을 찾으면 우리 진가가 심 소저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니, 장래 진가의 도움을 요청할 경우 진가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일은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들은 검을 들고 급히 떠났다. 여동생의 행방을 찾으러 급히 떠나는 것일 터였다.
계우서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지난번 심묘의 태도도 충분히 독특했는데 그녀는 더욱 사람을 놀라게 했다. 강호 사람은 오만했다. 게다가 진가는 큰 가문이었다. 그런데 재물로 거래할 장사에서 심묘는 몇 마디 말로 진가의 은인이 되었다. 진가 형제 두 사람이 약속했으니 장래 심묘는 무슨 곤란한 일이 있을 때 진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진가로부터 도움을 받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묘는 고개를 돌려 계우서를 보았다.
“계 주인, 이제 나와 당신 사이 거래를 이야기하지요.”
계우서는 허세를 부리며 턱을 어루만진 후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소저가 말씀하신 조건, 생각해봤습니다. 사실 소저의 요구는 너무 위험합니다. 성공하면 당연히 모두 큰 이득을 보겠으나 만약 그 전에 발각되면 풍선전당포가 와해되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주인인 나도 머리가 떨어질 겁니다. 여기의 하인들도 함께 죽을 테지요. 즉, 이 거래는 소저는 심가와 은자로 배상하고 나는 목숨으로 배상하는 것이니 나의 손해입니다.”
심묘는 가볍게 응수했다.
“그렇다면 거래는 성립되지 않겠군요. 알겠습니다. 계 주인, 폐를 끼쳤습니다. 그럼.”
계우서가 생각한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심묘는 낯빛을 바꾸고 일어났다. 계우서는 깜짝 놀라 연기를 그만두고 얼른 본심을 밝혔다.
“이봐요,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요. 어린 아가씨가 어찌 이렇게 조금도 고민이 없는지. 심 소저, 난 아주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을 처음 봤을 때 우리 두 사람에겐 강한 연분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저가 요구하면 남자들은 절대 거절할 수 없다고요. 나는 미인이 슬퍼하는 걸 볼 수 없어요. 이 거래에 응하지 않으면 당신은 즐겁지 못하겠지요. 당신이 즐거울 수 있다면 내 목숨 따위야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이 거래, 하죠.”
* * *
다실 다른 쪽 밀실.
계우서의 메스꺼운 말을 들은 고양이 역겹다는 표정으로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괜찮겠나? 저런 독한 여자를 건드리다니? 저 여자는 작약 소저가 아니라 사람을 먹는 꽃이건만.”
사경행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자기가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는 거지.”
* * *
심묘는 계우서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열렬한 시선을 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계 주인,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지요.”
계우서는 진중한 태도를 취했다.
“좋습니다. 심 소저, 말씀하시지요.”
“명제 사람이라면 누구나 20년 전 폐하께 암살 시도가 있었을 때 예친왕이 몸을 던져 폐하를 구출하고 한쪽 다리를 잃었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자객은 도망쳤구요.”
“맞습니다.”
심묘는 살짝 웃었다.
“당신이 소문내줄 내용은 간단합니다. 최근 예친왕이 신변 호위를 하나 처형했는데, 그 호위가 공교롭게도 늙은 것을 빼면 20년 전 자객과 똑같이 생겼다는 겁니다.”
“에…….”
계우서는 멍해졌다. 손에 쥔 찻잔이 자칫 뒤집힐 뻔했다.
“계 주인, 이 소식을 반드시 폐하께서 듣도록 해주십시오.”
심묘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건 사실입니까?”
계우서가 탐문하듯 물었다.
“진짜든 가짜든 계 주인은 방법을 찾아 그것을 진짜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
“심 소저…….”
계우서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작은 아가씨가 귀신처럼 느껴졌다.
“거래는 잘 체결이 되었으니 전 떠나야겠습니다. 빨리 행동하셔야 합니다. 적어도 예친왕부의 멸문 이전에는 황제가 그 소식을 들어야 할 겁니다. 되도록 서둘러주세요.”
심묘는 계우서를 바라보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떠났다. 바깥에서 오래 기다린 홍릉은 심묘가 나온 것을 보고 거래가 끝난 것을 알았다. 그녀는 심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 * *
밀실 안.
고양이 한참 침묵한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심가가 이렇게 대단하다니. 난 이 일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 지금 나눠 줄 물건은 적고 받을 사람은 너무 많아. 심가를 오래 남겨선 안 된다고 여기네.”
“남기고 안 남기고 간에 난 내 말에 책임을 질 거야. 심가의 손을 빌려 예친왕, 그 늙은 개를 처리한다라, 좋지.”
사경행은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
“어쩌면 심가가 이런 식으로 자네에게 맞설지도 모르네.”
“만일 그들이 감히 그런다면 나도 화근을 철저히 없애버릴 거야. 그보다 물건은, 아직 행방을 몰라?”
사경행의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사경행의 물음에 고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멸문 당일,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주지. 물건이 어디로 날아갈 수는 없을 테니.”
사경행은 곧게 허리를 펴고 손으로 옥잔을 가지고 놀았다.
“자넨 정말 예친왕부가 멸문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심 소저의 계획은 정교하지만 일을 처리할 때는 늘 의외의 사고가 생기는 법이네.”
“의외?”
사경행은 가볍게 웃었다. 긴 속눈썹이 반 드리운 도화 눈동자는 술처럼 사람을 취하게 했다. 하지만 눈빛은 칼처럼 예리했다. 그는 고양이가 쥐를 어르듯 여유롭게 우스갯소리를 했다.
“내가 그녀를 만난 뒤부터 그녀는 ‘의외’이지 않은 적이 없어.”
* * *
시간은 늘 빠르게 지나갔다. 심부에서 사당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그들은 서로 화기애애하고 각자 평안했다. 아니, 적어도 심신, 심귀, 심만 세 형제의 사이는 좋아 보였다. 하지만 사당을 태운 큰불은 심신 부부의 이방, 삼방에 대한 믿음도 태워버렸다.
사리를 구별하는 사람이라면 심청이 순결을 잃고 예친왕과 혼인하게 되는 일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진약추와 심모는 심청의 혼사를 준비하느라 즐거웠다. 황실과의 혼사이니 겉으로라도 즐겁다는 듯 준비해야 하긴 할 테지만, 정말 한 가족이라면 그렇게까지 유쾌할 수는 없었다. 참으로 박정한 모습이었다.
임완운은 심청 때문에 심귀와 말다툼을 했고, 심 노부인은 심귀를 두둔했다. 둘째 며느리에게 점점 더 불만스러워진 노부인은 심부 후원의 권력을 돌려주지 않았다. 자연스레 노부인의 마음을 얻은 진약추는 더욱 부지런히 심부 일을 했다. 임완운은 결국 참지 못하고 노부인에게 분노를 드러냈다. 그러자 심 노부인은 아예 심원백을 송경당에 두고 임완운이 보지 못하게 했다.
임완운은 심부 안에서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다. 그녀의 하인들은 몰래 대세인 만 이낭에게 붙었다. 임완운은 채운원 안에서 온종일 큰 소리로 욕을 퍼붓거나 심청을 껴안고 통곡했다. 그러나 그녀가 미쳐가는 일은 서원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심신 부부는 이방, 삼방과 거리를 유지했고, 태도는 친절하지도 냉담하지도 않았다. 심청의 일로 이방, 삼방의 박정한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심묘가 심청의 처지가 되었다면 심신과 나설안은 절대 울분을 억누르면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심묘를 위해 정의를 찾아줄 터였다. 더욱이 지금 심묘는 철이 많이 들어 이전처럼 그들과 소원하지도 않았다. 심신 부부는 문혜제에게 수도에 머물겠다고 요청하길 참 잘했다고 느꼈다.
심묘의 방. 백로가 말했다.
“큰공자님께서 방금 또 장신구를 골라오셔서 아가씨에게 주라십니다. 또 금권도 몇 장 주셔서 제가 아가씨의 상자 안에 넣어뒀습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구는 그녀가 풍선전당포에 간 것을 안 후 그녀에게 은자가 부족하다 여겨 매일 막무가내로 궁중 하사품 중 정교한 물건을 보내왔다. 가끔은 직접 은자를 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은자가 없으면 바로 말해. 내가 줄게. 풍선전당포는 가지 마. 심가 적녀가 왜 전당포에 물건을 저당 잡혀 은자로 바꿔?”
심묘는 설명하기 어려워 말을 아꼈지만 은자는 사양하지 않았다. 내일 진가 형제를 만나러 풍선전당포로 가야 했다. 대사를 앞두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은자였다. 진악산과 진악해가 가련하기 그지없는 여동생의 행방을 찾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심묘가 부수의와 혼인하고 막 황후가 되었을 때, 부수의는 예친왕의 존재를 견딜 수 없어 했다. 부수의는 문혜제가 아니니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길 이유가 없었다. 막 등극한 황제에게 말썽만 부리는 숙부는 확실히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었다.
그때 강남 예주 진가가 뒤늦게 진가 자매의 처지를 알게 되어 예친왕을 암살하려 했다. 형제들은 혈기가 있기에 예친왕의 남은 다리도 못 쓰게 만들었으나 애석하게도 예친왕은 살아남았다. 화가 난 예친왕은 암살 시도의 범인을 찾는 일을 부수의에게 맡겼다.
자객을 조사하려고 할 때 단서가 없으면 곤란한 법이었다. 하지만 부수의의 막료 중 강호 사람이 있어 풍선전당포의 비공식적인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부수의는 스스로 나서지 않고 사람을 시켜 예친왕을 암살하려 한 자객의 소식을 사려고 했으나 풍선전당포는 소식이 없다며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부수의는 사건의 전말을 밝혀내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강남 진가는 치명상을 입었다.
현생을 살고 있는 심묘는 그 일을 떠올렸다. 예친왕이 간악한 심계를 품고 임완운과 거래했을 때 심묘 역시 계획을 세웠다. 모두 그녀가 포석 놓은 대로 진행되었다. 심청의 능욕, 임완운의 반격, 심청의 임신까지. 전부 다 완벽했다. 회조연에서 심청의 임신을 밝혀 심청이 예친왕에게 시집가게 됐고 예친왕의 분노를 산 것 역시 심묘의 책략이었다. 예친왕이 온 신경을 자신에게 쏟고 있는 지금 이 틈에 진가 사람이 방법을 마련한다면 그를 해치울 수 있을 터이니.
사실 심묘는 전생에 풍선전당포가 예친왕 암살 시도에 진가 사람이 연관된 걸 알면서도 모른다고 잡아뗐으리라 여겼다. 그렇다면 풍선전당포 사람과 예친왕 사이에 충돌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의심할 만도 했다. 그래서 심묘는 고의로 ‘멸문’이란 무서운 말을 꺼냈다. 계우서는 놀란 표정을 지을 뿐 후련해하지는 않았다. 계우서와 예친왕부 사이 은혜도 원한도 없는 게 명백했다.
하지만 한번 죽었다가 살아나니 직감은 무섭게 정확할 때가 있었다. 계우서의 반응은 심묘의 추측을 없애지 못하고 다른 의혹을 더했다. 풍선전당포 배후의 주인이 계우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혹이 들어맞는다면 당시의 사건을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배후의 사람이 누구인지까지는 추측할 수 없었다. 전생 그녀는 자신이 존귀한 황후로 부수의의 곁을 따르니 이런 크고 작은 비밀을 손에 많이 쥐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안 깊은 곳은 상상보다 더욱 음험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조만간 예친왕부는 멸문되고 예친왕은 목숨을 잃어 심청은 죽지 못해 살 것이었다. 전생에는 심청이 심묘를 냉궁에 가두는 데 앞장섰을 테니, 현생에는 심청에게 똑같이 돌려줄 것이었다.
상강이 화분을 들고 오며 말했다.
“어제 날이 좋아서 화분을 갖고 나가 햇빛을 쐬려 했는데 아가씨께서 눈이 올 거라며 제게 우산으로 가리라고 하셨지요. 저는 사실 믿지 않았는데, 정말 오늘 일찍 눈이 왔지 뭐예요.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이 화분들은 처참해졌을 거고 저도 혼났을 거예요.”
백로가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미리 준비하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일찍이 물건을 준비하시고, 일찍이 잘못될 가능성을 잘 생각해두시니 저희도 위기 때마다 가뿐히 넘길 수 있어요. 아가씨의 성정은 아주 온당하고 훌륭합니다.”
심묘는 살짝 웃었다. 그 눈빛은 반석처럼 단호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난 단지 ‘의외’를 싫어하는 거야.”
* * *
심묘가 풍선전당포에 도착했을 때, 진가 형제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많이 변한 것 같았다. 특히 푸른 산처럼 호방하고 솔직한 분위기이었던 진악산은 몹시 침울해 보였다. 심묘는 진악산과 진악해를 보고 두 사람이 여동생의 소식을 듣거나 직접 보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여동생이 처참한 처지에 있는 걸 보았으니 과감하게 싸움하길 두려워하지 않는 강호 사람에게 참을 수 없는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생의 진가 사람이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예친왕을 암살하러 가는 일은 없었을 터.
진악해가 먼저 말했다.
“심 소저, 지난번에 언급한 황가 사람이 진가를 쫓지 않게 할 수 있었다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계우서는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찻잔 속에서 꽃송이를 찾는 데 열중하는 척하며 그는 일부러 심묘를 쳐다보지 않았다.
심묘가 대답했다.
“당연히 도울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전에 말했듯 이러면 내가 무릅쓰는 위험이 크고, 심가도 진가와 한배에 묶이게 됩니다. 만약 무언가 잘못되면 심가도 재난을 입을 겁니다.”
진악산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남에게 부탁하는 걸 압니다. 만약 소저가 돕는다면 진가 가산의 반을 심가에 드리겠습니다.”
계우서는 더는 딴청을 피울 수 없어 고개를 들어 진악산을 바라보았다. 진가는 강남의 갑부였다. 강남은 풍요로운 지역이니 진가의 은자는 황실보다 많을 것이었다. 가산의 반을 심가에게 주겠다니, 범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다.
심묘 역시 진악산의 간청하는 얼굴을 보자 얼떨떨했다. 진가는 복수를 하기 위해 어떤 대가도 치를 심산인 게 틀림없었다. 그쪽에서 먼저 후하게 값을 불러 자신이 도와준다 해도 여전히 근심 걱정이 많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 터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도박을 서슴지 않으니 진가 사람들이 자매를 얼마나 아끼는지 짐작하고도 남음 직했다. 전생의 심묘가 냉궁에 있고, 궁에서 고립무원일 때 심가가 멸문당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부모와 오라버니도 이처럼 대가를 따지지 않고 그녀를 구했을까.
“심 소저.”
진악산이 넋을 잃은 심묘를 불렀다. 심묘는 정신을 차리고 살짝 미소 지었다.
“가산은 됐습니다. 재차 말하지만 제가 돕는 건 여러분의 가산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장래 진가에게 손을 내밀 때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예친왕부에 원한이 있으니 예친왕부가 멸망하지 않으면 결국 언젠가 말썽이 생길 겁니다. 저희는 지금 한배를 탔습니다.”
심묘는 진악산을 바라보았다. 진악산도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투명하며 맑았고, 말투는 진실했다.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 설득력이 있어, 말하는 내용을 모두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꽃다운 나이의 어린 아가씨답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진악산은 자기도 모르게 여동생들도 심묘 같은 심성과 수완이 있었다면 그렇게 처참한 꼴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한탄했다. 그녀들을 생각하자 진악산의 기분은 암담해졌다.
“심 소저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황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예친왕부를 지키지 않을 거예요. 손을 쓰려면 다음 달이 좋습니다. 다음 달에 예친왕이 제 사촌 언니와 혼인합니다. 혼례 다음 날은 분명히 경계가 느슨할 테니 당신들은 해가 뜨기 전에 손을 쓰세요. 만에 하나의 실수도 없어야 합니다.”
진악산은 무언가 말하려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달 안에 황실 쪽을 어떻게 끝낼 겁니까?”
심묘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차를 마시는 계우서를 바라보았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당장 급한 일은 사람들을 소집하는 겁니다. 예친왕부는 좁지 않으니 구조를 분명히 파악해야 합니다. 손쓰는 날, 내 사촌 언니를 구해주는 것 외에는 반드시 화근을 철저히 없애야 합니다.”
“우리 형제 둘도 압니다. 안심하십시오.”
진악해가 말했다.
“강호에서 멸문을 무엇으로 여기는지 모르지만 내가 말하는 화근을 철저히 제거한다는 건 부녀자와 노인, 어린아이, 하인, 첩 관련 없이 산 사람은 남기지 않는 겁니다. 온 예친왕부를 철저히 무덤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진악산과 진악해 모두 멍해졌다. 진악해는 눈살을 찌푸렸다.
“첩 대다수는 예친왕에게 잡혀 온 가련한 사람입니다.”
심묘는 냉소했다.
“권세가는 망해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진 공자가 자비를 베풀면 그들은 진가 사람이 살해했다고 말할 테니 심가 사람도 연루될 겁니다.”
그녀의 말은 냉혹했지만 타당했다. 진악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생존자를 남기지 않겠습니다. 소저를 연루시키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그럼 두 분이 원한을 보복하고 예친왕부를 피로 씻길 기원합니다.”
진가 형제는 몸을 일으켜 작별을 고했다. 그들이 떠나길 기다린 계우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심 소저는 어린 나이임에도 아주 많이 아는 듯하군요. 보고 듣는 게 많고 식견도 넓은 진가 형제가 당신의 계획을 완전히 따르겠다고 하다니. 심 소저, 당신같이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처음 만나봅니다. 이후 기회가 되면 나와 봄날에는 교외 산책을, 여름밤에는 호수에서 뱃놀이를, 가을에는…….”
뒤로 갈수록 주제를 벗어나는 계우서의 말은 선량한 어린 아가씨를 희롱하는 호색가를 연상시켰다.
“계 주인, 나와 이런 이야기를 할 건 아니지요?”
심묘가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계우서가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난 심 소저에게 이미 소식이 잘되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궁중에도 전해졌으니 오래 지나지 않아 심 소저가 원하는 결말을 얻을 겁니다.”
심묘는 놀랐다. 풍선전당포가 실력이 있는 건 알았으나 이리 빠를지는 몰랐다. 분명 궁중 안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궁중에 소식을 침투시키려면 한바탕 우여곡절이 있을 텐데, 풍선전당포의 세력이 예상보다도 아주 깊고 넓어야만 이렇게 빠른 성사가 가능했다. 심묘가 애초 진가 형제와의 거래를 계우서에게 숨기지 않은 이유 역시 암만해도 숨길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으나 다시 한번 놀랐다.
심묘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수고를 끼쳤습니다, 계 주인. 일이 해결되면 이전 주인과 승낙한 일을 이야기하지요.”
계우서는 잠시 침묵하고 드물게 엄숙한 말투로 물었다.
“심 소저, 난 이해하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심 소저, 심가를 대가로 나와 거래했지요. 어느 날, 내가 심가에게 위험한 일을 시켜 심가를 거센 풍랑으로 밀까 걱정되지 않습니까? 이 거래는 소저에게도 수지가 맞지 않습니다.”
계우서는 심묘를 단단히 주시하며 심묘의 표정을 관찰했다. 심묘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미래의 곤란함을 걱정하기보다 지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걱정하는 게 낫습니다. 그런 날이 오면 단지 심가의 운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네요.”
“진심입니까?”
계우서는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 * *
밀실.
“거짓말.”
사경행이 가볍게 비웃었다.
“계우서, 저 바보만 믿을걸세. 저 여자의 사람을 속이는 기술은 이미 최고 경지야. 계우서가 과연 그녀의 적수가 될까?”
고양의 말에 사경행은 느릿느릿 말했다.
“염려할 필요 없어. 일단 내 배를 탔으니 내 허락 없이 내릴 수 없지.”
* * *
심묘가 일어나 계우서에게 작별인사를 할 때, 계우서가 말했다.
“맞다. 심 소저, 이전 내게 물어본 그 류형 소저의 행방을 찾은 듯합니다. 며칠 안에 결과가 있을 겁니다.”
“급하지 않아요, 계 주인, 천천히 찾으십시오. 저도 천천히 기다리겠습니다.”
계우서는 심묘의 말을 듣고 멍해졌다.
그녀가 떠나고 계우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작약 소저보다 알 수 없는 소저야. 작약 소저는 적어도 진주를 주면 좋아하기라도 하지. 심 소저는 사람 머리를 주면 기뻐하려나?”
그는 몸을 떨며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 * *
건청궁.
황제의 서재 안 탁자에는 상소가 높게 쌓여 있었다. 그러나 문혜제는 상주문에 눈길 한 번 보내지 않았다. 그는 곧 환갑이었다. 여전히 정정하지만 양 귀밑머리는 희끗희끗했다. 소년 때 그는 자유분방한 기개가 있었다. 지금도 장대한 뜻은 쇠퇴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점점 늙어가는 호랑이로 보고 있었다. 늘 젊은 호랑이가 그 자리를 이어받는 법이었다.
문혜제의 안색은 흙빛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빼빼 말랐다. 피부는 늘어져 뼈 위에 붙은 듯, 기이하게 늙은 모습이었다. 그의 쉰 목소리에서는 세찬 노기가 뻗쳐 나왔다.
“정말 똑같은 모습의 자객을 죽였느냐?”
문혜제의 눈앞에는 흑색 옷을 입은 두 명이 서 있었다.
“예, 폐하. 이미 사람을 납치해 확인했습니다. 예친왕부에서 친왕 전하 심복도 잡았는데, 친왕께서 며칠 전 복면 호위를 처형했다고 실토했습니다.”
문혜제가 눈을 감았고, 사납게 손을 휘둘렀다. 탁자 위 문진이 바닥에 부딪혀 몇 조각으로 부서졌다. 잠시 후 그가 냉소했다.
“짐이 그를 얕잡아 보았구나.”
궁중에는 귀와 눈이 많았다. 황후, 비빈, 신하, 심지어 그들의 종들. 눈과 귀가 많을수록 목숨을 부지하기 쉬웠고 정보를 많이 얻은 사람이 승리를 차지하는 법이었다. 황제도 예외는 아닌지라 곳곳에 그의 눈과 귀를 배치해 권좌를 안정시켰다.
밀정의 입에서 예친왕이 자객과 똑같이 생긴 호위 한 명을 죽였다는 의외의 정보를 들은 문혜제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박정한 황실에서 그는 형제들의 피 묻은 시체를 밟아가며 이 자리를 지켰다. 살아남은 이는 오직 열한 번째 황자였던 예친왕뿐. 문혜제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밤에, 예친왕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구한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문혜제는 예친왕에게 잘해줬다. 단순히 그의 다리에 은정을 베푼 게 아니라 문혜제의 마음에 은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위에 앉은 그에게 모든 사람은 탐욕을 갖고 접근했다. 아들들조차 모두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런 비정한 삶에서 예친왕은 문혜제에게 여전히 자기의 안위를 고려하지 않고 그를 위해 검을 막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온정을 베푼 자신은 큰 웃음거리에 불과했다. 위험했던 상황이 모두 이 ‘친형제’가 준비한 한 편의 연극인 듯했다. 심지어 문혜제는 예친왕의 못 쓰는 한쪽 다리도 가짜가 아닐까 의심스러워졌다. 문혜제는 속임수에 놀아났다는 생각에 격노했다. 역사는 교묘하게 재능을 감춘 이가 어느 날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켜 황위를 앗아간다고 말하고 있었다.
신임하는 사람에게 배반을 당하면 신임을 거둘 뿐 아니라 더욱 심각하게 의심하는 법이었다. 게다가 황실 사람은 누구보다 의심이 많았다. 이전 예친왕을 의심하지 않은 건 참된 마음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거짓으로 판명됐으니 황제의 의심은 뿌리를 내려 곧 완전히 자라 하늘 높이 솟은 큰 나무가 될 것이었다. 그때는 누구도 그 나무를 벨 수 없을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예친왕부를 지켜라. 짐은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볼 것이다.”
고 공공이 고개를 숙여 침묵하고 발끝을 바라보았다. 그는 황제의 분노를 보지 못한 양 행동했다. 그저 이 궁중생활이 참으로 다사다난하다고 속으로 작게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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