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후의 귀환
4권
17장
시간은 하루하루 흘렀다. 정경성은 여전히 평온해서 어떤 나쁜 일도 발생하지 않은 것 같았다. 새해가 코앞이니 사람들은 춘절에 쓸 물건을 구입하기에 바빴고, 빈곤한 집안에도 즐거운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즐겁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리왕과 양왕이 궁중 화원을 걷고 있었다. 신중한 태자와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는 주왕 일파와 리왕 일파는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다. 주왕 형제는 겉으로 예기를 드러냈지만, 리왕은 중용의 도를 걸었다. 리왕의 재학은 황자 중 첫 번째가 아니었고, 그의 모친 역시 가장 총애받는 후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위에서 아래까지 아주 원만히 일을 처리해 신하, 형제 관계없이 그를 인정했다.
“형님, 듣자니 근래 부황께서 왕숙부에게 아주 냉담하시답니다.”
“너도 들었느냐.”
양왕의 말에 리왕이 웃었다. 그는 웃을 때 눈가에 아주 작은 주름이 생겨 성격이 아주 유해 보였다. 그의 태도 역시 그러했다. 하나 그는 겉은 온화한 사람처럼 보여도 속은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부황은 본래 왕숙부를 중시해 왕숙부께 일이 있을 때 여러 번 도와주셨어. 그런데 이번에는 몇 번이나 입궁해도 부황은 직무가 바쁘다며 거절하셨지. 통찰력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황이 일부러 거리를 두고 푸대접하시고 있음을 알 거야.”
전부터 문혜제는 예친왕에게 성의를 다했다. 과거 문혜제의 총애받던 비 하나가 예친왕에게 죄를 지은 적이 있었다. 그 비의 친정은 꽤 세력이 있는 집안인데도 문혜제는 두말하지 않고 그녀를 냉궁에 넣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경고했다.
“예친왕은 짐의 형제다. 그에게 불경하면 바로 짐에게 불경한 것이다!”
문혜제는 예친왕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줬기에 요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양왕이 의심스럽다는 말투로 말했다.
“왕숙부는 무슨 일로 부황을 노하게 하신 건지요? 왕숙부가 관례에 벗어난 일을 저질러도 부황께선 그를 책망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근래 왕숙부가 무슨 일을 벌였단 이야기도 들은 적 없구요.”
“넌 왕숙부가 입궁해 부황께 무슨 일을 요청했는지 아느냐?”
양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왕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형이 철들지 않은 동생을 훈계하는 듯했다.
“일곱째야, 이 궁 안에서는 식견과 안목을 가져야 한다. 나도 모든 일에 너 대신 마음을 쓸 수는 없단다.”
양왕이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양왕과 성왕은 세력이 약해 리왕에게 머리를 숙이고 굴복하며 태도도 아주 공손했다.
“저는 형님을 따릅니다. 형님이 저보다 똑똑하시니 형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난 왕숙부가 입궁해 심가의 일을 요청했다 들었다.”
양왕은 무언가 깨달은 듯했으나 곧 의문을 표했다.
“심가? 혹시 왕숙부는 심가의 일로 부황의 분노를 산 건가요? 하지만 왕숙부는 심가 이방 적녀와 혼인할 텐데. 부황께서…… 심가 이방 때문에 화를 내기는 좀?”
친아들보다 문혜제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예친왕이 문혜제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면 그만큼 그의 요구가 터무니없었을 터이다. 황실 생활을 오래 한 황제가 신경 쓰는 건 세력이었다. 심귀는 삼품 문관인 데다 실권이 없어서 대국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니 문혜제가 이 일로 예친왕에게 화낼 이유가 없었다.
리왕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바로 그거야. 왕숙부가 요청한 것은 심가 대방 적녀, 심묘를 아내로 얻고 싶단 거였거든.”
“그렇군요. 왕숙부가 손에 병권을 쥐고 있는 심신의 적녀를 취하려 했으니 부황의 금기를 건드린 것 같네요. 그런데 왕숙부는 왜 갑자기 그쪽과 혼인하려는 건가요? 이전에는 심청을 원하지 않았어요? 부황께서 그가 제멋대로 구는 걸 봐주신대도 이런 민감한 일에 어리석게 굴어서는 안 되지요.”
리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겠구나. 왕숙부가 관례에 벗어난 일을 해도 신하의 본분은 엄수했는데. 이번에는 정도가 지나쳤어…….”
“부황께서 왕숙부가 심묘와 혼인하게 두실 리 없어요. 그러나 이번에 왕숙부에게 설명하시기는커녕 일체 만남을 피하고 계시니 무슨 경고를 하시는 것 같네요.”
양왕의 말에 리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인내심을 모두 소진하셨나 보지. 자, 이런 것들은 그만 이야기하자꾸나. 어쨌든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게다가 근래 부황께서 그다지 즐겁지 않으시니까, 사람들 앞에서 언급하진 말아야 해.”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양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떠난 후 화원 깊숙한 곳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푸른 장화에 옥대를 찬 정왕 부수의였다. 부수의는 화원 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는 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심묘?”
* * *
림강산의 누각 가장 꼭대기 층.
계우서는 고양이 편지를 다 읽자 그걸 가져다 화로 안에 던져 태웠다. 그는 즐거워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소식은 이미 전해져서 문혜제도 늙은 개에게 의심을 품었어. 늙은 개는 바위로 자기 발을 찧은 건데 모르고 있지.”
고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조심하게. 작은 실수도 있어선 안 돼.”
계우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코를 만졌다.
“알았어. 3형은 무슨 일로 바쁘길래 보이질 않네?”
“3형이 바쁘지 않은 날이 있어?”
고양은 갑자기 탄식했다.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난 3형을 믿어. 형의 능력은 커. 무슨 걱정이야? 형이 이렇게 오래 계획했으니 설령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온전히 물러나는 것은 문제없어. 고양 형은 너무 신중해. 우리 3형을 봐. 마음속에 고민이 많아도 겉으로는 늘 초연하니 그야말로 대장부지!”
계우서는 사경행을 신뢰할뿐더러 경외했다.
고양은 눈을 흘겼다.
“아첨꾼.”
“누가 아첨꾼이야. 그리고 아첨도 상대방이 그럴 가치가 있나 보고 한다구. 형한테는 하래도 안 해.”
계우서는 불쾌하단 듯 역시 눈을 흘겼다. 그에 고양이 온화하게 웃으며 놀렸다.
“그래? 그럼 이후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 약을 지어달라지 말게. 무릎 꿇고 사정해도 안 줄 거네.”
당황한 계우서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
“사실 난 정경성 안 젊은 사람은 겉모습만 그럴듯하고 실제는 별로라고 생각했어. 3형만 진짜 장부지. 그런데 이번에 다른 사람에게도 탄복했어. 형 말고도 정경성에 영웅이 있는 셈이지.”
“오, 또 탄복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정말 신선하군. 누구이기에 자네 눈에 들었는가?”
고양이 친절하지도 냉담하지도 않게 말했다.
계우서가 허벅지를 쳤다.
“심가 소저 심묘야! 난 그렇게 담력이 대단한 여인을 본 적 없어! 예친왕부를 없애기 위해 계략을 꾸며 손을 쓰니 전부 그대로 될 거잖아!”
“자네가 이전에 보지 못해서 그래.”
고양은 차갑게 흥 소리를 냈다. 이전 심묘가 사당을 태워 목숨으로 도박했을 때 고양은 심묘가 정말 미쳤다고 느꼈다. 고양은 방법을 모색하는 데 익숙했고 손을 쓰면 합당하게 처리했다. 심묘처럼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일 처리 방식을 처음 본 고양은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렇듯 제 세상처럼 설치고 다니면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예측을 번번이 뛰어넘고 심묘는 매번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아주 기이한 일이었다.
고양은 자신을 섬세한 도자기로 여겼기에 정말로 방법이 없는 일이나 가망이 없는 일은 그저 접어버렸다. 필사적으로 목맬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심묘는 어지간히도 극단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가장 단단한 바위로 여기며 자신과 맞서는 사람을 도자기로 보았다. 그녀에게는 일말의 손실도 발생하지 않았건만 그녀와 맞선 도자기는 전부 부서졌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바위로 여길 용기가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고양은 심묘가 더욱 위험하다고 느꼈다. 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성장하기 전에 빨리 없애는 것이 가장 좋았다. 사경행 역시 심묘가 큰 변수로 작용하리란 점을 모를 리 없었다. 자칫 심묘 때문에 오랫동안 공들인 계획이 수포가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경행은 그녀를 가만히 보고만 있으니 고양은 그의 마음속을 좀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심 소저가 이전에도 무슨 용맹을 떨쳤어?”
계우서는 잠시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으나 곧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위무대장군의 딸이 용맹스러운 건 정상이야. 심신이 곁에서 키우지 않아 무공은 전혀 못 하지만, 성정은 그대로 물려받은 듯하니 심 소저를 감히 얕보는 사람은 없을 거네.”
고양은 그 말을 끝으로 상념에 잠겼다. 그가 넋을 잃은 것을 보고 계우서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이어 말했다.
“이번 황가 일은 내가 소식을 만들었지만 모든 일은 심묘의 계획을 따라 한 거야. 지금 생각해도 확실히 무섭네. 예친왕은 무슨 일인지 몰라도 분노로 머리가 흐려졌나 봐. 예친왕이 직접 문혜제를 찾아가 심묘와 혼인하고 싶다고 말했대. 심신이 손에 병권을 쥔 것을 알면서도 말이야. 심묘와 혼인하겠다고 하면 황제의 눈에는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여겨질 가능성이 있는데. 예친왕이 잘못한 거지. 게다가 문혜제 성격에 한번 의심하면 끝까지 할 거고, 선동까지 더해지면 예친왕이 죽어도 문혜제는 눈도 깜빡하지 않을 거야. 상황이 이러니 진가의 일도 술술 풀리겠지. 이 계획은 모든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니 일말의 오차도 없어.”
“심묘가 ‘의외’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고양은 탄복했다. 사경행의 말이 맞았다. 심묘는 일을 할 때마다 위태로워 보여도 결국 원하던 목적을 달성한다. 그녀의 계획에는 지금까지 ‘의외’가 없었다. 언젠가 심묘가 의외의 일로 우왕좌왕하는 광경을 본다면 마음이 후련할지도 모르겠다고 고양은 짓궂은 생각을 했다.
“하여간, 난 심묘가 교제할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게다가 몇 년 후면 반드시 미인으로 성장할 거야.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어떻게 내가 놓치겠어?”
그는 스스로 잘생겼다고 여기는 미소를 지었다.
“난 결정했어. 앞으로 심묘는 내 마음속에서 작약 소저와 함께할 거야. 지금부터 심묘도 나와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 셈이야!”
고양은 아예 고개를 돌려 이 바보를 보지 않기로 했다.
* * *
심부 서원.
심묘가 방 안에서 물건을 세심하게 선별하고 있었다. 심구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교교야, 이리 많은 물건을 고르는 건 심청에게 혼수로 주기 위해서야?”
심묘는 창고에 가져다 두었던 황제가 하사한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무엇을 찾는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한참 찾기에만 열중하더니 마침내 옥침(玉枕, 옥으로 장식한 베개)을 골랐다. 차갑고 매끄러우며 반짝반짝 빛이 나 아름다웠다.
“혹시 심청에게 주려는 거야?”
심구는 다시 물었다. 심청의 혼례일이 코앞으로 다가왔기에 심가 전체는 혼사에 마음을 쓰느라 바빴다. 심모는 심묘에게 심청의 혼수로 무엇을 보낼 건지 물었고 심구 역시 그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여태 심묘는 혼수에 신경을 쓰는 기색이 없었다. 오늘 드디어 물건을 고르는 걸 보고 심구는 심묘가 심청에게 줄 물건을 고르나 보다 하고 여겼다.
심묘는 옥침을 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럼 네가 쓰지? 좋아 보이는데.”
이 옥침은 빙잠침으로, 전생에 심신이 직접 딸의 혼수 상자에 넣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미 부인이 깊은 성총을 받게 된 후에 자신의 몸이 불편하고 두통이 있으니 이 빙장침을 달라고 했다. 그 당시 빙장침은 완유가 가지고 있었는데, 완유는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빙장침은 완유가 미 부인과 몸싸움을 하던 중에 바닥에 떨어져 부서졌다. 부수의는 매섭게 완유를 질책했고 얼마 후 흉노족과의 화친혼이 결정되었음이 전해졌다. 지난 일이지만 심묘는 여전히 가슴이 미어졌다.
“교교야?”
심구는 갑자기 안색이 변한 심묘가 걱정스러웠다. 심구의 부름에 심묘는 정신을 차렸다.
“이건 다른 사람 줄 거야. 큰언니 혼수는 오라버니가 나 대신 아무거나 골라줘. 오라버니가 시간이 없다면 내가 곡우를 시켜서 사 오라고 할게.”
심청에겐 무정한 처사였다.
“어…… 어.”
당황한 심구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심구는 심묘가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멍청이, 그 베개를 누구한테 줄 건지 묻는 걸 잊었네!”
그때 방 밖에서 경칩이 심묘에게 물었다.
“아가씨, 옥침은 누구에게 주실 건가요?”
“친구에게.”
장래 진가를 이용할 수 있으니 미리 성의를 표시해두어야 했다. 소소한 은정과 자비를 베풀어 곤궁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면 이후 충성심에 불타는 친구를 얻을 수 있는 법. 그녀는 부수의 곁에서 사람을 다스리는 기술을 잘 배워두었다. 심신을 안정시켜줄 빙장침은 힘든 생활을 한 진가 여식에게 의심할 바 없이 좋은 물건이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짝할 사이 섣달 초여드렛날이 다가왔다. 섣달 초여드렛날은 길일이라 관혼상제(冠婚喪祭, 관례·혼례·장례·제례)에 적합했기에 여러 해 홀로 지내던 예친왕이 새 왕비를 맞이하는 날이기도 했다. 예친왕부는 마침내 새로운 여주인을 맞이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뻐할 일이 아닌 걸 잘 알고 있었다. 이 혼례가 언제 장례로 변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예친왕의 아내가 될 사람은 심가 이방의 적녀, 심청이었다. 위무대장군 심신의 딸인 심묘는 어리석은 머저리라고 소문난 데 비해, 심청은 재녀라고 명성이 자자한 심모만 못할진 몰라도 그녀 역시 아름답고 슬기롭다고 유명했다. 여느 대갓집의 주모가 되기에 부족함 없는 아가씨가 하필 예친왕에게 시집을 가다니, 사람들은 탄식했다.
군중 속 누군가 작게 말했다.
“심귀도 미쳤구먼. 눈을 뻔히 뜨고 딸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걸 보다니, 큰 죄를 짓는 거야.”
다른 사람은 그 말에 동조하지 않아 타박하듯 말했다.
“댁이 뭘 알아? 관리인 사촌 형에게 들었는데, 심청 소저는 일찍이 예친왕과 사통했대. 배에 아이도 있어. 황실의 혈육을 품은 게 아니라면 연못에 빠져 죽는 처벌을 당했을 거야.”
“그 말이 진짜요?”
주위 사람은 듣고 놀라워하며 물었다. 그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니 회조연 날 문무백관이 모두 보았답니다. 심청 소저는 하나도 불쌍하지 않아요. 다 자업자득이에요.”
“확실히 그렇네요, 혼인 전에 먼저 임신이라니, 사회 기강을 더럽혀도 유분수지.”
“정말 염치도 모르고.”
“심가 이방은 딸을 어떻게 가르친 거야? 정말로 가문의 수치구먼. 심 장군께서도 얼굴을 못 드시겠어.”
“이게 심 장군과 무슨 관계야? 심 장군은 평소 정경성에 안 계셔. 이방이 딸을 저렇게 가르친 거지.”
사람들은 떠들썩했고 대부분 심청을 경멸했다. 동정으로 시작했으나 곧 경시와 욕설로 변했다. 심귀와 임완운도 비방을 피할 수 없었다. 군중 속에서 심청의 임신 얘기를 처음 꺼낸 사람은 몰래 웃고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 * *
심부 채운원.
희파(喜婆)가 심청의 몸치장을 돕고 있었다. 임완운은 심청의 뒤에 서서 손수건을 비틀어 짰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는 없다. 하물며 옥이야 금이야 키운 딸이 생지옥에 걸어 들어가는 것을 뻔히 바라봐야만 하다니. 임완운은 누군가 자기 가슴을 칼로 찌르는 듯 몹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심청은 임완운과 다르게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담담히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희파가 마음대로 자신을 꾸미도록 뒀다. 희파가 방긋 웃었다.
“소저, 제가 얼굴을 꼬집을 겁니다. 아플 테지만 참으세요. 잠시 지나면 아름다운 새신부가 되는 겁니다.”
임완운은 가슴이 미어져 현기증이 났다. 심청은 멍하니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을 수시로 깜빡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심청은 생기 없는 죽은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희파는 심청의 모습을 보고 섬뜩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자 안에서 무명실을 꺼내 심청의 얼굴 위 솜털을 뽑기 시작했다. 얼굴은 희고 멀쑥해지지만 아픔이 상당했다. 보통 아가씨들은 아프다고 몇 번씩이고 소리치고는 했다. 그러나 심청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심청아.”
임완운이 견디지 못하고 또다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신부는 화색이 돌기는커녕 전신에서 절망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희파는 자신이 신부 치장이 아니라 고인의 염을 하고 있단 생각마저 들어 상서롭다는 말을 차마 못 하고 빠르게 얼굴 치장을 끝냈다. 희파가 떠나자 방 안에는 임완운과 심청, 여종만 남았다.
임완운은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와룡사를 다녀온 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았건만 그녀는 노부인처럼 늙어서 얼굴에는 주름이 무성하고 머리는 희끗희끗했다. 이전 화려한 옷차림의 영리한 귀부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그냥 당하는 게 아니에요. 난 반드시 복수할 거예요.”
심청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말투는 우는 듯 웃는 듯 괴상망측했다.
“심청아, 어미가 미안하다.”
임완운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심청은 멍하니 그녀에게 안겨 목이 잠긴 채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모두 날 돕지 못하시니, 저 스스로 복수해야지요.”
차분한 말투였다. 그러나 말속 깊은 원한은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심귀는 방관했고 임완운은 무능하고 무력했다. 심청은 자신의 부모를 원망했다.
임완운은 심청이 자신을 원망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일이 이 지경에 이른 데에 그녀의 탓이 없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녀가 심묘를 음해하지 않았다면, 그날 밤 문을 열고 들여다봤다면, 예친왕에게 그가 갖고 논 게 심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편지로 보내지 않았다면. 심청이 이렇게 출구 없는 절망에 떨어지진 않았을지도 몰랐다. 임완운은 간신히 미소 지었다.
“심청아, 걱정하지 마라. 어미가 반드시 널 위해 복수해주겠다고 맹세하마. 네 오라버니가 반드시 그 천한 것이 지위와 명예를 모두 잃고 바닥에 떨어지도록 할 것이다.”
* * *
심부 대청.
심 노부인은 가라앉은 얼굴로 중앙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심원백은 그녀 품 안에 반 엎드려 있었다. 노부인의 얼굴 위 흉악한 기색이 두려운 듯 심원백은 움직이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이런 염치도 없는 짓을 저지르고 무슨 선물을 받을 생각을 하느냐? 심귀, 네가 딸을 잘도 키웠구나.”
노부인의 호통에 심귀는 얼른 대답했다. 그는 임완운과 지금 바로 이혼하지 못해서 한이 맺혔다.
노부인은 허영심이 강했고 외부에 뽐내길 그 무엇보다 좋아했다. 이번에 심청이 큰일을 일으켜 그녀의 체면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문무백관은 심청의 추악한 일을 모두 알았고, 남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된 노부인은 임완운 모녀 두 사람을 원망했다.
심구는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느라 표정이 괴상했다. 노부인은 자신이 가녀 출신임을 잊은 것 같았다. 심청보다 나으면 얼마나 나은 신세였다고. 지금은 스스로를 고상하고 순결한 대갓집 규수였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심만은 조용히 있었다. 진약추도 분노한 노부인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심신과 나설안 역시 노부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노부인은 한번 더 성질을 부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혼수도 많을 필요 없다. 이런 계집아이에게 심가 은자를 쓸 가치는 없다.”
나설안에게서 경시의 기색이 더욱 짙어졌다. 노부인은 심원을 편애했다.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를 경시한다지만 심청도 노부인의 곁에서 자랐다. 예친왕부에 시집가는 심청의 앞날이 편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것이었다. 은자는 심청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줄 수 있을 텐데, 노부인이 이 정도로 무정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과연 상류사회에 오를 수 없는 가녀 출신이었다.
심귀는 효자처럼 순순히 알겠노라 대답했다. 노부인은 그가 순종적인 것을 보고 표정을 조금 풀었다. 심신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할 때 심모의 외침이 들렸다.
“둘째 오라버니.”
젊은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벌꿀색 장포를 입은 단정한 생김새의 남자는 심귀와 닮았고, 미간 사이에서 오만함이 은은하게 풍겼다. 심귀의 장자 심원이었다. 심원은 아주 영리해 심구가 무공을 갈고닦아 착실히 한 걸음씩 나아갈 때 이미 천부적인 재능을 주위로부터 인정받았다. 어릴 때 과거에 합격했고 석차는 당연히 높았다. 귀인의 눈에 들어 벼슬길에 올랐으나 관례상 지방에서 낮은 관리로 3년간 경험을 쌓아야 했다. 올해 연말이 딱 3년째라 그때 맞춰 돌아와 정경성 내의 관리가 되려고 했지만, 심청에게 일이 생겨 급히 돌아온 터였다. 오늘은 정확히 심청의 출가 날이었다.
심모는 심만의 뒤로 숨었다. 심만은 심모의 어깨를 토닥이며 시선을 심원에게 향했다. 심부 사람들은 심원을 두려워했다. 심원이 어린 나이임에도 노련한 수완가처럼 궁리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린 여동생들이 그를 무척이나 두려워한 것은 당연했다. 심묘 역시 예전에는 두려워했었다.
그의 귀환에 노부인이 가장 기뻐했다. 그녀는 심원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심원아.”
노부인의 품 안에서 심원백도 낭랑하게 외쳤다.
“둘째 형님.”
심원은 웃으며 노부인에게 인사했다. 그러고는 심원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원백아, 그새 많이 자랐구나.”
“심원아, 서둘러 돌아왔구나. 피곤할 텐데 먼저 쉬겠느냐?”
진약추가 웃으며 말했다. 임완운 대신 심부의 일을 맡아서 처리하는 주모의 위엄을 보인 것이었다. 심원은 고개를 돌려 진약추를 보았다. 진약추는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마음이 가라앉으며 두려워졌다. 1년간 보지 못한 심원은 속을 더욱 알 수 없는 사람이 된 듯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심원은 음과 양으로 아이들을 괴롭혔다. 심원은 똑똑했기에 맞붙어서 손해 보는 쪽은 늘 진약추였다. 진약추는 깊이 생각할 줄 모르는 임완운이 이런 똑똑한 아들을 낳은 것을 몹시 질투했다. 심원이 재능을 펼쳐 보일수록 아들이 없는 진약추는 위축되었고, 점차 이방에 감히 불만을 표출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됐다.
심원이 대꾸했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이번에 돌아온 것은 동생의 혼사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쉬다가 시간이 늦을까 걱정입니다.”
심청의 이야기가 나오자 방 분위기는 눈에 띄게 부자연스러워졌다. 노부인도 대꾸하지 않았다. 심원은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돌려 심구의 곁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심묘가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오래 보지 못해서 그런가, 심묘도 많이 변했구나. 여인은 크면서 여러 번 변한다더니 과연. 심묘……. 못 알아볼 뻔했어.”
심묘는 조용히 그와 마주 보았다. 심원의 시선은 음산하며 탐색의 빛을 띠었다. 늪을 헤엄치는 독사가 서두르지도 여유를 부리지도 않고 휘감아 올라오는 듯했다. 습하고 차가운 기운에 솜털이 일어서고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심묘는 방긋 웃어 보였다.
“둘째 오라버니는 변한 게 없네요.”
진약추는 멈칫했지만, 심모는 기뻐했다. 심신과 나설안은 약속을 한 듯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심구가 웃으며 말을 이어받았다.
“맞아, 둘째는 무엇도 변한 게 없네.”
심구는 화제를 자신으로 바꾸었다. 심원은 심구를 한 번 보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심묘와 큰형이 이렇게 사이가 좋을지 몰랐네.”
“친형제지간인데 당연히 감정이 좋지요. 둘째 오라버니는 심청 언니를 보러 가지 않나요? 서둘러야 늦지 않을 거예요.”
심묘가 다시 한번 온화하게 웃었다. 심원은 그런 심묘를 지그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난 지금 갈 거야.”
그는 노부인에게 인사했다.
“조모, 전 먼저 동생을 보러 가겠습니다. 오라비인 제가 곁에 없는 동안 동생이 시집을 다 가게 됐네요. 앞으로 누군가 괴롭히지는 않을지 동생과 몇 마디 해야겠습니다. 먼저 갑니다.”
그는 몸을 돌려 사람들에게 시선 한 번 두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떠났다.
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귀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심귀와 심원은 이전부터 매우 친밀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부자지간이었다. 심귀는 심원을 중시해 그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고 심원도 심귀에게 존경을 표했다. 그런데 지금 심원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심귀는 검푸른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노부인이 질책하듯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 다시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워진 그녀는 손을 휘두르며 외쳤다.
“날 부축해라. 방으로 돌아가자!”
오늘 혼례에 노부인은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초청에 응해 참여하는 손님들 대다수는 모두 고위 관직의 귀족으로 이 혼사의 내력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노부인은 체면을 더 떨어뜨릴 수 없었다. 그녀는 장 유모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노부인이 떠난 대청에는 어색한 공기가 가득했다. 침묵을 깨고 심모가 심묘에게 물었다.
“심묘는 심청 언니에게 선물로 뭘 줄 거야?”
“진주 장신구 하나.”
심묘는 냉담하게 말했다. 심모는 심묘가 자신을 상대하지 않으려는 모습에 분노했지만, 심신 부부 앞이라서 티 내지 않고 조용히 진약추 옆에 서 있었다. 심만이 심신을 바라보았다.
“형님, 심원이 돌아왔으니 또 어찌할 겁니까?”
심신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심원이 돌아온 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난 교교와 심구의 일도 관여 못 하는데, 심귀의 아들에게 관여하라고? 너희 삼방은 사람 수가 적으니 만약 별일이 없으면 이방을 거들어주려무나. 형제잖나.”
성실하고 인정이 후해 보이는 심신은 사실 독설가였다. 그와 몇십 년간 치열하게 대립한, 입심이 부족한 임안후 사정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진약추는 분노를 삼키려 손톱으로 손바닥을 깊게 찔렀다. 삼방의 사람이 적은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진약추에게는 딸 심모뿐, 아들이 없었다. 노부인은 진약추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며 여러 번 심만에게 첩을 들이라고 했다. 다행히 진약추에게 정이 깊은 심만이 거부해 통방 둘밖에 없긴 했지만 진약추는 늘 불안했다. 심신의 말은 진약추의 심장을 칼로 찌른 것과 같았다.
나설안도 미소 지었다.
“맞아, 동서. 다른 집 일로 애태우지 마. 두 사람의 마음이 선량한 걸 알아. 그러나 자기 일을 생각해야 할 때도 있어. 심모가 이렇게 자랐는데 장래 시집갈 때 형제의 도움이 없으면 부족하다고 여겨질 거야.”
심묘의 얼굴에 웃음기가 넘쳤다. 심신과 나설안은 집안싸움에는 능하지 못하나 전쟁터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보다 직감이 더욱 민감했다. 심만 부부가 이간질해 불화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심산과 나설안은 전혀 넘어가지 않았다.
“교교야, 우리 심청을 보러 가자. 네 선물 아직 내가 가지고 있어.”
심구가 심묘의 어깨를 토닥였다. 심묘는 심구의 의도를 알고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심묘는 심구와 서원으로 걸어갔다.
“심원이 너에게 적의를 품었어.”
“나도 알아.”
심구는 초조했다.
“심원이라면 일의 전말을 알아낼 가능성이 있어. 걔는 몰래 말썽을 일으키는 걸 가장 좋아하니까 분명 심청을 위해 복수하려 들 테지. 방법을 찾아 널 해칠지 모르니 잠시 부 안에 있어. 외출하지 말고.”
심구는 심원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분명한 원인은 알 수 없었다. 노부인이 둘을 차별하긴 했으나 정작 둘 사이에는 무슨 곡절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심구는 심원을 볼 때마다 불편했으니 어쩌면 날 때부터 앙숙인지도 몰랐다.
“오라버니, 날 해치려고 작정했다면 내가 아무리 빈틈없이 숨어도 심원은 방법을 찾을 거야. 걱정하지 마. 심원은 신중하니 절대 감정적으로 날 죽이려 하지 않을 거야. 계획을 세우겠지.”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그녀를 계획성으로 능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심구는 더욱 불안해했다.
“교교야, 넌 아직 어려서 위험을 몰라. 걔는 무서운 애야. 너 이렇게 부주의하다가 큰일 당한다고!”
심묘는 심구를 투명한 눈빛으로 담담히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걱정하지 마. 병사가 오면 장수로 막고, 물이 오면 흙으로 덮으면 돼.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오라버니도 있잖아?”
그녀는 차갑게 웃을 뿐 속마음을 심구에게 말하지 않았다. 전생 심구의 죽음은 사고가 아니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이방과 삼방 둘 다 도망칠 수 없다. 심원이 그녀에게 손을 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녀는 심원이 잘 살게 놔둘 마음이 없었다.
전생의 빚을 모두 갚아주지. 심묘의 입가에 싸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 * *
동원의 채운원.
심원이 도착한 것을 보고 임완운이 달려와 그를 꽉 껴안았다. 그녀는 목이 멨다. 근래 자신은 두려움에 떨 뿐 무엇 하나 마음먹은 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 무력함에 대한 설움이 심원을 보자 폭발한 것이었다. 임완운은 목이 메어 한마디도 못 했다.
밀랍이나 석고로 만든 인형 같던 심청의 멍한 눈에도 빛이 스쳤다. 심원은 임완운을 위로하고 심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심청은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오라버니, 어째서 일찍 돌아오지 않은 거야…….”
임완운은 심청이 우는 것을 보고 더욱 소리를 높여 크게 울었다. 방 안은 울음소리로 가득 차 처참했다. 통곡을 멈출 줄 모르는 두 사람 탓에 혼례가 아니라 장례를 앞둔 분위기였다.
심원의 눈 속에 분노가 스쳤다. 그는 어려서부터 심부에서 성장했다. 심부 안 가장 권세 있는 사람은 심신 부부지만, 심원에게 두 사람은 전쟁터의 무식한 군인일 뿐이었다. 딸도 머저리니 이방이 쉽게 이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 임완운과 심청은 우아하고 부귀해 시골의 벼락부자 딸 같은 심묘와 비교하기도 아까웠다. 그런데 그 천한 것이 자신의 동생과 모친을 이런 처지가 되도록 핍박했으니 의심할 여지 없는 도전이었다.
임완운이 보낸 편지에는 지금까지의 일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임완운의 계획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반격한 직후 꼬리를 자르듯 몸을 내빼 평안하게 지내는 심묘는 확실히 심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우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심원은 일말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냉철하게 말했다. 임완운이 훌쩍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심원아, 네게 좋은 방법이 있을 거다. 넌 반드시 동생을 구해줄 거야, 그렇지?”
심청도 간절한 눈빛으로 심원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부탁이니 날 도와줘. 난 그런 사람에게 시집가고 싶지 않아……. 난 그에게 시집가기 싫어……. 오라버니, 날 도와줘. 날 도와줘…….”
친동생인 심청도 심원을 두려워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려서부터 그녀가 괴롭힘을 당하면 심원은 늘 침착하게 그녀를 도와줬다. 심청은 심원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했다. 게다가 지금 심원은 그녀에게 물에 빠진 사람이 잡는 지푸라기와도 같았다.
심원의 표정은 차가웠고 냉혹했다.
“할 수 없어. 일이 여기까지 왔으니 되돌릴 가능성은 없다. 너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마구 해칠 수는 없는 거야. 그러니 이 혼사는 네가 반드시 매듭을 지어야 해.”
심청은 맥이 풀려 멈칫했다. 겨우 잡은 지푸라기마저 끊어지고 다시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진 심청은 큰 소리로 울었다. 화장이 번지고 치장이 망가졌으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임완운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심원이 차갑게 말했다.
“이 혼사를 깨뜨릴 방법은 없지만, 동생이 다른 사람의 계략에 당하게 둘 수는 없지요. 심묘가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똑똑하게 변했으니 가능성은 두 가지입니다. 배후에서 누군가 지시해준 게 아니면 이전 머저리 같던 모습은 모두 가장한 걸 겁니다. 지시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쉽겠지만, 가장한 거라면 두렵지 않다고 할 수 없지요.”
“괴이한 일이야. 그 계집이 어떻게 도망쳤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심원아, 그 천한 것을 결코 살려둬선 안 돼. 이 모든 일이 그 천한 것 때문에 일어났다. 그 목을 물어뜯어 피와 살을 먹지 못해 한이 맺혀.”
임완운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어머니, 지금은 심묘에게 대놓고 맞설 수는 없어요. 백부가 옆에 있으니까요. 백부는 정경성에 반년 더 머물 거라던데, 그동안 심묘는 등에 날개를 단 듯 마음대로 활개 칠 겁니다.”
말을 마치며 심원은 심청을 힐긋 바라보았다. 임완운은 온몸을 떨며 절규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헛되이 끝낼 순 없어!”
“당연히 끝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후원자가 대단해도 무너질 날이 있을 겁니다. 심묘에게 후원자가 있었다면 그녀의 후원자를 쓰러지게 하면 됩니다. 백부 일가가 정경성에 머무는 게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하나하나 찾아가는 수고를 덜었으니까요.”
심원의 입가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심신과 싸우겠다는 말에 임완운은 잠시 두려웠으나 바닥에 쓰러진 심청을 보니 분노가 샘솟았다.
“심원아, 반드시 그 천한 것을 놓쳐선 안 된다!”
심원의 시선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 구역에서 내 사람에게 수작을 부리다니. 그대로 돌려줄 겁니다. 심묘가 어머니와 여동생을 해쳤으니, 난 심가 대방에서 심묘 한 사람만 남길 겁니다. 혼자 남긴 후에 천천히 가지고 놀 거예요. 그래야 돌려주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잔인한 웃음이 천천히 심원의 얼굴을 뒤덮었다.
* * *
심청은 새신부 치장을 한번 더 해야 했다. 희파는 심청의 표정이 이전보다 나아진 걸 발견하고 의아했다. 총기는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으나 적어도 ‘산 사람’ 같은 분위기였다.
심지어 심청은 심모와 심묘가 선물을 주러 왔을 때 두 사람에게 웃어주었다. 그러나 심청은 임신으로 몸이 부은 데다가 기분마저 몹시 초조하니 치장을 마쳤음에도 무척 초췌해 보였다. 그런 모습으로 웃음을 짓자 오히려 미친 노파처럼 괴상하고 무서워 보였다.
“심청 언니, 반드시 스스로를 잘 보살펴야 해.”
심모가 눈가를 붉힌 채 말했다.
“그래.”
심청이 대답했다. 심묘를 바라보자 목이 멨다.
“심묘에게는 ‘은혜’가 있으니 반드시 ‘보답’할게.”
심청은 웃으며 말했지만, 말투에는 흉악한 살기가 느껴졌다. 심모는 오싹해져 몸을 떨었다.
“기다릴게.”
심묘도 살짝 웃었다.
이후 혼례는 순리에 따랐다. 노부인은 마지막까지 정말 심청을 보지 않았다. 이번 출가는 영예롭지 않았기에 심부 사람들은 부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들은 축복하고 경축하는 말도 적당히 했다. 예친왕 역시 신부 맞이를 오지 않고 집사 한 사람만 보냈다. 난감한 일이었다.
심원이 심청을 가마로 데려갔다. 둘이 심부를 나서자 모여든 사람들은 그들에게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모두 한목소리로 심청이 염치를 모르고 경박하다고 비난했다. 임완운과 심원은 분노했지만, 그들을 모두 사형에 처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심청이 탄 가마가 출발할 준비를 하자 심원은 심부 입구로 돌아가 심묘 옆에 섰다. 그는 가마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말했다.
“심묘, 아주 평온해 보이네.”
“시집가는 사람은 내가 아닌데, 내가 평온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라도 있겠어?”
심묘는 심원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작게 대답했다.
“심청이 이렇게 시집을 갔는데, 네 미래는 어떨 것 같아?”
“미래가 어떨지는 나와 오라버니가 알 수 있는 게 아니지.”
심원은 심묘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돌연 가라앉았다.
“세상일은 끊임없이 변화해. 종종 눈앞이 진퇴양난이어도 곤경 속에서 희망이 나타날지도 몰라. 눈앞의 길이 넓어도 스스로 막다른 길로 몰아갈 수도 있어.”
심묘가 웃었다.
“맞아. 세상일은 누구도 분명히 말 못 하지. 사람의 일은 예측하기 어려워. 하지만 길이 없는 것은 아니야.”
심원은 고개를 돌려 심묘를 직시했다. 그의 눈은 유달리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그의 말 역시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너는 원래 똑똑한 사람이었구나.”
심묘가 가부를 단언하지 않을 때, 뒤에서 큰 외침이 들렸다.
“교교야! 함부로 다니지 마. 바깥에는 나쁜 사람이 아주 많아. 사람은 겉만 보곤 몰라서 무슨 화를 입을지 몰라.”
심구가 급히 달려왔다. 심원을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모양새였다. 심원은 심구를 한 번 보고 웃었다.
“형님은 정말 농담도. 게다가 심묘가 이렇게 똑똑하니 누구도 음해하지 못할 거야. 사람은 겉만 보고 모른다는 말에 적합한 사람이 따로 있지 싶은데.”
심구는 냉소했다.
“교교는 천성이 순수하고 선량해서 음험한 소인배와 비교할 수 없어. 게다가 난 오라비니까 당연히 늘 마음을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리가 한입에 교교를 먹어버릴 테고, 그때 가서 울면 너무 늦을 거 아냐. 교교야, 가자!”
심부 사람은 예친왕부로 따라가 축하 연회에 참가해야 했다. 심구의 말은 심원을 믿을 수 없다는 뜻을 나타냈다. 두 사람의 멀어지는 모습을 보는 심원의 얼굴에 흉악한 기색이 스쳤다.
* * *
심가의 혼례 가마는 거의 정경성의 절반을 돌았다. 황후가 직접 지시한 혼사니 겉모습은 당연히 성대했다. 이 혼사가 영예롭지 않다는 걸 모두가 알지만, 그래도 시끌벅적하게 경축하는 장면을 보여야 했다.
가장 번화한 도로 위, 쾌활루 창가에서 고양은 평소처럼 가볍게 부채를 흔들며 창밖 성대한 신부 맞이를 바라보았다. 신부 맞이는 엽전을 뿌리며 걸어가고 백성들은 떼 지어 몰려나와 엽전을 주웠다. 위에서 바라보니 기쁨이 넘치는 듯했다. 그러나 가마 안의 사람은 그러지 못할 것이었다.
“심가의 혼사, 겉모습은 확실히 아주 호화롭네. 나도 오랫동안 이렇게 번화한 혼사를 보지 못했어. 장래 내가 작약 소저를 맞이할 때나 이런 성황을 다시 볼 것 같은걸.”
계우서가 은괴(銀塊)를 가지고 놀며 말했다. 고양은 핀잔을 주듯 그를 흘겨보았다.
“자네는 작약 소저를 늘 생각하는군. 약혼녀가 있는 거로 기억하는데. 자네가 이렇게 작약 소저에게 아첨하는 걸 그쪽은 알고 있나?”
“그건 아기 때 농담으로 말한 건데, 그쪽이 어떻게 자랐을지 누가 알겠어! 난 혼인 안 해! 난 작약 소저를 사랑한다고. 만약 작약 소저가 안 되면 심묘도 좋고.”
그는 헤헤 웃으며 맞은편 사람을 바라보았다.
“3형, 그렇지 않아?”
사경행은 말하기 싫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고양이 계우서를 비웃었다.
“심묘? 혼례를 치르다 목숨을 잃을까 걱정인데.”
“뭐가. 심묘를 마귀 같다고 욕하지 마. 난 심묘의 똑똑하고 대담하면서도 세심한 점을 높게 평가한다고.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잖아? 이전에는 부수의 그 자식을 좋아했다는데 안목이 어찌 그리 낮은지 모르겠어. 부수의 따위가 나와 비교나 돼? 정말이지.”
계우서가 승복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고양은 계우서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하지만 너의 심묘에게 곧 말썽이 생길 것 같긴 하군.”
“무슨 말썽?”
계우서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고양이 말을 이었다.
“심청의 오라비 심원이 돌아왔어. 심청을 예친왕부라는 함정에 빠뜨린 심 소저를 심원은 절대로 놔주지 않을 거야. 심원은 상대하기 쉽지 않은 자야. 아첨으로 권세에 빌붙는 심귀는 주도면밀한 심원과 비교할 수도 없어. 게다가 심원은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하지. 손을 쓰면 가차 없네.”
계우서는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듯 탁자를 탁 치며 말했다.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네. 부수의의 사람인 거 아니야?”
사경행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는 창밖을 한 번 바라보았다.
“도적의 부하일 뿐이야. 어릿광대가 너희의 주의를 끌었네.”
“하, 자넨 늘 그렇게 거만해.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고양의 물음에 사경행이 한마디로 대꾸했다.
“기다려.”
시작하길 기다린 후…… 이득을 봐야지.
* * *
혼례 가마는 마침내 예친왕부로 들어갔다. 예친왕부 입구에는 이미 많은 손님이 와 있었다. 예친왕의 평소 처세는 사납고 흉악하지만 황실 사람이니 대신들은 내키지 않더라도 와야 했다. 그러나 문혜제와 황자들은 찾아오지 않고 사람을 시켜 축하선물만 보냈다.
예친왕은 근래 문혜제의 태도에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오늘 궁중 사람이 왔을 때도 축하주를 들게 하기는커녕 감사하다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궁중에서 파견된 공공이 이를 보고 냉소했다. 공공은 잡초 같은 환관으로 비천해 보이지만 사실 황제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문혜제와 예친왕 사이에 문제가 있는데도 예친왕은 이전과 같이 내키는 대로 일을 처리했다. 이전처럼 너그럽지 않은 문혜제는 오늘 예친왕의 행동을 듣고 더욱 분노할 게 뻔했다.
궁중 사람이 돌아간 후 예친왕은 하인에게 계속 손님을 맞이하라 분부했다. 예친왕은 진홍색 혼례복 차림으로 옷감은 아주 고급이고 자수작업 역시 대단히 섬세했지만, 한쪽 바지통이 텅 비어 어색했다. 무엇보다 흉악한 얼굴에 음험한 웃음이 가득하니 보는 이마다 소름끼쳐 했다.
심부 사람들이 도착했다. 심귀와 심만은 잘 아는 동료를 찾아 말을 걸었다. 심귀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어차피 심청의 추악한 일은 이미 모두의 앞에서 까발려졌다. 그 아비 역시 후안무치하다는 뒷말이 나더라도 지금 이 혼사를 틈타 스스로 벼슬길을 닦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심만 역시 그랬다. 두 사람 모두 야심가이니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사람들과 말을 나누었다.
심신과 나설안은 새신부의 친정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심귀의 태도에 불쾌해했다. 임완운은 심원 옆에 앉았다. 임완운은 세심히 단장해 붉은 눈언저리를 가렸다. 예친왕을 노하게 할까 간신히 미소 짓고 있었는데 그 웃는 얼굴에는 어찌 봐도 분노가 서려 무의미하게 애쓰는 모양이었다. 심원은 표정이 없었고 때때로 심묘를 스치는 시선만 의미심장했다. 심구는 심원을 바라보며 심묘로 향하는 시선을 가로막았다.
심원을 견제하는 심구를 본 나설안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요 녀석아, 너 심원과 뭐 하는 게냐?”
심신 부부는 심청과 심원 남매의 원한을 모르니 심구는 얼버무렸다.
“음, 좀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아까 충돌이 있었어요.”
나설안은 그에게 눈을 부라렸다.
“대단하구나. 무공을 못 하는 사람에게 손을 대려 하다니. 심구, 너 도대체 몇 살이냐?”
심구가 심묘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냈으나, 심묘는 모르쇠로 찻잔만 바라보았다.
손님들은 서로 아첨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보기에는 평온해 보였다. 심청과 예친왕이 맞절할 때가 왔다. 심청은 얼굴을 붉은 수건으로 가리고 있었다. 곁은 여종 춘도와 설리가 부축했다. 천지에 절하고 부모에게 절할 때가 오자 심귀의 얼굴은 매우 뻣뻣하게 굳었다. 그를 보는 예친왕의 시선이 몹시 흐리니 그들 부부에게 절을 한다면 소름이 끼치는 일일 터였다.
예친왕부의 집사가 거만하게 말했다.
“예친왕 전하는 몸이 불편하시니, 부모님께 절하는 건 생략합시다.”
곁채는 모두 일순 조용해졌다. 임완운은 이를 갈았고, 뺨 위 근육이 잘게 경련했다. 어째서 하필 부모에게 절할 때 예친왕의 몸이 불편한 게 생각난 걸까? 천지에 절할 때는 예친왕의 몸이 잠시 불편하지 않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예친왕이 심청을 제대로 아내로 인정하지 않음을 만천하에 드러내 심귀와 임완운을 난감하게 하려는 게 명백했다. 심귀 역시 낯가죽이 뜨거워졌으나 그는 줄곧 약자 앞에서 강하고 강자 앞에서 약했다. 그는 예친왕이 책망할까 두려워 바로 비위를 맞췄다.
“전하께서 불편하시다니 생략합시다.”
나이가 어린 손님들은 그 추태를 대놓고 비웃었다. 웃음소리를 숨기지 않아 임완운은 하마터면 앞으로 나가 따질 뻔했다. 그녀의 분노가 폭발하려 할 때 심원이 그녀의 팔을 붙들고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임완운은 겨우 기분을 가라앉혔고 심원은 손을 거뒀다. 심원의 시선이 아첨하며 웃는 심귀를 향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설안이 경시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둘째 서방님이 너무 체면을 지키지 않네. 어떻게 남들이 자기 딸을 저렇게 괴롭히도록 내버려 둘 수 있지?”
“난 본래 그가 단지 부귀를 탐한다고만 여겼지, 이렇게 언행이 황당할지는 몰랐어. 심귀가 어째서 저리 변했을까?”
심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망한 말투였다.
“우리도 함께 경시를 당해야 한다니, 정말 기분이 나쁘네요.”
심구 역시 답답하고 울적한 목소리로 한탄했다.
삼방 일가도 부끄러웠다. 심만도 벼슬길에 아주 야심이 크지만 심귀처럼 아첨을 심하게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진약추는 학자 가문 출신으로 스스로 고귀하다 여겼다. 심귀의 부끄러운 줄 모르는 태도에 모든 심가 사람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예친왕은 사람들이 심부 사람을 멸시하는 걸 보고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일부러 부부가 맞절할 때도 시간을 끌었다. 심묘의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새신부가 그들의 옆을 걸어갈 때 몸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친왕의 혼인이니 신방에 몰려가 놀리는 것도 당연히 생략됐다. 게다가 심청이 임신했기에, 신방에서 떠들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황실 자손을 모해했다는 죄명을 감당해야 하니 누구도 그런 호들갑을 떨 생각이 없었다. 심청이 신방에 들어가자 예친왕은 바깥에서 손님을 대접하며 술을 마시고 즐겼다.
“예친왕 전하, 경하드립니다.”
대신들이 비위를 맞추려 축배를 들었다.
“기쁜 일은 함께 나누어야지.”
예친왕도 화답했다. 예친왕은 오늘 정말 기쁜 것처럼 신하들과 함께 웃었다. 그러나 심묘는 그에게서 종종 그늘진 표정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예친왕은 심묘 때문에 낭패를 보았으니 하나하나 갚아주려 했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예친왕은 멀리서 잔을 들고 질 나쁜 손짓을 하며 입술을 핥았다. 심묘는 그 악의를 그저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때 심구가 그녀가 어디를 응시하는 것을 보며 그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러나 예친왕은 이미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심묘가 갑자기 일어났다.
“조금 답답해. 입구로 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
“같이 가자.”
심구는 서둘러 일어섰다.
“괜찮아. 모경하고 호위들이 바깥에서 지키고 있고. 나도 멀리 가지 않고 입구에 있을 거야.”
심묘는 단호히 거절하고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예친왕부는 아주 커서, 모경은 화원에서 지키고 있었다. 그는 심묘가 나온 것을 보고 바로 따라붙었다. 심묘는 자기 말대로 멀리 가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예친왕부 서남쪽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묘.”
심묘가 고개를 돌리자 심원이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심원의 웃는 얼굴은 부수의의 온화하며 부드러운 것과 달랐고, 심구의 소박하고 정직한 것과도 달랐다. 계우서의 철없는 장난스러움과는 더욱 달랐다. 그의 웃는 얼굴은 다른 뜻을 품은 듯 늘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독사가 사냥감을 살펴보는 것 같은 시선이 더해지니 전신에서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 심원은 심가 이방 안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두려운 사람이었다.
“연회는 이제 시작인데 나오길래 무슨 비밀이 있나 싶었네. 오라버니들을 두고 혼자 놀러 나오다니.”
그의 말속에 다른 숨은 뜻이 있었다. 심묘는 대꾸하지 않고 나뭇가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미 추운 섣달, 이전에 만개한 꽃송이는 자취도 찾을 수 없고 가지 끝에는 무엇도 남지 않았다. 텅 빈 화원은 눈이 쌓여 썰렁하고 적막했다.
“그럼 오라버니는 뭘 하려는 거예요? 내 비밀을 몰래 훔쳐보려고?”
“몰래 볼 의도도 있었어. 하지만 네가 너무 엄중하게 숨겨서 전혀 방도가 없네. 너와 나도 남매인 셈이니 기회가 있다면 너에게 몇 마디 충고와 가르침을 주고 싶어.”
심묘는 고개를 들어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았다.
“자세히 이야기해봐요.”
“사실 이번에 수도로 돌아와서 네가 많이 변한 것을 알았어. 사람이 바뀐 듯한데, 아마 네가 성장했거나 곁에서 누군가 가르친 거겠지. 그러나 난 너보다 경험이 많아. 훨씬 더 분명히 볼 수 있지.”
심원은 말을 멈추고 잠시 곁채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사람들 목소리로 떠들썩했다. 서로 술을 올리고 축하하고 축하받으며 아첨하는 소리는 멀리서도 들리는 듯했다.
“오늘 심청이 혼례를 치러서 좋니?”
“솔직히 말해 속이 시원하네요.”
심묘는 살짝 웃었다. 순간 심원의 눈 속에 맹렬한 기색이 스쳤지만 그는 침착하게 웃었다.
“너는 정말 자제를 모르는구나. 너와 심청의 원한은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거야. 지금 심청이 예친왕부로 들어갔다고 네 승리라고 여긴다니. 결국 넌 어린아이일 뿐이구나.”
그는 심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친근한 남매 사이 같았다.
“그러나 심청이 예친왕부로 들어갔다고 뒤집을 기회가 꼭 없는 건 아니야. 지금의 굴욕을 꾹 참고 견디면 심청이 장래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내가 너라면 심청에게 단 한 번의 기회도 남기지 않고 일찍이 그 목숨을 원했을 거야. 잠깐의 억하심정으로 상대방에게 더 큰 고통을 주려다 오히려 내 퇴로가 없어질 테니까. 넌 스스로 후환을 키운 셈이야.”
그는 심묘를 보며 친근하게 웃었다.
“넌 아직 어려서 지나친 관용이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칼날로 돌아온다는 이치를 몰랐겠지. 적이라면 목숨을 앗아야 해. 그게 상책이야.”
심묘는 심원을 바라보았다. 심원은 확실히 이방 안에서 가장 똑똑했다. 그는 과정은 보지 않고 결과만 보았다. 누군가 그에게 미움을 사면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 목숨을 빼앗았다. 이 수완은 흉악하지만 후환이 없었다. 심원 같은 사람은 냉정하고 이성적이라 바깥에 깊은 감정을 갖지 않는 법이었다. 이런 사람을 분노하게 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오라버니의 말이 맞아요. 난 어려서 오라버니처럼 박정하지 않지요.”
풍자하는 말에도 심원은 마음에 두지 않고 웃었다. 심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난 오라버니보다 박정하지 않지만 나도 오라버니와 같아요. 나도 후환을 남기는 것은 좋아하지 않거든요. 심청 언니가 예친왕부로 시집가서 상황을 반전할 수 있을까요?”
심원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못할 것 같아?”
“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심묘가 반문했다. 심원과의 대화에서 그녀는 지금껏 줄곧 평온하고 영리하게 말했다. 그러나 “할 수 있을 것 같나요?”에는 짙은 조소가 감돌았다. 도리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비꼼은 감정을 일절 보이지 않던 심원의 동공을 순간적으로 수축시켰다. 심묘는 가볍게 웃고 재빨리 몸을 돌려 화원을 떠나 곁채로 돌아갔다.
심청이 과연 뒤집을 수 있을까. 그녀의 입가가 작게 올라갔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녀의 기쁜 웃음은 모경 일행을 멍하게 했다. 심묘 곁을 지키는 모경도 그 미소를 분명히 보았다. 그는 심묘가 화가 났을 때는 평온하게 명령하고 웃어도 그 속에 희미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눈썹과 눈이 휘어져 정말로 기분이 아주 좋은 것 같았다. 무슨 일이 그녀를 이렇게 기쁘게 만들었는지 짐작할 수 없어 모경은 화원 안에 아직 멍하니 서 있는 심원을 바라보았다. 심원과 나눈 대화가 심묘를 이렇게 기쁘게 만들 수 있는지 모경은 의심했다.
* * *
제아무리 성대한 연회도 언젠가는 결국 끝나는 법. 주흥(酒興)이 무르익자 하객들은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심묘도 부로 돌아가려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에서 나설안은 시종일관 침묵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심묘의 손을 잡고 물었다.
“교교, 넌…… 어떤 남자를 사모하느냐?”
시집을 가기 전의 딸에게 어머니가 물어볼 수 있는 평범한 질문이었다. 오늘 심청의 출가가 나설안의 마음을 건드린 듯했다. 평소 그녀는 전쟁터에 있어서 심묘의 이상형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심묘가 부수의를 짝사랑한 것만 알 뿐이었다. 나설안도 부수의를 본 적이 있었다. 확실히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으로 풍채도 좋았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포부가 작지 않기에 감정도 여럿과 나눠야 했다. 그에게 시집간다고 반드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심묘는 당황했지만 곧바로 미소 지으며 나설안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제가 어떤 사람에게 시집가길 바라세요?”
나설안은 심묘가 자기에게 되물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심묘가 자신의 장래 신랑감에 관해 얘기하는데도 아가씨다운 수줍음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그저 남의 일처럼 덤덤히 여기는 태도를 의식하지 못했다. 나설안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이 어미는 네가 품행이 정직한 사람에게 시집가길 바래. 관직이 너무 높지 않고 재물도 너무 많지 않고 야심도 너무 크지 않고 부 안의 사정도 너무 복잡하지 않아야 해. 권세와 재물은 이 어미와 아비가 전부 줄 수 있어. 그러니 남편은 야심은 작고 진심으로 널 사랑해야 해. 부 안이 간단해야 네가 시집간 후 조용히 지낼 수 있어. 어쨌든 진심으로 널 존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해.”
심묘의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그런데 이 어미도 네가 이런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눈에 확 띄는 사람을 좋아하겠지. 나도 네 나이 때는 그랬어. 젊고 잘생긴 영웅을 좋아했거든. 하지만 네 아버지와 혼인했고,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단다.”
나설안은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녀와 심신이 원하는 것은 딸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평범한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생의 심묘는 부모의 뜻과 반대로 자신을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선택했었다.
“그럼 전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 되겠네요.”
심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나설안은 예상치 못한 딸의 반응에 놀란 기색을 보였다.
“날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주는 사람한테 시집가는 것. 그게 어머니의 소원 아니에요? 나중에 혼인할 나이가 되면, 그런 사람과 할게요.”
나설안은 심묘의 손을 꼭 잡았다. 딸의 모습이 평소와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왜 이렇게 이상하지?’
심묘는 평소의 거만하고 날카로운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고, 어머니의 말을 존중해 따르겠다고 밝혔다. 나설안으로서는 이 상황이 기쁜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딸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순종적인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쓰렸다. 나설안은 심묘를 품에 끌어안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네 나이면 어떤 사람을 좋아해도 지나치지 않아. 이 어미는 우리 교교가 마음에 두는 사람은 당연히 훌륭할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렇게 똑똑하니까, 상대방도 반드시 널 아끼고 존중할 거야. 만약 교교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한테 잘하면, 평범한 사람이어도 절대 널 막지 않을 거야.”
“고마워요, 어머니.”
심묘는 나설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 * *
섣달 초아흐렛날, 또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연말이 되면서 맑아졌던 날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보기 드문 눈 폭풍이 휘몰아쳤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불어오는 북풍에 맞추어 거친 눈발이 사방에서 춤을 추었다. 정경성 거리에 행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상점도 모두 문을 닫았다. 칼날처럼 매서운 추위였다.
정경성 예친왕부 입구에 걸린 붉은 등롱은 바람에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입구에서 터트린 화약과 빛나는 천은 일찍이 눈에 덮였다. 입구에 붙인 새빨간 ‘희(囍)’ 자를 써둔 종이는 바람에 반이 뜯어지고 남은 반은 우둘투둘해 괴이한 모습이었다.
바깥을 지키고 있던 호위무사 둘은 손에 술병을 쥐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늘 축하주를 얻어 마신 터라 알딸딸한 상태였다.
“우리 부에 또 왕비가 올 줄은 몰랐다. 아직도 여기로 딸을 시집보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어이, 헛소리 말아. 무슨 시집을 보낸 거야, 팔아버린 거지. 그리고 왕비는 무슨. 얼마나 오래 살지도 모르는데.”
대꾸를 한 사내가 안을 한 번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쩌면 우리 둘을 즐겁게 해줄지도 모르지.”
술병을 쥔 사내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전하의 아이를 품고 있어. 더 살고 싶지 않으면 한번 들어가 봐.”
그때였다. 푹! 눈바람 사이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술병을 든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넌 못 들었어?”
“무슨 소리? 바람 소리에 놀라지 마.”
다른 사내는 술에 취해 손을 휘저었다.
“오늘은 전하의 혼례 날이니까 아무 일도 없어야만 해.”
그 사내는 취기를 깨려고 몸을 곧게 세웠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괜한 걱정은.”
다른 호위가 웃었다.
“이곳이 어디야. 바로 예친왕부라고! 누가 감히 여기에서 멋대로 굴겠어! 그렇다면 살기 싫은 거지. 괜히 겁먹지 마.”
그 순간, 그의 얼굴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엇? 이 눈은 어째서 따뜻하지?”
그는 손을 펼쳐 등불에 비추어 보았다.
“이…… 이건!”
피였다. 따뜻한 눈이 아닌, 따뜻한 피! 사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처마 위에는 다른 호위무사의 시체가 눈을 크게 뜨고 매달려 있었다.
“크허억! 저… 저…….”
그가 막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그의 목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렀다. 동시에 그는 힘을 잃고 쓰러졌다. 옆에 있던 사내 역시 가슴에 칼을 맞은 후 바닥에 쓰러졌다.
탁! 타다닥! 수십 명의 낯선 이들이 처마에서 바닥으로 뛰어 내렸다. 모두 검은색 옷에 복면을 쓰고 있어서 주위의 어둠과 녹아들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쓰러진 호위무사의 시체를 끌고 사라졌다.
잠시 후, 새로운 호위무사들이 그 자리를 지키기 시작했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의 손짓에 복면 일행은 예친왕부 안으로 조용히 침투했다.
* * *
예친왕의 침실.
예친왕은 부드럽고 낮은 침상 위에 편안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시녀 둘은 그의 곁에서 다리를 주무르고 음식을 먹였다. 심청은 침상 머리맡에 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으…….’
심청은 치욕스러움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은 고위 관료의 적녀로서, 부수의처럼 풍채 출중한 멋진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 했다. 그런데 지금 야비하고 잔인한 예친왕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심지어 조금 전 예친왕은 정실인 자신 앞에서,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르겠는 천한 여인과 음탕한 행위를 보란 듯이 했다. 심청은 분하고 두려웠고, 그럴수록 심묘가 무척 원망스러웠다.
“내 아이를 품었으니 축하할 일이야. 아니었다면 네가 이처럼 편안히 있지는 못했을 거야.”
예친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며 심청의 두려워하는 눈빛을 감상했다.
“네가 아이를 낳고 나면 그 공을 높이 사 대접해 줘야겠지. 우리 부에는 많은 호위가 있다. 그들은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지. 네가 나의 아내가 됐으니, 나를 대신해 그들을 위로해주거라…….”
‘뭐라고?’
심청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복수에 성공할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가겠다는 의지도 한순간에 꺾여버렸다.
“하하, 그날을 기대하마.”
예친왕의 말투가 온화해질수록 눈빛은 더욱 음험해졌다. 옆에 있는 두 시녀가 몸을 떨었다.
“왜 떠느냐?”
예친왕이 불만스럽단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 순간이었다. 왼쪽에 있던 시녀가 갑자기 예친왕의 몸 위로 쓰러지며 하얗고 가느다란 팔로 그의 머리를 껴안았다.
“이것이! 뭐 하는 짓이냐?”
예친왕은 그녀를 뿌리치려 했지만, 그사이 다른 시녀가 자신의 비녀로 그의 목을 내리 찔렀다.
“으아악!”
예친왕이 비명을 지르며, 시녀 둘을 바닥으로 밀쳐냈다.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심청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둘러 탁자 아래로 몸을 숨겼다.
“흡!”
예친왕은 자신의 목에 꽂힌 비녀를 뽑았다. 깊이 꽂히지는 않았으나,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호위! 호위!”
그러자 호위 한 명이 잽싸게 안으로 들어왔고, 예친왕은 쓰러진 시녀 둘을 발로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이것들이 어디서 굴러들어왔는지, 누군지 조사해라! 지금 당장!”
“…네.”
호위는 어딘가 수상해 보였다. 그는 머리를 숙여 대답하고는, 곧바로 예친왕을 향해 은색 칼날을 들이밀었다.
“으헉!”
바닥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었다. 칼이 그의 명치를 관통한 듯했다. 반짝반짝 빛나던 칼날에는 피가 흘렀고, 예친왕은 도살당한 돼지나 양처럼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심청이요?”
호위는 시체를 한 번 확인하고, 벌벌 떨고 있는 심청에게 물었다.
“네……. 당신은 오라버니가 날 구하라고 보낸 사람인가요?”
심청은 희망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호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누구지? 뭘까?’
심청은 의심스러웠지만 정신을 차리고 서둘렀다. 그녀는 방 안에 있던 금은보화와 비단을 챙겨서 방을 나섰다.
“어맛!”
문밖에는 많은 호위무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심청은 더욱 놀라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암흑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움직이는 듯했지만, 눈폭풍 때문에 정확히 볼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예친왕부 전체가 음산한 지옥으로 변해 있단 건 확실했다. 농후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고, 하얀 눈조차도 진홍색 빛을 띠고 있는 것만 같았다.
* * *
심부 서원.
상강이 창문을 닫으며 입을 열었다.
“바깥에 눈바람이 너무 심해요. 창문이 바람에 계속 열려서 사람을 놀라게 하네요. 노인에게 들으니 이런 날씨는 천제께서 죄인에게 죄를 묻는 거래요. 이번에 죄를 지은 자의 잘못이 아주 큰가 봐요. 이렇게 심한 눈바람은 난생처음이에요.”
“아가씨, 무얼 보세요? 낮의 축하 연회를 생각하세요?”
경칩이 심묘를 향해 물었다. 늦은 오후에 부로 돌아온 후 심묘는 해가 질 때까지 탁자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경칩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그녀가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냥 보는 거야.”
심묘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상강과 경칩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매우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심묘가 대체 무엇을 본다는 건지, 의아스러웠다.
‘방 안은 이렇게 편안한데, 바깥은 눈바람이 몰아치네. 하룻밤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심묘는 화원에서 심원이 한 말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섬세한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노래를 대신했다. 그 노래의 노랫말은 선과 악은 인과응보이며, 천지는 윤회한다는 내용이었다.
* * *
눈폭풍은 다음 날 이른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뚝 멈추었다. 그러나 밤새 쌓인 눈은 무릎까지 올 정도였다. 이런 날에는 부지런하기로 따라올 사람이 없는 상인조차 따뜻한 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밖으로 나가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날이 좋으나 나쁘나 아침이 밝았음을 알려야 하는 직업을 가진 한 노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얘기였다. 해가 아직 높이 뜨기 전, 노인은 서둘러 징을 들고 눈길을 나섰다. 그는 낡은 겹저고리를 입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 예친왕부 대문으로 향했다. 노인은 대문에 있어야 할 호위무사들이 없는 것을 보고 미심쩍어했다. 하지만, 노인은 문에 달린 ‘희’자를 보며 깨달았다.
‘옳거니, 어제가 예친왕부의 왕비를 맞는 날이었지. 다들 술을 마시고 즐겼나 보군. 그런데 그 아가씨는 어떻게 되려나. 쯔쯔.’
그는 하필 예친왕부에 시집을 와서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왕비를 걱정하며 혀를 찼다. 그때였다. 고요한 어둠을 깨고 무거운 대문이 바람에 삐걱대기 시작했다.
‘이 느낌은 뭐지?’
노인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며 멍하니 서 있었다.
“거기, 입구에 서서 뭘 하는 거요?”
쿵쿵… 쿵쿵! 노인의 심장이 갑자기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떠들썩하게 마셨어도 이렇게 조용할 순 없지. 개라도 소리를 내야 할 것이 아닌가!’
완전한 침묵 속에 잠긴 예친왕부는 마치 무덤 같았다. 그는 두어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가 떨리는 손을 대문으로 뻗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문틈을 살짝 들여다보는 순간.
“흐어엇!”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소리를 질렀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그 소리에 놀라 일제히 다가왔다. 문틈 사이로 눈이 피와 섞여 두꺼운 핏덩이가 된 것이 보였다. 그곳에서 구불구불 흘러나온 핏빛 빙하는 부의 대문 앞에서 멈춰 있었다. 쫓기다가 문을 사이에 두고 살길이 뚝 끊어진 것만 같았다. 게다가 꽁꽁 언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바람과 서리 때문에 언뜻 조각품처럼 보이기까지 했으나 여전히 흐르는 듯한 짙은 선혈이 그것이 사람임을 상기시켰다.
* * *
정경성 예친왕부는 왕비를 맞이한 날 멸문을 당했다. 부 안의 첩, 노복과 하인, 고양이와 개는 물론이고 닭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 범인은 예친왕부에 피맺힌 원한을 품은 듯 모든 것을 남김없이 학살했다. 모두 한칼에 목숨을 잃었지만, 부의 금은보화는 하나도 없어지지 않은 걸 보아 재물을 노린 것은 아님이 분명했다. 깔끔한 수완이었다.
예친왕의 일 처리는 흉악하고 잔인해서 악행이 산더미처럼 높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적지 않은 원한을 산 상태여서 손쓴 사람이 누군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든 간에 그들의 담력이 큰 것은 분명했다. 예친왕부와 맞서는 것은 바로 명제 황실과 맞서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예친왕을 지극히 아낀 문혜제는 늘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그래서 그 역시 하늘 두려운 줄 모르고 방만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사람들의 예상이 빗나갔다. 문혜제는 범인을 잡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매사 적당히 처리하는 정경성의 경조윤에게 이번 일을 떠넘길 뿐이었다. 문혜제가 예친왕부 멸문 학살 사건에 많은 심력을 쏟을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문혜제의 박한 태도를 보며 예친왕과 사이가 매우 틀어진 게 틀림없다고 추측할 만했다. 오히려 문혜제가 후련해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자자했다.
그런데 이 참혹한 사건에서 놀랍게도 생존자가 한 명 있었다. 바로 어제 예친왕부로 시집을 간 예친왕비 심청이었다. 그녀는 분명 예친왕의 침실 안에 있었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사람들은 당연히 심청 역시 살해당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살아 있었다.
경조윤은 심청을 잡아 심문하려고 했다. 심청과 이 일이 관련 있든 없든 그녀는 유일한 증인이었다. 왜 그녀만 살아남았을까. 아무리 심청이 무고하다 해도, 죄 없는 다른 노복과 첩들도 봐주지 않았는데? 게다가 예친왕의 몸에 비녀로 찔린 흔적이 있지 않은가. 이렇듯 의문투성이이니 자연히 심청은 의심 대상이 되었다.
심부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심청은 이미 잡혀간 뒤였다. 심귀와 심원은 각자 급한 일정을 미루고 만나 긴히 상의를 했지만, 속 시원한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심청이 이 일에 말려든 건 명확했다.
“심원아, 앞으로 우린 어떻게 해야겠느냐?”
심귀 부자는 이 일로 앞으로의 벼슬길에 많은 지장이 생길 게 분명했다.
“경조윤을 찾아가시지요. 지금 예친왕부로 가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심청이 잡혀갔으니 경조윤이 속사정을 알 것입니다.”
심원은 냉랭한 말투로 대꾸하고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를 책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심귀는 심원의 말뜻을 알아듣고 분노했지만, 겉으로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가자.”
나설안과 심신도 출발할 준비를 했다.
“심구야, 넌 예친왕부로 가보거라. 지금 심귀가 순포사(巡捕司, 현재의 경찰서와 비슷한 부서)로 가고, 심만이 입궁해 소식을 알아볼 것이다. 예친왕부로 가서 주위를 둘러보거라. 나와 네 아버지는 먼저 입궁하마. 이 일은 아주 중대한 일이다. 만약 첩자가 성안에 들어온 거면 큰일이야. 이번 일로 심가 쪽에 죽은 사람이 생겼다면 은자로 위로하고 보상하렴.”
나설안이 심구에게 분부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시고 맡기세요.”
심구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오라버니.”
심신 부부가 떠난 뒤, 심구가 짐을 급히 챙기려는데 심묘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교? 방 안에 있지 않고 왜 나온 거야?”
“오라버니, 예친왕부로 가려는 거야?”
“응.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빨리 돌아올게.”
그러자, 심묘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나도 데리고 가.”
깜짝 놀란 심구는 고개를 저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너와 예친왕의 원한이 깊은 걸 알아. 하지만 지금 예친왕부에 그런 일이 생겼잖니. 사실 나도 인과응보라 생각해. 네가 그들의 말로를 보고 싶다면 내가 대신 봐줄게. 네가 직접 볼 필요는 없어.”
“난 가보고 싶어.”
심구는 일부러 그녀에게 겁을 주기 시작했다.
“상황이 정말로 좋지 않아. 듣자 하니 어젯밤에 모두 처참하게 죽었다더라. 가슴과 배가 갈라져서 피가 몇 자는 쌓였다고. 억울하게 죽은 자의 혼이 부 안에 남아 있을 거야. 너 같은 어린 아가씨가 가면 혼령을 볼지도 몰라.”
실제로 예친왕부 사람들은 처참하게 죽었으나 심구의 말에는 과장이 섞여 있었다. 심구는 그만큼 심묘가 그런 피비린내 나는 장면을 보지 않길 바랐다. 관가의 여린 아가씨가 사람이 죽은, 그것도 떼로 살해당한 장면을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심묘는 겁먹어 얼굴을 찡그리기는커녕 도리어 웃으며 대답했다.
“나, 장군 집안의 딸이야. 귀신에 놀라면 사람들이 우습게 볼 거라구. 설마 오라버니는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을 만날까 봐 겁나?”
“당연히 아니지!”
심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러니 무서울 리 없어. 오라버니, 날 데리고 가.”
심구는 난처했다.
“그렇지만 너 가서 뭐 하려고? 정말 볼 게 없을 거야.”
“난 그저 가서 보려는 거야. 오라버니가 날 챙길 필요는 없어. 지금 그곳은 관리들이 지키고 있을 터이니 위험하지 않을 거야. 날 데려가. 말썽부리지 않는다고 약속할게.”
심묘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한마디 한마디가 확고했다. 심구는 최근 몇 가지 일을 겪은 후, 그녀의 결정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늘 자신이 데려가지 않으면 다른 날 몰래 갈 터였다. 그럴 바엔 오늘 자신이 데려가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었다.
“그래 좋아. 대신 왕부에 도착하면 함부로 다니지 않겠다고 약속해. 어딜 가든지 모경을 데리고 다녀. 이상한 게 있으면 바로 날 부르고.”
심구는 심묘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말했고, 그녀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좋아.”
* * *
하룻밤 사이 예친왕부는 완전히 변했다. 바로 전날 끊임없이 오갔던 마차의 말발굽 소리와 하객들의 웃는 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붉은색 대문 위에 흰색 봉인 종이가 가득 붙어 있었다. 반만 남은 ‘희’자는 외로이 바람에 흔들리다가 찬바람의 기세를 견디지 못한 듯 마침내 떨어졌고, 그마저도 사람들의 발에 밟혀 짓이겨졌다.
입구를 지키는 이들의 표정은 흉악한 것이라도 나타날까 두려운 기색을 보였다. 주위는 수군거리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의 악행을 모두 알았기 때문에 인과응보라 여기는 분위기였다.
심구 일행은 예친왕부 입구를 지키는 관리에게 방문 이유를 설명했다. 내부의 광경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처참했다. 어제 왔을 때의 경쾌한 호화로움이 오늘의 비참한 고요함과 대조되었다. 부의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은 비통한 일임이 분명했다. 시체는 이미 치우고 없었지만, 어젯밤을 상상하게 하는 핏자국은 여전했다. 온 관저가 적색이었고 밤새 내린 눈도 농후한 피비린내를 덮을 수 없었다.
병사들은 모두 소름 끼쳐 했고 심구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함께 온 심묘가 놀랄까 봐 급히 그녀를 챙기려 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평온했다. 숱한 전쟁을 치른 병사들보다도 더.
심묘는 눈을 천천히 내리떠 선홍색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히려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쓰고 있었다. 적의 피는 기분을 들뜨게 했다. 두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심가의 전생은 이보다도 처참했을 것이다. 그래서 심묘는 슬프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그저…… 예친왕을 직접 죽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