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교교야……. 난 내부를 둘러볼 건데 넌 어떻게 할래?”
심구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심묘를 향해 물었다. 심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예친왕부 서남쪽을 가리켰다.
“어제 왔을 때 예친왕부의 여종이 저쪽에 휴식을 취하는 다실이 있다고 했어. 나 거기 가서 앉아 있을게. 오라버니가 일을 마치면 다실로 날 찾아올래?”
“저쪽?”
서남쪽은 나무가 울창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예친왕이 정원을 감상하려고 특별히 보수한 듯했다. 심구는 알겠다고 말하며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다.
“모경에게 널 따라가라고 할게.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
고개를 끄덕인 심묘는 모경과 서남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핏빛으로 물든 예친왕부를 보고 여종들이 경기를 일으킬까 봐 여종을 한 명도 데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모경은 더더욱 심묘를 안전하게 모셔야만 했다.
‘고작 어제 한 번 오셨는데 길을 어찌 이렇게 잘 아실까?’
모경은 심묘가 모퉁이와 복도, 계단의 위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의아해하며 따라갔다.
잘 꾸며진 다실 입구에는 포도 넝쿨이 걸려 있었다. 여름에 포도알이 맺히면 술을 담가 마시고 꽃 감상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곳이었다. 이 풍치를 그 예친왕이 즐겼다니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밖에서 기다리거라. 나 혼자 들어가면 된다.”
모경이 머뭇거리자, 심묘가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다실일 뿐이야. 불안하면 먼저 들어가 한번 살펴보거라.”
모경은 곧바로 검을 빼 들고 내부를 살피러 들어갔다. 심묘는 그의 뒷모습을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전생과 현생, 신분이 어떠하든 한결같이 그의 신중하고 충성스러운 모습이 무척 고마웠다.
다실은 아주 넓어서 3층으로 나뉘었다. 각 층은 모두 호화로워서 바깥의 우아함과 달리 궁중의 화려함이 드러났다. 모경은 내부에 자객이 숨어 있지 않음을 확인하자, 심묘에게 두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아가씨,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밖에서 지키겠습니다.”
심묘는 모경이 떠난 뒤 가까운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궁중에서나 볼 수 있는 좋은 청화(靑華, 흰 바탕에 남청색의 그림 문양이 있는 도자기) 다기가 놓여 있었다. 심묘는 그것들을 그저 한 번 보고 지나쳤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다실의 3층, 벽에는 그림과 글이 가득 걸려 있었다. 하나하나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방 전체가 천금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심묘는 작품을 하나씩 감상하듯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한 그림 앞에서 멈추었다.
그것은 야연도(夜宴圖)로 전조의 서화 대가인 유원의 손에서 나온 작품이었다. 그림에는 전조 관원부의 아리따운 하녀, 좋은 술과 맛있는 요리, 즐거워 보이는 손님들이 표현됐고 정교하고 화려한 게 그 특징이었다.
심묘는 넋을 놓고 그 그림을 아주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다 한참 뒤 손을 내밀어 그림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녀는 야연도의 주역, 배가 산만 한 관원의 옷자락 끝을 아주 세심하게 매만졌다. 마치 그림 안의 옷자락이 실제로 만져지는 듯했다.
그때, 손가락 끝에 남다른 촉감이 느껴졌다. 딸깍! 작은 소리가 나며 그림이 가득 걸린 벽면이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밀실이었다. 심묘는 짤막한 숨을 내뱉고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횃불이 복도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 * *
밀실 가장 안쪽에는 관이 놓여 있었다. 관은 이미 뚜껑이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예친왕, 그 늙은 개가 드디어 죽었군. 어제 진가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우리는 물건을 찾기 위해 한바탕 우여곡절을 겪었을 거야.”
관 앞에는 사경행과 고양이 서 있었다. 고양은 예친왕의 죽음을 비웃었고, 사경행은 그에 화답하듯 무거워 보이는 명황색 보따리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기다린 거야. 주위에 다른 것도 있는지 다시 봐.”
고양은 곳곳을 살피며 사경행을 향해 말했다.
“이곳은 아주 비밀스러운 공간이야. 그를 제외하면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
“부씨 사람들은 의심이 아주 많잖아. 자네였다면 이곳을 숨기지 않고 그냥 뒀을까?”
사경행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자 고양은 부채를 부치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숨기겠지. 내가 늙은 개라면, 이곳을 발견한 자는 그 누구든 모두 죽일 거야. 죽어야 비밀을 지킬 수 있으니까. 늙은 개가 이것 하나는 잘했구만.”
사경행은 정신없이 곳곳의 물건들을 들추었다.
* * *
그때, 심묘는 손에 횃불을 쥐고 음산한 밀실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 걸음이 느렸지만, 지금은 다소 서두르고 있었다. 심구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 전에 그 물건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예친왕의 이 밀실은 전생에 부수의가 발견한 곳이었다. 심묘는 우연히 부수의와 배랑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었다.
“물건은 밀실 안에 있으니 폐하께서 직접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유원의 야연도를 따라 그렸던 배랑은 부수의에게 예친왕부 밀실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그림 속 주역의 옷자락에 있다고 말했었다. 심묘는 그들이 말하는 ‘물건’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말투로 보았을 때 부수의에게 매우 중요한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심묘는 혹시라도 예친왕부의 사람이 남아 있어 자신을 발견할까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부수의가 그 물건을 차지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심묘가 미리 빼돌리면 부수의를 상대할 때 이기는 패를 하나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터였다. 만약 자신이 사용하지 못한다면 완전히 없애버리든가 부수의의 원수에게 넘겨주는 것이 맞았다. 심묘가 오늘 심구를 따라 예친왕부에 온 목적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는 밀실의 벽을 더듬으며 걸어 나아갔다. 밀실은 생각보다 깊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한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눈앞에 탁 트인 밝은 공간이 나타났다. 마치 비좁은 복도가 넓은 대청으로 바뀐 것 같았다. 바로 동굴이었다. 그곳에는 관 하나가 가로로 놓여 있었고, 그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누구냐!”
심묘가 움직이기 전, 한 사람이 매섭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매우 익숙했다. 그녀가 목소리를 분별하기 전에 밝은 불빛 속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드러났다. 사경행과 고양이었다.
사경행이 어째서 이곳에 왔을까? 고양은 궁중 태의원 사람인데 어째서 사경행과 함께 있지? 냉정하고 차분했던 심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마음속에 생겨난 호기심이 전광석화처럼 뚫고 나올 것 같았다.
“심묘다! 어서 쳐!”
심묘가 제정신으로 본 마지막 모습은 고양의 놀란 표정이었다. 동시에, 그녀의 몸은 힘껏 떠밀렸고 하늘과 땅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흐억!”
가늘고 긴 손가락이 심묘의 목을 움켜잡았다. 사경행이었다. 그는 그녀를 벽에 짓눌렀다. 그의 차가운 옷자락이 심묘의 얼굴 위에 닿았고, 심묘는 그의 불타는 눈동자와 솟아오른 눈썹, 올라간 입꼬리를 마주했다. 그때, 고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묘를 살려줄 수 없네. 이 일은 중요해. 오늘 이곳에서 죽는 건 자기의 운명일 뿐이야. 시체도 이곳에 버려두고 떠나면 발견할 사람은 없어. 마음 약해지지 말고 치게! 어서!”
심묘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을 조르는 아름다운 손가락은 거칠고도 흉악했다. 사경행은 마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요괴 같았다. 그의 표정은 점점 잔인해졌고, 눈빛에서 강렬한 살의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죽일 심산이었다.
심묘는 꼼짝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봄날, 첫눈이 오고 날이 갠 후의 시냇물보다 맑은 눈동자였다. 그 속에는 슬픔도 기쁨도 없고, 다만 사람의 일생을 비출 수 있을 듯했다. 사경행의 눈빛이 그 눈동자에 일순 흔들렸다. 그는 잔인하게 미소 지으며,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눈을 부드럽게 가렸다.
“날 보지 마라. 나도 어쩔 수 없어.”
사경행은 고개를 숙여 심묘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짙은 살의를 띠었다. 동굴 안에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밀실에는 등불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사경행은 갑자기 손바닥 아래가 간질간질하다고 느꼈다. 심묘가 속눈썹을 깜빡이는 건가. 날갯짓하며 날아가려는 나비가 붙잡혀 날아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고양, 나가게.”
고양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가?”
“자네 먼저 나가.”
사경행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
고양은 더는 대꾸하지 않고 물건을 싸서 밖으로 향했다. 그의 발소리가 멀리 사라지자 사경행은 심묘의 얼굴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희고 깨끗한 손바닥을 횃불에 비추자 투명한 물기가 어린 듯했다. 그는 심묘가 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했다.
“울면 뭘 하나. 죽음은 피할 수 없는데.”
하지만 심묘의 수려한 얼굴은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눈물 한 방울, 상심 한 조각도 없었다. 그녀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심묘는 팔꿈치를 들어 올려, 사경행의 가슴을 강하게 찍었다.
퍽! 매섭고 정확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한 방에 뻗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사경행은 살짝 몸이 기우뚱했을 뿐 심묘의 왼쪽 팔을 재빨리 잡아챘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심묘는 사경행의 품속으로 돌진해서 소매 안에 있던 비녀로 그의 팔뚝을 찔렀다.
“윽!”
사경행은 심묘를 벽으로 던져버렸다. 그는 쓰러진 심묘의 목을 다시 조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심부 사람으로 손색없군. 암살도 다 배우고.”
심묘는 사경행의 팔뚝을 바라보았다. 비녀의 반 이상이 팔뚝에 꽂혀 검붉은 피가 금세 그의 소매를 적셨다.
“후후, 독이 있어도 상관없다. 그 전에 내가 널 반드시 죽일 테니까.”
사경행은 눈을 빛내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은 밤하늘의 별을 품은 듯 무척 아름다웠고 무심히 바라볼 때 가장 매력적이었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은 뭇 소녀들이 밤잠 못 이룰 만큼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심묘는 그 고혹적인 외양 뒤에 숨긴 냉혹함과 잔인함을 알고 있었다.
사경행은 파악하기 힘든 복잡한 사람이었다. 능력은 걸출하지만 온 세상을 무시하는 오만불손한 성격을 지녔다. 그래서 그가 벼슬길에서 활약하도록 만들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심묘는 의심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과연 그 사경행이 진짜 사경행일까. 확실히 사납고 흉악해 보이지만, 이렇게나 깊이 자신을 숨기고 있었다. 정말 모든 것에 무심한 걸까.
사경행은 그녀가 이 순간에도 딴생각에 빠진 게 불만인 듯 몸을 기울였다.
“심묘, 오늘 내가 널 죽이면 심가의 미래도 사라진다.”
심묘가 눈을 들어 사경행을 바라보자 그가 잔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방, 삼방이 연합한 데다 심원까지 돌아왔으니 심신에게 승산이 얼마나 있을 것 같아?”
그는 심묘의 목을 더욱 세게 죄며 말을 천천히 이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심묘의 치명적인 약점을 겨누고 있었다.
“황실은 심가를 호시탐탐 노리니, 심신은 발을 내딛기 어려울 거야. 네가 계획하고 있는 일은 오늘 내 손으로 끝내주겠어. 복수는 내세에서나 하거라.”
그의 표정이 점점 흉악해질수록 얼굴은 오히려 수려해 보이니, 심묘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람 마음을 완전히 파악한 듯 심묘가 가장 걱정하는 일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심묘는 이번 생을 다시 살며 심가가 평안 무사하길 바랐다. 모든 계획은 원수를 갚고 원한을 풀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지금 목숨을 잃는다면 모든 게 끝나버리는 것이다.
사경행의 눈빛에서는 일말의 동정이나 연민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진정 냉혹하며 무정했다. 그녀의 신분을 떠나, 고양과 사경행의 관계를 알게 되었으니 결코 무사히 돌려보낼 순 없었다. 심묘도 이를 잘 알기 때문에 기를 쓰고 사경행을 기습한 것이었다.
그 순간, 심묘의 눈앞에 완유와 부명의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심묘는 눈을 크게 뜨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깊은 슬픔이 몰려왔다. 아이들의 복수를 채 하지 못한 채 이곳에서 죽는다면, 내세에서도 아이들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사경행은 그녀의 눈물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눈물로 동정을 얻으려는 허튼수작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심묘가 얼마나 잔인한 수단을 서슴없이 쓰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경행이 무반응으로 일관해도 심묘는 계속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의 눈빛에 동정을 바라는 약한 모습은 없었다. 먼 곳을 보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경험하지 못한 고통을 겪은 듯 크고 깊은 비통함과 처량함이 담겨 있었다.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심묘의 목을 잡았던 손에서 힘을 점점 풀다가 아예 그녀의 목에서 손을 뗐다. 심묘는 상심에 빠져 그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사경행은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린 여자아이를 이유 없이 괴롭힌 것 같은 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심묘와 ‘어리다’라는 말은 조금도 어울리지 않건만. 그는 팔뚝 위 비녀를 뽑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자 심묘가 그를 보았다. 사경행은 그 눈빛에 갑자기 어색해진 듯했다.
“울지 마. 널 죽이지 않을 거야.”
그는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널 위협했을 뿐이야.”
심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사경행이 위협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방금까지 그는 흉흉한 살기를 내뿜었었다. 그의 마음이 여려진 것은 그녀의 눈물 때문이리라. 여자의 눈물로 약해질 사람이 아닌데, 무엇이 사경행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심묘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어떻게 이곳을 발견했지?”
“집안의 삼숙이 유원의 야연도를 모사한 걸 본 적 있어요. 그 그림을 무의식중에 더듬다가 이 밀실을 발견했어요. 호기심으로 들어온 건데, 당신들을 만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네요.”
사경행이 웃는 듯 마는 듯 그녀를 보았다.
“심만?”
심묘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네.”
“난 진가 형제가 아니다. 날 네 칼로 이용하려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사경행이 나른하게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심묘가 심만을 음해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었다.
“오늘 난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그 무엇도 듣지 않았으니 난처하게 하지 말아주세요. 나도 당연히 당신을 난처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 서로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해요.”
심묘는 그를 보았다.
“너도 날 난처하게 하지 마. 오늘 내가 네 목숨을 살려주었다는 것만 잊지 마. 만약 이 일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면 심가가 재수 없는 일을 당할 테니, 그땐 날 탓하지 마.”
사경행의 사납고 고집스러운 말투는 원망을 사고도 남았다. 하지만 심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빠르게 대답했다.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적절히 물러나는 모양에 만족한 듯 사경행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심묘, 넌 부씨 사람에게 원한이 있느냐?”
그는 ‘황실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부씨 사람’이라 말했다. 그렇게 표현한 의도도 있었다. 심묘는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대답했다.
“소후야가 그렇게 느끼면 그런 것이지요.”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과연 그렇군. 이제 여기에서 볼일은 끝났으니 너 먼저 가거라. 이곳에 오래 있어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면 나도 널 구할 수 없어.”
심묘는 지체 없이 몸을 돌렸다. 그녀는 임안후부 소후야가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를 이용해서도, 그로부터 미움을 사서도 안 된다. 사경행의 적 역시 명제 황실이라면 자신도 당연히 이익을 얻을 테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를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심묘가 두 걸음 정도 걷자, 사경행이 곧바로 뒤를 따랐다. 그는 긴 다리로 빠르게 심묘를 따라잡았다. 그는 심묘에게 약병을 던지며 말을 건넸다.
“내가 널 괴롭혀 울렸다고 말하지 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간 사경행은 심묘보다 먼저 그 자리를 떠났다.
어두운 횃불 아래 심묘의 얼굴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그녀도 위험한 수를 쓴 셈이었다. 전생에서 그녀가 진국에서 돌아와 미 부인과 총애를 다투던 시기, 지나치게 강경하고 곧았던 그녀의 성격을 보고 누군가가 조언한 바가 있었다.
“마마는 종일 단정하고 엄숙하십니다. 모의천하(母儀天下)라지만 폐하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미 부인은 온유하고 교태가 넘치지요. 우는 아이가 사탕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도 같은 도리라 남자는 물 같은 여자를 아낍니다.”
그때 심묘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행동으로는 상류사회에 오를 수 없었다. 게다가 일국의 황후인 자신이 어찌 일개 첩의 울고 웃는 아첨을 똑같이 따라 해야 한다는 말인지 기가 찼다. 하지만, 사경행의 적의를 느낀 심묘는 갑자기 이 ‘우는 아이가 사탕을 먹는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지금 심묘는 어렸다. 생긴 것도 여리고 천진했다. 더욱이 황후의 옷을 입고 있지 않으니 애교를 부린다면 만인의 심장이 녹아내릴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성격이 강경해 자신조차 남자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사태가 벌어지자 그 꿈에서도 생각 못 한 일이 현실이 되었고 덕분에 사나운 성격의 사경행이 그녀를 살려주었다.
심묘는 기억을 더듬으며 밀실 밖으로 나왔다. 다실에는 사경행과 고양은 물론이고 누구의 자취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가 다실을 나오니 모경이 보였다.
“방금 안에서 나온 사람이 없느냐?”
모경은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람이요? 안에는 아가씨뿐 아니었습니까? 안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셨습니까?”
“아니, 그냥 물어본 거네.”
심묘는 살짝 웃으며 사경행의 능력을 또 한번 높게 평가했다.
“그나저나 오라버니는 어째서 아직도 안 오는 거지? 오라버니를 찾으러 가자꾸나.”
모경은 심묘가 무엇 때문에 심구를 찾으러 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좀 전만 해도 다실에서 심구를 기다리겠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갑자기 찾으러 나서자니 종잡을 수 없는 동선이었다. 그러나 그는 심묘에게 따져 묻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알겠노라 대답하고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심묘는 고개를 돌려 다실의 꽉 닫힌 대문을 바라보았다. 사경행과 고양이 아직 저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늘 그녀는 그 ‘물건’을 위해서 왔다. 그런데 그 ‘물건’이 사경행의 손에 떨어질 줄이야. 심묘는 그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전생과 비교하면, 사경행은 밀실을 발견하지 못했어야 했다. 혹시 현세의 변화가 사경행의 운명도 변화시킨 건지 아니면 자신이 전생의 진상을 소홀히 파악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의문은 심구를 만나 심부로 돌아올 때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심구는 심묘가 예친왕부를 나온 후 멍하니 넋을 잃고 있자 그녀가 예친왕부를 온통 피로 물들인 참상에 놀란 거라 여겼다. 그래서 그는 귀가하자마자 심묘를 위한 탕을 끓이라는 분부를 내렸다. 나설안은 위험한 곳에 어린 여동생을 데려갔다며 심구를 혼내고 심묘를 걱정했다. 심구는 억울했지만 심묘는 그의 억울함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른 생각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고양은 사경행의 상처에 분개했다.
“그 계집애의 수완이 정말 흉악하군.”
사경행은 겉옷을 벗었다. 옷깃을 느슨히 하자 튼튼하고 굳센 몸이 드러났다. 비녀에 찔린 상처는 꽤나 깊어서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고양은 눈을 크게 뜨고 사경행의 상처를 꼼꼼히 살폈다.
고양이 약을 발라주는 동안, 사경행은 심묘의 비녀를 가지고 놀기 바빴다. 손안의 비녀는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은비녀로 장식 역시 파도무늬가 세공된 평범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녀의 끝은 유달리 날카롭고 뾰족했다. 암살용 은침과 비슷했다. 게다가 끝이 구부러져 갈고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런 비녀로 사람의 몸을 찌르면 쉬이 심한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사경행의 깊숙이 찢어진 상처가 바로 그 증좌였다.
“심신 일가는 도량이 넓고 마음 씀씀이가 담백하던데, 어찌 그 계집애는 그렇게도 악랄한 건가. 심신의 딸 같지 않아. 아이가 포대기째로 바뀐 거 아닌가? 이리 사정없이 공격하다니.”
고양이 가루약을 뿌리자 사경행이 미간을 찡그리고 숨을 내뱉었다. 고양은 언짢았다.
“아파도 참게. 나는 자네가 여자라고 해서 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런데 오늘 무슨 일인가? 심묘가 그런 중대한 상황을 목격했고, 자넬 다치게 했는데도 그냥 보내다니. 말해보게.”
고양은 진중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자네 정말 심묘에게 반한 건 아니지? 심묘는 아직 애일세. 대체 뭘 하려는 건가. 미친 겐가.”
그러자 사경행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대꾸했다.
“그만해. 어린 애를 괴롭힐 만큼 나도 그리 양심이 없지는 않아.”
그 말에 고양은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
“자네, 이전에는 어린 애들을 괴롭히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군. 갈수록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그는 사경행과 설전을 벌이면서도 상처에 붕대를 세심히 감아 주었다.
“자, 그래도 물건이 손에 들어왔군. 다음은?”
“다시 찾아.”
사경행의 명령에 고양은 눈살을 찌푸렸다.
“부가 쪽 사람이 조만간 알게 될 거야. 사실 난 심묘가 밀실을 알고 있었다는 게 가장 이상해. 심묘가 부가 편이면 넌 발각될 거야.”
그러자 사경행이 대답했다.
“심묘는 부가와 원한이 있어. 내 손을 빌려 적을 죽이지 못해 아쉬울 거야. 밀실을 찾은 건 우연이라고 하지만.”
사경행의 눈빛은 잘 벼린 칼날처럼 예리했다. 심묘는 우연히 밀실을 찾았다고 말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심묘는 목적이 있을 때만 행동했다. 그녀가 심청과 예친왕에게 대응하는 걸 보고 진작에 알아차린 부분이었다. 소용없어 보이는 물건도 최후에는 의외의 효용을 가졌다. 사경행은 심묘가 예친왕을 상대한 이유가 ‘물건’ 때문일 거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심묘가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사경행과 고양조차도 ‘물건’에 대해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런데 일개 규방 여인인 심묘가 그런 불편한 것들과 비밀을 공유하다니. 그녀가 알고 있는 비밀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을 것만 같았다.
“하여간 조심하게. 게다가 지금 심묘는 내 신분을 알고 있으니 앞으로 어떤 변화가 생길지 모르네.”
고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처를 싸매고 남은 붕대와 약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사경행은 깊은 상념에 잠긴 듯 등불 빛에 반짝이는 비녀를 바라보았다. 밀실 안에서 심묘가 눈을 크게 뜨고 소리 없이 울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경행은 결코 여자를 아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심묘에게 다른 감정을 품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도 말로 표현 못 할, 참을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 기분은 비정한 자신의 경계를 뚫고 정신을 일순 흔들어놨다. 지금은 후회가 몰려왔다. 약 바른 상처도 아리고 아팠다. 심묘가 인정 없이 비녀를 찔러 넣을 때 빠르게 피하지 않았다면 얼굴에 깊은 상처가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묘가 눈물을 흘린 것은 단지 순간의 기지일 수도 있었다. 사경행은 그녀가 간사하리만큼 매우 영민한 사람임을 알았다. 방어를 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잔꾀를 부리다니. 그러나 그녀의 약한 모습을 보자 살려주고 싶었다.
사경행은 다시 한번 손에 쥐고 있던 은색 비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심묘의 눈을 손으로 덮었을 때 손바닥 아래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듯 간질간질했던 감촉이 떠올랐다. 그 기묘한 감각 역시 동정을 품게 유도했다.
“독한 것.”
말과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등불 아래 소년의 수려한 용모가 빛나고 있었다.
“마음이 여려지면 안 돼.”
* * *
송경당.
심 노부인이 침울한 얼굴로 심귀를 보며 말했다.
“그럼 심청을 꺼내올 방법이 없는 것이냐?”
심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친왕부가 하룻밤 사이 멸문당했는데 심청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의문스러운 점이 많아 재심사한답니다.”
노부인은 걱정스러운 듯했다.
“큰일이네. 폐하께서 우리를 책망하지는 않으실지. 심청은 어찌 된 것이야? 정말 아무 잘못이 없는 것이냐?”
그녀는 심청이 매우 의심쩍은 듯했다. 그녀의 말투에 의혹과 질책, 그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임완운은 노부인 앞으로 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곁에서 심청의 성장을 지켜보시고도 그 성격을 모르십니까? 심청이 어찌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게다가 또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런 대단한 사람과 관계가 있을까요? 심청은 그저 운이 좋아 목숨을 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심청에게 미안한 일을 했으니 절대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임완운은 노부인과 여러 해 고부지간으로 지냈기에 그녀의 성격을 잘 알았다. 노부인은 뼛속 깊이 이기적인 사람인지라, 형세에 따라 그때그때 서슴지 않고 태도를 바꾸었다. 자기가 위험할 것 같으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심청을 버릴 사람이었다. 임완운은 심귀가 양심 없는 사람인 게 노부인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종종 생각할 정도였다.
노부인은 임완운의 말을 듣고 분노했다.
“네 말은 이상하구나. 우리가 언제 심청에게 미안한 일을 했느냐? 내가 그 아이에게 예친왕과 사통하라 핍박했더냐, 염치도 모르게 아이를 품으라 핍박했더냐? 난 그 아이에게 그리 가르친 적 없다!”
가녀 출신인 노부인은 저잣거리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흥분하면 곧잘 괄괄하게 말했다. 임완운은 선을 넘은 노부인에게 분노했다.
“어머님! 심청에게 어찌 그렇게 말씀하시나요? 그 아이는 어머님의 손녀입니다!”
진약추가 임완운을 말렸다.
“형님, 말을 삼가세요. 어머님도 심청이 걱정되고 화나셔서 하신 말입니다. 어머님께서 가장 아끼신 손녀가 심청이란 걸 모르는 이가 없는걸요.”
얼핏 들으면 가장 좋아한 손녀 역시 헌신 버리듯 가차 없이 버리니 노부인의 이기적인 성격은 확실히 멸시할 만하다고 진약추가 간접적으로 욕하는 듯도 했다. 심신과 나설안은 이 상황을 오히려 즐겁게 바라보며 말을 아끼고 있었다.
심원은 진약추를 바라보았다. 침울한 그 눈빛에 두려워진 진약추는 말을 멈추고 입을 닫았다. 그는 임완운의 곁으로 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조모, 조급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직 일은 손을 못 쓸 지경은 아닙니다. 지금 동생은 의심을 받을 뿐 죄를 선고받지 않았습니다. 여동생은 이 일과 무관하니 시일이 지나면 진상이 드러날 것입니다. 저도 철저히 조사해서 여동생이 이유 없이 누명을 쓰는 걸 막겠습니다.”
노부인은 가장 자랑스러운 손주인 심원의 말에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곁에서 매일 재롱을 떠는 심원백을 제일 총애했으나, 어린 나이에 능력이 탁월한 심원도 매우 아꼈다.
“그렇다면 네가 조사해보거라. 당연히 나도 심청이 사건과 무관해 곧 풀려나오길 바란다.”
그녀는 임완운을 보며 냉소했다.
“오히려 네 어미가 정신이 좀 이상한 것 같구나. 정신이 맑지 않으면 외출하지 말고 부 안에 있거라. 말썽부리지 말고.”
임완운은 원망과 분노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노부인은 자신에게 불만을 가진 것처럼 행동했다. 그 불만은 점점 커져 자식들 앞에서도 치욕을 겪게 했다. 진약추 역시 비꼬는 시선으로 임완운을 바라보았다.
심원의 부축을 받아 채운원으로 돌아온 임완운은 한숨을 돌렸다. 그녀는 심원의 팔을 잡았다.
“심원아, 방법을 찾아 네 동생을 구해다오. 심청이 어디 그런 능력이 있느냐, 어찌 그렇게 흉악한 짓을 하겠느냐고!”
심원이 그녀를 위로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심청은 누명을 쓴 것이니 조사해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지금 이 사건의 진범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진짜 흉수를 찾으면 심청의 누명도 당연히 벗겨질 겁니다.”
임완운은 목숨을 구해줄 지푸라기를 잡은 듯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그 흉수는 언제 찾을 수 있느냐? 심청은 얼마나 갇혀 있어야 하느냐? 언제쯤 풀려날 수 있느냔 말이다!”
심원은 빠르게 말을 내뱉는 임완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안색이 몹시 초췌했다. 그녀는 한참 전부터 화장을 하지 않아 피부는 칙칙하고 검버섯도 보였다. 머리카락도 헝클어져 예전의 섬세하고 단정한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임완운은 한평생 용모와 부귀를 중요시했건만, 지금은 구질구질한 모양새였다.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모두 머저리라고 불리던 심묘 때문이었다.
심원은 골치가 아팠다. 거만하고 날카로운 성격을 가진 그는 부로 돌아올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수습하기 어려운 국면에 처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부 안에서 임완운의 지위는 급격히 떨어졌고, 심청은 시집을 가기 전에 아이를 갖더니 지금은 또 예친왕부의 멸문 사건에 휘말려 있었다.
그는 갑자기 심청의 출가 날 심묘와 나눈 말이 떠올랐다.
“세상일은 누구도 분명히 말 못 하지. 사람의 일은 예측하기 어려워. 하지만 바로 눈앞에 길이 없는 것은 아니야.”
말마따나 사람의 화와 복은 언제 올지 모르고, 눈앞에 반드시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심청의 눈앞에는 정말로 길이 없었다. 길이 있어도 그 여정은 아주 고달플 것이었다. 멸문당한 예친왕부에서 그녀 혼자만 살아남았으니. 심원은 범인이란 놈이 마음이 여리거나 동정심에 심청을 살려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멸문에 휘말려 그 자리에서 살해당하는 것과 사건에 연루되어 살인 교사라는 죄명을 품고 죽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범인은 고의로 심청을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심청은 어렸다. 누가 이렇게 흉악하게 손을 쓴 거지? 심묘일까? 심묘를 의심하던 심원은 고개를 저었다. 성정이 흉악하다고는 하나 그 많은 자객을 부려 예친왕부 사람을 모두 죽일 능력은 없을 터였다.
심원의 눈빛은 더욱 가라앉았다. 배후가 심묘이든 아니든 간에 이 일은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 그 사람이 심청을 겨눈 것은 심가 이방을 겨눈 것과 마찬가지였다. 처한 상황이 곤란해도 출로가 없는 정도는 아니니, 그는 반드시 배후를 찾아내 천 배로 되돌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심묘의 말처럼 세상일을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다음 날, 그의 길 역시 완전히 막다른 길이 되었다.
* * *
온 성안은 예친왕부 멸문 사건 이야기로 왁자지껄했다. 제각각 서로 다른 추측으로 시끄러웠고, 삽시간에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점점 터무니없어졌다. 갓 예친왕비가 된 심청에게는 사실 다른 정부가 있었는데, 그녀의 혼례에 분노한 정부가 예친왕부를 몰살한 거라는 둥 유언비어는 아주 화려하고 허다했다.
예친왕부가 하룻밤 사이 멸문된 것은 심가 짓이라는 유언비어도 돌았다. 심가가 예친왕부를 멸문한 이유를 백성들은 생각나는 대로 떠들어댔다. 이 소문은 처음엔 단순히 심청과 심청 가족들만 비웃고 있었지만, 어느새 거대한 음모가 되어 심부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예친왕부 내에 작은 짐승조차 살아남지 못했는데 막 시집온 새신부만 남은 예친왕부의 멸문 사건. 이 신부는 무슨 덕이 있어 흉악한 범인이 그녀만 그냥 두었을까. 그녀에게 다른 이유가 있다면? 범인이 심부 사람이라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하지만 심부가 무엇 때문에 예친왕부를 무너뜨렸을까? 표면상으로만 보면 혼사에 불만을 품어서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깊이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지금 조정은 암류가 용솟음치는 시기였다. 심가가 이렇게 한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른 것인지, 무언가를 표명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백성들은 이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조정의 노련한 관료들은 놓치지 않았다. 심가는 격렬한 투쟁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이른 아침, 백로와 상강은 심묘의 요깃거리를 구하러 갔다. 현재 심부는 예친왕부 멸문 사건 외에 다른 일을 처리할 여력이 없었다. 주방에서 준비하는 하루 세 끼도 그저 그랬다. 송경당만 빼고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끼니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서원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여종들은 음식을 사러 매번 외출했다.
아침밥을 먹은 심묘는 머리를 빗고 얼굴을 씻었다. 그녀는 겨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라버니가 보내온 호피(狐皮) 목도리를 가져오너라.”
“그 목도리를 하시려구요?”
곡우가 상자에서 목도리를 꺼내 둘러주려 했으나 심묘는 이를 저지했다.
“내가 할게.”
목도리는 다른 털은 전혀 섞지 않고 오직 흰 여우 털로만 만든 진귀한 물건이었다. 심구가 서북 산림에서 직접 흰 여우를 사냥해 심묘에게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심묘가 한 번도 찾지 않는 바람에 여태 상자에 들어 있었다. 어떤 바람이 분 건지는 몰라도 예쁜 털가죽이 상자 안에서 빛을 보지 못해 애석해하던 곡우는 기뻤다.
“아가씨, 이 목도리를 하시니 한층 아름다우세요. 따뜻해 보이고 아주 좋네요.”
심묘가 목도리를 두르자 곡우는 진심으로 찬탄했다. 심묘는 살짝 웃으며 손가락으로 가볍게 부드러운 모피를 쓸었다. 좀 전 거울에 비쳐 보니 목에는 푸른 멍이 있었다. 사경행이 그녀의 목을 졸라 남은 흔적이었다. 당시에는 신경 쓸 여유도 없었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나, 오늘은 유달리 멍 자국이 뚜렷해 보였다. 겨울에 입는 옷의 옷깃이 높지만 자칫 다른 사람이 볼 수도 있었다. 만약 나설안과 심신이 알게 된다면 일을 어렵게 만들 터였다. 일을 하나 늘리는 것은 줄이는 것만 못하니 목을 가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심묘는 목도리를 한 채 밖으로 나갔다. 심구가 뜰 안 나무 아래 서서 호위에게 무언가 분부하는 게 보였다. 심구의 호위는 모두 군에서 차출한 사람으로 보통 호위와는 달랐다. 그들은 모두 용맹스러운 기백이 돋보이는 자들이었다. 심구는 심묘를 보고는 웃음으로 맞이했다.
“무슨 일 생겼어?”
심묘는 인사 대신 물었다. 서원에서 가장 좋은 건 광활한 뜰이었다. 예전에는 심신과 심구가 뜰에서 대련을 했었고, 가끔 나설안도 흥이 일 때면 끼어들기 일쑤였다. 심구가 정경성에서 지낼 때는 매일 아침 뜰에서 검술과 창술을 연습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가 연습을 하고 있지 않으니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왜 이리 일찍 나왔어. 더 자지 않고?”
그의 서투른 화제 전환에도 심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심청 언니와 심부를 위한 일이야?”
심구가 얼른 헛기침을 하며 심묘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하인들을 모두 물리고 문을 걸어 잠그고서야 입을 다시 열었다.
“심묘야, 이 말은 밖에서 하면 안 된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심구가 머리를 긁적였다.
“큰일은 아니야. 부모님과 내게 맡기면 돼. 넌 며칠 동안 외출하지 말고, 이 일에도 상관 마.”
심구는 심묘를 속여 넘기려 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심묘는 심구를 똑바로 주시했다.
“됐어, 오라버니. 날 속일 필요 없어. 예친왕부 멸문으로 심청 언니를 의심하더니, 지금은 심가를 의심하는 거지?”
심구는 심묘를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앞에 서면 오라비로서의 위엄은 바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 멍청한 심묘가 남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할까 비웃음을 사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이제는 똑똑해진 심묘가 그를 속수무책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녀는 심구가 말이 없어진 걸 보고는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 이 일로 걱정인 거지?”
심구는 정색했다.
“심묘야, 넌 아직 어려서 조정의 일을 몰라. 이 일은 간단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 배후에서 중상모략하려는 사람은 더한 것을 원해. 자칫 잘못하면 심가 전부가 연루될 거야.”
그는 심묘를 바라보고 말을 멈췄다가 잠시 후 망설이며 물었다.
“예친왕부 사건, 넌 아는 게 있어?”
하지만 그는 그럴 리 없다는 듯 빠르게 말을 더했다.
“너는 당연히 모르겠지. 규방 소저가 어디 이런 큰 능력이 있겠어?”
심구는 심묘에게 이방과 예친왕이 함께 음해하려고 했다는 일을 들은 후부터 줄곧 분노를 삼키지 못했다. 심묘가 부모님께 말하지 못하게 하지 않았다면, 경솔하게 행동하지 못하게 핍박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복수를 하러 갔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심묘는 그에게 알아서 처리할 방법이 있다고 했었다.
그 후 이방은 불운의 시기를 만난 듯 줄곧 운수가 사나웠다. 만약 회조연에서의 심청의 임신 발각과 예친왕부의 혼사가 모두 심묘의 수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면, 심구는 매우 놀랄 게 분명했다. 이번 예친왕부 멸문 사건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심구뿐 아니라 심신도 한바탕 난리를 부릴 게 뻔했다.
그러나 심묘는 어린 아가씨였다. 가능할 리 없었다. 하지만 심구는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예친왕부와 심묘 사이에 원한이 있어서…… 심묘가 이 일을 초래한 거라면?
“오라버니, 날 의심하는 거야?”
심묘는 심구를 보고 탄식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교교야, 내가 어떻게 널 의심해. 어린 너한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거야.”
심구는 서둘러 반박했다. 심묘를 화나게 할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심묘는 그의 조심스러운 표정을 보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심구에게 사실대로 다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비롯해 심신 부부는 솔직하고 담백하며 선량하고 충의가 남다른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악랄한 술수가 자신의 손에서 나온 것을 알면 매우 고통스러워할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심구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난 그런 능력이 없어. 그러니 오라버니도 날 의심할 필요 없고. 그렇지만 오라버니가 지금 걱정하는 일에 너무 신경을 쏟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심구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세상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야. 고작 몇 마디 유언비어 때문에 죄를 선고하겠어? 정말 죄를 지었다고 판결하려면 확실한 증좌가 필요해. 심청 언니와 우리 대방이 무슨 관계가 있지? 평소 부모님은 부에 안 계시니까 우리에게 뭐라고 할 수 없을 거야. 지금 백 가지 혼란이 있어도 우리는 걱정할 필요 없어. 당연히 ‘영리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할 거니까.”
심구는 의심스러웠다.
“영리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니, 그게 누군데?”
그때, 바깥에서 백로가 크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둘째 공자님, 어떻게 오셨나요?”
“봐봐. 영리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왔네.”
심묘는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머금었다. 심구가 빠른 걸음으로 나가 보니 입구에는 심원이 서 있었다. 그는 평소 자신의 모친처럼 용모를 중시했는데 밤새 고생한 듯 초췌해 보였다. 심구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온 심묘를 향한 그의 얼굴에서는 예전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고 침울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심묘, 할 말이 있으니 단둘이 얘기 좀 하자꾸나.”
“내 동생은 너랑 할 말 없어.”
심구가 심묘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내 동생’ 세 글자를 강조했다.
“오라버니, 괜찮아. 나도 둘째 오라버니와 얘기하고 싶었어.”
“교교야.”
심구는 다급해서 자칫 “심원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라는 말을 당사자 앞에서 내뱉을 뻔했다. 심묘는 그런 그의 팔을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 안심이 안 되면 입구에서 지켜줘.”
“그래, 그럼 난 입구에서 지키고 있을게.”
심구는 얼른 대답했다.
두 사람의 모습에 심원의 안색은 더욱 검푸르게 변했다. 심구는 전부터 자신을 싫어했지만, 여태 표면상으로는 늘 온화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날카롭게 맞서고 있었다. 심원은 대부분의 일을 시작할 때 정해진 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고 믿었다. 이번 일도 그러리라 생각했지만, 길에서 벗어나는 바람에 도착점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 심묘 때문이었다. 그녀가 심가의 가장 큰 변수였다.
심원이 심구를 냉랭하게 한 번 바라보았다.
“큰형은 입구나 지키시지.”
그는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심묘도 사람들의 걱정하는 시선을 뒤로 하고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심묘가 문을 천천히 닫고 고개를 돌리자 심원의 우울한 표정이 눈앞에 있었다.
“네가 한 거지?”
그의 말투가 너무 확고해서 심묘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오라버니는 무슨 일을 말하는 건가요? 예친왕부 멸문 사건? 아니면 유언비어로 여론이 분분한 거요?”
“모두 네가 한 거 아니야? 내가 널 얕잡아 봤군.”
심원은 냉소했다.
“오라버니가 날 과대평가한 것 같네요. 난 그런 큰일을 벌이고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없어요. 그럴 능력도 없고요.”
심묘는 그의 냉소에 개의치 않고 대꾸했다. 그러자 심원은 그녀를 위아래로 살피기 시작했다.
“너 지금 아주 즐거운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는지는 나도 관여할 수 없지요. 오라버니가 그렇게 여긴다면 나도 해명하기 싫어요. 어차피 날 믿지 않을 테니까요. 엄하게 질책하려고 온 것은 아니겠지요?”
심원은 참고 참았다. 심묘의 웃는 얼굴은 구름처럼 담담하고 바람처럼 가벼웠다. 그녀의 입꼬리는 굽어져 호를 그렸다. 두 눈은 물처럼 맑고 투명해 난처한 그를 담고 있었다. 심원은 늘 자부심이 대단했던 만큼, 고작해야 계례도 되지 못한 계집아이의 음흉한 수완에 당했다는 소식에 급히 수도로 돌아온 것만 해도 몹시 언짢았다. 게다가 그렇지 않아도 수렁에 빠진 형편에 또 다른 일이 벌어졌으니, 적을 얕본 게 후회됐다.
“넌 심부를 연루시킬까 두렵지 않으냐? 이러면 백부 일가에게도 좋지 않아!”
심원이 표독스럽게 다그쳤다. 심묘는 웃긴 이야기를 들은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오라버니의 말은 너무 이상하네요. 이 일이 심가와 관련 있어도 우리 대방과 무슨 상관이죠?”
심묘는 그의 분노가 폭발할 때쯤에서야 그녀에게 이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내 부모님과 오라버니는 1년 내내 서북에 있었고, 어린 내가 그런 큰일을 벌였다고 하면 모두 웃을 거예요. 심가가 정말 연루된대도 대방은 깨끗이 벗어날 수 있어요.”
심원은 몸서리쳤다. 그도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집에만 머물고 있는 심묘가 아무리 똑똑해도 조정 일은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조정은 남자들의 천하였다. 심부 안에 있는 그녀가 어떻게 조정 정세를 파악할지 의문스러웠는데, 지금 그녀의 비꼬는 말투를 보니 그 누구보다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심원의 안색이 변했다.
“너 일찍부터 수가 있었구나. 너희 대방은 도울 마음이 없었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집안일에 느긋하게 마음 쓸 여유가 없어요. 그렇지만 숙부들은 잘 해명할 거예요. 가장 걱정해야 할 사람은 둘째 오라버니죠.”
심묘는 고개를 흔들며 매우 애석한 척 가장했다.
“막 정경성에 돌아와 부임했는데, 이런 일을 맞닥뜨리다니. 오라버니의 앞길이 막혔네요.”
그녀는 일부러 말의 높낮이를 다채롭게 했다. 근래 심신과 함께 지내며 침착하게 상대를 분노하게 만드는 방법을 배운 덕분이었다. 더욱 화가 치민 듯 심원은 두 주먹을 팽팽하게 쥐었다. 심묘는 자신의 부드러운 목도리를 쓸어내리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내게 한 가지 생각이 있는데 긴박한 상황을 풀 수 있을 거예요. 모두 심씨 성인 걸 봐서 말씀드릴게요.”
“네 방법은 사용하지 않을 거야. 목숨이 달아날지도 모르니까.”
심원이 그녀를 주시했다.
“오라버니는 농담도 참. 내가 어디 그렇게 무섭다고 그래요. 성심성의껏 생각해낸 거예요. 하지만 오라버니는 명석한 사람이니 이미 알고 계실까 봐 걱정이네요. 심가가 연루되어도 심가가 그 안에서 벗어나면 될 일 아닌가요? 오라버니도 알 거예요. 유언비어는 진실이 아니지만 오래 퍼지면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는 걸요. 그러니 지나가는 소문으로 만들어야 해요. 그 방법은 심청 언니에게 달렸겠죠.”
심묘가 창밖을 바라보며 담담히 웃었다.
“모험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너!”
심원은 주먹을 내질렀지만, 주먹은 심묘의 입가에서 멈추었다. 그는 심묘를 주시하며 말했다.
“이 나이에 벌써 이렇듯 악독한 마음씨라니. 내 평생 처음 보는구나!”
그 순간, 심묘의 눈 속에 만족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피차일반이에요. 생각해봐요, 심청 언니는 오라버니의 미래를 위해 그 일을 한다고 할까요?”
그녀의 웃음은 온화했다.
“동의할 것 같네요. 결국 친남매니까.”
갑자기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심청 언니는 원하지 않을 거예요. 심청 언니는 자신을 가장 아끼는걸요. 오라버니에게야 장래를 위한 일이지만, 심청 언니에게는 생명이 걸린 일이잖아요.”
“심묘, 너에게 매번 행운이 오지는 않을 거다.”
심원은 이를 갈았다. 심묘의 피부를 산 채로 벗기지 못해 한이 맺힐 정도였다. 그는 이제야 임완운이 무엇 때문에 심묘에게 그토록 발광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을 뼛속까지 미워하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심묘가 다시 한번 그를 바라보았다.
“매번 행운이 따를지는 알 수 없죠. 그런데 오라버니에게 지금 탈출구가 없단 건 분명하네요.”
심원은 문을 거칠게 발로 차서 열고 떠났다. 놀란 심구가 방으로 바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심묘가 무사한 걸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어째서 저렇게나 화가 났어?”
“여동생이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는데, 자신은 힘을 쓸 방법이 없으니 자책하는 것 같아.”
뒤로 돌아서 있던 심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피풍의를 집어 들었다.
“외출하려고?”
“심청 언니가 감옥 안에 있는데, 한번 가봐야지.”
심묘는 살짝 웃었다.
“우린, 자매잖아.”
* * *
정경성 안에 이런 큰일이 있다면 풍선전당포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림강산 누각. 홍릉이 계우서에게 간식을 건네고 물러갔다. 계우서는 간식을 한입 먹고는 곧바로 뱉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뭐야, 정말 맛없네.”
그는 얼굴을 내밀어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형, 형네 요리사를 며칠만 빌려줘.”
“꺼져.”
고양은 차를 마시며 그들을 슬며시 바라보았다.
“지금 성 전체가 예친왕 일 이야긴데 간식을 먹을 여유가 있나? 계우서, 자네 정말 대단하군.”
그러자 계우서가 품위 있게 옷깃을 정리했다.
“너무 놀랄 필요 없어. 난 줄곧 이렇게 뛰어났으니까. 게다가 예친왕부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야. 내가 왜 간식을 못 먹어야 하지?”
고양은 그를 일깨웠다.
“진가 형제가 손쓰는 데 있어 선결 조건이 바로 풍선전당포가 소문을 내는 거였잖아. 잊지 말게. 무슨 자객이니 반란이니, 자네가 만든 소식이 적지 않아.”
“그 소식을 만들라고 한 사람은 심묘야. 심묘가 간식도 못 먹고 앉으나 서나 불안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어? 맞다. 오늘 아침에 심묘는 감옥에 가서 심청을 만났대. 봐봐, 그 정도여야 마음이 편안하다고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만약 심청이라면 그야말로 분노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걸.”
계우서의 말에 사경행이 웃으며 간식을 집어 먹었다. 확실히 맛이 별로인 듯, 그 역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남은 반을 그대로 내려놓고 더는 먹지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던 고양이 냉랭하게 말했다.
“자네가 심묘와 비교할 만한 사람인가? 심묘는 하늘을 찔러 뚫는 것도 겁내지 않을 걸세. 사경행을 비녀로 찌르고도 무사히 물러갔으니 내가 만난 사람 중에 담력이며 운이 최고인 소저일세.”
“뭐라고? 3형을 찔렀어?”
계우서가 놀라 외치며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사경행은 고양을 흘겨보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은가 봐?”
“방금은 내가 헛소리한 거야.”
고양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계우서는 재미난 일을 들었단 듯 끊임없이 사경행에게 캐물었다.
“심묘가 어떻게 형을 찌른 거야? 검을 사용했어? 3형도 못 피했다면 심묘의 동작이 아주 빨랐다는 건데. 게다가 안전하게 돌아갔다고? 세상에, 3형! 심묘를 이기지 못한 거야?”
“입 다물어!”
마침내 사경행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솜씨도 좋아. 생김새도 좋고. 아, 작약 소저와 심묘를 비교할 수 없다고 느껴지네. 형, 날 도와서 심묘의 환심을 살 방법 좀 생각해줄 수 없어? 내 생각에 이런 소저는 일찍부터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계우서는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한마디만 더 하면 너와 고양을 한꺼번에 보내버릴 거야.”
사경행이 무표정하게 응수하자 계우서는 풀이 죽어 입을 다물었다. 고양은 부채를 부치며 화제를 돌렸다.
“심묘가 심청을 찾아갔다니. 난 왜 예친왕부 일이 끝나지 않은 기분이 들지?”
“끝나지 않았다고? 사람이 모두 죽었는데 어떻게 안 끝나? 그런데 나도 이상하긴 해. 심묘는 왜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을까? 심묘는 심가가 연루되는 게 두렵지 않나? 다른 사람이었으면 서둘러 관계를 정리할 텐데, 심묘는 어째서 스스로 일을 크게 만드는 거냐고.”
“낚시하는 사람이 대어를 낚았다고 바로 멈추는 걸 봤나? 그 여자애의 계획은 모두 연결되어 있어. 예친왕부로 끝나는 게 아니야.”
계우서를 바라보는 사경행의 얼굴에는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 * *
심부의 채운원.
심원은 무거운 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임완운은 심원을 보고 희망에 부풀어 물었다.
“어떠냐?”
심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심원아, 반드시 심청을 구해줘야 한다.”
임완운은 눈물을 흘렸다. 근래 그녀는 매일 울어 눈이 제대로 떠지지도 않을 만큼 부어 있었다. 몸단장은 당연히 생각도 않고 제대로 씻지도 않아 퀴퀴한 냄새를 풍기기까지 했다. 심원은 그녀에게 떨어져 있었지만, 이내 팔목을 붙잡혔다.
“그 아이는 네 여동생이니, 반드시 구해줘야 한다! 심청은 무고해. 잡혀가서 겁내고 있을 거야. 불쌍한 것. 우리가 곁에 있을 수도 없고. 너만이 그 아일 구할 수 있어!”
그녀는 눈물 섞인 침을 튀기면서 말했다. 답답했던 심원은 그 모습을 보고 더욱 괴로워졌다.
“알겠어요.”
그는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임완운은 마음이 조급한지 심원을 붙잡았다.
“심원아, 어째서 바로 방으로 돌아가려는 게야? 관아로 알아보러 가야 하지 않느냐? 황제 폐하께 부탁하러 가보는 건? 넌 똑똑하니 조정에 아는 사람도 많지 않으냐. 꼭 네 여동생을 도와달라고 말을 해야 한다. 은자가 필요하면 어미가 주마.”
심원이 마음속 초조함을 억누르고 대답했다.
“어머니, 지금 관아는 도움이 안 됩니다. 무턱대고 소란을 피울 일이 아닙니다.”
임완운은 그의 말에 곧바로 소리를 내질렀다.
“내가 무턱대고 소란을 피운다고? 난 네 여동생을 구하려는 거야. 이 부 안에는 좋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 네 아버지는 양심이 없어서 온종일 그 여우 같은 것과 지낼 줄만 알지, 어디 우리 모녀의 생사에 상관이나 하느냐? 그런데 지금 너도 네 여동생의 일을 상관하지 않겠다고? 네 아버지에게 배웠느냐? 온갖 고생을 하며 키웠는데, 고작 이런 식으로 보답을 하다니! 너까지 네 아버지를 닮아가는구나!”
임완운은 말할수록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미칠 지경이었다. 심원의 말 중 어느 부분이 그녀를 건드렸는지 몰라도 그녀는 한참을 떠들어댔다. 그녀는 그를 책망하며 욕을 퍼부었고 힘껏 밀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예전의 고귀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난한 집안의 못 배운 여자, 아니 저잣거리를 헤매는 미친 여자 같았다. 심원은 피곤했다. 동시에 심묘가 그에게 했던 말이 귓속에 울렸다.
자신의 장래는 아주 밝았다. 정경성으로 돌아와 부임하면 승진을 거듭하며 승승장구했을 것이었다. 이후 명군을 선택해 보좌할 것이고 일대 명재상이 될 게 당연했다. 모든 사람을 밟고 올라가 그들을 내려다볼 터였다. 그러나 지금 모친은 몰상식한 여자가 되어버렸고 부친은 무조건 아첨하니 중용될 수 없었다. 게다가 벼슬길에 도움 될 가능성이 있던 여동생마저도 죄수가 되어버렸다. 가족들 모두가 걸림돌이었다.
심원은 부모와 형제도 중요했지만, 자신의 밝은 미래가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그는 비밀리에 부수의의 사람이 된 지 여러 해였다. 더 나은 계획을 위해 지방으로 부임했다가 수도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심묘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소문은 소문일 뿐 진실이 아니라지만 황실 사람의 귀에 들어갔으니 때는 이미 늦은 것. 제아무리 부수의가 자신을 신임한다 해도 그와 만나지도 못할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묘는 그에게 두 갈래의 길을 제시했다. 혈육과 미래. 그러나 둘 다 제대로 된 길이 아닌 셈이었다.
심원이 임완운을 보고 조용히 대꾸했다.
“어머니, 전 개의치 않는다 하더라도, 설마 남동생도 돌보지 않으실 건가요?”
그러자 쉴 새 없이 이어지던 욕설이 드디어 멈추었다. 그녀는 멍하니 심원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지금 온 심부가 연루되면 제일 먼저 공격의 대상이 되는 건 바로 우리 이방입니다. 심청은 가장 많이 연루되어 있어요. 아버지와 제가 관직을 잃는 건 개의치 않는다지만, 원백이도 연루된다면 어쩌실 건가요?”
임완운은 혼란스러운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게 원백이와 무슨 상관이야. 원백이는 어려. 어디 그런 큰일과 관련되려고? 원백이보다 무고한 사람은 없어.”
심원은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어머니, 이 일은 모두 무고합니다. 그럼 전 무고하지 않단 말입니까? 소문이 점점 격렬해지는데, 그러다가 온 부가 피해를 입을까 걱정입니다.”
그는 무거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 같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을 품으시는데, 설마 남동생까지 공연히 연관시키진 않으실 테지요?”
임완운은 몸을 떨었다. 온 심부는 박정했다. 심귀는 무정했고 노부인은 형세를 보며 박쥐처럼 태도를 바꾸었다. 삼방은 남의 일이라는 듯 외면했다. 임완운은 심부에 커다란 원망을 품었다. 심청을 위해서라면 온 심부가 연루되어도 관계없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대방도 끌어들여 함께 죽는다면 복수에 성공하는 셈이니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여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심부가 재난을 당하면 심원백도 피할 방법이 없었다. 황제는 첫째를 사랑하고 백성은 막내를 사랑하는 법이다. 심원은 어려서부터 똑똑했기에 그다지 마음 쓸 일이 없었다. 그에 반해 심원백은 어리숙한 데다가 장난이 심했는데, 이게 오히려 임완운의 모성애를 자극했다. 심원백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었다.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이 죄없이 목숨을 잃도록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럼…… 심원아, 우리는 어찌하면 되느냐?”
임완운이 심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광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심원이 자신의 유일한 지푸라기라는 것을 다시금 상기한 듯했다.
“어머니,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습니다.”
심원의 눈빛은 참혹함을 띠고 있었다.
“여동생과 남동생. 한 명만 보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