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장 (38/71)

19장

정경성 관아의 감옥은 옥졸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예친왕부 멸문 사건으로 심청은 아주 난처한 위치에 놓였다. 표면적으로는 겨우 살아난 그녀도 불쌍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의문점이 많았다. 그래서 심청과 사건이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판결이 나기 전부터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면서 그녀가 남편을 죽게 했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 그녀의 이름은 온 거리 사람들의 입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르내리는 뜨거운 이야깃거리였다. 지금 그녀는 멸문 사건 속에서 죽는 것보다 못한 상황에 처한 셈이었다.

참으로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멸문 사건 중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이 무공을 배우기는커녕 무장도 하지 않은 여인이라는 점. 그리고 이 재난의 범인으로 몰리고 있다는 점. 세상일은 이렇게 종종 이상하게 돌아가는 법이었다.

문혜제의 태도도 음미해볼 가치가 있었다. 그는 이 사건을 경조윤에 던져주고 철저히 조사하라고 했지만 그 뒤론 아무런 지시가 없었다. 하지만 문혜제와 예친왕의 정이 정말 이렇게 한순간에 끊어졌을까. 천자의 마음은 본래 추측하기 어려운 법이니 관원들도 문혜제의 의중을 읽을 수 없었다. 그들은 심청을 감옥에 가둬두고 심문하는 방법을 택했다.

감옥 입구. 심묘가 도착하자 옥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누구냐?”

“심부 심가 소저입니다. 특별히 대소저를 보러 왔습니다.”

경칩이 앞으로 한걸음 나왔다. 그녀는 은으로 가득한 주머니를 옥졸 수령의 손에 얹어주었다. 심묘는 소매 안에서 심구가 준 영패(令牌, 군의 사령관을 상징하는 패)를 옥졸에게 꺼내 보였다. 그러자 그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심묘 아가씨군요.”

정경성 안에서 심신의 명성은 널리 퍼져 있었다.

“심청 언니를 보고 싶은데, 대인께서 안내 부탁드립니다.”

심묘의 말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 며칠간은 원래 방문할 수 없는데, 심묘 아가씨의 지시니 특별히 소인이 따라야지요.”

그는 바깥을 지키는 수하에게 몇 마디를 전하고, 심묘만 출입하도록 허가했다. 경칩과 곡우는 바깥에 남았다.

지금 심청의 신분은 매우 곤란했다. 그 누구도 그녀가 죄를 벗을 기회가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만약 정말 죄를 벗더라도 불명예를 짊어지게 되니, 매우 고달픈 상황이었다.

“사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비록 지금 심청 소저가 감옥 안에 있으나 일단 진상이 밝혀지면 연루될 리 없습니다.”

옥졸 수령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심묘가 심청을 만나보길 희망하니 두 자매가 매우 친밀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신에게 호의를 사고자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심묘를 위로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옥졸 수령은 눈앞 돌층계가 나타났을 때 걸음을 멈추었다.

“심청 소저는 아래에 갇혀 있습니다. 내려가셔서 이야기하십시오. 전 수하와 바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단, 너무 길게는 안 됩니다.”

심묘는 다시 한번 그에게 감사하단 말을 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긴 계단 아래 길 막바지에는 문에 쇠로 된 잠금장치가 달린 감옥 하나가 있었다. 중대한 죄인을 가두는 곳이었다. 석벽 위로는 횃불 하나가 걸려 있었고, 감방 안에서 살짝씩 흔들리는 횃불과 함께 사람 그림자를 기이해 보이게 만들었다.

감옥 안에는 볏짚이 깔려 있었고, 기물이라고는 낡은 침상뿐이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더러운 솜이불을 두른 사람이 머리를 무릎 사이에 파묻은 채 볏짚 위에 앉아 있었다. 이불에는 이가 생긴 듯 아주 작은 검은 점들이 보였다. 심묘는 상대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창살 위를 몇 번 두드렸다.

무릎 속에 고개를 넣고 있던 사람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심청이었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심묘!”

하지만, 심청의 표정은 이내 분노로 변했다. 그러고는 심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심묘는 심청이 달려들어 자신을 잡아챌까 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추측대로 심청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양손을 창살 틈 사이로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모든 것은 헛수고였다.

“아직도 배우지 못했나 보네. 힘 낭비하지 마. 소용없어.”

심묘는 심청을 비웃으며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심묘, 내게 위세를 보이기 위해 온 거야? 내가 얼마나 처참한지 보려고? 네가 나보다 백배는 더 처참할 날이 올 거야!”

심청은 창살에서 매섭게 손을 떼며 크게 소리쳤다.

“진짜 안타깝네. 정말 그런 날이 와도 언니는 못 볼 테니까.”

심묘의 표정은 가식적인 연민을 담고 있었다. 어리둥절하던 심청의 눈에 다시 두려움이 스쳤다. 감옥에 갇힌 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났다. 게다가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물어볼 데도 없었다. 그녀는 응석받이로 자랐고 와룡사의 그날 밤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후 흉한 일들이 잇따라 고통을 더했다. 임신, 회조연, 시집, 피의 학살……. 무엇보다 자신은 지금 감금된 죄수였다. 심청은 힘없이 주저앉으면서도 강한 척했다.

“날 속일 생각 마. 이 일은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데 어떻게 날 연루시키려고?”

심묘는 천천히 쪼그리고 앉아 심청과 마주했다. 철이 안 든 어린아이를 보듯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친왕부가 멸문되었는데 언니 혼자서만 살아남았어. 음모든 아니든, 언니와 살인범이 관계가 있든 없든, 언니만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아주 큰 죄야.”

그러자 심청이 반박했다.

“나와 범인이 어떻게 관련이 있을 수 있어? 내가 어째서 예친왕부를 멸문시키냐고. 나와 그는 원한이 없어. 있었다면 너랑…….”

그녀는 말을 멈추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네가 한 거야?”

심묘는 입가를 살짝 당겼다.

“네가 한 거냐고?”

심청은 창살을 붙잡고 심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네가, 원한 때문에 사람을 시켜 예친왕부를 멸문하고 일부러 나 혼자만 살린 거지? 나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계산이 엄청나네!”

심청은 대경실색했지만 분노가 앞섰다. 심묘가 이 정도로 음험하고 악독할지는 몰랐다. 지금 자신을 이런 처지로 떨어뜨린 게 그 머저리 심묘라는 게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심청 언니, 어떤 일이든 증좌를 내놔야 해. 그래도 방금 한 말을 보니 감옥에서 좀 똑똑해진 것 같네.”

심묘는 증좌가 어디 있냐고 했지만 사실상 인정한 셈이었다. 심청은 악에 받쳐 소리질렀다.

“너 뭘 하려는 거야? 그게 뭐든 뜻대로 되진 않을 거야. 내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반드시 날 구해줄 테니까. 그들이 증좌를 찾기만 하면 이 감옥 안에 앉아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일 거야! 그때가 되면 난 반드시 널 능지처참할 거야!”

심묘는 웃음을 터뜨렸다.

“둘째 숙부와 심원 오라버니에게 기대하는 거야? 둘째 숙부는 지금 자기까지 연루될까 두려워 언니를 보러 오지도 않아. 오라버니는……. 푸하하. 오라버니는 전도유망했지. 좋은 관직에 오를 터였고. 그런데 언니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에 엮여 난감한 입장이 됐지. 그런데도 언니를 구해줄 거라 여기는 거야?”

심청은 분노로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심묘의 말을 토씨 하나까지 전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귀의 성격은 심청도 잘 알고 있었다. 예친왕에게 시집가던 날의 심귀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뼛속까지 노부인을 닮아서 자기 이익만 좇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어려서부터 그 속을 헤아릴 수 없던 심원 역시 자신을 도와줄지 의문이 들었다. 이전부터 적지 않은 말썽을 해결해줬지만, 이번에는 그의 벼슬길에 악영향을 끼칠 일이었다. 심청은 불안해졌다.

“심묘, 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어머니도 수수방관하지 않을 거야! 반드시 방법을 찾아 날 구해줄 거야. 어머니가 나서면 범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아. 그때 재수 없는 일을 당하는 건 바로 너희일 테고!”

심묘는 과장되게 탄식했다.

“나도 둘째 숙모가 언니에게 아주 잘하는 걸 알아. 언니는 둘째 숙모가 아끼는 딸이니 반드시 목숨 걸고 보호하려고 하실 거야…….”

그 말에 심청의 불안은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다. 오히려 의기양양해졌다. 진약추는 심모에게 엄하게 굴었고, 나설안은 심묘와 함께 있지 않았다. 임완운만 심청을 싸고돌았다. 난산으로 심청을 낳은 임완운은 어려서부터 심청에게 큰 애정을 기울였다. 그녀는 심청이 부수의를 쟁취하려 할 때도 자신이 도와줄 터이니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설령 심원이 냉담하게 자신을 모른 체한대도 그녀만은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쓰게 두진 않을 것이었다.

그때, 또다시 심묘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어두운 지하를 울렸다.

“심청 언니, 둘째 숙모의 마음속에서 언니와 심원백 중 누가 우선일까?”

심청은 할 말을 잃고 멍해졌다. 심묘는 온화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둘째 숙모가 심원백을 얼마나 아끼는지 우리 부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아. 언니 때문에 심원백이 손해를 봐야 한다면 둘째 숙모가 위험을 무릅쓰려 할까? 나도 그 답을 매우 알고 싶은데, 언니는 내게 답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심청의 몸이 엄청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임완운의 마음속에 심원백이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임완운은 늦은 나이에 심원백을 얻었다. 게다가 심원백은 장난이 심하지만 남의 환심을 잘 샀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심원백이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세상은 여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임완운은 어린 아들을 더 편애했다. 정말 자신 때문에 심원백을 연루시켜야 한다면, 정말 그렇게 된다면……. 심청도 그 답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신은 반드시 버려질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심묘 앞에서 자신의 기세가 꺾여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넌 뭐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내게 죽음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너 잊지 마. 내 배에는 황가의 혈육이 있어! 내 아이에게는 황실의 피가 흐르니 누구도 날 해칠 수 없어!”

심청은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따뜻한 애정이 샘솟는 데 자신도 놀라웠다. 며칠 전만 해도 자신의 배를 주먹으로 때리며 이 더러운 ‘사생아’가 없어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심묘는 그 모습을 보며 더 크게 웃었다. 한참을 웃고 난 후에야 웃음을 멈춘 그녀는 심청의 부푼 배를 보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심청 언니, 정말로 그 아이가 언니의 목숨을 지켜줄 평안부(平安符, 평안을 비는 부적)라고 믿는 거야? 폐하께서 예친왕을 중시하셨던 때라면 당연히 그 아이를 지켜주셨겠지. 그런데 지금은……. 그 아이가 언니의 명을 더 짧게 할까 걱정이네.”

“그게 무슨 뜻이야?”

심청은 심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심묘가 자신을 속이고 있지는 않다는 직감이 들기도 했다. 심청은 모르는 게 당연했지만, 유언비어는 궁중으로 흘러 들어가 황제의 귀에 닿은 지 오래였다. 이번 일은 은밀하게 변해 있었다. 이전의 문혜제라면 예친왕의 혈육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심청을 감옥에 가두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의심의 씨앗이 싹을 피운 상태였다. 황제는 인정을 모르는 잔인한 사람이니 심청과 배 속의 화근을 지옥으로 떨어뜨릴 생각을 진작부터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심묘, 너와 난 원한도 없는데, 왜 날 이렇게 만든 거야?”

혼란스러워진 심청은 매섭게 질문을 던졌다. 심묘는 웃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심청을 바라보았다.

“원한이 없었다? 언니네 모녀가 날 음해할 때, 내가 원한을 품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너…….”

심청은 심묘가 무섭게 느껴졌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으니, 너도 곱게 죽지는 못할 거야! 사람의 일은 몰라. 언젠가 너희 대방도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신세가 돼서 다른 사람에게 짓밟힐 거야. 너희 전부 곱게 죽지 못한다고!”

심청의 목소리는 날카로워졌다. 이렇게 소리를 크게 질러야 공포를 숨길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녀가 욕설을 퍼부어도 심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심묘는 목소리를 낮췄다.

“사람의 일은 모른다는 말은 맞지. 그런데 가만히 앉아 자신에게 유리하길 변하길 기다려서는 더욱 어려울 거야. 세상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니까. 다행히도 모든 노력이 헛되지는 않아.”

심청이 자신에게 곱게 죽지는 못할 거라고 저주하는 바는 이미 전생에서 경험해보았다. 전생에서 나설안은 죽었고, 심구는 익사를 당했다. 심신은 모든 하인과 함께 쇠사슬에 묶여 가장 크고 무서운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그가 도망칠까 봐 뺨 위에 죄수를 뜻하는 ‘수(囚)’를 낙인찍고 어깨뼈를 뚫기까지 했었다. 심신은 신체적인 고통은 견뎌냈지만 정신적인 치욕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이때 심묘는 냉궁에 갇혀 있었다. 밖에서는 부명이 태자 자리에서 밀려나는 걸 보고 미 부인이 즐거워하고 있었다.

심청의 정신은 이미 나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나이가 어렸고, 모친의 총애 덕분에 험한 일을 겪은 적도 없었다. 자신에게 변고가 생길 때 받아들이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심묘, 넌 사람도 아니야!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

심묘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청 언니, 희망이 하나씩 깨지는 느낌이 어때?”

심묘는 미소 지으며 말했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물처럼 맑은 눈동자 속에 낀 안개 너머로 검은 파도가 출렁거리고 있는 듯했다.

“내가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언니는 일찍이 날 배웅해줬지. 그래서 이번에 나도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언니의 마지막을 배웅하려고 온 거야.”

전생에서 심묘는 죽음에 이르렀을 때 미 부인 뒤에 서 있는 심모와 심청의 모습을 보았고,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심가 대방이 참혹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 데에 이방과 삼방의 공헌이 무척 컸다. 심묘는 이 고생스러운 인생을 다시 살면서 아직 성장하지 않은 독사의 이빨을 하나하나 뽑으며 천천히 고통을 느끼게 해줄 작정이었다.

심청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를 갈았다.

“심묘,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

심묘는 일어나 심청을 굽어보았다. 음산한 감옥에서 심묘의 얼굴은 가까이서 볼 엄두가 나지 않는 위엄을 드러냈다. 그 위엄 속에는 검은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입가에 차디찬 냉소를 띠었다. 그녀가 돌아서며 자줏빛 치맛자락이 옥문 앞에서 환하게 휘날렸다. 사람 그림자가 점차 멀어질 때 심청은 심묘의 목소리를 들었다.

“심청, 네가 첫 번째야.”

* * *

심부 동원.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심귀는 방 안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궁중 태감에게 빙빙 돌려 물어보니, 심청의 일은 정말로 해결하기 어려웠다. 문혜제와 예친왕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긴 듯했다. 이 문제는 조정 대신들의 추측보다도 더욱 심각한 게 분명했다. 진퇴양난이었다. 심청의 일에 관여하면 문혜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될 테고, 관여하지 않으면 소문은 점점 격렬해져서 그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게 분명했다. 그가 거듭 한숨을 내쉬자 만 이낭이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주물렀다.

심귀는 호색가라 부 안에 첩이 많았다. 그러나 임완운이 엄하게 단속해 배다른 자식들은 없었고, 요행히 아이를 낳아도 단명하고 말았다. 하지만 만 이낭만은 딸 심동릉을 낳아 잘 키우고 있었다. 그녀도 충분히 능력이 있는 셈이었다. 부 안의 하인들은 만약 만 이낭이 딸이 아니라 아들을 낳았다면 임완운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하기 일쑤였다.

만 이낭은 가녀 출신이었다. 임완운은 그녀가 눈에 차지 않았고, 노부인은 그녀의 신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 이낭은 사랑스럽고 다정했다. 치장했을 때의 아름다움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더욱이 그녀는 조심스러운 사람인지라 심동릉이 태어난 후 계속 자신의 작은 뜰에만 머물러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 했다. 몸이 허약하고 잔병이 많은 심동릉도 평소 뜰에 나오지 않았다. 명절 때만 사람을 만나니 평소에는 거의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심청에게 사고가 나면서 노부인은 예전처럼 임완운을 존중하지 않았고, 임완운과 심귀는 마주치기만 하면 말다툼을 했다. 만 이낭에게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다. 그녀는 심귀가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작은 일까지 살펴 시중들었다. 그녀의 계책에 심귀는 날이 갈수록 임완운 모녀에 더욱 혐오감을 느꼈다. 만 이낭이 심귀의 어깨를 주무르며 권고했다.

“대인, 심청 소저의 일로 걱정하시는 거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소저가 하지 않은 일이니 결국 진상이 밝혀질 겁니다.”

심귀는 탄식했다.

“그 아이가 했든 안 했든 이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아. 잘못하면 모든 사람이 연루될 거야.”

만 이낭 역시 근심에 쌓여 말했다.

“비록 그러해도 세상은 늘 흑백의 법칙이 있습니다. 소첩과 심동릉은 대인을 따를 수 있다면 죽어도 괜찮지만, 심원 공자는 지금 벼슬길에 올랐고 심원백 공자는 아직 어린데 연루되면 어찌합니까?”

심귀의 안색이 더더욱 어두워졌다. 초조했다. 그는 뼛속까지 이기적이고 재물을 밝히는 호색한이지만 두 아들에게는 큰 기대를 품어 마음을 쓰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몰라도 심부는 그들 대에 도달해서 아들이 거의 태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방의 두 아들은 심귀가 오만해진 이유이기도 했다. 심귀에게 딸은 이익을 위해 교환하는 물품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들은 대를 잇는 보물이었다. 딸 때문에 아들들이 손해를 볼 거라 생각하니 심귀는 숨이 막혔다.

“부인께서 지금 대소저의 구명을 위해 곳곳으로 뛰어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부모 마음이란 정말 가련합니다. 소첩의 작은 힘이라도, 무언가 도울 수 있길 바랍니다.”

심귀는 만 이낭이 임완운을 언급하자 더욱 답답함을 견딜 수 없었다.

“네가 뭘 도와! 그 미친 여편네가 딸을 염치도 모르는 여자로 키운 거야. 지금 모든 사람이 연루될 판인데, 뭣도 모르고!”

만 이낭은 놀란 듯 갑자기 뒤로 움츠렸다. 어깨를 주무르던 손도 멈췄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부인을 원망하지 마세요. 이런 큰일이 생겨서 괴로우실 겁니다. 만약 심청 소저가 옥중에서 분별없는 행동을 하면 부인은 아주 상심하실 거예요.”

심귀가 귀찮은 듯 말했다.

“그 아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심귀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느리게 음미했다.

“분별없는 행동?”

만 이낭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녀는 매우 걱정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린 아가씨가 막 시집가서 그런 일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심청 소저는 지금까지 응석받이로 자라서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못하게 잘 타이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심귀는 일어나 바깥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서쪽으로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다. 겨울의 하늘은 특히 빨리 어두워졌다.

“나 좀 나가마.”

“이렇게 늦었는데. 대인, 어디 가시게요?”

만 이낭이 물었다. 심귀는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처리할 일이 있어. 넌 저녁을 먹거라.”

심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자 만 이낭은 문을 잠그고 탁자에 앉았다. 탁자 위 요리는 풍성했다. 온 동원이 우울하고 암담했지만, 그녀가 먹는 음식은 여전히 풍요롭고 호화로웠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녀는 곰팡이가 핀 만두와 쉰 죽을 먹을 정도로 임완운의 눈치를 봐야 했다. 임완운 때문에 심동릉이 아파도 의원을 부를 은자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 일은 알 수 없었다. 항상 재수 없이 살아온 만 이낭의 모녀와 임완운 모녀의 입장이 바뀔 차례가 온 것이었다. 서녀인 심동릉은 임완운의 눈치를 보며 언제나 조심조심 행동했다. 집안을 나설 기회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심청은 옥에 갇혀 남은 반평생을 심동릉보다 더욱 참혹하게 보낼 게 분명했다.

“동릉에게 식사하러 오라고 하거라.”

만 이낭이 곁의 여종에게 분부했다.

“마님, 대인께서 정말로 심청 소저에게 손쓰실까요?”

다른 여종이 조심스레 물었다. 만 이낭은 고혹적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대인은 반드시 하실 거야.”

심귀와 여러 해 부부로 지낸 만 이낭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방금 자신이 계획적으로 흘린 말 때문에 그가 심청을 해쳤다는 걸 임완운이 알게 된다면……. 그 얼마나 재미난 광경이 펼쳐질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국을 한 숟갈 떠서 천천히 맛보았다.

그 시각 채운원에서는 심원이 피풍의를 걸치고 홀로 심부 대문을 나섰다. 어두운 겨울밤을 뚫고 나서는 그의 온몸을 살을 에는 듯한 북풍이 휘감았다.

* * *

음산한 감옥.

좁고 작은 창문으로 밖의 바람이 휙휙 불어 들어왔다. 감옥 안 사람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심청 역시 솜이 여기저기 튀어나온 이불을 몸에 칭칭 감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발돋움을 해도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체력을 많이 쓰면 더욱 피곤해질까 봐 결국 포기하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순찰하는 옥졸은 그런 그녀를 비웃는 얼굴로 바라볼 뿐 도와주지 않았다. 이런 음산한 곳에서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성격은 삐뚤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들에게는 죄인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는 게 한 가지 즐거움이었다.

심청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눈 속의 원한을 숨겨야 했다. 이곳에서 며칠 동안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가족들은 자신을 위해 무엇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옥졸들은 그녀를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했고 그녀가 고통받는 것을 보며 비웃었다. 그나마 들어오자마자 정조를 잃진 않았으니 다른 여죄수와는 다르게 약간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볼 수도 있었으나, 이는 심부 사람의 공로 덕분이 아니었다. 신세가 영예롭지 않아도 황실의 핏줄은 여전히 그녀의 배 속에서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청은 조심스레 배를 쓰다듬었다. 이 아이야말로 그녀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심묘가 한 말은 심청에게 극단적인 공포를 주었다. 그녀가 감옥에 들어올 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그때 그녀는 가족 중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줄 거라고, 결코 자신을 고통 속에 놔두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심묘는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와 그 희망을 하나하나 부숴버렸다. 심청은 자신의 바람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무사히 살아나갈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옥졸이 자신을 바라보다 밖으로 가려고 할 때 그를 불러 세웠다.

“저기.”

옥졸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심청의 몸 냄새를 견딜 수 없는 듯 손을 휘둘렀다.

“무슨 일이냐?”

“이 며칠 저희 가문 사람들이 절 보러 오지 않았나요? 아니면 말을 전해주란 건 없어요?”

하찮은 옥졸 따위가 자기를 멸시하다니. 심청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침착하게 물었다. 옥졸은 무시하는 시선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소리야? 아직 시시비비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누가 감히 너를 보러 올까? 네 여동생 외에는 네 소식을 묻는 사람은 없었어.”

죄명을 벗게 되어도 적지 않은 유언비어로 심가를 난처하게 했으니 그녀의 생활은 아주 곤란할 게 뻔했다. 옥졸은 그녀가 설령 풀려나더라도 심가에서 분명 버림받게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거침없이 무례하게 굴었다. 그에 심청은 실망한 건지 홀가분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팔찌를 벗어 창살 사이로 내밀었다.

“만일 내 오라버니가 날 보러 오면……. 머리가 아파서 사람을 만나지 않길 바란다고, 날 만날 수 없다고 말해주세요.”

그녀는 감옥으로 들어오면서 장신구는 거의 다 뺏긴 상태였다. 이 팔찌는 출가 전날 임완운이 준, 매우 진귀한 것이었다. 겨우 숨겨둔 물건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옥졸은 팔찌를 보자 눈빛이 환해졌다. 그는 팔찌를 빼앗아 횃불에 자세히 비춰보았다. 품질이 아주 좋아 보이자 살짝 웃음을 보였다.

“네가 이렇게 말하니, 나도 널 도와줘야지. 그러나 네 오라비가 널 보러 오면 좋은 일인데, 어째서 그를 만나려고 하지 않는 거지?”

심청은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나로 인해 부에 일이 생겼으니, 미안해서 그들을 만날 면목이 없어요.”

옥졸의 무시하는 눈빛은 여전했다. 심청이 정말 제대로 된 여자라면 가족들에게 혼전임신의 불명예를 짊어지게 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 미안해서 볼 면목이 없다고 하는 건 허세를 부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옥졸은 대가를 받았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옥졸이 멀리 가길 기다린 심청은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 힘없이 어깨를 껴안고 머리를 무릎 사이로 넣었다. 어느 순간부터 심청은 이 자세가 편했다. 자신이 한 일이 잘했는지 못했는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갈 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눈을 감았다가 뜨면 이전의 솔직하고 명랑한 심가 소저일 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살짝 잠이 들어 있을 때였다. 누군가 창살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청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흔들리는 횃불 아래 익숙한 얼굴 하나가 드러났다. 이전이라면 이 얼굴을 보고 기뻐했을 테지만 심묘의 말을 들은 이후라 그녀는 놀란 마음이 컸다. 그녀는 당황한 시선으로 심원을 바라보았다.

“동생아, 잘 지냈느냐?”

“오라버니, 왜 온 거야?”

심청이 침착하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심원은 뒤로 물러나는 그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소매 안을 더듬어 열쇠를 꺼내 감옥 문을 열었다. 심청은 이제야 기쁨을 드러내며 벌떡 일어났다.

“오라버니, 날 구해주러 온 거야?”

심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더러운 감옥에 강한 혐오를 느껴 인상을 찌푸리며 품에서 간식 보따리를 꺼내 건넸다.

“당분간은 널 구해낼 방법이 없어. 네 얼굴 좀 보고 음식을 주러 온 거야.”

심청은 실망을 역력히 드러냈다. 괴로워하면서도 반사적으로 간식 보따리를 열었다. 기름종이 봉투는 따뜻했고, 안에서는 좋은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밤떡이었다.

심원은 찡그린 표정과 다르게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고생 많았어. 네가 가장 좋아하던 거잖아. 배고플까 봐 가져왔어.”

심청은 코가 시큰해졌고, 자칫하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근래 그녀는 감옥 안에서 쉰 밥과 반찬을 먹었고 심지어 그조차도 양이 무척 적었다. 무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지금 좋아하는 음식을 보고 심원도 곁에 있으니 억울함에 결국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울지 말고 다 먹어. 며칠만 더 기다려. 널 구해줄게.”

심원은 다정하게 권했다. 심청은 울음을 멈추고 떡을 집어 먹으려고 했지만, 심원의 부드러운 웃음을 보고는 갑자기 손이 떨려 왔다. 누군가 차가운 물을 머리 위로 끼얹은 듯했다.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심묘의 말이 귓가에 다시 울렸다.

“오라버니는 전도유망했지. 좋은 관직에 오를 터였고. 그런데 언니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에 엮여 난감한 입장이 됐지. 그런데도 언니를 구해줄 거라 여기는 거야?”

그녀는 입 가까이 떡을 가져갔지만, 차마 입에 넣지는 못했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지내는 데에는 ‘믿음’이라는 두 글자가 귀했다. 만약 이전의 심청이라면 의심 없이 심원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청은 예친왕의 일로 심가 사람의 박정함을 직접 보았다. 심원이 정말로 벼슬길에 큰 장애물이 된 자신을 기꺼이 구하러 온 걸까? 반대 입장이라면 심청 역시 머뭇거릴 일이었다.

심청은 좀 전 마지막 패물까지 주며 옥졸에게 부탁한 게 떠올랐다. 심원이 그녀를 보려고 오면 막아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심원이 나타났으니 어떻게 된 일일까. 옥졸이 물건을 받고도 심청의 말을 무시했거나 심원이 다른 방법으로 들어온 게 분명했다.

심청은 그제서야 감옥 안을 순찰하는 옥졸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걸 눈치챘다. 게다가 심청이 갇힌 감방에는 다른 죄수는 없었다. 이곳에는 그녀와 심원 두 사람뿐이었다. 가장 친밀한 사이였지만, 그녀의 등이 서늘했다.

“왜 안 먹어?”

심원의 물음에 심청은 간신히 웃음을 보였다. 급한 가운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 나 아쉬워서 뒀다가 먹으려고.”

“차가워지면 먹기 안 좋아. 지금 먹고 며칠 지나면 다시 보내줄게.”

심원이 미소 지었다.

“아니……. 난, 나는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심원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그동안 굶주렸잖아? 왜 갑자기 먹고 싶지 않아진 거야?”

심청은 허둥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냥 먹고 싶지 않네. 임신해서 그런가 봐. 음식 먹을 때 종종 이래.”

그녀는 종이봉투에 다시 떡을 싸서 옆에 두었다.

“괜찮아지면 그때 꼭 먹을게.”

심원은 잠자코 심청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옥에 며칠 지내면서 똑똑해진 것 같네.”

부드러웠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잔인한 목소리가 감옥 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구나. 편히 보내주려 했는데 정말 애석하네.”

심청의 몸이 떨렸다.

“오라버니, 무슨 뜻이야?”

“보니까 내 뜻을 아는 것 같은데. 그 떡을 먹기 싫으면 됐어. 나의 배려를 저버렸지만, 네가 지금 임신한 걸 봐서 따지지 않으마.”

심원의 말은 아주 평온했다. 그의 말은 품위 있는 얼굴과 조화를 이뤄 사람을 두렵게 했다. 심청은 무언가 깨닫기도 전에 갑자기 미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크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평소 우아해 보이는 사람에겐 큰 힘이 있는 법이다. 어느 순간 친여동생의 목을 조르고 있는 심원은 일말의 머뭇거림이나 안쓰러움을 내비치지 않았다. 명령을 받아 낯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처럼 무심한 눈빛이 더욱 공포스러웠다. 심청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을 크게 뜬 채 심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심원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심청아, 내가 잔혹하다 탓하지 마라. 네가 큰 재난을 불러와서 자칫하면 온 심부가 연루될 수 있어. 너 하나 때문에 부모님과 원백이 모두 목숨을 잃는 걸 원하진 않을 테지? 동생아, 사람은 너무 이기적이면 안 돼.”

심청은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 쳤지만, 임신한 몸인 데다가 최근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쇠약해져 있었다. 숨이 이내 넘어갈 듯 말 듯 했다. 젊은 남자의 억센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발로 심원을 걷어차려 했지만, 바닥의 볏짚만 어지럽게 날릴 뿐이었다.

“나도 네가 달갑지 않은 거 알아. 이 일과 관련 없는데도 네 목숨으로 갚게 됐어. 이 오라비가 반드시 널 위해 복수해줄게. 보증하마. 심가 대방, 그리고 심묘는 반드시 너보다 천배 만배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야. 그러니 심청아, 부디 날 미워하지 마. 너만 죽으면 이방은 연루되지 않아. 내가 높은 벼슬에 올라야 널 위해 복수할 수 있어, 알겠지?”

심청의 몸은 점점 맥이 풀렸고, 눈의 초점도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큰 파도에 물가로 내동댕이쳐진 물고기가 죽기 직전에 다다른 것처럼. 심청의 주먹 쥔 손이 스르륵 풀리며 몸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짧은 시간에 생기는 전부 사라졌다.

심청의 목숨은 감옥 안에서 끝이 났다.

심원은 잠시 심청의 시체를 담담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바늘로 심청의 손가락 끝을 찔렀다. 그는 심청의 손을 끌어 감옥 안 벽에 혈서를 남겼다. 그리고 심청의 옷고름을 풀어 창살에 묶어 올가미를 만들고 그 안에 심청의 목에 넣었다. 그는 바닥의 기름종이 봉투를 주우며 아주 작게 읊조렸다.

“동생아, 넌 헛되이 죽은 게 아니야. 오라비가 반드시 널 위해 복수해줄게.”

* * *

정경성의 겨울은 다사다난했다. 풍파가 연이어 일었다. 예친왕부 멸문 사건에 백성들은 통쾌해했지만, 그 속에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관계됐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새신부, 심청은 감옥에 갇혔다. 사건의 관계가 복잡해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조사 과정을 알아보려 했다. 하지만 바깥으로 전해진 소식은 심청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심청이 감옥 안에서 혈서를 쓴 후 자결했다고 했다. 그녀는 남편의 집안사람 모두가 죽었기에 자신도 더는 세상을 살고 싶지 않으니 죽음으로 결백함을 밝힌다고 유서를 남긴 것이다.

사람들은 늘 죽은 사람에게 너그럽다. 심청은 도리를 지키지 않고 혼전에 임신했기에 ‘예친왕의 탕부’로 불렸었지만, 지금은 모두 그녀의 지조를 칭찬했고 예친왕 때문에 일생을 망친 거라며 동정했다.

이전 유언비어는 하룻밤 사이에 모두 사그라들었다. 임신한 여자가 죽음으로 뜻을 밝히다니 아주 큰 억울함을 품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소문은 모두 소문일 뿐, 뚜렷한 증좌는 하나도 없었다. 사실 예친왕이 죽으면 그녀 역시 과부가 되어 한평생 수절해야 하니 무엇을 위해 그런 일을 저지르겠는가. 처음부터 의심을 가질 까닭이 없었다. 심청이 예친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음을 아는 외부인은 없으니 말이다.

심청의 자결로 심부의 의혹 역시 깨끗이 소멸한 것 같았다. 문혜제는 가타부타 아무런 말이 없었고, 멸문의 흉수도 밝혀지지 않으니 사건은 이렇게 미해결로 끝이 날 것 같았다.

심청은 예친왕과 함께 입관되었다. 노부인은 이 소식을 매우 반겼다. 죽든 살든 어쨌든 심가에서 왕비가 나왔으니 자기는 ‘왕비를 배출한 명문가’의 노부인이 된 셈이었다. 심만과 진약추는 몹시 상심하는 모습을 보였고 심모는 소리 높여 통곡했다. 하지만 그들은 감옥에 있는 심청을 단 한 번도 보러 가지 않았기 때문에 과연 진심인지 누구도 알 턱이 없었다.

심귀는 어찌나 박정한지 평소대로 직무를 처리하며 슬퍼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때때로 그의 표정과 눈빛에는 기쁨이 스치기도 했다. 심청의 자살은 그의 골칫거리를 덜어준 셈이니 당연히 기쁠 노릇이었다. 그에 비해 심원은 심가 이방의 부담을 모두 안고 있었기에 매일 바깥으로 뛰어다녀야만 했다. 그래서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가장 비탄에 빠져 있는 사람은 단연 임완운이었다. 임완운은 심청의 자살 소식을 듣자마자 혼절했다. 깨어난 후에도 정신이 맑지 않아 향란의 손을 끌고 심청이 친정에 인사 오는 걸 보러 가야 한다며 헛소리를 할 정도였다. 심청의 일은 임완운에게 아주 큰 충격이었다. 이렇게 정신이 흐릿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심부 후원 전체는커녕 이방조차 관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만 이낭이 이방의 일을 도맡게 되었다. 채운원의 하인들은 만 이낭이 집안 권력을 쥐었으니 고생은 모두 끝났고, 심동릉도 집 밖으로 나오게 될 거라며 속닥거리기도 했다.

심가 이방과 삼방이 혼란스러울 때 대방은 일말의 반응도 없었다. 심신과 나설안은 그저 전처럼 매일 부 안에서 검술 연습을 하거나 옛친구를 방문하며 편안히 지냈다. 심신은 심구를 데리고 다니며 관직 인물과 접촉했다. 심구는 곧 심신의 위치를 물려받을 터였다.

심묘는 다시 광문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선생들은 매년 연말이 가까워지면 학생들이 배움에 의욕이 없어진다는 걸 잘 알았고, 그만큼 광문당의 수업도 많이 느슨해졌다. 덕분에 심묘는 수업을 여러 번 빠졌지만, 진도를 따라가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학생들은 그런 그녀를 보며 의견을 분분히 나누었다. 또한 예친왕부에 사고가 난 후 심모는 광문당에 다니지 않고 있는 데 비해, 심묘는 아무렇지 않게 모습을 드러낸 것을 흥미로워했다.

“오, 심묘 왔구나? 그런데 왜 상복을 안 입은 거야? 역시나. 심청이랑 너 사이에 문제가 많았다고 하던데, 그래서 슬프지도 않은가 봐?”

역패란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역패란은 심청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그래서 심청의 일에 분노를 느꼈고 원래부터도 미워하던 심묘에게 더욱 악의를 품었다. 짙은 청흑색 치마를 입고 온 심묘는 장신구도 옥팔찌 하나만 착용해 상중에 걸맞은 수수한 모습이었다. 과한 차림은 아니었다. 물론, 흰색 치마에 흰색 머리 장식을 하고 집안에서만 지내는 심모에 비하면 부족했지만.

“명제 율령에 나와 있어.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시면 흰색 옷을 입고, 그 외엔 짙은 색이면 가능하다고. 역 소저, 혹시 항렬을 모르는 거야? 심청 언니는 내 자매이지 집안 어른은 아니야.”

심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풍안녕은 오랜만에 심묘를 보고 흥분한 것 같았다. 묻고 싶은 것이 한 보따리는 있는 듯 얼굴이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하지만 풍안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역패란이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좋은 사람인 척하지 마. 너와 심청은 사이가 좋지 않았잖아. 솔직히 심청이 죽어서 기뻤지? 그렇지 않다면 왜 네 부모님은 심청이 잡혀갔는데도 돕지 않은 거야?”

모든 사람의 시선이 심묘를 향했다. 그녀가 이 곤란한 물음에 어떻게 답할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역패란의 말대로 심신은 심청이 갇혔어도 나서서 돕지 않았다. 그는 공로가 높으니 황제 앞에서 몇 마디 말만 했어도 적어도 심청을 도와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심청도 그렇듯 옥중에서 자결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차가운 눈빛을 한 심묘가 고개를 돌려 역패란을 주시했다. 역패란은 영문 모를 한기를 느끼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심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비꼬는 목소리로 또다시 대꾸했다.

“역 소저가 심청 언니랑 정이 깊어서 언니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려나 본데, 둘째 숙모가 언니를 구하려 역 부인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걸 알거든? 내 기억으론 역 부인이 병이 났다는 핑계로 만나주지도 않았어.”

그 순간, 역패란은 얼굴이 붉어지고 머리가 멍해졌다. 주위 학생들도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더듬거렸다.

“그, 그건, 우리 어머니는 정말로 편찮으셨어!”

“역 부인이 이런 결정적 시기에 아프다는 핑계를 대는데, 내 부모님은 무엇 때문에 그럴 수 없는 걸까?”

심묘는 저속한 말을 피하면서도 역패란을 노골적으로 모욕했다.

“역 부인은 못 한 일인데 왜 우리 부모님께는 강요하는 거야? 심청 언니가 옥중에 있을 때, 친혈육인 둘째 숙부와 둘째 오라버니도 전혀 방법이 없었어. 언니를 구하는 게 아주 쉬운 일이었다고 여기는 거야?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 하기는 어렵지.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마. 다음에 또 다른 사람을 질책하고 가르치고 싶으면, 스스로 먼저 하고 나서 말하길 바랄게.”

배랑이 막 교실로 들어오면서 심묘의 말을 들었다. 심묘는 흐트러짐 없는 똑바른 자세로 역패란과 역부를 모욕했다. 담백한 비난에 역패란은 말문이 막혀 아랫입술을 깨물고 심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강요하지 말라는 심묘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역부 역시 형세를 보며 삽시간에 심가 이방에 등을 돌리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도덕적으로 고결한 척 다른 사람을 질책하니 우스운 꼴이었다.

“심묘.”

역패란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는지 앞으로 한 발짝 나가 심묘를 불러 세웠다. 그때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렸고 배랑이 걸어 들어왔다. 모두 그를 보고 입을 다물었지만, 역패란은 여전히 노기등등한 얼굴로 심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말다툼은 금지입니다.”

배랑은 경고하듯 역패란을 바라보았다. 광문당 안에서 배랑은 온화한 선생이지만, 엄격하고 진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배랑이 진심으로 경고하자 거만한 성격의 그녀도 감히 대들지 못했다.

심묘가 자리에 앉자 풍안녕이 그녀의 팔을 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이 널 궁지에서 벗어나게 해줬네. 어쨌든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을 정도였어. 저쪽 언행이 너무 과했어.”

심묘는 배랑과 시선을 마주했다. 온유한 표정 속에는 탐색의 기색이 보였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것 같았다. 심묘는 그런 배랑을 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살짝 멍해졌다. 수려한 외모에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는 심묘가 웃는 모습은 어른스러웠다. 있는 듯 없는 듯한 묘한 유혹도 있어 그 안의 비밀을 알고 싶게 하는 표정이었다. 심묘는 곧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미소는 잠깐 나타났다가 바로 사라지는 신기루 같았다.

* * *

일의 경중을 막론하고 정경성 안의 소문은 모두 풍선전당포에 전해졌다. 계우서는 고개를 숙여 주판을 치면서 맞은편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강남 진가 장사는 확실히 수지가 맞았네. 이 정도 은자면 앞으로 3년간은 장사할 필요가 없겠어.”

“그 많은 은자를 전부 차지하고 심묘에게 하나도 주지 않은 거야? 어쨌든 심묘가 정보를 판 사람이지 않은가.”

고양이 농담을 했다. 계우서는 입을 삐죽거렸다.

“심묘가 은자는 모두 내 거라 말했단 말이야. 내가 큰 위험을 무릅쓰고 정보를 만들어줬잖아. 그렇지 않았으면 이렇게 후환이 없을 수 있었겠어? 게다가 심묘가 진악산에게 은자가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으면 3년이 아니라 30년은 장사를 안 해도 됐을 거야! 그 덕택에 내 이윤이 엄청 줄어든 셈이지. 여인만 아니었다면 아마 따끔한 맛을 보여줬을 텐데 말이야!”

“자네가 정말 따끔한 맛을 보여주려고 한다면, 난 자넬 위해 관을 하나 보내주겠네.”

고양의 말은 온화하며 교양을 갖추었으나 듣는 자가 이를 갈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예친왕은 심묘를 해치려다가 멸문을 당했지. 같은 가문의 자매는 그녀를 음해하려다가 죽었고. 이렇게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한 여인인데, 난 자네가 심 소저의 손에 3초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장담하네.”

계우서는 불만스러웠다.

“작작해. 내가 그리 약해? 대단해봤자 여인이야. 여인은 모두 약점이 있다고.”

계우서는 곁에서 무관심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사경행을 보며 말했다.

“만약 어느 날 심 소저가 우리 3형을 사랑하게 되면, 분명 멍하니 넋을 잃을 거야. 제아무리 얼음장처럼 차가운 여자라 해도 우리 형 앞에선 녹을 수밖에 없어. 그때가 되면 형이 검을 들어도 반항조차 하지 않을걸.”

그러자 고양은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런 순간이 오면, 심 소저는 반드시 사경행을 잘게 썰고 다져서 개에게 먹일 걸세.”

“형! 고양 형이 형을 개라고 욕해.”

계우서는 바로 일러바쳤다. 비녀를 가지고 놀던 사경행은 두 사람을 흘겨보았다. 수려한 얼굴은 보기 드물게 진중했다.

“그들이 왔어.”

사경행의 말에 고양은 장난기를 거두고 그를 보았다.

“그들이 정경성에 온 건가?”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 동안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 예친왕부의 물건이 전해졌다면 신분이 폭로될 수 있으니, 둘 다 함부로 나가지 말고.”

“하지만 혼자 어찌할 건가?”

계우서는 고양이 말을 끝내길 기다리지 않고 급히 말을 가로챘다.

“형은 예전부터 그들의 주의를 끌었어. 그들이 정경성에 들어왔다면 반드시 형을 찾아올 거야. 형, 정경성 안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해서는 안 돼.”

사경행은 기지개를 켜며 결연한 기색을 보였다. 불안해 보이는 계우서와는 달리 그는 웃고 있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난 그들이 오길 아주 오래 기다렸거든.”

“형, 또 사람을 가르치려는 거야? 이번에는 나도 데리고 하면 안 돼?”

계우서는 두 눈을 빛냈다.

“가능해. 네가 표적이 되면.”

사경행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고양은 아무 말 없이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 * *

정경성은 새해를 맞이하는 기쁨에 예친왕과 심청의 일을 빠르게 잊은 듯했다. 그 무엇도 새해맞이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분위기가 곳곳에 넘쳐흘렀다. 새로 내리는 눈이 쌓인 눈을 덮듯, 시간은 흘러 새로운 얘기들이 가득했고 새로운 희망이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황실은 우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많은 은자를 써서 연회를 열었다. 후궁을 전부 불러 신년을 맞이하는 걸 보니, 문혜제는 예친왕의 죽음에 상심하지 않은 게 분명해 보였다. 백성들은 황실이 무정하다는 말을 다시 한번 피부로 느꼈고, 개중 똑똑한 사람들은 문혜제가 후환 하나를 깔끔하게 처리해서 기뻐하고 있을 거라 추측했다. 문혜제는 그대로 덮을 셈인지 범인을 찾지 못한 걸 추궁하기는커녕 사건을 더 이상 언급하지도 않았다.

심청과 예친왕은 함께 왕실 묘혈에 매장되었다. 심청은 예친왕을 따라가겠다며 자진했지만, 황실은 곤란한 상황이라며 두루뭉술한 얘기만 늘어놓고 보상을 따로 하지 않았다. 노부인이 분개한 대목이었다.

심부 서원.

심신과 나설안, 심구는 아침 일찍부터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새로 오는 병사들을 교육하는 곳이었다. 서원 안에는 심묘만 남아 있었다.

“며칠 전 큰 공자님께서 책을 보내주셨는데, 같이 가져와 말릴까요?”

곡우가 심묘에게 물었다. 백로와 상강은 햇빛에 심묘의 서책을 말리고 있었다.

“그 책은 내가 바로 읽을 테니 말릴 필요 없어.”

심구는 심묘의 방 안에 병법서가 많은 것을 봤다. 그는 매우 기뻐하며 심신과 나설안에게 말했다. 이전의 심묘는 병서에 관심을 둔 적이 없어서 심신과 나설안은 그녀가 일시적으로 흥미를 보이는 거라 여겼으나, 어쨌든 많은 병법서를 찾아 선물했다.

물론 심묘는 여장군이 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심부가 장래 직면할 위험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기에 병법을 익혀 닥칠 난제를 해결하고 손해가 없도록 살피려는 거였다.

백로가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내일 옥토절이라서 만예호(湖) 쪽에서 만인 등불이 성대할 거랍니다. 아가씨, 내일 가실 거지요?”

옥토절은 명제의 명절이었다. 매년 새해 하루 전날 밤, 온 거리는 화등(花灯)과 등롱으로 가득 찼다. 이날은 사람들이 모두 집에서 나와 즐기는 매우 큰 축제기도 했다. 설치하는 화등 안에는 유달리 큰 옥토끼를 넣는데, 이는 온 명제에 비가 적당히 와서 백성들이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길 기원하는 상징물이었다. 하지만 올해 옥토절은 왕년과 달랐다. 올해 주제는 물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물 위에 자신의 화등을 띄우고 소원을 기도할 계획이었다. 물 위에 피어난 색색의 화등은 분명 아름다울 것이었다.

곡우가 나무랐다.

“무슨 허튼소리야. 엄청 붐빌 거야. 아가씨께서 나가셨다가 의외의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하지만 지난해는 다 갔었잖아.”

백로는 승복하지 않았다.

“지난해는 지난해, 올해는 올해지!”

곡우는 흉악하게 외쳤다. 백로의 말처럼 지난해 이맘때 심신 부부는 정경성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옥토절에 심부가 다 함께 외출했었다. 그러나 올해는 심부에 큰일이 있었고, 배후 흉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기회를 엿봐 보복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심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나도 보러 가려 했으니. 부모님과 오라버니가 곁에 계시니까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곡우는 여전히 안심이 되질 않아 나가지 않기를 재차 권유하려 했다.

“그렇게 하는 거다.”

심묘는 그녀의 말을 끊고 방으로 들어갔다. 곡우는 별수 없이 마음속 걱정을 억눌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심묘는 두말하지 않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모든 일을 이방, 삼방에게 맡기던 때와는 달랐다.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좋으나, 고집을 부릴 때는 어떤 말로도 회유할 수 없으니 참으로 난감했다.

심묘는 탁자 앞에 앉아 밖의 매화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붉은 매화가 가득해서 그녀가 이전에 받았던 서신이 떠올랐다. 진가 형제는 이미 강남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예친왕부 멸문 이후 그들은 풍선전당포를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 심묘 역시 신중을 기해 오로지 풍선전당포를 통해서만 그들과 소통했다. 그러니 누구도 그녀를 의심할 수 없을 것이었다.

모경이 이번에 가져온 소식은, 이전 계우서에게 물어본 류형 소저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정경성에서 가장 큰 보향루 안에 머물고 있으며 그 안에서 인기로 순위를 다투는 미인이었다. 이번 옥토절에 옥토선자(沃土仙子, 농경을 주관하는 가상의 신선) 역을 맡아 만예호에서 춤을 출 것이라는 소식도 함께였다. 심묘는 이 기회를 틈타 류형을 직접 만날 생각이었다.

곡우는 누군가가 복수의 칼을 갈고 나타날 수도 있다고 걱정했지만, 기우일 뿐이었다. 노부인은 두 아들과 손자들 외에는 누구와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심가 이방은 이미 무너진 셈이었다. 심원은 관료들에게 잘 보이려고 온 신경을 쓰고 있으니 근시일 내로 그녀에게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또한, 삼방은 예전부터 노골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으니 굳이 이 시기에 일을 일으켜 이목을 사지 않을 터였다. 심묘 입장에서는 지금처럼 마음 편히 새해를 맞이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심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때였다. 경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동원의 만 이낭이 찾아왔습니다.”

곡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또?”

“어째서 만 이낭은 우리 뜰로 달려오길 좋아하는 거람?”

상강과 백로도 작게 속삭였다.

“이거 너무 아첨하는데.”

여종들은 모두 만 이낭을 환영하지 않았다. 임완운과 심청의 일이 생긴 후 이방의 사람을 향한 혐오감이 강해졌다. 만 이낭이 어떤 이유로 왔든 결국은 이방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루가 멀다고 이곳에 찾아오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만 이낭이 심묘를 보러 왔을 때, 심묘 역시 다양한 핑계를 대며 만남을 거절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를 만나볼 생각이었다.

“들어오라고 해라.”

심묘의 명령에 곡우의 얼굴빛은 한층 어두워졌다. 만 이낭이 나쁜 생각을 품고 온 건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만 이낭은 경칩을 따라 들어왔다. 심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 이낭은 진한 청색 겹저고리와 청색 치마를 입었고, 팔에는 점잖은 은팔찌를 착용해 소박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겹저고리 위에 작은 흰색 꽃이, 치마 모서리에는 파도무늬가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게다가 손톱은 아름답게 물들여 시선을 사로잡았다. 몸에 딱 붙는 겹저고리는 고운 몸매를 돋보이게 해 그 안을 상상하게 했고 오이씨같이 갸름한 얼굴, 큰 눈, 흰 피부와 붉은 입술은 타고난 아름다움을 뽐냈다.

만 이낭이 심동릉과 함께 숨죽이고 지냈던 것을 보면 눈치가 있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심청이 죽고 임완운이 미치자마자 바깥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걸 봐서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는 성격인 게 분명했다.

심묘는 전생에 궁에서 만 이낭과 같은 여인을 많이 보았다. 잔머리와 고운 용모로 남자의 마음을 견고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여인들. 세상에 다양한 여인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도 남자의 마음은 끝끝내 알 수 없다는 것도 모르는 좁은 식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어쩌다 남자에게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스스로 총명하다 여기면 남자는 또 다른 여자를 찾아가는 법이었다. 만 이낭은 후자의 사람이었다.

만 이낭은 심묘에게 공손히 절한 후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몸짓이 남달랐다. 극장 간판 가녀다운 유연하고도 아리따운 몸놀림이었다. 심묘는 평온히 그녀를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만 이낭,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가?”

만 이낭은 심묘가 직설적인 질문을 할 거라 예상하지 못한 듯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녀 역시 소문을 들어 지금 심부에서 심신 부부의 세력이 가장 크며, 머저리였던 심묘가 대단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인사도 없이 차갑게 굴 줄이야. 그녀로서는 심묘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교활한 술수를 부리는 건지 추측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만 이낭의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이었다. 심묘는 그녀를 눈여겨볼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판단하고 있을 뿐이었다.

만 이낭은 당황을 가라앉히고 웃는 낯으로 말했다.

“새해 축원을 하려 아가씨를 뵈러 왔습니다. 만일 심청 소저의 일 때문에 이방과 다툰 일로 거북하시다면 소첩이 대인과 부인을 대신해 사죄하겠습니다.”

심묘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만 이낭, 자네가 ‘대신’ 사죄하는 걸 둘째 숙부와 숙모는 아시는가?”

만 이낭은 말문이 막혔지만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대인께서 소첩에게 지난날 충돌이 있었다고 말씀해주셨기에 제 지위는 낮을지언정 스스로 아가씨께 사죄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따름입니다.”

심묘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만 이낭은 심묘의 주시에 불안한 표정을 드러냈지만, 곧바로 또다시 웃음을 지었다.

“사실 동릉도 아가씨를 뵈러 오려 했습니다. 어쨌든 자매이잖습니까. 그런데 최근 감기가 들어 바람을 쐬면 좋지 않을까 봐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몸이 나아지면 아가씨를 뵈러 올 겁니다.”

심동릉의 얘기에 심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심가에는 서녀가 한 명 있었다. 바로 만 이낭이 낳은 이방의 심동릉이었다. 이방 심귀에게는 많은 첩실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들 모두 아이를 잘 갖지 못했고 드물게 낳아도 곧 요절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이방은 물론 심가 전체를 통틀어서 서출은 심동릉뿐이었다.

질투가 심한 임완운에게 험한 꼴을 당하지 않으려고 만 이낭은 심동릉을 낳고 온종일 집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심동릉 역시 허약하고 잔병치레가 잦아 존재감이 옅었다. 전생의 심동릉은 심귀의 벼슬길을 위해 시집을 가야만 했지만, 현생의 임완운은 이미 권세를 잃었고, 만 이낭의 위치가 올라갔으니 그녀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심묘는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심동릉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건강이 나쁘면 올 필요 없다고 전하게. 감기에 옮고 싶지 않으니.”

심묘가 무관심하다는 듯 대꾸했다. 만 이낭은 그런 심묘가 얄미웠지만, 얼굴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동릉은 심묘 아가씨와 친해지고 싶어 합니다. 모두 소첩의 잘못입니다. 동릉은 태어날 때부터 병을 앓아 여러 해 집에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우를 사귀지 못했죠. 모두 어미가 부덕한 탓…….”

그녀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매우 슬퍼했다. 심묘는 일부러 그쪽을 쳐다보지 않고 담백하게 대꾸했다.

“타고난 건강은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지. 또한, 동릉 언니가 집 안에 있던 것이 반드시 나쁜 건 아닐 터. 심청 언니가 영광을 누렸으나 이렇게 될지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사람의 복과 화는 겉을 보고 추측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을 마친 심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만 이낭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말씀이 맞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났다.

“아가씨, 소첩은 갑자기 해야 할 일이 떠올라 먼저 물러갑니다. 만약 아가씨께서 시간이 나시면 동릉을 보내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게 하겠습니다. 그 아이는 몸이 좋지 않으니 아가씨께서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올 때의 여유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허둥지둥 돌아갔다. 경칩이 차를 올리려 들어오다가 만 이낭이 급히 떠나는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만 이낭이 왜 저렇게 허겁지겁 가는 걸까요? 무엇을 하러 온 건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심동릉 아가씨는 여러 해 방에서 나오지 않아 아가씨와 얼굴을 몇 번 보지도 못했는데 무슨 대단한 감정이라도 나눈 듯 이야기하네요.”

뒤따라 들어온 곡우 역시 맞장구쳤다.

“맞아요. 지금 생각하니 저도 동릉 아가씨의 얼굴이 어떠한지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심부의 소저인데 이리 여러 해 숨다시피 지내니, 정말 불쌍하네요.”

“뭐가 불쌍해 보여? 그쪽의 눈엔 너희가 더 불쌍하겠지.”

심묘는 탁자 위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경칩은 심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쪽요? 아가씨, 동릉 아가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가 눈이 삐었었구나. 우리 부 안에 똑똑한 사람이 또 있었다니.”

심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 오늘 만 이낭의 방문은 탐색을 위한 게 분명했다. 만 이낭은 똑똑함을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탐색전을 통해 새로 얻은 심귀의 총애를 선포하려는 것 같았다. 또한, 심동릉 역시 함부로 나서지 않는 걸로 보아 심청보다 매우 똑똑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심묘는 그녀가 어느 편이든 간에 그녀를 친구로 삼지는 않을 거라 다짐했다.

“모두 긴장하도록 해.”

심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곁의 여종들을 일깨웠다.

* * *

만 이낭은 급히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녀는 병풍 뒤에 앉은 사람에게 말했다.

“동릉아.”

병풍 뒤 그림자가 만 이낭을 보았다. 만 이낭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심묘와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주었다. 그녀는 기억력이 아주 좋았다.

“동릉아, 심묘 소저의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냐? 난 오한이 느껴져서……. 말해보거라. 심청 소저의 일, 심묘 소저와 관련 있는 것 같으냐?”

병풍 뒤의 심동릉이 대답했다.

“어머니, 신중하세요. 심청 언니의 일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바깥에서 어떻게 말하든 절대 이 일을 입 밖에 꺼내지 말도록 하세요. 자칫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될 겁니다.”

“난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병풍 뒤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수를 내려놓고 일어나 만 이낭 곁으로 갔다. 예쁘고 귀여운 모습의 소녀였다. 심청의 호방함, 심모의 수려함, 심묘의 장중함에 비해 이 소녀는 유약했다. 얼굴은 만 이낭을 닮았다. 오이씨 같은 희고 갸름한 얼굴에 큰 눈. 눈빛까지 영민했다면 여우 요괴가 아니냐고 욕을 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안색이 창백하고 입술에 혈색도 없어 무해해 보였다.

그녀는 낡은 담황색 옷을 입고 있었다. 소녀의 작은 몸에는 헐렁하고 커서 볼품없으니 만 이낭이 예전에 입던 옷인 듯했다.

심동릉은 만 이낭을 위로했다.

“지금 모든 것이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어요. 적어도 어머니와 내가 대범하게 외출하고 있잖아요. 부인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요.”

만 이낭은 딸을 보자 마음이 시큰했다.

“심부는 지내기 어렵구나. 부귀를 흠모해서 심부에 들어오면 반평생 마음이 편안하고 근심 걱정이 없을 거라 여겼거늘. 고귀한 가문의 사람도 고생스러울 줄 누가 알았겠느냐. 너까지 연루시키고. 부인의 시야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지냈던 거다. 그런데 부 안 사람들은 역시 대단한 것 같구나. 그 조용하던 심묘 소저도 지금 보니 확실히 무섭고…….”

심동릉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어머니, 심청 언니의 일이 심묘와 관련 있든 없든 결국 그 배후 사람은 우리도 도와준 셈이에요. 지금 부인은 상황을 뒤집긴 어려울 거예요. 심원 오라버니가 대단하더라도 부인은 희망을 잃었으니 저희와 싸우지 못해요.”

만 이낭은 딸을 바라보며 안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건 그렇지. 결국 곤경에서 벗어났구나. 하지만 오늘 심묘는 아주 냉담했어. 우리의 호의를 받아들이기 원치 않으면 어쩌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닌 거지요. 심묘 동생도 똑똑한 사람이에요. 앞으로 동생을 건드리지 않으면 돼요. 만일 할 수 있다면, 동생이 둘째 오라버니를 처리하게 해도 좋구요.”

만 이낭은 멍해졌다.

“심원 공자는 이미 벼슬길에 올랐어. 심묘는 어린 아가씨일 뿐인데 어떻게 심원 공자를 상대할 수 있겠니?”

“어머니, 잘못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동생은 그리 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심부 안에서 가장 날카롭고 좋은 칼이랍니다.”

* * *

바깥에서는 심부 안에서 이토록 허튼수작이 많은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정경성 안 사람들은 심부가 늘 화기애애하며 위는 자애롭고 아래는 효도하는 좋은 모습만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전에는 겉모양만큼은 그러했지만 애석하게도 사람의 일은 늘 변했다. 어떤 때에는 깊게 묻힌 씨앗이 갑작스럽게 발아해 뽑아낼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자라나곤 했다.

심묘는 심구가 정경성에 돌아오자마자 모경을 심구에게 추천했다. 심구는 그 즉시 그의 능력을 시험해 모경이 상당한 실력자라는 걸 파악했다. 심구는 모경의 실력에 기뻐했다. 강한 장수 밑에 약한 병사는 없었다. 강한 장수가 많을수록 심가 군의 명성도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모경을 영입한 후 심구는 심묘의 안목을 칭찬했다. 그는 때때로 심묘에게 시장에 가서 ‘우연히’ 이런 인재를 찾아오라고 부탁하기도 해서 심묘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전생의 호위통령은 모경 한 명이었다. 심구의 말대로 어디서나 이런 인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온 거리가 호위통령으로 가득한 셈이었다.

심부 바깥에는 군사를 훈련하는 연무장이 있었다. 오늘 심구는 모경과 아지를 데리고 그곳을 찾았다. 둘은 한참 대련했는데, 아지는 심구의 수하 중 무예가 가장 뛰어난 사람인데도 모경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아지는 모경과 대결 후, 땀에 흠뻑 젖었다. 그는 사납게 침을 뱉었다.

“모 형과 대결하니 확실히 아주 상쾌합니다! 모 형의 검술은 경지에 이르러서 형님을 흠모하게 만드는군요.”

모경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아지 아우, 과찬이야. 내 검술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없어. 사람 위에 사람 있고, 하늘 위에 하늘 있지. 세상에는 기인이 아주 많아.”

“혹시 모 형보다 검술이 고명한 분이 계십니까? 그럼 정말 만나보고 싶네요!”

아지가 크게 웃었다. 모경은 말이 없었다. 그는 와룡사에서의 밤을 떠올렸다. 흑색 옷을 입은 남자가 창문으로 들어와 단시간에 자신의 검을 빼앗았다. 자신은 어린아이처럼 무력했다. 그 사람의 검술이야말로 진정으로 절묘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었다.

“모 형과 전쟁터에서 적을 죽이면 얼마나 통쾌할지 모르겠습니다. 전 일각도 지체할 수 없는데, 애석하게도 장군께선 아가씨를 위해 정경성에 반년이나 머무신답니다. 함께 적을 물리치려면 반년을 기다려야 해요. 그건 그렇지만 우리 아가씨도 정말 혜안을 가진 영웅이십니다. 모 형 같은 사람을 우연히 발견하시다니, 정말 어려운 일인데.”

아지는 말을 이었다. 당분간 수도에 메여 있어야 함에 대한 한바탕 탄식으로 시작했으나 심묘에 대한 칭찬으로 끝맺었다.

“아가씨는 놀라운 사람이시지.”

모경은 대답했다. 물론 그는 심묘의 일 처리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묘는 잔인하고 무정하며 동정심을 몰랐다. 그러나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대하는 사람은 모두 그녀를 사지로 몬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모경은 심묘가 마차의 발을 들어 올리고 그에게 물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모경, 당신의 무예를 장군 가문 심가에 팔 생각이 있나요?”

무사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었다. 어떻게 보면 심묘는 모경의 은인이었다.

아지가 그를 한 대 툭 쳤다.

“알겠어요. 아가씨께선 모 형을 추천한 사람이니 당연히 아가씨를 좋게 보시겠죠. 내일 옥토절에 잘 호위하세요.”

“응, 그래야지. 엇, 뭐지?”

그 순간, 모경은 머리 위쪽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 때문에 고개를 들었다. 아지도 그의 시선을 따라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내가 잘못 느꼈나 봐.”

모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상한 인기척에 화들짝 놀랐는데 잘못 느낀 듯했다.

하지만, 담장 너머에는 두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베옷을 입고 삿갓을 써서 온 얼굴을 빈틈없이 숨기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심부는 인재가 많아. 호위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니, 자칫하면 발각될 뻔했어.”

다른 사람도 목소리를 낮춘 채 맞장구를 쳤다.

“맞아. 심부는 호위가 많고, 병사도 유능해. 안에서 손을 쓰기는 위험한 데다가 성공하기도 어려울 거야. 오히려 경계만 삼엄해질 가능성이 커. 이후에 심묘의 보호가 물샐 틈 없어지면 손쓰기 더욱 힘들어질 거야.”

“그래도 가까스로 이런 기회가 생겼네. 그녀를 잡아다가 심문하면 헛되지 않을 거야. 나와 네 관직이 높아지게 될 텐데 어떻게 중도에 포기하겠어?”

두 사람은 흐흐 웃었다.

“물론 포기 못 하지. 내일 옥토절에 심묘가 외출한다니 그때 인파가 넘쳐서 납치하기 쉬울 거야. 한 무리가 심가 사람을 유인하고, 한 무리가 심묘를 데리고 가자.”

한 사람이 흉악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깔끔하네. 후환을 없애기 위해 볼일이 끝나면 호수에 빠뜨리자. 어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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